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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담임 목사님께서 설교 하실 때 동시에 생각을 적어 보았다.
목사님은 이 본문이 적극적 사고 방식으로 활용되는데,
할 수 있다고 아무리 소리 질러도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오류가 있다고 하셨다.

맞다. 거기에 더해서...

여기서 모든 것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가난, 고통, 외로움을 뜻하는 것이다. 거꾸로 부함까지도.
                       나는 비천에 처할 줄로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2절

어쩌면 이 말은 바울의 믿음의 고백이자 결의하고 할 수 있다.
이 외침의 배경은 바로 in Christ이다.
그 분이 내 곁에, 나와 함꼐 하시기에 가능한 놀라운 삶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많다.
그 길로 가는 것에 극도의 두려움을 가지고 삶을 넘나들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
그러니 시대를 읽고 품을 수 없다.
반면에 이 쪽에서 저쪽으로, 저 쪽에서 이 쪽으로의 삶의 전환 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달음질 한다면
이 또한 왜곡된 삶이고, 그에게서 시대의 그릇을 기대할 수 없어 보인다.
이 쪽도, 저 쪽도 가능하고,
그 어느 쪽도 삶의 기반이 아닌 하나님 만이 삶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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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05_살전 4:11-5:11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서는 참으로 많은 문제(신학적 주제)들이 복합되어 있다.
죽음과 부활, 지옥과 천국, 심판과 형벌, 구원 등등등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진정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이 지금까지 의지하고 살았던 것들을 버리고
선택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다.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예수를 믿는 삶은 이전의 삶과의 단절을 의미했고,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작은 부분에서부터 큰 부분까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 어려움은 다른 말로 하면 고난이요 환난이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오늘의 삶의 힘겨움을 이길 수 있는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장 예수를 믿고 그 분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던 사람이
침상에서 숨이 넘어가려 할 때 재림을 보지 못하는 것에 절망할까?
또 살아있는 사람은 그 상황을 목격하며 재림의 지연에 대해서 다른 마음을 갖게 될까?
사도 바울은 최소한 데살로니가에 편지를 쓰면서는 자신의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임을 믿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당황해 하며 이 글을 쓰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먼저 가는 사람들, 또 정확히 언제 재림의 사건이 일어날 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의 삶을 안정시켜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의 강림 때 오히려 먼저 간 성도들이 일어나는 일이 있고,
그 후 살아있는 자들이 뒤를 따른다고 설득하고 있다.
정말 그럴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의 존재이다.
단순히 보장이나 보상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예수를 믿는 삶이 살든 죽든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빛의 아들임을 인식할 때(정신을 차릴 때) 내세의 삶 만이 아닌
오늘의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10절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죽었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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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04_살전 4:1-10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하기를 원하신다고
바울의 육성을 통해 다시금 전해지고 있다.
거룩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거룩은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는 순간,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진 상황을 뜻한다.
그렇기에 여기서 음란을 버리라는 것,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를 대할 줄 알라는 것,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는 것 등이 부정한 것이 되는 이유이다.
즉 거룩이 하나님을 존재를 느끼는 삶이라면
그 반대는 하나님이 배제된 삶이다.
거룩이 하나님이 충만한 삶이라면
부정한 것은 하나님 아닌 것에 중독된 삶이다.
음란으로 대표되는 몸을 쫓는 삶이 부정한 이유는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음란한 삶을 우상숭배와 연결시킨다.
왜냐면 이 역시 하나님 아닌 우상에 중독된 삶이기 때문이다.
몸을 우상화한 것이 음란이라는 얘기도 된다.

오늘날의 인류는 내재화된 우상숭배 가운데서 스스로를 속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겉으로 교회 잘 다니고 신앙생활의 모양을 잘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과거의 사람들에 비해 더 다양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중독되어 살아가고 있다.
만약 바울이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서신을 보낸다면
정말 다양한 것들을 예로 들으면 거룩하라고 애타는 마음을 전했을 것이다.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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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03_살전 3:1-13

3 마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바울 서신의 목적은 단지 글이 아니라 만남에 있었다.
구체적인 만남의 보조적인 역할로 서신을 쓴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바울의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보고싶어 하는 열망이 절절하다.
직접 보는 것의 차선으로 디모데를 보내고, 또 서신을 보내는 사도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며 읽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데살로니가 교회의 현재 상황을 표현하면 '환난'이다.
이는 이미 바울이 복음 전하면서 그들에게 닥칠 것임을 예언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 환난이 혹시나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에서 멀어지게 할까 노심초사한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건실히 자라도록 돕기위해 디모데를 보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디모데를 포함한 자신의 역할을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쉼없이 마음에 담아 두고, 살피며, 부족함을 보충해 주는 자리라는 얘기다.
바울이 이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얼마나 집중했는 지는 말하면 입만 아프다.

