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새김'에 해당되는 글 94건

막 1:40-45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후 예수님의 앞에 나병환자가 나타났다.

그의 말 “원하시면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은 이 말을 들으시고, 가타부타 말씀하지 않으시고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셨다.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불쌍히 여기셨다고 전하고 있다.


불쌍히 여기심,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생들을 향하신 마음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오셔서 뭘 더 바라셨을까?

기적을 일으키며 인기를 끌고 싶으셨던 것도,

뭔가 힘을 써서 누군가를 복종시키기를 원하신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오는 무언가가 필요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는 하나님으로 족하기에 그런 것들은 꺼리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냐?

심지어 자신에게도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집착한다.

유능한 사람이 되어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자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관심하지 않으신 것 같다.

그저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당신 자신의 존재로 충분하셨다.

만약 나병환자가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어떤 의사표현도 안 하고, 

그냥 예수님이 좋아서 머물고 있었다면 굳이 고치시지 않으셨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요청에 부응은 하시지만, 그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암튼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를 향해 깨끗하게 되라고 하셨고, 정말 깨끗하게 되었다.

그를 괴롭혔던, 그를 가두어두었던, 그를 붙잡고 있던, 그를 짓누르고 있던, 그를 지배하고 있던

나병이 씻은 듯이 나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의 두드러지는 대목은

병이 나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히 명하시는 장면이다.

앞에서 말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장면이다.

그저 율법대로 제사장에게 보이고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라는 것 뿐.

예수님의 관심은 그가 고침을 받고싶다고 여기는 그 위축된 마음에 대한 연민이었다.

그래서 그가 몸의 질병으로 인해 온전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 못한 것을 보시고 아픈 심정으로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삶에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음에 동정하신 것이다.

병에 걸려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고침을 받기를 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 병에 걸려 있는 것 자체가 그의 불완전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만족하며 자신의 인생을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한계성은 그 병이 나아야 한다고 생각 할 수밖에 없고,

예수님은 일단 병을 고쳐주신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병이 아니라 마음이다.

몸의 결핍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결핍이 더 중대함으로 깨닫고 그 여정으로 나가야 한다.

예수님은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피부적인 필요들에 대한 요청을 받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셨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인생들은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은 여전하다.


예수님께서 엄히 경고하시면서 

그 나은 사람이 소문을 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셨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과정의 무게만큼이나 기쁨 또한 컸을 것이기에

그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소리쳐 전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그렇게 번져 나갔다.

예수님께서 어떤 홍보원들을 통해서 선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막 1:35-39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예수님은 새벽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따라가 사람들이 찾는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 장면을 요약하면 이렇다.

새벽 시간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하고, 제자들은 사람들을 향하고 있었다고...


예수님은 아무리 일이 많고 피곤해도 하나님을 향하여 서는 것을 빼놓지 않으셨다.

이것은 당신의 사역을 하나님과의 연계성 속에서 이루어 가시려는 원칙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예수님을 더 예수님 되게 하는 과정이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의 사역에는 사람들의 어떠함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안전장치가 있었다는 얘기다.

안전장치라기보다는 하나님께 맞추어진 사역 매뉴얼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

반면 예수님을 좇아와서 사람들이 찾는다는 얘기를 하는,

진짜일 가능성이 높지만, 과장하여 '모든 사람이 찾'는다고 말하는 제자들의 태도는

전적으로 사람에게 맞추어진, 사람을 향한 사역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다는 소식을 예수님께 전하면서 뿌듯했을 것이고,

그렇게 인기있는 스승을 모시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자부심도 컸을 것이다.

인기라는 것은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자들은 아마도 그것을 예수님께 요구했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찾나이다’라는 말은 제자들의 그런 마음이 실린 표현이다.

사실 오늘날 사역자들의 태도와 같은 것이 아닐까?

모든 사람이 '나를' 찾는 상황을 선망하며, 어떻게 하면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을 지를 고민하고 연출하지 않나.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부름, 그들의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역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름, 하나님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사역을 위해 애쓰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찾는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시고

다시금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는 곳, '다른 가까운 마을'로 옮겨 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만약 한 곳에 터를 잡고 몰려오는 사람들을 만나는 사역을 한다면 

오늘날처럼 대형교회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역은 하나님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서선을 좇아 새로운 사람들을 찾아 나서신다.

이는 이른 새벽, 시간과 장소를 구별한 기도로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이 찾는 것에 부응하고, 그들의 시선을 만족시키려다가는 하나님의 시선을 놓치고 만다.

하나님의 부름, 하나님의 시선을 좇아가는 것이 먼저이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는 일이 많이 등장할까.

아마도 예수님을 찾은 이들 중에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고,

질병이 그 때 사람들이 직면한 가장 긴급한 문제였다는 것을 뜻한다. (1)

예수님은 당신 앞에 나타난 사람들을 앞에 두고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처럼 논쟁하지 않으셨다.

배가 고픈 사람이 오면 빵을 주고, 아픈 사람이 오면 낫게 해 주셨다.

골치 아프게 이러쿵저러쿵 따지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에게 맞추어 그 사람의 필요에 최선을 다해서 부응해 주신다.

당신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거슬리는 것이 된다고 할지라도 아랑곳 하지 않으셨다.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오신다면 성도들은 가장 먼저 무엇을 해 달라고 할까?

예수님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일단 사람들은 자신들의 피부적 문제들을 누군가 해결해 주기를 원한다.

자기에게 아픔이 있거나 힘들 때 다른 이들, 다른 거시적인 문제들에 마음 쓰는 것이 어려운지도 모른다. (2)

과거나 오늘이나 예수님 앞에 선 사람들의 앞선 요청은 ‘저를 좀 낫게 해 주세요’ 일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질병의 문제는 사회정의의 문제와도 닿아 있다. (3)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낫기를 구하는 병들을 보면 대개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이들,

소외된 이들에게서 주로 발병하는 것일 경우가 많다.

정서적으로 따돌림을 당함으로 인해 겪게 되는 어려움들인 경우도 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질병을 고쳐주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상한 마음(심령)에 대한 치유를 시도하신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단지 병을 낫게 해 주시는 분으로만 한정하면 곤란한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사역은 질병의 문제 너머에 있었다.

만약 예수님이 가신 길을 좇아가려는 제자라면 예수님이 어디를 바라보시고 나아가고 계신지를 알아야 한다. (4)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의식이 조금이라도 깨어나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닐까.

자신의 문제에만 갇혀 있지 말고, 예수님처럼 좀 더 차원 높은 삶의 이야기에 접속하기를 바라셨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제자들조차 그러지 못한 것 같다. 예수님 사후에나 가능했던 일들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예수님께서 해결하셔야 했던 당면과제들의 스케일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역 초반에서 질병을 고치는 것에 있었지만,

조금씩 오버랩 되면서 좀 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결국에는 하나님의 영역의 문제들에 직면하셨다.

