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에 해당되는 글 43건

하나님이 이끄는 40년을 시작한지도 꽤 되었다.
교회에서 '목적이 있는 40일' 캠패인 중 2월 마지막 날에 시작을 했는데
벌써 6월 하순이 다 되었다.
원래 목적지는 신명기까지 하는 것이었는데,
40장 보는데 넉 달이 걸렸으니, 갈 길이 너무 멀다.
레위기라는 산은 또 어떻게 넘을 수 있을지...
그래도 레위기까지는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데, 27장이니.
암튼 허접한 내용이었지만 여기까지 온 것에 감사하고, 또 마음을 잡아서 레위기도 함 가보자.
천천히, 서둘지 말고.ㅋㅋ

 

마침이 아닌 시작

출 40

16 모세는 주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것을 모두 그대로 하였다.

17 마침내 제 이 년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웠는데,


출애굽 한 지 둘째 해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고 봉헌합니다.

모세와 백성들의 머릿속에 시내광야에서 보낸 지난 10개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입니다.

부끄럽고 죄스러운 사건 사고의 연속, 그러나 뿌듯함과 감사의 마음이 가득한 시간이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추는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비록 광야에서 불완전한 삶을 살고 있는 형편이지만 중심에 하나님의 성소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없음’으로 인한 불안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든 기댈 언덕이 저 멀리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닌 자신들 안에 있게 된 것이니까요.


그러나 성막이 세워진 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로서 본격적인 출발점에 서게 된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드웨어가 만들어졌고, 그것을 채울 소프트웨어의 문제가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 멈추어 버리면 안 됩니다.

이 성막을 통해 해 나갈 일들이 어떤 것인지 더 관심 갖고 집중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성막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한 최대로 끌어 올릴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를 담는 그릇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릇의 완성 앞에서 만족하고 그릇만 쳐다보고 있으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누군가 이 건물, 제도에 집착하면 정신, 관계, 생명력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제도가 어느 정도 안전장치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가변성, 수용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변화와 발전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지금도 멋들어진 예배당 건물을 지어놓고는 그 건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보다는

그 건물 자체를 지키기 위해 급급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본말이 전도되어도 한 참 나가버린 것이라 하겠습니다.

안식일이라는 제도가 그러했듯, 성막 역시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사건이 중요한 것이고,

결국 성막과 제도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로부터 이어지는 레위기의 말씀들이 의미가 있습니다.

성막과 제사장 제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얼마나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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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를 바꾸지 말기를

출 39

1 그들은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로 성소에서 예배드릴 때에 입는 옷을 정교하게 짜서 만들었다. 그들은 이렇게,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아론이 입을 거룩한 옷을 만들었다.


일꾼들은 마지막으로 제사장의 옷을 만듭니다.

제사장의 옷은 거룩한 옷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을 매개하는 일을 할 때 입는 옷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된 사람은 그 거룩한 옷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전에 했습니다(출28).

더불어 그 옷을 만드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만들었다’는 생각에 붙잡히면 안 됩니다.

‘내가 거룩한 옷을 만들었다’, ‘내가 온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것을 만들었다’고 우쭐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옷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제사장의 직임에 있습니다.

곧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가능할 일입니다.

거룩함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발현되는 속성입니다.

그런데 한낱 사람이 자신의 손재주로 그것을 ‘만들었다’고 주권을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오직 자신에게 그런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 드릴 따름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는 가능한데 시간이 지나면

그 자체가 커다란 권력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했다’는 이 무서운 권력이 많은 선한 일들을 그르치는 함정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단지 그 시간에 그렇게 쓰임을 받은 것에 대한 깊은 감사만이 진정 거룩함을 담보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그것이 놀랍고 대단합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 주시지 않아도 또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순서를 바꾸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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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드는 일

출 38

24 성소 건축비로 든 금 곧 흔들어 바친 금은 모두 성소 세겔로 이십구 달란트 칠백삼십 세겔이다.

25 인구 조사의 대상이 된 회중이 바친 은은 성소의 세겔로 백 달란트 천칠백칠십오 세겔이다.

26 스무 살이 넘어서 인구 조사의 대상이 된 사람이 모두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므로, 한 사람당 성소 세겔로 반 세겔 곧 한 베가씩 낸 셈이다.

27 성소 밑받침과 휘장 밑받침을 부어 만드는 데 은 백 달란트가 들었으니, 밑받침 백 개에 백 달란트 곧 밑받침 한 개에 한 달란트가 든 셈이다.

 

어느 날 아이 하나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매 주일 내는 헌금은 어디에 다 써요?”라고요.

그 아이는 그 돈으로 교회학교 선생님들 월급을 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날 우리 선생님들은 한 푼 받지 않고 우리 친구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이라고 ‘강조’를 한 날이었기 때문이죠.

아이들의 의문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이렇게 되겠죠.

‘우리가 내는 헌금은 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 때 욱하는 마음에 ‘내가 다 받아 갔다!’라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지만 꾹 누르고는

교회에 불도 켜야 하고, 물도 쓰고, 종이도 쓰고 등등을 읊어대며 비용으로 들어간다고 하며 넘겨버렸습니다.

‘교회와 돈’에 대한 의구심은 이렇게 작은 아이들조차도 갖고 있는 생각입니다.

교회와 돈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아니, 어떤 관계를 가져가야 하는 것일까요?


모세로부터 위임을 받아 성막과 성소의 물품을 만든 이들을 자신들이 사용한 물품,

더 정확히 말하면 비용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쓰고 남을 만큼 많이 가져온 재료들 가운데서

얼마나 썼는지 낱낱이 밝혀 두어야 했던 것입니다.

금도 은도 무척이나 많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금은이 많이 쓰였으니, 백성들은 빈털터리가 되었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이 내어 놓은 대부분의 금붙이들은 애굽에서 빠져 나올 때 애굽 사람들에게 받아 온 것들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다 사용할 것을 예상하시고 준비하게 해 주신 것이지요.

아무튼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독립된 하나의 민족(아직 나라를 형성하진 않았으므로)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제도로 만들어 가고 있는 과정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성막이 만들어졌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돈을 내어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불어 그 성막을 유지하기 위해, 성막을 중심으로 앞으로 이루어질 종교행위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돈(가축이나 곡식 포함)을 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재물을 내어놓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옛말에도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듯이

돈이 가면 마음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수중에서 나간 돈이 어떻게 사용되는 지, 또 어떤 절차를 거쳐 가는 지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결국 그 돈이 하나님께서 원래 부여하신 질서대로 투명하게 사용될 때

이스라엘 나라 공동체 또한 건강하게 유지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타락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을 받아서 관리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했습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부를 축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적 욕심을 위해 성전에 드려진 물질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개의 교회의 재정은 한 사람에 의해 관리되지 않고

여러 사람들에 의해 관리되면서 어느 정도 감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런 체제는 쓰임의 결과에는 관심하지만 과정에는 무관심(사실은 무지)하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지켜보다 보니 필요하지 않은 곳에까지 낭비되는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체면치례를 위해, 임기응변적으로, 군중심리로, 일관성 없이 방만하게 운영되어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건물에 집중하다 보니 멋드러진 건물을 지어 놓고는 그 관리비에 허덕거리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경상비의 비중이 너무 커져서 본말이 전도된 상황이 연출되는 것입니다.

‘작은 정부’라는 말이 있듯이 ‘작은 교회’를 지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성소의 건축 비용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멀리 나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소이든 교회이든 돈이 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서 필요한 것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비용이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 채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돈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 돈을 더 잘 사용하기 위한 데에 지혜를 모으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모아진 돈을 허투루 쓰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일도 역시 ‘돈 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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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의 합작품

출 37

1 브살렐은 아카시아 나무로, 길이가 두 자 반, 너비가 한 자 반, 높이가 한 자 반인 궤를 만들었다.

