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40-45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후 예수님의 앞에 나병환자가 나타났다.

그의 말 “원하시면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은 이 말을 들으시고, 가타부타 말씀하지 않으시고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셨다.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불쌍히 여기셨다고 전하고 있다.


불쌍히 여기심,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생들을 향하신 마음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오셔서 뭘 더 바라셨을까?

기적을 일으키며 인기를 끌고 싶으셨던 것도,

뭔가 힘을 써서 누군가를 복종시키기를 원하신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오는 무언가가 필요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는 하나님으로 족하기에 그런 것들은 꺼리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냐?

심지어 자신에게도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집착한다.

유능한 사람이 되어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자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관심하지 않으신 것 같다.

그저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당신 자신의 존재로 충분하셨다.

만약 나병환자가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어떤 의사표현도 안 하고, 

그냥 예수님이 좋아서 머물고 있었다면 굳이 고치시지 않으셨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요청에 부응은 하시지만, 그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암튼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를 향해 깨끗하게 되라고 하셨고, 정말 깨끗하게 되었다.

그를 괴롭혔던, 그를 가두어두었던, 그를 붙잡고 있던, 그를 짓누르고 있던, 그를 지배하고 있던

나병이 씻은 듯이 나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의 두드러지는 대목은

병이 나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히 명하시는 장면이다.

앞에서 말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장면이다.

그저 율법대로 제사장에게 보이고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라는 것 뿐.

예수님의 관심은 그가 고침을 받고싶다고 여기는 그 위축된 마음에 대한 연민이었다.

그래서 그가 몸의 질병으로 인해 온전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 못한 것을 보시고 아픈 심정으로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삶에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음에 동정하신 것이다.

병에 걸려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고침을 받기를 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 병에 걸려 있는 것 자체가 그의 불완전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만족하며 자신의 인생을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한계성은 그 병이 나아야 한다고 생각 할 수밖에 없고,

예수님은 일단 병을 고쳐주신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병이 아니라 마음이다.

몸의 결핍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결핍이 더 중대함으로 깨닫고 그 여정으로 나가야 한다.

예수님은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피부적인 필요들에 대한 요청을 받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셨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인생들은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은 여전하다.


예수님께서 엄히 경고하시면서 

그 나은 사람이 소문을 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셨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과정의 무게만큼이나 기쁨 또한 컸을 것이기에

그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소리쳐 전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그렇게 번져 나갔다.

예수님께서 어떤 홍보원들을 통해서 선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막 1:35-39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예수님은 새벽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따라가 사람들이 찾는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 장면을 요약하면 이렇다.

새벽 시간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하고, 제자들은 사람들을 향하고 있었다고...


예수님은 아무리 일이 많고 피곤해도 하나님을 향하여 서는 것을 빼놓지 않으셨다.

이것은 당신의 사역을 하나님과의 연계성 속에서 이루어 가시려는 원칙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예수님을 더 예수님 되게 하는 과정이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의 사역에는 사람들의 어떠함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안전장치가 있었다는 얘기다.

안전장치라기보다는 하나님께 맞추어진 사역 매뉴얼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

반면 예수님을 좇아와서 사람들이 찾는다는 얘기를 하는,

진짜일 가능성이 높지만, 과장하여 '모든 사람이 찾'는다고 말하는 제자들의 태도는

전적으로 사람에게 맞추어진, 사람을 향한 사역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다는 소식을 예수님께 전하면서 뿌듯했을 것이고,

그렇게 인기있는 스승을 모시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자부심도 컸을 것이다.

인기라는 것은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자들은 아마도 그것을 예수님께 요구했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찾나이다’라는 말은 제자들의 그런 마음이 실린 표현이다.

사실 오늘날 사역자들의 태도와 같은 것이 아닐까?

모든 사람이 '나를' 찾는 상황을 선망하며, 어떻게 하면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을 지를 고민하고 연출하지 않나.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부름, 그들의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역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름, 하나님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사역을 위해 애쓰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찾는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시고

다시금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는 곳, '다른 가까운 마을'로 옮겨 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만약 한 곳에 터를 잡고 몰려오는 사람들을 만나는 사역을 한다면 

오늘날처럼 대형교회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역은 하나님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서선을 좇아 새로운 사람들을 찾아 나서신다.