질병에서 율법의 문제로, 또 다시 민족적 문제들로, 또 다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확장되었다.


예수님을 만나는 우리의 모습도 이 단계를 거치는 것 같다.

내 몸의 문제, 집안의 문제, 사회의 문제, 국가와 전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그런데 우리는 평~생 내 문제에만 매어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나 늘 자신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마가복음 1장에 머물러 병을 고침 받는 것이 전부인것처럼 여긴다.

그러면 더이상 예수님과의 동행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여기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냈다는 능력에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예수님을 쫓으면서 그 능력을 자신도 행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다.

마치 사마리아에서 베드로에게 능력을 돈으로 사고자했던 시몬처럼 말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손끝에서 나온 능력이 아니다.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 그 분의 존재이다.

그 예수님의 존재는 귀신의 말에서 드러난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 엘리야 같은 선지자, 세상의 왕, 아론 이전부터 있었던 대제사장 등등으로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하는 다소 부족한듯해 보이는 표현으로 예수님을 불렀다.

그런데 여기서 ‘거룩’이 무슨 의미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거룩하다는 것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완성이나 위생적으로 깨끗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가까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분이고, 하나님과 관계가 최고로 좋은 분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한 점도 흠잡을 곳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암흑같이 꽉 막힌 상태로 존재하는 귀신은 예수님을 쳐다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 분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이름만큼 위대한 이름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입에 올리지만,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뭐가 그리 많이 끼어있는 지.

되고 싶은 것, 얻고 싶은 것, 보여주고 싶은 것...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칭호는 요원하다.

신앙생활이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것들을 덜어내는 과정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거룩한 자’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질 것이다. 

예수님처럼!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나(존재)와 보이는 나(말, 태도, 일)와 같을 때, 그것을 권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사람들을 그것을 봤다.

다른 사람들이 말씀을 전할 때는 부분적으로 권위를 느끼고,

진리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들을 수는 있었지만 보지 못했는데

예수님을 통해서는 진리 자체를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권위 있는 자라는 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그들(서기관을 포함한 지도자들)은 모르는 것을 말하고,

예수님은 아는 것을 말씀하셨다.

소위 (종교)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 알지도 못하면서 참 많은 말을 한다.

끊임없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르기에 모든 것을 아는 이를 향해 촉각을 세워야 함이 당연하다.


인생들도 권위가 있기 위해서는 자신과 말(행동)의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 깨닫는 마음을 주시고, 열린 눈과 귀를 갖게 해 달라고 구해야 한다.

만약 자신이 높임을 받고, 때로 전하는 말씀이 능력 있게 전해진다면

그 권위는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더 겸허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더 유연한 도구가 되어야 하지 않나.

그것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여기며 오만하게 행동하는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예수님의 첫 번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예비 제자들은 한 치의 의심이나 주저함 없이 

자신들의 생업을 ‘버려 두고’서 예수님을 따라 나선다.

그들이 버려두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지금까지 자신들을 먹여살려온 것들, 자신들이 믿고 의지했던 것을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자세한 정황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일단 당시 유다의 남자들은

그 직업이나 사는 곳과 상관없이 종교적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채워지지 않는 큰 갈증을 느끼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갈증을 채워주겠다고 여러 종교지도자들이 앞에 서 있었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외형에 치우친 관례적인 종교행위에 머물거나

때로 자신들과는 너무 먼 차원, 삶과 괴리된 이상들이었을 것이다.

일단 그런 것을 제안하는 이들 자체가 너무 높거나 멀거나 어려웠다.

그런데 예수님은 찾아왔고, 보다 친근한 말씀들을 들려주셨고, 무엇보다 차별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물이나 던지며 고기를 잡던 하류인생들이었지만

그 속에 꿈틀대는 갈망을 위해 과감하게 지금까지의 삶은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격심사도 없고, 조건도 없이 그저 따라오라는 것처럼 단순하고 강력한 부름이 또 있을까.

최소한 이 부름의 순간에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 출세할 것이라는 생각은 안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의지해 살던 것들을 버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는 예수님을 발견한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훈련을 통해 양성된 사람들이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른 사람들이 제자가 된다는 것이다.

단지 부르실 때 지금까지의 삶을 등지고 일어설 수만 있으면 된다.

사람들은 버렸을 때 없는 것으로 인해 곤란을 겪을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걱정할 일이 아니다.

채우는 것은 본인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채우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성령의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못하기 때문에 비움을 겁내고

비우면 끝나는 줄 알고 조금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살아가는 형국이라고 할까.

알고 있는 것 많고, 가진 것 많고, 말 많은 사람들은 제자되기가 어렵다.

단순해지는 것, 예수님의 말씀처럼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 필요할 거 같다. 

그런 면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좆은 처음 제자들은 참 멋지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어느 누구나 믿음을 갖고 살고 있다.

무엇이든 믿는 구석이 있기에 하루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러나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서 삶의 내용은 확연히 달라진다.

지금 나는 무엇을 믿고 살고 있는가?

자신의 머리를 믿고 있나? 실력(능력)을 믿고 있나? 자신의 학벌과 인맥을 믿고 있나?

집안의 재력과 소유의 힘을 믿고 있나? 부모, 배우자나 자식을 믿고 있나?


사실 교회 밖을 예로 들 필요도 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질문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무엇을 믿고 살고 있냐고 하면, ‘예수’를 믿고 산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자신이 가진 소유와 자녀의 성취 같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얼마나 휘둘리면서 살고 있나?

휘둘린다는 표현이 좀 거슬릴 수 있겠는데, 그것은 곧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뜻이다.

성도들이 교회 왔을 때 표정이나 기도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원하는 대로 되면 업 되고, 

자신이 생각한 대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다운 되지 않나?

자식을 보면서도 자기 눈앞에서 좋은 성적을 얻고 좋은 대학을 가야하고, 

좋은 직장을 가야 안심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이 무엇을 믿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선포하며 그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역시 마찬 가지였다.

사람들은 믿음이 있었다.

화려한 성전과 성곽이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다고,

자신들이 통달해 있는 율법의 조항들을 지키는 것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 태도 가운데 정작 하나님께서 소외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으라’라는 선언은

그렇게 왜곡된 믿음에서 참 믿음으로 돌아서라는 요청이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 그 믿음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성전을 중심하고, 예루살렘을 주목하고, 율법에 몰입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부(성공)와 권력(정치적, 종교적)을 의지하는 삶에서 벗어나라는 선언이었다.


