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자료로 예전에 교사 경건회 때 나름대로 써 둔 것이 있다.
원래 자기가 쓴 글을 좀 다시 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기 때문에 이리저리 수정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다 보니 오히려 새로 쓰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
하지만 나름 정리를 할 수 있어 재미있다.
단점은 간략했던 것에 자꾸 말을 붙이는 바람에 길어진다는 거다.
 

출2:24,25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은 천년을 하루같이 여기시기도 하지만 하루를 천년같이 여기실 수 있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백여 년의 기간은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고스란히 당신의 것으로 가져가실 수 있는 분이라는 뜻도 된다.

요셉이 죽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애굽을 다스릴 때

아마도 그들은 보호자를 잃은 상실감을 맞봐야 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족속들은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속의 하나님은 알고 있었으나

제대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방법을 알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양적으로는 충분히 늘어났지만 질적으로는 아직 부족한 상태였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본다면 이 위기를 타개하는 것은 아주 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상황을 모두 다 알고 있으셨음에도

마치 아무 것도 모르시는 것처럼 또다시 수십 년을 더 보내시는 것을 보게 된다.

누가 봐도 곧바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그들을 구해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잠자코 계신다. 한 사람이 준비될 때까지.

그 한 사람, 하나님의 대안은 모세였고, 큰 인내심으로 그를 기다리신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계획하신 일들을 실현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사람이 없으면 일하실 수 없는 분이다.

그래서 감히 하나님을 ‘무능한 전능자’라고 부른다.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면 하염없이 무능할 수밖에 없는 분, 하나님.

그 곳에서 그 분은 손이 없고 발이 없고 입이 없다.

오늘 전능하신 하나님을 유능하게도 무능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나다.


재미있는 것은 모세는 바로의 딸에게 구함을 받아 이름도 얻고 40년의 삶을 보장 받았다.

그리고 미디안 제사장의 딸에 의해 구함을 받아 또 40년의 삶을 보장 받았다.

이런 우여곡절의 시기를 거치며 모세가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준비되고 있을 때

드디어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들었고, 언약을 기억하고 있으며, 돌보실 것이라는 뜻을 드러내신다.

이제 모세의 나머지 40년의 삶을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시려 하신다.

그러나 그 이전과 다르게 모세는 강한 의지로 저항하는 모습이 다음 장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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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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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교회에서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을 하고 있다.
새벽기도회에 대한 막대한 부담을 갖고 있으면서도 벌써 두번이나 빠졌다.
그래도 전 교인이 책도 같이 읽고, 말씀도 같이 듣고, 소그룹으로 모일 수 있어 나름 유익한 기간이 될 것 같다.

40일... 나는 그것을 좀 패러디 해서 나름대로 출애굽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내가 한다고 하지만 뭐 다 주워 들은 이야기들을 나열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정리하는 차원에서 도움이 될 듯하여 시작해 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광야 40년을 생활 한 후 요단강 앞에 갈 때까지.

오늘은 그 첫번째, 출애굽기 1장의 이야기다.

출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출애굽 이야기는 출애굽기로부터 시작된다.

애굽으로 내려온 야곱의 후손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출애굽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 이유는 애굽이라는 나라에 이스라엘의 후손이 더이상 머물수 없게 된 것이다.

애굽 사람들, 특히 왕이 봤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도 위협적인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를 두고 보지 못하고 고역을 시키고 결국에는 새로 태어나는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리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때 이런 애굽 왕 바로의 서슬퍼런 칼날을 막아선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천사도, 혹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나, 지하 조직의 힘센 장수도 아닌 두 명의 여인이었다.



십브라와 부아

그래서 출애굽의 이야기의 진정한 시작은 바로 이 두 여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교훈을 깊이 새기는 것이 그들에 대한 최선의 예의가 되리라.


살아가다 보면 상황에 따라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가 문제다.

이제까지 가지고 왔던 삶의 원칙을 어겨가면서 까지 따라야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먹고 살아야 하는 입장에서 윗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힘이 없는 입장에서 힘 센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여럿이 함께 하는 일인데 나만 빠질 수 없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때 우리들을 심각하게 고민을 하지만 선뜻 나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고

누군가가 원하는 행동을 하고 마는 것이 대부분의 우리들이다.