2 순금으로 그 안팎을 입히고, 그 둘레에는 금테를 둘렀다.


하나님께서 산 위에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들이 그대로

오홀리압과 브살렐, 그리고 그를 돕는 이들의 손길에 의해 실체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모세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동안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솜씨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혹시 잘못 이해한 부분 때문에 오류가 나지 않을지 노심초사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막을 만들고 언약궤를 만들고 성소의 각종 기명들을 만드는 일은 순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세에게 설계도를 주셨을 뿐 그것을 만드는 일은 오로지 백성들의 몫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 모세가 전하는 것을 하나도 빠트릴 수 없었겠지만,

이 작업의 모든 키는 작업자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좀 달리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꿈의 실현이 사람들의 손끝에 달려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진 능력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집중해서 한 치의 오차 없이 만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있었습니다.


이 본문을 읽고 위와 같은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답답한 마음이 듭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 손끝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꿈이 사람들의 손끝에서 현실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삶의 장 속에서 그것을 분별해 내고 구체화 해 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말 모세와 같은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해서 모든 의혹을 말끔히 씻어 준다면 또 모르겠지만

오늘의 사회, 오늘의 기독교, 오늘의 교회의 현실은 한마디로 ‘오리무중’이라 하겠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말해 자신이 뭘 해야 할 지 도무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르침들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을 가지고도 정반대로 이야기들을 하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이죠.

더구나 사회 문제들에 대한 견해들은 왜 그리 극단을 달리는지.

그러다 보니 교회의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현재 교회에 잘 출석하고 있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지 심히 우려되는 대목입니다.


성경 말씀 한 두 줄 읽고 너무 멀리까지 나온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답답한 마음을 담아 봅니다.

어쨌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마치 브살렐과 같이

하나님의 설계도를 자신의 손끝에서 실체로 만들어 내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동업자요, 동역자입니다.

그 동역의 결과는 멋진 합작품의 생산에 있는 것이 되겠죠.

그런데 요사이 그리스도인들, 특히 말 잘하는 사람들이 그 합작품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기에 아쉬운 마음 가득합니다.


그래도 어디선가 조용히 멋진 작품을 만들고 있는 분들이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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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 어느 방향으로

출 36:5 이르기를 "백성들이, 주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는 데에 쓰고도 남을 만큼 많은 것을 가져 오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성소를 짓기 위해 금은보석은 물론 실로 천을 만들어 바치는 일에 앞 다투어 달려듭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기간의 열심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 보이는 것과 같은 열심으로 32장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열심을 내는 모습, 그 자체를 놓고 평가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대개 열심히 뭔가를 하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방향이고, 의도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지도자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열심을 하나님의 성막을 만드는 데에 사용하도록 했지만,

아론은 똑같은 열심을 금송아지 우상을 만드는데 사용하게 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열심을 굉장한 미덕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이 특심인 교회들은 다른 교회 목회자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하지만 그 열심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방향이 잘못되어 있을 때가 너무도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열심이라는 것이 얼마든지 우상에게로, 이단에게로도 향할 수 있고,

그래서 이단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이 더 특별한 열심을 보이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열심이 없음을 탓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열심을 내야할 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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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하나님의 선물

출35(표준새번역)

1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아 놓고 말하였다. "주께서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명하신 말씀은 이러하다.

2 엿새 동안은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렛날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 곧 주께 바친 완전히 쉬는 안식일이므로, 그 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형에 처해야 한다.

3 안식일에는 너희가 사는 어디에서도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


출애굽기에만 안식일 언급이 다섯 번이나 등장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양식인 만나를 주시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일은 쉬는 날로서, 주님의 거룩한 안식일이니, 당신들이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으십시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당신들이 다음날 먹을 수 있도록 아침까지 간수하십시오.” 16:23

십계명을 주시면서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20:10

안식년과 함께 다시 이르시면서
“너희는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의 소와 나귀도 쉬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여종의 아들과 몸붙여 사는 나그네도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23:12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이르시는 것을 마무리 하시며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징이니, 이는, 나 주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면서 숨을 돌렸기 때문이다.” 31:17

그리고 출애굽기 35장,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의 사건을 지나고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성막을 지으려고 하는 시작점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안식일 규례를 명하십니다.


‘맞아 안식일에는 뭐든 일을 하면 안 돼!’라고 생각하며 넘어가면 쉽겠지만,

안식일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아 보입니다.

결국 율법을 철석같이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에게 안식일은 그런 삶의 지표와도 같은 것이었고,

이렇게 누차 하나님께서 강조하셨다는 데서 더 확실한 정당성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그들의 반대편에 서 계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 12:8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 마 12:12


좀 비약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안식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종교인과 신앙인이 나눠진다고 생각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과

안식일에 담긴 의미,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은 같을 수 없는 것이니까요.

아마 출애굽기를 쓰고, 또 바로 받아서 읽었어야 했던 사람들은

보다 강한 어조의 율법의 경구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초보적 신앙 단계에서 바로 의미나 의도로 가버리면

자유가 아닌 방종으로 희석되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있어서, 또 예수님을 믿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 준수의 문제는

단지 문자적인 준수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마도 예수님은 보다 더 강력하게 말씀하셔서

‘안식일 해체자’ 혹은 ‘율법의 파괴자’로까지 비춰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물론 앞에서도 약간은 이해가 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종교인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사람이라면,

신앙인은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는 사람입니다.

뭐 신앙인이라는 표현이 좀 부족하다고 생각하실 분도 있지만

일단 이 논의에서는 더 나아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종교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힘들게도 보일 수는 있지만 마음은 편할 것이고,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겉으로는 쉬워 보이지만 실제 그 내면은 끊임없는 갈등의 연속(수행)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종교인에게 전혀 신앙이 없다든지

신앙인에게 종교적인 행위나 절차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에게 안식일이라는 율법이 없었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알아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수준(?) 이상이 되었을 때는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어쩌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유로움으로 옮겨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껍데기들의 이면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때로 목숨처럼 여기는 제도와 규율들을 넘어서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교회에 더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자연스러워 지기 보다는 더 경직되어 갑니다.

내면으로는 이미 규율을 규율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자유로운 사람들이나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옭아매려는 규율에 규율을 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해 준 그런 규율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안식일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출애굽기에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안식일은

그리스도교를 통해 주일로 바뀌기는 했지만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사이 주5일 근무를 이야기하며 5일 일하고 이틀을 쉬는 이들도 있지만,

6일을 일하고 하루를 쉬어야 한다는 것은 실로 파격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다른 율법들에 비해 가장 실천되기 어려운 것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어차피 가진자 힘 있는 자들은 안식일이든 아니든 일하지 않았습니다.

놀고먹으며 힘없는 이들, 노예들, 나그네들, 심지어 종의 자식들의 노동 덕분에 먹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도 쉽게 지켜지지 않을게 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섯 번이나 반복하시는 데는 이렇게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이해한 안식일은 초점이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대한 주권을 선언하시고, 또 그 날 선한(좋은) 일을 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신 것은 정말 옳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수고롭게 살아가는 인생에게 베푸신 최고로 좋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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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는 지도자

출34

29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34 그러나 모세는, 주님 앞으로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말할 때에는 수건을 벗고, 나올 때까지는 쓰지 않았다. 나와서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 때에는,

35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게 되므로, 모세는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까지는 다시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모세는 또다시 산 위에서 하나님과 40일을 보내고 다시 만든 돌 판을 들고 내려옵니다.

그런데 지난번과 달라진 것은 모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납니다.

너무도 간절한 모세의 태도 덕분에 하나님께서 더 가까이 다가오셔서 이야기 하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모세는 처음에 자신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광채 나는 얼굴 그대로 백성들과 이야기를 했지만,

광채가 나는 것을 알고, 또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알자

그 때 부터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만날 때는 수건을 벗었다.


