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여고생들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써니'같은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바탕에 깔린 영화는 더욱 그렇다.

오늘 동구마케팅고 하은이반(기독 동아리)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갔는데,
영화 동아리의 영화관람에 끼어서 보게 되어
영화관은 동구의 여인들이 꽉 들어찼다.
그들 사이에서 보는 여고생들의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했다.

그러나 그들은 잘 몰랐을 거다.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 배경들이 가진 시대성을 말이다.
그것까지 알면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엄마들에게 강추한다고, 꼭 보시라고 말씀드리라고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여고생이라고 하면서, 또 유호정이 교복을 입으며 추억에 잠기지만
실제 여고시절로 돌아가서는 교복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건 80년대에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만 알 거다.
교복 자율화!
5공화국 때 영화 중 잠시 등장했던 전모 대통령 덕분으로 있었던 자유롭지 못한 시대에 자유!
그래서 임나미가 벌교에서 전학을 와서 당황해하는 것과 연관되는데
자기는 스펙스 신발을 신었는데 다른 친구들은 프로스펙스나 나이키를 신었다는 것으로 충격을 받는 장면이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프로스펙스 신발을 신었다.
그 때가 85년이었는데, 친구들이 주변에 모여들어서 신기해 하며, 공부 잘해서 사주셨냐고 부러워했었다.
정확히 기억하는데 당시 25,000원짜리로 제품명은 '그랜드슬램' 테니스화였다.
스펙스와 프로스펙스, 월드컵과 프로월드컵의 차이를 아는 사람은 우리 세대다.
소위 메이커 옷과 신발이 청소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잡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촌스러운 모습인데, 영화는 그것을 참 잘 담아낸 것 같다.

(일단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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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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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하고 생각하는 것이 곧 글을 쓰는 바탕이며 출발점이다.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훈련이 더욱 중요하다.
기막힌 이야기 기막힌 글쓰기, 최수묵 지음, 교보문고, 29p.

매일 짧게라도 글을 써 보겠다고 작정을 했는데,
어느 날은 블로그만 열어 둔 채로 한두 줄 쓰다가는 한 글짜도 더 나가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다 떠올려 보고,
아무 글도 써 있지 않은 플래너를 뒤적거린다.
그러면서 장탄식이 나온다.
'아, 오늘은 아무 생각도 없이 하루를 보낸 것인가?'
정말 하루라는 긴 시간을 보내면서 아무 생각도 안 했을까?

그렇다.
하루동안 생각 같은 생각을 하지 않고 보낸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 가운데 지혜를 얻지 못한 것이다.
꼭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음에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인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연해주 들녁에서_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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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후기

깨어살리/日步 2011. 4. 27. 22:34
설교 하기 전이 좋을까 설교 한 후가 좋을까?
어리석은 질문같지만...
설교 전이 더 좋은 것 같다.
왜?
설교 전에 긴장 하게 되고, 마무리가 잘 되지 않았을 때는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최소한 아직 말을 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말은 내 뱉으면 그만큼 나에게 되돌아 오는 것을 느낀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라는 지극히 사적인 통로를 통해서 전해지다 보니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들어갈 수 있고, 그러다보면 그 말의 질량이 낮아 질 때가 있다.
그렇게 말씀을 전하고 내여 오면 한 없이 허전함에 부끄러움까지 느끼게 된다.
아마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전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전한 전체 말씀이 아닌 마음에 와 닿은 일부분만을 기억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또 매 번 최선으로 준비되지 않는 설교를 보면서,
나 자신의 성실하지 못함, 실력 부족이 많이 느낀다.
물론 내가 할 수 없는 성령의 영역이 있음을 고백한다.
때때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나를 압도하는 경험도 하지만,
그것이 늘상 일어나는 체험은 아니다.
그래서 노력 없이 그런 요행만을 바랄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암튼 오늘은 설교 후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이런저런 넋두리를 해 본다.
다음 번에는 좀 더 최선을 다하고, 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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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회를 보면 어른스러움이 많이 결여된 모습들을 본다.
묵직하게 사회를 넓게 품는 사람, 세력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 사회의 어른스러움의 실종은 장남문화의 단절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장남의 문화란 책임감과 여유, 포용력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 대가족으로 살며 여러 대가 함께 살았을 때 형들이 그런 역할을 감당했다.
작은 아들은 작은 아들로 살지만, 그 작은 아들의 장남은 큰 아버지를 보면서 장남의 역할을 배운다.
그래서 장남의 문화는 단절되지 않고 가정에 사회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핵가족화되면서 작은 아들의 집에서 자라는 장남은 더이상 장남의 역할을 배울 곳이 없다.
그래서 차남인, 막내인 아버지의 약간 느슨한 책임감, 조급함, 이기적인 태도를 배우게 된다.
이로 인해 사회는 점점 빠르게 개인주의화된다. 

