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산띠아고길의 최종 목적지인 산띠아고 데 꼼포스뗄라에 도착하면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있다. 하나는 순례자 사무실에 가서 순례 확인증을 받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11시에 있는 대성당의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다. 미사는 매일 드려지는데, 순례자들도 있지만 이 도시만을 보기위해 온 관광객들도 많기 때문에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래서 한 시간 이전부터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는 이들도 있다. 미사가 시작되기 전에 순례자 사무실에서 보내온 자료를 바탕으로 출발지를 기준으로 어느 나라 사람 몇 명이 순례를 마쳤는 지 호명을 한다. 이전에 본 자료에서는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데, 순례자가 너무 많아서인지 숫자만 불러준다. 

그리고 미사가 시작이 되는데, 먼저 사제들이 입장을 한다. 그런데 처음에 좀 놀란 것은 단에 오르는 신부의 숫자가 너무 많은 거다. 열 명도 넘는 것 같았다. 아니 무슨 특별한 미사이기에 순서를 담당하는 신부가 저렇게 많담. 그러나 미사 내내 대부분의 신부들은 자리를 지켰고, 어떤 역할도 맡지 않았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 라고 넘겼는데, 그 궁금증은 다른 순례자와의 대화에서 풀렸다. 자신들과 함께 걸어오던 신부님 한 분이 있었는데, 미사 전에 사라지더니 신부 옷을 입고 그 앞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아~ 순례자라도 신부는 회중석에 앉지 않고 단에 오르는구나..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다. 그리고 유추해서 알 수 있었던 것! 미사를 드릴 때 신부는 일반인들, 그들의 표현으로 한다면 평신도와 함께 앉지 않는다는 것!


산띠아고 대성당의 독특한 볼거리인 대형 향로를 좌우로 크게 흔드는 보나부페이로.

단 위의 다수 신부들도 이 신기한 광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하고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 성직자와 평신도이다. 이 둘의 구분! 물론 개신교에서도 이 개념은 널리 사용되고 있다. '평신도'라는 표현을 담고 있는 신문도 있고, 모임들도 여럿 있다. 


신학대학을 다닐 때 수업 중에 있었던 일이다. 가르치던 여자 교수님은 교역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한 학생(지금 신학대학의 교수로 있음)이 교수님을 향해 '평신도' 운운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정색을 하면서 개신교에 평신도가 어디 있냐고 격앙된 말투로 답하셨었다. 맞다. 개신교에는 평신도가 없다. 이 말은 성직자도 없다는 얘기도 된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나누고 그 구분을 철저히 지키는 전통은 가톨릭의 것이다. 왜냐면 성직자는 사제 즉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기 때문이다.


때로 목회자들이 스스로를 성직자라고 말하기도 하고, 성도들도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정작 성직자인 목사가 가톨릭의 미사에 참여할 땐 영성체 예식에 참여도 못한다. 영세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구분해서 말하는 소위 (가톨릭의) 평신도보다도 못한 것이 목사라는 것을 생생히 체험하게 된다. 물론 가톨릭의 전통으로 그렇다는 얘기니 오해는 없어야 겠다.


아무튼 하고싶은 얘기는 최소한 개신교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개념은 없다. 루터에 의해 만인제사장이 선언되었다면, 모두가 제사장이고, 또 모두가 제사장이 아니라는 얘기다. 모두가 성직자이거나 모두가 평신도라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성도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사실 목회자도 성도이다. 그럼 어떻게 구분할까? 달란트에 따른 역할의 다름으로 보면 된다. 목회자는 좀 더 기도와 말씀 가운데 거하며 교회와 일반 성도들을 돌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실 그런 역할은 누구와도 나누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자기만 할 수 있다고 할 때, 그들만 할 수 있다고 할 때, 불편한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 목회자에게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여기며 의존하고 기대하지 말아야겠다. 그저 그들의 역할을 인정해 주고 그 전문성을 존중해 주면 된다.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해 볼 것이다. 그럼 정말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있는 것인가? 가톨릭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가톨릭에서 신부를 성직자라고 하는 근거는 뭔가? 제사인 미사를 주관할 수 있는 사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물이 있고 평신도가 있어도 신부가 없으면 그곳을 성당이라고 하지 않고 공소라고 한다. 신부가 없으면 성당도 미사도 불가능하다. 그럼 잘 생각해 보자. 그들이 신부를 사제라고 하는 근거는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교황은 스스로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여기는데, 그럼 베드로에게서 온 것인가? 베드로는 어부이고 한 번도 제사를 주관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다. 그럼 예수님께로부터 왔나?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예수님께서 제사를 지내셨다는 얘기는 없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사를 지내달라고 부탁하신 일도 없다.

그렇다면 구약의 제사장들에게서 왔나? 그건 더욱 말도 안되는 얘기다. 신약 시대에 생겨난 종교가 왜 구약 시대의 유물을 붙들고서 제사, 사제 운운하는지 모르겠다. 결국은 수많은 순진한 성도들의 눈과 귀를 홀리기 위한 적절한 방법으로 만들어지고 발전한 것이 미사가 아니겠는가. 그 일을 자기들만 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기 위해 성직자를 구분해 질적 다름을 주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성직자가 없다는 얘기의 결론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른 존재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영악해서 스스로 성직자 운운하며 끼어들고, 인간들이 약해서 누군가 앞에 서 주기를 바라서 목회자를 끼워 넣는 일 등등 그만해야 한다. 물론 돕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필요하다. 더 알고, 먼저 깨달은 사람들의 안내는 있어야 한다. 그것도 최소한으로 말이다. 신앙의 깊이를 더한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끼어있는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 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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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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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기도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됐다.

21세기가 영성의 시대이고, 영성의 핵심이 기도이기 때문일까.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자연스럽게 그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세계적으로 한국 개신교 신자들이 기도 잘하기로 유명하다.

새벽기도는 물론이고, 수요일, 금요일 저녁(밤) 정해진 모임 뿐만 아니라 

여러 작고 큰 모임들을 가지며 기도한다.

기도를 해도 '뜨겁게'해야 한다.

뜨겁게 하지 않으면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시원하지 않은 거다.

마음 속에 맺힌 것, 꽉 막힌 일들이 물꼬가 터지듯이 뻥 뚫릴려면

좀 더 파워풀하게 '주여~'를 외치며 몸을 들석거려야 하는 것이다.


사실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도의 방식 역시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선택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기도 방법 가운데 담기는 내용이다.

대부분의 기도에 담기는 내용을 보면, 거의 요구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진다.

요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기도라는 말 자체에 그 뜻이 담겨 있으니까.

그런데 요구하는 것이 한 쪽으로 치우쳐 있으니 곤란한 것이다.


거의 대부분 물질, 출세, 건강 등 성취물(복)에 집중되어 있다.

성경을 잘 읽어 보면(참고, 신28:1-14)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 앞에 '~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명령을 잘 지켜 행하면, 복을 주신다는 약속이다.

