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생들과 말하다 두 번이나 말 문이 박혔다.

반에서 석차가 떨어져서 걱정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자 마자 나오는 말이 '다음에 잘하면 되지~'였다.
그래서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괜찮아, 잘 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지. 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네가 어떠하든 소중하게 여기시는데...
이렇게 말했어야 하는거고.

또 연예인들 이야기를 하다가 모 개그우먼 이야기가 나왔다.
예쁘다 안 예쁘다 얘기를 하다가
내 입에서 바로 튀어 나온 말이 "그래도 돈을~"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이 곳 저 곳에 나오면서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데...라고 얼버무렸다.

나 역시 뭐든 잘해야 하고, 돈만 많이 벌면 된다고 하는 가치관으로 가지고 살고 있는 거다.
그런 것이 쉽게 튀어 나오는 걸 보면 스스로를 속이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닌척하면서 말이다.

청소년들에게 '괜찮아~'라고 말해 줄 수 있어야 겠고,
돈이 전부가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는 얘기를 해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가치관으로 살고 있는 어른이 되지 못한 것 같아 서글프다.

그냥 말 문이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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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아들을 둔 엄마가 있다. 누구보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다. 요사이 딸도 아들도 자신의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열심히 살고 있다. 또 각각 애인도 있어서 교회에서도 소문난 커플들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 정도면 다른 가정들에 비해서도 자녀들이 잘 지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엄마는 자녀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입이 나오고 얼굴빛이 어두워진다. 나름 공부도 잘 하고 있고, 연애도 잘 하고 있으면 그렇게 계속 가기만 바라며 지켜보면 되는 것 아닐까?
엄마 마음은 그것이 아닌가 보다. 더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겠고, 지금보다 더 나은 학과에 가서 더 전망 있는 직장에 취직하면 좋겠고, (실제로는 자신이 다 해 주려고 하면서도) 자기 일을 알아서 잘 해주었으면 좋겠고, 더 좋은 집 배우자를 만나면 좋겠고, 더 신앙 있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고, (늘 품고 있기를 원하면서) 빨리 독립해서 자기 앞가림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또 기도의 대부분을 채운다.
자식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미 많은 부분에서 자식들은 엄마를 배려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자식들을 향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자식들을 향해 그렇게 매달리는 것이 정말 누구를 위해서인지 묻고 싶다. 그렇게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면서 정말 자식들이 잘 되기를 위해서 그러는 것인가? 물론 그렇다고 대답들 하시겠지만, 경험하고 관찰해 본 바에 의하면 '아니다'이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자식의 수준을 위해서, 자기가 들인 물질을 포함한 노력에 대한 보상심리가 더 많은 부분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욕망(이런 엄마들의 태도는 욕망이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을 채우기 위해 자녀들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자녀들은 엄마의 장식품이 아니다. 자녀는 자녀 나름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이미 그들을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있다. 부모는 자녀들이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며, 진지하게 선택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지금 부모들은 모든 것을 다 결정하고, 그대로 따르라고만 한다. 아이들은 그런 부모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꾹 참으며 분노를 쌓는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그것을 되갚아 주겠다고 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엔 더더욱 그럴 것이다. 빨리 깨닫고 자녀들을 놓아 주고, 자신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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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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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부에 최근 4주를 결석한 중1 여자 아이가 있어서 전화를 했다.
아이는 전화를 받지 않아서 엄마랑 통화를 하게됐는데,
엄마 얘기로는 아이가 교회가 가기 싫어해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가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를 정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든 생각은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엄마가 교회에 오는 것에 소위 '재미를 못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엄마의 그런 마음 상태가 아이에게 영향을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청소년들은 부모와 상관없이도 이런 저런 것들을 의심하고 거부할 수 있는 시기다.
그럴 때 부모의 삶의 태도는 중요한 방향타가 된다.
그런데 요즘 문제는 오늘의 청소년들의 부모들이 불안한 정서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뭐 꼭 신앙이 없다, 믿음이 없다는 식으로 얘기 할 것까지도 없다.
요사이 아이들의 부모 세대들이 맞닥드리고 있는 세상은 불확실 그 자체다.
그 가운데 신앙적 삶도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 자녀들에게 신앙적 일관성을 보여주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속은 어떠하든지 아이들에게 일관성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부모의 바른 자세일텐데 그것도 어려움에 처한 것이다.

아이가 교회에 가기 싫어한다는 얘기도 시작했지만
사실은 부모들이 교회에 오기 싫어하는 것이 문제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 때는 결국 부모들이 자신의 신앙을 재정립해야 하는 시기라고 하겠다.
지금까지 가지고온 신앙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온 몸으로 격동의 시기를 보낸 그 위 세대 부모들로부터 공짜로 받은 신앙의 유산이
이제 모두 소진되어 버린 상태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자기 신앙이 아닌 부모의 신앙으로 살아왔다는 얘기다.
이제 그것에 대해서 중심으로부터 큰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봐도 된다.

부모들에게 말하고 싶다.
이제 좀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을 돌아보라고,
그리고 나와 하나님에 대한 진지 질문을 던지라고 말이다.
아까도 그 분에게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어떻게 들으셨을 지 모르겠다.

안타까운 것은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있다.
멈추어 서면 도태될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또 자식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스스로 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향해 채찍질을 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어찌 할까?

요즘 범 교회적으로 신앙의 대잇기를 부르짓고 있는데,
대이어질 신앙의 실체가 무엇이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얘기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 부모들, 교회가 아래 세대에게 전해줄 것이 뭔지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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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그 길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대개 보수적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 익숙한 방식을 유지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를 더 먹을 수록 더욱 보수적이 된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옳고 그름보다는 익숙하고 편한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자신과 친한 사람, 해 오던 방식을 따르는 것을 선호한다.

지금 교육계의 문제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들...
특히 교회에 잠재하고 있는 문제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변하지 않으려는 보수적 태도가 도사리고 있다.
조금도 바꾸려고 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변하는 시대를 좇아 가지 못하는 것이다.

요사이 교회나 학교 현장을 보면서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긴박감을 느끼고 있다.
지금 젊은 이들, 청소년들은 이미 바뀌어있다.
그런데 그들을 상대해서 뭔가를 시도하고 있는 기성세대들을 그것을 모른다.
아니 알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이제 더이상 한 사람 혹은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다수의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상대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왜냐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나이나 위치, 혹은 직함 등을 머리로 이해하고 권위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상대방이 얼마나 진실한지, 더 나아가 나를 향한 진심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인지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낀다.
만약 가슴으로 그것을 확신하게 되면 머리와 온 몸을 주어 버린다.

그래서 교육의 현장의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
일대 다수의 만남을 지양하고, 일대일 혹은 일대 소수의 만남이 가능한 구조로 나가야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일방적인 전달의 구조를 탈피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들이 들려 질 수 있는 구조로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획기적인 생각의 전환과 투자가 요구된다.
어쩌면 그래서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도 더 걸리고, 힘도 더 많이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교인들만 봐도 큐티 나눔이나 일대일 훈련 등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선호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니 더 젊은 세대들은 어떻겠는가?
학교에서도 전체를 대상으로 한 수업에서는 딴전을 피우고 돌아 앉아 있는 아이들이
가까이 다가가서 자신의 일대일의 인격적 접촉을 시도할 때는 태도도 달라지고, 말씨도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 지는 명확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린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야흐로 영성의 시대는 그런 영적 권위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 영적 권위란 예수님의 마음,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만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을 향해, 젊은 이들을 향해 예의가 없다고, 부모들일 가르치지 않았다고 남탓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이젠 익숙한 방식을 버리고, 기꺼이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굳어있는 몸을 유연하게 해야 한다.
일단 다음 세대들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들을 만나는 방법(본질이 아닌)을 비용이 얼마가 들던 간에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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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학교 교사들과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10주 내로 성경 전체를 살펴보자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첫 모임에서는 성경에 대한 지금까지의 생각이나 의문들에 대해서 나누고
구약성경의 전체를 조망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어제는 두 번째 모임으로 창세기를 공부했다.
두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얼마나 자세히 살펴 볼 수 있을까 만은
최선을 다해서 설명하고, 의문점들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처음 전체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잘 모른다고 하셨던
몇 분들이 세부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니까 열변을 토하는 광경을 보게 된 것이다.
일단 어느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그래도 나은데,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다른 사람의 견해에 대해 판단까지 하는 것은 좀 지나치다 싶었다.
물론 그것이 사람의 성향의 다름에서 오는 현상일 수도 있겠으나
이를 통해 성경공부의 목적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성경, 아니 꼭 성경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그 배우는 것을 통해 자신을 바꾸는 모험으로 한 걸음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고 유익할까.
그런데 그 성경을 배우면서 조금도 자신을 바꾸려는 마음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더 확고히 하거나, 다르면 모른 척 하거나 거부한다.
그에 비해 의문을 품거나 화가 나는 것은 나은 거다. 그렇게 변화가 시작되는 거니까.

변화,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꾼다는 것이 사실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고, 두려움으로 움츠려 안전만을 추구한다면
우린 온전한 사람,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도 자기 방식으로 읽고 엉뚱한 소리를 할 테니 말이다.