물론 모든 장남 문화가 다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좀 더 통큰 사고, 넓게 품는 가슴은 이 시대에 더 없이 소중한 덕목이 아닐까.

오늘 노회를 했다.
노회 중 우리 교단을 장자교단, 우리 노회를 장자노회라고 부르는 것을 여러번 들었다.
그렇다면 장자답게 책임있고, 통큰 마음과 헌신적인 모습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지금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인 '금권선거'에 대한 단호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여러 목사 장로님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용단을 내렸다.
총회에 노회총대를 보내지 않기로 한 것이다.
총대로 뽑히는 순간 금권선거에 빠져들고, 그렇게 총회에 가봐야 할 수 있는 일이 크지 않기에
아예 총대를 파송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뽑지도 않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 정도로 되겠느냐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지만,
몇몇 목사님들의 충정어린 호소는 가슴 뭉쿨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진작에 이런 결의를 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아 들지만,
그래도 뭔가 변화와 개혁을 위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에 고무적인 하루였다.

장남이든 아니든, 장자든 그렇지 않든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어르스러움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정말 이 사회가 너무 가벼워졌다.
대통령도 형이 국회의원이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 형님으로 모셨던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지
너무 가볍게 호들갑 떨듯히 일하는 것 같고, 언론은 진중한 고민이 없이 흥미만을 좇아 다니며
사람들의 정신을 산만하게 하고 있는 것이 오늘 한국의 자화상이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했다고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벌집을 만들어 버린다.
좀 기다려 줄 줄도 알고, 이해하려는 넓은 마음 더더욱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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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에 갔을 때, 한 카톨릭 복지시설에서 받은 책갈피이다.
추측하건데, 아마 프란치스코가 아닐까 싶다.
자연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그의 기행에 비추어 보면 저렇게 동물들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는 동물들이 곁에 있는 지 아는 지 모르는 지 하나님을 향한 기도 가운데 몰입되어 있다. 

오늘 새벽에도 기도회에 갔었다.
사순절이기도 하고, 그 중에서도 이 번 주간은 고난주간이고,  
올 해 동숭교회는 특별히 '내 생애 마지막 한 달' 캠페인을 진행 중이기도 하다.
나는 교역자니까 빠질 수 없다.
지난 주에 담임목사님께서 '내가 만약 목사가 아니면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고 하셨는데,
나도 그런 생각을 했고, 대답은 빠졌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왜냐면 난 새벽, 아침에 취약한 체질이기 때문이다.

