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한다.
억지로, 의무적으로 하는 것은 힘이 든다.
                                         무리다.
                                         버겁다.
                                         고통이다.
                                         긴장이다.
                                         어색하다.
                                         뻑뻑하다.

고수는 힘을 들이지 않는다.
도끼질을 할 때도, 톱질을 할 때도, 칼질을 할 때도, 관계를 할 때도.
힘으로 하려고 하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터지고,
                           부러지고,
                           멍든다.


정말  강하면 약해 보이고,
        크면 작아 보이고,
        빠르면 느리게 보이고,
        깊으면 얕아 보이고,
        지혜로우면 어리석어 보인다.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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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찬양예배에 채에스더 목사라는 분이 오셨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의 삶을 복음으로 해석하는 분이셨다.

절절한 말씀들을 들을 수 있어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말미에 담임목사님이 건강의 비결이 뭐냐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건강검진 결과 60대이면서 40대의 몸이라는 소견을 들었다는 말씀과 함께
"머리가 비어 머리가 아프지 않고, 가슴이 비어 가슴이 아프지 않다."

명쾌하다!
머리 속에, 가슴 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담고 고통하고 있는 내가 비추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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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
내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하지만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 꼬여 있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것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마리 있으면
편안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줄 수 없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이 숲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 나무라는 걸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한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 게 있다면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 몸의 가지 하나라도
필요로 하는 이 있으면 기꺼이 팔 한짝을
잘라 줄 마음 자세를 언제나 가지고 산다
부족한 내게 그것도 기쁨이겠기 때문이다

도종환
부드러운 직선(창비시선 177),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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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깨어살리/돌소리 2009. 11. 7. 10:52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안디옥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운 이유는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 때문에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이어가는 그들의 특별한 삶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을까.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만 올리고 또 올린다면
예수님이 땀과 눈물, 심지어 피까지 쏟으시며 사셨던 삶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단지 예수님은 저 만치 나의 기도를 하나님께 중개하는 그런 존재로 고정화 해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최고의 본을 보이신 우리의 모델이셨다.
우린 그 여정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고뇌와 결단을 배우고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사는 것과는 동떨어져
자신의 삶의 내용을 예수님으로 조금도 바꿀 마음이 없으면서
머리로 '알고 있는 예수님'을 되뇌이며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그건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신앙적 행위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교회에 출석하는 것 자체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구별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지칭하듯 입으로 예수를 말하는 예수쟁이 혹은 교인은 될 지언정
참다운 그리스도인, 예수 따르미는 아니다.

누군가 '제가 교회를 안 빠지고 잘 다녔고, 장로거든요!'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실까.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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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의 결핍을 과장하는 버릇이 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이 너무 많다고 투덜거린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한 일 아닌가.
볼 수 있고, 호흡할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배설할 수 있고,
아픔, 시원함, 더위, 추위, 서늘함 등 내외부의 변화들을 느낄 수 있는 것들,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걸어서, 차로 이동 할 수 있다는 것,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누리고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수없이 많은 누림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
너무 당연하다고 느껴서 일까?

9월 24일 일요일
당신이 경험하는 일과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과연 당신이 이처럼 환상적인 체험을 할 만한 자격이 있는가? 당신이 하느님이 어루만져 주실 만큼,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특별한 체험을 할 만큼 특별한 사람인가? 그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라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다. 당신이 이런 일을 누리고 경험할 만큼 한 일이 없다. (나웬이 러셀 슈와이카드의 글 인용) 마지막 일기, 헨리 나웬

자격이 없는 데도 받았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이다.
그 만큼의 은혜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왜 그렇게 더 달라고 부르짖는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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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힘:사람

요즘 과제 때문에 '숨겨진 힘-사람'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경영서적을 많이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대략 이런 책들은 실제 사례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일단 마음에 든다. 아직 앞부분을 읽고 있지만 이 책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는 대충 알 것 같다. 한 마디로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성공한 기업들은 그것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천했다는 것이다.