그러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 지 명확하다.

'~면' 앞쪽에 있는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명령을 잘 지켜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잘 안된다는 것, 잘 지켜 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함께 해 달라는 것을 구해야 한다.

자녀를 위한 기도에서도 마찬가지다.

내 아들이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게 해 달라고, 시험 잘 보게 해 달라고 수능날 기도할 것이 아니라,

평소 내 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도록 해 달라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아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면 복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이 얘기 안해도 주실 것 아닌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비유하면 이렇다.

아빠가 아들에게 "장난감 정리 잘 해 놓으면, 동화책 읽어줄께!"했는데,

그 때부터 장난감을 정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동화책 읽어줘!'를 연발하는 것이다.

그것도 처음 한 두번은 아이가 귀여우니까 들어주지, 계속 그러고, 커서도 그러면 정말 대책이 없는 일이다.

앞 문장에서 '커서도 그러면' 부분을 한 번 더 강조해야겠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연륜을 더해도 그 기도 내용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커서도 전혀 진전이 없는 것이다. 

성장은 없고 나이만 먹는 것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를 누구보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잘 아신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면 나에게 필요한 최선의 것을 아실까, 모르실까? 아니 주실까, 안 주실까?

시간문제이지 분명히 주실 것이다. 차고 넘치도록!

그런데 우린 지금 좁은 시선을 가지고 이 거 달라, 저 거 달라 안달을 하고 있으니.


오히려 시선을 돌려 지금까지 주신 것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지 못하는 오늘 나의 현실을 고백하고, 함께 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그리고 할 말이 없으면 가만히 앉아 자신을 들여다 보고,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기도가 더 좋고, 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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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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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안묵적으로 지지받아온 말이다. 
정말 교역자를 대적하면 벌을 받아서 아프고, 심지어 죽기까지 할까?
일부 교역자들은 그 근거로 모세를 대적했던 사람들이 당했던 일을 거론하며 겁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한 것은 목회자를 대적했던 사람들의 집에 죽는 사람이 발생하고
병에 걸려서 고생을 하는 것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목사를 대적하면 안 된다는 공식이 성립한다.
그럼에도 대개의 교회들에서는 목회자들을 성도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쫓아 내는 일들이 비일비제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런 현상으로 주눅이 들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여기지만
그럼에도 그런 말을 하면서 누가 벌을 받았느니 하면서 설왕설래하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일단 상식적으로 봤을 때,
누군가를 미워하고, 공격하며 격정적인 마음으로 일정 기간을 보내게 될 때
가장 큰 내상을 입는 것은 비판받는 대상이 아니라 비판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내부에 병을 키우게 될 수 있다는 거다.
또 그런 성격적인 측면이 작용을 해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내 생각으로는 목회자들은 자신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성도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런 움직임이 보이면 빨리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예수님이셨어도 그렇게 하셨을 것 같다.
결국 인간사가 그렇게 단기적으로 뭐가 옳고 그르고를 판가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이야기가 좀 곁길로 나갔지만,
목회자를 대적했다는 그 사실로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병에 걸리고, 죽는 것은 인간사에 드리운 총체적 운명의 한 부분일 뿐이고,
우연히 그 사건과 결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인과관계를 찾는 것은 인간이 가진 또하나의 어리석음의 결과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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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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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여고생들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써니'같은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바탕에 깔린 영화는 더욱 그렇다.

오늘 동구마케팅고 하은이반(기독 동아리)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갔는데,
영화 동아리의 영화관람에 끼어서 보게 되어
영화관은 동구의 여인들이 꽉 들어찼다.
그들 사이에서 보는 여고생들의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했다.

그러나 그들은 잘 몰랐을 거다.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 배경들이 가진 시대성을 말이다.
그것까지 알면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엄마들에게 강추한다고, 꼭 보시라고 말씀드리라고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여고생이라고 하면서, 또 유호정이 교복을 입으며 추억에 잠기지만
실제 여고시절로 돌아가서는 교복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건 80년대에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만 알 거다.
교복 자율화!
5공화국 때 영화 중 잠시 등장했던 전모 대통령 덕분으로 있었던 자유롭지 못한 시대에 자유!
그래서 임나미가 벌교에서 전학을 와서 당황해하는 것과 연관되는데
자기는 스펙스 신발을 신었는데 다른 친구들은 프로스펙스나 나이키를 신었다는 것으로 충격을 받는 장면이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프로스펙스 신발을 신었다.
그 때가 85년이었는데, 친구들이 주변에 모여들어서 신기해 하며, 공부 잘해서 사주셨냐고 부러워했었다.
정확히 기억하는데 당시 25,000원짜리로 제품명은 '그랜드슬램' 테니스화였다.
스펙스와 프로스펙스, 월드컵과 프로월드컵의 차이를 아는 사람은 우리 세대다.
소위 메이커 옷과 신발이 청소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잡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촌스러운 모습인데, 영화는 그것을 참 잘 담아낸 것 같다.

(일단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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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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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투자해서 구입한 오디오.
스피커가 AR이라는 말만 듣고서, 누가 물어 보면 'AR이래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가족이 된 지 1년을 훌쩍 넘기고서야 좀 궁금해졌다.
왜냐면 어떨 때는 소리가 좋은데, 어떨 때는 좀 답답하게 들릴 때가 있어서다.
오래된 거라 성능이 좀 떨어졌나 싶어서 인터넷에 AR스피커를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내 거랑 똑같이 생긴 것들이 죽 뜬다.
물론 똑같이 보여도 여러 기종들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내가 소장하고 있는 스피커는 60년대부터 생산된 AR-4x모델이다.
그런데 눈에 딱 띄는 문구, '보컬에 적합한' 스피커!
아~ 그랬구나. 이 스피커는 사람의 목소리를 잘 담아내는 거구나.
그래서 클래식을 틀면 왠지 소리가 뭉쳐서 들리는 것 같은데,
반면 재즈나 가요 같은 것을 들을 때는 참 좋았던 거다.
이제부터는 스피커에 맞는 음악을 들어야겠다.

그런데 사람들도 그런 것 같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징, 사람의 결이라고 할까.
그 사람만의 고유성이 있는데, 그것을 거의 무시하고
이것저것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려고 하는 것 같다.
아니 그런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모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밀어 붙인다.
특히 자녀들을 대하는 엄마들의 태도가 그렇다.
엄마들이 원하는 자녀상은 아마 거의 똑같을 것이다.
기계적으로 엄마가 계획하는 대로 다 받아서 좋은 성적 내고, 좋은 대학 가고, 좋은 회사 가고,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되는 것!
만약 그렇게 되면 마치 영화 메트릭스의 마지막 부분에 세상 사람이 몽땅 스미스로 바뀐 것처럼 되어 버릴 지도 모든다.
모두 똑같은 사람을 목표로 기르려고, 아니 생산하려고 하니 말이다.
그래서 엄친아라는 말도 나왔을 거다.