더 나아가 교역자로서 나에게 막중함이 다가온다.
먼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바꾸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 그들에게 나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잘 소개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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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돌아오는 절기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 '뭐 이 시기에 그 본문에 그 말씀이겠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올 해도 변함없이 사순절이 시작되었고, 돌아오는 주일이 두 번째 주일이다.
지금 어린이부는 매일 성경읽기를 하고 있고, 주 중에 읽는 본문 중에서 주일 본문을 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주에 정해진 본문은 마태복음 20:29-34의 말씀이다.
그런데 2월 마지막 주 설교 본문과 내용상 겹치는 부분이 있다.
두 소경의 치유 사건이다.
다른 복음서는 고침 받은 소경은 한 명인데 마태는 꼭 두 명이다.
가다라(거라사)의 광인도 두 명이었다.
마태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썼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증인이 두 명이 되어야 한다는 율법에 좀 더 충실하려 했던 것 같다.
신 19:15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이 전통에 의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도 두 명씩 보내셨다고 다른 복음서(막6, 눅10)도 전하고 있다.
연관을 지어 본다면 두 명의 전통은 정탐꾼 열두 명에서 실패를 경험한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탐꾼을 두 명을 보내는 것에서부터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예수님께 눈을 뜨게 해 달라는 소경이 두 번 등장하는데
9장에서의 사건과 20장에서의 사건을 어떻게 다른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을까?
그 포인트는 예수님께 있는 것 같다.
소경들이야 9장이나 20장이나 고쳐 달라는 것에 목을 매는 입장이니 말이다.

장소적으로도 9장은 가버나움 인근이었고, 20장은 여리고였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계실 때이다.
이미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이라는 수난예고를 세 차례나 하신 다음이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음가짐의 그 비장함을 빼놓고 이 사건을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정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계실 때,
어쩌면 주변에 사람들은 많았지만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뿐이었으니 혼자 외롭고 쓸쓸하다 못해
참담한 심정까지 느끼셨을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향해 또 소경 둘이 소리를 지른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이놈의 인생들은 참 어디까지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
예수님께서 지금은 그럴 정신이 아니니 돌아가라고 하셔도 됐을 법한데
예수님은 너무도 친절하게 그들을 향해 서셨고,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질문을 하셨다.

특히 교회에서 교사로서 어린이들을 상대할 때,
교사를 하겠다는 것이 대단한 결단이고, 그러하기에 교회학교 부서에 있는 것 그 존재 자체로 귀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큰 선택을 한 것인데, 나에게 이거해라 저거 해라 할 수 있어? 그리고 이 어린놈들은 그것도 몰라주고 불평하고 귀찮게 하는 거야?'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가끔씩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들이 왜 나를 몰라주느냐는 식의 생각 말이다.
우리도 그러할 진데 우리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이 무지한 인간들이 죽음 앞에 고통당하는 나를 몰라주고 또 뭘 더 해 달라고 한단 말인가?'라고 불평을 하실 수도 있는 일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런 인간들을 그들의 말처럼 불쌍히 여기셨던 것 같다.
초지일관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온전케 해 주시고 싶은 마음을 잃지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가 사순절에 묵상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이 이 마음이 아닐까.
예수님께서 당신을 내어주면서도 우리들을 걱정하고 불쌍히 여기셨던 그 마음, 
그런 여정을 걸으시며 겪으신 고통스러운 심정을 느끼고,
그 길로의 초대에 대한 응답하는 삶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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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하나님과 만남이라고 할 때, 그 만남을 이끌어 가는 쪽은 어디일까?
물론 만남이기에 쌍방이 적절하게 이끌어 간다고 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그런 대답을 하기에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대개의 기도는 하나님은 배제한 채
자신이 일방적으로 이끌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군가를 만날 때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주도했을 때 상대방의 기분이 어떨까?
더구나 그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어떠셨을까 생각해 보자.
그리고 지금까지 소위 하나님과의 만남은 잘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만약 조금이라도 찔림이 있다면 이제 주도권을 넘겨 드릴 때가 되었다는 신호가 온 것이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도록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 기도를 한 차원 높여 주는 길이 될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의 기도를 성령께 맡기는 것이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심들을 잠잠하게 하고
온전히 그 분을 인식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은 분심 그 이상으로 쉼없이 이어지는 말들을 늘어 놓는 것을 기도라고 여기고
한 순간의 끊김도 없이 쏟아 놓고 나올 때 시원하다고, 기도가 잘 되었다고 여겼지 않은가?
그러나 이젠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다.

그러면 침묵으로 가만히 있으면 될까?
솔직히 침묵으로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리 분심들을 잘 처리하게 되었다고 해도 사람이 죽지 않는 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살아있다는 증거이니 너무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성령의 이끄심에 나를 맡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뭐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겠으나 단순기도를 하는 것을 제안할 수 있겠다.
예수의 기도,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죄인인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반복할 수 있다.
좀 길면 '예수여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줄이거나, '예수님!', '주님!'등으로 더 줄여서 할 수도 있다.

또 예수마음기도를 할 수 있다. 
내가 선택해서 하고 있는 것은 '당신의 탁월하신 친절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이다.
'예수마음의 사랑이여, 제 마음을 불사르소서'나
'예수마음의 자비여, 제 마음을 용서하소서' 등을 반복할 수도 있다.
(예수마음 호칭기도문 가운데 선택)

단순기도는 기도문을 되뇌이거나 공염불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한 자 한 자를 생각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 중 하나님의 현존이 느껴지면 멈추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분심이 떠오를 때 기도문으로 돌아간다.
조금 어렵다고 생각되면 호흡과 맞추어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들숨에 '당신의 탁월하신 친절에'. 날숨에 '저를 온저히 합하나이다'를 반복한다.

기도문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성급한 마음에 뭔가 성과를 얻으려고 달려들면 안 된다.
지난 시간 나 중심의 기도습관에 너무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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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중 일어나는 분심에 미래의 일, 현재의 일과 함께 과거의 일이 있다.
계획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는 일들이 떠오를 때는 그것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또 기도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에 만나주겠다고 약속을 하며 보내고
다시 기도로, 주님 앞으로 돌아오면 된다.
이 것이 미래와 현재의 일에 대한 태도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일이 떠오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의 일이란 어떤 사회적 사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 내가 경험한 일들을 말한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과거의 일이란 알게 모르게 현재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일 수 있다.
그래서 과거의 일이 떠오를 때는 정면으로 만나 보는 것이 좋다.
하지만 과거의 일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일부러 끄집어 내려 애쓰거나, 회상을 하라는 말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찾아 오는 것을 만나라는 말이다.

과거 상처와 좌절이 무의식의 세계에 잠재되어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그것이 불현듯 떠오를 때 오늘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를 풀 수 있는 키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런 상처와 좌절의 기억이 해결되지 않을 때,
그것들은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극하여 하나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과거의 기억을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 내는 작업을 기도 중 할 수 있다.
그 시공간으로 들어가 하소연도 하고, 고발도 하고, 탄원하고 청원하는 시간을 가지게 될 때
묶였던 족쇄가 풀리듯 감사와 기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칠 때 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기도의 목적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
과거의 일을 만나는 작업 역시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기 위한 준비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나의 기도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내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것'이 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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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얘기지만 기도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의 마음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그러나 대부분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미 많은 기도를 하고 있다.
예배 중, 모임을 가질 때, 식사 할 때 대표해서 기도를 한다.
그럴 때에야 격식에 맞춘 어투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은밀한 기도 시간에 조차도
자신의 직분이나 위치를 의식한 말투나 내용의 기도한다는 것이다.
소위 말해 우리가 사회 생활을 통해 덧쓰게 된 페르소나(가면)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 가면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인데도
스스로 틀에 넣어 자신의 감정들을 배제한 채로 과장된 사실들을 나열하는 기도를 드린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과 진솔한 만남이 가능할까?
다른 말로 하면 나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의 접촉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말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우리의 유일한 신분은 어린 아이면 족하다.
아이 같다는 것은 감정에 솔직하고, 사회적 위치나 역할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페르소나에 갖히지 않은 진솔한 마음으로 하는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고, 
내면 깊이 담긴 이야기들이 남김 없이 꺼내 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마 19:13-14)
 
'어린이다움이란 다른 한 편 그것이 지닌 순진성과 무의식성 덕분에 상당히 완벽한 自己의 상, 꿈밈없는 자기의 개성을 갖춘 전체인간의 상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어린이나 원시인을 볼 때 어른이 된 문화인의 마음속에 충족되지 않는 욕구와 필요에서 우러나온 그리움이 눈을 뜨는 것이다. 그것은 적응되기 위해서, 즉 페르소나(Persona)에 맞추다 보니 전체 인격상에서 떨어져나간 인격부분에 해당된다.'
회상, 꿈 그리고 사상(아니엘라 야훼 엮음, 집문당) 20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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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하면서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소위 분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쉼없이 떠오르는 분심을 어떻게 할까?
그 분심이 어디로부터 오는 지,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을 기도 안을 가져 오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중요한 것은 분심이 없는 것이 아니며, 그 많은 분심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내는 작업 역시 기도임을 아는 것이다." 예수마음기도(권민자 지음, 성바오로) 52p

기도할 때 주로 떠오르는 분심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미래의 일들, 현재의 일들, 과거의 일들이 그것이다.