많은 기업들은 사람이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우스웨스트 항공은 그러한 생각을 실제로 실천하고 있다. 78p

그래서 이 책의 2장에는 사우스웨스트 항공사가 어떻게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지 구체적 실례들이 빼곡하다. 이 부분에서 눈길을 끈 것이 인재선발인데, 이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직원의 태도라고 한다. 실력이 아닌 태도, 성격을 중심으로 사람을 뽑는다는 것은 자칫 그 과정이 선명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직원들을 면접 과정에 참여시키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늘려서 최선의 인재를 선발한다고 한다.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만큼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선발 담당자가 말하는 태도가 중요한 이유가 걸작이다.

"우리는 지원자의 태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만약 태도에 문제가 있다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우리 회사에 들어 올 수가 없다. 업무 능력은 교육을 통하여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격은 그렇지 못하다." 86p

'성격은 그렇지 못하다'라는 말에서 가슴이 덜컹한다. 요즘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나의 태도, 즉 자동반응 하는 성격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격이 족쇄처럼 나를 붙들고 있다고 느껴지고 있던 참이다. 겉으로는 나이도 먹고, 배우기도 많이 배우고, 말도 고상하게 할 수 있게 되지만 정작 성격이 나를 원래 자리로 끄집어 내린다. 성격은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지만, 성격에 지배되기보다 깨어 있는 의식에 지배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너무도 쉽게 무장해제를 당해 버린다.

암튼 위의 이야기들은 듣고 배워서 아는 것 이상으로 실천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준다. 그리고 사람의 참다운 실력은 동료들과 건강하게 소통할 수 있는 태도라는 것을 알게 한다.

예수님의 방법은 분명히 사람 중심이었다. 그것도 율법주의자들처럼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실천하셨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고,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 가셔서 살 맞대는 일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의 한 마디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셨고, 애정을 가지고 대답해 주셨는데, 그가 적대자라 해도 별 차이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로 대접받는 경험을 한 사람이 어느 순간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 누군가가 예수님이었다면 그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사람 소중하다고 떠들지만 말고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구체적 실천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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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 수업 시간에 ‘30살이 더 많은 사람으로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분’을 찾아서 심층인터뷰를 해 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교수님이 과제를 내 주셨다. 하지만 수강생 대부분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교수님은 그러면 ‘자신이 30년 후에 누군가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끔 하는 사람이 될 수는 있을까’를 질문하셨다. 30년 후에 누군가 나를 본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없을 것 같지만, 혹시 가능하다면 오늘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수업을 마치고 11시를 넘기는 시간까지 모여 앉아서 두 주 남은 행사 이야기와 또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대학원 동기들을 보면서 참 좋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거의 중간이니까 나를 중심으로 아래위로 10살이 훌쩍 넘으니 최고 20년도 더 차이나는 사이도 있다. 그런 연령 차이에다가 알게 된지 8개월 여 되는데도 얼마나 오누이 같고, 남매 같고 형제자매 같은지. 어쩌면 이렇게 만나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온 사람들처럼 말이다.

9월 19일 화요일
오늘 나는 우리 삶이 수많은 형태로 연결되어 왔다는 점에 새삼 놀랐다.
                                                                                                  (헨리 나우웬의 마지막 일기 50p)

헨리 나우웬을 만났던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닐까?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만약 헨리 나우웬 신부를 알게 되었고, 관계를 맺게 되었다면 그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지 않았을까? 뭐 그 사정도 잘 모르고, 인간 헨리 나우웬에 대해서도 자세히 모른다. 단지 그의 저작들을 통해 그의 생각을 엿보았을 뿐이다. 글이라는 것이 묘해서 그 사람을 다 보여주는 것 같으면서 교묘하게 진면목은 감출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헨리 나우웬이 관계를 지속하면서 그들과의 연결에 새삼 놀라는 대목에서 나는 뭘 그걸 가지고 그러나 하면서도 나에겐 그런 관계가 있는 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낮에는 친구가 목사 안수를 받는 곳에 다녀왔다. 내가 동기회에 회장 없는 총무라서 대표 격으로라도 가야했고, 또 평소 통화를 자주하고 지내는 편이었기에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고민없이 다녀왔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그 관계가 나에게 감동을 주는 것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놀랄만하지도 않다. 19년 지속된 관계지만.

