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기도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됐다.

21세기가 영성의 시대이고, 영성의 핵심이 기도이기 때문일까.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자연스럽게 그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세계적으로 한국 개신교 신자들이 기도 잘하기로 유명하다.

새벽기도는 물론이고, 수요일, 금요일 저녁(밤) 정해진 모임 뿐만 아니라 

여러 작고 큰 모임들을 가지며 기도한다.

기도를 해도 '뜨겁게'해야 한다.

뜨겁게 하지 않으면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시원하지 않은 거다.

마음 속에 맺힌 것, 꽉 막힌 일들이 물꼬가 터지듯이 뻥 뚫릴려면

좀 더 파워풀하게 '주여~'를 외치며 몸을 들석거려야 하는 것이다.


사실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도의 방식 역시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선택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기도 방법 가운데 담기는 내용이다.

대부분의 기도에 담기는 내용을 보면, 거의 요구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진다.

요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기도라는 말 자체에 그 뜻이 담겨 있으니까.

그런데 요구하는 것이 한 쪽으로 치우쳐 있으니 곤란한 것이다.


거의 대부분 물질, 출세, 건강 등 성취물(복)에 집중되어 있다.

성경을 잘 읽어 보면(참고, 신28:1-14)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 앞에 '~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명령을 잘 지켜 행하면, 복을 주신다는 약속이다.

그러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 지 명확하다.

'~면' 앞쪽에 있는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명령을 잘 지켜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잘 안된다는 것, 잘 지켜 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함께 해 달라는 것을 구해야 한다.

자녀를 위한 기도에서도 마찬가지다.

내 아들이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게 해 달라고, 시험 잘 보게 해 달라고 수능날 기도할 것이 아니라,

평소 내 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도록 해 달라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아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면 복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이 얘기 안해도 주실 것 아닌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비유하면 이렇다.

아빠가 아들에게 "장난감 정리 잘 해 놓으면, 동화책 읽어줄께!"했는데,

그 때부터 장난감을 정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동화책 읽어줘!'를 연발하는 것이다.

그것도 처음 한 두번은 아이가 귀여우니까 들어주지, 계속 그러고, 커서도 그러면 정말 대책이 없는 일이다.

앞 문장에서 '커서도 그러면' 부분을 한 번 더 강조해야겠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연륜을 더해도 그 기도 내용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커서도 전혀 진전이 없는 것이다. 

성장은 없고 나이만 먹는 것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를 누구보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잘 아신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면 나에게 필요한 최선의 것을 아실까, 모르실까? 아니 주실까, 안 주실까?

시간문제이지 분명히 주실 것이다. 차고 넘치도록!

그런데 우린 지금 좁은 시선을 가지고 이 거 달라, 저 거 달라 안달을 하고 있으니.


오히려 시선을 돌려 지금까지 주신 것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지 못하는 오늘 나의 현실을 고백하고, 함께 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그리고 할 말이 없으면 가만히 앉아 자신을 들여다 보고,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기도가 더 좋고, 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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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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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에 갔을 때, 한 카톨릭 복지시설에서 받은 책갈피이다.
추측하건데, 아마 프란치스코가 아닐까 싶다.
자연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그의 기행에 비추어 보면 저렇게 동물들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는 동물들이 곁에 있는 지 아는 지 모르는 지 하나님을 향한 기도 가운데 몰입되어 있다. 

오늘 새벽에도 기도회에 갔었다.
사순절이기도 하고, 그 중에서도 이 번 주간은 고난주간이고,  
올 해 동숭교회는 특별히 '내 생애 마지막 한 달' 캠페인을 진행 중이기도 하다.
나는 교역자니까 빠질 수 없다.
지난 주에 담임목사님께서 '내가 만약 목사가 아니면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고 하셨는데,
나도 그런 생각을 했고, 대답은 빠졌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왜냐면 난 새벽, 아침에 취약한 체질이기 때문이다.

암튼 기도를 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과 잘 통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 새벽에도 한 청년이 무릎을 꿇고는 큰 소리로 기도하는 바람에 약간 졸다가 번쩍 깼다.
그런데 그 기도 내용을 들으며 답답함을 느꼈다.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고,
쉴새 없이 뽑아 내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대개의  개신교 신자들의 기도가 이럴 거다.
문제는 기도를 할 때 너무 힘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나'가 너무 살아 있어서, 그 나를 만나시는 하나님이 들어갈 여백이 없는 것이다.
나의 의지, 이렇게 되게 해 달라는 요구, 계획 등을 내려 놓고,
그 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니는 지 잠잠히 기다리는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기다리다 보면 하나님을 느끼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마치 위의 책갈피의 그림처럼, 내가 어디에 있는 지, 무엇이 내 주변에 있는 지, 심지어 내가 누구인지도 잊고 기도로 빠져 드는 것 말이다.
자신을 비우고 기다리는 것이 전재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기도, 그래서 참 어렵다. 그런데 또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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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9월 2일 토요일
나는 단 하루도 나의 내념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능한 한 솔직하고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고서는 그냥 넘기지 않겠다고 자신과 약속했다.