미래에 대한 분심은 뭔가 계획을 세워야 하는 일들과 관련되거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때 불안함과 함께 오게 마련이다.
그러면 일단 그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실체를 알아차리고
계획을 세우는 시간을 주겠다고 하거나,
어떻게 될지 두려워하는 일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닌
지금 기도 가운데서 크게 일어나는 불안한 마음을 그대로 아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적 분심을 지나 가도록 하고 다시 기도로 돌아오면 된다.

기도로 돌아온다는 얘기는 지금 나를 만나고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에 집중한다는 것을 뜻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하고 근심하는 데에 기도의 시간을 쓰지 말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의탁) 지금 나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현재에 대한 분심도 마찬가지다.
죽고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달래서 보내고(맡기고) 기도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절박한 상황 때문에 도저히 마음에 평온을 찾을 수 없다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

물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면 기도 시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생활 가운데서도 분심에 이끌려 살아왔기 때문에
어떤 것이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 '나'인지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덮고 있는 구름들을 걷어가는 과정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진 않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예수마음기도'를 반복할 때 거의 사투를 벌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반복해서 하는 말이지만 정말 '쉴 새 없이' 별의 별 생각들이 다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다 보면 '나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생각이 번득하고 일어난다.

기도의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기도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라면 그 만남을 방해하는 것들을 방치한 채로 기도할 수 있을까?
(계속)

(1. 예수마음배움터에 다녀온 후 노트 필기한 것과 내 생각을 정리하는 것  2. 위에 언급한 '예수마음기도'(권민자)라는 책을 주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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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의 성패는 하나님과 만남을 잘 가졌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
그렇다면 기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장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분심일까? 그럴 수 있겠다.
쉼 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이 기도를 방해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도하며 이 분심을 잘 살펴보면 오히려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돕는 소중한 소재가 될 수 있다.
내 마음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 또 어떤 쪽으로 향하고 있는 지를 알아챌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 가운데 분심을 정면으로 만나고 대화를 시도하며 그 정체를 알아가게 될 때
내 마음 안이 정리가 되고 결국에는 내 속 깊은 곳으로부터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계획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내 생각과 내 의지를 비우고, 쉼 없이 떠오르는 분심들을 하나하나 만나고 정리하며 위로하고 화해하다 보면
결국 하나님, 그 분과의 방해 받지 않는 만남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는 내가 의지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물론 하나님 앞에 있기 위한, 그리고 분심과 만나기위한 최소한의 훈련과 노력은 필요하다(예수마음기도).

그래서 기도를 정말 방해하는 것은 분심이라기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다.
자신의 의도, 자신의 생각대로 되게 하고자 하는 것들,
예를 들어 '기도의 제목'을 빙자해 끝없이 이어지는 '되게 해 달라'는 기도들 말이다.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위로를 받겠다고, 복을 받겠다고 하는 기도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엄밀히 말해서 이런 것들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만남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자기 주도적 기도의 목표들이 가득할 때 하나님이 다가 오시기 너무 힘들어 진다.
쉽게 그려보면, 하나님께서 기도자의 얘기가 끝나기를 기다리시다가 지쳐서 돌아가시는 형국인 것이다.
자신의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요원할 뿐이다.
마치 하나님을 목석으로 만든 우상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왜냐면 내 얘기만 들으면 되는 거니 말이다.

자기 이야기만 하고 오는 것이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 기도 가운데 나를 만남으로 초대하시는 성령님이 주도권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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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오래 해 오면서 기도에 대한 컴플렉스를 한 번 쯤 가져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저 사람은 저렇게 집중해서 기도를 잘 하는데, 나는 왜 시작만 하면 바로 딴 생각을 하는 거지?'
'저 사람은 저렇게 긴 시간 열정적으로 부르짓는데, 나는 왜 할 말이 별로 없는 거지?' 등등

특히 딴 생각의 문제는 쉬 해결되지 않는 것 같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념들, 그리고 심지어 졸음까지.
그래서 조용히 기도하는 것 보다는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일단 자신의 소리를 들으며 다른 것에 신경쓰지 않고 집중할 수도 있고,
슬쩍 졸음으로 빠지는 일도 방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통성기도라는 것이 모두에게 잘 맞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통성기도는 자신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하다보니
그 기도가 정말 하나님과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에
사실 마음 속으로부터 추천하고 싶은 기도는 아니다.
물론 기도를 성령께서 이끄신다고 할 때 내가 하는 말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통성기도 후에 갖는 심적 평안을 응답이라는 차원으로 설명하려 할 수도 있겠으나,
여전히 발산하는 것(한 풀이) 이상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한다.
(지극히 개인적 소견으로...)

할 수만 있다면 기도를 하나님과 소통하는, 하나님 만나는 시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게 될 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쉼없이 일어나는 다른 생각들이 문제다.
사실 이전까지는 이것을 잡념들이라 생각하고 '나는 기도가 잘 안 되'라고 생각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더 세게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사모하고 그렇게 쉼없이 내 이야기를 쏟아 놓을 수 있었을 때
스스로 크게 위안을 얻고 기도 잘 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마음배움터에서 영성피정을 하면서 이 잡념들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됐다.
잠잠해야 할 기도 시간에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좀 다른 말로 표현해서 '분심'이라고 하는데,
이 분심이 바로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는 것이다.
내 안의 무의식의 공간에서 끊임없이 의식으로 올라오는 생각들을 잘 살펴 보면
일종의 패턴이 있고, 그 패턴을 알게 되면 현재 나를 지배하고 있는 상처나 아픔의 그림자를 알게 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분심이 다 그런 것을 대변하지는 않기에 잘 살펴보고
경중을 따져보고 흘려 보낼 것은 흘려 보내고, 확인해 볼 것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놀랍고 재미있는 것은 기도 시간에 이 작업을 편한 마음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앉아서 마치 아빠 앞에 아이가 이야기 하듯
자신 안의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하면 된다.
심지어 자신을 얽어 매고 있었던 과거의 어떤 시공간을 접하게 되었을 땐
그 자리에서 그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그대로 풀어 놓는 것이다.
그렇게 분심을 알아차려 가다 보면 그 분심들에 가려져 있던 내 안에 하나님을
아무런 장애물 없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분심은 내가 살아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분심에 끌려 다니기 보다 그 분심의 정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
분심은 습관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을 만나면서도 우린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 같으면서도 금세 자신의 생각으로 돌아와 버린다.
그러다보며 자신의 이야기만 하기에 급급하기 마련이다.
만약 기도를 통해 분심을 알게 되고, 조절할 수 있게 된다면
사람들과의 만남 또한 변화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진솔한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또한 사람과의 진실된 만남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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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은 에니어그램과 함께한 한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연말에 2008년 에니어그램 교육일정을 모두 정하고 참가비까지 입금하고 밀어 붙였다.
그렇게 해서 결국 지난 10월에 지도자과정까지 모두 마치게 되었다.
그래서 에니어그램을 마스터했을까?
대답은 '아니다'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게 말하겠지만 최소한 나는 에니어그램이라는 것이 실체가 없다고 생각한다.
에니어그램은 누군가 그 앞에 섰을 때 형체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것이라 할까.
그러니 에니어그램은 도구이고 그 앞에 선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습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니어그램을 잘 알게 되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자신을 잘 알게 되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 말의 연장선상에서 얘기하면, 나에 대해서 알아가는 과정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에니어그램을 여전히 잘 모르겠다고 하는 말이 맞는 표현이라는 거다.

그런 차에 지난 목요일과 금요일에 에니어그램 첫 번째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것도 마산까지 내려가서 말이다.
물론 마산이나 되니 에니어그램에 대해 배우겠다고 나를 부를지 않았겠나.
아무튼 강의를 가겠다고 약속하고 날짜가 좁혀들수록 감당하기 어려운 압박감에 시달려야 했다.
3번 유형! 나의 유형인데, 이 유형은 뭐든 잘 하기를 원하는 데 문제는 잘 못할 것 같은, 그러니까 실패할 것 같으면 회피하려 드는 바람에 날짜가 임박해 올수록 안 하면 좋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흐르는 거다.
그래서 정말 한 주 전에는 전화를 해서 혹시 취소할 상황은 아닌지 확인까지 하고 말았다.
그러나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약간의 절망과 함께 다급해진 마음에
있는 자료, 없는 자료 모아서 강의안을 만들고,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만드느라 며칠 밤을 지새웠다.
왜냐면 잘 해야 하니까. 잘 하려면 준비를 잘 해야 하는 거고.

강의를 준비하면서 7번 유형의 목사님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다.
나는 잘 짜여진, 잘 준비된 상태에서 많은 내용을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목사님은 내용보다는 몸으로 느끼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강의만 듣고 가게 되면 남는 것이 없다는 얘기였다.
물론 7번 유형들은 낙천주의자이고 재미를 추구하기 때문에 강의를 해도 그리 부담을 서로에게 지우지 않고 즐겁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도 나의 장점과 그 목사님의 이야기를 받아들여서 체험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내용을 담아내기로 했다.
물론 또다시 강의안을 뒤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하든 진행해야 할 내용을 꼼꼼하게 담아가야 한다는 것이 내 주의니까 말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두 시간 반 씩 두 번의 강의를 했다.
웜업을 위한 게임들과 그룹작업을 적당히 넣어서 내용을 몸으로 체험하게 했다.
막상 진행하면서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많은 내용도 필요하지 않고,
걱정했던 것과 같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익했다는 나름대로 좋은 반응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 문제는 항상 나에게 있다.
에니어그램의 목표점이 하나님의 자유하심과 같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면,
난 나를 알아가고는 있지만 자유로워지는 것에는 아직 턱없이 먼 여정을 남겨두고 있다.
실패를 회피하고, 잘 해야 한다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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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지람 속에 자란 아이
비난하는 것을 배우고

미움 받으며 자란 아이
싸움질을 하게 된다.

