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2.2. 서울역-인천공항2터미널-카트만두 트리뷰반 공항

 

몇몇 항공사들이 서울역과 삼성동에 도심공항터미널을 운영한다.

체크인과 출국수속까지 진행할 수 있어 편리하다.

대한항공을 이용하는 이득을 보려고 서울역에서 모든 수속을 진행했다.

이럴 경우 공항에선 승무원들이 이용하는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진다.

그렇게 공항철도를 이용해 공항에 도착하니 별 할 일도 없어

처음 대면인 2터미널을 신기한듯 바라보다 자연스럽게 승무원 입장통로로 빨려들어갔다.

호기심에 찬 눈을 깜박이며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고객님 공항에 도착하셨나요? 어디 계시죠?"

공항환전 직원의 전화였다.

달러를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아서 다시 전화를 한다고 하곤 움직이다가 깨달았다.

아뿔사, 난 이미 출국심사대를 통과해 출국장에 와 있었던 거다.

공항환전을 신청해 놓고 받지도 않고 그냥 들어와 버린 거다.

'출국장에서는 받을 수 없다'는 주의사항을 읽었던 것이 뇌리를 스친다.

세상에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간혹 나와서 받아가는 이도 있었다는 말에 법무부 직원에게 문의하니

항공사 직원을 대동하면 나갔다 올 수도 있단다.

진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것을 느끼며 직원을 찾아 헤매다

환승데스크에 문의하니, 개인적인 일로는 불가능하단다.

아니 세상에 공항에서 개인적인 일이 아닌 것이 얼마나 있을까.

결국 내 능력으로는 못 나가겠다고 알리니, 그대로 환불처리를 한단다.

 

수중에 네팔 루피가 좀 있으니 숙소까지 가는데는 문제가 없겠다고 여길 즈음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네팔에 입국하며 받아야 하는 비자비 25달러!

서둘러 환전소에 갔더니 출국장에서는 ATM출금이 안되고 오직 현금만 환전할 수 있다고.

이러다 네팔 공항에서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되는 것은 아닐까.

빌려볼까 싶어 약국도 살피고, 여기저기 보다가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사고

점원에게 개인적인 부탁이라며 물으니 현찰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아~ 어찌할까 방법이 영 없는 걸까.

 

불현듯 2013년 파리의 경험이 떠올랐다.

문제가 생겼을 땐 바로 그 문제의 장소서 해결의 문이 열린다!

시간도 거의 다 되어 일단 탑승게이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네팔로 가는 직항 비행기니 트레킹을 위해 나선 이들이 많겠지 싶어 살피니

역시 복장과 가방 등이 눈에 들어온다.

이미 말문을 연 이들의 입에서 안타푸르나, 에베레스트 등 익숙한 지명들이 흘러나왔다.

그 중 연배가 있어 보이는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고,

게이트 앞에 줄을 서며 자연스럽게 그 어저씨 바로 앞에 섰다.

평소 같았으면 한국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말을 건넬 생각도 안 했겠지만

이 날은...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혼자 가시나봐요? 어디 가세요?'

아저씨는 이미 다른 이들과 말문을 연 터라 쉽게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다.

쿰부히말라야 트레킹에 나섰다고,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솔직히 아저씨가 하시는 얘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에만 집중되어 있을 뿐.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었던 얘기는 못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용기가 나지 않기도 했고, 네팔에 더 가까이로 공을 던져보기로 한 거다.

 

그런데 티켓확인을 하면서 그 아저씨의 항공권을 슬쩍 봤더니 같은 열이었다.

또 기대를 걸어 볼 수 있을까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이 아저씨의 자리가 바로 내 옆이었던 것.

일단 8시간이라는 시간을 벌 수 있게 된 거다.

특별히 의도성을 갖지 않아도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화는 꽃을 피웠다.

나도 나지만, 이 분도 홀로 떠난 여정에 말벗이 필요했고,

옆 자리에 들을 준비가 된 젊은이가 앉아 있었으니까.

때론 흥미롭게, 때론 지루하게 시간은 흘러 두 시간여 후면 카트만두에 도착한다고 운항정보가 뜬다.

마음에 담아둔 얘기를 꺼내야 할 때다.

큰 맘 먹고, 심호흡을 하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비자비만 어떻게 해결이 된다면 좋겠다고,

표정이 약간 흔들리시긴 했지만, 아저씨는 흔쾌히 30달러를 내어주셨다.

