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을 뗄 때
레21장
6 그들의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들의 하나님의 이음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들의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왜 항상 다른 삶을 요청하시는 것일까요.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이 더 편하고 즐거울 수 있다면야 누구나 손들고 껴들려고 할 테지만,
그렇지 않고 더 어렵고 힘든 여정이라면 누가 그 길을 선택하려 할까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쩌면 힘겨운 현실을 보내고 있습니다.
노예이긴 했지만 안정된 삶의 자리에서 떠나 집도 절도 없는 광야에서 불확실한 내일을 향해 하루하루를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더욱 기막힌 것은 모세라는 지도자를 통해 하루가 멀다 하고 율법이라는 강화된 행동지침들이 하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조금은 과장을 해서 표현해 본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들을 읽으며 나와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조차 머리가 아픈데 당시 사람들은 오죽했을까요.
더구나 제사장들은 더욱 엄격하게 율법이 적용된다고 말씀하시는 대목에서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요.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놓고, 한 켠에 나와 상관이 없을 거야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지는 않았을지.
아, 당시 사람들의 수준을 너무 높여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정보와 지식수준은 아니었을 테니 말입니다.
일단 그들이 당시 처한 상황과 거기까지 오면서 목격하고 경험한 사건들이 그들에게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시켜 놓았으니 이런 요구 앞에 불평할 수 없는 것이었겠죠.

어쩌면 하나님께서 21장의 말씀처럼 제사장과 관련된 말씀을 주시면서
'내가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라고 생각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든 나(하나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언제든 어떤 상태이든 찾아올 수 있도록 하고
뭐 이런 저런 전재조건을 달아 놓는다는 것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수준의 문제일 수 있어 보입니다.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수준을 결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에게 열어 놓으신다고 성막을 아무렇게나 허름하게 만들어 놓고
제사장은 아무나 하고 싶다는 사람으로 하게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 수준으로 생각하고 격하시켜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까다로운 절차를 따라 성막과 제사장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크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의 한계를 아시고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서 한 발 떨어져 서 계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중간에 성막도 있고, 자격을 갖추고 잘 훈련된 제사장들이 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래서 수준이 높아지면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던 그 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볼품없는 한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인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는 돼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하나님께 이르는 과정에서 한시적으로 주신 몽학선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율법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젖을 뗄 때를 알아야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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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해진 이유
레16장
1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에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3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삼고 숫양을 번제물로 삼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삶()이면서, 동시에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이시기에
인간이 그 하나님과 마주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선한 동기와 상관없이 비극은 일어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전적으로 사람에게 있습니다.
사람의 잘못, 더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면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서 주어지는 율법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기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보다 가까이에서 만나고 싶어 하셨지만,
그러다가는 사람들이 죽을 것임을 알고 계셨기에 최대한 안전한 방법의 하나로 성막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쉽게 접근하도록 노력하셨지만
이미 10장에서와 같은 사건을 거치며 더 분명한 지침의 필요를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16장의 내용은 그런 이유 때문에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 사람, 대제사장이 죽고 사는 문제는 전체 이스라엘 공동체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에 더욱 중요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구약 시대처럼 짐승을 잡으면서 복잡하고 힘든 제사를 드리지는 않지만
나름 짜인 순서에 따라서 예배라는 것을 드립니다.
또 개인적으로는 큐티(묵상)를 하더라도 자기만의 순서를 따라서 하게 됩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존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오로지 사람을 위해서, 그들이 하나님과 만남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의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란 얘기입니다.
성막에 대한 얘기에서나 제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미 말씀을 드린 내용을 또다시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복잡한 절차를 만드실 의지가 없으셨을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보다 쉬운 방법을 주시려 했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 둘 더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좀 더 단순한 길을 열어가는 그리스도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에 얽히고설킨 것들을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모세처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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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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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출병'에 와서 멈춰버렸습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이 유출병 이야기를 가지고 너무 '영해'를 한 나머지
교회 공동체 내에 유출병이 걸린 것과 같은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은 나병에 걸린 사람들보다 더 위험하다는 식의 글을 올려놓은 것도 보았습니다.
때로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말씀을 끼워 맞추기 식으로 해석하는 함정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함정이라기보다 습관이고, 또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줄로 알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혹시 저도 그런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았습니다.
어쨌든 15장만 지난다면 레위기의 가장 험한 능선을 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 힘을 내고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쉽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진솔한 공동체
레15장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자라

정상적이지 않게 몸에서 체액이 흘러나왔을 때
당시로서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지에 대해 잘 알 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병리적인 것인지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로 인해 공동체를 위태롭게 할지도 추측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단 거리를 두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정하다고 하시고, 절차와 기간을 정해주십니다.