헨리 나웬의 마지막 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한 번에 끝까지 읽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매일 한 글자씩 써 내려간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아
하루에 한 두 편씩을 읽으려고 한다.
그 여정을 통해 나를 돌아보며 성찰을 시도해 보고 싶어서이다.
어찌 내 주제에 헨리 나웬이라는 거목을 올려다 볼 수나 있을까 만은
성큼 성큼 앞장서 가는 아빠를 종종걸음으로 뒤쫓아 가는 아이처럼
그렇게 읽고 생각하고 기록을 남겨보고 싶다.

9월 3일 일요일
기도는 무의식과 의식을 이어주는 다리다.
어쩌면 나의 기도, 하느님 곁에 있으려는 나의 노력, 하느님과 친교를 맺는 나의 방식을 버리고
성령께서 내 안에서 자유로이 움직이시도록 나 자신을 내맡길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기도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저렇게 기록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기도의 상태를 '어둠과 메마름'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로부터 기도가 돌처럼 무감각해졌다고 하더라도 성령께서 이끄실 것임을 믿고 있었다.
그리곤 그 다음 날 일기에서는 사람들과의 관계인 우정을 기도에 비유한다.

9월 4일 월요일
기도하려는 나의 노력은 우정을 위한 노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도와 우정은 정화를 필요로 하며 덧없는 감정에 덜 의존하고
한결같이 헌신하는 일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리고 하는 말 '이 지혜를 따라잡으려면 참으로 많이 수양해야 한다.'
맙소사 이 영성의 대가가, 그래서 내가 쳐다 볼 수도 없을 것 같이 높은 경지에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수양해야 한단다.

나는 수양은커녕 기도에 무장해제를 하고 살고,
성령에게 맡기기는커녕 PC에 더 의존해서 삶을 연명하고 있으니 참 한심한 노릇이다.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고 살 수 있다니 참으로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 기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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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하나님과 만남이라고 할 때, 그 만남을 이끌어 가는 쪽은 어디일까?
물론 만남이기에 쌍방이 적절하게 이끌어 간다고 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그런 대답을 하기에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대개의 기도는 하나님은 배제한 채
자신이 일방적으로 이끌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군가를 만날 때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주도했을 때 상대방의 기분이 어떨까?
더구나 그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어떠셨을까 생각해 보자.
그리고 지금까지 소위 하나님과의 만남은 잘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만약 조금이라도 찔림이 있다면 이제 주도권을 넘겨 드릴 때가 되었다는 신호가 온 것이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도록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 기도를 한 차원 높여 주는 길이 될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의 기도를 성령께 맡기는 것이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심들을 잠잠하게 하고
온전히 그 분을 인식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은 분심 그 이상으로 쉼없이 이어지는 말들을 늘어 놓는 것을 기도라고 여기고
한 순간의 끊김도 없이 쏟아 놓고 나올 때 시원하다고, 기도가 잘 되었다고 여겼지 않은가?
그러나 이젠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다.

그러면 침묵으로 가만히 있으면 될까?
솔직히 침묵으로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리 분심들을 잘 처리하게 되었다고 해도 사람이 죽지 않는 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살아있다는 증거이니 너무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성령의 이끄심에 나를 맡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뭐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겠으나 단순기도를 하는 것을 제안할 수 있겠다.
예수의 기도,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죄인인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반복할 수 있다.
좀 길면 '예수여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줄이거나, '예수님!', '주님!'등으로 더 줄여서 할 수도 있다.

또 예수마음기도를 할 수 있다. 
내가 선택해서 하고 있는 것은 '당신의 탁월하신 친절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이다.
'예수마음의 사랑이여, 제 마음을 불사르소서'나
'예수마음의 자비여, 제 마음을 용서하소서' 등을 반복할 수도 있다.
(예수마음 호칭기도문 가운데 선택)

단순기도는 기도문을 되뇌이거나 공염불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한 자 한 자를 생각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 중 하나님의 현존이 느껴지면 멈추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분심이 떠오를 때 기도문으로 돌아간다.
조금 어렵다고 생각되면 호흡과 맞추어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들숨에 '당신의 탁월하신 친절에'. 날숨에 '저를 온저히 합하나이다'를 반복한다.