스피커도 그러할진데, 사람은 더욱 그렇지 않을까.
각각 담아내는 삶의 내용이 다르게, 다른 소리를 내도록 창조된 것이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그 다름, 독특함이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하는 것이 아닐까. 



# 삼베로 만든 그릴을 벗기면 약간은 험악한 속살을 드러내는데, 연륜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마 나에게 오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탔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암튼 매력적인 놈과 동거 중이었다니, 새삼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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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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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하고 생각하는 것이 곧 글을 쓰는 바탕이며 출발점이다.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훈련이 더욱 중요하다.
기막힌 이야기 기막힌 글쓰기, 최수묵 지음, 교보문고, 29p.

매일 짧게라도 글을 써 보겠다고 작정을 했는데,
어느 날은 블로그만 열어 둔 채로 한두 줄 쓰다가는 한 글짜도 더 나가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다 떠올려 보고,
아무 글도 써 있지 않은 플래너를 뒤적거린다.
그러면서 장탄식이 나온다.
'아, 오늘은 아무 생각도 없이 하루를 보낸 것인가?'
정말 하루라는 긴 시간을 보내면서 아무 생각도 안 했을까?

그렇다.
하루동안 생각 같은 생각을 하지 않고 보낸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 가운데 지혜를 얻지 못한 것이다.
꼭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음에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인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연해주 들녁에서_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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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후기

깨어살리/日步 2011. 4. 27. 22:34
설교 하기 전이 좋을까 설교 한 후가 좋을까?
어리석은 질문같지만...
설교 전이 더 좋은 것 같다.
왜?
설교 전에 긴장 하게 되고, 마무리가 잘 되지 않았을 때는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최소한 아직 말을 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말은 내 뱉으면 그만큼 나에게 되돌아 오는 것을 느낀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라는 지극히 사적인 통로를 통해서 전해지다 보니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들어갈 수 있고, 그러다보면 그 말의 질량이 낮아 질 때가 있다.
그렇게 말씀을 전하고 내여 오면 한 없이 허전함에 부끄러움까지 느끼게 된다.
아마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전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전한 전체 말씀이 아닌 마음에 와 닿은 일부분만을 기억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또 매 번 최선으로 준비되지 않는 설교를 보면서,
나 자신의 성실하지 못함, 실력 부족이 많이 느낀다.
물론 내가 할 수 없는 성령의 영역이 있음을 고백한다.
때때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나를 압도하는 경험도 하지만,
그것이 늘상 일어나는 체험은 아니다.
그래서 노력 없이 그런 요행만을 바랄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암튼 오늘은 설교 후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이런저런 넋두리를 해 본다.
다음 번에는 좀 더 최선을 다하고, 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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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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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은 요즘 교회들이 긴장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면 한 가지 큰 의구심이 든다. 
동일한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고, 그것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다.
이제껏 가만히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의 문제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개의 교회와 목사님들이 침묵으로 일관했었다는 얘기다.
이미 2002년에도 한 목사님이 돈봉투를 받았다는 양심선언이 있었고,
이에 대해 당시 교계 일부의 술렁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남의 일처럼 여기다가 이제와서 큰 일을 맞은 것처럼 자성한다고 야단이다.

차이점은 언론의 관심에 있고, 이로인해 사회전반의 시선이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쏠리는 것을 의식하고 그것을 막아 보겠다는 동기가 많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정말 조심스럽지만, 이런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은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결국 이전부터 있었던 금권선거 가운데 자신들이 돈봉투를 돌릴 때, 또 그 봉투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 보시고 있다는 것을 몰랐나?
그 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돈보다 하나님, 총회장 자리보다 하나님을 선택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와서 사회에서 관심을 보이고, 공론화 되자 자성한다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특정인을 문제의 근원인양 몰아 세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성명서를 발표하고 자성하자고 하고, 그것에 동의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서
진심어린,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여전히 자신이 옳고, 지금 그런 자신들의 위치와 힘을 지키겠다는 의도가 더 앞서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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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회를 보면 어른스러움이 많이 결여된 모습들을 본다.
묵직하게 사회를 넓게 품는 사람, 세력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 사회의 어른스러움의 실종은 장남문화의 단절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장남의 문화란 책임감과 여유, 포용력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 대가족으로 살며 여러 대가 함께 살았을 때 형들이 그런 역할을 감당했다.
작은 아들은 작은 아들로 살지만, 그 작은 아들의 장남은 큰 아버지를 보면서 장남의 역할을 배운다.
그래서 장남의 문화는 단절되지 않고 가정에 사회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핵가족화되면서 작은 아들의 집에서 자라는 장남은 더이상 장남의 역할을 배울 곳이 없다.
그래서 차남인, 막내인 아버지의 약간 느슨한 책임감, 조급함, 이기적인 태도를 배우게 된다.
이로 인해 사회는 점점 빠르게 개인주의화된다. 

물론 모든 장남 문화가 다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좀 더 통큰 사고, 넓게 품는 가슴은 이 시대에 더 없이 소중한 덕목이 아닐까.

오늘 노회를 했다.
노회 중 우리 교단을 장자교단, 우리 노회를 장자노회라고 부르는 것을 여러번 들었다.
그렇다면 장자답게 책임있고, 통큰 마음과 헌신적인 모습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지금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인 '금권선거'에 대한 단호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여러 목사 장로님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용단을 내렸다.
총회에 노회총대를 보내지 않기로 한 것이다.
총대로 뽑히는 순간 금권선거에 빠져들고, 그렇게 총회에 가봐야 할 수 있는 일이 크지 않기에
아예 총대를 파송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뽑지도 않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 정도로 되겠느냐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지만,
몇몇 목사님들의 충정어린 호소는 가슴 뭉쿨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진작에 이런 결의를 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아 들지만,
그래도 뭔가 변화와 개혁을 위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에 고무적인 하루였다.

장남이든 아니든, 장자든 그렇지 않든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어르스러움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정말 이 사회가 너무 가벼워졌다.
대통령도 형이 국회의원이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 형님으로 모셨던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지
너무 가볍게 호들갑 떨듯히 일하는 것 같고, 언론은 진중한 고민이 없이 흥미만을 좇아 다니며
사람들의 정신을 산만하게 하고 있는 것이 오늘 한국의 자화상이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했다고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벌집을 만들어 버린다.
좀 기다려 줄 줄도 알고, 이해하려는 넓은 마음 더더욱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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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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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에 갔을 때, 한 카톨릭 복지시설에서 받은 책갈피이다.
추측하건데, 아마 프란치스코가 아닐까 싶다.
자연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그의 기행에 비추어 보면 저렇게 동물들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는 동물들이 곁에 있는 지 아는 지 모르는 지 하나님을 향한 기도 가운데 몰입되어 있다. 