타멜에서 만나 현지 돈을 드렸으면 좋겠지만, 혹시 모르니 계좌번호를 받아두겠다고 하니

뭐 그럴 필요까지 있겠냐고 하시면서도 가르쳐 주셨다.

결국 다음날 계좌송금을 했다.

숙소에 들어갔을 때, 너무 지쳐서 다시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랑탕히말라야 트레킹의 첫 위기는 옆자리 아저씨 덕분에 일단락 되었다.

돈의 크기를 떠나 그 도움이 한없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 위기를 넘어서며, 도대체 이번 여정이 어떻게 펼쳐지려고 이런 일을 다 겪나 싶어

두렵기도 하고 기대도 되는 순간들이었다.

 

멀리 흘러내리는듯한 빙하를 배경으로 한 컷.

고개 하나만 넘으면 캰진곰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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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3. ABC트레킹 일곱째날

뱀부(2,510)-시누와(2,340)-촘롱(2,170)-지누단다(1,760)

 

오르는 길, 첫 걸음의 긴장이 가득했지만,

되짚어 내려가는 길, 가벼워진 발걸음 만큼이나 마음도 편안했다.

ABC에서 멀어지니 한껏 당겨져 팽팽해진 고무줄이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내리막이었다가 오르막으로 변한 계단을 오르면서도 그 때처럼 길의 압박은 느껴지지 않았다.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가고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시간이 올 줄 알았고, 그래서 안도하는 마음 컸지만, 썩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이 길 위에서의 시간이 줄어들고 있으니까.

이 배움의 여정이 끝으로 향하고 있느니까.

언제 다시 이 길 걷고, 산들을 마주 할 수 있을까 싶어 멀어질 수록 아쉬움은 더 커졌다.

그러면서도 마주해 힘겨운 걸음 옮기고 있는 이들을 보며 의기양양해 하는 내 모습이라니.ㅎㅎ

바로 삼일 전에 바로 내가 그 방향에 서 있었는데, 인생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길이 줄어드는만큼 또 줄어드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라릿과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원래 포카라까지 함께 가기로 했었는데, 내려가는 길 만난 젊은 길동무들 덕분에 일정이 조정되면서

이별이 시간이 성큼 다가왔다.

지누단다까지만 함께하고 그 이후로는 그 친구들과 함께 내려가기로 한 것.

물론 몸도 많이 좋아져서 내 짐을 짊어질 수 있게된 것도 한 이유였다.

첫 인상은 무뚝뚝해 보였지만 내내 다정하게 함께해주어 얼마나 고마웠는지.

꼭 다시 찾아 만나리라 다짐해 보지만 여의치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짧은 시간 석별의 정을 나누고, 킴롱콜라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지누단다에서 이 길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았다.

 

 

 

 

 

 

히말라야 호텔에서 만난 젊은 길벗들이다. 나를 남겨두고 둘은 데우랄리까지 갔고, 내가 MBC에 있을 땐 이들은 ABC에 있었지만,

결국엔 만나 포카라까지 함께 했다. 나이는 어렸지만 여행엔 베태랑들이라 도움도 많이 받았고, 힘든 여정에 위로도 많이 받았다.

지금 또 어디를 걷고 있을까 궁금하다.

 

 

 

 

5일 간 동행자, 안내자, 보호자, 길벗, 동생이었던 라릿과 이별의 아쉬움을 담아 한 컷 남겼다.

함께 찍은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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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 ABC트레킹 여섯째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4,130)-MBC-데우랄리-도반-뱀부(2,510)

 

ABC트레킹을 준비하며 예상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 다음으로 미룰까 고민하기도 했다.

초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중단하고 쉬운 여행을 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를 돌아 다시 내려가는 길,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을 온 몸으로 했다는 뿌듯함에 들뜨고,

멈추지 않기를 잘 했다는 안도감에 신바람이 났다.

 

오른 길 내려가는 것이지만, 내리막은 오르막이 되고 오르막은 내리막이 되어 쉽지 않기는 매 한가지였다.

그래도 고도가 낮아지는 것이다 보니 오를 때보다는 한참을 더 갈 수 있었다.

데우랄리에서 다시 점심을 먹고,

히말라야 호텔을 지나 도반을 뒤로하고 다섯시가 훌쩍 넘은 늦은 시간에 뱀부에 도착했다.

