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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철이 시작되고 있다.
밭에 거름을 넣고, 쟁기질 하고, 로터리 작업해서, 골도 타야 한다.
어제는 일단 감나무에 거름(유기물 비료)을 넣었다.
그리고 고추밭 만들 자리에도 거름을 뿌렸다.
다음 주에 내려와서 로터리 작업하고 골 타고 이랑도 만들어야 한다.
오래간만에 거름 나르고 쇠스랑으로 땅을 팠더니 팔도 욱신거리고,
무엇보다 손끝이 얼얼하다.
빨간 고무로 코팅된 장갑을 끼고 일을 하면 손이 가진 힘 이상을 사용하게 되어 손끝이 힘겨워한다.
하지만 몸으로 일하며 땀 흘리는 것만큼 유익한 경험은 없는 것 같다.
잡다한 생각들도 물러가고, 흙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니 말이다.
도시생활에선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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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 딸기밭이다.
요사이 나오는 딸기를 제철 과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은데,
딸기가 제철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보면 된다.
아직 꽃도 피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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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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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경건회 말씀을 준비하면서 앞의 것과는 쪼금 다르게 써 보았다.

막상 경건회 때는 그림을 그리듯 전하다 보니 앞부분 이야기에서

중간 예수님 이야기는 빼고 바로 결론으로 갔는데

‘내가 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자, 전하자’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본 그대로 하기를(2)

출27

8 제단은 널판으로 속이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게 하라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본 대로 해야 할 책임이 모세에게 주어졌습니다.

대개 그리스도인들은 출애굽기 22장부터 31장까지, 더 길게 잡으면 40장까지를 읽으며

지루한 마음으로 눈을 굴려 신속히 지나갑니다.

본 대로, 그대로 전해서 똑같이 만들게 해야 할 모세는 한 눈을 팔 수 없는 긴장된 시간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 규례를 잘 지키기 위해 더 세분화된 규정까지 만들어 철저히 지키려 했으니까요.

정말 그럴까요?

그들이 정말 하나님께서 그리신 안식일의 그림을 그대로 완성한 것일까요?


아니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외치며

손 마른 자를 고치시고(마11),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를 고치신(요5) 예수님이 그 그림을 완성한 것일까요?


안식일... 출20:8, 출23:12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올려지고, 작은 자들에게 숨 돌릴 틈이 주어진 것은 누구를 통해서였습니까?


자신들은 안식일을 넉넉하게 지킬 수 있음을 뽐내며

그럴 수 없어 안식일의 규례를 범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질시하는 행위는

결코 하나님에게서 안식일을 명하시며 보여 주신 그림을 그대도 완성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구덩이에 빠진 양을 구하듯(마11:11)

불안정한 사람을 도와주고, 낫게 해 주는 예수님의 삶이 더 하나님의 그림을 온전히 완성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실(마25:40)

그 하나님을 생각하며 오늘 나에게 주시는 이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정성을 쏟을 수 있다면

그대로 함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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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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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서울타워에 갔다.
그런데 전에 보지 못한 진풍경을 목격하게 되었으니,
안전망에 걸린 수 십, 수 백 개의 자물쇠들,
홀로인 것도 있지만 두개씩 쌍으로 채워져 있는 모습.

영원히 헤어지지 말자고 굳게 채워진 연인들의 자물쇠.

손가락 거는 것으로는 부족해 자물쇠로 굳게 채운 마음.
그 사랑, 그 약속 영원했으면 좋으련만
그 다음 일은 나도 모르고, 그들도 모르고, 하늘만이 아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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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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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그대로 하기를

출27

8 제단은 널판으로 속이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게 하라

(25:9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25:40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네게 보인대로’는 성소를 만들라는 말씀을 주시며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사용하시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할 때 융통성을 부린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칭찬하실 기술자는 자신의 능력을 한껏 뽐내기 위해 융통성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려주신 대로 그대로 만드는 자여야 합니다.

또한 이를 중계해야 하는 모세의 역할 또한 막중했습니다.

자신이 본 그대로 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런 것들을 이르실 때 단지 말씀으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 만들어졌을 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셨던 것 같습니다.

들은 대로, 받아 적은 대로가 아니라 ‘본 대로’이기 때문이다.

이후 기술자들이 작업을 똑바로 하고 있는지 노심초사 했을 모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 때 모세가 보았던 것을 그대로 할 필요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율법을 새롭게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로 하려는 마음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인 그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람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마음과 행동을 따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셨고, 그래서 그대로 하려고 노력하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외형적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을 보게 됩니다.

종교적 행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열심을 내니 말입니다.

반면 내적 삶의 자세는 전혀 그리스도의 삶을 좇지 않습니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에게 겉모습은 너무도 쉽게 벗겨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손쉽게 그리스도의 원칙을 상황에 따라 바꾸어 버리는 놀라운 융통성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몇 명이라도 삶으로 경험하고 목격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해 주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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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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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출26

1 열 폭으로 성막을 만들어라. 그 천은, 가늘게 꼰 모시 실과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놓아 짠 것이라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설계도를 주시면서 그 유효기간은 언제까지로 생각하셨을 까요?

우리는 대개 성막을 40년 광야 생활의 풍경 중 하나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설계도를 주실 때는 조만간 가나안에 들어갈 예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천막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 명하실 것이 아니라

돌로 만드는 것을 가르쳐 주셨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만들 신전의 설계도를 주셨다면

어쩌면 백성들이 더 기대에 차서 더 힘 있게, 더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았을까요?


어떤 분들은 성막이 광야에서 이동하는 진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성막은 광야에서 40년이 지체된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다윗을 지나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까지 그대로 유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단지 광야생활을 염두에 두고 성막 건축을 지시하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온전한 성소의 모델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까지 480년 가까이 지속된 것이 성막이었습니다(왕상6:1).

그러니 이후 만들어진 그 어떤 성전보다도 더 오래 유지 된 것이 성막이었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 새로운 천으로 갈았겠지만 그 원형은 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 있어서 성소의 재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백성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 만남이 능력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한 점입니다.
그래서 그 천막이 하나님의 위대함을 더 드러내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웅장하고, 멋진 신전을 가진 신이라면 당연히 능력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초라한 천막을 성소로 가진 신이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가졌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고, 더 큰 영광을 돌리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겉보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백성들은 만나주시는 분이 누구냐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큰 교훈을 가져가게 될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질그릇에 담긴 보배를 이야기 하며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고후4:7).


사람들은 건물에 주목하지만 그 건물은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그 안에 깃들이는 하나님께 완전한 능력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연약하고 볼품없는 천막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음으로 해서

그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최고의 성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을 때 솔로몬이 화려하게 지은 성전도 무참히 무너져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꼼꼼하게 이르시는 하나하나 빠짐없이 받아 백성들에게 전해
작은 수치 하나 틀림없이 성막이 만들어지게 해야 하는 모세의 책임은 너무도 막중한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의 손으로 만든 곳이 하나님과 백성들이 만나는 곳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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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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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곳을 위해

출25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출애굽기에서 가장 재미없는 부분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산에 오른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성소와 회막 건축에 대한 자세한 설계도를 받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언약궤, 진설병 상, 등잔대 만드는 법을 25장에서 명하십니다.

3D영상으로 만들어 보면 재미가 있을 것도 같은데, 그냥 글로만 대하니 정말 뭔 소린지 알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일단 이 모든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초가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드린 예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눈길을 끕니다.

예물의 존재가치는 ‘기쁜 마음’에 있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드린 예물만이 성소와 회막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성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들의 마음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이나 성소는 하나님과 백성의 마음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마음이 함께 할 때 성소와 그 안의 기명들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상징하지만,

마음이 빠져 버릴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삼상 4장에서의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기는 사건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는 어떨까요? 하나님과 마음의 만남이 있는 곳입니까?

혹시 세속적 가치가 횡횡하며 참된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사적 욕구 해소를 위해, 부질없는 외형적 체면에 매어서

마음 없는 껍데기만의 헌신으로 드림을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무리 멋들어진 모양을 하고, 화려하게 치장한다고 해도

하나님과 사람들의 마음의 만남이 없다면 돌과 나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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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한 아이가 헌금 봉투에 1,000원이라고 쓰고 넣어둔 쪽지입니다.