놀림 속에서 자란 아이
싸움질을 하게 된다.

창피를 당하며 자란 아이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관용 속에 자란 아이
참을성을 알게 되며

격려 받으며 자란 아이
자신감을 갖게 된다.

칭찬 들으며 자란 아이
감사할 줄 알게 되고

공정한 대접 속에 자란 아이
정의를 배우게 된다.

안정 속에서 자란 아이
믿음을 갖게 되고

인정받으며 자란 아이
자신을 사랑할 줄 알게 되며

인정과 우정 속에서 자란 아이
온 세상에 사랑이 충만함을 알게 된다.

도로시 로 놀트(Dorothy Law Nolte)

‘어린이가 꼭 필요로 하는 일곱 가지’(존드레셔 지음, 생명의말씀사) 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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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아기를 품에 안고 있던 한 여인이 말했습니다.
저희에게 아이들에 대하여 말씀해 주소서.
그는 말했습니다.
그대들의 아이라고 해서 그대들의 아이는 아닌 것.
아이들이란 스스로 갈망하는 삶의 딸이며 아들인 것.
그대들을 거쳐 왔을 뿐 그대들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 그대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아이들이란 그대들의 소유는 아닌 것을.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순 있으나 그대들의 생각까지 줄 순 없습니다.
왜?
아이들은 아이들 자신의 생각을 가졌으므로.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마저 줄 수 없습니다.
왜?
아이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그대들은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도 가 볼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들은 아이들과 같이 되려 애쓰되 아이들을 그대들과 같이 만들려 애쓰진 말라.
왜?
삶이란 결코 뒤로 돌아가진 않으며, 어제 머물지도 않는 것이므로.
그대들은 활,
그대들의 아이들은 그 활로 쏘는 살아 있는 화살.
사수는 무한의 길 위에 한 표적을 겨누고 그의 온 힘으로 그대들을 당깁니다.
그의 화살이 보다 빨리, 멀리 날아가도록.
사수의 손길에 의해 구부러짐을 기뻐하라.
왜?
그는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는 만큼, 또한 흔들리지 않는 활도 사랑하므로.

칼릴 지브란(Khalil Gibran)
예언자(The Prophet)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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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주 주보를 만드는데, 한 쪽 면에 부모님들에게 도움이 될만 한 글들을 싣고 있다.
내가 쓰기도 어렵고 하여 이 책 저 책에서 글을 뽑는다. 사실 쉽지 않다.
오랜만에 좋은 글을 발견했다. 언젠가 들어보고 감탄을 했던 것인데, 전문을 발견한 거다.

얼마 전 어떤 엄마가 자신의 딸 얘기를 하면서 '내 것'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것을 듣고는
속으로 이 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글이다.
물론 너무 이상적으로 들리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그대는 활'이라는 제목은 내가 임의로 붙여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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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의 에니어그램 지도자 과정이 시작됐다.
4월부터 시작해 7월 중순부터 8월까지만 빼고 10월까지 장장 6개월 간
매 주 화요일 오후 시간을 온전히 투자해야 한다.

오늘은 그 첫 번째 모임!
원래는 20명까지 신청 마감인데 신청자가 많아 다 거절하지 못해 28명이나 함께 하게 되었다.
대략적인 진행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있고 난 후 한 명씩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두 번째로 소개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 분이 좀 길게 하셔서 짧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갔다.
그런데 나도 내가 생각한 것만큼은 짧게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들어와서 계속 되는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는데,
아니 참석자들의 이야기가 왜 그렇게 긴지.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들어가면 될 텐데 
소개 항목에도 없는 이야기들을 꺼내서는 장황하게 말하는 것이다.
한 참석자는 어찌나 우울하게 말하던지 불쾌감이 몰려와서 참느라고 혼났다.
그렇게 하다 보니 원래 5시에 끝나야 하는 데 거의 6시가 다 되어서 끝이 났다.
첫 날이고, 서로를 알아야 하는 것도 좋지만 좀 감당이 안 되는 시간이었다.

평소 나는 주로 말을 하는 입장에 선다.
그런다보니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하고
아무 대꾸가 없으면 '없으시면 마치겠습니다.'하고 넘어가 버릴 때가 많다.
그런데 앞의 것과 유사한 경험들을 하면서 깨닫는 것은 모든 사람들은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분위기를 봐서 꺼내 놓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나만 잘났다고 내 말만 늘어놓고서는 만족해하며 잘 전달되었겠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너무 좋은 말을 해서 다른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태도인지 깨닫게 된다.

지혜로운 태도는 어떻게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려고 들기 보다는
가능한 더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을 충분히 들어 줄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갈고 닦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왜냐면 그들은 나를 향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을 테니 말이다.
눈빛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라고 소리 지르면서
입으로는 '할 말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일까.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어떤 이론이나 검사 도구를 하나 더 익힘으로부터 온다기보다는
진심으로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음에서부터 오는 것이라 생각된다.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MBTI, 에니어그램이 중요하지만 한 사람이 내 앞에 있을 때는
그 사람의 눈빛과 몸짓과 그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이 더 중요한 이해의 도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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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다.

요즘 아이들은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을 배려 할 줄 모르는 것이 특징이다.
거기에 더해 자기의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한다.
참지 못하고, 스스로 분을 삭이지 못하며 어린이답지 않은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80년대의 학교에서도 간혹 그런 아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옛날이 좋았다는 그런 식의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요즘 아이들은 나름대로 충분한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자유롭고, 창의적이고, 의사표현이 분명하고, 아는 것도 많다.
이와 같은 장점들을 충분히 살리면서 자신 아닌 다른 사람들과 건강하게 공존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면 의례히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다.'
아이들이 보이는 태도나, 말버릇(잘 사용하는 단어)은 부모를 반영한다는 얘기다.
그러니 아이들이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부모를 고스란히 닮은 것이란 말이다.
더불어 아이들이 갈등상황을 풀어 가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 역시 그런 연유에서 오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럼 부모의 어떤 면이 아이들에게 영향을 준 것일까?
그것을 원인을 생각하려면 일단 핵가족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어린이들의 부모가 된 이들은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넘어오는 경계에 살았던 사람들이고,
지금은 거의 다 핵가족으로 살고 있다.
그러면서 더 이상 자신의 가족 외에 다른 친지들(대가족에서는 한 지붕 아래서 살았을)과의
유대관계가 모두 해체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아이들의 엄마들은 친지들을 남 보듯 하게 되었고,
때로는 작은 갈등의 소지들을 크게 키워서 의절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가장 잦은 일은 시부모와의 심각한 갈등의 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지내는 것이(보지 않으니까) 더 편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재대로 연결된 관계가 없는 집들이 많다.
지금 어린이들의 부모들은 위기나,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아이들이 이런 부모 아래서 자라다 보니 갈등을 풀어 가는 능력이 거의 바닥일 수밖에 없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교사인 부모로부터 보고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 간에 싸움이 생기게 되면 옛말처럼 신속하게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 되는데, 여기까지는 예전에도 보아왔던 것이라면
상황 파악을 뒤로 하고 오로지 자기 아이만 두둔하고,
부모들의 싸움은 훨씬 장기화 시키는 것이 과거와는 다른 점이다.
어느 쪽도 양보하려는 노력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갈등을 풀어가는 능력을 배양하지 못한 부모들에게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 하겠지만
정말 이 것을 지켜봐야 할 때는 답답하다 못해 (좀 과장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부모들은 아이가 멋진 사람으로 성공하기를 바란다.
자신들이 보여 주지도 않는 모습을 아이들이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마중물도 넣지 않고 쇳소리 나는 마른 펌프질을 해대는 격이라 할 수 있다.
부모 자신의 절제 없이 아이들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할 수만 있다면 부모들은 자신의 성품, 습관에 집중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아이들의 어떠함에 집중해 시간 보내지 말고 자기를 들여다 볼 시간을 갖는 것이 더 필요하다.