 

뱀부의 맨 위에 있는 롯지 역시 라릿의 아내의 친척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킴롱콜라는 정말 작은 마을인데, 그 마을 출신들이 곳곳에서 숙박업을 하고 있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덕분에 난 더 친절한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물론 물 한 병도 공짜는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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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22. ABC트레킹 다섯째날-여섯째날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 3,700)


느린 걸음이라도 멈추지 않고 계속 가다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다.

막상 도착해 보면 별로 늦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라릿은 이런 나의 걸음에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잘 걷는 법이라고 격려한다. 

그렇게 걷고 걷다보니 멀게만 느껴지던, 아름다움에 경탄했던 그 마차푸차레가 바로 코 앞이다.

왜 세계 3대 미봉에 속하는 지, 또 네팔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지 알 거 같다.

한낮의 태양 아래서도 아름답지만, 석양을 마주할 때의 마차푸차레는 경외감마저 불러일으킨다.

내가 이런 광경을 봐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오후 3:30,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 롯지는 한산했다.

앞서 간 이들은 어디 있을까. 대부분 ABC까지 갔다가 머물지 않고 저녁에 내려온다는 얘기.

2시간만 더 올라가면 그 곳이니 일찍 도착했으면 당연히 갔다오는 것이 맞을 거다.

욕심을 부려서 더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늘 나의 여정은 여기까지다.

나에겐 내일도 있으니 오늘이 마지막인것처럼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어제부터 벗이 된 형님이 도착했다.

라릿이 말했는지 방을 함께 사용하도록 배정이 되었다.

서로의 걸음을 격려하며 또 이후의 일정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정보들을 교환할 수 있어 좋았다.

여행 중에 만나 한 부분을 나누는 벗들을 사귀는 것이 참 신기한 일이다.

까미노의 길 위에서도, 시베리아횡단열차 안에서도 그랬듯,

여기 ABC 베이스캠프 트레킹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함께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갔는데, 어제 히말라야 호텔의 식당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북적였다.

히말라야 호텔에서 올라온 이들과 ABC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합쳐져서 그런 것일까.

한국 사람들도 더 눈에 띄었고, 목적지에 다 다다라서 이런저런 중요한 정보들을 들을 수 있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고생을 좀 덜 했을텐테 싶은 것들도...

특히나 가벼운 먹거리들을 챙겨왔다는 얘기에 아차 싶었다.

내가 이번 트레킹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왔다는 뼈아픈 반성을 하게 했다.

약품과 먹거리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실수라 해야 할 거다.

그럼에도 이렇게 MBC에 앉아 있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으니 또 기막힌 일이고 말이다.

아무튼 고도에 걸맞게 4~5도까지 내려가는 숙소의 추위를 견디며 잠을 청했다.

 

 

미차푸차레 베이스캠프

 

 

석양에 물들어 아름다움을 뽑내는 마차푸차레

 

저만치 내일의 목적지인 안나푸르나 남봉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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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8. ABC트레킹 둘째날

간드룩(1,940m)-쿰롱단다(2,210)-킴롱콜라(1,715)


배운다는 것은 변화를 위한 것이니 배우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내가 가져왔던 생활습관을 버려야 할 수도 있고,

전혀 새로운 것을 익혀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 배움을 손쉽게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가 번번이 실패를 맛봐왔지 않나.

걸어보지 않은 길을 걷고, 나와 전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며 힘겨워하고 있으니

지금 난 더없이 훌륭한 배움의 길에 있는 것이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향한 걸음이 힘겨울수록, 혹독할수록 더 큰 배움을 안겨주는 것이 아닐까.

온 몸으로 저항하고 있음에도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새로운 길을 간다.

힘들고 아프고 앞길을 예측할 수 없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 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수업을 받는 것이다.


간드룩을 벗어나는 길은 비교적 수월했다.

계단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어 돌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간드룩의 좁은 골목들을 지났고,

약간의 오르막과 긴 내리막이 이어져 있어 큰 어려움 없이 걸었다.

바로 담 넘어에서 웃으며 나마스떼 인사를 전하는 아이들이 있어 힘낼 수 있었다.

하지만 길은 다시 오르막으로 접어 들었고, 산모퉁이로 돌아서 난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땐 자동적으로 뒤를 돌아보며 걸었다.