오늘 새벽에도 기도회에 갔었다.
사순절이기도 하고, 그 중에서도 이 번 주간은 고난주간이고,  
올 해 동숭교회는 특별히 '내 생애 마지막 한 달' 캠페인을 진행 중이기도 하다.
나는 교역자니까 빠질 수 없다.
지난 주에 담임목사님께서 '내가 만약 목사가 아니면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고 하셨는데,
나도 그런 생각을 했고, 대답은 빠졌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왜냐면 난 새벽, 아침에 취약한 체질이기 때문이다.

암튼 기도를 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과 잘 통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 새벽에도 한 청년이 무릎을 꿇고는 큰 소리로 기도하는 바람에 약간 졸다가 번쩍 깼다.
그런데 그 기도 내용을 들으며 답답함을 느꼈다.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고,
쉴새 없이 뽑아 내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대개의  개신교 신자들의 기도가 이럴 거다.
문제는 기도를 할 때 너무 힘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나'가 너무 살아 있어서, 그 나를 만나시는 하나님이 들어갈 여백이 없는 것이다.
나의 의지, 이렇게 되게 해 달라는 요구, 계획 등을 내려 놓고,
그 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니는 지 잠잠히 기다리는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기다리다 보면 하나님을 느끼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마치 위의 책갈피의 그림처럼, 내가 어디에 있는 지, 무엇이 내 주변에 있는 지, 심지어 내가 누구인지도 잊고 기도로 빠져 드는 것 말이다.
자신을 비우고 기다리는 것이 전재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기도, 그래서 참 어렵다. 그런데 또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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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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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수련회 장소를 찾는 일이 너무 늦어 버렸다.
그래서 일단 기간이 비어있다고만 하면 열일 제쳐두고 달려가야 하는 형편이다.
지난 화요일에 두 곳을 다녀왔고, 오늘도 한 곳을 다녀왔다.
단양과 영월, 그리고 춘천을 찍었다.

오늘 갔던 곳은 춘천시 남산면 빙하리 한강변에 있는 '기화유스호스텔'이다.
이 곳은 처음이 아니라 2001년에 소년부 5,6학년 친구들과 2박3일을 보낸 곳이다.
지금 그 친구들은 대학생들이 다 되었다.
그 곳에 정말 10년 만에 다시 갈 수 있게 될 것 같아서 가슴 벅차다.
물론 수련시설로서 완전하진 않다.
물놀이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수영장도 없고, 한적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름 강에서 할 수 있는 몇 가지 놀이를 선택할 수 있고,
운동장이 바로 앞에 펼쳐져 있어서 좋다.
또 예전엔 없어서 불편했는데, 방마다 화장실과 샤워시설을 갖추어서 한결 좋아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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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처음 쓸 때는 버스정류장에 서서 내가 기다리는 버스 위치를 검색해 보며 어디쯤 오고 있는 지를 아는 것에 뿌듯해 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엔 폰을 꺼내서 검색해 보려고 하다가 멈추어 버린다. 귀찮아서이기도 하지만 뭐 꼭 그걸 검색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다. 그냥 기다려도 오고, 추적을 해 본다고 해서 더 빨리 오는 것도 아니니 의미 없는 소비적 행동같아서이다. 
그 시간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의 끝자락을 잡아서 이런 글 하나 더 쓸 수 있는 소재를 만들어 보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엔 핸드폰을 들여다 보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요금제를 바꿔야 할 판이다. 꼭 필요할 때만 살짝 터치할 뿐.
이제 초고속 인터넷은 보편화 되고, 핸드폰도 그냥 핸드폰이 아닌 스마트폰으로 진화하면서 우리의 정서는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볼거리에 영혼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더이상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 전하는 것을 보고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글을 쓰더라도 잠시 지나가는 감정을 단문으로 아주 짧게 그리고 무책임하게 쏟아놓을 뿐이다.

오늘 새벽에 담임목사님께서 주신 말씀 가운데 너무도 적절한 구절이 있었다. "속도를 낸다고 빨리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우리의 삶이 빨라졌다고들 하지만, 정작 자신을 진실되이 돌아보는 데도 느려졌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 역시 느려지고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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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일어난 재난의 상황을 놓고 말이 많다.
일단은 함께 고통을 나누자는 태도와 말들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그 곳을 향해서 하나님의 심판 혹은 징계 또는 경고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들은 정말 기가 막힌다.
그 말을 특별히 목사님이 했다는 것에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낀다.
그런 말을 하면서 아마도 자신들이 우상숭배의 땅인 일본을 향해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는 예언자쯤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성경을 좀 다시 읽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성경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시겠지만).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언했지는 지를 좀 다시 공부하시라는 것이다.

예언자의 예언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곳에 가서 직접 그들에게 말했다.
더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예언자들의 헌신이다.
자신의 모든 삶을 그들을 향해 고스란히 내어 놓고서 피를 토하며 하는 말이 예언이었다.
그러면서도 예언자들은 자신이 전한 말이, 또 해야 하는 말이 너무도 무섭고 가슴 아파서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애끓는 마음으로 한 마디 한 마디를 눈물을 머금고 전한 사람들이 예언자들이다.
그러나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예언자의 심정은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본심에 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까 예언자는 하나님의 슬픈 마음을 함께 가슴아파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오늘 소위 예언을 하는 것처럼 말하는 목사님들에게서 이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너무도 냉정하다. 최소한의 인정도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리고 정말 이번 일이 하나님의 징계이고 경고라고 치자.
그러더라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왜냐면 일단 징계가 내려 망하게 되었을 때엔 예언자의 역할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얘가를 부르며 애통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다시금 회복될 것에 대한 '소망'을 주는 역할을 했다.
 
지금 그 목사님들의 모습에서 위로나 소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말을 하는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가 더 부각이 된다.
일본을 향해서 우상숭배, 무신론, 물신주의라고 평가했는데,
최근 그 분께서 교회를 통해서 축적한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기위해 어떤 행태를 보이고 있는 지 다 알고 있지 않나. 
그래서 당신이 하나님을 내세우면서 뒤로는 돈을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는 것
이것이 물신주의가 아니고, 또 역시 우상숭배가 아닌가?
더이상 하나님의 지키심을 믿지 못하고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것은 무신적인 것이 아닌가?
어찌 그 분 한 분만의 문제일까?
그 교회도 그렇고, 최근 매스컴에 보도되고 있는 한기총도 그렇고, 또 대부분의 교단의 정치 행태들이 그렇다.
누군가를 향해 하려고 하는 말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겸허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것이 참다운 종교인의 길이고, 그런 사람이 던지는 한 마디 말을 듣기 위해 모여들 것이다.