그러나 애굽 왕의 명령을 받은 히브리 산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원칙을 따라 올곧게 행동하고 있다.

아무리 애굽 왕 바로의 공권력이 가공할 위세로 자신들에게 명령한다고 해도

그들은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우리들은 너무도 손쉽게, 이제는 어떤 고민도 없이,

세상적 흐름에 나를 실어 보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겨우 주일에 교회에 와서 종교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만 위안 삼을 뿐이다.

그런 일들은 우리의 목숨을 요구하지도 않는데...


이런 산파들의 목숨을 건 행위로 인해 아론이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산파들을 잇는 이들은 아므람과 요게벳, 미리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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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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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아쉽다.

말씀새김 2007. 2. 16. 09:53

사무엘상 15장의 이야기는 사울의 인생에 결정적 사건을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사울은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일련의 사울의 일탈을 경험하시면서 그를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신다.
이 마음을 전해 받은 사무엘 역시 근심하고 부르짖었다고 나온다.
결국 하나님은 사울에 대한 마음을 접고, 새로운 왕을 세우실 것을 결정하고 다음 장에서는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울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처분이 가혹하기 이를 데 없다.
사울을 백성들이 고른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고르신 것이다.
마치 백성들이 사울을 뽑아서 세워달라고 했던 것처럼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세우신 왕을 너무도 쉽게 끝내 버리신다는 것이다.
몇 가지 실수를 했다고 해서 무참히 그의 왕조까지 닫아 버릴 것을 결정해 버리셨다.
그 전까지 보이셨던 하나님의 인내심이 너무도 얇아진 것 같아 보이기까지 한다.
사울이 아니면 요나단이 있지 않았나?
어떤 측면으로는 다윗만큼, 아니 그 이상의 인품과 재능을 가진 요나단까지 물리치실 필요가 있으셨을까?

그래서 사무엘상에서 만나는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하나님의 본심이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어찌되었든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의 세력을 누르고 왕위에 오른 다윗이 그의 왕권의 정당성을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포기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사울이 죽고, 새로이 다윗의 왕조가 세워지고, 또 그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 갈 때
사울을 그 정도로 폄하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일까? 사무엘상 끝 부분에 가면 하나님을 찾아 보려는 사울의 시도들을 가차없이 거절당하는 모습을 본다.
사울을 더이상 회생 불가한 멸망으로 몰아가려 하는 저자의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성경에서 사울만큼 불운한 인물이 또 있을까?
사실 진위를 떠나서 그에 대한 왜곡된 기술들이 그를 더 초라하게 한다.
그의 뒷모습이 애처롭다.
그를 오해할 수 밖에 없는 분위기가 또 아쉬움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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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은 잔잔해지지 말았어야 했다.  (0) 200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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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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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던 제자들.
바람이 불고 높은 파도가 치며 풍랑이 일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풍랑을 해쳐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결국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깨워 살려달라고 부탁을 드리는 마지막 선택을 했다.
다음 순간 그 험악했던 바다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잔잔해 졌다.
그런데 이 가운데 예수님은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는 책망의 말씀을 하셨다.

아무튼 이 이야기를 두고 제자들이 간구하여 풍랑이 잔잔케 된 것처럼
간절히 기도하면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종종 들었던 것 같다.
맞는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인생이라는 것이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고,
때때로 풍랑이 일어 고생을 하지만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 구함으로 해결함을 받을 수 있다는...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면 몇 가지 질문이 가능하다.
예수님이 타고 계신 배가 과연 가라앉았을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워서 간청했기 때문에 풍랑이 잔잔해 지고 그들이 살아난 것인가?
예수님은 살려달라고 불렀던 제자들을 칭찬하시기는커녕 책망하셨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기적 같은 일을 하시면서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명하여 잠잠하게 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의 바른 자세는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시간을 견뎌 냈어야 하는 것이다.

풍랑은 잔잔해지지 말았어야 했다.

나의 삶에도 작든 크든 풍랑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그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고,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면 잠잠해지는 기적이 없더라도
배가 침몰해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풍랑은 잔잔해지지 말았어야 했다.

2005.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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