그러니 ‘복음을 믿으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한 파장으로 울려온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광야와 시험의 조합은 너무도 당연하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야곱이 집을 떠나 라반에게 갈 때 통과했던 그 곳이고,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끌려 갈 때 지나갔던 길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걸었던 학습장이었고,

다윗이 왕이 되기 위한 지루한 수업이 있었던 곳이고,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또 다시 돌아 올 때 지나는 길이었다.


광야는 무엇을 의미할까?

없음(無)을 뜻한다.

없는 곳이다.

자신을 지지해 줄 어떤 것도 없는 곳.

먹을 음식도 물도 없는 곳이다.

나를 위급한 상황에서 지켜줄 집도, 담장도 없다.

도와줄 도움의 손길도 없다.

일단 지지자들이 없다는 것이 광야는 희망과 소망의 땅이라기보다는 절망과 죽음의 땅이다.


인간이 세운 제도와 가족과 관계가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은 가려진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온전한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아니 부정할 것도 없다.

가진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그러나 그 사람이 예수님이셨다면 많이 달라진다.

능력이 있는 예수님은 그 광야를 손쉽게 생명의 땅으로 바꿀 수 있다.

광야에서 온전히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만나느냐

아니면 능력껏 자신의 필요를 채울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시험은 광야의 하나님이 되라는 것이다.

무를 유로 바꾸라는 유혹이다.

하나님 없이 살라는 유혹이다.


신앙생활은 광야로 나가는 것이다.

광야에서 아무것도 없기에 모든 것이 있음,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체험 할 수 있다.

(광야는 때때로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배신, 죽음, 질병, 고통 등으로. 그 때 시험 역시 찾아온다. 

시험의 다른 얼굴이 의심이다. 하나님이 나타나시지만 하나님으로 볼 수 없도록 한다.)


그러나 신앙의 여정은 우리로 하여금 광야에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어쩌면 광야에서 하나님의 실존 안에 거하는 삶을 지속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 또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격적, 자연스런 삶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오신 것처럼

그리스도인 역시 사람들 가운데로 돌아와야 한다.

그 곳에서 이젠 더 이상 거짓 하나님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그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삶을 살게 된다.

당연히 그의 삶은 작은 하나님, 작은 예수의 삶이 된다.


그러므로 정리해 보면 광야는 훈련의 장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위한 훈련의 장이다.

예수님께선 이 코스를 정말 모범적으로 통과하신다.

사람들 중엔 이런 과정을 거치며 종종 자신이 하나님인줄 오해 하고 자신의 몸을 세우려 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취는 남아 있지 않다. 오직 예수님 외에는...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에 대한 소개는 단 하나다. 그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다.
그 이상 부연하거나 추가적 사건이 있을 필요는 없다.
요한복음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조롱받았던 곳!
뭐 다윗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끼워 맞추기식 논리도 필요 없다.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는 것을 굳이 힘들여 풀어 놓을 필요도 없다.
아직 유아일 때 이집트 구경을 했다는 것도.
얼토당토하지 않은 동방의 박사들과 목자들까지 끌어들일 필요도 없다.
그저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사람이고,
그가 처음 드러난 것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부터다.

아마 요한도 처음에는 그가 자신이 얘기한 사람인지 몰랐을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예수의 정체가 밝혀졌을 것이다.
하늘로서 들리는 소리 역시 예수님만 듣는다.
얼마나 감격적인 자기 확신인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 기뻐하는 아들이라는 것!

어쩌면 모든 인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은 동일할 거다.
그러나 모두를 기뻐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당신께서 선택하신 유대인들조차 기뻐하시긴 어려워 보인다.
예수님께서 기뻐하는 아들이라는 것이 그분의 삶 전체를 분명하게 해준다.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삶이 어떠할지 알 수 있다는 얘기다.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살아낸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를 얼마나 무겁게 받으셨을까.
매일의 삶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고,
결국 십자가가 현실이 되는 상황 가운데서도 물러 서거나 피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고(존재),
더불어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행위).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세례 요한은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했다.
그럼 세례요한의 능력이 뭔가?
자신 뒤에 오시는 분의 능력은 또 뭘까?

세례 요한은 이미 자신의 능력을 보여줬다.
광야로 사람들을 끌어냈고, 그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획기적인 일을 실현했다.
그럼 예수님의 능력은 무엇인가?
가르침, 병고침 등의 기적? 영적 파워(카리스마)?
이런 것들로도 예수님은 그 누구와도 구별되는 능력의 차이를 보이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하나 더 있다.
바로 죽음의 능력이다.
온갖 고통을 다 받고 못박힌 십자가의 죽음,
그 길이 어떤 길임을 알고도 그것을 선택하는 그 모든 여정이 바로 예수님의 능력이다.
물론 세례요한 또한 헤롯 왕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예수님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예수의 능력은 뭘까?
우리가 기대하고 고대하는 예수의 능력은 뭘까?
전자에만 있지 않나? 기적과 같은.
먹을 것, 질병에서 나음 받고, 명예를 얻고, 힘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예수님의 최종적 능력은 죽음에 있었다.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그 능력,
죽기까지 사람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키가 된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인생들을 향한 사랑의 능력이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탁월한 능력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정답에 가깝다.
세례요한은 사랑이 아니라 정의에 가까웠고, 구별이나 분리였다.
광야로 나오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또 정죄하지 않았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막1:2-5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그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더라

세례 요한의 사역은 사람들을 성전 밖으로 불러낸 것이다.
(당시 요한과 같은 이들이 더 있었다.)
그 때까지 성전과 그 성전의 사람들인 제사장들,
그리고 그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중심의 종교생활을 했다.
그것이 자신들의 삶의 안녕을 지켜주는 방편이었다.
그런 그들을 성전과 예루살렘의 밖으로 끌어 낸 것이 요한이다.
의례에 묶여 있던 하나님과 진리를 향한 갈망에 자유를 준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상황을 혼란으로 여기고, 경계해야할 사태라고 보았을 것이다.
상당히 기분 나빴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활동은 굳은 종교를 유연하게 하는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는 것은 결국 들과 강에서 제사(속죄제, 화목제)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도 제사장이 연 어떤 야외 성소에서가 아닌 한 야인이 선 들녘과 강에서였다.
그러니 이 얼마나 예수님의 길을 잘 준비한 것인가?
예수님은 이후 당신 스스로를 성전보다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고,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성전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요한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던 말씀일 수도 있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1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여기서 시작이라는 것은 마가복음의 기록을 알리는 것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삶에 대한 엶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예수님을 통해서도 그렇고, 또 예수님 전에도 사실은 복음은 있었다.
하나님의 이름 그 이상의 복음이 또 있을까?
예수가 그 하나님을 최고로 담아내었기에 예수님의 이름이 복음을 대변하게 된 것이다.