언 듯 생각해 보면 인위적으로 조작한 것도 아닌데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면

좋은 기회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집트의 파라오였다면 자신이 신의 아들, 혹은 신이라고 떠들며

백성들을 자신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는 좋은 도구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있어서 얼굴의 광채는 그것이 비록 하나님을 만남으로 얻게 된 것이라 해도

백성들이 두려워 한다면 장애물일 뿐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그것과는 달리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백성들을 더 강하게 장악해서 지배하려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모세의 위대성을 엿볼 수 있고, 왜 하나님께서 모세를 선택하셨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사귐의 시간을 통해 광채와 같은 능력을 얻더라도
 오히려 그것을 뒤로 감출 수 있는 사람,
광채 뒤에 그대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해야 할 작은 일들에 성실히 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서 빛나는 광채, 또 어떤 능력도 하나님의 것이며
잠시 스쳐가는 지나가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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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한다고 큰 소리 처놓고서는 뒷심 부족에 발목이 잡혀 버렸다.
더구나 목사 안수 받은 후유증(?)까지 겹쳐서 하루 한 두번 블로그에 얼굴 도장만 찍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니 야심차게 시작한 하나님이 이끄는 40년은 출애굽기도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으이그...

빈손의 지도자

출34

8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서 경배하며  9 아뢰었다.
"주님, 주님께서 저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사실이면,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 백성이 고집이 센 백성인 것은 사실이나, 주님께서 우리의 악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주님의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모세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노심초사 하고 있습니다.

다시금 산에 올라 하나님을 대하고 있으면서도 반복해서 함께 가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렇듯 모세의 영향력(카리스마)은 하나님과 밀고 당기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백성들에게 전하거나,

하나님을 향해 백성들을 대변하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발할 수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향해서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모세가 얻은 것은 없습니다.

오직 혜택은 백성에게,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물론 백성이 얻은 혜택은 최소한의 희생을 감수한 후에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모세의 역할이 있었기에 수준 이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힘겨운 훈련의 여정을 통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사이 만나게 되는 지도자들은 대개 반대로 합니다.

백성들에게는 아부하고, 하나님의 이름에는 먹칠을 합니다.

인기에 영합하는 가벼운 존재들에 의해 벌어지는 필연적 결과입니다.

그들의 손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들려져 있습니다.

빈손의 지도자였던 모세와 대조되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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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통(通)하는 사이
출애굽기 33장
17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잘 알고, 또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서, 네가 요청한 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마."
18 그 때에 모세가 "저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

하나님께서 같이 가시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던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얼굴)을 보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전에 산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백성들의 죄악에 대해서 들을 때보다 백성들의 상태가 더 나쁘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모세는 불안해진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모세의 진가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내겠다는 애틋한 사랑도 그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의 탁월성이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그것과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가지고 있는 마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닌 속에 갖고 계신 근원적 마음과 같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 주실 때 불쾌하거나 끌려가는 기분이 아니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못내 들어 주시는 것처럼 하셨지만 실은 모세의 이와 같은 태도에 뿌듯해 하시며,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고자 하시는 일을 더 쉽게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할 때 숫자를 줄이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부탁을 들어 주시기로 하셨지만, 그것이 모세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임을 알고 계셨기에 곧바로 타협안을 제시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서 있을 때 당신의 손으로 그를 덮고 지나가신 후 손을 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하나님을 정면으로 보고 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모세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고 싶으셨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최선을 다해 모세의 마음을 만져주시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실로 엄청난 일 앞에서 크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무지한 백성들을 인도하며 힘들고 지칠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본 전무후무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뒷모습 밖에 보지 못했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어쩌면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하나님의 모습이란 하나님의 뒷모습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사랑, 정의 등등의 것들이 그만큼 온전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면 우린 하나님의 일부분만을 만나고, 접촉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하나님을 전부 아는 것처럼 큰 소리를 낸다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모세조차 하나님의 뒷모습을 잠시 보았을 뿐인데 말입니다.


하나님 없는 성막을 지을 수 없다

모세가 성막을 짓기 전에 큰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실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세하게 성막의 식양을 주셨고, 이젠 성막을 짓기만 하면 되지만 하나님 없는 성막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텅 빈 성막만을 가지고 가본들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군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모세의 긴장의 이유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꼭 함께 하신다는 확증 아래서 그 분의 성막을 짓겠다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 없는 성막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관심과 요청을 뒤로 하고 자신들의 것만을 챙기려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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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 하나님을 위로하다

출32

10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14 모세가 이렇게 간구하니, 주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시고, 주님의 백성에게 내리시겠다던 재앙을 거두셨다.

19 모세는 화가 나서,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돌 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내던져 깨뜨려 버렸다.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니, 바로 그 날, 백성 가운데서 어림잡아 삼천 명쯤 죽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완전히 없애 버리시겠다는 하나님을 일단 진정시키고 산을 내려왔지만

정작 백성들의 타락한 장면을 목격하고는 화를 참지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 돌 판 두 개도 내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또 백성들 서로를 죽이게 하여 삼천 명쯤을 죽게 했습니다.

실로 참혹한 장면이 아닐 수 없지만 어쩌면 모세 덕분에

더 큰 재앙이 피하고 삼천 명의 희생으로 마무리 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후 수송아지를 만든 일로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셨지만(35절)

모든 백성을 향한, 또 기록에 남을 만큼의 전면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와 백성들 앞에서 너무도 다른 모세의 행동에 의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세의 이런 행동이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막았기 때문에 마음을 돌리기는 하셨지만

화나고 괘씸한 마음은 그대로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모세가 돌 판을 던져 깨뜨려 버리고 또 백성들을 향해 화를 낼 때

하나님께서 속 시원해 하시며 위로?!를 받으셨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느끼는 모세의 존재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대신해 화를 내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린 덕분에 이스라엘의 대부분은 생존의 은혜를 입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대신해 화를 내고 있는지요.

하나님의 공의의 분을 품는 사람들의 존재가 점점 희박해 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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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출31

6 분명히 나는 단 지파 사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이 브살렐과 함께 일하게 하겠다. 그리고 기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지혜를 더하여, 그들이 내가 너에게 명한 모든 것을 만들게 하겠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친히 쓰신 증거판을 주시는 장면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하시는 말씀 중에

두 기술자를 뽑아서 일을 맡기라고 하시는 부분에서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굳이 사람의 손을 빌려서 성막을 만드셔야만 했나?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실 곳이 생기는 것이었나?

성막이 만들어 지고, 제사장의 제도가 서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나?

함께 하실 수 없으셨나?

그 이전에 아브라함을 포함한 성조들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불완전한 것이었나?


어쩌면 이 제사제도가 세워지는 부분에 냄새가 납니다.

순수한 신앙의 발로라기보다는 종교주의자들의 손길이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제도와 절차를 통해 사람들을 길들여 자신들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이후 역사를 보더라도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혹은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관계가 진전되는 것을 별로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전 혹은 유사성전들로 인해 백성들은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할 뿐이다.

물론 제도라는 안전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안정되게 하나님 이야기가 전승되어 갈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안정이라는 것이 함정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안정을 가장 중심으로 놓다보면 하나님께서 전해 주셔서 만들어 놓은

지극히 과정적이고, 수단일 수밖에 벗는 것들이

목적이 되고 대상이 되어 버리는 일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홀리압과 브살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언약궤가 그 자체로 신통력을 지니기라도 한 듯이

사람들이 그 것은 부적으로 만들어 버려서 전쟁터에서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여기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분명히 발생합니다(삼상 4장).

그러니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성전을 무참히 무너트려 버리실 때

그 성전은 이미 백성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로 하나님께는 아무 의미도 없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소통)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일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성도들이 특정한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되는 것은 본말이 크게 전도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언약궤가 거룩합니까, 그것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거룩한 것입니까?

