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부에 최근 4주를 결석한 중1 여자 아이가 있어서 전화를 했다.
아이는 전화를 받지 않아서 엄마랑 통화를 하게됐는데,
엄마 얘기로는 아이가 교회가 가기 싫어해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가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를 정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든 생각은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엄마가 교회에 오는 것에 소위 '재미를 못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엄마의 그런 마음 상태가 아이에게 영향을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청소년들은 부모와 상관없이도 이런 저런 것들을 의심하고 거부할 수 있는 시기다.
그럴 때 부모의 삶의 태도는 중요한 방향타가 된다.
그런데 요즘 문제는 오늘의 청소년들의 부모들이 불안한 정서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뭐 꼭 신앙이 없다, 믿음이 없다는 식으로 얘기 할 것까지도 없다.
요사이 아이들의 부모 세대들이 맞닥드리고 있는 세상은 불확실 그 자체다.
그 가운데 신앙적 삶도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 자녀들에게 신앙적 일관성을 보여주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속은 어떠하든지 아이들에게 일관성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부모의 바른 자세일텐데 그것도 어려움에 처한 것이다.

아이가 교회에 가기 싫어한다는 얘기도 시작했지만
사실은 부모들이 교회에 오기 싫어하는 것이 문제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 때는 결국 부모들이 자신의 신앙을 재정립해야 하는 시기라고 하겠다.
지금까지 가지고온 신앙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온 몸으로 격동의 시기를 보낸 그 위 세대 부모들로부터 공짜로 받은 신앙의 유산이
이제 모두 소진되어 버린 상태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자기 신앙이 아닌 부모의 신앙으로 살아왔다는 얘기다.
이제 그것에 대해서 중심으로부터 큰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봐도 된다.

부모들에게 말하고 싶다.
이제 좀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을 돌아보라고,
그리고 나와 하나님에 대한 진지 질문을 던지라고 말이다.
아까도 그 분에게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어떻게 들으셨을 지 모르겠다.

안타까운 것은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있다.
멈추어 서면 도태될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또 자식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스스로 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향해 채찍질을 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어찌 할까?

요즘 범 교회적으로 신앙의 대잇기를 부르짓고 있는데,
대이어질 신앙의 실체가 무엇이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얘기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 부모들, 교회가 아래 세대에게 전해줄 것이 뭔지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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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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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목사님들이 언론에 등장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물론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기사들이 더 많다.
교회에서 세운 언론사를 자신의 자녀들에게 물려주기위해 노력한다는 얘기로,
수천억원을 들여 교회를 건축해야 하는 당위성을 주장하는 모습으로,
교단의 교권다툼으로 결국엔 타교단 장로인 변호사에게 수장 자리를 내 주는 치욕의 장면으로...