시작이라는 것의 의미는 어쩌면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 말씀을 읽을 때 그 속에서 시작되는 복음의 역사!

그래서 우리는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역이 내 속에서 시작되고,
또 누군가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갈 때 그 곳, 그 사람에게 복음은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셨고, 끊임없이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아마 마가는 이 첫 문장을 쓰기위해 가장 고심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자신 안에서 그 순간 새롭게 떠오르는
예수님의 생생한 이야기들이 그로 하여금 시작의 마음을 갖게 한 것이다.

마가와 함께 복음을 시작하는 오늘!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담임 목사님께서 설교 하실 때 동시에 생각을 적어 보았다.
목사님은 이 본문이 적극적 사고 방식으로 활용되는데,
할 수 있다고 아무리 소리 질러도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오류가 있다고 하셨다.

맞다. 거기에 더해서...

여기서 모든 것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가난, 고통, 외로움을 뜻하는 것이다. 거꾸로 부함까지도.
                       나는 비천에 처할 줄로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2절

어쩌면 이 말은 바울의 믿음의 고백이자 결의하고 할 수 있다.
이 외침의 배경은 바로 in Christ이다.
그 분이 내 곁에, 나와 함꼐 하시기에 가능한 놀라운 삶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많다.
그 길로 가는 것에 극도의 두려움을 가지고 삶을 넘나들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
그러니 시대를 읽고 품을 수 없다.
반면에 이 쪽에서 저쪽으로, 저 쪽에서 이 쪽으로의 삶의 전환 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달음질 한다면
이 또한 왜곡된 삶이고, 그에게서 시대의 그릇을 기대할 수 없어 보인다.
이 쪽도, 저 쪽도 가능하고,
그 어느 쪽도 삶의 기반이 아닌 하나님 만이 삶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말씀새김 > 바울서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았든지 죽었든지 그리스도 안에  (0) 2010.02.27
거룩하라!  (0) 2010.02.24
간절히 보고자 함  (0) 2010.02.18
하나님을 기쁘시게  (0) 2010.02.17
버리고, 돌아와 기다리는 삶  (0) 2010.02.16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바울서신05_살전 4:11-5:11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서는 참으로 많은 문제(신학적 주제)들이 복합되어 있다.
죽음과 부활, 지옥과 천국, 심판과 형벌, 구원 등등등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진정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이 지금까지 의지하고 살았던 것들을 버리고
선택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다.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예수를 믿는 삶은 이전의 삶과의 단절을 의미했고,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작은 부분에서부터 큰 부분까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 어려움은 다른 말로 하면 고난이요 환난이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오늘의 삶의 힘겨움을 이길 수 있는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장 예수를 믿고 그 분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던 사람이
침상에서 숨이 넘어가려 할 때 재림을 보지 못하는 것에 절망할까?
또 살아있는 사람은 그 상황을 목격하며 재림의 지연에 대해서 다른 마음을 갖게 될까?
사도 바울은 최소한 데살로니가에 편지를 쓰면서는 자신의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임을 믿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당황해 하며 이 글을 쓰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먼저 가는 사람들, 또 정확히 언제 재림의 사건이 일어날 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의 삶을 안정시켜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의 강림 때 오히려 먼저 간 성도들이 일어나는 일이 있고,
그 후 살아있는 자들이 뒤를 따른다고 설득하고 있다.
정말 그럴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의 존재이다.
단순히 보장이나 보상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예수를 믿는 삶이 살든 죽든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빛의 아들임을 인식할 때(정신을 차릴 때) 내세의 삶 만이 아닌
오늘의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10절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죽었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말씀새김 > 바울서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2) 2010.03.12
거룩하라!  (0) 2010.02.24
간절히 보고자 함  (0) 2010.02.18
하나님을 기쁘시게  (0) 2010.02.17
버리고, 돌아와 기다리는 삶  (0) 2010.02.16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바울서신04_살전 4:1-10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하기를 원하신다고
바울의 육성을 통해 다시금 전해지고 있다.
거룩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거룩은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는 순간,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진 상황을 뜻한다.
그렇기에 여기서 음란을 버리라는 것,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를 대할 줄 알라는 것,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는 것 등이 부정한 것이 되는 이유이다.
즉 거룩이 하나님을 존재를 느끼는 삶이라면
그 반대는 하나님이 배제된 삶이다.
거룩이 하나님이 충만한 삶이라면
부정한 것은 하나님 아닌 것에 중독된 삶이다.
음란으로 대표되는 몸을 쫓는 삶이 부정한 이유는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음란한 삶을 우상숭배와 연결시킨다.
왜냐면 이 역시 하나님 아닌 우상에 중독된 삶이기 때문이다.
몸을 우상화한 것이 음란이라는 얘기도 된다.

오늘날의 인류는 내재화된 우상숭배 가운데서 스스로를 속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겉으로 교회 잘 다니고 신앙생활의 모양을 잘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과거의 사람들에 비해 더 다양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중독되어 살아가고 있다.
만약 바울이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서신을 보낸다면
정말 다양한 것들을 예로 들으면 거룩하라고 애타는 마음을 전했을 것이다.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말씀새김 > 바울서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2) 2010.03.12
살았든지 죽었든지 그리스도 안에  (0) 2010.02.27
간절히 보고자 함  (0) 2010.02.18
하나님을 기쁘시게  (0) 2010.02.17
버리고, 돌아와 기다리는 삶  (0) 2010.02.16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바울서신03_살전 3:1-13

3 마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바울 서신의 목적은 단지 글이 아니라 만남에 있었다.
구체적인 만남의 보조적인 역할로 서신을 쓴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바울의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보고싶어 하는 열망이 절절하다.
직접 보는 것의 차선으로 디모데를 보내고, 또 서신을 보내는 사도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며 읽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데살로니가 교회의 현재 상황을 표현하면 '환난'이다.
이는 이미 바울이 복음 전하면서 그들에게 닥칠 것임을 예언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 환난이 혹시나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에서 멀어지게 할까 노심초사한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건실히 자라도록 돕기위해 디모데를 보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디모데를 포함한 자신의 역할을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쉼없이 마음에 담아 두고, 살피며, 부족함을 보충해 주는 자리라는 얘기다.
바울이 이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얼마나 집중했는 지는 말하면 입만 아프다.

어쩌면 목회자, 때때로 교회 내의 중직자들이 바로 이 일을 위해 부르심을 입은 것 아닐까.
요즘 드는 생각은 이런 사람들이 너무 게으르고 말만 많다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는 열심이 뛰기도 하지만 불평이 가득한 경우도 많다.