수없이 많은 생명이 잠든 그 땅을 바라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슬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함께 아파하며  울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며, 말이 아닌 손과 발이,
침 튀기는 것이 아닌 눈물과 땀을 흘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지금 나는 또 뭘 하고 있는 것인지.
뭘 해야 하는 것인가? 나 또한 말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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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은 물론 지혜를 확장하는 삶을 살기


지금 내 생각은 언제 적 것인가?

어떤 사람은 사고의 틀이 십대, 어떤 사람은 20대 중반, 또 어떤 사람은 30대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을 만나도, 어떤 사람은 만나도 그 때의 사고체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판단하고 결론을 이끌어 내는 과정이 늘 유치하고, 편협하고, 외골수로 흐르게 된다.

가장 심각한 것은 다른 사람을 말을 결코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워야 한다.

지식도 더 얻어야 한다. 더 알아야 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일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안목을 가져야 한다.

이는 어떤 생각에 묶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일신우일신 할 수 있는 삶의 태도

일보(김교신의 일기책 이름) 할 수 있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배운다는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창시절로 배움의 시기를 끝낸다.

그리고 결정적인 어떤 게기를 전후해서 배움의 자세를 멈추어버린다.

배움은 책을 통해서도 일어나지만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찌 하든지 자신의 이야기만 하려 한다.

배우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다.


진정한 배움은 지식을 넘어서 지혜에 닿게 한다.

그래서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문제는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점점 더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 지혜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지혜의 마음을 넓힌다는 것은 단기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들과 만남 속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을 통해서 성령 안에서 지혜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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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목사님들이 언론에 등장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물론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기사들이 더 많다.
교회에서 세운 언론사를 자신의 자녀들에게 물려주기위해 노력한다는 얘기로,
수천억원을 들여 교회를 건축해야 하는 당위성을 주장하는 모습으로,
교단의 교권다툼으로 결국엔 타교단 장로인 변호사에게 수장 자리를 내 주는 치욕의 장면으로...

반면에 교회가 사회를 위한 선한 일을 하겠다는 취지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사회복지 엑스포 같은 것을 통해 교회의 사회봉사를 알리고,
서해안 기름유출이 있을 때는 교회사회봉사단을 꾸려서 섬김의 장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엔 교회들의 자산을 기반으로 은행을 만들겠다고 선언을 하기도 했다.
교회가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뭔가 이런 일들을 할 때 더이상 주목을 받지 못한다.
아마도 어른 목사님들은 이런 행동이 꽤나 인기를 끌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보면 소위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높다.
어떤 프로그램을 하면 교회 인근에 주민들에게 긍정적인 소문이 나고 선교가 일어날까를 고민한다.
그 산물이 카페, 도서관, 극장 등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런 쪽에 관심을 갖고 예산을 몰아 줘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물론 기존 교회의 원로들에게 이런 얘기가 잘 먹히지 않아서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지금의 교회들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을 보면서 의문이 든다.
소위 문화라는 이유들을 들어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의욕적으로 진행하고
그래서 사람들을 끌어 오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라는 생각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핵심이다.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겉으로 보여지는 화려함, 특별함으로 사람들을 끌어 들이지만
그들은 교회의 실체를 알고는 발걸음을 돌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결론은 잘 길러진 참 괜찮은 그리스도인 하나가 최고의 프로그램이라는 얘기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잘 살아갈 때 우리가 소원하는 최고의 선교가 일어나는 것이다.
밖으로 이렇다 저렇다 소리지르는 것을 멈추고
이젠 자신을 돌아보고, '나나 잘하자'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다.
내가 괜찮은 그리스도인이 되면 된다.
대사회적으로 교회의 리더십이 실추되었다고, 뭘 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노력을 돌려서 자신을 바로 세우는 쪽으로 가라는 얘기다.
결국 교회의 지도자들, 특히 앞선 목사님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길을 걷는다면 거의 모든 문제는 술술 풀릴 것이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무슨 프로그램을 할까'하는 공허한 소리들은 그만 하게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http://www.andotadao.org/chlight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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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은 뭘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어떤 삶을 사느냐'는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을 삶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천한다는 것은 회개(반성)와 동시에 변화된 삶으로 나아가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믿음과 대응되는 반대개념이 아니라 믿음을 포함하는 더 넓은 의미이다.

누군가 무엇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가 무엇을 믿는 지를 알 수 없다.
과장해서 표현하며 하나님 조차도 그가 무엇을 믿는 지 아실 수 없다.
오로지 그가 삶 가운데서 어떤 결단을 하고 변화된 삶을 살고 있느냐로 알 수 있을 뿐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복잡한 질문들을 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예정론, 신정론, 삼위일체는 물론 영지주의 등 난해한 문제들을 가지고 와서 해결해 달라고,
그것이 풀리지 않아서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헛다리 짚은 거다.

예수 그리스도의 단순한 삶을 배우고,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성육신이니, 동정녀 탄생이니, 대속이니 하는 것들도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사랑을 나도 실천하고, 예수님의 버림을 나도 실천하고,
예수님의 모욕당함을 나도 당하면 된다.
"하루에 한 시간씩 하나님을 만나고,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는 마더 테레사의 말에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리스도인은 어떤 이론이나 신학이 옳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나를 부르셨기에 그를 좇아 가는 사람들이다.
믿음을 넘어서 삶으로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점이다.

하나님께서 묻지 않으실까?
"너 예수를 믿으며 살았냐?"가 아니라 "너 예수처럼 작은 자들을 사랑하며 살았냐?"라고.

믿음? 그건 의외로 간단하다.
우리의 구원의 문제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거면 충분한다.
그리고 '믿습니다'라는 외침과 조건부의 행위로 결정할 수 있다는 오만을 버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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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들이 성도들을 무술도장에서 사범이 제자를 가르치듯 해야 합니다."
얼마전 어떤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나는 이 말을 교회에서도 도장처럼 승급, 승단을 시켜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요즘 교회는 성도들을 승급시키지 않는다.
한 5급 쯤 되면 거기에 멀물러 있게 만든다.
그래서 사범인 목사를 죽을 때까지 필요하게 만든다.
그들은 매번 동일한 동작을 반복한 뿐이다.
어느 누구와의 겨루기도 필요없다.
목사가 나서서 막아주고 지켜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승급하지 못한 성도들이 나이가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가 되어 교회의 중직자가 되는데,
배운 것이 없고, 볼 줄 아는 안목도 없고, 결정적으로 잘 성장하고 훈련된 신앙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그들에게 맞겨진 교회가 건강하게 운영될 수 없다.
많은 교회들이 치고받고 싸우는 것에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또 늘 같은 동작만 반복하던 성도들이 세상에 나갔을 때
매 주 듣는 것은 많아서 말도 잘하고, 머리 회전도 빠르지만
정작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알 지 못해 기독교 쭉정이로 살아간다.
그들이 교회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으니 욕을 먹지 않을 수 없다.

승단을 해서 수준이 올라가면 과거 반복동작들은 그의 몸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이미 몸에 밴 기본기이고, 그것을 응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높은 신앙의 여정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승급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이해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다른 모습을 취하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심지어 이단으로 몰아세우기까지 한다.