한국 사회가 너무 급하게 달려온 탓에 잃어버린 것이 많은데,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하고,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 것이 가정인 것 같다.
지금의 부모들이 부모역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신들도 역시 역할 모델을 잃어 버렸다.
그들만 나무랄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 하지만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라서...
정말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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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숭교회 교회학교는 통합교육을 하고 있다.
대개의 교회들처럼 유년부(초1-2), 초등부(초3-4), 소년부(초5-6), 중등부(중1-3), 고등부(고1-3)로 나누지 않고,
어린이부(초1-6학년), 청소년부(중1-고3)로 통합해서 부서를 만들고 예배와 행사를 함께 진행하는 것이다.
반(어린이부는 사랑방이라고 함)도 학년을 섞어서 편성을 한다.
벌써 청소년부는 4년여, 어린이부는 3년여의 기간 동안 통합교육을 해 오면서 노하우도 쌓였지만,
여전히 교회 내에서의 이런 형태의 교육 시스템에 대한 의구심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때론 통합교육을 진행하는 주체로서 어려움이 없는 것도 아니다.
여러 학년을 섞어서 하다 보니 눈높이를 맞추는 것도 쉽지 않고
또 인원이 많다 보니 뭔가를 집중해서 하기도 쉽지 않다.
인원 문제는 통합교육의 문제라기보다는 부서실의 문제이니 논외의 사항이라 생각하고,
부모님들이 지적하는 것 중 하나가 사랑방(어린이부에서 반을 사랑방으로 부름) 모임 때
남자 아이들 간의 갈등 상황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지난주에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2학년과 4학년 남자 아이 둘이 티격태격하는 일이 있었다.
문제는 갈등의 상황이 아니라 선생님이 그 상황을 풀어보려고 하는 데서 발생했다.
2학년 남자 아이가 도무지 선생님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되려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분에 못 이겨 눈물을 지었고, 선생님을 째려 본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아이들의 입장에서 배려하며 이야기를 풀어 보려는 선생님이라도 황당할 수밖에 없었단다.
그래서 선생님은 일단 말귀를 알아듣는 4학년 아이는 타일러서 보내고 좀 더 지켜보며 이야기를 하다가
할 수 없이 밖에서 기다리는 엄마를 불러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나오는 데 뒤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그 아이가 4학년 아이의 부당했음과
자신의 정당했음에 대해서만 변명을 하더라는 것이다.
사실 그 선생님이 지적했던 것은 그 아이가 선생님 앞에서 보인 태도였는데도 말이다.
아마 예측하건데 그 엄마의 성향으로 봐서 아들의 이야기를 맹목적으로 믿고
4학년 친구는 물론 선생님까지도 다른 눈으로 보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으며 통합교육이 더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2학년 남자 아이는 그 집의 '독생자'였다.
그래서 그 아이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뭐든 장애 없이 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있었던 것이다.
최소한 두 명 혹은 그 이상의 형제들이 함께 자라는 집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형제들이 많으면 동생들은 바르지 못한 행동을 할 때 형에게 제재를 받게 된다.
때로 부모님 몰래 얻어터지기도 한다.
그래도 자신이 옳았다면 부모님 앞에 형을 정정당당히 고발하는 과정을 거치며 형에 대한 정의의 심판을 내리게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형들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형들에게 형으로서의 의젓한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더 낫다.
형제가 많은 집의 아이들은 그 만큼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볼 기회를 많이 갖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집 밖에 나와서도 다른 친구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즘 아이들 중에는 혼자인 아이들이 많다.
혼자가 아니더라도 부모들의 주 관심이 자녀들의 성품보다는 능력에 있다보니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적절하게 풀고 조절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집에서 더이상 접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하나밖에 없는 자녀들에 대한 부모들의 지나친 애착이 아이들의 성격을 외골수로 만들어 버린다.
아이들은 자신이 느끼는 욕구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모두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해소하는 능력의 부재가 더 심각한 문제이다.
그래서 통합교육은 필요하다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려고 한다.
집에서 경험할 수 없는 갈등들을 경험하는 장이 필요하고,
아이들이 그 갈등을 건강하게 풀어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부모의 지지와 협력이 필요하다.
아쉬운 것은 교회에서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에 좋은 기억만 남겨도 아쉬울 시간에
갈등 과정을 길게 끄는 것이 선생님들에겐 때로 상심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모들에게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까? 또 하나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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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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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간의 소통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무엇일까?
상대방의 진심이 담긴 마음을 읽는 것을 가장 장애하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하며 상대방의 말의 끝을 좇아가게 된다.
대개는 상대방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머릿속으로는 오로지 자신이 할 말을 준비하느라 바쁜 것이 사실이다.
상대방의 말이 빨리 끝나기만을 학수고대 한다.
그러다 안 되면 확 잘라 버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말을 통해 거의 모든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평상시의 대화야 그렇게 되든 말든 별 상관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이 격해져 말다툼을 할 때나 하소연을 할 때가 문제다.
조금만 잘못하면 말꼬리를 잡으며 서로 큰 소리를 내게 되고,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히게 된다.
말의 옳고 그름을 따지며 몸싸움으로 번지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허탈함만이 남을 뿐이다.
지나고 보면 '내가 정말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것이 아니었는데'하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은 자신의 말이 자신의 본심과 다르게 나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상대방의 마음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더 한 단계 높은 소통의 방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상대방이 말을 할 때 그 사람이 하는 말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있는 그 사람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상대방의 감정의 변화, 그런 말을 하는 내적 동기,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집중하는 것이다.
때로 그 사람은 자신이 내 뱉은 말과 정반대의 감정 상태에 대해
공감을 받고 지지를 얻음으로써 큰 위로를 받으며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하는 말이 틀렸다고 말하고 접근하기 시작하면
서로 자신의 본심은 밀어 둔 채로 서로의 말에 집착하며, 말로 말을 이기려고 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지 그 사람의 형편과 감정을 공감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금방 태도를 바꾸고 진심어린 마음을 드러낼 지도 모른다.

이것이 코칭에서 중요한 스킬 중 하나다.
'상대방의 말에 집중하기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에 집중하라'
그래서 그 사람이 하는 말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한 질문을 하기 보다는
그 사람이 그 말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의 변화나,
말의 중심이 되는 당시에 기분이 어땠는지를 묻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간다면
'인간 행동의 기저에는 반드시 긍정적 의도가 있다'는 NLPia코칭 철학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말이 과격하고, 부당하게 터져 나올 때에 조차도
먼저 그 사람의 내부에는 긍정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는 상대방이 그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정말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물으며
긍정적 의도를 함께 찾아 공감해 준다.
그런 다음에는 그 긍정적 의도를 충족시킬 수 있는 다른 창조적 행동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게 말(행동)하는 긍정적 의도는 뭐지요?'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소통에 있어 엄청난 패러다임 변화를 가져다 줄 것임에 틀림없다.
긍정적 의도에는 자기 승인, 애정, 건강, 자기 방어, 성장, 자유 등이 있을 수 있다.

좀 생뚱맞기는 하지만 성경을 읽으면서도 이런 자세는 도움이 된다.
때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노를 발하시며 심판을 선언하실 때가 있지만,
비록 심판이라는 극단적인 말씀을 하시지만
그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본심은 사랑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가장 탁월했던 사람이 모세였다.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죽이고 모세로 다시 시작하겠다고 하실 때,
모세는 하나님의 진심을 알고는 더 앞서 나가서는
다른 민족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뭐라고 하겠냐고 하면서 만류한다.
실은 하나님께서 말씀처럼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뚫어 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때로 더 큰 소리로, 때로는 납작 엎드려서 하나님을 막아서서,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방법으로 나아가시도록 도왔던 것이다.
만약 모세가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했더라면
하나님은 오히려 모세를 괘씸해하시며 그의 뒤통수를 날리셨을 지도 모를 일이다. (좀 발칙한 상상!!! 용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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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성경유형 검사를 하면 16가지 유형 중 하나가 자신의 유형이라는 결과를 얻게 된다.
지표라고 하는 I-E(내향-외향), S-N(감각-직관), T-F(사고-감정), J-P(판단-인식) 여덟 개를 조합한다.
예를 들어 에너지의 방향이 내향이고,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감정으로 결정하고,
판단적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다면 INFJ유형이 되는 것이다.

94개의 간단한 문제를 풀고 자신의 유형을 곧바로 알 수 있는데,
그 유형에 대한 설명이 대개는 거의 정확하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유형을 네 개의 이니셜로 된 글자로 받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유형이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주의하고 개발할 것은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그럴 때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보다 향상된 인간관계를 영위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MBTI의 각 유형을 하나하나 설명할 수도 있지만,
네개씩 묶어서 설명하는 방법이 있다.
-기능(ST, SF, NF, NT라인), 기질(SJ, SP, NF, NT), 사분할(IS, ES, IN, EN), 태도(IJ, IP, EP, EJ)
그 중에서도 기질로 설명되는 것이 가장 흥미로운 것 같다.
특별히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연결해서 설명할 때 이해하기 쉽다.

ISTJ

ISFJ

INFJ

INTJ

ISTP

ISFP

INFP

INTP

ESTP

ESFP

ENFP

ENTP

ESTJ

ESFJ

ENFJ

ENTJ


디오니시우스(SP)기질
SP유형인 디오니시우스는 자신이 발견해 낸 사실에만 반응하는 현실주의자이며 술과 육체의 즐거움 속에서 기쁨을 누렸다. 그는 인간에게 성의 즐거움에 대한 이해를 갖게 했다. 충동적이 되기를 원하고, 충동적이 될 때 살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충동이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해야만 하며, 충동이 하라고 하는 한은 그 행동을 계속한다. 이들은 신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으며, 상징적인 것에 대체로 무관심하고, 도구를 주인으로 섬긴다. 그 어떤 유형보다 도구사용에 숙련성을 보인다.