'말씀새김 > 바울서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2) 2010.03.12
살았든지 죽었든지 그리스도 안에  (0) 2010.02.27
거룩하라!  (0) 2010.02.24
하나님을 기쁘시게  (0) 2010.02.17
버리고, 돌아와 기다리는 삶  (0) 2010.02.16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바울서신02_살전 2:1-12

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받았으니 우리가 이와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는 곳을 보고, 하나님께서 하고 싶어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과 같아 지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삶의 가장 완전한 모범은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만큼 하나님과 가깝게 살았던 사람은 없다.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듯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어떤 종교적 행위, 의례, 소속(멤버십)에 있지 않은 것 같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만나시면서 견지하셨듯이
인간을 향한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갖고,
그들을 향해 기꺼이 목숨까지도 내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8절)
이 얼마나 예수님과 닮은 마음 자세인가?

간사한 아첨이나 실속을 채우는 탐심이 있을 수 없고(5절)
정당한 댓가 운운하며 자신의 몫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교회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이런 부분에 약점을 보이는 것 같다.
교회 안에 얼마나 간사한 아첨과 탐심이 많은지.
소위 종교인들, 먹고 사는 문제와 결부되기에 직업적으로 흐를 수도 있고,
조직 안에서 살다보면 외곡된 문화의 영향 아래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옳은 말을 하기보다는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성패를 좌우하지 않나.
칭찬과 간사한 아첨과의 경계는 어디일까.
또 자기 몫을 챙기지 못하면 바보라는 소리를 듣지 않나.
진리와 원칙을 지키려는 사람은 오히려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안전보장이 아닌 인간으로부터의 그것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닐지.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방식을 지켜나가기 위한 자기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을 치른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고,
예수님께서 그 길을 온전히 걸으신 것이다.

'말씀새김 > 바울서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2) 2010.03.12
살았든지 죽었든지 그리스도 안에  (0) 2010.02.27
거룩하라!  (0) 2010.02.24
간절히 보고자 함  (0) 2010.02.18
버리고, 돌아와 기다리는 삶  (0) 2010.02.16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바울서신을 오늘부터 한 장씩 읽어보려 한다. 물론 읽다보면 뛰어뛰엄 읽을 수도 있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겠지만, 암튼 바울이 쓴 서신의 연대적 순서에 따라 데살로니가 전서 부터 읽는다.

<바울서신의 대략적 집필 순서>
살전(50년), 살후(50년대 혹은1세기 말), 갈(54,55), 고전(54,55), 고후(55,56), 롬(56), 엡(60,80), 골(56-58,58-60), 빌(53-55, 56-58), 몬(불확실...), 딤전(60년대, 2세기초), 딛(60년대, 2세기초), 딤후(60년대, 2세기초)

바울서신01_살전 1:1-23

살전 1:9-10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아들이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는지...

과거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물리적 환경은 복잡했지만,
정서적으로는 명쾌했던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향하던 시선을 하나님으로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여러가지 방해와 저항 요소들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대상은 확실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우상이라는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내재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우상은 우리 생활 곳곳에 침투해 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만연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학벌에 대한 우상화
돈에 대한 우상화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우상화
인기에 대한 우상화

이런 것들이 오히려 더욱 우리의 삶과 정신을 좀 먹고 지배하고
급기야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함정에 빠뜨려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아들이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삶의 양태를 송두리체 바꾼 것을 의미한다.
우상이라는 것은 그 지역 토착 문화를 뜻하고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은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인데
그것을 버렸다는 것은 지역적 소속감의 박탈
혹은 가족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기꺼이 그 선택을 했다는 것은 실로 혁명적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부분에서 이 선교, 복음의 전파의 일이 사람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어찌 사람의 힘과 노력으로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성령이 감동하고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믿음 역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임에 분명하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합당한 자세이다.

더 나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지금까지 바라고(vision) 살던 것들에서 떠나
새로운 바라봄, 기다림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재림)이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지금 강한 힘으로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의 종국,
그것들 위에 최후 승자로 서실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것으로
이제는 그 이전의 것들에 연연하여 휘둘리지 않고 더 분명한 삶의 지표, 방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버리고, 돌아와 기다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까!

'말씀새김 > 바울서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2) 2010.03.12
살았든지 죽었든지 그리스도 안에  (0) 2010.02.27
거룩하라!  (0) 2010.02.24
간절히 보고자 함  (0) 2010.02.18
하나님을 기쁘시게  (0) 2010.02.17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장자 레위인
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3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으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인들이 제사장을 시종하는 역할을 합니다.
언뜻 보면 아론의 후손이 아닌 레위인들은 스스로를 작게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딱히 군사적인 역할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기업(땅)도 변변히 가질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레위인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를 안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앞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을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로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열번째 재앙이었던 처음난 것들(장자)의 죽음에서 목숨을 부지 하게 하셨기에
모든 처음 난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모든 집에서 장자를 내 놓도록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대신해서 레위인들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레위인들은 단지 한 지파, 때로는 소외된 사람들의 신분이 아닌
이스라엘 전체의 장자를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집에서 장자들이 소중하듯이 레위인들은 모든 백성들에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역시 한 지파로 이루어진 집단이 성막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닌
모든 지파로부터 온 소중한 자들이 그 역할을 감당한다는 뜻에서 더욱 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성들이 해야할 일을 대신해서 하는 것이니 백성들은 레위인들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 것입니다.
레위인들이 백성들 앞에 어른이 될 수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위인들의 신분을 절묘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 같습니다.
불평할 수 없고, 무시당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만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되었지만, 그 하나님의 손에 의해 제사장들에게 맡겨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로 자신의 역할을 맞추어 갈 때 최고의 사람들이 바로 레위인들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위치 정하기
2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자기의 진영에 군기와 자기의 조상의 가문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치라

뭐든 흐트러져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군가에 의해 정돈되고 질서를 잡을 때 의미를 갖게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약하지만 대열을 갖추게 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삽겹줄이 더 단단하다는 잠언의 말씀 역시 여기에 합당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대오를 갖추는 것입니다.

자리를 정하고, 순서를 정하고, 위계를 정합니다.
이런 과정은 상호간에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파별로 위치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성막이 있고, 레위인들의 거처가 있었습니다.
이동 할 때에도 성막을 중심으로 해서 앞 뒤로 배치됩니다.
이렇게 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제의 그들이 아닙니다. 
각각의 모습은 동일하지만 좀 더 시야를 넓게 해서 봤을 때는 그들의 위치가 정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와 관련된 정돈을 통해 하나님과 관련된 정신적 안전을 얻을 수 있었다면
군제를 개편함으로 해서 물리적 안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물리적 안전의 핵심 역시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든 그 중심이 무너질 때 몸의 안전 역시 담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런 과정으로 통해 아말렉 같은 도적들에게 기습을 당하는 일은 다시 발생하지 않게 됐습니다.