엄마가 찔러 주어 아무 생각 없이 아이의 손을 거쳐 헌금함에 들어간 어떤 헌금보다 소중한 예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받으시지 않으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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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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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만나는 하나님

출24

9 모세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장로 일흔 명과 함께 올라갔다.  10 거기에서, 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깔아 놓은 것 같으며, 그 맑기가 하늘과 꼭 같았다.  11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손으로 치지 않으셨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뵈며 먹고 마셨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백성들 앞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너무도 놀라운 광경 앞에 백성들은 놀라다 못해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시내산은 더없이 성스러운 장소로 보였을 것입니다.

특히 뽑혀서 올라간 70명의 장로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이 하나님을 뵈며 먹고 마셨다.”

이 얼마나 멋진 순간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먹고 마셨다니.

그런데 왜 저는 이 장면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봐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이로운 일을 경험한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일들을 벌이는 지 뻔히 알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너무 멀리 나가는 것 같아 다소 생뚱맞기까지 한 이야기를 떠오르는 대로 좀 해 볼까 합니다.


이렇게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표현할 때,

‘시내산에서 나타나신 하나님’, ‘시내산의 하나님’ 쯤으로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목격한 하나님의 모습을 기억 속에 새겨 놓으려고 안간힘을 쏟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경험한 상황 속에 아예 못 박아 놓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시내산, 시내산, 시내산...

그러나 하나님은 시내산에 살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또 그들이 시내산에서 목격한 하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전부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재대로 보지도 못했고, 볼 수도 없었습니다.

모세조차도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해 친히 손바닥으로 덮고 지나가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뒷모습만 잠시 보았을 뿐입니다(출33:23).

그러니 장로들이 하나님의 발 아래만 보았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면서 자신들의 짧은 언어로 규정하려 합니다.

이후 아람왕의 신하들이 하나님을 산의 신 운운하는데(왕상 20:23),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도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당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아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을 뿐인데,

그렇게 하나님을 한 마디로 정의하려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결국 다른 모습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알아보는 데 커다란 장애물이 됩니다.


이렇게 제한적인 감각에만 의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자세는

40일도 인내하지 못하고 바닥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는 것 너머,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범위 밖에 계신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에게 눈높이를 맞추어 주시고,

우리들을 이해시키시지 위해 몸 낮추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기 위해 보여주신 그 사랑의 크기보다

그 사건의 주변적인 것들에 얽매여 새롭게 나를 만나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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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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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미 찍고 왔다.
부재자 투표!

버스로 세 정거장 가서 200미터 더 걸어서 찍고 왔다.
차라리 스타벅스를 찍어서 국회로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스타벅스는 최소한 입점하는 지역과 어울리는 컨셉으로 매장을 꾸미고
가능한 고객에게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은 하니깐.
뭐 고객의 주머니를 털어 가기 위한 술책이긴 하지만.
맛있는 커피라도 맛보게 하니 그냥 봐 줄 수 있겠다.
사회환원을 쥐꼬리만큼도 하지 않았다고 며칠 전에 기사가 나긴 했지만,
국회의원들이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는 것에 비하면 피해는 훨씬 경미하다고 해야 할까.

암튼 경북 상주시 출마자 중에는 찍을 사람이 없었지만
비례대표를 찍기 위해 좀 먼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가서 찍고 왔다.
선거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행사였으면 좋겠는데, 갈수록 절망을 주니 답답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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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를 하니 이런 것도 주던데.
투표확인증-공공시설 2,000원 할인
좀 더 쓰지 2,000원이 뭐야!
환승할인 덕분에 교통비 900원 들었으니, 1,100원 남네.
명바기 아저씨 덕분에 900원 덕봤다고 감사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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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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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원칙, 우상의 변칙

출23

1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너희는 다른 신들의 이름을 기억해서는 안 되며, 입 밖에 내서도 안 된다.


다른 신들의 이름이란 무엇일까요?

신을 섬긴다는 것, 믿는다는 것은 그 신의 가치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 신의 가치는 사람들에게 삶의 원칙 혹은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율례를 이르실 때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가장 경계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위 말해 우상숭배를 한다는 것, 당시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상황에 따라 여러 다른 신들을 섬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일관된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자기를 편의에 맞는 기준을 들이 들이 댈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아무래도 가진 자들의 입장에서 더없이 편리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잇속을 챙기기 위해 ‘신’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고,

약자 일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좇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의 한결 같은 원칙은 공평함과 배려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의 규례를 주시며 여종의 아들과 몸 붙여 사는 나그네,
심지어 소와 나귀의 ‘숨 돌릴 틈’을 생각해 주시는 분이시지만,

그들이 잘못했을 때조차 무조건 편들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원수와 미워하는 자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분명하고 아름다운 원칙입니까?

그런데 만약 다른 신의 이름을 부름으로서 이런 원칙들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사회는 금세 종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져들지 않겠습니까.

정의는 사라지고, 서로를 믿지 못하고, 위선과 아부가 난무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칙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하지만

우상의 변칙은 ‘그래도 된다.’고 말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래도 된다.’에 마음이 더 끌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대부분 좋게 표현해 다신교 숭배자들이고,

성경대로 표현한다면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왜냐면 가는 곳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원칙을 가지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칙의 횡횡’이 오늘날 우리들의 초상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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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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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보기를

출22

2 밤에 도둑이 몰래 들어온 것을 알고서, 그를 때려서 죽였을 경우에는, 죽인 사람에게 살인죄가 없다.

3 그러나 해가 뜬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그에게 살인죄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2장에서 소유권 침해에 대한 말씀을 주십니다.

그 첫 번째가 도둑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도둑이 밤에 몰래 들어온 것을 알고, 그를 때려서 죽이면 죽인 사람에게는 살인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해가 뜬 이후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비록 상대방이 도둑이라 할지라도 그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을 때는 죽이면 살인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재산이 중요하고, 다른 사람들의 것을 몰래 가져가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는 데 그것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밤에 어두워 서로를 알아 볼 수 없을 때는 내 생명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해가 떠서 상대를 알아 볼 수 있을 때는 도둑이지만 그 생명 또한 지켜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도둑일지언정 ‘사람’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십계명을 범하다 걸린 것이라 해도 그는 먼저 사람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누군가를 사람으로 보려하지 않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자기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보다도 못하게 여기지는 않는지.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하시는 말씀 속에서도 백성들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지라고 말씀하시면서도,

그 율법의 근간이 사람에 대한 믿음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요사이 유괴와 살인 등 극악한 범죄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범인이 잡힌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그 가족들이나 경찰에게나 견디기 힘든 시기를 보내게 합니다.

최근 잡힌 범인은 오락가락 진술을 번복하면서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약간의 아쉬움은 그 범인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를 사람으로 봐 주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지만 그도 역시 우리와 같은 존중받아야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이야기>

언제 아침이 시작되는가?


늦은 밤, 스승과 제자들이 화톳불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이런 저런 잡담들을 나누다가,

문득 하늘에 빛나는 달과 별들을 바라보면서 모두들 침묵에 잠겼다.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스승이 입을 열었다.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한 젊은이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멀리 있는 짐승을 보고 그것이 개인지 양인지를 분별할 수 있으면,

그 때가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 아닐까요?”


"좋은 대답이군,"스승이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답은 아닐세.”

제자들은 잠시 의논한 끝에, 두 번째 젊은이가 대표로 말했다.

"빛이 나뭇잎에 내릴 때 그것이 소나무 잎인지 참나무 잎인지를 분별할 수 있으면

그 때가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이번에도 스승은 고개를 저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훌륭한 대답이지만, 역시 내가 찾는 답이 아니네.”

제자들은 머리를 모으고 생각해보았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스승에게 간청했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해주십시오."


스승은 제자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 눈을 들여다 볼 때 형제나 누이가 보이면 아침이 밝은 것이고,

형제도 누이도 보이지 않으면 아직 캄캄한 밤중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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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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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의 에니어그램 지도자 과정이 시작됐다.
4월부터 시작해 7월 중순부터 8월까지만 빼고 10월까지 장장 6개월 간
매 주 화요일 오후 시간을 온전히 투자해야 한다.