암튼 기도를 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과 잘 통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 새벽에도 한 청년이 무릎을 꿇고는 큰 소리로 기도하는 바람에 약간 졸다가 번쩍 깼다.
그런데 그 기도 내용을 들으며 답답함을 느꼈다.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고,
쉴새 없이 뽑아 내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대개의  개신교 신자들의 기도가 이럴 거다.
문제는 기도를 할 때 너무 힘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나'가 너무 살아 있어서, 그 나를 만나시는 하나님이 들어갈 여백이 없는 것이다.
나의 의지, 이렇게 되게 해 달라는 요구, 계획 등을 내려 놓고,
그 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니는 지 잠잠히 기다리는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기다리다 보면 하나님을 느끼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마치 위의 책갈피의 그림처럼, 내가 어디에 있는 지, 무엇이 내 주변에 있는 지, 심지어 내가 누구인지도 잊고 기도로 빠져 드는 것 말이다.
자신을 비우고 기다리는 것이 전재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기도, 그래서 참 어렵다. 그런데 또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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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수련회 장소를 찾는 일이 너무 늦어 버렸다.
그래서 일단 기간이 비어있다고만 하면 열일 제쳐두고 달려가야 하는 형편이다.
지난 화요일에 두 곳을 다녀왔고, 오늘도 한 곳을 다녀왔다.
단양과 영월, 그리고 춘천을 찍었다.

오늘 갔던 곳은 춘천시 남산면 빙하리 한강변에 있는 '기화유스호스텔'이다.
이 곳은 처음이 아니라 2001년에 소년부 5,6학년 친구들과 2박3일을 보낸 곳이다.
지금 그 친구들은 대학생들이 다 되었다.
그 곳에 정말 10년 만에 다시 갈 수 있게 될 것 같아서 가슴 벅차다.
물론 수련시설로서 완전하진 않다.
물놀이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수영장도 없고, 한적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름 강에서 할 수 있는 몇 가지 놀이를 선택할 수 있고,
운동장이 바로 앞에 펼쳐져 있어서 좋다.
또 예전엔 없어서 불편했는데, 방마다 화장실과 샤워시설을 갖추어서 한결 좋아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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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처음 쓸 때는 버스정류장에 서서 내가 기다리는 버스 위치를 검색해 보며 어디쯤 오고 있는 지를 아는 것에 뿌듯해 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엔 폰을 꺼내서 검색해 보려고 하다가 멈추어 버린다. 귀찮아서이기도 하지만 뭐 꼭 그걸 검색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다. 그냥 기다려도 오고, 추적을 해 본다고 해서 더 빨리 오는 것도 아니니 의미 없는 소비적 행동같아서이다. 
그 시간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의 끝자락을 잡아서 이런 글 하나 더 쓸 수 있는 소재를 만들어 보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엔 핸드폰을 들여다 보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요금제를 바꿔야 할 판이다. 꼭 필요할 때만 살짝 터치할 뿐.
이제 초고속 인터넷은 보편화 되고, 핸드폰도 그냥 핸드폰이 아닌 스마트폰으로 진화하면서 우리의 정서는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볼거리에 영혼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더이상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 전하는 것을 보고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글을 쓰더라도 잠시 지나가는 감정을 단문으로 아주 짧게 그리고 무책임하게 쏟아놓을 뿐이다.

오늘 새벽에 담임목사님께서 주신 말씀 가운데 너무도 적절한 구절이 있었다. "속도를 낸다고 빨리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우리의 삶이 빨라졌다고들 하지만, 정작 자신을 진실되이 돌아보는 데도 느려졌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 역시 느려지고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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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깨어살리/日步 2010. 9. 10. 09:46
목요일마다 중학교 3학년 다섯반 종교수업을 한다.
뭐 딱히 종교적인 얘기보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그래서 별명이 도덕선생님이다.
크리스천이 아닌 친구들이 대다수인 곳에서 소위 교회 이야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요즘 교실 상황이 예전 같지 않아서 도통 말을 들으려는 태도들이 없기도 해서
이슬비에 옷 젖듯이 조금씩 내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영상과 팝송에 담아 조금씩 전달하고 있다.