장소를 정하고, 시간을 정하고, 정해진 순서를 따른다는 것이 때로 갑갑하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개성 없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 것에 대한 반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따르는 이들이 모인다는 것, 그리고 한 분 하나님을 중심으로한 삶을 생각하며
정해진 순서를 따를 때, 그것은 큰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적 삶이 훈련된 사람이 또한 개인적인 영성을 지켜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과 살아가는 법을 아는 사람이 또한 하나님과 사는 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하나님이 이끄시는 40년은 레위기에서 끝나지 않고 민수기로 이어진다.
실은 레위기까 끝나면서 그들의 광야 생활은 겨우 1년을 조금 넘긴 것 뿐이다.
그러니 앞으로 39년이 남았다고 보면 된다.
레위기에서만 멈춘다면 '하나님이 이끄는 1년'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최소한 민수기를 지나야 40년의 대부분을 거치는 거다.
다시 시작~

책임 나누기
민 1: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이끄셔서 광야로 나왔고, 틀림없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일들만으로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실은 변함이 없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날이 언제이냐의 문제만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막이 완성된 시점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을 계수하게 하십니다.

왜 백성들의 숫자를 세도록 하신 것일까요?
그냥 백성들의 숫자가 궁금하셨을까요?
혹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신들을 방어하도록 하려 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백성들의 수로 힘을 과시하도록 하려 하신 것일까요?
뭐 그럴 수도 있겠으나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광야 가운데서 백성들을 계수하게 하신 것은 
각 지파, 또 전체 이스라엘의 그 수에 걸맞는 책임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함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책임의 크기만큼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인구 계수와 다른 점입니다.
다윗은 인구 계수를 통해 이스라엘의 힘의 크기를 알고 싶었고, 또 그 세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도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레위지파와 또 그에 속한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직임들을 맡아 갈 때
다른 지파의 백성들은 소외된 듯한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의 적당한 위치를 주시기위한 기초작업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시고 있고, 레위인들이 할 일을 받았듯
이제 이스라엘의 백성들 각자도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한 책임을 나누기를 하고 있습니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하나님이 이끄는 40년이라는 거창한 모토를 걸고 출애굽기를 출발했는데
이제 레위기라는 산을 넘기에 이르렀다.
사실 지난해 12월 초에 읽고 써두긴 했는데,
마무리를 못해 차일피일 미루다 마침표를 찍기로 굳은 결심을 하고 다시 왔다(떠났던 것 같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
레27장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28 어떤 사람이나 자기 소유 중에서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들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29 온전히 바쳐진 그 사람은 다시 무르지도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사람이 자신을 대신해 짐승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인 번제로 시작한 레위기는
사람이 자신을 드리기로 서원하고 그 값을 드리는 것에 대한 규정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레위기를 정의하자면 제사장 매뉴얼이고, 거룩한 삶을 위한 교과서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약속의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약속, 그것은 생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의 땅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고,
역시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으로 인해 죽어 가는 땅으로 이끄셔서
이들을 통해 그 땅을 생명의 땅, 살림으로 일구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녹아 있는 것입니다.
특히 레위기는 백성들은 물론 제사장들이 철저히 익혀 틀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이기에 어그러짐이 있을 때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율법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 짧은 구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서원할 때 이 율법에 적용을 받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서원하였다면, 바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제사를 드리려고 결심했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안다면 마음 내키는 대로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로 결심했으면서 갈팡질팡 우왕좌왕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출발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위해 일어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맺은 약속,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기본을 너무도 쉽게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레위기를 읽는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에 대한 각오를 새롭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최우선 목적
레26장
40 그들이 나를 거스른 잘못으로 자기의 죄악과 그들의 조상의 죄악을 자복하고 또 그들이 내게 대항하므로 41 나도 그들에게 대항하여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 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받지 아니한 그들의 마음이 낮아져서 그들의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42 내가 야곱과 맺은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하리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의 발단은 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에게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신실함을 놓지 않는 쪽은 늘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광야에 들어서 한 해를 보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약속 파기의 가능성을 말씀하시며 경고하십니다.
경고는 미움의 표현이 아닌 사랑의 표현입니다.
죽이려고 하심이 아닌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현재 자신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크게 봅니다.
그래서 그 잣대로 상황을 판단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차원에서 그 상황을 보신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이미 오래전 해묵은 것이라 할 수도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언약을 이행하시기 위해
안간힘을 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죄악과 어떤 해괴한 짓을 해도 그들이 돌이키기만 한다면
조상들과 맺은 언약은 유효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대원칙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스스로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때에도
하나님께는 가능성이요, 소망의 싹은 변함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찾고 만나시는 최우선 목적은 그들을 살리시고 복주시기위한,
함께함으로 기쁨을 나누고자 하시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정기 교육 시간
레25장
20 만일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21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22 너희가 여덟째 해에는 파종하려니와 묵은 소출을 먹을 것이며 아홉째 해에 그 땅의 소출이 들어오기까지 너희는 묵은 것을 먹으리라

이스라엘을 설명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되는, 아니 가장 우선적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들의 삶의 순환이 안식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나아가 인생의 순환까지도 안식일이 확장된 안식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한 명 한 명의 쉼의 문제에 관심이 있으셨듯이
땅의 쉼에도 역시 관심을 가지고 있으셨습니다.
땅의 쉼이란 결국 그 땅에 뿌리를 박고 생명활동을 이어가는 식물들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뽑아내면서 그려 가시는 이상적 공동체 안에
단지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땅의 쉼과 나무와 식물들의 쉼이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저주받은 땅이 하나님의 복 주심에 의해 풍성한 소출을 내지만
그 땅이 한 없이 모든 것을 내 놓을 수 있는 무한한 창고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땅의 생명력을 통해 무상으로 먹거리를 얻었으니
7년에 한 번 쉬도록 하여 재충전의 시간을 주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농부들에게 있어서 1년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업이 아닌 목축업을 하는 민족이었기에 처음부터 길을 잘 들이면 되는 문제이긴 합니다.
그래도 막상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20절의 말씀을 미리 하시면서 걱정하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 곧 믿음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을 나올 때 자신들의 가능성이나 소망을 보고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왔듯이
장차 들어가게 될 가나안에서의 삶 역시 하나님에 대한 믿음 가운데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땅의 안식은 6년 동안 일하여 먹고 살지만
단지 그들의 땀 흘림 만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교육 시간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주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땀 흘려 수고 하여 얻는 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사랑의 처방
레24장
10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의 어머니가 이스라엘 여인이요 그의 아버지는 애굽 사람인 어떤 사람이 나가서 한 이스라엘 사람과 진영 중에서 싸우다가 11 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며 저주하므로 무리가 끌고 모세에게로 가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슬르밋이요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었더라 