교회가 거룩합니까, 그 안에서 사람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이 거룩합니까?

사람의 손을 통해 세워지고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릴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만남을 통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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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것은 쉬운 거다

출30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3 "너는 제일 좋은 향품을 취하되, 순수한 몰약을 오백 세겔, 향기로운 육계를 그 절반인 이백오십 세겔, 향기로운 향초 줄기를 이백오십 세겔,

24 계피를 오백 세겔, 이렇게 성소 세겔로 취하고, 올리브 기름 한 힌을 취하여라.

25 너는 향을 제조하는 법을 따라 이 모든 것을 잘 섞어서, 성별하는 기름을 만들어라. 이것이 성별하는 기름이 될 것이다.


출애굽기가 전하는 제사장 이야기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예수님 때문에 더 힘들어 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정해주신 절차와 공식대로 만들고 따라하면

그 자체로 구별되고 거룩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공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가타부타 이야기할 여지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대로 전하는 역할, 물론 이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마음’의 문제를 이야기 하시면서

상황은 전혀 다른 쪽으로 돌아서버립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외모에서 중심으로 옮겨 갔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실은 그것이 예수님이 선언을 하신 것이지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으로 보시고 계셨습니다.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때도 그러하셨고,

이스라엘의 불순종 앞에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주실 때 반복하신 말씀의 주제가 마음이었습니다.

육체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라고 목청 높여 전하셨으니까요.

그러나 겉모습에 중심을 두고 그것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던 이들에겐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국 모세를 통한 모세의 세대에 마침표를 찍으시고,

예수님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세대가 도래하도록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겉으로 보여 지는 절차와 외모에 따라서가 아닌

마음으로 판단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때문에 더 어려워졌다고 감히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망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모세를 부르시어 당신의 백성을 만드시기 위해 율법을 주셨던 것이 은혜였듯

예수님을 통해 마음의 길을 열어 주신 것 또한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는 우리가 진심으로 나아갈 때 또한 하나님의 진심어린 마음과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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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의 마음

출29

1 나를 섬기는 제사장을 거룩히 구별하여 세우는 절차는 이러하다.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두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골라라.

2 그리고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누룩 없이 기름만 섞어 만든 과자와, 누룩 없이 기름만 바른 속 빈 과자를, 고운 밀가루를 가지고 만들어라.

3 너는 그것을 모두 한 광주리에 넣어서, 수송아지와 두 마리의 숫양과 함께 광주리째 바쳐라.


여전히 실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하라’고 이르시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보다 생생한 장면은 출애굽기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명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오히려 여기에서 자세한 사항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28장에서 제사장의 옷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29장에서는 그것을 제사장에게 입히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옷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냥 제사장의 일을 할 사람이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그 절차에는 또 희생이 따랐습니다.

희생이 없이는 제사장으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과거에 범죄 한 사실이 있고, 현재 흠(결격사유)을 가졌다면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희생은 자신도 모르게 지었을지도 모르는 죄를 위한 것이고,

장래에 지을 지도 모르는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제사장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자신에게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기에 그 직무를 감당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했습니다.

백성 중에서 정해진 요건을 갖춘 자가 정해진 절차를 밟았을 때 거룩한 직임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제사장은 자신이 입은 옷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때부터 타락이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면 그는 분명 그 옷을 자신의 권력으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그의 옷이 그인 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되는 자는 옷에 감추어져 있는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기 위해

내적 자신으로의 끊임없이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백성들도 그러하지만 제사장들은 더더욱 자신이 드리는 짐승들이 불태워질 때

그것과 함께 자신의 속되고 거짓된 자아를 함께 태워버리는 의식을 성실히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야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의 타는 냄새를 향기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불태워지는 짐승의 살과 기름에는 아무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제사장의 낮은 마음이 함께 할 때에라야 진정한 능력이 있는 제사,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되는 더 중요한 절차, 희생은 바로 제사장의 마음의 태워짐이었습니다.

자신을 남김없이 산화시키는 헌신만이 그를 제사장으로 거룩한 자리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거기에 있었다면, 예수님이야 말로 최고의 제사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그것을 조금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허덕이고 있으니

하나님의 긍휼이 더더욱 크게 느껴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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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필요한 은혜

출28

2 너는 너의 형 아론이 입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보이는 거룩한 예복을 만들어라.

3 내가 슬기로운 생각으로 가득 채워 준 모든 재주 있는 사람을 불러다가, 나를 섬길 아론이 제사장이 되어서 입을 예복을 만들라고 하여라.

4 그들이 만들어야 할 예복은 이러하니, 곧 가슴받이와 에봇과 겉옷과 줄무늬 속옷과 관과 띠이다. 이렇게 그들은 너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만들어 주어서, 나를 섬기는 제사장 일을 맡게 하여야 한다.


1.
출애굽기 28장은 성소의 사람인 제사장이 입을 옷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옷을 이르시면서 ‘거룩’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시는데,

제사장의 옷이 ‘거룩한 예복’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되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거룩할 수는 없습니다.

그에게 맡겨진 일이 거룩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거룩한 직임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예복으로 자신의 개성, 한계, 허물을 가렸던 것입니다.


제사장의 직무는 하나님의 의지로부터 온 것이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명하신 것이고, 임명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이 된 사람이 자신이 거룩하고, 위대하다고 오해,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화려한 옷, 화려한 자리에 앉을수록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더욱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화려한 옷은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위한 배려로 주신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 화려한 옷을 보고 제사장을 존경하고, 자신들과 다른 존재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사장은 그럴수록 더욱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의 은혜를 더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거룩한 옷 입기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어찌 자신이 그 옷을 입을 수 있는지 괴로움에 휩싸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에 우쭐하기보다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직무의 무게를 생각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
목사임직을 앞두고 있습니다.

목사가 된다는 것, 그것이 저의 존재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끊임없이 저의 존재를 갈고 닦는 일은 계속할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가 구약에서 말하는 제사장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 된 사람이 감당하는 일의 중대성은 과소평가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사라는 이름의 옷은 거룩한 예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저의 고백은 ‘주님의 은혜가 더욱 필요합니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아니면 조금도 나아갈 수 없는 자리가 또한 ‘목사의 자리’가 아닐까요.

주님의 은총이 더욱 필요하고, 함께하는 사람들의 기도가 더욱 필요하고,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는 갈고 닦음이 더더욱 필요합니다.

아마 자신의 내적 모습이 볼품없을수록 더욱 화려한 ‘예복’을 입으려고 안달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경계하며 저 자신의 존재를 예수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더욱 겸손해져서 낮은 마음을 품기를 소원해 봅니다.

목사, 그래서 조금도 눈에 띄는 어떤 옷도 필요하지 않고,

존재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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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경건회 말씀을 준비하면서 앞의 것과는 쪼금 다르게 써 보았다.

막상 경건회 때는 그림을 그리듯 전하다 보니 앞부분 이야기에서

중간 예수님 이야기는 빼고 바로 결론으로 갔는데

‘내가 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자, 전하자’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본 그대로 하기를(2)

출27

8 제단은 널판으로 속이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게 하라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본 대로 해야 할 책임이 모세에게 주어졌습니다.

대개 그리스도인들은 출애굽기 22장부터 31장까지, 더 길게 잡으면 40장까지를 읽으며

지루한 마음으로 눈을 굴려 신속히 지나갑니다.

본 대로, 그대로 전해서 똑같이 만들게 해야 할 모세는 한 눈을 팔 수 없는 긴장된 시간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 규례를 잘 지키기 위해 더 세분화된 규정까지 만들어 철저히 지키려 했으니까요.

정말 그럴까요?

그들이 정말 하나님께서 그리신 안식일의 그림을 그대로 완성한 것일까요?