반면에 교회가 사회를 위한 선한 일을 하겠다는 취지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사회복지 엑스포 같은 것을 통해 교회의 사회봉사를 알리고,
서해안 기름유출이 있을 때는 교회사회봉사단을 꾸려서 섬김의 장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엔 교회들의 자산을 기반으로 은행을 만들겠다고 선언을 하기도 했다.
교회가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뭔가 이런 일들을 할 때 더이상 주목을 받지 못한다.
아마도 어른 목사님들은 이런 행동이 꽤나 인기를 끌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보면 소위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높다.
어떤 프로그램을 하면 교회 인근에 주민들에게 긍정적인 소문이 나고 선교가 일어날까를 고민한다.
그 산물이 카페, 도서관, 극장 등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런 쪽에 관심을 갖고 예산을 몰아 줘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물론 기존 교회의 원로들에게 이런 얘기가 잘 먹히지 않아서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지금의 교회들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을 보면서 의문이 든다.
소위 문화라는 이유들을 들어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의욕적으로 진행하고
그래서 사람들을 끌어 오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라는 생각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핵심이다.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겉으로 보여지는 화려함, 특별함으로 사람들을 끌어 들이지만
그들은 교회의 실체를 알고는 발걸음을 돌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결론은 잘 길러진 참 괜찮은 그리스도인 하나가 최고의 프로그램이라는 얘기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잘 살아갈 때 우리가 소원하는 최고의 선교가 일어나는 것이다.
밖으로 이렇다 저렇다 소리지르는 것을 멈추고
이젠 자신을 돌아보고, '나나 잘하자'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다.
내가 괜찮은 그리스도인이 되면 된다.
대사회적으로 교회의 리더십이 실추되었다고, 뭘 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노력을 돌려서 자신을 바로 세우는 쪽으로 가라는 얘기다.
결국 교회의 지도자들, 특히 앞선 목사님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길을 걷는다면 거의 모든 문제는 술술 풀릴 것이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무슨 프로그램을 할까'하는 공허한 소리들은 그만 하게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http://www.andotadao.org/chlight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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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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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들이 성도들을 무술도장에서 사범이 제자를 가르치듯 해야 합니다."
얼마전 어떤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나는 이 말을 교회에서도 도장처럼 승급, 승단을 시켜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요즘 교회는 성도들을 승급시키지 않는다.
한 5급 쯤 되면 거기에 멀물러 있게 만든다.
그래서 사범인 목사를 죽을 때까지 필요하게 만든다.
그들은 매번 동일한 동작을 반복한 뿐이다.
어느 누구와의 겨루기도 필요없다.
목사가 나서서 막아주고 지켜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승급하지 못한 성도들이 나이가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가 되어 교회의 중직자가 되는데,
배운 것이 없고, 볼 줄 아는 안목도 없고, 결정적으로 잘 성장하고 훈련된 신앙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그들에게 맞겨진 교회가 건강하게 운영될 수 없다.
많은 교회들이 치고받고 싸우는 것에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또 늘 같은 동작만 반복하던 성도들이 세상에 나갔을 때
매 주 듣는 것은 많아서 말도 잘하고, 머리 회전도 빠르지만
정작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알 지 못해 기독교 쭉정이로 살아간다.
그들이 교회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으니 욕을 먹지 않을 수 없다.

승단을 해서 수준이 올라가면 과거 반복동작들은 그의 몸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이미 몸에 밴 기본기이고, 그것을 응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높은 신앙의 여정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승급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이해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다른 모습을 취하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심지어 이단으로 몰아세우기까지 한다.

저급할 때는 각자의 도장의 특색들이 중요하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그 차이들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승급하지 못한 이들은 이 안목을 갖지 못하기에 남을 더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유단자가 된다는 것은 그 도장에 더이상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모든 것을 가르쳐주고, 훈련시켜서
도장(교회)을 내 보내야 한다.
또 다른 곳에서 그들이 누군가를 제자로 삼아서 가르치도록 말이다.
아니면 더 높은 경지로 이끌어줄 또다른 스승에게 배우러 가든지, 
스스로 기술을 더욱 연마하기위한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아쉽게도 지금 교회에서 승급은 금기사항이다.
위험한 일이라 여기고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따로 불러서 호되게 주의를 줘서 원위치로 돌려놔야 한다.
그래서 마치 매트릭스에서 레오를 찾아 되돌려 놓으려는 스미스 같은 역할이 교역자들의 일이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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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도심교회와 지역교회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도심교회는 과거에는 지역교회였지만 주거지가 외곽으로 옮겨가면서 자연스럽게 도시 가운데 남아 있는 교회를 가리키고, 지역교회는 당연히 주거지에 있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요즘 강하게 드는 물음은
'도심교회가 왜 부흥해야 하는가?'이다.
도심교회는 당연히 쇠퇴하여 문을 닫아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아니면 그 주변에 살고 있는 몇 안 되는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면 딱 좋다.
그런데 교회는 서울 한 복판에 있는데 성도들은 일산, 분당, 구리, 인천, 심지어 천안에서도 온다.
그러면서 여전히 교회가 더욱 커져야 한다는 강한 소명(스스로)에 사로잡혀 있다.