레위기는 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시는 제사와 제사장과 관련된 율법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사건은 거의 없습니다.
그 희소한 사건에 두드러지게 등장한 것이 두 번의 죽음의 사건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직접 아론의 두 아들을 죽이신 것이고(10장),
두 번째는 레위기 24장에 등장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사건입니다.
그의 죽음의 이유는 하나님(신성)모독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을 모독한 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과
그의 출생 배경을 통해 광야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다른 피를 가진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중요한 고비마다 불만 세력으로 활동했을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출애굽 관련 영화를 보면 다양한 종족들이 함께 나오는 것을 볼 수 있고,
그들을 중심으로 모세를 대항한 폭동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힘들 때마다 이들은 순수 이스라엘의 후손들보다 애굽을 더 추억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광야 40년이라는 형벌은 이런 불순한 동기들을 씻어내기 위해서도 필요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합니다.

아무튼 하나님을 모독한 것은 하나님의 귀에 들렸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이지만
그 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들렸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로 부각됩니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함부로 오르내리게 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도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질 수 있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존재와 상관없이 백성들의 의식 속에 하나님 상이 격하되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향한 자세 또한 흐트러질 것이 뻔합니다.

한 번 잘못할 것이니 그의 목숨을 가엽게 보고 용서해 줄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이제 겨우 걸음마를 땐 이스라엘 공동체에겐 그런 일을 감당할 충분한 내공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 아프지만 그를 돌로 쳐 죽이는 극약처방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가지고 하나님이 잔인한 신이니 뭐니 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수한 한 명의 인권도 소중히 여기시지만, 전체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시기 위한 선택을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주의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그의 머리에 안수를 할 때,
하나님 역시 슬픈 마음을 갖고 지켜보고 계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않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후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건들로 가득하게 됩니다.
공동체를 위해서가 아닌 한 개인을 위해 제사장을 임의로 세우거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들러리 정도로 여기는 경우도 많았으며
목석으로 하나님을 대신하게 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저질렀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오히려 즉각적으로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고, 대응하실 때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를 씻을 수 있은 방법을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버려 두실 때는 그 일들이 어떤 결과로 종지부를 찍게 될 지 긴장가운데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에덴 맛보기
레23장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것이 나의 절기들이니 너희가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3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의 날이라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안식일/ 유월절(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과 무교절(첫째 달 열닷세날부터 7일 동안)
첫 곡식단을 바치는 명절(곡물을 거둘 때 첫 이삭 한 단을 바침, 안식일 이튿날 흔듬)
칠칠절(곡식단을 요제로 드린 날부터 50일)/ 설날(일곱째 달 첫 날)
속죄일(7월 10일)/ 초막절(7월 15일부터 7일 동안)

사람이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부터라 할 수 있습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에덴동산에 각종 나무의 실과를 먹으며 유유자적 할 수 있었을 텐데,
금단의 열매를 먹으면서부터 저주받은 땅을 가는 일을 해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다양한 많은 일들이 있지만 당시의 일이라면 농사와 집 안팎의 일이 고작이었을 것이지만,
먹고사는 문제라는 것에서는 동일하다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는 인생들이 6일 동안 자신의 삶을 위해 땀 흘리고,
일곱번째 날은 구별하여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하시지만, 류가 다른 일인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바로 에덴동산에서 있었을 법한 분위기를 만들어 보시려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일 동안은 사람을 위해 일하지만,
일곱 번째 날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면서 저주의 삶을 살도록 하셨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며 누렸던 그 삶의 내용을 맛보도록 허락하신 것이 됩니다.
그러니 결국 안식일 또한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이죠.
바리새인들은 이를 오해하여 그 제도 자체를 수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모든 막히고 얽힌 것들을 풀어주기 위한 날로 생각하시며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각에 한 발짝 더 다가가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레위기 23장에 정리되어 있는 유대인들의 절기들 역시 이 안식일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절기들을 '나의 절기', '여호와의 절기'라고 하시지만,
절기 역시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배려가 배어있는 사람을 향한 선물이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과 절기를 지킬 때 하나님의 숨결 안에서 참 자유를 느끼고 쉬어야 했듯이
오늘 우리들도 소위 안식일이라고 말하는 주일이나 신앙생활을 위해 구별한 시간 가운데 있을 때
환경이나 성과들에 구애됨 없이 하나님 안에서 쉼의 체험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 만남의 기억, 에덴을 맛보기 위해!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식탁 예절
레22장
2 아론과 그의 아들에게 말하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이 내게 드리는 그 성물에 대하여 스스로 구별하여 내 성호를 욕되게 함이 없게 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오늘을 살아가며 레위기를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소위 율법이라고 하는 것들, 특히 생활에 관한 것들이 아닌 제사와 관련된 것들이라면 더욱.
그러면서도 레위기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율법 하나하나를 이르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가 찾고 믿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놀라움이 아닐 수 없다.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3천 년 전에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민족을 붙들어 놓고
꼼꼼하게 이르신 가르침이 바로 레위기이고 구약의 율법들이다.
그러니 때로 이게 뭐야? 하면서 치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지만
다시금 붙잡고 씨름해야 하는 이유가 충분해 진다.
'왜 하나님은 그 때, 왜 하나님은 그들에게, 왜 하나님은 이것을 중요하게 강조하셨을까?'라는 식의 물음들을 들고서 말이다.
그렇기에 평면적이고 문자적 접근보다는 입체적이고 의미적 접근을 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 아닐까.