아니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외치며

손 마른 자를 고치시고(마11),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를 고치신(요5) 예수님이 그 그림을 완성한 것일까요?


안식일... 출20:8, 출23:12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올려지고, 작은 자들에게 숨 돌릴 틈이 주어진 것은 누구를 통해서였습니까?


자신들은 안식일을 넉넉하게 지킬 수 있음을 뽐내며

그럴 수 없어 안식일의 규례를 범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질시하는 행위는

결코 하나님에게서 안식일을 명하시며 보여 주신 그림을 그대도 완성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구덩이에 빠진 양을 구하듯(마11:11)

불안정한 사람을 도와주고, 낫게 해 주는 예수님의 삶이 더 하나님의 그림을 온전히 완성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실(마25:40)

그 하나님을 생각하며 오늘 나에게 주시는 이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정성을 쏟을 수 있다면

그대로 함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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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그대로 하기를

출27

8 제단은 널판으로 속이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게 하라

(25:9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25:40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네게 보인대로’는 성소를 만들라는 말씀을 주시며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사용하시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할 때 융통성을 부린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칭찬하실 기술자는 자신의 능력을 한껏 뽐내기 위해 융통성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려주신 대로 그대로 만드는 자여야 합니다.

또한 이를 중계해야 하는 모세의 역할 또한 막중했습니다.

자신이 본 그대로 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런 것들을 이르실 때 단지 말씀으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 만들어졌을 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셨던 것 같습니다.

들은 대로, 받아 적은 대로가 아니라 ‘본 대로’이기 때문이다.

이후 기술자들이 작업을 똑바로 하고 있는지 노심초사 했을 모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 때 모세가 보았던 것을 그대로 할 필요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율법을 새롭게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로 하려는 마음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인 그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람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마음과 행동을 따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셨고, 그래서 그대로 하려고 노력하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외형적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을 보게 됩니다.

종교적 행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열심을 내니 말입니다.

반면 내적 삶의 자세는 전혀 그리스도의 삶을 좇지 않습니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에게 겉모습은 너무도 쉽게 벗겨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손쉽게 그리스도의 원칙을 상황에 따라 바꾸어 버리는 놀라운 융통성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몇 명이라도 삶으로 경험하고 목격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해 주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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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출26

1 열 폭으로 성막을 만들어라. 그 천은, 가늘게 꼰 모시 실과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놓아 짠 것이라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설계도를 주시면서 그 유효기간은 언제까지로 생각하셨을 까요?

우리는 대개 성막을 40년 광야 생활의 풍경 중 하나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설계도를 주실 때는 조만간 가나안에 들어갈 예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천막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 명하실 것이 아니라

돌로 만드는 것을 가르쳐 주셨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만들 신전의 설계도를 주셨다면

어쩌면 백성들이 더 기대에 차서 더 힘 있게, 더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았을까요?


어떤 분들은 성막이 광야에서 이동하는 진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성막은 광야에서 40년이 지체된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다윗을 지나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까지 그대로 유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단지 광야생활을 염두에 두고 성막 건축을 지시하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온전한 성소의 모델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까지 480년 가까이 지속된 것이 성막이었습니다(왕상6:1).

그러니 이후 만들어진 그 어떤 성전보다도 더 오래 유지 된 것이 성막이었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 새로운 천으로 갈았겠지만 그 원형은 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 있어서 성소의 재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백성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 만남이 능력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한 점입니다.
그래서 그 천막이 하나님의 위대함을 더 드러내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웅장하고, 멋진 신전을 가진 신이라면 당연히 능력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초라한 천막을 성소로 가진 신이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가졌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고, 더 큰 영광을 돌리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겉보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백성들은 만나주시는 분이 누구냐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큰 교훈을 가져가게 될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질그릇에 담긴 보배를 이야기 하며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고후4:7).


사람들은 건물에 주목하지만 그 건물은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그 안에 깃들이는 하나님께 완전한 능력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연약하고 볼품없는 천막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음으로 해서

그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최고의 성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을 때 솔로몬이 화려하게 지은 성전도 무참히 무너져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꼼꼼하게 이르시는 하나하나 빠짐없이 받아 백성들에게 전해
작은 수치 하나 틀림없이 성막이 만들어지게 해야 하는 모세의 책임은 너무도 막중한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의 손으로 만든 곳이 하나님과 백성들이 만나는 곳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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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곳을 위해

출25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출애굽기에서 가장 재미없는 부분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산에 오른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성소와 회막 건축에 대한 자세한 설계도를 받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언약궤, 진설병 상, 등잔대 만드는 법을 25장에서 명하십니다.

3D영상으로 만들어 보면 재미가 있을 것도 같은데, 그냥 글로만 대하니 정말 뭔 소린지 알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일단 이 모든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초가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드린 예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눈길을 끕니다.

예물의 존재가치는 ‘기쁜 마음’에 있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드린 예물만이 성소와 회막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성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들의 마음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이나 성소는 하나님과 백성의 마음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마음이 함께 할 때 성소와 그 안의 기명들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상징하지만,

마음이 빠져 버릴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삼상 4장에서의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기는 사건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는 어떨까요? 하나님과 마음의 만남이 있는 곳입니까?

혹시 세속적 가치가 횡횡하며 참된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사적 욕구 해소를 위해, 부질없는 외형적 체면에 매어서

마음 없는 껍데기만의 헌신으로 드림을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무리 멋들어진 모양을 하고, 화려하게 치장한다고 해도

하나님과 사람들의 마음의 만남이 없다면 돌과 나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난주에 한 아이가 헌금 봉투에 1,000원이라고 쓰고 넣어둔 쪽지입니다.

엄마가 찔러 주어 아무 생각 없이 아이의 손을 거쳐 헌금함에 들어간 어떤 헌금보다 소중한 예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받으시지 않으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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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만나는 하나님

출24

9 모세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장로 일흔 명과 함께 올라갔다.  10 거기에서, 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깔아 놓은 것 같으며, 그 맑기가 하늘과 꼭 같았다.  11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손으로 치지 않으셨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뵈며 먹고 마셨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백성들 앞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너무도 놀라운 광경 앞에 백성들은 놀라다 못해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시내산은 더없이 성스러운 장소로 보였을 것입니다.

특히 뽑혀서 올라간 70명의 장로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이 하나님을 뵈며 먹고 마셨다.”

이 얼마나 멋진 순간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먹고 마셨다니.

그런데 왜 저는 이 장면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봐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이로운 일을 경험한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일들을 벌이는 지 뻔히 알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너무 멀리 나가는 것 같아 다소 생뚱맞기까지 한 이야기를 떠오르는 대로 좀 해 볼까 합니다.


이렇게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표현할 때,

‘시내산에서 나타나신 하나님’, ‘시내산의 하나님’ 쯤으로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목격한 하나님의 모습을 기억 속에 새겨 놓으려고 안간힘을 쏟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경험한 상황 속에 아예 못 박아 놓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시내산, 시내산, 시내산...

그러나 하나님은 시내산에 살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또 그들이 시내산에서 목격한 하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전부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재대로 보지도 못했고, 볼 수도 없었습니다.

모세조차도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해 친히 손바닥으로 덮고 지나가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뒷모습만 잠시 보았을 뿐입니다(출33:23).

그러니 장로들이 하나님의 발 아래만 보았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면서 자신들의 짧은 언어로 규정하려 합니다.

이후 아람왕의 신하들이 하나님을 산의 신 운운하는데(왕상 20:23),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도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당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아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을 뿐인데,

그렇게 하나님을 한 마디로 정의하려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결국 다른 모습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알아보는 데 커다란 장애물이 됩니다.