오늘은 그 첫 번째 모임!
원래는 20명까지 신청 마감인데 신청자가 많아 다 거절하지 못해 28명이나 함께 하게 되었다.
대략적인 진행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있고 난 후 한 명씩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두 번째로 소개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 분이 좀 길게 하셔서 짧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갔다.
그런데 나도 내가 생각한 것만큼은 짧게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들어와서 계속 되는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는데,
아니 참석자들의 이야기가 왜 그렇게 긴지.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들어가면 될 텐데 
소개 항목에도 없는 이야기들을 꺼내서는 장황하게 말하는 것이다.
한 참석자는 어찌나 우울하게 말하던지 불쾌감이 몰려와서 참느라고 혼났다.
그렇게 하다 보니 원래 5시에 끝나야 하는 데 거의 6시가 다 되어서 끝이 났다.
첫 날이고, 서로를 알아야 하는 것도 좋지만 좀 감당이 안 되는 시간이었다.

평소 나는 주로 말을 하는 입장에 선다.
그런다보니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하고
아무 대꾸가 없으면 '없으시면 마치겠습니다.'하고 넘어가 버릴 때가 많다.
그런데 앞의 것과 유사한 경험들을 하면서 깨닫는 것은 모든 사람들은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분위기를 봐서 꺼내 놓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나만 잘났다고 내 말만 늘어놓고서는 만족해하며 잘 전달되었겠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너무 좋은 말을 해서 다른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태도인지 깨닫게 된다.

지혜로운 태도는 어떻게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려고 들기 보다는
가능한 더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을 충분히 들어 줄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갈고 닦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왜냐면 그들은 나를 향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을 테니 말이다.
눈빛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라고 소리 지르면서
입으로는 '할 말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일까.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어떤 이론이나 검사 도구를 하나 더 익힘으로부터 온다기보다는
진심으로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음에서부터 오는 것이라 생각된다.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MBTI, 에니어그램이 중요하지만 한 사람이 내 앞에 있을 때는
그 사람의 눈빛과 몸짓과 그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이 더 중요한 이해의 도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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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복지로부터

출21

1 "네가 백성 앞에서 공포하여야 할 법규는 다음과 같다.

2 너희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종살이를 해야 하고, 일곱 해가 되면, 아무런 몸값을 내지 않고서도 자유의 몸이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시기 시작한 율법이 계속됩니다.

20장이 대원칙이었다면 21장부터는 각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첫 번째의 것이 종에 대한 것입니다.

히브리 종은 종이 된지 7년째에 놓임을 받게 될 것인데,

만약 결혼했다면 아내와 같이 자유가 되고,

자식을 낳았다면 아내와 자식은 주인의 것이 되므로

혼자 자유가 될 것인지 아니면 가족들과 계속 종으로 남을 것인지 결정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구히 종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시작이 종의 복지로부터 시작한 점입니다.

다른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아직 성막이나 제사 규례가 없긴 하지만 제사장의 규례나,

지파 지도자를 선출하는 문제나, 그들이 전쟁을 할 때에 관한 규례를 주시던가,

재산 상속 같은 가진 자들의 집안의 주요 관심사에 대한 규례를 주실 수도 있고,

사회문제가 될 수 있는 범죄들에 대한 세부적인 것들을 먼저 주실 수도 있었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종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애굽에서 종 생활을 백년도 넘게 해 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종’이라는 주제는 익숙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동족 안에서도 조금만 힘이 있고, 돈이 있어도 종을 부리고 사는 일이 쉽게 생겼을 것이고,

이 문제에 대한 정리가 시급한 사안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1차적 과심이 종, 여종, 가난한 자, 나그네에게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된 삶을 살았던 종․노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먼저 관심가지셨듯이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종, 노예, 가난한 자, 나그네에게 먼저 관심을 가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자들의 인권과 복지가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세우는데 초석이 된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왜 종이라는 제도를 인정하고 계신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의 종이라는 개념은 요즘을 말하면 하층민이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부자들의 집에 들어가 일을 도와주면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 말입니다.

자유롭게 드나들며 품삯을 받으며 일을 돕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것보다도 못한 사람이라면 아예 그 집에 머물며 일을 했겠죠.

그 사람들을 종이라고 할 수 있었겠죠.(제 생각입니다.)

 

어느 사회든 작은 자들의 한을 모른척하고 이룩한다면 분명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 전 2MB대통령이 일부 기업인들에게 모바일 폰 번호를 나눠주고,

언제든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연락하라고 했다는데,

그 분이 가진 자들의 불편, 애로, 고충을 신속하게 들어 주겠다는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냈다면,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직통전화를 종들, 여인들, 가난한 자들, 나그네들에게 먼저 열어 놓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 역시 누구에게 먼저 마음을 열고 있는지.

하나님의 요청은 너희 안에 작은 자들에게 대한 배려, 그들의 삶의 상태,

그들의 먹먹한 부르짖음에 먼저 몸 낮추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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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들의 진솔한 만남이 있는 곳

출20

18 온 백성이 천둥소리와 번개와 나팔 소리를 듣고 산의 연기를 보았다. 백성은 그것을 보고 두려워 떨며, 멀찍이 물러섰다.

19 그들은 모세에게 말하였다. "어른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시오.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죽습니다."

2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들을 시험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이며, 당신들이 주님을 두려워하여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21 백성은 멀리 떨어져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시는 먹구름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갔다.


백성들이 두려워 떱니다.

하나님께서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로 당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광경, 이제까지 겪어 보지 못했던 경험 앞에 오금이 저린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실 때 굳이 놀라운 광경을 연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떡으로 만드시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의 진위가 결정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는 그 어떤 현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 가만히 계셔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놀랄만한 자연 현상들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는 이유는 백성들을 위한 배려에 있었습니다.

그들을 겁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듣고 따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그런 하나님의 배경에 놀라기도 하겠지만,

그런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섭네, 죽겠네, 두렵네 하면서 호들갑을 떨기 보다는

기쁨에 감격하며 감사함으로 말씀을 받아야 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그 주변적인 것들을 판단의 중요한 근거로 사용합니다.

왜 기적이 일어나는 지, 그 기적을 있게 하시는 분은 누구인지에 관심하기 보다는

그 기적 자체에 몰입해 버리는 것이 그런 현상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후에 모세가 산으로 올라 간 후 40일 동안 조용하자

참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뭔가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기는 인간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꺼이 사람들의 눈높이를 맞추시는 분, 그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당신에게만 맞추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시내산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하나님과 인간의 진솔한 만남이 있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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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백성 매뉴얼
출20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해 계명을 말씀하실 때
가장 먼저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도 신이고, 또 다른 신들이 존재한다는 말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으로 생각해 보면 신이란 인간사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인지로 모릅니다.
무슨 일을 하던 마음을 두고 의지하고 믿음을 주는 대상이 바로 신이 아닐까요?
때로 힘이 될 수도 있고, 돈이 될 수도 있고, 명예가 될 수도 있고, 나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자신의 신념이 신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만들어져 있는 생각의 틀, 구조, 확신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게 되는 것,
나를 존재하게 했고,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충만한 에너지 안에 있으면서 그것을 모른척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세운 자신의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고수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여기며 삽니다.
어쩔 수 없이 버거운 인생의 짐들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일 수도 있고,
내가 만들어 놓은 가공의 신의 그것일 수도 있습니다.
신들에 의해 겹겹이 쌓여 살아가는 실존이란
도저히 하나님을 가까이, 아니 하나님께서 가까이 올 수 없게 합니다.
그것을 끊어내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님께서 안타까움으로 내어놓으시는 부탁이며, 계명입니다.

4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과 이어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 사이에 차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앞의 문장을 부연 설명하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상을 만든다는 것은 하나의 종교가 만들어 진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숭배하는 제도가 만들어 질 것이고, 조직도 만들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첫 번째 문장에서 다른 신을 두는 것보다 한 발짝 더 앞으로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봐 줄 수 없는 꼴을 연출하는 것이죠.

이는 마치 간음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도 인정하시는 이혼 사유가 되는 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한 결별의 의사를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이후에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수렁이 바로 이 우상숭배였으니,

하나님의 입장에서 강조의 강조를 거듭해도 부족함이 없는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5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질투를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이 질투를 한다는 것이 좀 의아한 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약한 인간이나 할 만한 감정으로 질투를 하시다니...