저급할 때는 각자의 도장의 특색들이 중요하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그 차이들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승급하지 못한 이들은 이 안목을 갖지 못하기에 남을 더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유단자가 된다는 것은 그 도장에 더이상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모든 것을 가르쳐주고, 훈련시켜서
도장(교회)을 내 보내야 한다.
또 다른 곳에서 그들이 누군가를 제자로 삼아서 가르치도록 말이다.
아니면 더 높은 경지로 이끌어줄 또다른 스승에게 배우러 가든지, 
스스로 기술을 더욱 연마하기위한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아쉽게도 지금 교회에서 승급은 금기사항이다.
위험한 일이라 여기고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따로 불러서 호되게 주의를 줘서 원위치로 돌려놔야 한다.
그래서 마치 매트릭스에서 레오를 찾아 되돌려 놓으려는 스미스 같은 역할이 교역자들의 일이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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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힘 가진 사람들이 함부로 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런데 자신이 그 권력과 끈이 닿게 되면 확 돌변한다.
그럴 수 있다고, 지금은 그런 것이 필요한 때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우리 내부에 권력에 대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힘 뿐만이 아니다.
인기, 아름다움, 지식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가 뭔가를 더 큰 소리로 비판하게 될 때,
저신의 내부를 더 솔직하게 들여다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큰 소리로 비판하는 어떤 것이 내 내부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 명심하자!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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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연수 소감문을 썼는데, 무슨 출사표 같다.
쓸 얘기는 더 많은데 그러면 소감문의 정체성을 잃을 것도 같고,
분량도 정해져 있어서 이 정도로만...


마음이 콩밭에 갔어요!
김민태

2004년 가을, 신대원 3학년을 마쳐갈 즈음 내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귀농! 남들은 좋은 교회 전임 자리를 찾고 있을 때, 나는 몇몇 뜻 맞는 귀농학교 동기들과 귀농할 땅을 찾아 다녔다. 그 때 나는 온통 생태적 삶, 순환이 있는 삶, 소비가 아닌 생산적 삶에 대한 간절함에 흠뻑 빠져있었다. 결국 이듬해 2월 삶의 근거지를 경북 상주시 모동면으로 옮기고야 말았고, 초짜 농부로 밭농사도 재미나게 지어보고, 포도농사는 뜻밖으로 알찬 수익을 올렸다.
이렇게 그 농부의 때를 추억하는 지금, 내 마음은 다시 콩밭에 가 있다. 이번엔 진짜 콩밭이다. 연해주의 드넓은 콩밭이 눈만 감으면 손에 잡힐 것 같다.
사실 연해주의 끝이 보이지 않는 대지는 적잖이 충격을 주었다. 물론 몽골이나 중국 등 땅이 넓은 나라를 가보지 않아서 그렇긴 하지만, 연해주가 그런 곳일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기에 더욱 그렇다. 어디든 가보지 않고는 말을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녁시간에 걸었던 우정마을 주변의 초원, 거기서 발견한 대지에 걸려 있는 네 개의 하늘! 끝이 보이지 않는 콩밭, 그래서 호미를 들고 콩밭 매어보겠다던 소망은 날아가 버렸지만, 어딜 가도 금세 지평선으로 변해버리는 사방의 전경들... 신기한 것은 그런 풍광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왠지 친숙하고, 따듯했다. 어떤 이들은 연해주를 포함해 북간도, 심지어 사할린까지도 우리나라가 되찾아야 할 땅이라고 주장하며 캠페인을 하는데, 그건 좀 심한 것 같고, 최소한 우리나라의 땅은 아니지만 우리 민족의 땅이라고는 말 할 수 있겠다 싶다. 그것이 편안함의 이유가 아닐까.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땅을 더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닌 걸어보고 싶은 마음으로 하루 온 종일 걸어보고 싶었다. 호수에서 물장난(혹자는 수영이라고 하겠지만)을 하고 나와서 밀키스 하나 들고(다른 분들은 맥주) 걷게 되었을 때, 비록 아스팔트길이긴 했지만 표또르(현재 한국인 가이드)의 트럭이 늦게 왔으면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연해주를 다녀온 후에 하도 연해주 이야기를 해서 주변에서 그만 좀 하란다. 정말 갈 거냐고 묻는다. 그런데 그 질문은 나도 나에게 하고 있다. 사실 이 나이에, 별 쓸모도 없을 것 같은 내가 그 곳에 가서 뭘 할 수 있을까? 내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 텐데! “사람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일까? 러시아어는 물론 영어도 잘 못하는데, 그리고 배운 건 최근에 사회복지 공부 좀 한 거고, 이과도 아닌 문과에 신학공부밖에 한 것이 전부니 뭐에 써먹을 수 있을까?
장자의 얘기를 빌려와서 무용의 유용함을 보여줄 때까지 버텨볼까? 최소한 좀 더 젊기라도 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표또르 정도 수준은 되었다면... ㅋㅋ 또 한편으로는 “네가 짧은 기간에 좋은 것만 보고 온 것 아니냐”는 질문도 가능해 보인다. 그 길고 혹독한 겨울을 경험한다면 며칠 못 살고 도망쳐 올 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런데 이런 얘기를 들으면 난 ‘그래 겨울에도 가봐야겠다’는 호기가 생긴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주로 하는 얘기가 있다. ‘꿈이 있니? 꿈이 있다면, 그 꿈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맞지 않을 때는 그 일을 바꿔야 하는 거야! 그 때는 10대이든, 40대든, 70대든 상관없어!’
그럼 나의 꿈은 뭐지? 1차 귀농을 할 때 이후로 변하지 않는 나의 꿈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자연의 순환의 한 지점에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꼭 농촌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잘 할 수 있는 직업이 농부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농부가 되고 싶은 거다. 뭐 내가 튼튼한 체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쪽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어서도 아니다. 왠지 처음부터 그런 삶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난 이 연해주가 아니라면 또 다른 ‘연해주’를 찾을 거다. 고생스런 삶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도시의 삶의 햇수를 더할수록, 교회에서 짬밥이 늘어 갈수록 더욱 간절하다.
그런 면에서 이번 연수는 나의 마음을 다시 콩밭으로 가게 했다.

‘하나님, 아~ 어쩌죠. 제 마음이 콩밭에 가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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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깨어살리/日步 2010. 9. 10. 09:46
목요일마다 중학교 3학년 다섯반 종교수업을 한다.
뭐 딱히 종교적인 얘기보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그래서 별명이 도덕선생님이다.
크리스천이 아닌 친구들이 대다수인 곳에서 소위 교회 이야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요즘 교실 상황이 예전 같지 않아서 도통 말을 들으려는 태도들이 없기도 해서
이슬비에 옷 젖듯이 조금씩 내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영상과 팝송에 담아 조금씩 전달하고 있다.

