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 해당되는 글 6건

신앙생활은 뭘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어떤 삶을 사느냐'는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을 삶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천한다는 것은 회개(반성)와 동시에 변화된 삶으로 나아가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믿음과 대응되는 반대개념이 아니라 믿음을 포함하는 더 넓은 의미이다.

누군가 무엇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가 무엇을 믿는 지를 알 수 없다.
과장해서 표현하며 하나님 조차도 그가 무엇을 믿는 지 아실 수 없다.
오로지 그가 삶 가운데서 어떤 결단을 하고 변화된 삶을 살고 있느냐로 알 수 있을 뿐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복잡한 질문들을 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예정론, 신정론, 삼위일체는 물론 영지주의 등 난해한 문제들을 가지고 와서 해결해 달라고,
그것이 풀리지 않아서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헛다리 짚은 거다.

예수 그리스도의 단순한 삶을 배우고,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성육신이니, 동정녀 탄생이니, 대속이니 하는 것들도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사랑을 나도 실천하고, 예수님의 버림을 나도 실천하고,
예수님의 모욕당함을 나도 당하면 된다.
"하루에 한 시간씩 하나님을 만나고,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는 마더 테레사의 말에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리스도인은 어떤 이론이나 신학이 옳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나를 부르셨기에 그를 좇아 가는 사람들이다.
믿음을 넘어서 삶으로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점이다.

하나님께서 묻지 않으실까?
"너 예수를 믿으며 살았냐?"가 아니라 "너 예수처럼 작은 자들을 사랑하며 살았냐?"라고.

믿음? 그건 의외로 간단하다.
우리의 구원의 문제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거면 충분한다.
그리고 '믿습니다'라는 외침과 조건부의 행위로 결정할 수 있다는 오만을 버리면 된다.


'깨어살리 > 돌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움을 멈추지 않기  (0) 2011.02.05
최고의 프로그램  (0) 2010.12.21
더이상 반복동작은 그만  (1) 2010.12.03
비판할 때는  (0) 2010.11.13
마음이 콩밭에 갔어요!  (1) 2010.10.06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바울서신을 오늘부터 한 장씩 읽어보려 한다. 물론 읽다보면 뛰어뛰엄 읽을 수도 있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겠지만, 암튼 바울이 쓴 서신의 연대적 순서에 따라 데살로니가 전서 부터 읽는다.

<바울서신의 대략적 집필 순서>
살전(50년), 살후(50년대 혹은1세기 말), 갈(54,55), 고전(54,55), 고후(55,56), 롬(56), 엡(60,80), 골(56-58,58-60), 빌(53-55, 56-58), 몬(불확실...), 딤전(60년대, 2세기초), 딛(60년대, 2세기초), 딤후(60년대, 2세기초)

바울서신01_살전 1:1-23

살전 1:9-10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아들이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는지...

과거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물리적 환경은 복잡했지만,
정서적으로는 명쾌했던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향하던 시선을 하나님으로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여러가지 방해와 저항 요소들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대상은 확실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우상이라는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내재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우상은 우리 생활 곳곳에 침투해 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만연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학벌에 대한 우상화
돈에 대한 우상화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우상화
인기에 대한 우상화

이런 것들이 오히려 더욱 우리의 삶과 정신을 좀 먹고 지배하고
급기야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함정에 빠뜨려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아들이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삶의 양태를 송두리체 바꾼 것을 의미한다.
우상이라는 것은 그 지역 토착 문화를 뜻하고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은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인데
그것을 버렸다는 것은 지역적 소속감의 박탈
혹은 가족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기꺼이 그 선택을 했다는 것은 실로 혁명적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부분에서 이 선교, 복음의 전파의 일이 사람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어찌 사람의 힘과 노력으로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성령이 감동하고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믿음 역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임에 분명하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합당한 자세이다.

더 나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지금까지 바라고(vision) 살던 것들에서 떠나
새로운 바라봄, 기다림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재림)이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지금 강한 힘으로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의 종국,
그것들 위에 최후 승자로 서실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것으로
이제는 그 이전의 것들에 연연하여 휘둘리지 않고 더 분명한 삶의 지표, 방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버리고, 돌아와 기다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까!

'말씀새김 > 바울서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2) 2010.03.12
살았든지 죽었든지 그리스도 안에  (0) 2010.02.27
거룩하라!  (0) 2010.02.24
간절히 보고자 함  (0) 2010.02.18
하나님을 기쁘시게  (0) 2010.02.17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그래서?

깨어살리/돌소리 2009. 11. 7. 10:52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안디옥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운 이유는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 때문에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이어가는 그들의 특별한 삶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을까.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만 올리고 또 올린다면
예수님이 땀과 눈물, 심지어 피까지 쏟으시며 사셨던 삶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단지 예수님은 저 만치 나의 기도를 하나님께 중개하는 그런 존재로 고정화 해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최고의 본을 보이신 우리의 모델이셨다.
우린 그 여정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고뇌와 결단을 배우고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사는 것과는 동떨어져
자신의 삶의 내용을 예수님으로 조금도 바꿀 마음이 없으면서
머리로 '알고 있는 예수님'을 되뇌이며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그건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신앙적 행위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교회에 출석하는 것 자체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구별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지칭하듯 입으로 예수를 말하는 예수쟁이 혹은 교인은 될 지언정
참다운 그리스도인, 예수 따르미는 아니다.

누군가 '제가 교회를 안 빠지고 잘 다녔고, 장로거든요!'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실까.

"그래서?"