하지만 잘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투라는 것은 시기와 다르게 사랑의 감정에서 나옵니다.

질투는 사전적으로 ‘사랑의 한 형태로서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자기 이외의 인물을 사랑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대인 감정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질투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른 존재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향해 마음을 주는 것을 참아보실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삼사 대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죄 갚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천 대까지 베푸시는 은혜가 사실은 하나님의 본심인 것이다.

하나님의 본심이 어디에 있는 지 더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7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해왔습니다.

성장 시기에 따라서 이름을 다르게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이름을 그 사람의 존재와 일치시키며 성장하고 온전해 진다고 본 듯합니다.

실재 이름보다 호를 사용한 것도 어쩌면 이름을 가벼이 부르지 않기 위함이었을지 모릅니다.

본인의 이름도 그러하기에 부모님의 이름은 거의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자식이 어떻게 부모님의 존함을 입으로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부모님의 함자를 말해야 할 때는 띄어서 한 자 한 자 말했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으로 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특별한 태도를 가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는데 너무 황공하고 송구해서 도저히 그 단어 자체를 발음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써 놓은 단어만 나오면 절을 하기도 하고,

읽지도 않고 그저 ‘네 글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계명의 말씀을 충실히 따른다는 것이 그것일까요?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며 백성들이 행하기를 바라셨던 모습이 이 것이었을까?

부모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을 때, 더 중요한 것은 그 마음에 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다함없는 존경의 마음을 그렇게라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그만큼 소중하고, 귀한 분으로 여기는 마음이 밑바탕이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을 중심에 놓고서 하나님을 장식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교회의 모습이라면,

그 안에서 온갖 수식어를 붙인 찬양과 기도를 올려 드린다 해도

마음이 없다면 망령된 모임이요, 망령된 사람들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밥 먹듯 하나님을 되 뇌이면서 그의 뜻을 내 삶을 옮겨 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망령되이 하나님의 이름을 일컫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의 이름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루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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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프로포즈

출19

4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 5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6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보다 적극적인 관계의 시작은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상 한 두 명에 의해 전승된 이야기들로 한 민족의 정체를 규정하기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본격적인 관계 형성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

마치 한 여인을 앞에 두고 청혼을 하듯 하나님은 속에 담아 두었던 말씀을 꺼내십니다.

그래서 감히 출애굽기 19장의 제목을 ‘하나님의 프로포즈’라고 붙여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해내신 구체적인 사건이 있고,

누구도 방해 할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먹을 것에 마음을 빼앗길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아침저녁으로 하늘양식을 내려 주소 계시니까요.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의 선택이 유효하게 하려면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택은 바로 율법 준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언약을 지키면 됩니다.

그들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율법 즉, 어느 민족도 가져보지 못한 하나님과 사람의 계약서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장면입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약속 체결 장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으로서의 멤버십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보호자요 소유자로서 책임을 다하시게 되는 놀라운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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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다.

요즘 아이들은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을 배려 할 줄 모르는 것이 특징이다.
거기에 더해 자기의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한다.
참지 못하고, 스스로 분을 삭이지 못하며 어린이답지 않은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80년대의 학교에서도 간혹 그런 아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옛날이 좋았다는 그런 식의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요즘 아이들은 나름대로 충분한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자유롭고, 창의적이고, 의사표현이 분명하고, 아는 것도 많다.
이와 같은 장점들을 충분히 살리면서 자신 아닌 다른 사람들과 건강하게 공존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면 의례히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다.'
아이들이 보이는 태도나, 말버릇(잘 사용하는 단어)은 부모를 반영한다는 얘기다.
그러니 아이들이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부모를 고스란히 닮은 것이란 말이다.
더불어 아이들이 갈등상황을 풀어 가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 역시 그런 연유에서 오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럼 부모의 어떤 면이 아이들에게 영향을 준 것일까?
그것을 원인을 생각하려면 일단 핵가족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어린이들의 부모가 된 이들은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넘어오는 경계에 살았던 사람들이고,
지금은 거의 다 핵가족으로 살고 있다.
그러면서 더 이상 자신의 가족 외에 다른 친지들(대가족에서는 한 지붕 아래서 살았을)과의
유대관계가 모두 해체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아이들의 엄마들은 친지들을 남 보듯 하게 되었고,
때로는 작은 갈등의 소지들을 크게 키워서 의절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가장 잦은 일은 시부모와의 심각한 갈등의 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지내는 것이(보지 않으니까) 더 편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재대로 연결된 관계가 없는 집들이 많다.
지금 어린이들의 부모들은 위기나,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아이들이 이런 부모 아래서 자라다 보니 갈등을 풀어 가는 능력이 거의 바닥일 수밖에 없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교사인 부모로부터 보고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 간에 싸움이 생기게 되면 옛말처럼 신속하게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 되는데, 여기까지는 예전에도 보아왔던 것이라면
상황 파악을 뒤로 하고 오로지 자기 아이만 두둔하고,
부모들의 싸움은 훨씬 장기화 시키는 것이 과거와는 다른 점이다.
어느 쪽도 양보하려는 노력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갈등을 풀어가는 능력을 배양하지 못한 부모들에게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 하겠지만
정말 이 것을 지켜봐야 할 때는 답답하다 못해 (좀 과장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부모들은 아이가 멋진 사람으로 성공하기를 바란다.
자신들이 보여 주지도 않는 모습을 아이들이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마중물도 넣지 않고 쇳소리 나는 마른 펌프질을 해대는 격이라 할 수 있다.
부모 자신의 절제 없이 아이들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할 수만 있다면 부모들은 자신의 성품, 습관에 집중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아이들의 어떠함에 집중해 시간 보내지 말고 자기를 들여다 볼 시간을 갖는 것이 더 필요하다.

한국 사회가 너무 급하게 달려온 탓에 잃어버린 것이 많은데,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하고,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 것이 가정인 것 같다.
지금의 부모들이 부모역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신들도 역시 역할 모델을 잃어 버렸다.
그들만 나무랄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 하지만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라서...
정말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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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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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내용의 글들을 계속 올리다 보니 내 속에서부터 멀미가 나려고 한다.
그만 할까 하는 생각도 해 보지만, 뭐 매일 성경 한 장 읽고 부담없이 생각 정리해서 올리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과정이니 뭐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올리기를 계속한다.
뭐 내 맘이니깐.히히
 

하소연입니까, 간증입니까?

출애굽기 18

8 모세는 장인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신 일, 곧 바로와 이집트 사람에게 하신 모든 일과, 그들이 오는 도중에 겪은 모든 고난과, 주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건져 주셨는가 하는 것을 자세히 말하였다.

9 그러자 이드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시려고 베푸신 온갖 고마운 일을 전하여 듣고서, 기뻐하였다.


편한 사람, 가족, 친구를 만났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 놓게 마련입니다.

사소한 일부터 힘든 일, 고통스러운 일, 참을 수 없는 일 등등의 일들을 늘어놓으며 하소연을 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만두지도 않을 것이면서 그만두고 싶다느니, 떠나고 싶다느니 넋두리를 해 대겠죠.


모세는 오랜만에 장인을 만납니다.

40년이나 함께 살았으니 어쩌면 모세에겐 아버지 같은 존재이고, 흉허물이 없는 사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모세에게 있어 이드로는 편한 사람이었습니다.

집을 떠나 애굽으로 가서 지금까지 모세는 그 전까지 80년의 인생 중 그 어느 때보다 더 긴장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오랜만에 만난 장인에게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았을 까요.

애굽에서 벌어졌던 일들, 애굽을 나와서 이곳까지 오면서 있었던 일들을 열거하자면 며칠 밤낮이 걸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들을 마음 높고 터트릴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내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을 감당하고 있는데 백성들은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고 불평만 할 수 있는 것인지,

하나님은 또 나를 더 가까이 대해 주지 않으시고, 백성들을 너무 오냐오냐 하시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털어 놓을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장인을 만난 자리에서 이 모든 넋두리를 담아 하소연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들을 도우셔서 이곳까지 올 수 있었는지를 ‘간증’했습니다.

얼마나 실감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던지 이드로는 자신이 소문으로 들었던 것이 사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확신에 찬 응답이 나오게 되었고,

이드로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한 턱 내게 됩니다.