일단 도심교회를 포함한 일부 대형교회(주거 지역에 있으면서 그 지역을 넘어선)의 부흥은 여러가지 사회적 폐해를 낳고 있다(그냥 떠로르는 대로 적어 봄).
1. 먼 거리를 오가기 때문에 자동차를 이용하면서 매연(특히 이산화 탄소 배출)으로 인한 환경 오염을 가중시킨다. 물론 교통체증을 유발할 수도 있겠다.
2. 사는 곳과 교회가 다르기 때문에 지역 공동체 형성을 저해한다.
특히 아이들의 경우 다른 지역의 교회를 다니면서 생활권과 교회의 거리로 인해 단절 현상을 경험한다.
3. 시간적 한계로 인해 신앙생활에 있어서 더 깊은 여정으로 나가는 것을 어렵게 한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는 교회 유목민을 양산한다.
4. 먼 곳에 있는 교인들을 붙잡아 놓기 위해서 교회는 본질에 충실하기 보다는 프로그램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5. 먼 길 오가는 것은 자연스럽게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차 안에서 서로 간에 긍정적인 에너지 보다는 불화의 단초들을 제공하게 된다.
6. 교회도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에 맞춘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여유있게 편안하게 프로그램을 진행하지 못한다.


교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교회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애처롭다.
특히 도심교회는 그 지역의 독특함보다는 모두에게 맞추려고 애쓰고 있다.
교회는 그 지역의 특성에 맞게, 그 지역의 사람들과 호흡하는 장이 되어야 하는데
요즘 교회는 이런 저런 프로그램을 알리는 현수막 걸어 놓고 호객하는 백화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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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출31

6 분명히 나는 단 지파 사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이 브살렐과 함께 일하게 하겠다. 그리고 기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지혜를 더하여, 그들이 내가 너에게 명한 모든 것을 만들게 하겠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친히 쓰신 증거판을 주시는 장면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하시는 말씀 중에

두 기술자를 뽑아서 일을 맡기라고 하시는 부분에서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굳이 사람의 손을 빌려서 성막을 만드셔야만 했나?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실 곳이 생기는 것이었나?

성막이 만들어 지고, 제사장의 제도가 서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나?

함께 하실 수 없으셨나?

그 이전에 아브라함을 포함한 성조들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불완전한 것이었나?


어쩌면 이 제사제도가 세워지는 부분에 냄새가 납니다.

순수한 신앙의 발로라기보다는 종교주의자들의 손길이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제도와 절차를 통해 사람들을 길들여 자신들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이후 역사를 보더라도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혹은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관계가 진전되는 것을 별로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전 혹은 유사성전들로 인해 백성들은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할 뿐이다.

물론 제도라는 안전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안정되게 하나님 이야기가 전승되어 갈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안정이라는 것이 함정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안정을 가장 중심으로 놓다보면 하나님께서 전해 주셔서 만들어 놓은

지극히 과정적이고, 수단일 수밖에 벗는 것들이

목적이 되고 대상이 되어 버리는 일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홀리압과 브살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언약궤가 그 자체로 신통력을 지니기라도 한 듯이

사람들이 그 것은 부적으로 만들어 버려서 전쟁터에서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여기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분명히 발생합니다(삼상 4장).

그러니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성전을 무참히 무너트려 버리실 때

그 성전은 이미 백성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로 하나님께는 아무 의미도 없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소통)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일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성도들이 특정한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되는 것은 본말이 크게 전도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언약궤가 거룩합니까, 그것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거룩한 것입니까?

교회가 거룩합니까, 그 안에서 사람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이 거룩합니까?