이는 이른 새벽, 시간과 장소를 구별한 기도로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이 찾는 것에 부응하고, 그들의 시선을 만족시키려다가는 하나님의 시선을 놓치고 만다.

하나님의 부름, 하나님의 시선을 좇아가는 것이 먼저이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는 일이 많이 등장할까.

아마도 예수님을 찾은 이들 중에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고,

질병이 그 때 사람들이 직면한 가장 긴급한 문제였다는 것을 뜻한다. (1)

예수님은 당신 앞에 나타난 사람들을 앞에 두고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처럼 논쟁하지 않으셨다.

배가 고픈 사람이 오면 빵을 주고, 아픈 사람이 오면 낫게 해 주셨다.

골치 아프게 이러쿵저러쿵 따지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에게 맞추어 그 사람의 필요에 최선을 다해서 부응해 주신다.

당신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거슬리는 것이 된다고 할지라도 아랑곳 하지 않으셨다.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오신다면 성도들은 가장 먼저 무엇을 해 달라고 할까?

예수님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일단 사람들은 자신들의 피부적 문제들을 누군가 해결해 주기를 원한다.

자기에게 아픔이 있거나 힘들 때 다른 이들, 다른 거시적인 문제들에 마음 쓰는 것이 어려운지도 모른다. (2)

과거나 오늘이나 예수님 앞에 선 사람들의 앞선 요청은 ‘저를 좀 낫게 해 주세요’ 일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질병의 문제는 사회정의의 문제와도 닿아 있다. (3)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낫기를 구하는 병들을 보면 대개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이들,

소외된 이들에게서 주로 발병하는 것일 경우가 많다.

정서적으로 따돌림을 당함으로 인해 겪게 되는 어려움들인 경우도 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질병을 고쳐주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상한 마음(심령)에 대한 치유를 시도하신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단지 병을 낫게 해 주시는 분으로만 한정하면 곤란한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사역은 질병의 문제 너머에 있었다.

만약 예수님이 가신 길을 좇아가려는 제자라면 예수님이 어디를 바라보시고 나아가고 계신지를 알아야 한다. (4)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의식이 조금이라도 깨어나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닐까.

자신의 문제에만 갇혀 있지 말고, 예수님처럼 좀 더 차원 높은 삶의 이야기에 접속하기를 바라셨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제자들조차 그러지 못한 것 같다. 예수님 사후에나 가능했던 일들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예수님께서 해결하셔야 했던 당면과제들의 스케일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역 초반에서 질병을 고치는 것에 있었지만,

조금씩 오버랩 되면서 좀 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결국에는 하나님의 영역의 문제들에 직면하셨다.

질병에서 율법의 문제로, 또 다시 민족적 문제들로, 또 다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확장되었다.


예수님을 만나는 우리의 모습도 이 단계를 거치는 것 같다.

내 몸의 문제, 집안의 문제, 사회의 문제, 국가와 전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그런데 우리는 평~생 내 문제에만 매어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나 늘 자신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마가복음 1장에 머물러 병을 고침 받는 것이 전부인것처럼 여긴다.

그러면 더이상 예수님과의 동행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여기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냈다는 능력에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예수님을 쫓으면서 그 능력을 자신도 행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다.

마치 사마리아에서 베드로에게 능력을 돈으로 사고자했던 시몬처럼 말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손끝에서 나온 능력이 아니다.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 그 분의 존재이다.

그 예수님의 존재는 귀신의 말에서 드러난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 엘리야 같은 선지자, 세상의 왕, 아론 이전부터 있었던 대제사장 등등으로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하는 다소 부족한듯해 보이는 표현으로 예수님을 불렀다.

그런데 여기서 ‘거룩’이 무슨 의미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거룩하다는 것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완성이나 위생적으로 깨끗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가까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분이고, 하나님과 관계가 최고로 좋은 분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한 점도 흠잡을 곳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암흑같이 꽉 막힌 상태로 존재하는 귀신은 예수님을 쳐다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 분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이름만큼 위대한 이름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입에 올리지만,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뭐가 그리 많이 끼어있는 지.