가까운 친구나, 친지를 만났을 때 답답함을 토로하며 하소연도 할 수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힘겨운 과정이지만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이끌어 주심을 간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닐까요?

이것은 패러다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의 문제란 말입니다.

어쩌면 소위 말하는 긍정의 힘이라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요?


편한 상대를 만날 때조차 중심으로부터 주체할 수 없는 간증이 쏟아져 나왔던 모세.

그는 복 받은 자임에 틀림없고, 또 그와 함께 할 백성들 또한 복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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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숭교회 교회학교는 통합교육을 하고 있다.
대개의 교회들처럼 유년부(초1-2), 초등부(초3-4), 소년부(초5-6), 중등부(중1-3), 고등부(고1-3)로 나누지 않고,
어린이부(초1-6학년), 청소년부(중1-고3)로 통합해서 부서를 만들고 예배와 행사를 함께 진행하는 것이다.
반(어린이부는 사랑방이라고 함)도 학년을 섞어서 편성을 한다.
벌써 청소년부는 4년여, 어린이부는 3년여의 기간 동안 통합교육을 해 오면서 노하우도 쌓였지만,
여전히 교회 내에서의 이런 형태의 교육 시스템에 대한 의구심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때론 통합교육을 진행하는 주체로서 어려움이 없는 것도 아니다.
여러 학년을 섞어서 하다 보니 눈높이를 맞추는 것도 쉽지 않고
또 인원이 많다 보니 뭔가를 집중해서 하기도 쉽지 않다.
인원 문제는 통합교육의 문제라기보다는 부서실의 문제이니 논외의 사항이라 생각하고,
부모님들이 지적하는 것 중 하나가 사랑방(어린이부에서 반을 사랑방으로 부름) 모임 때
남자 아이들 간의 갈등 상황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지난주에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2학년과 4학년 남자 아이 둘이 티격태격하는 일이 있었다.
문제는 갈등의 상황이 아니라 선생님이 그 상황을 풀어보려고 하는 데서 발생했다.
2학년 남자 아이가 도무지 선생님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되려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분에 못 이겨 눈물을 지었고, 선생님을 째려 본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아이들의 입장에서 배려하며 이야기를 풀어 보려는 선생님이라도 황당할 수밖에 없었단다.
그래서 선생님은 일단 말귀를 알아듣는 4학년 아이는 타일러서 보내고 좀 더 지켜보며 이야기를 하다가
할 수 없이 밖에서 기다리는 엄마를 불러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나오는 데 뒤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그 아이가 4학년 아이의 부당했음과
자신의 정당했음에 대해서만 변명을 하더라는 것이다.
사실 그 선생님이 지적했던 것은 그 아이가 선생님 앞에서 보인 태도였는데도 말이다.
아마 예측하건데 그 엄마의 성향으로 봐서 아들의 이야기를 맹목적으로 믿고
4학년 친구는 물론 선생님까지도 다른 눈으로 보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으며 통합교육이 더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2학년 남자 아이는 그 집의 '독생자'였다.
그래서 그 아이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뭐든 장애 없이 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있었던 것이다.
최소한 두 명 혹은 그 이상의 형제들이 함께 자라는 집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형제들이 많으면 동생들은 바르지 못한 행동을 할 때 형에게 제재를 받게 된다.
때로 부모님 몰래 얻어터지기도 한다.
그래도 자신이 옳았다면 부모님 앞에 형을 정정당당히 고발하는 과정을 거치며 형에 대한 정의의 심판을 내리게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형들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형들에게 형으로서의 의젓한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더 낫다.
형제가 많은 집의 아이들은 그 만큼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볼 기회를 많이 갖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집 밖에 나와서도 다른 친구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즘 아이들 중에는 혼자인 아이들이 많다.
혼자가 아니더라도 부모들의 주 관심이 자녀들의 성품보다는 능력에 있다보니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적절하게 풀고 조절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집에서 더이상 접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하나밖에 없는 자녀들에 대한 부모들의 지나친 애착이 아이들의 성격을 외골수로 만들어 버린다.
아이들은 자신이 느끼는 욕구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모두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해소하는 능력의 부재가 더 심각한 문제이다.
그래서 통합교육은 필요하다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려고 한다.
집에서 경험할 수 없는 갈등들을 경험하는 장이 필요하고,
아이들이 그 갈등을 건강하게 풀어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부모의 지지와 협력이 필요하다.
아쉬운 것은 교회에서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에 좋은 기억만 남겨도 아쉬울 시간에
갈등 과정을 길게 끄는 것이 선생님들에겐 때로 상심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모들에게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까? 또 하나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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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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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지키실 것입니다.

출애굽기 17

7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에서 주님께 대들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므리바라고도 하고, 또 거기에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고 해서, 그 곳의 이름을 맛사라고도 한다.


하여간 이스라엘 사람이든 오늘날의 우리든 간에

눈에 보이는 상황에만 얽매어 판단을 하는 것은 매한가지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의 전후 맥락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얘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도 쉽게 모세가 누구고,

그를 자신들 앞에 세우신 분이 누구인지에 대해 망각해 버립니다.

당연히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가 어떤 지팡인지도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죠.


어쩌면 오늘의 나는

지금 내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 고통, 실패보다

더한 어려움을 지나온 과정의 결과물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때 우리들을 넉넉하게 지켜주셨고,

오늘 나로 존재케 하신 것이란 말씀입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애굽이라는 강대국에서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살 운명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은 자유의 몸이 되어 있는 것이 놀라운 일 아닙니까?

또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기적들을 직접 목격하고도 살아 있다는 것이 또 기막힌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그런 일들을 하셨고

지금도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신비롭기까지 한 일 아닌지.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 잠시의(상대적인) 목마름으로 인해

그 이전에 자신들을 구하시고 지키셨던 분을 원망하며 불평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그래서 더 안타까움을 더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지금까지 나를 지키셨듯이 오늘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불평불만에 휩싸여 신세한탄을 하며 지내기보다는

다음 순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움직이실 지를 기대하는 쪽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장 선 지도자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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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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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약속=율법

출16

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항의하였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 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

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이 날마다 나가서, 그날 그날 먹을 만큼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그들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하여 보겠다.

5 매주 엿샛날에는, 거두어들인 것으로 먹거리를 준비하다 보면, 날마다 거두던 것의 두 배가 될 것이다."


우리가 평소 누군가와 소통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혹시 상대방을 무시한 채 일단 내 입장에서만 감정적으로 표현하고 보는 경우가 많지는 않은지.

특히나 가장 좋지 않는 태도가 불평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에게선 이 불평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우는 소리’를 해가며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방식도 거의 ‘우는 소리’에 가까웠습니다.

물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힘들다 등등등...

자신들을 상대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그 정도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그들은 언제나 불평으로 하나님을 코너로 몰아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일관된 선한 응답이 놀랍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일 음식을 이미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것을 받아 내는 방식이 또한 원망이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니 준비된 것을 주시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은 언짢지 않으셨을까요?

그러나 16장에서 하나님은 별로 개의치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백성들이 불평할 만하다고 여기신 것인지, 아니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곧바로 모세를 부르시고는 그들의 요청대로 고기와 떡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이 말씀을 전하는 모세가 더 노를 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별로 유쾌한 과정은 아니었지만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아침저녁으로 내리시는 하늘양식을 먹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멋진 삶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또 있겠습니까요.

물론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애환이 있겠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피부로 체험했을 테니까요.

지금 우리가 하루하루 자신의 노력으로 먹고 산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두신 것들의 한계 안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 율법을 정하십니다.

만나는 매일 1인당 한 오멜을 주을 것, 6일 째 되는 날에는 두 배로 줍고 안식일에는 쉴 것.