암튼1
어제는 책 읽으라는 얘기를 살짝 했다.
중학교 때 책읽는 습관을 못 가지면 평생 어려울 거라고 하면서.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의 유익 중 하나가 '상상력'에 있다고 했다.
상상력이란 똑같은 상황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인데,
예를들어 곤경에 처하거나, 건강의 이상이 생겼을 때, 가족이나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할 때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행동하지 않고 그 너머를 볼 수 있게 한다는 얘기를 했다.

그런 얘기를 하고는 가만히 나를 생각해 봤다.
그러면, 나는 상상력이 있나?
내가 그래도 책을 좋아하고 나름 독서를 즐기는 편인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시야가 넓은 것 같지도 않고, 더더구나 상상력은 그리 있어 보이지 않는다.
기질이나 성격의 문제가 더 큰 건가?
어쩌면 그나마 책을 읽어서 이정도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암튼2
상상력이 있으면 좋겠다.
다양한 측면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
소설도 쓰고, 시도 쓰고.
무엇보다 더 멀고, 더 넓은 삶을 꿈꾸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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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양심의 문제다.
무슨 일을 해도 상관은 없는데,
그 일이 양심을 흔들 때는 더이상 지속할 수 없는 거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무엇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양심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은 특정 순간에 양심의 문제가 대두될 뿐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일이 양심과 관련이 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소위 말해 성직이라는 하는 것이다.

성직,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의 중간에 서 있는 거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확신하지 못하거나
그 세상에 대해 만나는 사람들과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을 때
그 일 가운데 계속 있을 때, 그것은 양심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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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며 사람들은 더 큰 것을 원한다.
그것이 명성이든, 권력이든, 소유든 말이다.
그러나 너무 큰 것은 그 크기만큼이나 파장을 많이 남긴다.
그 파장은 때로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부정적인 형태를 띤다.
예수님과 같은 영적 거인의 죽음은 그만큼 큰 파장으로 인류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누가 예수님과 같을 수 있을까?
인간이 더 많이 갖고, 더 알려지고, 더 커지면 그 것은 누군가의 것을 빼앗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가지도록 주신 것을 독점한 것이라 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책임을 슬쩍 그 사람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공정한 상황이 아니다.
이럴 때, 이 사람이 그 자리를 뜨게 되면 그 빈 자리는 너무 커서 도무지 채울 수 없게 된다.
인간 그 누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너무 관심의 집중을 받는 것은 좋지 않다.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만큼만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 서로에게 복이 아닐까.

최근 한 대형 교회의 원로목사님이 별세하셨다.
너무 많이 존경받고, 너무 많이 관심을 받던 터라 그 빈 자리가 걱정 되는 상황이다.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이 너무 많아서 그가 없음에 그 공허감을 누가 채워준단 말인가?
적당히 자신의 분량대로 조용히 살다 가는 것,
작은 아쉬움 남기고 가는 것이 좋겠다.
서로 공평하게 사는 것이 좋겠다.
적당히 존경을 나누고, 관심을 나누고, 힘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그런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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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모습이 가장 예쁘고 사랑스러울 때.
누구나 이런 때가 있었을 거다.
그러나 이젠 언제 그런 때가 있었는 지도 까맣게 잊고
뭔가를 해야만 사랑받는다며 치열한 일상을 살고 있다.
어쩌면 그리 노력하지 않아도 될지 모르는데도.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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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거금을 주고 구입한 오디오다.
TV가 없다보니 라디오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요사이는 MC들의 말이 너무 많아 집중하기가 어려워 대개 CD로 음악을 듣는다.
주로 클래식, 째즈, 영화음악을 듣는다.

위층에서 시끄럽다고 할까봐 볼륨을 높이지 못한다.
조용하게 나오다 높은 음이 나오면 달려와서 줄이기 바쁘다.
그런데 최근에 들은 얘기로 볼륨을 낮게 고정해두면 스피커가 그 수준에 굳어버린단다.
그래서 오늘은 볼륨을 높여 보려고 했는데 조금 올렸다가 또 낮추고 말았다.
너무 커서, 누군가에게 피해가 갈까봐, 싫은 소리 들을까봐...