되고 싶은 것, 얻고 싶은 것, 보여주고 싶은 것...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칭호는 요원하다.

신앙생활이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것들을 덜어내는 과정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거룩한 자’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질 것이다. 

예수님처럼!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나(존재)와 보이는 나(말, 태도, 일)와 같을 때, 그것을 권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사람들을 그것을 봤다.

다른 사람들이 말씀을 전할 때는 부분적으로 권위를 느끼고,

진리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들을 수는 있었지만 보지 못했는데

예수님을 통해서는 진리 자체를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권위 있는 자라는 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그들(서기관을 포함한 지도자들)은 모르는 것을 말하고,

예수님은 아는 것을 말씀하셨다.

소위 (종교)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 알지도 못하면서 참 많은 말을 한다.

끊임없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르기에 모든 것을 아는 이를 향해 촉각을 세워야 함이 당연하다.


인생들도 권위가 있기 위해서는 자신과 말(행동)의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 깨닫는 마음을 주시고, 열린 눈과 귀를 갖게 해 달라고 구해야 한다.

만약 자신이 높임을 받고, 때로 전하는 말씀이 능력 있게 전해진다면

그 권위는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더 겸허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더 유연한 도구가 되어야 하지 않나.

그것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여기며 오만하게 행동하는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예수님의 첫 번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예비 제자들은 한 치의 의심이나 주저함 없이 

자신들의 생업을 ‘버려 두고’서 예수님을 따라 나선다.

그들이 버려두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지금까지 자신들을 먹여살려온 것들, 자신들이 믿고 의지했던 것을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자세한 정황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일단 당시 유다의 남자들은

그 직업이나 사는 곳과 상관없이 종교적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채워지지 않는 큰 갈증을 느끼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갈증을 채워주겠다고 여러 종교지도자들이 앞에 서 있었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외형에 치우친 관례적인 종교행위에 머물거나

때로 자신들과는 너무 먼 차원, 삶과 괴리된 이상들이었을 것이다.

일단 그런 것을 제안하는 이들 자체가 너무 높거나 멀거나 어려웠다.

그런데 예수님은 찾아왔고, 보다 친근한 말씀들을 들려주셨고, 무엇보다 차별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물이나 던지며 고기를 잡던 하류인생들이었지만

그 속에 꿈틀대는 갈망을 위해 과감하게 지금까지의 삶은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격심사도 없고, 조건도 없이 그저 따라오라는 것처럼 단순하고 강력한 부름이 또 있을까.

최소한 이 부름의 순간에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 출세할 것이라는 생각은 안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의지해 살던 것들을 버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는 예수님을 발견한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훈련을 통해 양성된 사람들이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른 사람들이 제자가 된다는 것이다.

단지 부르실 때 지금까지의 삶을 등지고 일어설 수만 있으면 된다.

사람들은 버렸을 때 없는 것으로 인해 곤란을 겪을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걱정할 일이 아니다.

채우는 것은 본인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채우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성령의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못하기 때문에 비움을 겁내고

비우면 끝나는 줄 알고 조금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살아가는 형국이라고 할까.

알고 있는 것 많고, 가진 것 많고, 말 많은 사람들은 제자되기가 어렵다.

단순해지는 것, 예수님의 말씀처럼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 필요할 거 같다. 

그런 면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좆은 처음 제자들은 참 멋지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어느 누구나 믿음을 갖고 살고 있다.

무엇이든 믿는 구석이 있기에 하루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러나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서 삶의 내용은 확연히 달라진다.

지금 나는 무엇을 믿고 살고 있는가?

자신의 머리를 믿고 있나? 실력(능력)을 믿고 있나? 자신의 학벌과 인맥을 믿고 있나?

집안의 재력과 소유의 힘을 믿고 있나? 부모, 배우자나 자식을 믿고 있나?


사실 교회 밖을 예로 들 필요도 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질문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무엇을 믿고 살고 있냐고 하면, ‘예수’를 믿고 산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자신이 가진 소유와 자녀의 성취 같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얼마나 휘둘리면서 살고 있나?

휘둘린다는 표현이 좀 거슬릴 수 있겠는데, 그것은 곧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뜻이다.