에피메테우스(SJ)기질
프로메우스는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아버지인 제우스가 주는 어떠한 선물도 받아들이지 말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자기 자신이 했던 충고에 따라 제우스가 그를 위해 만들어낸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제우스가 판도라를 에피메테우스에게 주려고 하자 에피메테우스는 형을 본받아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그러자 제우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노발대발하게 되었다.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에게 내린 가혹한 형벌에 놀란 에피메테우스는 비록 이 선물, 이제까지 창조되었던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에 따르는 위험을 충분히 알고는 있었지만, 서둘러 자기가 내렸던 결정을 재고하여 판도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판도라는 곧 호기심에 굴복하여 올림푸스에서 자기가 가져오기는 했으나, 제우스로부터 열어보면 안 된다는 명령을 받은 금으로 된 상자를 열었다. 에피메테우스는 그의 아내가 금지된 상자의 뚜껑을 들어 올리고 난 후에 조차 그녀를 말리지 않고 모든 종류의 악이 인류에게로 쏟아져 나오도록 내버려두었다. 노년, 노고, 질명, 어리석음, 악덕 그리고 열정 등이 쏟아져 나왔다.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와 함께 극심한 고통을 겪었지만 결코 그녀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훌륭한 분별력을 가지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 이제는 온 세상에 퍼진 이러한 재앙들에 대한 방패로서 그를 안내해 줄 “해야 하는 것”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을 추구하게 된다. 에피메테우스가 판도라와 결혼하라는 제우스의 요구에 응했을 때, 그는 처세하는 지혜를 얻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여론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는데 대한 지식을 얻은 것이다. 이와 같이 순종하므로써 에피메테우스는 양심에 관한 자기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인류의 모든 악을 경험했지만 그러나 그는 또한 판도라의 상자에 있었던 악 가운데 단 하나의 선인, 희망과 예언이라는 보물을 가지게 되었다.

프로메티안(NT) 기질
생명이 없는 그 자신의 조각에 실망한 프로메테우스는 미네바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녀는 그를 하늘로 데려갔고, 프로메테우스는 그곳에서 태양의 바퀴에서 불을 훔쳐온다. 훔쳐온 불을 그가 만든 사람의 가슴에 댐으로써 그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준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그의 도벽에 대한 대가를 “쇠사슬에 묶여 못에 박혀 하늘아래” 버려지는 벌로써 지불한다. 독수리가 날아가 그의 간을 하루 동안 쪼아 먹는 일을 해를 거듭하여 끊임없이 반복한다.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에는 끝이 없었다. 손발이 묶여서 절벽에 못 박힌 채 추위와 바람과 서리를 맞으면서 그의 간은 다시 자랐고, 독수리는 그 간을 다시 쪼아 먹었다. 프로메테우스는 하늘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을 무지로부터 구출했다. 그는 인간 발전의 철칙을 선도하였으며 인간을 위해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선사하였다.

아폴로니안(NF)기질
그리스 신화 속에서 아폴로는 신들과 인간 사이의 직접적인 매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인간으로 하여금 사명감을 갖게 하고, 이미 세속의 악을 알고 있는 그들에게 성스러움을 발견해 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폴로는 자발적인 진리의 전달자였다. 그는 인간들을 위해 아버지 제우스의 뜻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아폴로는 그리스 정신의 이중성을 상징한다. 이상, 진리, 미, 영성, 신성함에 대한 바람과 더불어 불경함, 추함, 타락함, 육감적인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는 그는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로서 헌신적으로 타인을 도우며, 위안을 주는 음악과 노래의 전달자로서 그리스인의 이상이다. 그는 마음과 육체의 치료자이며 예언의 전달자, 신들의 대변자이고, 영감을 주는 신성하고 깨끗한 존재였다. 아폴로의 야성적이고 광폭한 면이 폭발하는 것은 오직 그의 우위성이 도전받거나, 인간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 주려는 그의 노력이 좌절되었을 때 뿐이다. 아폴로의 내면에는 사명감, 인간에 대한 존중, 주체성의 추구뿐만 아니라 필요 하다면 기꺼이 살인을 하고, 제사의식 중에 여사제들을 음흉하게 이용하려 하고, 마침내 아버지 제우스를 배반하기까지 하는 제어되지 않는 욕망이 함께 존재한다. 그에게 성스러움과 불경함이 동시에 내재되어 있다.

출처 '나의 모습 나의 얼굴'(한국심리검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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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로부터 시작해 주일을 향해 하루하루가 더해 갈 수록
플래너에는 내가 해야 할 일들, 결정해야 할 일들이 하나 둘 늘어 간다.
우리 부서에는 최소한 두 명, 많게는 서너 명의 교사들이 적극적으로 일을 찾아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일을 스스로 짊어지려는 행태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왜 나는 주일을 향해 내 손으로, 내 생각대로 해야 할 일들을 축적해가는 것일까?
그 답을 지난 주에 깨달았다.
교사들을 믿지 못해서도 아니고, 내가 일을 잘 한다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내 주변에서, 특히 우리 부서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내가' 정답을 주려하기 때문이다.
어떤 과업이 생각나면 그 것을 끙끙거리며 결론을 만들어 내야만 하고,
그 결론을 교사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 일을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교사들은 수동적이 되고,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코칭의 철학에 '사람들은 각자 자신 안에 해답을 갖고 있다'는 것이 있다.
내가 꼭 결정을 해 주지 않아도 각자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얘기다.
이것이 내가 '이렇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려 하는 것을 멈추고,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고 묻는 쪽으로 바꾸어야 할 이유이다.
더이상 모든 '공'을 내가 움켜 쥐고 있지 말고, 교사들에게 던져 주라는 것이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리고 뭔가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는 각자가
스스로 해답을 찾고, 그 것으로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해 나갈 수 있도록
각각의 작은 공들을 던져주는 역할이 나의 일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 역할이 결국 그들을 성공하게 만드는 코치의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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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칭이란?

사람세움/코칭 2008. 1. 25. 22:27

코칭이란 무엇일까?
뭐 내가 짧은 지식으로 말해 봐야 당연히 부족할 것이 분명하여,
아래에 자료들(책)에서 코칭에 대한 정의들을 뽑아봤다.
먼저 내가 간단히 정의를 해 본다면 '코칭은 마음으로 듣기'라고 정의하고 싶다.
실제 코칭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잘 듣는 것 만큼 더 훌륭한 코칭은 없는 것 같다.
어떤 멋진 질문을 할까 고민하면서 듣는 것이 아닌,
상대방에게 몰입하여 그 사람의 감정의 흐름, 몸의 작은 떨림까지 함께 느끼며 들을 때
정말 나도 놀라는 너무도 적절한 질문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코칭은 상대방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전제하고,
그 사람의 성장을 진심으로 바라며 기다리며 듣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코칭이라고 하니까 왕왕 컨설팅, 멘토링, 카운셀링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아주 간단히 차이점을 살펴 보면,
컨설팅은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코칭은 그 해결책을 스스로 발견하게 한 후 그 해결책을 스스로 재생산할 수 있도록 과정을 공유하고,
능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멘토링은 코칭의 형태와 매우 유사하지만,
멘토링은 멘토와 멘티의 관계가 수직적이며 상호간의 인간적 개입이 더 깊다는 점이다.
반면 코칭은 수평적 파트너십이며, 깊숙한 개입이 있을 필요가 없다.
카운슬링이 과거 지향적인 면이 많은 반면,
코칭은 철저히 미래 지향적이다. 코칭의 대상은 치료의 대상이 아니다.


코칭의 정의들

코치가 파트너, 지원자가 되어 코치받는 사람과 지속적인 협력관계를 통해 그의 잠재능력을 극대화시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코칭은 상대가 바라는 목표를 향해 자발적으로 행동을 촉진하게 만드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코칭 클리닉_한국코칭센터 2일 과정 워크샵

코칭은 상대의 안에 있는 답을 끌어내고, 행동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목표는 그 결과를 가지고 '스스로 답을 발견하고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을 육성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또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은 지를 상대 자신이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코칭대화 기술(이토하키라, 김영사) 115p

'코칭'이란 개인의 자아실현을 서포트하는 시스템이다.
마법의 코칭(에노모트 히데타게, 새로운 제안) 55p

코칭은 한 개인이나 그룹을 현재 있는 지점에서 그들이 바라는 더 유능하고 만족스러운 지점까지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기술이자 행위이다. 코칭은 사람들이 자신의 비전을 키우고, 자신감을 가지며,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돕는다. 또한 스스로 기술을 증진시키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실제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돕는다.
'코칭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를 성장시키도록 돕는 과정이다.' -로우 타이스
크리스천 코칭(게리 콜린스, IVP) 21p

코칭은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묶여 있는 개인의 잠재력을 풀어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코치의 가르침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배우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티머시 골웨이(하버드 대학교 교육학자 테니스 전문가)
코칭 리더십(존 휘트모어, 김영사) 17p

