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새김/레위기'에 해당되는 글 28건

하나님이 이끄는 40년이라는 거창한 모토를 걸고 출애굽기를 출발했는데
이제 레위기라는 산을 넘기에 이르렀다.
사실 지난해 12월 초에 읽고 써두긴 했는데,
마무리를 못해 차일피일 미루다 마침표를 찍기로 굳은 결심을 하고 다시 왔다(떠났던 것 같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
레27장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28 어떤 사람이나 자기 소유 중에서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들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29 온전히 바쳐진 그 사람은 다시 무르지도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사람이 자신을 대신해 짐승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인 번제로 시작한 레위기는
사람이 자신을 드리기로 서원하고 그 값을 드리는 것에 대한 규정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레위기를 정의하자면 제사장 매뉴얼이고, 거룩한 삶을 위한 교과서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약속의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약속, 그것은 생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의 땅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고,
역시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으로 인해 죽어 가는 땅으로 이끄셔서
이들을 통해 그 땅을 생명의 땅, 살림으로 일구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녹아 있는 것입니다.
특히 레위기는 백성들은 물론 제사장들이 철저히 익혀 틀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이기에 어그러짐이 있을 때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율법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 짧은 구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서원할 때 이 율법에 적용을 받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서원하였다면, 바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제사를 드리려고 결심했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안다면 마음 내키는 대로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로 결심했으면서 갈팡질팡 우왕좌왕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출발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위해 일어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맺은 약속,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기본을 너무도 쉽게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레위기를 읽는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에 대한 각오를 새롭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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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선 목적
레26장
40 그들이 나를 거스른 잘못으로 자기의 죄악과 그들의 조상의 죄악을 자복하고 또 그들이 내게 대항하므로 41 나도 그들에게 대항하여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 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받지 아니한 그들의 마음이 낮아져서 그들의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42 내가 야곱과 맺은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하리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의 발단은 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에게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신실함을 놓지 않는 쪽은 늘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광야에 들어서 한 해를 보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약속 파기의 가능성을 말씀하시며 경고하십니다.
경고는 미움의 표현이 아닌 사랑의 표현입니다.
죽이려고 하심이 아닌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현재 자신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크게 봅니다.
그래서 그 잣대로 상황을 판단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차원에서 그 상황을 보신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이미 오래전 해묵은 것이라 할 수도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언약을 이행하시기 위해
안간힘을 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죄악과 어떤 해괴한 짓을 해도 그들이 돌이키기만 한다면
조상들과 맺은 언약은 유효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대원칙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스스로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때에도
하나님께는 가능성이요, 소망의 싹은 변함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찾고 만나시는 최우선 목적은 그들을 살리시고 복주시기위한,
함께함으로 기쁨을 나누고자 하시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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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교육 시간
레25장
20 만일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21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22 너희가 여덟째 해에는 파종하려니와 묵은 소출을 먹을 것이며 아홉째 해에 그 땅의 소출이 들어오기까지 너희는 묵은 것을 먹으리라

이스라엘을 설명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되는, 아니 가장 우선적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들의 삶의 순환이 안식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나아가 인생의 순환까지도 안식일이 확장된 안식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한 명 한 명의 쉼의 문제에 관심이 있으셨듯이
땅의 쉼에도 역시 관심을 가지고 있으셨습니다.
땅의 쉼이란 결국 그 땅에 뿌리를 박고 생명활동을 이어가는 식물들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뽑아내면서 그려 가시는 이상적 공동체 안에
단지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땅의 쉼과 나무와 식물들의 쉼이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저주받은 땅이 하나님의 복 주심에 의해 풍성한 소출을 내지만
그 땅이 한 없이 모든 것을 내 놓을 수 있는 무한한 창고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땅의 생명력을 통해 무상으로 먹거리를 얻었으니
7년에 한 번 쉬도록 하여 재충전의 시간을 주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농부들에게 있어서 1년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업이 아닌 목축업을 하는 민족이었기에 처음부터 길을 잘 들이면 되는 문제이긴 합니다.
그래도 막상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20절의 말씀을 미리 하시면서 걱정하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 곧 믿음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을 나올 때 자신들의 가능성이나 소망을 보고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왔듯이
장차 들어가게 될 가나안에서의 삶 역시 하나님에 대한 믿음 가운데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땅의 안식은 6년 동안 일하여 먹고 살지만
단지 그들의 땀 흘림 만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교육 시간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주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땀 흘려 수고 하여 얻는 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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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처방
레24장
10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의 어머니가 이스라엘 여인이요 그의 아버지는 애굽 사람인 어떤 사람이 나가서 한 이스라엘 사람과 진영 중에서 싸우다가 11 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며 저주하므로 무리가 끌고 모세에게로 가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슬르밋이요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었더라 

레위기는 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시는 제사와 제사장과 관련된 율법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사건은 거의 없습니다.
그 희소한 사건에 두드러지게 등장한 것이 두 번의 죽음의 사건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직접 아론의 두 아들을 죽이신 것이고(10장),
두 번째는 레위기 24장에 등장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사건입니다.
그의 죽음의 이유는 하나님(신성)모독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을 모독한 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과
그의 출생 배경을 통해 광야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다른 피를 가진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중요한 고비마다 불만 세력으로 활동했을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출애굽 관련 영화를 보면 다양한 종족들이 함께 나오는 것을 볼 수 있고,
그들을 중심으로 모세를 대항한 폭동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힘들 때마다 이들은 순수 이스라엘의 후손들보다 애굽을 더 추억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광야 40년이라는 형벌은 이런 불순한 동기들을 씻어내기 위해서도 필요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합니다.

아무튼 하나님을 모독한 것은 하나님의 귀에 들렸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이지만
그 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들렸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로 부각됩니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함부로 오르내리게 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도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질 수 있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존재와 상관없이 백성들의 의식 속에 하나님 상이 격하되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향한 자세 또한 흐트러질 것이 뻔합니다.

한 번 잘못할 것이니 그의 목숨을 가엽게 보고 용서해 줄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이제 겨우 걸음마를 땐 이스라엘 공동체에겐 그런 일을 감당할 충분한 내공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 아프지만 그를 돌로 쳐 죽이는 극약처방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가지고 하나님이 잔인한 신이니 뭐니 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수한 한 명의 인권도 소중히 여기시지만, 전체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시기 위한 선택을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주의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그의 머리에 안수를 할 때,
하나님 역시 슬픈 마음을 갖고 지켜보고 계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않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후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건들로 가득하게 됩니다.
공동체를 위해서가 아닌 한 개인을 위해 제사장을 임의로 세우거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들러리 정도로 여기는 경우도 많았으며
목석으로 하나님을 대신하게 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저질렀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오히려 즉각적으로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고, 대응하실 때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를 씻을 수 있은 방법을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버려 두실 때는 그 일들이 어떤 결과로 종지부를 찍게 될 지 긴장가운데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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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맛보기
레23장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것이 나의 절기들이니 너희가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3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의 날이라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안식일/ 유월절(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과 무교절(첫째 달 열닷세날부터 7일 동안)
첫 곡식단을 바치는 명절(곡물을 거둘 때 첫 이삭 한 단을 바침, 안식일 이튿날 흔듬)
칠칠절(곡식단을 요제로 드린 날부터 50일)/ 설날(일곱째 달 첫 날)
속죄일(7월 10일)/ 초막절(7월 15일부터 7일 동안)