이렇게 제한적인 감각에만 의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자세는

40일도 인내하지 못하고 바닥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는 것 너머,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범위 밖에 계신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에게 눈높이를 맞추어 주시고,

우리들을 이해시키시지 위해 몸 낮추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기 위해 보여주신 그 사랑의 크기보다

그 사건의 주변적인 것들에 얽매여 새롭게 나를 만나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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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원칙, 우상의 변칙

출23

1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너희는 다른 신들의 이름을 기억해서는 안 되며, 입 밖에 내서도 안 된다.


다른 신들의 이름이란 무엇일까요?

신을 섬긴다는 것, 믿는다는 것은 그 신의 가치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 신의 가치는 사람들에게 삶의 원칙 혹은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율례를 이르실 때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가장 경계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위 말해 우상숭배를 한다는 것, 당시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상황에 따라 여러 다른 신들을 섬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일관된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자기를 편의에 맞는 기준을 들이 들이 댈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아무래도 가진 자들의 입장에서 더없이 편리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잇속을 챙기기 위해 ‘신’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고,

약자 일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좇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의 한결 같은 원칙은 공평함과 배려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의 규례를 주시며 여종의 아들과 몸 붙여 사는 나그네,
심지어 소와 나귀의 ‘숨 돌릴 틈’을 생각해 주시는 분이시지만,

그들이 잘못했을 때조차 무조건 편들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원수와 미워하는 자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분명하고 아름다운 원칙입니까?

그런데 만약 다른 신의 이름을 부름으로서 이런 원칙들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사회는 금세 종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져들지 않겠습니까.

정의는 사라지고, 서로를 믿지 못하고, 위선과 아부가 난무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칙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하지만

우상의 변칙은 ‘그래도 된다.’고 말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래도 된다.’에 마음이 더 끌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대부분 좋게 표현해 다신교 숭배자들이고,

성경대로 표현한다면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왜냐면 가는 곳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원칙을 가지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칙의 횡횡’이 오늘날 우리들의 초상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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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보기를

출22

2 밤에 도둑이 몰래 들어온 것을 알고서, 그를 때려서 죽였을 경우에는, 죽인 사람에게 살인죄가 없다.

3 그러나 해가 뜬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그에게 살인죄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2장에서 소유권 침해에 대한 말씀을 주십니다.

그 첫 번째가 도둑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도둑이 밤에 몰래 들어온 것을 알고, 그를 때려서 죽이면 죽인 사람에게는 살인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해가 뜬 이후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비록 상대방이 도둑이라 할지라도 그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을 때는 죽이면 살인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재산이 중요하고, 다른 사람들의 것을 몰래 가져가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는 데 그것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밤에 어두워 서로를 알아 볼 수 없을 때는 내 생명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해가 떠서 상대를 알아 볼 수 있을 때는 도둑이지만 그 생명 또한 지켜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도둑일지언정 ‘사람’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십계명을 범하다 걸린 것이라 해도 그는 먼저 사람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누군가를 사람으로 보려하지 않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자기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보다도 못하게 여기지는 않는지.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하시는 말씀 속에서도 백성들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지라고 말씀하시면서도,

그 율법의 근간이 사람에 대한 믿음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요사이 유괴와 살인 등 극악한 범죄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범인이 잡힌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그 가족들이나 경찰에게나 견디기 힘든 시기를 보내게 합니다.

최근 잡힌 범인은 오락가락 진술을 번복하면서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약간의 아쉬움은 그 범인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를 사람으로 봐 주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지만 그도 역시 우리와 같은 존중받아야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이야기>

언제 아침이 시작되는가?


늦은 밤, 스승과 제자들이 화톳불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이런 저런 잡담들을 나누다가,

문득 하늘에 빛나는 달과 별들을 바라보면서 모두들 침묵에 잠겼다.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스승이 입을 열었다.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한 젊은이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멀리 있는 짐승을 보고 그것이 개인지 양인지를 분별할 수 있으면,

그 때가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 아닐까요?”


"좋은 대답이군,"스승이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답은 아닐세.”

제자들은 잠시 의논한 끝에, 두 번째 젊은이가 대표로 말했다.

"빛이 나뭇잎에 내릴 때 그것이 소나무 잎인지 참나무 잎인지를 분별할 수 있으면

그 때가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이번에도 스승은 고개를 저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훌륭한 대답이지만, 역시 내가 찾는 답이 아니네.”

제자들은 머리를 모으고 생각해보았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스승에게 간청했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해주십시오."


스승은 제자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 눈을 들여다 볼 때 형제나 누이가 보이면 아침이 밝은 것이고,

형제도 누이도 보이지 않으면 아직 캄캄한 밤중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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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복지로부터

출21

1 "네가 백성 앞에서 공포하여야 할 법규는 다음과 같다.

2 너희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종살이를 해야 하고, 일곱 해가 되면, 아무런 몸값을 내지 않고서도 자유의 몸이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시기 시작한 율법이 계속됩니다.

20장이 대원칙이었다면 21장부터는 각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첫 번째의 것이 종에 대한 것입니다.

히브리 종은 종이 된지 7년째에 놓임을 받게 될 것인데,

만약 결혼했다면 아내와 같이 자유가 되고,

자식을 낳았다면 아내와 자식은 주인의 것이 되므로

혼자 자유가 될 것인지 아니면 가족들과 계속 종으로 남을 것인지 결정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구히 종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시작이 종의 복지로부터 시작한 점입니다.

다른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아직 성막이나 제사 규례가 없긴 하지만 제사장의 규례나,

지파 지도자를 선출하는 문제나, 그들이 전쟁을 할 때에 관한 규례를 주시던가,

재산 상속 같은 가진 자들의 집안의 주요 관심사에 대한 규례를 주실 수도 있고,

사회문제가 될 수 있는 범죄들에 대한 세부적인 것들을 먼저 주실 수도 있었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종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애굽에서 종 생활을 백년도 넘게 해 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종’이라는 주제는 익숙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동족 안에서도 조금만 힘이 있고, 돈이 있어도 종을 부리고 사는 일이 쉽게 생겼을 것이고,

이 문제에 대한 정리가 시급한 사안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1차적 과심이 종, 여종, 가난한 자, 나그네에게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된 삶을 살았던 종․노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먼저 관심가지셨듯이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종, 노예, 가난한 자, 나그네에게 먼저 관심을 가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자들의 인권과 복지가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세우는데 초석이 된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왜 종이라는 제도를 인정하고 계신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의 종이라는 개념은 요즘을 말하면 하층민이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부자들의 집에 들어가 일을 도와주면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 말입니다.

자유롭게 드나들며 품삯을 받으며 일을 돕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것보다도 못한 사람이라면 아예 그 집에 머물며 일을 했겠죠.

그 사람들을 종이라고 할 수 있었겠죠.(제 생각입니다.)

 

어느 사회든 작은 자들의 한을 모른척하고 이룩한다면 분명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 전 2MB대통령이 일부 기업인들에게 모바일 폰 번호를 나눠주고,

언제든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연락하라고 했다는데,

그 분이 가진 자들의 불편, 애로, 고충을 신속하게 들어 주겠다는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냈다면,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직통전화를 종들, 여인들, 가난한 자들, 나그네들에게 먼저 열어 놓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 역시 누구에게 먼저 마음을 열고 있는지.

하나님의 요청은 너희 안에 작은 자들에게 대한 배려, 그들의 삶의 상태,

그들의 먹먹한 부르짖음에 먼저 몸 낮추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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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들의 진솔한 만남이 있는 곳

출20

18 온 백성이 천둥소리와 번개와 나팔 소리를 듣고 산의 연기를 보았다. 백성은 그것을 보고 두려워 떨며, 멀찍이 물러섰다.

19 그들은 모세에게 말하였다. "어른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시오.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죽습니다."

2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들을 시험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이며, 당신들이 주님을 두려워하여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21 백성은 멀리 떨어져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시는 먹구름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갔다.


백성들이 두려워 떱니다.