이렇게 하나 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 맺어가는 약속으로서의 율법은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간에 생명을 담보로 맺어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율법은 생명의 안전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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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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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간의 소통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무엇일까?
상대방의 진심이 담긴 마음을 읽는 것을 가장 장애하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하며 상대방의 말의 끝을 좇아가게 된다.
대개는 상대방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머릿속으로는 오로지 자신이 할 말을 준비하느라 바쁜 것이 사실이다.
상대방의 말이 빨리 끝나기만을 학수고대 한다.
그러다 안 되면 확 잘라 버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말을 통해 거의 모든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평상시의 대화야 그렇게 되든 말든 별 상관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이 격해져 말다툼을 할 때나 하소연을 할 때가 문제다.
조금만 잘못하면 말꼬리를 잡으며 서로 큰 소리를 내게 되고,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히게 된다.
말의 옳고 그름을 따지며 몸싸움으로 번지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허탈함만이 남을 뿐이다.
지나고 보면 '내가 정말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것이 아니었는데'하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은 자신의 말이 자신의 본심과 다르게 나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상대방의 마음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더 한 단계 높은 소통의 방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상대방이 말을 할 때 그 사람이 하는 말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있는 그 사람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상대방의 감정의 변화, 그런 말을 하는 내적 동기,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집중하는 것이다.
때로 그 사람은 자신이 내 뱉은 말과 정반대의 감정 상태에 대해
공감을 받고 지지를 얻음으로써 큰 위로를 받으며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하는 말이 틀렸다고 말하고 접근하기 시작하면
서로 자신의 본심은 밀어 둔 채로 서로의 말에 집착하며, 말로 말을 이기려고 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지 그 사람의 형편과 감정을 공감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금방 태도를 바꾸고 진심어린 마음을 드러낼 지도 모른다.

이것이 코칭에서 중요한 스킬 중 하나다.
'상대방의 말에 집중하기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에 집중하라'
그래서 그 사람이 하는 말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한 질문을 하기 보다는
그 사람이 그 말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의 변화나,
말의 중심이 되는 당시에 기분이 어땠는지를 묻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간다면
'인간 행동의 기저에는 반드시 긍정적 의도가 있다'는 NLPia코칭 철학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말이 과격하고, 부당하게 터져 나올 때에 조차도
먼저 그 사람의 내부에는 긍정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는 상대방이 그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정말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물으며
긍정적 의도를 함께 찾아 공감해 준다.
그런 다음에는 그 긍정적 의도를 충족시킬 수 있는 다른 창조적 행동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게 말(행동)하는 긍정적 의도는 뭐지요?'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소통에 있어 엄청난 패러다임 변화를 가져다 줄 것임에 틀림없다.
긍정적 의도에는 자기 승인, 애정, 건강, 자기 방어, 성장, 자유 등이 있을 수 있다.

좀 생뚱맞기는 하지만 성경을 읽으면서도 이런 자세는 도움이 된다.
때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노를 발하시며 심판을 선언하실 때가 있지만,
비록 심판이라는 극단적인 말씀을 하시지만
그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본심은 사랑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가장 탁월했던 사람이 모세였다.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죽이고 모세로 다시 시작하겠다고 하실 때,
모세는 하나님의 진심을 알고는 더 앞서 나가서는
다른 민족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뭐라고 하겠냐고 하면서 만류한다.
실은 하나님께서 말씀처럼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뚫어 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때로 더 큰 소리로, 때로는 납작 엎드려서 하나님을 막아서서,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방법으로 나아가시도록 도왔던 것이다.
만약 모세가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했더라면
하나님은 오히려 모세를 괘씸해하시며 그의 뒤통수를 날리셨을 지도 모를 일이다. (좀 발칙한 상상!!! 용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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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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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고 싫고에 의해 행동을 결정할 때는 지난 것 같다.
정황을 봐서 옳다고 여겨지는 일을 해야 한다.
여러 일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부모님과 관련된 일이 그렇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부모님의 마음을 먼저 배려하고
그 분들이 서실 자리를 미리 마련해 드려야 한다.
혹시 내가 내키지 않는다고, 싫다고 해서 머뭇거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돈이 드는 일이어도 그렇고,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어도 그렇다.
자식된 도리라는 표현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내가 이루고 싶은 가족이라는 그림을 떠올려 보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 역시 나의 '기호'에 따라 가변적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상황에 따라 변덕을 부리는 것 또한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요청이 '제발 마음을 굳게 하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시험의 목적

출15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고통의 문제는 무엇일까?

왜 하나님을 잘 믿고, 더구나 그 분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어려움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실로 놀라운 일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아마 체험을 이야기 하라면 3박4일도 모자라 녹취해서 책으로라도 내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런 흥분되는 시간을 지나고 그들이 마주해야 했던 ‘현실’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들의 길은 이름만 달리할 뿐 광야의 연속이었고,

광야는 곧 결핍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수르광야를 지나며 3,4일 물의 결핍을 경험할 때 과연 그것을 신앙의 이름으로만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타는 목마름 속에서 그 입으로 한 결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하는 시간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있으셨을까?

이건 지금의 독자의 물음이기도 하지만, 그 현장에서 온 몸으로 겪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타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시험’이라고 간단히 나옵니다.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따르는지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아직 구체적인 그 무엇도 주시지 않은 상황에서 뭘 따르라는 말씀인지 다소 생뚱맞긴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들의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이 휴가를 떠나신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고통의 상황 중에서 바른 선택을 해 주기를 바라시는 마음 가득 담아서 말입니다.

다소 가혹한 감이 없진 않지만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당신의 사람들을 단련하시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달라지고, 불리해 지더라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 주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목마름의 시간이 주어질 때, 그래서 하나님의 부재가 더 느껴질 때,

오히려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것,

그래서 삶의 태도를 흐트러트리지 않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시험을 통해 이르고자 하시는 목적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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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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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백인 학교에 아메리카 인디언 자녀들이 전학을 왔습니다.
몇 개월 공부하고 나서 선생님이 "애들아, 시험 칠 준비해라" 했더니,
백인 아이들이 전부 옆에 가방을 다 올렸는데 아메리카 인디언 아이들은 둥그렇게 앉더랍니다.
"애들아, 너희들 시험 친다고 했는데 왜 둥그렇게 앉냐?"
그랬더니 그 인디언 아이들이 그러더랍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이렇게 서로 의논해서 풀라고 배웠는데요."

작은책 4월호 '엮은이가 독자에게' 중에서
 

패자에서 승자로

출14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현장에 있긴 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불완전 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실로 감격스러운 일들을 겪으며 애굽을 탈출해 나오기는 했지만

백성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가장 중요한 동기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하나님에 막연한 두려움에 모세를 따라왔을 뿐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할 만큼의 능력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앞길을 막는 홍해 앞에서 불평하며 되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들 듯

바로에겐 쫓아낸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잡아오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바로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으시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 광야에 갇혀 있다고 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애굽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단절을 위한 거대한 의식이었습니다.

홍해 사건을 통해 백성들의 기억 속에 애굽은 다시 돌아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새기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보내신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애굽을 혼쭐을 내고 나오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애굽을 자신들이 노예생활을 했던 곳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완전 무장한 애굽의 군대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볼 때

출애굽은 노예의 신분으로 쫓겨난 사건이 아닌 전쟁에서 승리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자가 됩니다.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끌어 내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하신지를 똑똑히 체험했습니다.


홍해를 건넘으로 인해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확실하게 건넌 것이고,

이제 이들에게 남은 일은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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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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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다가 보면 똑같은 문제에 대해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 중에서 극명하게 다르게 드러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고민이나 고통 등 삶의 문제들을 어떻게 상대하느냐는 것으로 나타난다.

1. 고민이나 고통을 책임과 의무로 여기고 짊어져야 한다
2. 고민이나 고통을 친구로 여기고 삶을 즐겨야 한다.

짊어지느냐, 즐기느냐는 마음에 달린 것 같다.
이제까지 짊어지는 삶이었다면, 이젠 즐기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더 어려워 보인다.
약간은 진지함의 관성이 있기에...
 

준비를 위한 준비

출13

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20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요셉에 의해 시작된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애굽생활이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70명으로 시작한 그들이 한 민족이 되어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거니와

이제는 하나님의 명실상부한 선택된 민족으로서 첫발을 내디디는 모습이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전까지는 어렴풋한 하나님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한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발걸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을 빠짐없이 실천한 사람들만이 이 대열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시작으로 일주일간의 무교절을 지킨 사람들이고,

앞으로도 매 년 반복해서 이 구원의 사건을 되새길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 절기를 지키며 자신들이 어떤 백성인지,

어떻게 자신들이 시작되었는지를 전하고 또 전할 것입니다.