사람이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부터라 할 수 있습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에덴동산에 각종 나무의 실과를 먹으며 유유자적 할 수 있었을 텐데,
금단의 열매를 먹으면서부터 저주받은 땅을 가는 일을 해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다양한 많은 일들이 있지만 당시의 일이라면 농사와 집 안팎의 일이 고작이었을 것이지만,
먹고사는 문제라는 것에서는 동일하다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는 인생들이 6일 동안 자신의 삶을 위해 땀 흘리고,
일곱번째 날은 구별하여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하시지만, 류가 다른 일인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바로 에덴동산에서 있었을 법한 분위기를 만들어 보시려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일 동안은 사람을 위해 일하지만,
일곱 번째 날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면서 저주의 삶을 살도록 하셨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며 누렸던 그 삶의 내용을 맛보도록 허락하신 것이 됩니다.
그러니 결국 안식일 또한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이죠.
바리새인들은 이를 오해하여 그 제도 자체를 수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모든 막히고 얽힌 것들을 풀어주기 위한 날로 생각하시며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각에 한 발짝 더 다가가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레위기 23장에 정리되어 있는 유대인들의 절기들 역시 이 안식일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절기들을 '나의 절기', '여호와의 절기'라고 하시지만,
절기 역시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배려가 배어있는 사람을 향한 선물이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과 절기를 지킬 때 하나님의 숨결 안에서 참 자유를 느끼고 쉬어야 했듯이
오늘 우리들도 소위 안식일이라고 말하는 주일이나 신앙생활을 위해 구별한 시간 가운데 있을 때
환경이나 성과들에 구애됨 없이 하나님 안에서 쉼의 체험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 만남의 기억, 에덴을 맛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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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예절
레22장
2 아론과 그의 아들에게 말하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이 내게 드리는 그 성물에 대하여 스스로 구별하여 내 성호를 욕되게 함이 없게 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오늘을 살아가며 레위기를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소위 율법이라고 하는 것들, 특히 생활에 관한 것들이 아닌 제사와 관련된 것들이라면 더욱.
그러면서도 레위기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율법 하나하나를 이르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가 찾고 믿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놀라움이 아닐 수 없다.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3천 년 전에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민족을 붙들어 놓고
꼼꼼하게 이르신 가르침이 바로 레위기이고 구약의 율법들이다.
그러니 때로 이게 뭐야? 하면서 치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지만
다시금 붙잡고 씨름해야 하는 이유가 충분해 진다.
'왜 하나님은 그 때, 왜 하나님은 그들에게, 왜 하나님은 이것을 중요하게 강조하셨을까?'라는 식의 물음들을 들고서 말이다.
그렇기에 평면적이고 문자적 접근보다는 입체적이고 의미적 접근을 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 아닐까.

22장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무슨 결벽증 환자 같다(하나님, 표현을 용서해 주세요!).
눈에 띄는 단어들이 구별, 부정, 성물, 정결, 더럽히지, 속되게, 죄, 흠 등이기에 그렇다.
하나님께 바쳐졌던 성물을 먹는 문제와 바칠 제물에 관한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하나님과 식탁에 마주 앉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크신 하나님과 식탁에 마주 앉다니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 줄 그들은 알았을까?
예수님과 함께 만찬을 즐기며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보지 못했던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걸음마 단계를 막 지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똑바로 걸을 수 있도록 정도를 가르치고 계신 것이리라.
그러니 아무나 아무렇게나 참여할 수 있게 허용하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격을 정하시고, 그들의 몸 상태까지 따져 묻도록 하시는 것이다.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겉모습 이야기를 하실 수밖에 없다.
사실은 마음이 없다면 겉모습도 제대로 갖추기 쉽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겉모습으로 그 속마음까지 판단해 버리는 세태이다.
각자의 다른 형편을 헤아려 보려하는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

레위기가 말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예절이 겉으로 만의 형식이 아닌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심이 될 수만 있다면
그래서 마음이 통하는 일이 생긴다면
때로 겉모양이 조금 미흡해 지는 일이 있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진실된 믿음의 자세는 외모를 압도하는 정결함이 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식탁에 우리들을 초청하시며 바라시는 것이 이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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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을 뗄 때
레21장
6 그들의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들의 하나님의 이음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들의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왜 항상 다른 삶을 요청하시는 것일까요.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이 더 편하고 즐거울 수 있다면야 누구나 손들고 껴들려고 할 테지만,
그렇지 않고 더 어렵고 힘든 여정이라면 누가 그 길을 선택하려 할까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쩌면 힘겨운 현실을 보내고 있습니다.
노예이긴 했지만 안정된 삶의 자리에서 떠나 집도 절도 없는 광야에서 불확실한 내일을 향해 하루하루를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더욱 기막힌 것은 모세라는 지도자를 통해 하루가 멀다 하고 율법이라는 강화된 행동지침들이 하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조금은 과장을 해서 표현해 본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들을 읽으며 나와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조차 머리가 아픈데 당시 사람들은 오죽했을까요.
더구나 제사장들은 더욱 엄격하게 율법이 적용된다고 말씀하시는 대목에서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요.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놓고, 한 켠에 나와 상관이 없을 거야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지는 않았을지.
아, 당시 사람들의 수준을 너무 높여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정보와 지식수준은 아니었을 테니 말입니다.
일단 그들이 당시 처한 상황과 거기까지 오면서 목격하고 경험한 사건들이 그들에게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시켜 놓았으니 이런 요구 앞에 불평할 수 없는 것이었겠죠.

어쩌면 하나님께서 21장의 말씀처럼 제사장과 관련된 말씀을 주시면서
'내가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라고 생각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든 나(하나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언제든 어떤 상태이든 찾아올 수 있도록 하고
뭐 이런 저런 전재조건을 달아 놓는다는 것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수준의 문제일 수 있어 보입니다.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수준을 결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에게 열어 놓으신다고 성막을 아무렇게나 허름하게 만들어 놓고
제사장은 아무나 하고 싶다는 사람으로 하게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 수준으로 생각하고 격하시켜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까다로운 절차를 따라 성막과 제사장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크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의 한계를 아시고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서 한 발 떨어져 서 계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중간에 성막도 있고, 자격을 갖추고 잘 훈련된 제사장들이 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래서 수준이 높아지면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던 그 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볼품없는 한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인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는 돼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하나님께 이르는 과정에서 한시적으로 주신 몽학선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율법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젖을 뗄 때를 알아야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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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을 물리치면
레20장
7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26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사형에 해당하는 것들(2-21절) - 몰렉 섬김, 접신자와 박수무당 따름, 부모 저주, 간음, 근친상간, 동성애, 수간


