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 본문이 계속 예레미야다.
'생명의 삶'이 예레미야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내내 어둡고, 결말 역시 마찬가지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이기 때문이다.

부활절 후 성령강림절까지 기쁨의 50일에 왜 이 본문을 선택했는지 의아스럽지만,
예레미야를 읽으며 선지자 혹은 예언자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설교준비를 하며 써 보았던 예언자에 대한 생각들이다.

예언자의 설교(예언)는 듣기 거북하다.
예언자의 호소는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지 말고 생각하라고 한다. 그래서...
예언자는 기존 권위에 도전한다.
예언자는 전통이나 율법의 길과 다르다.
예언자는 평화(잘 되고 있다고)를 말하지 않는다.
예언자는 다수의 편에 서지 않는다.
예언자는 자신이 한 말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예레미야의 슬픔).

예언자의 삶은 편하지 않다. 그래서...
예언자는 고통 가운데 있지, 편함이나 안락과는 거리가 멀다.
예언자는 온전히 하나님을 뜻을 담아내는 그릇이다(때때로 의지나 욕구가 없어 보인다).
예언자는 공과 사가 따로 없이 온전히 예언을 위해 사용된다(결혼, 가족생활, 의식주 등).

신학대학을 다닐 때 학교를 일러 '선지동산'이라고 했다.
다른 신학교에 가 보니 거기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정말 그 곳에서 선지자, 즉 예언자가 배출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 목회자들이 스스로 혼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말은 예언자처럼 하기도 하면서 대접은 제사장으로 받으려 한다.
신학교가 배출한 것은 선지자가 아니라 제사장 쪽인 것 같다.
그러니 교회가 공의와 정의에 편이 아닌 힘과 돈의 편을 드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다수의 힘 있는 이들의 편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맞다.
목회자들은 제사장의 자리에 서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예언자의 전통 위에 계셨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을 보면서 대제사장이라고도 하고,
예수님 덕분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으로 한 명 한 명을 제사장이라고 하긴 하지만...
예수님을 가르치고, 보여주어야 할 사람들이 스스로 예언자가 아닌 제사장의 반열에 서려 한다.

가톨릭에서 매번 제사(미사)를 드리고, 신부를 사제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넌센스인지 알 수 있다.
더구나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의 전통을 잇는다고 하면서 사제라고 하다니...
그러나 문제는 목사들이 제사장인줄 착각하는 것이다.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정죄하면서 그대로 내심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성도들 또한 제사장이 되어주기를 바라기까지 한다.
당연히 교회는 성전이 되고, 그 곳에서 들려지는 말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성전을 지키기 위한 말들, 예레미야를 적대했던 사람들이 했던 말과 유사한 말들이 전해진다.

아이러니 한 것은 지금 가톨릭의 사제들이 예언자 노릇을 하고,
개신교는 목회자들은 제사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거다.
웃지 않을 수 없다.

'깨어살리 > 돌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어야 하는데...  (0) 2010.09.03
수경스님이 남긴 '다시 길을 떠나며'  (0) 2010.06.14
나도 거부한다.  (0) 2010.05.06
도심교회는 부흥하지 말아야 한다.  (0) 2010.03.19
약하면 힘을 쓴다.  (0) 2010.03.12
블로그 이미지

dols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