결국 이 역시 제가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정함과 부정함을 관계의 측면에서 이해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의 건강을 해치지 않고, 소중하게 여겨줄 수 있는 상황은 선하고 정한 것이고,
반대로 그럴 수 없는, 때로는 그것을 판단할 수 없을 때는 일단 거리를 두고 부정하다고 하며 안전을 기하도록 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나병에 대한 진단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출병이 있을 때도
부정하다고 하며 특별한 절차를 밟는 것은 그 사람을 정죄하고 죄인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사자와 함께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진단이 사라질 때 공동체는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서로를 향한 진심어린 관심의 부재, 또 속내를 깊이 감추는 데서 야기됩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역할은 공동체를 보다 진솔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더이상 말할 수 없는 것이 없는, 또 어떤 허물이든 정화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전하시는 율법의 목적지가 어딘지 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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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거룩
레13장
2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의 중요한 업무 하나는 백성들의 피부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혹시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겼을 때는 지체 없이 제사장에게 가서 그 곳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차에 따라서 꼼꼼하게 관찰하고 그것이 정한지 부정한지를 판가름내 주어야 합니다.
절차에 따라 꼼꼼하게 관찰한다는 것은 환처가 어디이든 그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거의 만지다시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제사장이 자신을 '난 거룩한 제사장인데, 이런 더러운 일을 할 수 있겠어!'라는 생각으로 이런 일들을 기피한다면 아마 전염병으로 변해 백성들에게 큰 재앙을 맞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일은 단지 한 사람의 피부병을 살피는 것이 아닌 전체 백성의 생명을 돌보는 일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의 거룩한 직임은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곳에서 그 일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물이 없어 잘 씻지 못해 발생하는 피부병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큰 재앙으로 죽을 수도 있는 것을 면하게 하시겠다는 깊은 배려하심이 머무는 곳이 바로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의 거룩한 일은 바로 질병으로 더러워진 살갗을 살피고 만지는 일인 것입니다.
제사장의 일이 성전에서 멋들어진 제사를 집례하기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요사이 목회자들의 다수는 여전히 열악한 삶을 살고 있지만(이 표현에 반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눈에 띄는 몇몇 교회의 목회자들이 끝없는 영광과 힘을 좇는 모습을 봅니다.
물론 과거 그들의 삶은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으로 정당화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거룩하다고 말하는 사람으로서 한 쪽으로 너무도 멀리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많은 젊은 목회자들이 그런 소위 출세한 목회자들의 모습을 선망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빨리 그쪽으로 길을 정하고 그 노하우를 전수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하나님이 열어 두신 길이 아님을, 거룩한 사역의 길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아파하는 한 사람을 찾아 그가 온전해 질 길이 어디에 있을 지 함께 고민하는 모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구유에 오시고, 먼지 날리는 길을 걸으시며, 냄새 나는 옷을 걸치셨지만
그 분이 하신 일들, 만난 사람들, 가신 길로 인해 거룩한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들만 탓할 일도 아닙니다.
성도들은 말씀 좋은 교회를 찾아 다니며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만 '나홀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곪아 터진 부분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은총 안에서 산다는 것은 단지 홀로 가능한 일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 돕고 힘을 주는 관계의 형성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은 그 안에서 거룩함으로 역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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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설 때
레10장
3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라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으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다가 죽었습니다.
9절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는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엉뚱한 불을 담아 들고 들어 간 것입니다.
아론이 첫 제사를 드리고 곧 이어 이런 참담한 일이 생기다니 특히 아론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를 향해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고 명합니다.
아론의 가족들은 입술을 깨물며 슬픔을 안으로 삭여야만 했습니다.
두 아들을 잃은 찢어지는 아픔보다도 하나님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이 제사장임을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다른 존재임을 인식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도 아니지만, 또 사람의 일도 아닌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선 중개자 였습니다.
땅에 발을 딛고 선 사람 중 가장 먼저 하나님의 시선을 접해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해이한 마음과 자세로 자신들의 일을 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의 죽음은 애석하지만 이 일로 남은 자들에겐 분명하게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더불어 이들의 죽음으로 더 큰 재앙(더 많은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기에 하나님을 더 욕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람들의 눈에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제사장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제사장들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 수준이 결정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말씀에서 대개 지도자들의 타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시겠다는 말씀은
비단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전도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며 프로그램을 만들고 전도 훈련을 하지만,
정작 그들의 '제사장적 삶', '하나님 앞에 선 자의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일들이 벌어지고,
그들이 그리도 인도하고 싶어 하는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사람들이 등을 돌렸고, 하나님도 눈살을 찌푸리시지 않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 이상의 전도 프로그램은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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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하여
레9장
7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제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되 여호와의 명령대로 하라