기도문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성급한 마음에 뭔가 성과를 얻으려고 달려들면 안 된다.
지난 시간 나 중심의 기도습관에 너무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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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중 일어나는 분심에 미래의 일, 현재의 일과 함께 과거의 일이 있다.
계획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는 일들이 떠오를 때는 그것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또 기도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에 만나주겠다고 약속을 하며 보내고
다시 기도로, 주님 앞으로 돌아오면 된다.
이 것이 미래와 현재의 일에 대한 태도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일이 떠오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의 일이란 어떤 사회적 사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 내가 경험한 일들을 말한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과거의 일이란 알게 모르게 현재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일 수 있다.
그래서 과거의 일이 떠오를 때는 정면으로 만나 보는 것이 좋다.
하지만 과거의 일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일부러 끄집어 내려 애쓰거나, 회상을 하라는 말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찾아 오는 것을 만나라는 말이다.

과거 상처와 좌절이 무의식의 세계에 잠재되어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그것이 불현듯 떠오를 때 오늘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를 풀 수 있는 키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런 상처와 좌절의 기억이 해결되지 않을 때,
그것들은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극하여 하나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과거의 기억을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 내는 작업을 기도 중 할 수 있다.
그 시공간으로 들어가 하소연도 하고, 고발도 하고, 탄원하고 청원하는 시간을 가지게 될 때
묶였던 족쇄가 풀리듯 감사와 기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칠 때 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기도의 목적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
과거의 일을 만나는 작업 역시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기 위한 준비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나의 기도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내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것'이 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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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얘기지만 기도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의 마음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그러나 대부분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미 많은 기도를 하고 있다.
예배 중, 모임을 가질 때, 식사 할 때 대표해서 기도를 한다.
그럴 때에야 격식에 맞춘 어투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은밀한 기도 시간에 조차도
자신의 직분이나 위치를 의식한 말투나 내용의 기도한다는 것이다.
소위 말해 우리가 사회 생활을 통해 덧쓰게 된 페르소나(가면)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 가면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인데도
스스로 틀에 넣어 자신의 감정들을 배제한 채로 과장된 사실들을 나열하는 기도를 드린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과 진솔한 만남이 가능할까?
다른 말로 하면 나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의 접촉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말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우리의 유일한 신분은 어린 아이면 족하다.
아이 같다는 것은 감정에 솔직하고, 사회적 위치나 역할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페르소나에 갖히지 않은 진솔한 마음으로 하는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고, 
내면 깊이 담긴 이야기들이 남김 없이 꺼내 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마 19:13-14)
 
'어린이다움이란 다른 한 편 그것이 지닌 순진성과 무의식성 덕분에 상당히 완벽한 自己의 상, 꿈밈없는 자기의 개성을 갖춘 전체인간의 상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어린이나 원시인을 볼 때 어른이 된 문화인의 마음속에 충족되지 않는 욕구와 필요에서 우러나온 그리움이 눈을 뜨는 것이다. 그것은 적응되기 위해서, 즉 페르소나(Persona)에 맞추다 보니 전체 인격상에서 떨어져나간 인격부분에 해당된다.'
회상, 꿈 그리고 사상(아니엘라 야훼 엮음, 집문당) 20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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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하면서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소위 분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쉼없이 떠오르는 분심을 어떻게 할까?
그 분심이 어디로부터 오는 지,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을 기도 안을 가져 오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중요한 것은 분심이 없는 것이 아니며, 그 많은 분심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내는 작업 역시 기도임을 아는 것이다." 예수마음기도(권민자 지음, 성바오로) 52p

기도할 때 주로 떠오르는 분심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미래의 일들, 현재의 일들, 과거의 일들이 그것이다.

미래에 대한 분심은 뭔가 계획을 세워야 하는 일들과 관련되거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때 불안함과 함께 오게 마련이다.
그러면 일단 그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실체를 알아차리고
계획을 세우는 시간을 주겠다고 하거나,
어떻게 될지 두려워하는 일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닌
지금 기도 가운데서 크게 일어나는 불안한 마음을 그대로 아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적 분심을 지나 가도록 하고 다시 기도로 돌아오면 된다.

기도로 돌아온다는 얘기는 지금 나를 만나고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에 집중한다는 것을 뜻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하고 근심하는 데에 기도의 시간을 쓰지 말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의탁) 지금 나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현재에 대한 분심도 마찬가지다.
죽고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달래서 보내고(맡기고) 기도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절박한 상황 때문에 도저히 마음에 평온을 찾을 수 없다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

물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면 기도 시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생활 가운데서도 분심에 이끌려 살아왔기 때문에
어떤 것이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 '나'인지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덮고 있는 구름들을 걷어가는 과정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진 않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예수마음기도'를 반복할 때 거의 사투를 벌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반복해서 하는 말이지만 정말 '쉴 새 없이' 별의 별 생각들이 다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다 보면 '나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생각이 번득하고 일어난다.