세상 어느 것도 하나님의 숨결이 닿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비록 죄악으로 물들어 있는 가나안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잘라내려고 하실 때 어찌 마음 아프지 않으실까요.
그것은 마치 당신의 지체 하나를 절단하는 것과 같은 고통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세계를 운영해 가시면서 뒤틀린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어쩌면 방치해 더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백성들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마치 농부가 묵은 땅을 갈아 엎고 씨앗을 뿌리듯이
뒤짚어 엎을 땅 가나안에 뿌릴 이스라엘이라는 씨를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씨앗을 향해 쏟으시는 하나님의 깊은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그 말씀이 하지 말라는 말씀에 집중이 되지만 그 이면에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 지금 광야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을 향한 집중을 계속해 주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속 드러나는 이 백성들의 경솔함과 무개념의 행동들은 하나님의 걱정을 증폭시켰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하셨던 것들을 다시 반복하시며 한 발 더 나아가 사형선고까지 하시는 것입지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에서 벗어난 삶의 목록들, 가나안에 팽배한 삶의 양태들과의 단절만이 거룩한 삶,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담보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나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 유혹들은 성곡적인 훼방을 위해 악착같이 물고 늘어질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승리할 때, 유혹을 물리칠 때만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이 자신들의 것들이 될 텐데,
아직은 미래적 일들이기에 긴장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바로 레위기 20장과 가나안을 매일 오가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유혹의 땅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옮겨 다니며 각각의 영역에 효과적으로 적응하는 법을 익힌듯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유혹이 유혹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제 더이상 하나님의 애간장을 태우는 일은 그만두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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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은 사랑이다.
레19장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한 몸에서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란 분리됨의 결과물 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자 다른 모양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자신들의 본래적 정체성을 망각했기에 하나님께서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강조하시는 거룩, 특히 레위기를 통해 보여주시는 거룩의 모델은
바로 이와 같은 분리되고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시키시려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부모이든, 가난한 이웃이든, 일꾼이든, 종이든
거꾸로 재판관이든, 부자들이든 간에
서로를 향해 형제라고 말할 수 있게 됨으로
그래서 한 부모 아래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존재임을 각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로서 산다는 것은 단지 모든 것을 허용하는 관계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하시듯이 바른 원칙을 갖고 그 쪽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전재됩니다.
왜냐면 천지창조에서 보여주셨듯이 하나님은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질서는 단지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짐승에서 식물에까지도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자하는, 하나님의 백성 됨을 깨닫는 사람은
사람과 일, 사물을 보면서 사람의 기준과 원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과 원칙,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미 그 모든 것에 하나님께서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보지만 하나님을 보고, 짐승을 보면서도 역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야곱이 형 에서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하듯 한다는 것이 바로 거룩한 삶이 아닐까요.

만물에 깃든 하나님, 그 생명을 알아 볼 수 있는 눈을 키우고,
그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아끼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로부터 하나님의 마음과 만남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관계를 나누고 차별하다 못해 멸시하고, 적대하다 못해 학대하며, 책임전가하는 것이 아닌
모두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됨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은 결국 당신을 모함하고, 때리고, 채찍질 하고,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한 사람들을
용서하며 품으신 예수님의 모습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을 거룩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로 볼 뿐만 아니라
바로 자신으로 느끼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겐 너와 내가 따로 없고, 그 누구도 하나님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으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땅에 살지만 하늘을 만날 수 있는 삶,
마음 열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는 삶.
이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추가>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만난 때, 내 안에 하나님과 상대방 안의 하나님이 만나는 것.
그러므로 결국 내가 나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희로애락이 나의 것이 된다.
같이 느끼는 세상,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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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질서_또 하나의 약자 보호
레18장
24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이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땅을 더럽히는 일-근친상간
어머니(아버지의 다른 아내), 누이, 손녀, 외손녀, 고모, 이모, 숙모, 며느리, 형제의 아내, 아내의 자매
여인과 그 여인의 딸 혹은 손녀나 외손녀 함께 취함 불가, 자녀를 몰렉에게 주는 일, 남자가 남자와, 짐승과 교접

예전에 어떤 집에서 개를 키웠다고 합니다.
암컷이 새끼를 낳았고, 수컷인 새끼가 자랐는데
어느날 주인은 애미와 새끼가 교미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놀란 이 아저씨는 몽둥이를 들고 둘 다 죽여 버리겠다고 달려들었다고 합니다.
그 때 아주머니가 아저씨의 팔뚝을 잡고 말리며 '그러니까 짐승이죠!'라고 했다고 합니다.
물론 개를 길러 보면 아무리 커도 최소한 지 새끼는 알아보는 것 같은데,
아마 그 어린 수놈이 정신 줄을 놓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짐승과 사람의 다른 점은 짐승은 온전히 본능적으로 산다는 것이고,
사람은 본능이 있지만 이성적으로 조절하며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기 몸뚱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질서를 알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짐승처럼 사는 일이 만연하게 된다면 그것은 몸과 마음이 더럽혀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만 더럽혀진 것이 아니라 땅까지도 더럽혀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시며 지금은 더렵혀진 가나안의 사람들을 쫓아내시지만
강조점은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사전에 경종을 울리시는 것입니다.

좀 다른 측면으로 보면 성적 문란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힘이 약한 남자들은 그가 일가친척이라도 그에게서 자신의 아내를 지킬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작은 자들의 슬픔과 한이 쌓이는 사회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이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해 낸다는 말씀은 너무도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약자를 보호하는 문제는 전체 사회를 지키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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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주인
레17장
14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그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

초등학교 2학년 때 영종도에 있는 큰집에 놀러갈 일이 있었습니다.
큰어머니께서 갯벌에 조개를 잡으러 가셔서 저녁에 마중을 가려고 우물가를 지나가는데
동네 어른들이 개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바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간을 잘라서 먹는 것이었습니다.
'인간들의 잔인함이라...'뭐 대충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것 때문인지 저는 익힌 것이라도 간을 먹지 않습니다.

뭐 지금 시대에 피를 먹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논의는 별 의미는 없어보입니다.
혹자는 짐승이 죽을 때 피에 사람에게 해로운 성분들이 들어가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하니
그것이 사실이라면그런 뜻에서야 먹지 말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시는 지 그 뜻을 생각해 보는 것이 되겠죠.