오늘날 우리들이 주로 배우는 것이 이 것이 아닐까.
소리를 낮추는 것! 조용히 있는 것!
그래서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잊어버리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르고 살고 있다.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다.
그 영혼을 깨우는 곳이 학교이고 교회여야 할텐데 이젠 두 곳 모두 그 정체성을 버리기위해 경쟁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린 지금보다 더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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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찬양예배에 채에스더 목사라는 분이 오셨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의 삶을 복음으로 해석하는 분이셨다.

절절한 말씀들을 들을 수 있어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말미에 담임목사님이 건강의 비결이 뭐냐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건강검진 결과 60대이면서 40대의 몸이라는 소견을 들었다는 말씀과 함께
"머리가 비어 머리가 아프지 않고, 가슴이 비어 가슴이 아프지 않다."

명쾌하다!
머리 속에, 가슴 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담고 고통하고 있는 내가 비추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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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의 결핍을 과장하는 버릇이 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이 너무 많다고 투덜거린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한 일 아닌가.
볼 수 있고, 호흡할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배설할 수 있고,
아픔, 시원함, 더위, 추위, 서늘함 등 내외부의 변화들을 느낄 수 있는 것들,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걸어서, 차로 이동 할 수 있다는 것,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누리고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수없이 많은 누림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
너무 당연하다고 느껴서 일까?

9월 24일 일요일
당신이 경험하는 일과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과연 당신이 이처럼 환상적인 체험을 할 만한 자격이 있는가? 당신이 하느님이 어루만져 주실 만큼,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특별한 체험을 할 만큼 특별한 사람인가? 그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라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다. 당신이 이런 일을 누리고 경험할 만큼 한 일이 없다. (나웬이 러셀 슈와이카드의 글 인용) 마지막 일기, 헨리 나웬

자격이 없는 데도 받았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이다.
그 만큼의 은혜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왜 그렇게 더 달라고 부르짖는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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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 수업 시간에 ‘30살이 더 많은 사람으로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분’을 찾아서 심층인터뷰를 해 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교수님이 과제를 내 주셨다. 하지만 수강생 대부분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교수님은 그러면 ‘자신이 30년 후에 누군가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끔 하는 사람이 될 수는 있을까’를 질문하셨다. 30년 후에 누군가 나를 본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없을 것 같지만, 혹시 가능하다면 오늘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수업을 마치고 11시를 넘기는 시간까지 모여 앉아서 두 주 남은 행사 이야기와 또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대학원 동기들을 보면서 참 좋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거의 중간이니까 나를 중심으로 아래위로 10살이 훌쩍 넘으니 최고 20년도 더 차이나는 사이도 있다. 그런 연령 차이에다가 알게 된지 8개월 여 되는데도 얼마나 오누이 같고, 남매 같고 형제자매 같은지. 어쩌면 이렇게 만나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온 사람들처럼 말이다.

9월 19일 화요일
오늘 나는 우리 삶이 수많은 형태로 연결되어 왔다는 점에 새삼 놀랐다.
                                                                                                  (헨리 나우웬의 마지막 일기 50p)

헨리 나우웬을 만났던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닐까?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만약 헨리 나우웬 신부를 알게 되었고, 관계를 맺게 되었다면 그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지 않았을까? 뭐 그 사정도 잘 모르고, 인간 헨리 나우웬에 대해서도 자세히 모른다. 단지 그의 저작들을 통해 그의 생각을 엿보았을 뿐이다. 글이라는 것이 묘해서 그 사람을 다 보여주는 것 같으면서 교묘하게 진면목은 감출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헨리 나우웬이 관계를 지속하면서 그들과의 연결에 새삼 놀라는 대목에서 나는 뭘 그걸 가지고 그러나 하면서도 나에겐 그런 관계가 있는 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낮에는 친구가 목사 안수를 받는 곳에 다녀왔다. 내가 동기회에 회장 없는 총무라서 대표 격으로라도 가야했고, 또 평소 통화를 자주하고 지내는 편이었기에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고민없이 다녀왔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그 관계가 나에게 감동을 주는 것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놀랄만하지도 않다. 19년 지속된 관계지만.