주목해서 볼 일은 이들이 창세기 50장에서 요셉이 임종하며 형제들에게 명했던 일,

즉 요셉 자신의 해골을 매고 올라가라고 맹세시킨 일을 실천한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모세를 통해 이 모든 일들이 주도되고 있지만,

결국 요셉으로 시작되어 요셉으로 마무리 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치르며 보여주었던 출애굽의 밑그림이 성취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대의 행진도 아니고, 급하게 출발한 그 길이 얼마나 막막했을 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여인들, 어린이들, 노인들이 뒤 섞이고, 짐승들과 짐수레들의 행렬이

오히려 그들을 낙담하게 하지는 않았을까요?

더구나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도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그냥 앞 사람만 따라 가야 했다면 말입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 있었으니,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에서 지켜주는 것 이상으로 큰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정처 없이 버려진 것이 아닐까 싶은 마음을 크게 잡아 주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이제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준비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애굽을 떠났고, 또 그 과정에서 주변 세계에 그들의 존재가 충분히 알려져서

환경적 준비는 다 되었을지 몰라도, 정작 준비되어야 할 정신의 훈련이

광야의 시간들을 통해 시험받고, 더 단단해 지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기대감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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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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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내 몸을 따듯하게 해 주었던 옷들을 세탁을 하고, 접어서 장롱 서랍에 넣었다.
좀 섭섭하고 미안한 생각도 들지만 그렇다고 계속 밖에 걸어 둘 수는 없다.
때가 되면 들어가고 좀 더 얇은 옷가지들이 밖으로 나와야 한다.
만약 그러지 않고 따듯해진 날에도 두꺼운 겨울 옷을 입고 다닌다면
사람들의 비웃음보다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 할 거다.
계절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바꾸어 입어야 하는 데
여전히 과거의 것들을 고집하면 남들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곤란한 일이 되고 만다.
익숙하다고, 편하다고 뒤로 물러서기만 한다면 더이상 발전은 없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입고 있던 애굽이라는 옷을 6개월 동안 벗겨주려고 애쓴 것 같다.
그 결정적 순간이 바로 출애굽기 12장의 사건이 아닐까.
오늘 묵은 옷들을 꺼내 세탁을 하고 장롱에 넣으면서
옷의 변화 만큼이나 마음의 변화 또한 소망해 본다.
 

보고, 듣고, 만지다

출12

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양고기, 문설주, 무교병, 쓴 나물, 띠, 지팡이...
성경 특히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명심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있다면

성경의 말씀들이 오늘날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쓰여 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기록되었다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끔 왜 이런 것을 자세히 쓰고 있는지 의아스러울 땐 이스라엘의 후손의 마음으로 읽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는 마지막 재앙을 준비하시는데

하나님과 모세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과 함께하십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시작점을 찍으려 하시고,

또 그 시작점을 매 해 기념하며 기억하도록 하려고 하십니다.

그 기억은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직결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지시하십니다.

뭐 굳이 백성들이 이런 일들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일들을 빠짐없이 이르고 계십니다.

그냥 서둘러 재앙을 내리시고 바로로 하여금 쫓아내도록 하셔도 되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며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규정에 따라 절차를 밟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율법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이 시작, 즉 유월절의 시작은 공감각을 이용하도록 하십니다.

보고, 듣고, 만지는 생생한 경험으로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몸에 새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어떤 일을 당할 때 그 때의 그 경험을 떠올리며

자신들을 구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자신들을 구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양을 고르고, 양과 시간을 보낸 후, 그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나누어 먹고, 더불어 쓴 나물과 무교병을 먹는데,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급하게 먹어야 합니다.

누구라서 이런 장면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초월해 계시는 어떤 분으로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도 생생하게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그 모든 것을 통해

오늘도 우리들을 만나고 계시고, 그 가운데 기억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기 12장의 하나님은 더없이 강한 분이시지만 섬세한 사랑의 마음을 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매 년 유월절을 통해 전하며 기억해야 합니다.


(설교체로 바꿈, 이렇게 쓰는 것이 더 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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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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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나님을 지키는 용이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꼭 천국 가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절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3학년 꼬마가 쓴 기도문

아이들이 연초에 쓴 기도문을 정리하다 발견한 기발한 기도문이다.
하나님을 지키는 용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
하나님께서 즐거워하실 것 같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만, 언젠가 하나님을 지켜드리겠다는 동심의 순수함이 담겨있다.
 

출11

3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모세는 아무것도 없이 애굽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있는 것이라곤 늙은 몸을 의지한 지팡이와 하나님의 이끄심에도 불구하고 가득한 두려움뿐이었다.

그러나 6개월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의 손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는 이제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의 말, 몸짓이 애굽이라는 나라의 모든 사람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으로 자처하며 거드름을 피우던 바로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까지도 애굽의 백성들에게 눈여겨 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는 은금 패물을 손쉽게 얻을 수 있도록 만드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모세는 이쯤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자신을 설득해 긴 여정이 이끌어 오신 이유를 알게 되었을까.


이렇듯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할 준비가 되었지만,

여전히 바로는 처음 그 태도를 조금도 바꾸지 않고 있다.

완고함으로 오기까지 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는 바로와는 상관없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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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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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집에 도둑이 들었다.
어떻게 했는지 자물쇠 두 개를 모두 부수고 들어와서는
장롱과 서랍을 모두 열어 젖혀 두고 갔다.
결론은 도둑맞은 것이 없다는 거다.
훔쳐 갈 것이 없으니 가져 간 것도 없다.
뭔가 금붙이를 노린 것 같은데 도둑도 실망이 컸을 것 같다.
(참, 도둑 걱정을 하고 있네.)
뭔가 값비싼 것을 집에 두고 있다가 이럴 때 잃었다면
오늘 하루 동안 갑갑했겠지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다.
물론 현관 자물쇠 두 개를 모두 교체하는 비용은 들었지만.

물건에 마음을 붙여 놓았을 때 그 물건을 잃으면 마음도 잃게 되는 것 같다.
마음이 붙어버릴 만한 물건을 만들지 않는 것도 삶의 중요한 덕목이지 않을까.
좋은 경험 한건가?
유쾌하지만은 않은 경험이지만 경험을 통해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건 사실이다.
 

내가 경험하는 하나님

출10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사실 삼천년도 넘는 간극을 넘어서 출애굽기의 사건을 피부로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대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재앙사건을 보기 때문에 편협한 견해를 가질 수도 있다.

열 가지 재앙을 표현하는 것에도 조금의 과장이 있을 수 있고,

그러므로 바로가 일련의 일들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재앙이 세 개가 남았다.

그 재앙 중 메뚜기 재앙과 흑암의 재앙이 본 장에서 애굽에 내린다.

무엇이든 적당 할 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지나쳐 과하게 되면 그것은 재앙이 된다.

비가 더 많이 온다든지, 바람이 더 많이 분다든지, 병충해가 더 많으면 재앙이 된다.

농업이 모든 것의 근간이었던 시절에 우박이나 메뚜기가 조금만 더 와도

실로 큰 재앙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재앙 하나하나를 놓고 논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모든 것들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강하게 인식시키시겠다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그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조상의 하나님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들의 조상들이 경험한 하나님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들조차 경험해 보지 못한 하나님 경험을 주고 계신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주시고자 6개월여의 의식을 진행하고 계신 것이다.

그들은 몸으로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으리라.


재앙들이 애굽 전역을 강타하면서도

유독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을 때,

그리고 이 현상이 모세라는 사람에 의해 일어나기도 잦아들기도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의 변방에 있던 자신들이 역사의 중심으로,

주인공의 자리로 옮겨 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는 삶이 더없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게 하는 기간이 열 가지 재앙의 시간이었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경험하는 과정은 필수인 것 같다.


아홉 번째 재앙으로 흑암이 내린 것은 애굽의 사람들에게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는 것을 멈추고 깊이 생각하라는 하나님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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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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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더 분명하게 이야기 해 달라고 부탁한다면,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지 이미 매뉴얼로 제시되어 있다면
걱정할 것이 없을 것 같다.
특히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앞에서는 거의 속수무책이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너무도 다양하고,
그 감정이라는 것이 심하게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어떤 원리나 구조를 세우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이 상책일 때도 있다.