하나님께서 노아의 시대로부터 육식을 허락하셨지만, 그 때도 피를 먹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면 그 피는 곧 생명을 대변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짐승을 취할 때 부득불 그것의 생명을 빼앗을 수밖에 없지만,
그 생명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피를 구별함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릴 때 피를 구별해서 드리는 행위나,
짐승을 잡을 때 피를 땅에 쏟고 흙으로 덮은 후 고기를 먹도록 하신 것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신 것이 아닌지.
피로 상징되는 생명은 사람의 영역이 아닌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또 자신의 생명, 이웃의 생명이 바로 하나님의 것임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부여하신 생명 이상 무엇을 더 하나님께 구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허락하신 것들을 마음껏 누리되
그것의 주인이 내가 아닌 하나님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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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해진 이유
레16장
1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에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3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삼고 숫양을 번제물로 삼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삶()이면서, 동시에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이시기에
인간이 그 하나님과 마주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선한 동기와 상관없이 비극은 일어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전적으로 사람에게 있습니다.
사람의 잘못, 더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면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서 주어지는 율법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기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보다 가까이에서 만나고 싶어 하셨지만,
그러다가는 사람들이 죽을 것임을 알고 계셨기에 최대한 안전한 방법의 하나로 성막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쉽게 접근하도록 노력하셨지만
이미 10장에서와 같은 사건을 거치며 더 분명한 지침의 필요를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16장의 내용은 그런 이유 때문에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 사람, 대제사장이 죽고 사는 문제는 전체 이스라엘 공동체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에 더욱 중요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구약 시대처럼 짐승을 잡으면서 복잡하고 힘든 제사를 드리지는 않지만
나름 짜인 순서에 따라서 예배라는 것을 드립니다.
또 개인적으로는 큐티(묵상)를 하더라도 자기만의 순서를 따라서 하게 됩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존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오로지 사람을 위해서, 그들이 하나님과 만남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의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란 얘기입니다.
성막에 대한 얘기에서나 제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미 말씀을 드린 내용을 또다시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복잡한 절차를 만드실 의지가 없으셨을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보다 쉬운 방법을 주시려 했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 둘 더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좀 더 단순한 길을 열어가는 그리스도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에 얽히고설킨 것들을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모세처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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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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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출병'에 와서 멈춰버렸습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이 유출병 이야기를 가지고 너무 '영해'를 한 나머지
교회 공동체 내에 유출병이 걸린 것과 같은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은 나병에 걸린 사람들보다 더 위험하다는 식의 글을 올려놓은 것도 보았습니다.
때로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말씀을 끼워 맞추기 식으로 해석하는 함정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함정이라기보다 습관이고, 또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줄로 알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혹시 저도 그런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았습니다.
어쨌든 15장만 지난다면 레위기의 가장 험한 능선을 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 힘을 내고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쉽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진솔한 공동체
레15장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자라

정상적이지 않게 몸에서 체액이 흘러나왔을 때
당시로서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지에 대해 잘 알 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병리적인 것인지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로 인해 공동체를 위태롭게 할지도 추측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단 거리를 두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정하다고 하시고, 절차와 기간을 정해주십니다.

결국 이 역시 제가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정함과 부정함을 관계의 측면에서 이해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의 건강을 해치지 않고, 소중하게 여겨줄 수 있는 상황은 선하고 정한 것이고,
반대로 그럴 수 없는, 때로는 그것을 판단할 수 없을 때는 일단 거리를 두고 부정하다고 하며 안전을 기하도록 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나병에 대한 진단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출병이 있을 때도
부정하다고 하며 특별한 절차를 밟는 것은 그 사람을 정죄하고 죄인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사자와 함께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진단이 사라질 때 공동체는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서로를 향한 진심어린 관심의 부재, 또 속내를 깊이 감추는 데서 야기됩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역할은 공동체를 보다 진솔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더이상 말할 수 없는 것이 없는, 또 어떤 허물이든 정화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전하시는 율법의 목적지가 어딘지 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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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는 복음
레14장
2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3 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병 환부가 나았으면

나병으로 판정을 받은 사람이 정하게 되었을 때 치뤄야 하는 절차를 명하십니다.
나병환자를 다루는 근본 이유는 그를 격리하여 공동체 전체로 질병이 번져가는 것을 막는 데 있기도 하지만
한 사람이 질병으로인해 영구히 공동체로부터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데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병환자가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절차를 본 장에서 설명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는 규례를 주시는 이유는 공동체와 분리하고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하려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제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보게 하지만
제사를 통해 살아 마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레위기를 '레위복음'이라고도 합니다.
앞의 맥락에서 봤을 때 좀 다른 말로 하면 '살리는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한 사람을 살리고, 전체 공동체를 살리는 말씀이 바로 레위기가 담고 있는 율법인 것입니다.
사실 율법의 정신은 어렵고 무거운 짐이 아닌 백성들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율법은 일부 계층에 의해 오용되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닌 죽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의 제도와 교리, 관습들도 그 의도와 달리
일부 사람들에 의해 오용될 때 사람들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혁자들의 말처럼, 교회는 '늘 개혁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세워 살아가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병 판정을 받고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떨어져서 보낸 죽음같은 시간을 벗어나
제사장의 손에 이끌려 정결을 위한 절차를 밟을 때 그 기쁨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기쁨을 모든 이들에게 전할 책임이 오늘 우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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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거룩
레13장
2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의 중요한 업무 하나는 백성들의 피부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혹시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겼을 때는 지체 없이 제사장에게 가서 그 곳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차에 따라서 꼼꼼하게 관찰하고 그것이 정한지 부정한지를 판가름내 주어야 합니다.
절차에 따라 꼼꼼하게 관찰한다는 것은 환처가 어디이든 그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거의 만지다시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제사장이 자신을 '난 거룩한 제사장인데, 이런 더러운 일을 할 수 있겠어!'라는 생각으로 이런 일들을 기피한다면 아마 전염병으로 변해 백성들에게 큰 재앙을 맞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일은 단지 한 사람의 피부병을 살피는 것이 아닌 전체 백성의 생명을 돌보는 일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의 거룩한 직임은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곳에서 그 일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물이 없어 잘 씻지 못해 발생하는 피부병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큰 재앙으로 죽을 수도 있는 것을 면하게 하시겠다는 깊은 배려하심이 머무는 곳이 바로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의 거룩한 일은 바로 질병으로 더러워진 살갗을 살피고 만지는 일인 것입니다.
제사장의 일이 성전에서 멋들어진 제사를 집례하기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요사이 목회자들의 다수는 여전히 열악한 삶을 살고 있지만(이 표현에 반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눈에 띄는 몇몇 교회의 목회자들이 끝없는 영광과 힘을 좇는 모습을 봅니다.
물론 과거 그들의 삶은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으로 정당화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거룩하다고 말하는 사람으로서 한 쪽으로 너무도 멀리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많은 젊은 목회자들이 그런 소위 출세한 목회자들의 모습을 선망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빨리 그쪽으로 길을 정하고 그 노하우를 전수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하나님이 열어 두신 길이 아님을, 거룩한 사역의 길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아파하는 한 사람을 찾아 그가 온전해 질 길이 어디에 있을 지 함께 고민하는 모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구유에 오시고, 먼지 날리는 길을 걸으시며, 냄새 나는 옷을 걸치셨지만
그 분이 하신 일들, 만난 사람들, 가신 길로 인해 거룩한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들만 탓할 일도 아닙니다.
성도들은 말씀 좋은 교회를 찾아 다니며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만 '나홀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곪아 터진 부분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은총 안에서 산다는 것은 단지 홀로 가능한 일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 돕고 힘을 주는 관계의 형성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은 그 안에서 거룩함으로 역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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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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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받은 기간
레12장
7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남아를 낳으면 - 7일 부정, 33일 후 산혈이 깨끗하여 짐
여아를 낳으면 - 14일 부정, 66일 후 산혈이 깨끗하여 짐
번제(일 년 된 어린양)와 속죄제(집비둘기나 산비둘기)를 드림
힘이 양에 미치지 않으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세 마리

하나님께서 출산을 한 여인이 남아든 여아든 정해진 기간이 지나 산혈이 깨끗해 질 때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는 규례를 주십니다.
산혈이 깨끗해지고 속죄제를 드리는 것인지, 속죄제를 드림으로 산혈이 깨끗해지는 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정해진 기간에 맞추어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남아를 낳았을 때와 여아를 낳았을 때의 기간이 다른 지에 대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남성과 다른 여성의 특별한 신체와 관련한 규례는 15장의 유출병과 이곳에 있는 출산과 관련되어 등장합니다.