어쩌면 목회자, 때때로 교회 내의 중직자들이 바로 이 일을 위해 부르심을 입은 것 아닐까.
요즘 드는 생각은 이런 사람들이 너무 게으르고 말만 많다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는 열심이 뛰기도 하지만 불평이 가득한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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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02_살전 2:1-12

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받았으니 우리가 이와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는 곳을 보고, 하나님께서 하고 싶어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과 같아 지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삶의 가장 완전한 모범은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만큼 하나님과 가깝게 살았던 사람은 없다.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듯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어떤 종교적 행위, 의례, 소속(멤버십)에 있지 않은 것 같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만나시면서 견지하셨듯이
인간을 향한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갖고,
그들을 향해 기꺼이 목숨까지도 내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8절)
이 얼마나 예수님과 닮은 마음 자세인가?

간사한 아첨이나 실속을 채우는 탐심이 있을 수 없고(5절)
정당한 댓가 운운하며 자신의 몫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교회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이런 부분에 약점을 보이는 것 같다.
교회 안에 얼마나 간사한 아첨과 탐심이 많은지.
소위 종교인들, 먹고 사는 문제와 결부되기에 직업적으로 흐를 수도 있고,
조직 안에서 살다보면 외곡된 문화의 영향 아래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옳은 말을 하기보다는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성패를 좌우하지 않나.
칭찬과 간사한 아첨과의 경계는 어디일까.
또 자기 몫을 챙기지 못하면 바보라는 소리를 듣지 않나.
진리와 원칙을 지키려는 사람은 오히려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안전보장이 아닌 인간으로부터의 그것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닐지.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방식을 지켜나가기 위한 자기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을 치른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고,
예수님께서 그 길을 온전히 걸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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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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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을 오늘부터 한 장씩 읽어보려 한다. 물론 읽다보면 뛰어뛰엄 읽을 수도 있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겠지만, 암튼 바울이 쓴 서신의 연대적 순서에 따라 데살로니가 전서 부터 읽는다.

<바울서신의 대략적 집필 순서>
살전(50년), 살후(50년대 혹은1세기 말), 갈(54,55), 고전(54,55), 고후(55,56), 롬(56), 엡(60,80), 골(56-58,58-60), 빌(53-55, 56-58), 몬(불확실...), 딤전(60년대, 2세기초), 딛(60년대, 2세기초), 딤후(60년대, 2세기초)

바울서신01_살전 1:1-23

살전 1:9-10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아들이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는지...

과거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물리적 환경은 복잡했지만,
정서적으로는 명쾌했던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향하던 시선을 하나님으로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여러가지 방해와 저항 요소들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대상은 확실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우상이라는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내재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우상은 우리 생활 곳곳에 침투해 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만연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학벌에 대한 우상화
돈에 대한 우상화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우상화
인기에 대한 우상화

이런 것들이 오히려 더욱 우리의 삶과 정신을 좀 먹고 지배하고
급기야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함정에 빠뜨려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아들이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삶의 양태를 송두리체 바꾼 것을 의미한다.
우상이라는 것은 그 지역 토착 문화를 뜻하고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은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인데
그것을 버렸다는 것은 지역적 소속감의 박탈
혹은 가족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기꺼이 그 선택을 했다는 것은 실로 혁명적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부분에서 이 선교, 복음의 전파의 일이 사람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어찌 사람의 힘과 노력으로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성령이 감동하고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믿음 역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임에 분명하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합당한 자세이다.

더 나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지금까지 바라고(vision) 살던 것들에서 떠나
새로운 바라봄, 기다림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재림)이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지금 강한 힘으로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의 종국,
그것들 위에 최후 승자로 서실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것으로
이제는 그 이전의 것들에 연연하여 휘둘리지 않고 더 분명한 삶의 지표, 방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버리고, 돌아와 기다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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