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내지 않도록
레7장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그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가져다가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주었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을 영원한 소득이니라

레위기 7장에서 제사를 통해 제사장과 그의 가족들에게 돌려지는 몫
속건제물_제사장인 남자가 거룩한 곳에서 먹음(6절)
번제물_번제를 드리는 제사장이 번제물의 가죽을 가짐(8절)
소제물_기름 섞은 것이나 마른 것이나 모두 아론의 모든 자손이 균등하게 분배(10절)
화목제물_거제로 드린 것을 피를 뿌린 제사장에게 돌림(14절)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줌(34절)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제사를 위해 제물을 준비해 온 백성들은
제물의 일부 또는 대부분이 제사장들의 몫으로 돌려질 때 어떤 생각을 했을 지 궁금합니다.
더구나 그들이 가지고 온 짐승이나 곡식은 최상의 것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깝지 않았을까요?

백성들이 그러하듯 제사장들에게도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반 백성들처럼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할 수 없었기에 제사장은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풍요로울 수 없었습니다.
물론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는 레위인들, 또 레위인이 바친 십일조는 제사장들의 것이 되었지만
그 것이 그들에게 충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러니 제사장들은 성막에서 제사를 집례 할 때마다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융통성(? 잔머리)을 발휘하면 자신이나 가족이 배불리 먹을 고기와 곡식을 챙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시기 위해서인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과정에서 제사장들의 몫을 정확히 정해 주셨습니다.
아마 제사장들도 제사를 집례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소위 거룩한 직임을 감당하면서 생계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삶에서의 곤궁함은 때론 사심으로 사명을 무너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자신들의 것으로 정해진 몫이 있었기에 평안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제사장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몫 이상을 요구하게 되거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정해진 몫을 제사장들에게 돌리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이런 함정에 빠진 예라 하겠습니다(삼상 2:12-17).
그런데 요사이는 몇몇 목회자들이 자신의 몫 이상을 가져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내의 사람은 물론 일반인들의 눈살까지도 찌푸리게 합니다.
반면 어떤 힘 있는(?) 성도들은 목회자의 정당한 몫을 주지 않으려고 힘겨루기를 합니다.
과연 그 교회의 목회자가 평안 가운데 사역을 감당하기를 바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생계,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기 시작하면
제대로 된 목회사역을 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조차도 인정하신 부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변호하면서 당연히 받을 것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전제로 아래의 말을 합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 9:13)
바울처럼 자비량 사역을 할 수 있는 형편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바울의 사역방식은 이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 교회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똑같이 일을 하고도 자신의 몫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한 일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챙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될 때 사회는 불안해 지고 작은 사람들의 한이 쌓여 가는 것 같습니다.

현재 교회가 직면한 어려움은 어떤 한 가지 부분만 진단하고 처방한다고 해결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근접해 지려는 노력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바울과 같은, 아니면 또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이 가능하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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