이 율법대로 한다면 출산한 여인은 최소한 40일에서 80일 동안은 분리된 생활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격리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본인은 물론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대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출산한 여인에 대한 배려를 하신 것은 아닐까요?
요즘 말로 하면 몸을 풀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보장해 주신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남아는 40일, 여아는 80일이라는 문제가 또다시 나오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여아를 낳은 것으로 특별히 산모를 더 쉬게 해 줄 필요는 없어 보이니까요.

이 문제를 원죄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이도 있는 것 같은데,
가볍게 성경을 읽어 가면서 그런 복잡하고 고차원적이기까지 한 추론을 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공동체 내에서 여인이 출산을 했을 때의 규례를 정해 주심으로
여성들이 감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공식화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은 아이를 출산했을 때, 지켜야 할 기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여인에겐 보장받은 기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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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레11장
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육지의 모든 생물 중 먹을 만한 생물 -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
먹지 못할 생물 -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만 충족하는 집승(낙타, 사반, 토끼, 돼지)
물에 있는 것 -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
새 중 가증히 여길 것 - 독수리, 솔개 물수리, 말똥가리, 말똥가리 종류, 까마귀 종류, 타조, 타흐마스, 갈매기,
                                새매, 올빼미, 가마우지, 부엉이, 흰 올빼미, 사다새, 너새, 황새, 백로, 오디새, 박쥐
혐오할 곤충 -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나는 것
먹을 수 있는 곤충 - 앞의 조건에 뛰는 다리가 있는 것(메뚜기 종류, 베짱이 종류, 뀌뚜라미 종류, 팥중이 종류)


이쯤에서 거룩이라는 말을 정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거룩의 정의를 하기 전에 제 경험담 하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열심이 특심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친구와 금요 철야기도회를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다녔습니다. 학기 중에는 가끔 가고, 방학 때는 거의 매 주 갔던 것 같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순복음교회의 특징은 뜨거운 기도에 있습니다. 2,3시간여의 1부 예배가 거의 12시까지 진행되는데 마칠 즈음 뜨거운 통성기도를 합니다. 그것이 마치는 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쉬는 순서가 있었다기 보다는 그 때가 쉬기에 적당해서 늘 밖에 나와서 어묵 같은 것을 사 먹고 들어갔습니다. 어느날 쉬는 시간에 나가려고 하는데, 옆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께서 아무래도 순복음교인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어디서 왔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회에서 왔다고 했더니, '아하~ 그 거룩 거룩 하는 데요!' 하는 겁니다. 물론 평소 장로교인들의 모습을 거룩거룩한다고 표현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듣는 것은 좀 당혹감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 제 입에서 나온 말은 ' 거룩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였고, 그 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출출한 배를 채우고 들어와서는 좀 미안한 마음에 좀 전에는 죄송했다고 사과를 했고, 아마 그 아주머니도 겸연적어 하시며 미안하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교회에까지 가서 철야집회에 참석할 정도의 청소년을 너무 과소평가 했던 거죠.

아무튼 그 당시 저는 거룩에 대한 분명한 뜻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습니다.
그 뜻은 '죄와 분리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면 레위기 11장에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짐승들을 말씀하시며 요청하시는 거룩의 뜻이
제가 어린 시절 배워 알고 있었던 그것과 같은 것일까요?
거룩의 뜻을 사전적으로 찾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이 거룩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도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것이 더 정확한 뜻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3)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출 13:2)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

안식일을 명하시며, 모세를 만나 신을 벗으라고 하시며, 유월절을 재정하시며, 또 위에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성막과 제사장과 관련하여 반복해서 거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거룩이라는 단어는 사람과 사람 간에서 나온 말이 아닌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어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사람 쪽보다는 하나님 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은 단지 깨끗하다 더럽다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셨을 때 깨끗할 장소가 어디며, 깨끗할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거룩은 더럽고 추한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장소와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은 수평적인 비교를 통해 어떤 특별함이 아닌 것입니다.
안식일이라는 한 날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 날을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기에 거룩한 것이고,
모세가 선 땅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곳에 계셨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고,
처음 난 것이 거룩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하나님께 바쳐지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니 반대로 부정하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정한 어떤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의 상태가 부정한 것입니다.

부정한 동물과 정한 동물을 이야기 할 때
깊이 들어가면 그것의 생물학적 이유들을 뒷받침해서 논의를 진행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것들을 먹는 것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뭐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전제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의복을 입을 때 거룩한 옷을 입은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전제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식생활에 대한 규례들을 받을 때 그 음식은 거룩해 지고 백성들은 거룩한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짐승이 어떠한 것은 상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 복잡해 지기는 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것은 거룩하고, 어떤 것은 정하다 혹은
어떤 사람은 죄인이고, 어떤 사람은 의인이다 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지양하지는 얘기입니다.
예를들어 주초의 문제만 놓고 봐도 어떤 교회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고 또 어떤 교회에서는 정죄가 됩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을 붙들고 이러쿵 저러쿵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이 어떤 것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잡아가는, 그래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이가 되어
결국 하나님께서 '거룩하다'라고 인정하는 백성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존재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단절된 채로
자신의 어떤 것을 통해 거룩함에 이르려고 합니다.
나름대로 외형을 꾸미고, 자기식의 신앙생활의 틀을 갖추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음으로 아무리 최고의 길을 가더라도 격하게 표현해 부정한 상태하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있고,
그 만남을 전제로 한 준비의 과정이 있다면 지금 아무리 형편없는 상태라 해도 거룩한 그리스도인이라 하겠습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교회라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의 자리가 될 수 없다면 거룩한 곳이 아니며
공터 한 모퉁이 볼품없는 곳에 천막을 친 곳이어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거룩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소냐 돼지냐를 가르듯 눈에 보이는 모습만으로 정·부정을 가르라고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님을 오늘은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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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설 때
레10장
3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라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으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다가 죽었습니다.
9절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는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엉뚱한 불을 담아 들고 들어 간 것입니다.
아론이 첫 제사를 드리고 곧 이어 이런 참담한 일이 생기다니 특히 아론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를 향해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고 명합니다.
아론의 가족들은 입술을 깨물며 슬픔을 안으로 삭여야만 했습니다.
두 아들을 잃은 찢어지는 아픔보다도 하나님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이 제사장임을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다른 존재임을 인식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도 아니지만, 또 사람의 일도 아닌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선 중개자 였습니다.
땅에 발을 딛고 선 사람 중 가장 먼저 하나님의 시선을 접해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해이한 마음과 자세로 자신들의 일을 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의 죽음은 애석하지만 이 일로 남은 자들에겐 분명하게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더불어 이들의 죽음으로 더 큰 재앙(더 많은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기에 하나님을 더 욕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람들의 눈에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제사장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제사장들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 수준이 결정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말씀에서 대개 지도자들의 타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시겠다는 말씀은
비단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전도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며 프로그램을 만들고 전도 훈련을 하지만,
정작 그들의 '제사장적 삶', '하나님 앞에 선 자의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일들이 벌어지고,
그들이 그리도 인도하고 싶어 하는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사람들이 등을 돌렸고, 하나님도 눈살을 찌푸리시지 않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 이상의 전도 프로그램은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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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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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하여
레9장
7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제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되 여호와의 명령대로 하라