상대의 존재가치와 숨은 열정을 경청해 주고 상대가 그것을 명확히 인식하여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지지하고 격려하고 상호책임을 지는 것이다.
부모코칭(정진우 우수명, 아시아코치센터) 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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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에게 교회사역, 다음으로 배우고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코칭, MBTI, 에니어그램이다.
그 중에서 코칭에 대해서는 정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굴뚝 같은데
차일피일 미루다 제대로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만한 글을 쓰지 못했다.
하여 일단 코칭을 배우는 과정에서 독후감으로 제출했던 글을 올린다.
이렇게라도 시작을 하고, 조금씩 정리해 해 가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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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서 많이 드는 생각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든지 일방적인 것은 잘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잘 먹히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런 현상은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이것이 옳다’,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주는 것에 대해서 곧바로 ‘맞다’고 응답하지 않고, ‘그것밖에 없나?’, ‘그렇게 밖에 얘기할 수 없나?’라고 한 번 더 생각하거나 반대 생각을 하게 된다. 반면 내가 감탄을 하며 받아들이는 것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맞았을 때, 내가 거치고 있는 과정과 유사한 과정을 통해 이른 사실들에 대해서는 주저함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코칭은 너무도 적절한 커뮤니케이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마법의 코칭」의 저자가 책의 시작부터 언급하는 해답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온 이유다. 해답을 일부 사람들만 향유했던 시대가 끝이 났다는 것, 지배․종속의 관계에서 협동의 인간관계로 변화했다는 것, 상류와 하류가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적절한 관점이 아닐 수 없다.
어설픈 코치로서 클라이언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전히 내 생각을 주입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 나를 본다. 그런 나 하나도 변화시키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상대방을 만나고 있는 나를 변화시키려는 시도 그것이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 나오는 ‘영향력의 원’ 개념처럼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를 변화시키는 생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저자의 제안에 시선이 멈춘다.
코칭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X이론에 물들어 있고(철학1 모든 사람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내가 가진 답이 정답이라고 주장하고(철학2 그 사람에게 필요한 해답은 모두 그 사람 내부에 있다.), 파트너이기보다는 지시하는 입장이었던 것 같다(철학3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그러니 내가 사람들의 자아실현을 돕는 코치라고 말하는 것이 정말 마음속으로부터 찔리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5가지 코어스킬로 질문스킬(확대질문과 특정질문, 미래질문과 과거질문, 긍정질문과 부정질문), 경청스킬(부하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을 듣는 것), 직관스킬(생각하지 않는다. 예측하지 않는다. 리드하지 않는다.), 자기관리스킬(머리 관리, 마음관리, 몸 관리, 시간관리), 확인스킬(미래 확인 - 목표 상기, 현재 확인 - 가치관 확인, 과거 확인 - 성공체험 확인)을 제안하는데,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하고 싶지만, 실제로 실천하지 못하는 면이 더 많기 때문에 잘 모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코칭은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변화(지시명령형→질문형)와 패러다임 환경(X이론형→Y이론형)의 변화를 통해 메타성과(눈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수치화하기 어렵다. 예방요법, 전체적, 지속적)를 올릴 수 있도록 해 준다고 말한다. 메타성과의 정의를 보니 어쩌면 답답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좀 더 큰 틀에서 보면 보다 긍정적이다 못해, 실제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 같다.
저자도 이야기 했지만 서브스킬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도 아쉽고, 상사와 부하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도 좀 마음에 안 들지만, 또 책을 한 권 읽음으로 인해 큰 과제를 하나 더 얻게 되었다. 하나라도 더 알았으면 그만큼 더 잘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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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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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 주일 오전 교사미팅 때

때로 전화를 했을 때 믿지 않는 아버지가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 거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어머니가 받아주셨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차분하게 인사드리고 용건을 이야기하면 잘 들어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전화하는 쪽보다 받으시는 분이 더 쑥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신다면 너무 두려워 할 것도 없습니다.
사실 더 어려운 것은 잘 못 알아들으시는 할아버님이 받으실 때입니다.
어! 어! 하시다가 서둘러 끊어 버리시니까요.
전화할 때마다 아버지나 다른 사람이 받는 일이 반복되면 그 어린이의 집으로 전화할 때 망설여지게 됩니다.
그런데 좀 다른 측면으로 생각하면 전화를 매 주 하게 되면 교회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전화 오는 것이 귀찮아서라도 아이들 보내주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너 또 안가면 또 전화 온단 말야!'라고 말 할 수도 있죠.
이것은 마치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재판장의 태도와 같습니다.

누가복음 18:1-8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또 부모와 아이들은 정기적으로 걸려오는 선생님의 전화를 기다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금요일 일정을 선생님이 전화하시는 시간을 중심으로 짜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과외를 하거나 가족모임을 한다는 것이지요.
선생님께서 맡으신 아이의 가정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어 보입니다.

어이들에게 전화하는 일, 좀 더 적극적으로 해 주세요. 그리고 주 중 만나시는 일도 계획해 주세요.
 

1. 매 주 전화를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2. 전화 심방을 어렵게 하는 걸림돌은 무엇입니까?
 

3. 어떤 도움이 있다면 그 걸림돌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
 

4. 자 그럼 이제 어떤 다짐을 해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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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슬픈 일이 있었다.
어린이부 2학년 꼬마가 차 사고로 하나님 품으로 간 것이다.
후진하던 차량의 운전자의 부주의로 난 사고였다.

아홉살 꽃다운 나이에 우리의 곁을 떠난 아이...
매 주일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160명이 넘는다.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알고 부모나 형편에 대해서 아는 아이들이 있지만,
그런 아이들은 소수이다.
겨우 이름을 90% 정도 알고 있을 뿐,
그 아이들에 대해 자세한 사항을 알진 못한다.

그 아이들 중에서도 이 친구는 그래도 이름도 알고,
성격이나 모습에 대해서 몇 마디 할 수 있는 아이였다.
이유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나오지만
형과 함께 워낙 개구장이여서 누구보다 빨리 파악이 된 친구였다.
또 담당 선생님이 매 주일 아침 전화를 해야 나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아이의 슬픈 소식은 여러가지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매 주일 만나는 아이들이 어느 순간 어떤 일을 당할 지 알 수 없다는 것,
혹 아이들이 예배당에 왔다 가는 시간을 소중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 것은 아닌지,
아이들에게 주님 안에서의 삶을 얼만큼 알려주었는지, 또 그렇게 살도록 했는지,
내가 나의 역할을 똑바로 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오는 주일부터 더 강하게 아이들에게 요청, 요구, 설득, 강조 해야 하나 라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강렬하게 든 생각은
아홉살이란 나이에 하나님 품으로 간 것에 대한 생각이다.
이제 서른 일곱 해를 시작한 내 나이의 숫자의 의미가 크게 다가왔다.
마감되지 않고 해마다 더해지는 숫자들, 그것을 더해주시는 분의 뜻은 무엇일까.
결국 그 모든 의문의 짐은 남은 자들의 몫으로 남는 것이리라.
그 친구의 가족, 친구들, 그리고 나에게까지.

내일 설교 주제가 '찬양의 예배'이다.
그래서 더더욱 그 아이가 생각난다.
인생들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이의 숫자를 더할 수록 더 영악해질 뿐 순수함을 찾아 볼 수 없어 지지만,
그럴 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수한 찬양을 더 받으시길 원하시지 않을까.
내가 그토록 꿈꾸며 이루려고 하는 것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인지도,
오로지 하나님을 향한 나의 마음이 남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아버지가 사고를 낸 차량이 속한 고물상을 없애자는 서명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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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랫만에 글을 써서 내 블로그지만 좀 어색하다는...


지난 8월부터 시작해 12월까지 MBTI 전 과정을 수료하고, 일반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뭐 워낙 대중화 되어 있어서 마치 운전면허증을 딴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만 정작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듯해서,
나름대로 관심을 갖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은 누군가에게 뭘 해 주려는 의도보다는 나를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집중했던 것이다.

그리고 올 해는 에니어그램을 시작했다.
MBTI와 사뭇 다른 성향의 유형검사 도구인 에니어그램도 마스터하고 싶다는 강한 동기로.

MBTI는 몇 번을 가도 16가지 유형별 이니셜들이 익숙해지지 않아서 어려웠는데,
반면 에니어그램은 한 번 다녀왔는데 9가지 유형에 대해 그림이 그려진다.
물론 이전에 두어번 경험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훨씬 이해가 쉽다.

하지만 MBTI는 하면 할 수록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게 하지만
에니어그램은 알면 알 수록 더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MBTI는 16가지 유형이 한 사람으로 나를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관계를 맺어 가도록 하지만,
에니어그램은 9가지 유형 중 하나가 나라고 하지만 그것은 거짓의 탈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니 에니어그램은 좀더 심층적인 과제가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MBTI는 내가 가지고 있는 성향들을 발견하고 잘 사용하고, 없는 것을 계발해 가도록 하지만
에니어그램은 나의 행동의 근원적 동기(집착, 회피)를 찾고 그것을 벗어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내적여정,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라고 하는 것 같다.

어느 것이 더 낫다 못하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은 우문이 될 것이다.
MBTI만큼 한 사람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성격유형검사 도구는 없는 것 같다.
또 에니어그램만큼 내면을 깊이있게 들여다 보게 하는 도구는 없는 것 같다.

짧게나마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몇 자 적어 보았다.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고...(언제 쓸지는 나도 잘...)
암튼 2008년에는 에니어그램과의 긴 여정에 들어간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참 나'를 찾아가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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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에 빼곡히 메모한 것을 그냥 순서대로 타이핑을 했다.
감격을 내 안으로 담기위해, 목사님의 말씀처럼 곱씹기 위해...

신비의 길 요3:16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고 편해져야 한다.
내면의 깊은 자유함과 평강, 해방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배워오면서 가능해진 것.
QT, 새벽기도가 하루 일과의 한 항목일 때가 있었다.
이제는 사랑하는 '님'이 나에게 뭐라 하실까 해서 말씀을 편다.
조건적 관계(나 중심)가 아닌 하나님의 함께하심(하나님 중심)으로 이동한다.