하나님께서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로 당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광경, 이제까지 겪어 보지 못했던 경험 앞에 오금이 저린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실 때 굳이 놀라운 광경을 연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떡으로 만드시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의 진위가 결정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는 그 어떤 현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 가만히 계셔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놀랄만한 자연 현상들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는 이유는 백성들을 위한 배려에 있었습니다.

그들을 겁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듣고 따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그런 하나님의 배경에 놀라기도 하겠지만,

그런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섭네, 죽겠네, 두렵네 하면서 호들갑을 떨기 보다는

기쁨에 감격하며 감사함으로 말씀을 받아야 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그 주변적인 것들을 판단의 중요한 근거로 사용합니다.

왜 기적이 일어나는 지, 그 기적을 있게 하시는 분은 누구인지에 관심하기 보다는

그 기적 자체에 몰입해 버리는 것이 그런 현상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후에 모세가 산으로 올라 간 후 40일 동안 조용하자

참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뭔가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기는 인간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꺼이 사람들의 눈높이를 맞추시는 분, 그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당신에게만 맞추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시내산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하나님과 인간의 진솔한 만남이 있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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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백성 매뉴얼
출20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해 계명을 말씀하실 때
가장 먼저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도 신이고, 또 다른 신들이 존재한다는 말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으로 생각해 보면 신이란 인간사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인지로 모릅니다.
무슨 일을 하던 마음을 두고 의지하고 믿음을 주는 대상이 바로 신이 아닐까요?
때로 힘이 될 수도 있고, 돈이 될 수도 있고, 명예가 될 수도 있고, 나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자신의 신념이 신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만들어져 있는 생각의 틀, 구조, 확신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게 되는 것,
나를 존재하게 했고,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충만한 에너지 안에 있으면서 그것을 모른척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세운 자신의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고수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여기며 삽니다.
어쩔 수 없이 버거운 인생의 짐들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일 수도 있고,
내가 만들어 놓은 가공의 신의 그것일 수도 있습니다.
신들에 의해 겹겹이 쌓여 살아가는 실존이란
도저히 하나님을 가까이, 아니 하나님께서 가까이 올 수 없게 합니다.
그것을 끊어내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님께서 안타까움으로 내어놓으시는 부탁이며, 계명입니다.

4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과 이어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 사이에 차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앞의 문장을 부연 설명하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상을 만든다는 것은 하나의 종교가 만들어 진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숭배하는 제도가 만들어 질 것이고, 조직도 만들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첫 번째 문장에서 다른 신을 두는 것보다 한 발짝 더 앞으로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봐 줄 수 없는 꼴을 연출하는 것이죠.

이는 마치 간음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도 인정하시는 이혼 사유가 되는 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한 결별의 의사를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이후에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수렁이 바로 이 우상숭배였으니,

하나님의 입장에서 강조의 강조를 거듭해도 부족함이 없는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5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질투를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이 질투를 한다는 것이 좀 의아한 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약한 인간이나 할 만한 감정으로 질투를 하시다니...

하지만 잘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투라는 것은 시기와 다르게 사랑의 감정에서 나옵니다.

질투는 사전적으로 ‘사랑의 한 형태로서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자기 이외의 인물을 사랑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대인 감정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질투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른 존재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향해 마음을 주는 것을 참아보실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삼사 대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죄 갚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천 대까지 베푸시는 은혜가 사실은 하나님의 본심인 것이다.

하나님의 본심이 어디에 있는 지 더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7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해왔습니다.

성장 시기에 따라서 이름을 다르게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이름을 그 사람의 존재와 일치시키며 성장하고 온전해 진다고 본 듯합니다.

실재 이름보다 호를 사용한 것도 어쩌면 이름을 가벼이 부르지 않기 위함이었을지 모릅니다.

본인의 이름도 그러하기에 부모님의 이름은 거의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자식이 어떻게 부모님의 존함을 입으로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부모님의 함자를 말해야 할 때는 띄어서 한 자 한 자 말했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으로 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특별한 태도를 가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는데 너무 황공하고 송구해서 도저히 그 단어 자체를 발음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써 놓은 단어만 나오면 절을 하기도 하고,

읽지도 않고 그저 ‘네 글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계명의 말씀을 충실히 따른다는 것이 그것일까요?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며 백성들이 행하기를 바라셨던 모습이 이 것이었을까?

부모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을 때, 더 중요한 것은 그 마음에 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다함없는 존경의 마음을 그렇게라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그만큼 소중하고, 귀한 분으로 여기는 마음이 밑바탕이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을 중심에 놓고서 하나님을 장식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교회의 모습이라면,

그 안에서 온갖 수식어를 붙인 찬양과 기도를 올려 드린다 해도

마음이 없다면 망령된 모임이요, 망령된 사람들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밥 먹듯 하나님을 되 뇌이면서 그의 뜻을 내 삶을 옮겨 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망령되이 하나님의 이름을 일컫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의 이름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루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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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프로포즈

출19

4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 5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6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보다 적극적인 관계의 시작은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상 한 두 명에 의해 전승된 이야기들로 한 민족의 정체를 규정하기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본격적인 관계 형성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

마치 한 여인을 앞에 두고 청혼을 하듯 하나님은 속에 담아 두었던 말씀을 꺼내십니다.

그래서 감히 출애굽기 19장의 제목을 ‘하나님의 프로포즈’라고 붙여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해내신 구체적인 사건이 있고,

누구도 방해 할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먹을 것에 마음을 빼앗길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아침저녁으로 하늘양식을 내려 주소 계시니까요.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의 선택이 유효하게 하려면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택은 바로 율법 준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언약을 지키면 됩니다.

그들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율법 즉, 어느 민족도 가져보지 못한 하나님과 사람의 계약서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장면입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약속 체결 장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으로서의 멤버십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보호자요 소유자로서 책임을 다하시게 되는 놀라운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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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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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내용의 글들을 계속 올리다 보니 내 속에서부터 멀미가 나려고 한다.
그만 할까 하는 생각도 해 보지만, 뭐 매일 성경 한 장 읽고 부담없이 생각 정리해서 올리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과정이니 뭐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올리기를 계속한다.
뭐 내 맘이니깐.히히
 

하소연입니까, 간증입니까?

출애굽기 18

8 모세는 장인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신 일, 곧 바로와 이집트 사람에게 하신 모든 일과, 그들이 오는 도중에 겪은 모든 고난과, 주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건져 주셨는가 하는 것을 자세히 말하였다.

9 그러자 이드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시려고 베푸신 온갖 고마운 일을 전하여 듣고서, 기뻐하였다.


편한 사람, 가족, 친구를 만났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 놓게 마련입니다.

사소한 일부터 힘든 일, 고통스러운 일, 참을 수 없는 일 등등의 일들을 늘어놓으며 하소연을 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만두지도 않을 것이면서 그만두고 싶다느니, 떠나고 싶다느니 넋두리를 해 대겠죠.


모세는 오랜만에 장인을 만납니다.

40년이나 함께 살았으니 어쩌면 모세에겐 아버지 같은 존재이고, 흉허물이 없는 사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모세에게 있어 이드로는 편한 사람이었습니다.

집을 떠나 애굽으로 가서 지금까지 모세는 그 전까지 80년의 인생 중 그 어느 때보다 더 긴장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오랜만에 만난 장인에게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았을 까요.

애굽에서 벌어졌던 일들, 애굽을 나와서 이곳까지 오면서 있었던 일들을 열거하자면 며칠 밤낮이 걸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들을 마음 높고 터트릴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내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을 감당하고 있는데 백성들은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고 불평만 할 수 있는 것인지,

하나님은 또 나를 더 가까이 대해 주지 않으시고, 백성들을 너무 오냐오냐 하시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털어 놓을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장인을 만난 자리에서 이 모든 넋두리를 담아 하소연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들을 도우셔서 이곳까지 올 수 있었는지를 ‘간증’했습니다.