사람의 손을 통해 세워지고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릴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만남을 통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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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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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향유네가 포도를 따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상주에 내려오면서 기대하고 고대했던 때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
전국에서 포도로 유명한 모동에 화학 농약(제초제, 살충제 등도 포함)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포도농사를 짓는 친구가 있기에.
다른 집의 포도밭과는 사뭇 다른 풍경을 친구의 포도밭에서 볼 수 있다.
친환경 농약들을 최대한 사용하지만 잎들이 병에 노출되어 점이 보이거나 말라 떨어져 있는 모습이다.
다른 밭을 보면 전혀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니 친구가 이런 저런 쉽지 않은 기간들을 보내며 결국 수확을 하게 되는 때란 정말 벅찬 감격의 때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수확을 시작한지 하루가 지나서 포도 수확에 합류 할 수 있게 됐다.
서 있기도 그렇고, 앉아서 하기도 그런 애매한 높이에 포도가 달려 있고,
무조건 따는 것이 아니라 봉투 아래쪽을 열어서 속을 확인하고 따야 하니 자세 잡기가 힘들었다.
허리를 숙이거나 컨테이너를 세워서 걸터앉은 상태에서 손을 머리 높이 보다 조금 높게 들고서는
봉투를 찢고 확인을 하고, 잘 익은 송이를 가위로 다르게 된다.
그러다 보니 팔, 목, 허리에서 신호가 온다.
친구는 조금만 익숙해지면 나아질 거란다.
그래 익숙해지면 한결 나아지겠지.
정말 시간이 지나면서 봉투를 찢는 것 하며, 자르는 것, 컨테이너에 담는 것에 익숙해졌다.
한마디로 요령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몸 곳곳이 얼얼하기는 했지만 내 몸에 맞는 적절한 자세를 잡아가니 무리가 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포도밭 주인들을 거의 따라가면서 포도를 딸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익숙해진다는 것, 능숙해 진다는 것은 어떤 일을 할 때 생산성을 높이는 것 같다.
숙련공을 우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이 말은 농사일을 한다든지, 기계를 다루는 일을 할 때는 맞는 말일 수 있겠지만,
사람과 관련된 일에서는 맞지 않는 말이 아닐까.
사람을 만나는 일에 익숙해 졌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상황에 맞는 태도를 능숙하게 취할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특히 교회에서 사역하게 될 때 이런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위험신호가 아닐까?
설교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찬양을 인도하는 일에 익숙해지고, 기도회를 인도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성도들을 만나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
과업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안에 본질인 하나님, 사람, 진정한 사랑과 관심은 자취를 감춰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한 명의 교회 기술자가 탄생한 것일 뿐이다.

익숙해진 그 것을 누리기보다는 본질에 대한 접근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자세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결국 어떤 행동 속에 감추어진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지...

2005. 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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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2

깨어살리/돌소리 2006. 10. 16. 19:28
오늘도 속리산을 넘어 괴산에 가서 노가다를 했다.
구조물을 철거한 옥상에 방수를 하고,
대문 옆에 흐르는 수로를 콘크리트로 덮는 작업을 했다.
지난번에는 혼자서 작업을 하는 것이라 내 페이스를 따라서 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집 주인 아저씨와 목수 한 분이 함께 하셔서 그 분들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중에는 마치 천 미터 달리기를 하고 들어왔을 때의 그런 상태까지 가게 되어
쪼그리고 앉아서 50대 아저씨들이 일하는 모습을 뻔히 보고 있을 때도 있었다.
내가 이렇게 허약한가 하면서도
그냥 서 있어도 힘든 땡볕아래서 장시간 긴 붓으로 방수액을 바르고,
이런 저런 것들을 들어 나르는 일은 힘이 안 들면 이상한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소위 말해 노가다로 잔뼈가 굵은 분들은 힘 조절을 하면서 넉넉하게 일을 해 가는 것 같다.
나 같은 초보 노가다 꾼은 어디에 어떻게 힘을 줘야하는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맬 수밖에 없었다.

강단에서 설교하면서 땀에 대해서나, 일에 대해서 너무 쉽게 말했던 것 같다.
어쩌면 ‘잘 모르니’ 함부로 말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인아저씨는
‘이런 일도 해 봐야 돼, 그래야 두려움이 없어지거든!’ 하셨다.
맞다.
어떤 일이든 한 번 몸으로 해보면 다음에 해야 할 때 작업에 대한 그림을 쉽게 그릴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들을 때 내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이런 분들과 함께 어울려 일하는데 장애가 많다.
이제껏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 왔기 때문일 거다.
교회에서 말하는 실천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전하는 것이 실천인가?
실천은 바로 이들의 말을 듣는 것,
그래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닐지.
전혀 다는 세계에 살면서 잠시 한 발짝 들여 놓았다가 서둘러 빼버리는 것이 실천은 아닐 것 같다.
교회 밖에 관심을 가져야하는데 교회 안으로도 충분히 정신이 없다.

오늘 함께 일했던 목수 아저씨는 장로님이라고 했다.
난 그 분에게 내가 전도사라고 말씀드리지 못했다.

2005.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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