아론_속죄제(송아지), 번제(숫양)
이스라엘 자손_속죄제(숫염소), 번제(송아지, 어린양), 화목제(수소, 숫양, 소제)

아론의 제사가 시작됩니다.
아론이 처음으로 드린 제사는 백성의 것도, 아들들을 위한 것도 아닌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를 드린 후에 백성들의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늘 나 아닌 누군가를 향한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만약 제사장이라면 오늘 누구의 제사를 드릴 것인지 얼마나 성공적으로 할 것인지에 집중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된 아론이 먼저 드린 제사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과 손은 자연스럽게 밖으로 향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먼저 '나'입니다.
자신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제사를 집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깨끗이 하고, 자신을 드리는 시간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분주하게 봉사하면서
정작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순서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 하겠습니다.
외부로 드러나는 행동에 집중하다 보니 홀로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교회들은 그런 깊은 그리스도인을 원하지 않는 지도 모릅니다.
외형에 치중하며 소모적이기까지 한 교회의 자화상이라 하겠습니다.
문제는 일반 그리스도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역자들의 삶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이 반영된 제물을 손수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속한 곳에서 하나님 앞에 세상을 등지고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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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을 나누다.
레8장
2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함께 그 의복과 관유와 속죄제의 수송아지와 숫양 두 마리와 무교병 한 광주리를 가지고 3 온 회중을 회막 문에 모으라

제사장 위임식 : 속죄제(수송아지), 번제(숫양), 위임식(숫양)

성막의 제단은 그 제단을 사용할 자들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위임식을 위해 처음으로 사용됩니다.
실로 역사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 역시 하나님께서 이르신 말씀을 그대로 따르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조심스러웠을 것이고,
이것을 지켜보는 백성들 또한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위임식의 당사자들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은 백성들과의 소통을 위해서(출 18), 제사장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 세워집니다.
전자는 이드로의 충고에 의해, 후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세워진 것이 다릅니다.
드디어 일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만남을 안내 할 사람들이 세워진 것입니다.
직접 하나님을 만나서 대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어느 방법보다도 안전한 방법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아론이 출애굽 초반부터 협력자의 자리에 있긴 했지만 뚜렷하게 정해진 역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사장이라는 분명한 직임을 갖게 됩니다.
이로써 모세는 함께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이고,
아론과 더불어 그의 아들들에게도 함께 위임하면서 그 책임의 지속성도 보장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날의 위임식은 하나님과 백성을 향한 책임을 나누는 예식이었습니다.
모세는 여기서 우려하는 마음도 들었겠지만, 홀가분한 마음이 더 컸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일들을 감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사람을 하나 둘 세우며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민족을 세워갑니다.

목사로 안수 받는 임직식과 비교 할 수는 없으나 그 의미는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선배 목사들이 지금까지 짊어지고 오던 일들을 함께 짊어지자고 하는 일이 임직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수적 포화상태라는 것을 비판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나누게 된 것에 대한 축하하며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어떤 단체, 조직에서도 새로운 사람들이 세워지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환영하며 기뻐할 것은 함께 짐을 나누고 책임지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십시오.(갈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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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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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내지 않도록
레7장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그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가져다가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주었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을 영원한 소득이니라

레위기 7장에서 제사를 통해 제사장과 그의 가족들에게 돌려지는 몫
속건제물_제사장인 남자가 거룩한 곳에서 먹음(6절)
번제물_번제를 드리는 제사장이 번제물의 가죽을 가짐(8절)
소제물_기름 섞은 것이나 마른 것이나 모두 아론의 모든 자손이 균등하게 분배(10절)
화목제물_거제로 드린 것을 피를 뿌린 제사장에게 돌림(14절)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줌(34절)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제사를 위해 제물을 준비해 온 백성들은
제물의 일부 또는 대부분이 제사장들의 몫으로 돌려질 때 어떤 생각을 했을 지 궁금합니다.
더구나 그들이 가지고 온 짐승이나 곡식은 최상의 것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깝지 않았을까요?