아론_속죄제(송아지), 번제(숫양)
이스라엘 자손_속죄제(숫염소), 번제(송아지, 어린양), 화목제(수소, 숫양, 소제)

아론의 제사가 시작됩니다.
아론이 처음으로 드린 제사는 백성의 것도, 아들들을 위한 것도 아닌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를 드린 후에 백성들의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늘 나 아닌 누군가를 향한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만약 제사장이라면 오늘 누구의 제사를 드릴 것인지 얼마나 성공적으로 할 것인지에 집중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된 아론이 먼저 드린 제사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과 손은 자연스럽게 밖으로 향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먼저 '나'입니다.
자신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제사를 집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깨끗이 하고, 자신을 드리는 시간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분주하게 봉사하면서
정작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순서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 하겠습니다.
외부로 드러나는 행동에 집중하다 보니 홀로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교회들은 그런 깊은 그리스도인을 원하지 않는 지도 모릅니다.
외형에 치중하며 소모적이기까지 한 교회의 자화상이라 하겠습니다.
문제는 일반 그리스도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역자들의 삶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이 반영된 제물을 손수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속한 곳에서 하나님 앞에 세상을 등지고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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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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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을 나누다.
레8장
2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함께 그 의복과 관유와 속죄제의 수송아지와 숫양 두 마리와 무교병 한 광주리를 가지고 3 온 회중을 회막 문에 모으라

제사장 위임식 : 속죄제(수송아지), 번제(숫양), 위임식(숫양)

성막의 제단은 그 제단을 사용할 자들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위임식을 위해 처음으로 사용됩니다.
실로 역사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 역시 하나님께서 이르신 말씀을 그대로 따르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조심스러웠을 것이고,
이것을 지켜보는 백성들 또한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위임식의 당사자들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은 백성들과의 소통을 위해서(출 18), 제사장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 세워집니다.
전자는 이드로의 충고에 의해, 후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세워진 것이 다릅니다.
드디어 일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만남을 안내 할 사람들이 세워진 것입니다.
직접 하나님을 만나서 대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어느 방법보다도 안전한 방법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아론이 출애굽 초반부터 협력자의 자리에 있긴 했지만 뚜렷하게 정해진 역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사장이라는 분명한 직임을 갖게 됩니다.
이로써 모세는 함께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이고,
아론과 더불어 그의 아들들에게도 함께 위임하면서 그 책임의 지속성도 보장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날의 위임식은 하나님과 백성을 향한 책임을 나누는 예식이었습니다.
모세는 여기서 우려하는 마음도 들었겠지만, 홀가분한 마음이 더 컸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일들을 감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사람을 하나 둘 세우며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민족을 세워갑니다.

목사로 안수 받는 임직식과 비교 할 수는 없으나 그 의미는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선배 목사들이 지금까지 짊어지고 오던 일들을 함께 짊어지자고 하는 일이 임직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수적 포화상태라는 것을 비판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나누게 된 것에 대한 축하하며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어떤 단체, 조직에서도 새로운 사람들이 세워지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환영하며 기뻐할 것은 함께 짐을 나누고 책임지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십시오.(갈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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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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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내지 않도록
레7장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그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가져다가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주었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을 영원한 소득이니라

레위기 7장에서 제사를 통해 제사장과 그의 가족들에게 돌려지는 몫
속건제물_제사장인 남자가 거룩한 곳에서 먹음(6절)
번제물_번제를 드리는 제사장이 번제물의 가죽을 가짐(8절)
소제물_기름 섞은 것이나 마른 것이나 모두 아론의 모든 자손이 균등하게 분배(10절)
화목제물_거제로 드린 것을 피를 뿌린 제사장에게 돌림(14절)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줌(34절)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제사를 위해 제물을 준비해 온 백성들은
제물의 일부 또는 대부분이 제사장들의 몫으로 돌려질 때 어떤 생각을 했을 지 궁금합니다.
더구나 그들이 가지고 온 짐승이나 곡식은 최상의 것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깝지 않았을까요?

백성들이 그러하듯 제사장들에게도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반 백성들처럼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할 수 없었기에 제사장은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풍요로울 수 없었습니다.
물론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는 레위인들, 또 레위인이 바친 십일조는 제사장들의 것이 되었지만
그 것이 그들에게 충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러니 제사장들은 성막에서 제사를 집례 할 때마다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융통성(? 잔머리)을 발휘하면 자신이나 가족이 배불리 먹을 고기와 곡식을 챙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시기 위해서인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과정에서 제사장들의 몫을 정확히 정해 주셨습니다.
아마 제사장들도 제사를 집례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소위 거룩한 직임을 감당하면서 생계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삶에서의 곤궁함은 때론 사심으로 사명을 무너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자신들의 것으로 정해진 몫이 있었기에 평안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제사장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몫 이상을 요구하게 되거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정해진 몫을 제사장들에게 돌리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이런 함정에 빠진 예라 하겠습니다(삼상 2:12-17).
그런데 요사이는 몇몇 목회자들이 자신의 몫 이상을 가져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내의 사람은 물론 일반인들의 눈살까지도 찌푸리게 합니다.
반면 어떤 힘 있는(?) 성도들은 목회자의 정당한 몫을 주지 않으려고 힘겨루기를 합니다.
과연 그 교회의 목회자가 평안 가운데 사역을 감당하기를 바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생계,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기 시작하면
제대로 된 목회사역을 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조차도 인정하신 부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변호하면서 당연히 받을 것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전제로 아래의 말을 합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 9:13)
바울처럼 자비량 사역을 할 수 있는 형편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바울의 사역방식은 이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 교회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똑같이 일을 하고도 자신의 몫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한 일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챙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될 때 사회는 불안해 지고 작은 사람들의 한이 쌓여 가는 것 같습니다.