22장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무슨 결벽증 환자 같다(하나님, 표현을 용서해 주세요!).
눈에 띄는 단어들이 구별, 부정, 성물, 정결, 더럽히지, 속되게, 죄, 흠 등이기에 그렇다.
하나님께 바쳐졌던 성물을 먹는 문제와 바칠 제물에 관한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하나님과 식탁에 마주 앉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크신 하나님과 식탁에 마주 앉다니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 줄 그들은 알았을까?
예수님과 함께 만찬을 즐기며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보지 못했던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걸음마 단계를 막 지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똑바로 걸을 수 있도록 정도를 가르치고 계신 것이리라.
그러니 아무나 아무렇게나 참여할 수 있게 허용하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격을 정하시고, 그들의 몸 상태까지 따져 묻도록 하시는 것이다.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겉모습 이야기를 하실 수밖에 없다.
사실은 마음이 없다면 겉모습도 제대로 갖추기 쉽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겉모습으로 그 속마음까지 판단해 버리는 세태이다.
각자의 다른 형편을 헤아려 보려하는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

레위기가 말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예절이 겉으로 만의 형식이 아닌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심이 될 수만 있다면
그래서 마음이 통하는 일이 생긴다면
때로 겉모양이 조금 미흡해 지는 일이 있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진실된 믿음의 자세는 외모를 압도하는 정결함이 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식탁에 우리들을 초청하시며 바라시는 것이 이것이 아닐까.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젖을 뗄 때
레21장
6 그들의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들의 하나님의 이음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들의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왜 항상 다른 삶을 요청하시는 것일까요.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이 더 편하고 즐거울 수 있다면야 누구나 손들고 껴들려고 할 테지만,
그렇지 않고 더 어렵고 힘든 여정이라면 누가 그 길을 선택하려 할까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쩌면 힘겨운 현실을 보내고 있습니다.
노예이긴 했지만 안정된 삶의 자리에서 떠나 집도 절도 없는 광야에서 불확실한 내일을 향해 하루하루를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더욱 기막힌 것은 모세라는 지도자를 통해 하루가 멀다 하고 율법이라는 강화된 행동지침들이 하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조금은 과장을 해서 표현해 본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들을 읽으며 나와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조차 머리가 아픈데 당시 사람들은 오죽했을까요.
더구나 제사장들은 더욱 엄격하게 율법이 적용된다고 말씀하시는 대목에서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요.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놓고, 한 켠에 나와 상관이 없을 거야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지는 않았을지.
아, 당시 사람들의 수준을 너무 높여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정보와 지식수준은 아니었을 테니 말입니다.
일단 그들이 당시 처한 상황과 거기까지 오면서 목격하고 경험한 사건들이 그들에게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시켜 놓았으니 이런 요구 앞에 불평할 수 없는 것이었겠죠.

어쩌면 하나님께서 21장의 말씀처럼 제사장과 관련된 말씀을 주시면서
'내가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라고 생각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든 나(하나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언제든 어떤 상태이든 찾아올 수 있도록 하고
뭐 이런 저런 전재조건을 달아 놓는다는 것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수준의 문제일 수 있어 보입니다.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수준을 결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에게 열어 놓으신다고 성막을 아무렇게나 허름하게 만들어 놓고
제사장은 아무나 하고 싶다는 사람으로 하게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 수준으로 생각하고 격하시켜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까다로운 절차를 따라 성막과 제사장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크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의 한계를 아시고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서 한 발 떨어져 서 계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중간에 성막도 있고, 자격을 갖추고 잘 훈련된 제사장들이 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래서 수준이 높아지면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던 그 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볼품없는 한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인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는 돼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하나님께 이르는 과정에서 한시적으로 주신 몽학선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율법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젖을 뗄 때를 알아야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유혹을 물리치면
레20장
7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26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사형에 해당하는 것들(2-21절) - 몰렉 섬김, 접신자와 박수무당 따름, 부모 저주, 간음, 근친상간, 동성애, 수간


세상 어느 것도 하나님의 숨결이 닿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비록 죄악으로 물들어 있는 가나안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잘라내려고 하실 때 어찌 마음 아프지 않으실까요.
그것은 마치 당신의 지체 하나를 절단하는 것과 같은 고통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세계를 운영해 가시면서 뒤틀린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어쩌면 방치해 더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백성들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마치 농부가 묵은 땅을 갈아 엎고 씨앗을 뿌리듯이
뒤짚어 엎을 땅 가나안에 뿌릴 이스라엘이라는 씨를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씨앗을 향해 쏟으시는 하나님의 깊은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그 말씀이 하지 말라는 말씀에 집중이 되지만 그 이면에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 지금 광야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을 향한 집중을 계속해 주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속 드러나는 이 백성들의 경솔함과 무개념의 행동들은 하나님의 걱정을 증폭시켰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하셨던 것들을 다시 반복하시며 한 발 더 나아가 사형선고까지 하시는 것입지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에서 벗어난 삶의 목록들, 가나안에 팽배한 삶의 양태들과의 단절만이 거룩한 삶,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담보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나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 유혹들은 성곡적인 훼방을 위해 악착같이 물고 늘어질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승리할 때, 유혹을 물리칠 때만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이 자신들의 것들이 될 텐데,
아직은 미래적 일들이기에 긴장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바로 레위기 20장과 가나안을 매일 오가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유혹의 땅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옮겨 다니며 각각의 영역에 효과적으로 적응하는 법을 익힌듯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유혹이 유혹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제 더이상 하나님의 애간장을 태우는 일은 그만두어야 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거룩은 사랑이다.
레19장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한 몸에서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란 분리됨의 결과물 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자 다른 모양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자신들의 본래적 정체성을 망각했기에 하나님께서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강조하시는 거룩, 특히 레위기를 통해 보여주시는 거룩의 모델은
바로 이와 같은 분리되고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시키시려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부모이든, 가난한 이웃이든, 일꾼이든, 종이든
거꾸로 재판관이든, 부자들이든 간에
서로를 향해 형제라고 말할 수 있게 됨으로
그래서 한 부모 아래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존재임을 각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로서 산다는 것은 단지 모든 것을 허용하는 관계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하시듯이 바른 원칙을 갖고 그 쪽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전재됩니다.
왜냐면 천지창조에서 보여주셨듯이 하나님은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질서는 단지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짐승에서 식물에까지도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자하는, 하나님의 백성 됨을 깨닫는 사람은
사람과 일, 사물을 보면서 사람의 기준과 원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과 원칙,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미 그 모든 것에 하나님께서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보지만 하나님을 보고, 짐승을 보면서도 역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야곱이 형 에서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하듯 한다는 것이 바로 거룩한 삶이 아닐까요.

만물에 깃든 하나님, 그 생명을 알아 볼 수 있는 눈을 키우고,
그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아끼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로부터 하나님의 마음과 만남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관계를 나누고 차별하다 못해 멸시하고, 적대하다 못해 학대하며, 책임전가하는 것이 아닌
모두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됨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은 결국 당신을 모함하고, 때리고, 채찍질 하고,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한 사람들을
용서하며 품으신 예수님의 모습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을 거룩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로 볼 뿐만 아니라
바로 자신으로 느끼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겐 너와 내가 따로 없고, 그 누구도 하나님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으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땅에 살지만 하늘을 만날 수 있는 삶,
마음 열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는 삶.
이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추가>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만난 때, 내 안에 하나님과 상대방 안의 하나님이 만나는 것.
그러므로 결국 내가 나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희로애락이 나의 것이 된다.
같이 느끼는 세상,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리.

블로그 이미지

dols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