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는 일이 많이 등장할까.

아마도 예수님을 찾은 이들 중에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고,

질병이 그 때 사람들이 직면한 가장 긴급한 문제였다는 것을 뜻한다. (1)

예수님은 당신 앞에 나타난 사람들을 앞에 두고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처럼 논쟁하지 않으셨다.

배가 고픈 사람이 오면 빵을 주고, 아픈 사람이 오면 낫게 해 주셨다.

골치 아프게 이러쿵저러쿵 따지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에게 맞추어 그 사람의 필요에 최선을 다해서 부응해 주신다.

당신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거슬리는 것이 된다고 할지라도 아랑곳 하지 않으셨다.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오신다면 성도들은 가장 먼저 무엇을 해 달라고 할까?

예수님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일단 사람들은 자신들의 피부적 문제들을 누군가 해결해 주기를 원한다.

자기에게 아픔이 있거나 힘들 때 다른 이들, 다른 거시적인 문제들에 마음 쓰는 것이 어려운지도 모른다. (2)

과거나 오늘이나 예수님 앞에 선 사람들의 앞선 요청은 ‘저를 좀 낫게 해 주세요’ 일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질병의 문제는 사회정의의 문제와도 닿아 있다. (3)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낫기를 구하는 병들을 보면 대개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이들,

소외된 이들에게서 주로 발병하는 것일 경우가 많다.

정서적으로 따돌림을 당함으로 인해 겪게 되는 어려움들인 경우도 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질병을 고쳐주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상한 마음(심령)에 대한 치유를 시도하신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단지 병을 낫게 해 주시는 분으로만 한정하면 곤란한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사역은 질병의 문제 너머에 있었다.

만약 예수님이 가신 길을 좇아가려는 제자라면 예수님이 어디를 바라보시고 나아가고 계신지를 알아야 한다. (4)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의식이 조금이라도 깨어나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닐까.

자신의 문제에만 갇혀 있지 말고, 예수님처럼 좀 더 차원 높은 삶의 이야기에 접속하기를 바라셨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제자들조차 그러지 못한 것 같다. 예수님 사후에나 가능했던 일들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예수님께서 해결하셔야 했던 당면과제들의 스케일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역 초반에서 질병을 고치는 것에 있었지만,

조금씩 오버랩 되면서 좀 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결국에는 하나님의 영역의 문제들에 직면하셨다.

질병에서 율법의 문제로, 또 다시 민족적 문제들로, 또 다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확장되었다.


예수님을 만나는 우리의 모습도 이 단계를 거치는 것 같다.

내 몸의 문제, 집안의 문제, 사회의 문제, 국가와 전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그런데 우리는 평~생 내 문제에만 매어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나 늘 자신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마가복음 1장에 머물러 병을 고침 받는 것이 전부인것처럼 여긴다.

그러면 더이상 예수님과의 동행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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