암튼1
어제는 책 읽으라는 얘기를 살짝 했다.
중학교 때 책읽는 습관을 못 가지면 평생 어려울 거라고 하면서.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의 유익 중 하나가 '상상력'에 있다고 했다.
상상력이란 똑같은 상황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인데,
예를들어 곤경에 처하거나, 건강의 이상이 생겼을 때, 가족이나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할 때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행동하지 않고 그 너머를 볼 수 있게 한다는 얘기를 했다.

그런 얘기를 하고는 가만히 나를 생각해 봤다.
그러면, 나는 상상력이 있나?
내가 그래도 책을 좋아하고 나름 독서를 즐기는 편인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시야가 넓은 것 같지도 않고, 더더구나 상상력은 그리 있어 보이지 않는다.
기질이나 성격의 문제가 더 큰 건가?
어쩌면 그나마 책을 읽어서 이정도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암튼2
상상력이 있으면 좋겠다.
다양한 측면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
소설도 쓰고, 시도 쓰고.
무엇보다 더 멀고, 더 넓은 삶을 꿈꾸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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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양심의 문제다.
무슨 일을 해도 상관은 없는데,
그 일이 양심을 흔들 때는 더이상 지속할 수 없는 거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무엇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양심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은 특정 순간에 양심의 문제가 대두될 뿐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일이 양심과 관련이 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소위 말해 성직이라는 하는 것이다.

성직,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의 중간에 서 있는 거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확신하지 못하거나
그 세상에 대해 만나는 사람들과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을 때
그 일 가운데 계속 있을 때, 그것은 양심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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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며 사람들은 더 큰 것을 원한다.
그것이 명성이든, 권력이든, 소유든 말이다.
그러나 너무 큰 것은 그 크기만큼이나 파장을 많이 남긴다.
그 파장은 때로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부정적인 형태를 띤다.
예수님과 같은 영적 거인의 죽음은 그만큼 큰 파장으로 인류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누가 예수님과 같을 수 있을까?
인간이 더 많이 갖고, 더 알려지고, 더 커지면 그 것은 누군가의 것을 빼앗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가지도록 주신 것을 독점한 것이라 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책임을 슬쩍 그 사람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공정한 상황이 아니다.
이럴 때, 이 사람이 그 자리를 뜨게 되면 그 빈 자리는 너무 커서 도무지 채울 수 없게 된다.
인간 그 누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너무 관심의 집중을 받는 것은 좋지 않다.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만큼만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 서로에게 복이 아닐까.

최근 한 대형 교회의 원로목사님이 별세하셨다.
너무 많이 존경받고, 너무 많이 관심을 받던 터라 그 빈 자리가 걱정 되는 상황이다.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이 너무 많아서 그가 없음에 그 공허감을 누가 채워준단 말인가?
적당히 자신의 분량대로 조용히 살다 가는 것,
작은 아쉬움 남기고 가는 것이 좋겠다.
서로 공평하게 사는 것이 좋겠다.
적당히 존경을 나누고, 관심을 나누고, 힘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그런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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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지도자(성직자)가 죽는, 아니 죽어야 하는 종교다.
위세를 얻고 섬김을 받는 자리에 앉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가 아니다.
대접을 받고, 권세를 얻고, 마음껏 누리고 사는 것은 그저 종교인일 뿐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다.
이는 카톨릭이나 정교회나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범기독교 집단들의 가장 큰 오류는 지도자가 죽지 않으려하는 것이다.
지도자의 위치가 공고해지면 공고해 질 수록 진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진리는 죽음으로 살아나는 것이니까.

예수가 만든 최초의 공동체 안에 예수는 죽었다.
그가 선택한 제자의 손에 의해.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전을 받고 죽음으로 말하는 것.
예수의 제자는 또다시 자신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동체 안에서 가장 먼저 죽는 사람이다.
그렇게 죽어갈 때 그 모임은 진리를 지켜낼 수 있다.
죽지 않으면 사람이 남을 뿐이다.

죽지 않는 기독교,
그러므로 진리에서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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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받는 중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초심 학인 시절, 어른 스님으로부터 늘 듣던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그런 중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칠십, 팔십 노인분들로부터 절을 받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 이상은 자신이 없습니다.
 
환경운동이나 NGO단체에 관여하면서
모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비록 정치권력과 대척점에 서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하나의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원력이라고 말하기에는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을 보면서 제 자신의 문제가 더욱 명료해졌습니다.
'한 생각'에 몸을 던져 생멸을 아우르는 모습에서,
지금의 제 모습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제 자신의 생사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살면 제 인생이 너무 불쌍할 것 같습니다.
대접받는 중노릇 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적인 삶을 이어갈 자신이 없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납니다.
조계종 승적도 내려놓습니다.
제게 돌아올 비난과 비판, 실망, 원망 모두를 약으로 삼겠습니다.
 
번다했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어느 따뜻한 겨울,
바위 옆에서 졸다 죽고 싶습니다.
 
2010년 6월 14일
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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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받는 종(목사)노릇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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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모습이 가장 예쁘고 사랑스러울 때.
누구나 이런 때가 있었을 거다.
그러나 이젠 언제 그런 때가 있었는 지도 까맣게 잊고
뭔가를 해야만 사랑받는다며 치열한 일상을 살고 있다.
어쩌면 그리 노력하지 않아도 될지 모르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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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광장 사용을 늦게 허가해서 그런 것인지
주 행사는 부산에서 이루어지고 서울광장은 모니터로 시청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물론 서울에서도 곽노현 교수가 나와서 한 말씀하시고, 나중에는 한명숙 시장 후보도 나왔다는데
나는 중간에 와서 정확히는 모르겠다.

암튼 벌써 1년이 지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고
사회가 별로 나아지지 않은 것 같아 더 마음이 아프다.
누구의 책임이랄 것도 없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 함께 짊어지고 고통스러워 해야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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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 본문이 계속 예레미야다.
'생명의 삶'이 예레미야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내내 어둡고, 결말 역시 마찬가지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이기 때문이다.

부활절 후 성령강림절까지 기쁨의 50일에 왜 이 본문을 선택했는지 의아스럽지만,
예레미야를 읽으며 선지자 혹은 예언자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설교준비를 하며 써 보았던 예언자에 대한 생각들이다.

예언자의 설교(예언)는 듣기 거북하다.
예언자의 호소는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지 말고 생각하라고 한다. 그래서...
예언자는 기존 권위에 도전한다.
예언자는 전통이나 율법의 길과 다르다.
예언자는 평화(잘 되고 있다고)를 말하지 않는다.
예언자는 다수의 편에 서지 않는다.
예언자는 자신이 한 말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예레미야의 슬픔).