얼마나 실감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던지 이드로는 자신이 소문으로 들었던 것이 사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확신에 찬 응답이 나오게 되었고,

이드로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한 턱 내게 됩니다.


가까운 친구나, 친지를 만났을 때 답답함을 토로하며 하소연도 할 수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힘겨운 과정이지만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이끌어 주심을 간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닐까요?

이것은 패러다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의 문제란 말입니다.

어쩌면 소위 말하는 긍정의 힘이라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요?


편한 상대를 만날 때조차 중심으로부터 주체할 수 없는 간증이 쏟아져 나왔던 모세.

그는 복 받은 자임에 틀림없고, 또 그와 함께 할 백성들 또한 복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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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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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지키실 것입니다.

출애굽기 17

7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에서 주님께 대들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므리바라고도 하고, 또 거기에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고 해서, 그 곳의 이름을 맛사라고도 한다.


하여간 이스라엘 사람이든 오늘날의 우리든 간에

눈에 보이는 상황에만 얽매어 판단을 하는 것은 매한가지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의 전후 맥락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얘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도 쉽게 모세가 누구고,

그를 자신들 앞에 세우신 분이 누구인지에 대해 망각해 버립니다.

당연히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가 어떤 지팡인지도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죠.


어쩌면 오늘의 나는

지금 내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 고통, 실패보다

더한 어려움을 지나온 과정의 결과물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때 우리들을 넉넉하게 지켜주셨고,

오늘 나로 존재케 하신 것이란 말씀입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애굽이라는 강대국에서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살 운명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은 자유의 몸이 되어 있는 것이 놀라운 일 아닙니까?

또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기적들을 직접 목격하고도 살아 있다는 것이 또 기막힌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그런 일들을 하셨고

지금도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신비롭기까지 한 일 아닌지.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 잠시의(상대적인) 목마름으로 인해

그 이전에 자신들을 구하시고 지키셨던 분을 원망하며 불평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그래서 더 안타까움을 더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지금까지 나를 지키셨듯이 오늘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불평불만에 휩싸여 신세한탄을 하며 지내기보다는

다음 순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움직이실 지를 기대하는 쪽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장 선 지도자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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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약속=율법

출16

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항의하였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 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

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이 날마다 나가서, 그날 그날 먹을 만큼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그들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하여 보겠다.

5 매주 엿샛날에는, 거두어들인 것으로 먹거리를 준비하다 보면, 날마다 거두던 것의 두 배가 될 것이다."


우리가 평소 누군가와 소통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혹시 상대방을 무시한 채 일단 내 입장에서만 감정적으로 표현하고 보는 경우가 많지는 않은지.

특히나 가장 좋지 않는 태도가 불평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에게선 이 불평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우는 소리’를 해가며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방식도 거의 ‘우는 소리’에 가까웠습니다.

물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힘들다 등등등...

자신들을 상대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그 정도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그들은 언제나 불평으로 하나님을 코너로 몰아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일관된 선한 응답이 놀랍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일 음식을 이미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것을 받아 내는 방식이 또한 원망이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니 준비된 것을 주시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은 언짢지 않으셨을까요?

그러나 16장에서 하나님은 별로 개의치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백성들이 불평할 만하다고 여기신 것인지, 아니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곧바로 모세를 부르시고는 그들의 요청대로 고기와 떡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이 말씀을 전하는 모세가 더 노를 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별로 유쾌한 과정은 아니었지만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아침저녁으로 내리시는 하늘양식을 먹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멋진 삶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또 있겠습니까요.

물론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애환이 있겠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피부로 체험했을 테니까요.

지금 우리가 하루하루 자신의 노력으로 먹고 산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두신 것들의 한계 안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 율법을 정하십니다.

만나는 매일 1인당 한 오멜을 주을 것, 6일 째 되는 날에는 두 배로 줍고 안식일에는 쉴 것.

이렇게 하나 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 맺어가는 약속으로서의 율법은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간에 생명을 담보로 맺어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율법은 생명의 안전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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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고 싫고에 의해 행동을 결정할 때는 지난 것 같다.
정황을 봐서 옳다고 여겨지는 일을 해야 한다.
여러 일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부모님과 관련된 일이 그렇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부모님의 마음을 먼저 배려하고
그 분들이 서실 자리를 미리 마련해 드려야 한다.
혹시 내가 내키지 않는다고, 싫다고 해서 머뭇거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돈이 드는 일이어도 그렇고,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어도 그렇다.
자식된 도리라는 표현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내가 이루고 싶은 가족이라는 그림을 떠올려 보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 역시 나의 '기호'에 따라 가변적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상황에 따라 변덕을 부리는 것 또한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요청이 '제발 마음을 굳게 하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시험의 목적

출15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고통의 문제는 무엇일까?

왜 하나님을 잘 믿고, 더구나 그 분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어려움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실로 놀라운 일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아마 체험을 이야기 하라면 3박4일도 모자라 녹취해서 책으로라도 내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런 흥분되는 시간을 지나고 그들이 마주해야 했던 ‘현실’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들의 길은 이름만 달리할 뿐 광야의 연속이었고,

광야는 곧 결핍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수르광야를 지나며 3,4일 물의 결핍을 경험할 때 과연 그것을 신앙의 이름으로만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타는 목마름 속에서 그 입으로 한 결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하는 시간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있으셨을까?

이건 지금의 독자의 물음이기도 하지만, 그 현장에서 온 몸으로 겪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타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시험’이라고 간단히 나옵니다.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따르는지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아직 구체적인 그 무엇도 주시지 않은 상황에서 뭘 따르라는 말씀인지 다소 생뚱맞긴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들의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이 휴가를 떠나신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고통의 상황 중에서 바른 선택을 해 주기를 바라시는 마음 가득 담아서 말입니다.

다소 가혹한 감이 없진 않지만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당신의 사람들을 단련하시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달라지고, 불리해 지더라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 주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목마름의 시간이 주어질 때, 그래서 하나님의 부재가 더 느껴질 때,

오히려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것,

그래서 삶의 태도를 흐트러트리지 않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시험을 통해 이르고자 하시는 목적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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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백인 학교에 아메리카 인디언 자녀들이 전학을 왔습니다.
몇 개월 공부하고 나서 선생님이 "애들아, 시험 칠 준비해라" 했더니,
백인 아이들이 전부 옆에 가방을 다 올렸는데 아메리카 인디언 아이들은 둥그렇게 앉더랍니다.
"애들아, 너희들 시험 친다고 했는데 왜 둥그렇게 앉냐?"
그랬더니 그 인디언 아이들이 그러더랍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이렇게 서로 의논해서 풀라고 배웠는데요."

작은책 4월호 '엮은이가 독자에게' 중에서
 

패자에서 승자로

출14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현장에 있긴 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불완전 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실로 감격스러운 일들을 겪으며 애굽을 탈출해 나오기는 했지만

백성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가장 중요한 동기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하나님에 막연한 두려움에 모세를 따라왔을 뿐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할 만큼의 능력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앞길을 막는 홍해 앞에서 불평하며 되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들 듯

바로에겐 쫓아낸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잡아오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바로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으시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 광야에 갇혀 있다고 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애굽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단절을 위한 거대한 의식이었습니다.

홍해 사건을 통해 백성들의 기억 속에 애굽은 다시 돌아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새기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보내신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애굽을 혼쭐을 내고 나오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애굽을 자신들이 노예생활을 했던 곳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완전 무장한 애굽의 군대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볼 때

출애굽은 노예의 신분으로 쫓겨난 사건이 아닌 전쟁에서 승리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자가 됩니다.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끌어 내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하신지를 똑똑히 체험했습니다.


홍해를 건넘으로 인해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확실하게 건넌 것이고,

이제 이들에게 남은 일은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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