내가 나름대로 정한 원칙은
일단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시간이 지나 결과가 좋으면 잘한 선택이고,
결과가 좋지 못하면 반성은 하되 후회는 하지 말자는 것이다.

바로는 선택의 기로에 서서는 최악의 선택을 계속하고 있다.
나름대로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후회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무시되는 현실들 

출9

27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28 여호와께 구하여 이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성에서 나가서 곧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그리하면 우렛소리가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 아니할지라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

30 그러나 왕과 왕의 신하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모세는 신이 아니었고 사람이었다.

그가 과거에 어떤 신분이었는지를 떠나 지금은 명백하게 이스라엘 사람이고,

80살의 초라한 행색의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당시 신으로 자처하던 바로나,

그의 주변에서 호사를 누리던 그 어떤 권세가들이 가진 권위 그 이상이었다.

그들이 가졌다고 자랑하던 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바로가 끝내 회피하려는 현실, 그 현실이 진실임을 깨달았어야 했다.

어쩌면 바로는 자신을 신으로 추앙하는 거짓 현실에 휩싸여

진짜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질 때도

금방 지나가 버릴 것이라고, 눈속임이라고 자신을 속이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 명의 착각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또 하나의 현실이 무시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현재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일부 목회자들이 교회 안에서 누리는 (조금 과장해서) 절대 권력이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통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제왕적으로 누리는 힘을 현실로 여기다가

교회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비판을 부당하다고 몰아붙이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목회자들의 태도가 너무도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왜 바로를 이야기 하면서 일부 목회자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지 가슴 아프다.

나도 그 목회자들의 무리 가운데 있는 것인데...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자신을 둘러싼 인의 장막에 휩싸여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안 된다.

바로가 그 현실을 무시하고 있을 때

애굽에는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의 재앙으로

각각 가축의 죽음, 악성종기, 우박이 내려진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고센에는 내리지 않았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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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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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빼먹지 않고 쓰려고 했는데 토요일과 주일에는 아무래도 무리인듯 하다.
주일은 주일 대로, 토요일은 주일을 준비해야 하니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이 이끄는 40년이라는 거창한 주제이지만,
실은 매일 성경을 읽고 싶은 나의 작은 소망이 담긴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어줍잖은 글이라도 매일 빠짐없이 기록을 남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도 어느정도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지만,
욕심을 가지면 글을 올리는 것이 불가능해 질 것 같다.

나름 성경을 읽을 때 가지는 원칙을 정리해 보려고 하는데 그것도 여의치는 않다.
'돌소리의 직관으로 성경읽기'라고 해 볼까하는데, 말처럼 쉽지는 않다.

월요일이 다 가고 밤이 되서야 또 한 장을 마무리 한다.
 

시간의 주인

출8장

28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29 모세가 이르되 내가 왕을 떠나가서 여호와께 간구하리니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바로의 백성을 떠나려니와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하지 마소서 하고

30 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니

31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그 파리 떼가 바로와 그의 신하와 그의 백성에게서 떠나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32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초라한 행색을 한 두 노인이 전하는 말을 듣게 된 바로의 기분은 어땠을까?

혹시 강대국의 사신이 대단한 위세로 수백 수천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나타났다면,

그래서 그들이 전하는 선전포고를 접하는 자리에 있었다면 바로가 조금은 위축되었을까.

노예로 일하고 있는 자들이 보이지도 않는 자신들의 신이 자신들을 놓아주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않으셨더라도 대개의 절대 권력을 가진 왕들은 바로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뻔히 알고 계신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보내시면서 바로의 시건을 끌만한 그 어떤 것도 그들에게 덧입혀 주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선 굳이 그런 일을 하실 필요가 없으셨던 것 같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인간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할 만한 그 어떤 화려한 장식이 위세가 아닌

‘하나님의 이름’과 ‘시간’이면 충분했다.

하나님의 이름이 전해지고, 그 이름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들이 현실로 드러날 때

그 누구도, 어떤 권력도 맥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역으로 시간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 어떤 고통도, 두려운 일도 해소될 것이라고 믿는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갖고 사는 어리석은 인간의 행태이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벌어지고 있는 재앙들이 그저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약간 귀찮은 일일뿐 그것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구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조금 심하다 싶으면 그들을 불러 몇 마디 말로 달래서 중지 시키고,

또 그렇게 그 재앙이 멈추면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다.

어떤 다급한 일이 있을 땐 달려와 무릎 꿇고 눈물범벅이 되어 기도하지만

그 일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나가 버리면 또 등 돌리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크리스천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이렇게 바로가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향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의 재앙을 각각 개구리, 이, 파리로 내리신다.

하나님의 각본대로 바로는 재앙을 모면하기 위해서 모세와의 대화를 시도할 뿐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는 일으키지 않는다.

자신들이 따라 할 수 없을 때에야 그나마 하나님을 인정하는 술객들이 어쩌면 그래도 지혜로운 것이다.


이런 시간의 과정을 통해 조금씩 하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 족속들의 마음속에 크게 자라고,

애굽의 백성들의 기억 속에 새겨지고, 주변의 나라들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가공할 재앙이 네 번째에 들어서면서 고센 땅이 구별된다는 것이 또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을까?

이스라엘 족속들은 이제 자신들에게 임한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기만 하는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자신들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몸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분명하게 보고, 깨달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모세에 대한 신뢰가 더욱 확고해 지고, 그가 명하는 것을 조금도 빠뜨림 없이 따르게 된다.

모세에 대한 믿음은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직결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당신의 백성 삼으시려는 계획을 쉬지 않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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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이유


출7장
8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 바로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말하기를 너의 지팡이를 들어서 바로 앞에 던지라 하라 그것이 뱀이 되리라

10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며 일을 시작하신 것도 답답한 일인데,

그를 통해 일을 해 가시는 과정은 답답하다 못해 한심해 보인다.

대개 우리는 출애굽기의 이 부분을 읽으며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찬양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어디 하나님이 그런 재앙을 내리셔야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셔도 된다.

왜? 하나님이시니까.

오히려 ‘짜잔’하며 단칼에 무 자르듯 깔끔하게 처리해 버리시고는

별 일 아니었다고 말씀하시는 모습이 더 좋지 않을까.

뭐 하러 자신 없어하는 모세를 설득하고,

여전히 거리를 두고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며

6개월이라는 시간을 지속한다는 말인가?

그러니 답답하다 못해 한심해 보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애굽을 상대로,

아니 한 인간인 바로를 상대로 수개월에 걸친 지루한 싸움을 시작하신다.

말을 해 놓고 보니 ‘싸움’이라는 것도 말이 안 된다.

한 인간과 하나님이 싸움을 하다니.

하나님의 일방적인 후려치심이라고 하면 더 맞을 것 같다.

이 일련의 과정의 목적이 하나님의 이김에 있지는 않은 것 같다.

핵심은 하나님께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에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존감의 문제이다.

100년도 더 넘게 고통을 당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존재감을 상실한 상태였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왜 이 곳에 있는 지에 대한 질문조차 망각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을 이끌고 나가서 다른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다고 해도

그들의 나약한 의식이 그들 스스로를 버텨내지 못하게 만들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히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하는 시간만큼, 아니 그 이상 고심하시고 준비하신 일이다.

도와주시려는 것이고, 기억에 남겨 주시려는 것이다.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시는 것이고,

그들의 마음속에 꽉 막혀 있는 한을 풀어 주시는 것이다.


그럼 억울한 애굽의 백성들은 어떻게 하나?

잘 살펴보면 그들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재앙은 때로 예고되었고, 그래서 그에 따른 준비를 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기도 했다.

특히 열 번째 재앙은 피해갈 방법이 있음을 그들은 소문(언론?)을 통해 들었을 것이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지 않을 수도 있었다.

늘 듣지 않는 마음이 이스라엘 백성이든 애굽 백성이든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펼치시는 역사!

모세의 지팡이가 바닥에 던져질 때 어떤 소리가 났을까?

쨍? 탁? 턱? 텅? 쿵? 딱? 척? 짝?

그 소리가 어떻든지

바로와 그 신하들은 이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어야 했다.

만약 그렇다면 새로운 ‘시작’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절망적 ‘끝’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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