예언자의 삶은 편하지 않다. 그래서...
예언자는 고통 가운데 있지, 편함이나 안락과는 거리가 멀다.
예언자는 온전히 하나님을 뜻을 담아내는 그릇이다(때때로 의지나 욕구가 없어 보인다).
예언자는 공과 사가 따로 없이 온전히 예언을 위해 사용된다(결혼, 가족생활, 의식주 등).

신학대학을 다닐 때 학교를 일러 '선지동산'이라고 했다.
다른 신학교에 가 보니 거기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정말 그 곳에서 선지자, 즉 예언자가 배출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 목회자들이 스스로 혼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말은 예언자처럼 하기도 하면서 대접은 제사장으로 받으려 한다.
신학교가 배출한 것은 선지자가 아니라 제사장 쪽인 것 같다.
그러니 교회가 공의와 정의에 편이 아닌 힘과 돈의 편을 드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다수의 힘 있는 이들의 편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맞다.
목회자들은 제사장의 자리에 서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예언자의 전통 위에 계셨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을 보면서 대제사장이라고도 하고,
예수님 덕분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으로 한 명 한 명을 제사장이라고 하긴 하지만...
예수님을 가르치고, 보여주어야 할 사람들이 스스로 예언자가 아닌 제사장의 반열에 서려 한다.

가톨릭에서 매번 제사(미사)를 드리고, 신부를 사제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넌센스인지 알 수 있다.
더구나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의 전통을 잇는다고 하면서 사제라고 하다니...
그러나 문제는 목사들이 제사장인줄 착각하는 것이다.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정죄하면서 그대로 내심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성도들 또한 제사장이 되어주기를 바라기까지 한다.
당연히 교회는 성전이 되고, 그 곳에서 들려지는 말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성전을 지키기 위한 말들, 예레미야를 적대했던 사람들이 했던 말과 유사한 말들이 전해진다.

아이러니 한 것은 지금 가톨릭의 사제들이 예언자 노릇을 하고,
개신교는 목회자들은 제사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거다.
웃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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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에 고려대를 자퇴하며 대자보를 붙였던
김예슬의 그 때 그 선언이 작은 책으로 출판이 되었다.

대자보에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담아냈다.
어느 한 구석도 빼놓을 수 없을만큼 놀라운 필력으로 써내려간 글이다.
사실 좀 화도 났다. 이렇게 어린 친구가 이런 생각을 하고 또 글을 쓰다니...

내용을 요약하려는 것은 아니고,
이 책을 손에 들고 며칠을 씨름하며 나의 오늘을 많이도 반성하고 있다.
오늘 나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할까?

만약 내가 20대로 돌아간다면 이 친구처럼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쉽지는 않을 거다.
최소한 이렇게 알려지고 힘을 얻지는 못할 거다.
어쨌든 고려대 학생이라는 프리미엄이 있으니 가능한 얘기일수도 있으니.
고려대생의 선언이니까.. 하며 폄훼하려는 생각은 없다.

아무튼 내가 20대로 돌아간다면 꼭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양심적병역거부다.
김예슬의 선언을 보면서도 부끄러움을 많이 느꼈지만
종교적 신념(여호와의 증인) 때문도 아니면서 평화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병역을 거부하며 불이익을 감수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한 없는 부끄러움을 이미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나도 거부한다.
일상 속에 만연한 무감증과 무력함, 그리고 진리를 외면하고 물질을 숭배하고
숫자 놀음에 파묻혀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현실을.
그리고 생각은 리버럴하지만 생활은 급진적이지 않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던 나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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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거금을 주고 구입한 오디오다.
TV가 없다보니 라디오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요사이는 MC들의 말이 너무 많아 집중하기가 어려워 대개 CD로 음악을 듣는다.
주로 클래식, 째즈, 영화음악을 듣는다.

위층에서 시끄럽다고 할까봐 볼륨을 높이지 못한다.
조용하게 나오다 높은 음이 나오면 달려와서 줄이기 바쁘다.
그런데 최근에 들은 얘기로 볼륨을 낮게 고정해두면 스피커가 그 수준에 굳어버린단다.
그래서 오늘은 볼륨을 높여 보려고 했는데 조금 올렸다가 또 낮추고 말았다.
너무 커서, 누군가에게 피해가 갈까봐, 싫은 소리 들을까봐...

오늘날 우리들이 주로 배우는 것이 이 것이 아닐까.
소리를 낮추는 것! 조용히 있는 것!
그래서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잊어버리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르고 살고 있다.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다.
그 영혼을 깨우는 곳이 학교이고 교회여야 할텐데 이젠 두 곳 모두 그 정체성을 버리기위해 경쟁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린 지금보다 더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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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도심교회와 지역교회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도심교회는 과거에는 지역교회였지만 주거지가 외곽으로 옮겨가면서 자연스럽게 도시 가운데 남아 있는 교회를 가리키고, 지역교회는 당연히 주거지에 있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요즘 강하게 드는 물음은
'도심교회가 왜 부흥해야 하는가?'이다.
도심교회는 당연히 쇠퇴하여 문을 닫아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아니면 그 주변에 살고 있는 몇 안 되는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면 딱 좋다.
그런데 교회는 서울 한 복판에 있는데 성도들은 일산, 분당, 구리, 인천, 심지어 천안에서도 온다.
그러면서 여전히 교회가 더욱 커져야 한다는 강한 소명(스스로)에 사로잡혀 있다.

일단 도심교회를 포함한 일부 대형교회(주거 지역에 있으면서 그 지역을 넘어선)의 부흥은 여러가지 사회적 폐해를 낳고 있다(그냥 떠로르는 대로 적어 봄).
1. 먼 거리를 오가기 때문에 자동차를 이용하면서 매연(특히 이산화 탄소 배출)으로 인한 환경 오염을 가중시킨다. 물론 교통체증을 유발할 수도 있겠다.
2. 사는 곳과 교회가 다르기 때문에 지역 공동체 형성을 저해한다.
특히 아이들의 경우 다른 지역의 교회를 다니면서 생활권과 교회의 거리로 인해 단절 현상을 경험한다.
3. 시간적 한계로 인해 신앙생활에 있어서 더 깊은 여정으로 나가는 것을 어렵게 한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는 교회 유목민을 양산한다.
4. 먼 곳에 있는 교인들을 붙잡아 놓기 위해서 교회는 본질에 충실하기 보다는 프로그램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5. 먼 길 오가는 것은 자연스럽게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차 안에서 서로 간에 긍정적인 에너지 보다는 불화의 단초들을 제공하게 된다.
6. 교회도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에 맞춘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여유있게 편안하게 프로그램을 진행하지 못한다.


교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교회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애처롭다.
특히 도심교회는 그 지역의 독특함보다는 모두에게 맞추려고 애쓰고 있다.
교회는 그 지역의 특성에 맞게, 그 지역의 사람들과 호흡하는 장이 되어야 하는데
요즘 교회는 이런 저런 프로그램을 알리는 현수막 걸어 놓고 호객하는 백화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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