성도들이 교회 왔을 때 표정이나 기도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원하는 대로 되면 업 되고, 

자신이 생각한 대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다운 되지 않나?

자식을 보면서도 자기 눈앞에서 좋은 성적을 얻고 좋은 대학을 가야하고, 

좋은 직장을 가야 안심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이 무엇을 믿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선포하며 그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역시 마찬 가지였다.

사람들은 믿음이 있었다.

화려한 성전과 성곽이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다고,

자신들이 통달해 있는 율법의 조항들을 지키는 것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 태도 가운데 정작 하나님께서 소외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으라’라는 선언은

그렇게 왜곡된 믿음에서 참 믿음으로 돌아서라는 요청이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 그 믿음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성전을 중심하고, 예루살렘을 주목하고, 율법에 몰입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부(성공)와 권력(정치적, 종교적)을 의지하는 삶에서 벗어나라는 선언이었다.


그러니 ‘복음을 믿으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한 파장으로 울려온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광야와 시험의 조합은 너무도 당연하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야곱이 집을 떠나 라반에게 갈 때 통과했던 그 곳이고,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끌려 갈 때 지나갔던 길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걸었던 학습장이었고,

다윗이 왕이 되기 위한 지루한 수업이 있었던 곳이고,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또 다시 돌아 올 때 지나는 길이었다.


광야는 무엇을 의미할까?

없음(無)을 뜻한다.

없는 곳이다.

자신을 지지해 줄 어떤 것도 없는 곳.

먹을 음식도 물도 없는 곳이다.

나를 위급한 상황에서 지켜줄 집도, 담장도 없다.

도와줄 도움의 손길도 없다.

일단 지지자들이 없다는 것이 광야는 희망과 소망의 땅이라기보다는 절망과 죽음의 땅이다.


인간이 세운 제도와 가족과 관계가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은 가려진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온전한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아니 부정할 것도 없다.

가진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그러나 그 사람이 예수님이셨다면 많이 달라진다.

능력이 있는 예수님은 그 광야를 손쉽게 생명의 땅으로 바꿀 수 있다.

광야에서 온전히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만나느냐

아니면 능력껏 자신의 필요를 채울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시험은 광야의 하나님이 되라는 것이다.

무를 유로 바꾸라는 유혹이다.

하나님 없이 살라는 유혹이다.


신앙생활은 광야로 나가는 것이다.

광야에서 아무것도 없기에 모든 것이 있음,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체험 할 수 있다.

(광야는 때때로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배신, 죽음, 질병, 고통 등으로. 그 때 시험 역시 찾아온다. 

시험의 다른 얼굴이 의심이다. 하나님이 나타나시지만 하나님으로 볼 수 없도록 한다.)


그러나 신앙의 여정은 우리로 하여금 광야에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어쩌면 광야에서 하나님의 실존 안에 거하는 삶을 지속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 또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격적, 자연스런 삶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오신 것처럼

그리스도인 역시 사람들 가운데로 돌아와야 한다.

그 곳에서 이젠 더 이상 거짓 하나님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그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삶을 살게 된다.

당연히 그의 삶은 작은 하나님, 작은 예수의 삶이 된다.


그러므로 정리해 보면 광야는 훈련의 장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위한 훈련의 장이다.

예수님께선 이 코스를 정말 모범적으로 통과하신다.

사람들 중엔 이런 과정을 거치며 종종 자신이 하나님인줄 오해 하고 자신의 몸을 세우려 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취는 남아 있지 않다. 오직 예수님 외에는...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에 대한 소개는 단 하나다. 그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다.
그 이상 부연하거나 추가적 사건이 있을 필요는 없다.
요한복음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조롱받았던 곳!
뭐 다윗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끼워 맞추기식 논리도 필요 없다.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는 것을 굳이 힘들여 풀어 놓을 필요도 없다.
아직 유아일 때 이집트 구경을 했다는 것도.
얼토당토하지 않은 동방의 박사들과 목자들까지 끌어들일 필요도 없다.
그저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사람이고,
그가 처음 드러난 것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부터다.