하나님과 교제를 배우면서 내면의 비밀들을 이야기하게 된다.
뭔가 비밀이 많을 때 말이 많다. 깊은 교류는 말이 없어진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영과 영의 만남이고 교제이다.
성령은 우리의 영을 깨워 하나님을 만나게 한다.
신비=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로 들어가는 것, 연합하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자존감을 어디로 부터 얻는냐가 중요하다.
사회적 이름이나 배경이 아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기초해야 한다.
하나님과 만나는 나는 이상적 '나'가 아니라 치유,구원받아야 할, 겉으로 드러나는 '나' 이면에 있는 '나'이다.
깨닫기를 하나님께서 20년 30년 40년 기다리신다.

어떤 하나님이 나와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대화를 터야 한다. 그것이 기도이다.
말씀을 읽을 때, 사랑하는 님의 편지로 생각하고 읽어야 한다.
편지의 여운, 따듯함이 남아 있도록 해야 한다. 일상 속에서 반추, 되새김을 하면서...
무슨 일을 하든 '현재의 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내 주장, 나의 것을 내려 놓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역이 내 삶 속에서 많아지도록 해야 한다.

신비에 뿌리 박아야 한다. 궁극적인 실제와의 만남을 바라봐야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배워가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가면 초연해지고, 쉽게 상처 안받고,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을 중단하게 된다.
이 것은 일생과 관련된 문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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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 아이가 두번이나 소리높여 우는 일이 있었다.
이 아이는 교회 올 때마다 공을 가지고 오는데,
오늘 결국 그것이 문제를 야기한 것이다.

한번은 선생님 한 분이 공을 빼앗아 캐비닛에 넣었다.
예배당에서는 공을 가지고 놀지 말라는 뜻에서 예배 끝나고 준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아무리 그래도 공을 빼앗긴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큰 소리로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
난 공을 내주지 않는 선생님의 단호한 외침까지 목격을 했다.

그리고 예배가 진행되고 있을 때, 설교 중이었는데, 또 폭발을 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까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다른 선생님이 목소리를 높였고,
이 아이는 '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게 하느냐'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난 그 상황에서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 아이 하나에게 묶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지혜롭게 처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고,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이 없기도 했다.
겉으로는 신경 쓸 일도 많다는 듯 회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족(반)모임이 진행 중일 때
이 아이가 뒷쪽에 공을 가기고 기대어 서 있는 거다.
다가가서 꼭 껴안으며 '전도사님은 네가 좋은데...'라는 말을 귀에 속삭여 주었다.
그런데 웬일로 이 아이가 예전처럼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 않았다.
아이가 공을 가지고 복도로 나가길래 따라 나가서 몇 번 같이 차주었고,
다시 건물 밖으로 유도해서 둘만의 축구시합을 벌였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서 어떻게 이 아이와의 관계를 형성해 가야 할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아이와 놀아주고, 재미있게 놀아주고, 또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그리고 그 아이에게 살짝이 속삭이는 거다.
"우리 또 축구하고 놀자. 그런데 예배당에서, 예배시간에는 공을 차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아이와 신뢰를 쌓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한다면
아이에게 상처도 주지 않고, 아이도 좋고, 나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어른이 된 이들은 그 정도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저 윽박지르고, 단시간에 복종시키려 할 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아이의 마음을 얻어 가는 과정이 교육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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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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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5. 8. 유년부 공과 진도에 맞추어
본문 : 사도행전 11:19-26
19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와 키프로스와 안디옥까지 가서, 유대 사람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20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키프로스 사람과 구레네 사람 몇이 있었는데, 그들은 안디옥에 이르러서, 그리스 사람에게도 말을 붙여서, 주 예수를 전하였다. 21 주께서 그들을 돌보시니, 믿게 된 수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왔다. 22 이 소식을 듣고서,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다. 23 바나바가 가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해서, 모든 사람에게 굳센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하였다.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주께로 나아왔다. 25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다소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려왔다.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줄곧 거기에 머물면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다.

목표 :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서 책임 있는 삶을 다짐한다.

설교문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우리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들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11장 19절에서 26절의 말씀이에요(봉독함).

자기 이름 말고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을 별명이라고 해요.
우리 친구들 별명 가지고 있죠?
어떤 별명은 들으면 참 좋은 것도 있어요. 전도사님 같으면, ‘배용준!’이라고 부르면 듣기 나쁘진 않아요(좀 웃으라고ㅋㅋ).
하지만 이름을 가지고 조금 바꿔서 ‘○태’라고 부르면 듣기도 싫고, 기분도 나쁘죠.
우리 친구들은 어떤 별명을 가지고 있어요?(어린이들의 대답을 들으면 진행)

정리해 본다면 어떤 별명을 가지느냐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조금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기왕에 가지려면 아주 좋은 별명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런 뜻에서 오늘 성경말씀 속의 사람들도 가졌었던, 그리고 여러분도 이미 가지고 있는데 미처 모르고 있는 아주 좋은 별명 하나를 소개하려고 해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며 약속하신 성령이 제자들이 내려온 이후 12제자는 물론 함께하는 많은 사람들은 열심히 예수님을 전하는 생활을 했어요. 함께 모여서 말씀을 듣고, 찬양을 하고, 먹는 것도 나누어 먹고, 내 것 네 것 없이 나누어 쓰기도 하고요. 그래서 예수님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지게 되었고, 당연히 소문이 나게 되었어요. 그러자 예수님이 계실 때부터 싫어했던 사람들이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게 되었어요. 괴롭혀서 없애버리려 한 거죠.
핍박하는 일이 더 심해지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어서 이 곳 저 곳으로 도망가다시피 했고, 피신한 그 곳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어요.
사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핍박하여 괴롭게 하면 ‘줄어들고 언젠가는 없어질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반대로 퍼져나갔고, 더 늘어 간 거예요.
이 퍼져 나간 사람들 중에 안디옥이라는 곳으로 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다른 곳의 사람들보다도 더 열심히 예수님을 믿었어요.
자기들 집에서만 한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눈 띄게 예수님을 믿으며 살았어요.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이 사람들 뭐하는 사람들이지?’하며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가만히 보니까 이 사람들 모이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 그리스도 하니까,
사람들은 결국 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되어버렸어요.
‘야, 저기 그리스도인 온다.’
뭐 이런 식으로요.

사실 처음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것은 좋은 뜻에서 그랬다기 보다는 ‘뭐 저런 사람들이 다 있어?’하는 식이었는데,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이 이름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부르는 또 하나의 이름이 된 거예요.
영어로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이죠.

이제 알았죠? 우리의 별명이 무엇인지.
우리의 별명은 그리스도인이에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뭔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이름, 그리스도인.
우리 친구들에게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멋지게 살아가는 유년부 친구들이 되세요.
그러면 사람들은 말할 거예요.
‘그리스도인이 우리 곁에 있으니까 너무 좋아. 나도 저런 그리스도인이 될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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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주일 유년부 설교문)
본  문  마태복음 19:13-15
13 그 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려와서, 손을 얹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거기에서 떠나셨다.
목표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 않으시고, 하늘 나라가 어린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을 안다.

설교문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우리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들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9장 13절에서 15절의 말씀이에요(봉독함).

1.
얘들은 가라, 얘들은 가!
아이들은 안 되요. 들어 올 수 없어요!
어린이 입장 불가에요.
이런 것 본적 있어요?(13세 이하 금지 표시)

그런데 이런 일이 성경에서도 있었어요.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서 말예요.

2.
어느 날, 예수님께서 여러 사람들에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니 당연한 모습이죠.
예수님의 말씀이 거의 끝나가고 있을 무렵 한 쪽에서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무슨 일인가 봤더니,
예수님의 제자들의 목소리와 어떤 아주머니들의 목소리가 섞여서 소란하게 드리는 거예요.

어떤 아주머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뵙기 위해 찾아 왔는데
제자들이 ‘아이들은 가!’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 정신이 있기나 해요? 우리 예수님께서 얼마나 바쁘신데 얘들까지 데이고 와서 정신없게 해요? 당장 데리고 가세요!’
‘그저 예수님께서 이 아이에게 손만 얹어 주셨으면 해서 온 것인데 왜 못 뵙게 해요?’
이런 소리들이 오가게 된 거죠.
당연히 예수님도 금방 무슨 일인지 알게 되셨어요.

3
예수님은 가만히 있지 않으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그들 쪽으로 가셨어요.
제자들을 비키게 하시고는 어린이들을 보시고는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아라, 하늘 나라는 이런 자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는 어린이들의 머리에 일일이 손을 얹어 안수해 주셨어요.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어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얘들은 가라, 얘들은 가!’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어른들처럼 그렇지 않으셨어요.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늘 나라는 이런 자들의 것이다.”

4.
여러분 예수님께 오는 것, 교회에 오는 것 주저하지 마세요.
언제든 좋아요.
마음이 괴로울 때, 기쁠 때, 힘들 때, 외로울 때
언제든 오세요.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막지 않으시는데, 누가 막을 수 있겠어요.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 교회는 여러분이 오는 그 날이 바로 어린이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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