백성들이 그러하듯 제사장들에게도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반 백성들처럼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할 수 없었기에 제사장은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풍요로울 수 없었습니다.
물론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는 레위인들, 또 레위인이 바친 십일조는 제사장들의 것이 되었지만
그 것이 그들에게 충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러니 제사장들은 성막에서 제사를 집례 할 때마다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융통성(? 잔머리)을 발휘하면 자신이나 가족이 배불리 먹을 고기와 곡식을 챙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시기 위해서인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과정에서 제사장들의 몫을 정확히 정해 주셨습니다.
아마 제사장들도 제사를 집례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소위 거룩한 직임을 감당하면서 생계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삶에서의 곤궁함은 때론 사심으로 사명을 무너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자신들의 것으로 정해진 몫이 있었기에 평안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제사장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몫 이상을 요구하게 되거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정해진 몫을 제사장들에게 돌리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이런 함정에 빠진 예라 하겠습니다(삼상 2:12-17).
그런데 요사이는 몇몇 목회자들이 자신의 몫 이상을 가져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내의 사람은 물론 일반인들의 눈살까지도 찌푸리게 합니다.
반면 어떤 힘 있는(?) 성도들은 목회자의 정당한 몫을 주지 않으려고 힘겨루기를 합니다.
과연 그 교회의 목회자가 평안 가운데 사역을 감당하기를 바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생계,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기 시작하면
제대로 된 목회사역을 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조차도 인정하신 부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변호하면서 당연히 받을 것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전제로 아래의 말을 합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 9:13)
바울처럼 자비량 사역을 할 수 있는 형편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바울의 사역방식은 이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 교회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똑같이 일을 하고도 자신의 몫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한 일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챙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될 때 사회는 불안해 지고 작은 사람들의 한이 쌓여 가는 것 같습니다.

현재 교회가 직면한 어려움은 어떤 한 가지 부분만 진단하고 처방한다고 해결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근접해 지려는 노력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바울과 같은, 아니면 또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이 가능하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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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지피는 사람들

레 6장

13 불은 끊임없이 재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성경말씀에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제사장들은 여러 분야로 서로 다른 일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 말씀을 받아 전할 때에야 아론과 네 명의 아들이 제사장의 일을 했지만

이후에 후손들이 많아져 제사들이 많아졌을 때는 각각의 맡은 일들을 감당했겠죠.

잘 아시듯 다윗의 때에는 제사장들이 많아서 가족별로 반차를 나누어서 봉사하게도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맡은 일 중에서 가장 잘 해야 하는 부분이 불과 관련된 부분인 것 같습니다.

왜냐면 재단의 불은 절대로 꺼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궁이의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는 과거 우리네 아낙네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조금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제사장은 혹시 재단의 불이 꺼지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며,

불을 지필 장작들도 충분히 확보를 해 두어야 하고, 날씨의 변화도 예민하게 관찰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재단의 불을 꺼지지 않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라는 질문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꺼지지 않는 재단의 불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라는 질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백성들은 꺼지지 않는 불을 보며 하나님께서 성막에 항상 계시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달리 표현하면 꺼지지 않는 불은 늘 자신들을 기다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어떤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님이 토요일에도 저녁 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있으면

자신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신다고 좋아한다고 합니다.

비교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닌 줄 알지만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이 꺼지지 않는 성막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현존의 자리였고,

그 현존을 돕는 자들이 바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이 불을 지피는 일로 백성들이 하나님을 느끼게 할 때,

그것이 검댕이 묻는 일이라 해도 거룩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일로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드러나게 할 수 없습니다.

제사장 자신의 욕구나, 명성을 위해 일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로 한 번 튀어 보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목회자들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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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지는 그리스도인

레4

3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속죄제(4:1-5:13)

속죄제에서 먼저 고려되는 것은 죄 지은 자가 누구냐였습니다.

범죄한 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제물이 되는 짐승과 제사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제사장이 가장 먼저 언급되고 그 다음이 회중, 족장, 평민의 순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자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이 분명한데,

이는 온 회중보다도 그 책임이 막중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제사장을 소중히 여기시며 관심 갖고 보신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한, 혜택들을 누리며 함부로 행하지 못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한발 앞서서 하나님의 뜻을 더 반듯하게 실천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에 대한 정당한 응답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사장으로서 당신의 역할을 누구보다도 충실히 감당하셨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그 제사장의 소임이 고스란히 오늘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계승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중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을 변론하신다고는 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온전한 제사장의 직임은 누구도 아닌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의 시선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때로 어떤 목회자는 자신을 제사장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성도들은 또 목회자들이 제사장이고, 그래서 목회자의 기도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도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더 큰 책임을 맡았다는 것으로 특별한 자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앞의 생각은 예수님 이후 그리스도교를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책임질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고,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인의 삶이 곁길로 가도록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일들을 다른 이(교역자)에게 돌리고 역시 무책임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 모두는 레위기 4장의 맨 앞자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시선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부르셔서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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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의 마음

출29

1 나를 섬기는 제사장을 거룩히 구별하여 세우는 절차는 이러하다.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두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골라라.