'깨어살리 > 돌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약하면 힘을 쓴다.  (0) 2010.03.12
가죽나무  (0) 2010.02.02
불법으로 진보하다!  (1) 2009.10.05
노예들의 착각  (0) 2009.09.09
2050년 어느 날의 일기  (1) 2009.09.09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청소년부에서 아이들이 큐티를 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시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아이들 입에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신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이 두 문장이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시련을 주실까?
성경을 보면 그 대답을 얻을 수 있을까?
뭐 단련하신다고 할 수도 있고, 다 뜻이 있으셔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고,
좀 정성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약간은 미신적인 표현으로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봐도 인간들이 처한 상황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정답은 찾을 수 없다.

성경은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성경은 답안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인생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히 결론을 지을 수 없는 것이니
무 자르듯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다.
조급한 마음에 한 마디로 정의 할 수 없는 것인 것 같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정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에 빠진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 그리스도인 삶, 신앙이라는 것,
고통, 시련,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 간단하게 풀릴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성서는 오늘의 우리와 똑같이 그런 의문에 휩싸였던 이들의 긴 여정을 담고 있는 책이다.
굴곡 많은 인생을 살며 그만큼 큰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씨름했던 이야기들을 전하는 책이다.
그래서 그들은 크신 하나님의 일부분에 접촉한다. 
그들이 그려내는 하나님 이야기의 결론은 하나님에 대한 것은 모두 '알 수 없음'이고
그 분의 사랑만은 확실히 '알 수 있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모습을 추출해 낼 뿐이다.
시련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과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오늘 내가 그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서가 혹은 설교가 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으로 교인이 되고 교회에 오는 것도 문제일 수 있으나,
더 큰 문제는 그런 생각으로 설교하는 목회자들에게 있다.
자신이 접촉한 하나님의 모습을 절대화, 공식화해서
다수의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이미 하나님은 그 모습으로 계시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은 다른 모습,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나시기 때문이다.

어쩌면 각자가 갖고 있는 삶이라는 것은 일생, 아니 그 이상을 통해 풀어 가야할,
또는 그 과정을 통해 풀려질 '나의 과제'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의존하게 된다면 자신이 해결해야할 숙제를 엄마에게 부탁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꼴이 된다.
몇 번은 가능할 지 몰라도 그 습관이 계속된다면
그는 아마도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의 끄트머리만 좇으며 흉내내고,
연기하는 삶이 되고 말 것이다.

성서를 읽으며 그들의 부르짖음, 고뇌에 응답하셨던 하나님께서
나에게 또 어떻게 응답하실 지를 기대하는 삶,
그래서 늘 변화무쌍한 다양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인의 길을 가야한다.

'깨어살리 > 돌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아하는 데 이유는 없다.  (2) 2009.05.26
모두를 '나'로 여기는 마음!  (0) 2009.05.14
바보만들기  (0) 2009.04.09
졸업하지 못하는 사람들...  (1) 2009.04.07
정신이 들다!  (0) 2009.03.18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15

요즘 교회들이 사람들을 모으는데 열심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사람을 모아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사람이 되게 하기 보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들기위해 노력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 교회에 다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됨보다 교인됨을 좇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학교 교육이 그러하듯 제도교회의 '바보만들기'에 수해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교회와 목회자들의 기준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과 만남을 갖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인가?
물론 전자가 후자와 일치한다면 문제는 없지만
눈을 씻고 봐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까움이다.

교단이 나서서 정책으로 숫자를 정하고 전도하겠다고 하는데,
우연인지 의지적인 것인지 현정권에 대단히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도 웃지 못할 진실이다.
성공적으로 성도들을 시대적 문제들에서 떨어뜨려 놓고 있으니 말이다.
뭐 대단한 출정이나 하는듯 구호를 외치고 난리를 하니 이성은 둔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전도를 해서 사람들을 모아 교회를 채운다 한들
그들이 지금 교인들보다 더 낳아지리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하는' 사람들인 바리새인들의 이야기가 먼 이야기가 아니다.

'깨어살리 > 돌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두를 '나'로 여기는 마음!  (0) 2009.05.14
성경은 답안지가 아니다.  (2) 2009.05.11
졸업하지 못하는 사람들...  (1) 2009.04.07
정신이 들다!  (0) 2009.03.18
민족은 존재하는가?  (0) 2009.03.18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교회에 더 있으면 있을수록 더 확신이 드는 것이 있다.
교회에 그리스도인은 없고 교인만 있다는 것이다.
교회엔 그리스도인은 없고 목사, 장로, 권사, 집사만 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한 노력 또한 별로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목사의 모습, 장로의 모습, 권사의 모습, 집사의 모습에 충실하려 할 뿐이다.
자신이 집사이면 집사에 맞는 행동을
권사가 되면 권사의 행동을
장로가 되면 장로의 행동을
목사는 목사의 행동을 하기에 급급하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에 대한 고민보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장로로 보이느냐가 더 우선하는 것이다.

세상적 가치관을 조금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유지한 채
힘의 논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대로 뭔가 해 보려는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다.
배려도, 인내도, 사랑도 찾아보기 힘들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럴바엔 교회를 좀 쉬는 것이 더 낫지 않나.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으니 교회를 향한 비판도 당연해 보인다.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
외형으로 드러나는 교인의 모습에 비중을 두고 있으니 안타까움을 더한다.

지나친 비약일수도 있겠으나, 충분히 반성해 볼 일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나는 전도사 노릇에 집중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식과 삶에 집중하고 있는가?

블로그 이미지

dols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