쿰롱단다로 향하는 오르막길 중간쯤에서 작은 체구의 젊은(어린) 동양인 여성들이 짐을 내려놓고 쉬고 있었다.

나도 자연스럽게 깊은 숨을 뱉어내며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을 만나게 되도 언어문제로 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것을 염려해서 

간단히 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것이 보통인데, 힘이 들어서 더 갈 수 없어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네팔 현지인들이었고, 세 명이 자매지간이라고 했다.

처음엔 잘 못 알아들어서 내려가는 중인 줄 알고 좋겠다고 했는데,

짐을 들고 앞서 걷는 것을 보고 미소가 절로 나왔다.

어디서 왔냐, 어디까지 가냐 등등 기본적인 정보를 대충 공유하긴 했는데, 정말 대충했다.

일회성의 만남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며칠 후 목적지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재회했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아주 중요한 사이가 되었다.

이들과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는 여정 또한 배움의 시간이었고,

마치 뒷산에 온 것처럼 걷는 그들의 모습과 대비되는 내 모습에서

여러가지 생각하게 했으니 또 스승이 아닐 수 없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오르고 내리며 적적한 길에 길벗이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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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7. ABC트레킹 첫째날

포카라(850m)-나야풀(1,070m)-사울리바자르(1,220m)-킴채(1,640m)-간드룩(1,940m)



사울리바자르에서 킴채, 다시 킴채에서 간드룩 구간을 가이드북은 '급격한 오르막'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 급격하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직접 보고, 걸어보기 전엔 미처 몰랐다.

글로 읽는 것과 실제 경험하는 것 사이의 간격이 얼마나 큰 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사울리바자르에서 식사하며 잠시의 휴식 시간을 갖고

이제까지 걸어온 것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길을 따라 걸었다.

초반 약간의 오르막과 계단을 오를 때까지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조차 못했다.

작은 다리를 건너서 조금 더 갔을 때, 드디어 그 놈을 보고야 말았다.

이게! 이게! 계단인가 싶은 마음이 앞섰지만, 뒤로 넘어지지 않고 잘 오를 수 있을까 싶었지만 

멈출 수 없어 한 발 한 발 내 디디며 스틱에 의지해 올랐다.

등에 짊어지고 있는 짐도 짓눌렀지만, 감기로 인해 좋지 않은 몸상태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솔직히 무척 당황했고, 상심이 되기도 했다. 

첫날부터 마음 상태가 바닥인데, 무슨 트레킹을 하겠다는 것인지 한숨이 나왔다.

첫 계단의 중간 정도 올랐을 때, 위에서 젊은 서양인 여성들이 달리듯이 내려왔다.

'하이~'하고 인사를 주고받을 틈도 없이 지나쳐 가버린다.

빨리 내려갈 수 있는 것도 부러웠지만, 내려가고 있다는 것은 한참이나 뒤돌아보게 했다.

나도 저들처럼 내려 갈 수 있을까, 그 날이 오기나 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으니.

그 때 내 마음이 얼마나 참담했는 지.


그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집들이 나타나고 가로지르는 도로도 나타났다.

잠시 눈이 마주친 현지인 아주머니는 전혀 표정이 없다.

밝게 인사만 해주었어도 힘이 났을테지만, 그 분에게 그럴 의무는 없는 것이니 탓할 순 없었다.

지도를 보니 도로를 따라가면 지그재그로 돌고돌아 수월하게 올라 갈 수 있을 같았다.

그러나 트레커의 길은 그 길이 아니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계단이었다.

살짝 갈등을 하긴 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나는 트레커이지 자동차가 아니니까. 자존심이 있지.ㅠ


그렇게 사울리 바자르를 출발해 킴채를 지나 간드룩까지 장장 3시간 반 동안 걸었다.

사울리 바자르에서 보면 700미터, 나야풀에서 보면 900미터 가까운 높이를 올랐으니

단순히 걸은 것이 아니라 올랐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트레킹 첫 날 노포터 노가이드에 가파른 길을 오르며 도대체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싶었지만,

내 발로 왔다는 것, 누구도 갔다 오라고 등떠밀지 않았다는 것만 명확해질 뿐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고통스러운 여정이라 하더라도 불평은 내가 선택할 감정이 아니었다.

 

 

이 정도 계단은 (좀 과장하면) 거의 평지라 할 수 있다. 

 

 

힘든 가운데도 멀리 보이는 설산은 가슴을 띄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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