오늘 만나는 사람들, 과연 그들과의 연결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삶을 정리하는 순간까지 나의 존재를 느끼게 해 줄 사람이 있을까?

나와 30년 차이나는 이들은 지금 초등학교 1학년들이다. 그들과 진솔한 만남을 가지려하면 최소한 10년 이상은 있어야 할 것 같고, 그 전에 20년, 아니 10년 차이라도 마음을 나누며 공존의 기쁨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한두 가지라도 서로에게서 담고 싶은 점들을 찾아 갈 수 있으면 더 좋겠고. 그래서 오늘 목사 안수를 받은 친구도, 또 같이 공부하는 동기들도, 교회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도 귀하고 소중하게 만나고 연결해 가야겠다. 언젠가 그들과 연결되어 있음에 새삼 깜짝 놀라기를 바라며.

92년에 한 동기의 결혼식을 마치고 참석했던 친구들이 사진을 찍었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 여섯 번째 친구가 오늘 안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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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플래너와 인연을 맺은 지가 벌써 8년이다.
그와 함께 '시간관리'라는 테마는 나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래서 교회에서 그 분야와 관련된 강의는 나의 몫이 된다.
그럼 오늘 나의 시간관리를 잘 하고 있나?
물론 강의에서 누차 강조해 말하지만 시간관리는 곧 사건관리다.
시간의 실체가 사건의 연속이라고 한다면 결국 나에게 쉼 없이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관리는 하는 것이 시간관리가 되는 것이니까.

나에겐 두 가지 시간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 앞에서의 시간과 나 혼자의 시간.
전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나의 시간이고, 후자는 그럴 필요 없는 나의 시간이다.

사람들을 의식하고 마주하는 사건들의 연속선은 진솔한 나의 시간일 수 없고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는 사건들의 연속선은 긴장이 없이 흘려버리는 시간이다.
그러니 둘 다 나의 가치와는 상반된 시간들인 것이다.
결국 생각과 반대로 나의 시간관리, 즉 사건관리는 좌절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좌절로부터 오는 것이 피로가 아닐까.

9월 11일 월요일

자고 싶으면 잘 시간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엄청난 피로감 속에 깨어나
몸을 일으키는 것은 그저 무슨 일인가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에 지독히 집착하는 편이다.
시간을 잘 활용하여 오래도록 염원해 온 계획을 실현하고 싶다.

의외로 헨리 나우웬의 시간은 피로감으로 가득하다.
시간을 본인이 원하는 일들로 채우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해 내야 하는 과정은 피로와의 싸움이다.
피로란 뭘까? 그의 인용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짐일까?

시간을 잘 보내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같은 소망이지만
그 시간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자신의 마음의 지향과 다른 일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인간들이 짐승들과 달리 피로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나의 이야기로 돌아온다면 나의 시간관리, 사건관리 역시 피곤하다.
다른 사람 살피랴 피곤하고, 나 스스로에게 절망하느라 피로에 시달린다.

마태복음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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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이 닥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내가 그렇다. 죽지 않는 것을 원하지는 않지만, 아파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몸 상태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지만 실은 병들었다고 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을 때가 더 많다고 해야 한다.

삶이 고통스럽지도, 불행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그러나 오늘 헨리 나웬의 일기를 읽으면서 내가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불행과 고통이 복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당하는 그 불행을 내가 만났을 때 뒷문이 아닌 앞문으로 당당히 맞을 수 있다면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을까?

헨리 나웬은 추기경인 조지프라는 사람이 암으로 입원해 있을 때 만났던 일들을 추억하며
그의 아픔을 넘어 죽음까지도 교회에 선물이 되겠다고 일면 가혹할 것 같은 말을 적고 있다.