아마 요한도 처음에는 그가 자신이 얘기한 사람인지 몰랐을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예수의 정체가 밝혀졌을 것이다.
하늘로서 들리는 소리 역시 예수님만 듣는다.
얼마나 감격적인 자기 확신인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 기뻐하는 아들이라는 것!

어쩌면 모든 인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은 동일할 거다.
그러나 모두를 기뻐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당신께서 선택하신 유대인들조차 기뻐하시긴 어려워 보인다.
예수님께서 기뻐하는 아들이라는 것이 그분의 삶 전체를 분명하게 해준다.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삶이 어떠할지 알 수 있다는 얘기다.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살아낸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를 얼마나 무겁게 받으셨을까.
매일의 삶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고,
결국 십자가가 현실이 되는 상황 가운데서도 물러 서거나 피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고(존재),
더불어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행위).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세례 요한은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했다.
그럼 세례요한의 능력이 뭔가?
자신 뒤에 오시는 분의 능력은 또 뭘까?

세례 요한은 이미 자신의 능력을 보여줬다.
광야로 사람들을 끌어냈고, 그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획기적인 일을 실현했다.
그럼 예수님의 능력은 무엇인가?
가르침, 병고침 등의 기적? 영적 파워(카리스마)?
이런 것들로도 예수님은 그 누구와도 구별되는 능력의 차이를 보이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하나 더 있다.
바로 죽음의 능력이다.
온갖 고통을 다 받고 못박힌 십자가의 죽음,
그 길이 어떤 길임을 알고도 그것을 선택하는 그 모든 여정이 바로 예수님의 능력이다.
물론 세례요한 또한 헤롯 왕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예수님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예수의 능력은 뭘까?
우리가 기대하고 고대하는 예수의 능력은 뭘까?
전자에만 있지 않나? 기적과 같은.
먹을 것, 질병에서 나음 받고, 명예를 얻고, 힘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예수님의 최종적 능력은 죽음에 있었다.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그 능력,
죽기까지 사람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키가 된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인생들을 향한 사랑의 능력이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탁월한 능력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정답에 가깝다.
세례요한은 사랑이 아니라 정의에 가까웠고, 구별이나 분리였다.
광야로 나오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또 정죄하지 않았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막1:2-5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그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더라

세례 요한의 사역은 사람들을 성전 밖으로 불러낸 것이다.
(당시 요한과 같은 이들이 더 있었다.)
그 때까지 성전과 그 성전의 사람들인 제사장들,
그리고 그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중심의 종교생활을 했다.
그것이 자신들의 삶의 안녕을 지켜주는 방편이었다.
그런 그들을 성전과 예루살렘의 밖으로 끌어 낸 것이 요한이다.
의례에 묶여 있던 하나님과 진리를 향한 갈망에 자유를 준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상황을 혼란으로 여기고, 경계해야할 사태라고 보았을 것이다.
상당히 기분 나빴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활동은 굳은 종교를 유연하게 하는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는 것은 결국 들과 강에서 제사(속죄제, 화목제)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도 제사장이 연 어떤 야외 성소에서가 아닌 한 야인이 선 들녘과 강에서였다.
그러니 이 얼마나 예수님의 길을 잘 준비한 것인가?
예수님은 이후 당신 스스로를 성전보다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고,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성전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요한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던 말씀일 수도 있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1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여기서 시작이라는 것은 마가복음의 기록을 알리는 것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삶에 대한 엶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예수님을 통해서도 그렇고, 또 예수님 전에도 사실은 복음은 있었다.
하나님의 이름 그 이상의 복음이 또 있을까?
예수가 그 하나님을 최고로 담아내었기에 예수님의 이름이 복음을 대변하게 된 것이다.

시작이라는 것의 의미는 어쩌면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 말씀을 읽을 때 그 속에서 시작되는 복음의 역사!

그래서 우리는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역이 내 속에서 시작되고,
또 누군가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갈 때 그 곳, 그 사람에게 복음은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셨고, 끊임없이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아마 마가는 이 첫 문장을 쓰기위해 가장 고심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자신 안에서 그 순간 새롭게 떠오르는
예수님의 생생한 이야기들이 그로 하여금 시작의 마음을 갖게 한 것이다.

마가와 함께 복음을 시작하는 오늘!

블로그 이미지

dols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