현재 교회가 직면한 어려움은 어떤 한 가지 부분만 진단하고 처방한다고 해결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근접해 지려는 노력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바울과 같은, 아니면 또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이 가능하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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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지피는 사람들

레 6장

13 불은 끊임없이 재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성경말씀에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제사장들은 여러 분야로 서로 다른 일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 말씀을 받아 전할 때에야 아론과 네 명의 아들이 제사장의 일을 했지만

이후에 후손들이 많아져 제사들이 많아졌을 때는 각각의 맡은 일들을 감당했겠죠.

잘 아시듯 다윗의 때에는 제사장들이 많아서 가족별로 반차를 나누어서 봉사하게도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맡은 일 중에서 가장 잘 해야 하는 부분이 불과 관련된 부분인 것 같습니다.

왜냐면 재단의 불은 절대로 꺼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궁이의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는 과거 우리네 아낙네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조금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제사장은 혹시 재단의 불이 꺼지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며,

불을 지필 장작들도 충분히 확보를 해 두어야 하고, 날씨의 변화도 예민하게 관찰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재단의 불을 꺼지지 않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라는 질문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꺼지지 않는 재단의 불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라는 질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백성들은 꺼지지 않는 불을 보며 하나님께서 성막에 항상 계시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달리 표현하면 꺼지지 않는 불은 늘 자신들을 기다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어떤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님이 토요일에도 저녁 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있으면

자신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신다고 좋아한다고 합니다.

비교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닌 줄 알지만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이 꺼지지 않는 성막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현존의 자리였고,

그 현존을 돕는 자들이 바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이 불을 지피는 일로 백성들이 하나님을 느끼게 할 때,

그것이 검댕이 묻는 일이라 해도 거룩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일로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드러나게 할 수 없습니다.

제사장 자신의 욕구나, 명성을 위해 일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로 한 번 튀어 보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목회자들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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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길이 열리다.

레 6장

2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하되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3 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의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속건제 레 5:14-6:7

속건제와 속죄제가 많이 혼동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속건제가 속죄제의 큰 울타리 안에 들어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속죄제나 속건제나 하나님의 계명을 부지중에 범하였을 때에 드리는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차이는 속건제에서는 하나님의 계명 중에서도 하나님과 관계된 부분에 대해서 더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는 속건제니 그가 여호와 앞에 참으로 잘못을 저질렀음이니라”(5:19)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또 속죄제는 기타 항목에서도 ‘깨달았을 때’라는 표현을 통해 대개 자신도 모르고 지은 죄들을 다루는데,

속건제는 속이고, 부인하고, 거짓 맹세하는 등 고의적인 측면이 더 강하고,

더 중요한 것은 위의 과정을 통해 이웃에게 심각한 손해나 피해를 주었을 때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제는 자복하는 과정을 거쳐 제물을 가져오면 되는 반면

속건제는 일단 손해를 입힌 사람에게 보상을 하고, 제사를 추가적으로 드려야 했습니다.

아마 당시에도 속죄제를 드려야 하느냐 속건제를 드려야 하느냐를 놓고 옥신각신 하기도 하고,

속죄제를 드렸느냐 속건제를 드렸느냐를 가지고 사람들의 시선도 나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제사의 의미는 명백해 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를 요구하시는 것은

그들을 괴롭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살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잘못을 하고 그 죄로 말미암아 죽지 않도록,

더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죄라는 표현은 명확한 기준이 있을 때 성립되는 것이지

사람들에게만 맡겨 두었을 때는 역학 관계에 따라 무시될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강자들은 제멋대로 행동해도 죄가 되지 않고,

약자는 상대적 차별과 부당한 질서 속에서 한을 쌓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공동체의 수면 아래 잠복하고 있다가 뿌리로부터 썩어 들어가게 해서 넘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속죄제와 속건제라는 이름으로 해소책을 주신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어느 누구든 차별이 없고

정당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특히 속죄제의 경우 지도자들에는 엄격한 수준을 요구하셨지만

일반 백성들에게는 다양한 수준을 제시하시며 형편에 맞추어 하나님 앞에 나아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사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활짝 열어 주신 길을 제대로 걷지 않았습니다.

제사를 무시하고 동시에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의 이런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의 사건이 일어났고,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살 길도 이런 살 길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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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사람들

레5

7 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가난한 자들의 속죄제물

힘이 흠 없는 암염소, 흠 없는 어린 암양에 미치지 못할 때,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

힘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에 미치지 못할 때 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



하나님은 백성들의 형편을 고려하셔서 힘이 미치지 못할 때는 덜 부담이 되는 제물을 바치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죄제를 삶 가운데 자연스럽게 여기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 부담이 되지 않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과도 닿아 있습니다.

다른 제사는 상황에 따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속죄제는 허물이 생겼을 때에는 누구나 언제든 드려야 하기 때문에

그 문턱을 낮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늘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화하는 의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역시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교회는 대부분 성도들의 지친 몸과 마음의 쉼과 위안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고,

조금 낫다고 하는 교회가 봉사와 선교를 강조하는 교회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해 지기 위한 자기반성을 위한 절차를 교회 안에 담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를 사함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세상 가운데서 끊임없이 범죄하고 허물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는데

타당한 절차를 통해 자복하고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채널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 교회 안에는 자칭 의인들로 가득합니다.

구조적으로 그것을 고착화 하고 권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을 명심하고, 스스로 돌아보아 거짓된 삶을 자복하고 통회하는 예배를 드리며

스스로의 한계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을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는 진정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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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지는 그리스도인

레4

3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속죄제(4:1-5:13)

속죄제에서 먼저 고려되는 것은 죄 지은 자가 누구냐였습니다.

범죄한 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제물이 되는 짐승과 제사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제사장이 가장 먼저 언급되고 그 다음이 회중, 족장, 평민의 순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자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이 분명한데,

이는 온 회중보다도 그 책임이 막중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제사장을 소중히 여기시며 관심 갖고 보신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한, 혜택들을 누리며 함부로 행하지 못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한발 앞서서 하나님의 뜻을 더 반듯하게 실천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에 대한 정당한 응답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사장으로서 당신의 역할을 누구보다도 충실히 감당하셨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그 제사장의 소임이 고스란히 오늘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계승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중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을 변론하신다고는 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온전한 제사장의 직임은 누구도 아닌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의 시선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때로 어떤 목회자는 자신을 제사장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성도들은 또 목회자들이 제사장이고, 그래서 목회자의 기도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도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더 큰 책임을 맡았다는 것으로 특별한 자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앞의 생각은 예수님 이후 그리스도교를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책임질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고,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인의 삶이 곁길로 가도록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일들을 다른 이(교역자)에게 돌리고 역시 무책임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 모두는 레위기 4장의 맨 앞자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시선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부르셔서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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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제로 보내셨도다

레3

3 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5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화목제 역시 소제처럼 제물의 일부만을 떼어 하나님께 태워서 바치는 제사입니다.