9월 7일
나는 조지프와 함께 있으면서 그의 병과 언제 닥쳐올 수 있는 죽음이
오늘날 교회에 그가 선사하는 가장 큰 선물이 될 수도 있겠다는 깊은 확신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이 에이즈와 암, 기아와 전쟁과 폭력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조지프의 병과 죽음이 아파하는 모든 사람을 진실로 배려하는 사목이 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는 끔찍한 불행을 겪으실 때
그 고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 보셨기에 그 사건은 우리에게 복음이 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 나에게 일어나는 예기치 않은 불행도
그것을 맞이하는 나의 태도 여하에 따라 전혀 다른 반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너무도 조심스럽지만, 나의 어떤 불행도 하나님께 유익하게 바꾸어내는 삶으로 당당히 나가고 싶다.
나의 죽음도 유익하다는 찬양의 가사처럼...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믿음을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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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9월 2일 토요일
나는 단 하루도 나의 내념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능한 한 솔직하고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고서는 그냥 넘기지 않겠다고 자신과 약속했다.

헨리 나웬의 마지막 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한 번에 끝까지 읽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매일 한 글자씩 써 내려간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아
하루에 한 두 편씩을 읽으려고 한다.
그 여정을 통해 나를 돌아보며 성찰을 시도해 보고 싶어서이다.
어찌 내 주제에 헨리 나웬이라는 거목을 올려다 볼 수나 있을까 만은
성큼 성큼 앞장서 가는 아빠를 종종걸음으로 뒤쫓아 가는 아이처럼
그렇게 읽고 생각하고 기록을 남겨보고 싶다.

9월 3일 일요일
기도는 무의식과 의식을 이어주는 다리다.
어쩌면 나의 기도, 하느님 곁에 있으려는 나의 노력, 하느님과 친교를 맺는 나의 방식을 버리고
성령께서 내 안에서 자유로이 움직이시도록 나 자신을 내맡길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기도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저렇게 기록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기도의 상태를 '어둠과 메마름'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로부터 기도가 돌처럼 무감각해졌다고 하더라도 성령께서 이끄실 것임을 믿고 있었다.
그리곤 그 다음 날 일기에서는 사람들과의 관계인 우정을 기도에 비유한다.

9월 4일 월요일
기도하려는 나의 노력은 우정을 위한 노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도와 우정은 정화를 필요로 하며 덧없는 감정에 덜 의존하고
한결같이 헌신하는 일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리고 하는 말 '이 지혜를 따라잡으려면 참으로 많이 수양해야 한다.'
맙소사 이 영성의 대가가, 그래서 내가 쳐다 볼 수도 없을 것 같이 높은 경지에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수양해야 한단다.

나는 수양은커녕 기도에 무장해제를 하고 살고,
성령에게 맡기기는커녕 PC에 더 의존해서 삶을 연명하고 있으니 참 한심한 노릇이다.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고 살 수 있다니 참으로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 기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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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의 중요한 척도 중 하나가 '집중'이라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집중력이 나에게 많이 부족하다.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산만 그 자체이다.
요즘 들어 부쩍 더욱 많이 느낀다.

내 상황으로도 그렇고, 내 생각으로도 당연히 집중해야 할 곳이 있는데,
그대로 내버려 둔 채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을 때가 더 많다.

책은 다 읽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책 얘기만 들으면 일단 구입하려는 마음만 앞선다.