기도의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기도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라면 그 만남을 방해하는 것들을 방치한 채로 기도할 수 있을까?
(계속)

(1. 예수마음배움터에 다녀온 후 노트 필기한 것과 내 생각을 정리하는 것  2. 위에 언급한 '예수마음기도'(권민자)라는 책을 주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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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오래 해 오면서 기도에 대한 컴플렉스를 한 번 쯤 가져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저 사람은 저렇게 집중해서 기도를 잘 하는데, 나는 왜 시작만 하면 바로 딴 생각을 하는 거지?'
'저 사람은 저렇게 긴 시간 열정적으로 부르짓는데, 나는 왜 할 말이 별로 없는 거지?' 등등

특히 딴 생각의 문제는 쉬 해결되지 않는 것 같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념들, 그리고 심지어 졸음까지.
그래서 조용히 기도하는 것 보다는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일단 자신의 소리를 들으며 다른 것에 신경쓰지 않고 집중할 수도 있고,
슬쩍 졸음으로 빠지는 일도 방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통성기도라는 것이 모두에게 잘 맞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통성기도는 자신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하다보니
그 기도가 정말 하나님과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에
사실 마음 속으로부터 추천하고 싶은 기도는 아니다.
물론 기도를 성령께서 이끄신다고 할 때 내가 하는 말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통성기도 후에 갖는 심적 평안을 응답이라는 차원으로 설명하려 할 수도 있겠으나,
여전히 발산하는 것(한 풀이) 이상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한다.
(지극히 개인적 소견으로...)

할 수만 있다면 기도를 하나님과 소통하는, 하나님 만나는 시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게 될 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쉼없이 일어나는 다른 생각들이 문제다.
사실 이전까지는 이것을 잡념들이라 생각하고 '나는 기도가 잘 안 되'라고 생각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더 세게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사모하고 그렇게 쉼없이 내 이야기를 쏟아 놓을 수 있었을 때
스스로 크게 위안을 얻고 기도 잘 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마음배움터에서 영성피정을 하면서 이 잡념들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됐다.
잠잠해야 할 기도 시간에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좀 다른 말로 표현해서 '분심'이라고 하는데,
이 분심이 바로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는 것이다.
내 안의 무의식의 공간에서 끊임없이 의식으로 올라오는 생각들을 잘 살펴 보면
일종의 패턴이 있고, 그 패턴을 알게 되면 현재 나를 지배하고 있는 상처나 아픔의 그림자를 알게 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분심이 다 그런 것을 대변하지는 않기에 잘 살펴보고
경중을 따져보고 흘려 보낼 것은 흘려 보내고, 확인해 볼 것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놀랍고 재미있는 것은 기도 시간에 이 작업을 편한 마음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앉아서 마치 아빠 앞에 아이가 이야기 하듯
자신 안의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하면 된다.
심지어 자신을 얽어 매고 있었던 과거의 어떤 시공간을 접하게 되었을 땐
그 자리에서 그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그대로 풀어 놓는 것이다.
그렇게 분심을 알아차려 가다 보면 그 분심들에 가려져 있던 내 안에 하나님을
아무런 장애물 없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분심은 내가 살아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분심에 끌려 다니기 보다 그 분심의 정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
분심은 습관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을 만나면서도 우린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 같으면서도 금세 자신의 생각으로 돌아와 버린다.
그러다보며 자신의 이야기만 하기에 급급하기 마련이다.
만약 기도를 통해 분심을 알게 되고, 조절할 수 있게 된다면
사람들과의 만남 또한 변화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진솔한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또한 사람과의 진실된 만남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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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던 제자들.
바람이 불고 높은 파도가 치며 풍랑이 일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풍랑을 해쳐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결국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깨워 살려달라고 부탁을 드리는 마지막 선택을 했다.
다음 순간 그 험악했던 바다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잔잔해 졌다.
그런데 이 가운데 예수님은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는 책망의 말씀을 하셨다.

아무튼 이 이야기를 두고 제자들이 간구하여 풍랑이 잔잔케 된 것처럼
간절히 기도하면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종종 들었던 것 같다.
맞는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인생이라는 것이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고,
때때로 풍랑이 일어 고생을 하지만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 구함으로 해결함을 받을 수 있다는...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면 몇 가지 질문이 가능하다.
예수님이 타고 계신 배가 과연 가라앉았을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워서 간청했기 때문에 풍랑이 잔잔해 지고 그들이 살아난 것인가?
예수님은 살려달라고 불렀던 제자들을 칭찬하시기는커녕 책망하셨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기적 같은 일을 하시면서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명하여 잠잠하게 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의 바른 자세는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시간을 견뎌 냈어야 하는 것이다.

풍랑은 잔잔해지지 말았어야 했다.

나의 삶에도 작든 크든 풍랑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그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고,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면 잠잠해지는 기적이 없더라도
배가 침몰해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풍랑은 잔잔해지지 말았어야 했다.

2005.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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