다른 점은 제물의 나머지 부분을 제사장만 갖는 것이 아닌 제물을 바친 사람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레7:11-18, 28-34).

하나님께서는 내장에 낀 기름과 콩팥 정도만 취하셨습니다.

화목제는 그 동기에 따라서 제물의 고기를 다루는 방식도 달랐습니다. 이것은 7장에서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다른 제사들과 달리 화목제는 기쁨을 전제로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 또 뭔가 해 보겠다고 서원하며 결의에 찬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끌고 간 제물을 모두 태우고 빈손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양 손 가득 나누어 먹을 고기를 들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족은 물론 이웃과도 나누어 먹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제사가 얼핏 하나님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만 보이지만,

소제에서는 제사장을, 화목제에서는 가족과 이웃을 생각함으로 그 범위가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는 성막에서 하나님께 드리지만 그 결과는 이웃을 향하는 제사라 하겠습니다.

감사와 서원의 기쁨은 자신을 둘러싼 이웃과 나눌 때 참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예수님께서 번제나 속죄제나 속건제로 보내지신 것이 아니라 화목 제물로 보내지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제사의 제물이셨다면 어떤 한 가지 사안을 위해 일회적으로 바쳐진 것일 수 있으나,

화목제라는 것은 그 제사를 통해 그것을 기억하는 자들에게는 계속적으로 유효한 제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만찬을 통해 당신의 몸과 피를 나누며 다시 오실 때까지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 화목제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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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를 대자면 휴가도 있었고, 바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레위기는 들여다 보고 있어도 별로 생각이 진전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제사의 순서들을 설명하는 것도 무의미할 것 같고...
그래도 읽고 또 읽고, 집중하다보면 나름 창조적인 영감이 주어지기도 한다.
그것이 부스러기 한 조각 같더라도 솜사탕처럼 달콤하다.

사람의 일이 아니다.

레2

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2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3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가 목적에 중점을 두었다면 번제와 소제는 그 방법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번제가 짐승을 불살라 드리는 것이었다면 소제는 곡식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물론 번제를 모든 것을 드리는 헌신의 뜻을 담은 제사라고 합니다.

소제 역시 그 제물의 특성상 추수감사의 때나 짐승을 잡기 어려울 때 주로 드리는 제사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소제는 곡식을 드리는 제사인데, 특별히 낱알을 그대로 드리는 것이 아닌 고운 가루여야 했습니다.

굽든 부치든 삶든 간에 그 근간은 고운 가루여야 합니다.

들녘에서 거두어들인 곡식들을 맷돌에 정성스럽게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가루도 그냥 가루가 아닌 ‘고운’ 가루여야 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요즘처럼 방앗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돌도 곱게 가는 믹서가 있는 때도 아닌 그 때 고운 가루를 만들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 때의 기준이 지금의 밀가루 정도를 요구하지는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바치는 사람의 정성 그리고 제사장의 꼼꼼함의 정도에 따라 고운 정도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많지도 않은 곡식 중에서 갈고 또 갈아서 고운 가루를 만들어 오는 사람들의 정성이 소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소제는 번제처럼 전체를 드리지 않고 기념할 정도의 양만을 드리고

나머지는 아론의 자손들이 먹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왜 그걸 제사장들이 먹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제사장들을 어느 정도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지,

또 제사장들 스스로 어떤 자의식을 가져 주기를 바라시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제사장들을 소중히 여겨주기를 바랐습니다.

그 마음 그대로 하나님 역시 제사장들을 따듯한 시선으로 보고 계신다는 것이고,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먹으며 자신들의 직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특권으로 여길 때 아론의 두 아들이나(레 10장) 엘리의 두 아들(삼상 2장)과 같은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할 때 사람을 생각하고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고, 그 것을 먹게 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과정에서 그들의 마음을 가감 없이 제물로 받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열심히 만든 것을 어느 제사장이 먹을까?’라고 생각한다든지,

‘이 가루는 누가 만들어 온 거지?’ , ‘누가 많이 가져왔지?’라는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제사의 순수성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소제의 순수성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이 여기서 통하게 됩니다(골 3:23).


흔히 교회에서 주어진 일을 하면서 그 행위를 사람을 의식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대가를 받으려 할 뿐만 아니라 반대로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고 교회 전체를 판단합니다.

또 사람을 의식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역할을 축소하거나 심각하게 사기를 잃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의 부재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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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다시 시작, 물론 부담은 만땅으로 가지고 있다가...
레위기라는 큰 산을 넘어 보자! 영차~

 

타는 냄새가 향기가 될 때

레1

1 주님께서 모세를 회막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너희 가운데서 짐승을 잡아서 나 주에게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누구든지 소나 양을 제물로 바쳐라.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 되기위한 교과서이자, 제사장들에겐 직무 매뉴얼입니다.

사실 제사장에겐 삶의 지침서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 지까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 제사규례는 1장부터 7장까지 집중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를 읽으면서 그 제물이 뭔지, 또 그 절차는 어떤지에 대한 논의는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이 제사규례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좀 더 생각을 해 보고 싶습니다.

이미 출애굽기에서도 말씀드린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시면 될 듯한데,

소(송아지), 양, 염소, 비둘기를 바치는 행위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성막 역시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위한 것이었듯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뭐가 부족해서 초라한 천막집이 필요하시겠습니까?

온 세상을 만드시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또 뭐가 부족하셔서 짐승을 태우는 고약한 냄새를 향기로 받으실까요?

그래서 단언컨대 사람에게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면 지금도 짐승을 불살라 드리는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사람을 위한 것이기에 시대에 따라 바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맞추어진 방식으로 사람을 깊이 배려한 과정이 제사로, 예배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절차를 따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순서 안에 역할을 감당하는 제사장은 그 절차를 준수해야 합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어김없이.


하나님을 향해 하는 모든 과정에는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제물에 시야가 좁혀지면 안 됩니다.

그것이 비추어주는 외형에 얽매이면 그 이면에 자리한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가 소외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과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 어느 것도 나와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달리 표현하면 모든 것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심지어는 책상위에 놓여 있는 연필 한 자루 역시 나를 반영하고 나는 그 연필을 반영합니다.

그러니 나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들과의 상생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만약 소, 양이나 염소, 비둘기를 하나님께 드릴 때 그 제물은 자신과 상관없는 어떤 것이 아닌

나의 일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제물을 죽이고, 각을 뜨고, 태울 때 자신 역시 죽임당하고 각이 떠지고 태워지는 것임을 동시적으로 경험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를 포함한 제사는 단지 금전적(제물의 비용) 헌신을 넘어 나 자신 전체를 드림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물에 붙는 ‘흠 없는’이라는 수식어는 제물의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제물을 들어 바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정해진 순서와 양(量), 기준들은 그 만큼 하나님을 향한 집중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의 현장에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 불가능하면서 어찌 그로부터 오는 은혜를 누리겠다고 말 할 수 있을까요.


제물과 하나 되어 찢기고 태워질 수 있을 때 그 것은 진정한 제사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향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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