중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한 신령한(?) 전도사님 한 분이 오셨던 적이 있다.
이 분이 형과 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하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내가 산만하다는 거였다.
그 때는 그 말을 수긍할 수 없었다.
일단 기분이 많이 나빴는데, 그 이유는 내가 형보다 공부를 잘 했기 때문이다.
더 산만한데 어떻게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내 논리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전도사님의 진단(적절한 표현!)이 맞았던 것 같다.
형은 인생이 심플해서 하고자 하는 것을 한결같이 해 오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잘 못 살아왔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 보면 이리저리 흔들림이 더 많았던 것 같고,
특히 요사이 많이 산만한 모습을 보면서 더 그 말이 더 떠오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소망 중 하나가 뭔가를 집중해서 뚫는 삶을 사는 것 아닐까.
꼭 뭐를 뚫은 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일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내가 나의 인생을 살면서 더 이상 잘 할 수 없을 만큼 최선의 집중을 한 흔적을 갖고 싶다.

집중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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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기웃 하다가 드디어 트위터에 가입했다.
블로그를 하면서 또 트위터를 한다는 것이 산만해지는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냥!' 한 번 발 담가 보기로 했다.

우선 김주하, 이외수, 노회찬의 Follower가 되었고,
누가 내 글을 구독해 줄 진 몰라도
주로 간간히 떠오르는 아포리즘을 올려볼까 한다.
그리고 독서 후의 정리에 부담이 있었는데, 편한 마음으로 마음에 와닿은 구절들을 올려야겠다.

많이 지져대야징 twitter~
http://twitter.com/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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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님과 부교역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
나야 뭐 아직 비중도 없고, 내가 할 이야기도 제한적이어서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회의가 중반을 넘어서고 있을 때 '교육'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왔다.
내가 무슨 얘길를 했느냐를 떠나서 그런 자리에서의 나의 태도는 딱 두가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조용히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말을 하되 높은 톤으로 한다는 거다.

문젠 두 번째!
말을 하더라도 차분히 해야하고, 내용은 전후 맥락 가운데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하고,
앞뒤를 잘라내 버리니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잘 전해질 수가 없다.

왜 목소리가 커지고, 또 크든 작든 감정이 실리기까지 하는 걸까?
말에 감정이 실리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듣는 사람도 감정으로 듣게 된다.

예전부터 말하면서 감정을 실어서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는데
그래서 늘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을 했었는데,
지금 보면 내가 딱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게 하고 나면 그 전에 가만히 듣고 있었던 것도 제대로 경청하지 않은 것이 된다.
어쩌면 잘 듣는 것을 못했으니 내 말도 잘 전달하지 못하는 거다.

결국 마음의 문제로 귀결된다.
안정감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잘 듣지 못하고,
공격이 두려워 먼저 공격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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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영성적 삶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묶이지 않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

과거에 있었던 상처가 지금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고,
미래 일어날 일들이 나를 불안하게 하지 않도록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그 분을 바라보며
그 분이 아닌 것들에 의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아파하고 가슴 조렸는가?
하루도 한 순간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거기에 더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정작 나 자신을 버려두었다.
잘 하지 못할까봐, 실수할까봐, 사람들이 싫어할까봐, 버림받을까봐 움츠러들었다.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걸...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느낀다면 이 순간이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다.

-----------------

내일 나와 관련해서 한두 가지 결정될 일이 있다.
그 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 이래도 저래도...
중요한 것은 내가 그런 일들 가운데 일이 아닌 하나님을 볼 수 있느냐 이고,
최고의 순간은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나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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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신데, 나는 (소위) 하나님의 일을 보고 있다."

8박9일의 예수마음배움터 피정을 마치면서 나에게 던지는 말은 '어디 보니?'
하나님이 보시는 곳을 같이 볼 수 있으면 생활은 많이 달라진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두려움과 불안 휩싸여 고민할 일은 현저히 줄어들고,
오늘, 아니 지금 이 순간을 깊이 누리게 된다.
이 순간이라 함은 바로 지금 나의 마음에 대한 관심이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가 가을 하늘처럼 맑아지는 경험을 하는 거다.
'관상'이라는 것이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런지.

하나님, 이 순간 저의 마음을 말끔히 비울께요.
하나님께서 가득하시도록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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