2 그리고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누룩 없이 기름만 섞어 만든 과자와, 누룩 없이 기름만 바른 속 빈 과자를, 고운 밀가루를 가지고 만들어라.

3 너는 그것을 모두 한 광주리에 넣어서, 수송아지와 두 마리의 숫양과 함께 광주리째 바쳐라.


여전히 실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하라’고 이르시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보다 생생한 장면은 출애굽기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명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오히려 여기에서 자세한 사항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28장에서 제사장의 옷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29장에서는 그것을 제사장에게 입히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옷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냥 제사장의 일을 할 사람이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그 절차에는 또 희생이 따랐습니다.

희생이 없이는 제사장으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과거에 범죄 한 사실이 있고, 현재 흠(결격사유)을 가졌다면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희생은 자신도 모르게 지었을지도 모르는 죄를 위한 것이고,

장래에 지을 지도 모르는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제사장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자신에게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기에 그 직무를 감당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했습니다.

백성 중에서 정해진 요건을 갖춘 자가 정해진 절차를 밟았을 때 거룩한 직임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제사장은 자신이 입은 옷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때부터 타락이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면 그는 분명 그 옷을 자신의 권력으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그의 옷이 그인 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되는 자는 옷에 감추어져 있는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기 위해

내적 자신으로의 끊임없이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백성들도 그러하지만 제사장들은 더더욱 자신이 드리는 짐승들이 불태워질 때

그것과 함께 자신의 속되고 거짓된 자아를 함께 태워버리는 의식을 성실히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야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의 타는 냄새를 향기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불태워지는 짐승의 살과 기름에는 아무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제사장의 낮은 마음이 함께 할 때에라야 진정한 능력이 있는 제사,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되는 더 중요한 절차, 희생은 바로 제사장의 마음의 태워짐이었습니다.

자신을 남김없이 산화시키는 헌신만이 그를 제사장으로 거룩한 자리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거기에 있었다면, 예수님이야 말로 최고의 제사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그것을 조금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허덕이고 있으니

하나님의 긍휼이 더더욱 크게 느껴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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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필요한 은혜

출28

2 너는 너의 형 아론이 입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보이는 거룩한 예복을 만들어라.

3 내가 슬기로운 생각으로 가득 채워 준 모든 재주 있는 사람을 불러다가, 나를 섬길 아론이 제사장이 되어서 입을 예복을 만들라고 하여라.

4 그들이 만들어야 할 예복은 이러하니, 곧 가슴받이와 에봇과 겉옷과 줄무늬 속옷과 관과 띠이다. 이렇게 그들은 너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만들어 주어서, 나를 섬기는 제사장 일을 맡게 하여야 한다.


1.
출애굽기 28장은 성소의 사람인 제사장이 입을 옷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옷을 이르시면서 ‘거룩’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시는데,

제사장의 옷이 ‘거룩한 예복’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되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거룩할 수는 없습니다.

그에게 맡겨진 일이 거룩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거룩한 직임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예복으로 자신의 개성, 한계, 허물을 가렸던 것입니다.


제사장의 직무는 하나님의 의지로부터 온 것이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명하신 것이고, 임명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이 된 사람이 자신이 거룩하고, 위대하다고 오해,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화려한 옷, 화려한 자리에 앉을수록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더욱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화려한 옷은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위한 배려로 주신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 화려한 옷을 보고 제사장을 존경하고, 자신들과 다른 존재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사장은 그럴수록 더욱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의 은혜를 더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거룩한 옷 입기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어찌 자신이 그 옷을 입을 수 있는지 괴로움에 휩싸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에 우쭐하기보다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직무의 무게를 생각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
목사임직을 앞두고 있습니다.

목사가 된다는 것, 그것이 저의 존재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끊임없이 저의 존재를 갈고 닦는 일은 계속할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가 구약에서 말하는 제사장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 된 사람이 감당하는 일의 중대성은 과소평가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사라는 이름의 옷은 거룩한 예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저의 고백은 ‘주님의 은혜가 더욱 필요합니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아니면 조금도 나아갈 수 없는 자리가 또한 ‘목사의 자리’가 아닐까요.

주님의 은총이 더욱 필요하고, 함께하는 사람들의 기도가 더욱 필요하고,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는 갈고 닦음이 더더욱 필요합니다.

아마 자신의 내적 모습이 볼품없을수록 더욱 화려한 ‘예복’을 입으려고 안달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경계하며 저 자신의 존재를 예수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더욱 겸손해져서 낮은 마음을 품기를 소원해 봅니다.

목사, 그래서 조금도 눈에 띄는 어떤 옷도 필요하지 않고,

존재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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