오늘 만나는 사람들, 과연 그들과의 연결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삶을 정리하는 순간까지 나의 존재를 느끼게 해 줄 사람이 있을까?

나와 30년 차이나는 이들은 지금 초등학교 1학년들이다. 그들과 진솔한 만남을 가지려하면 최소한 10년 이상은 있어야 할 것 같고, 그 전에 20년, 아니 10년 차이라도 마음을 나누며 공존의 기쁨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한두 가지라도 서로에게서 담고 싶은 점들을 찾아 갈 수 있으면 더 좋겠고. 그래서 오늘 목사 안수를 받은 친구도, 또 같이 공부하는 동기들도, 교회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도 귀하고 소중하게 만나고 연결해 가야겠다. 언젠가 그들과 연결되어 있음에 새삼 깜짝 놀라기를 바라며.

92년에 한 동기의 결혼식을 마치고 참석했던 친구들이 사진을 찍었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 여섯 번째 친구가 오늘 안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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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플래너와 인연을 맺은 지가 벌써 8년이다.
그와 함께 '시간관리'라는 테마는 나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래서 교회에서 그 분야와 관련된 강의는 나의 몫이 된다.
그럼 오늘 나의 시간관리를 잘 하고 있나?
물론 강의에서 누차 강조해 말하지만 시간관리는 곧 사건관리다.
시간의 실체가 사건의 연속이라고 한다면 결국 나에게 쉼 없이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관리는 하는 것이 시간관리가 되는 것이니까.

나에겐 두 가지 시간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 앞에서의 시간과 나 혼자의 시간.
전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나의 시간이고, 후자는 그럴 필요 없는 나의 시간이다.

사람들을 의식하고 마주하는 사건들의 연속선은 진솔한 나의 시간일 수 없고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는 사건들의 연속선은 긴장이 없이 흘려버리는 시간이다.
그러니 둘 다 나의 가치와는 상반된 시간들인 것이다.
결국 생각과 반대로 나의 시간관리, 즉 사건관리는 좌절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좌절로부터 오는 것이 피로가 아닐까.

9월 11일 월요일

자고 싶으면 잘 시간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엄청난 피로감 속에 깨어나
몸을 일으키는 것은 그저 무슨 일인가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에 지독히 집착하는 편이다.
시간을 잘 활용하여 오래도록 염원해 온 계획을 실현하고 싶다.

의외로 헨리 나우웬의 시간은 피로감으로 가득하다.
시간을 본인이 원하는 일들로 채우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해 내야 하는 과정은 피로와의 싸움이다.
피로란 뭘까? 그의 인용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짐일까?

시간을 잘 보내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같은 소망이지만
그 시간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자신의 마음의 지향과 다른 일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인간들이 짐승들과 달리 피로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나의 이야기로 돌아온다면 나의 시간관리, 사건관리 역시 피곤하다.
다른 사람 살피랴 피곤하고, 나 스스로에게 절망하느라 피로에 시달린다.

마태복음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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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이 닥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내가 그렇다. 죽지 않는 것을 원하지는 않지만, 아파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몸 상태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지만 실은 병들었다고 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을 때가 더 많다고 해야 한다.

삶이 고통스럽지도, 불행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그러나 오늘 헨리 나웬의 일기를 읽으면서 내가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불행과 고통이 복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당하는 그 불행을 내가 만났을 때 뒷문이 아닌 앞문으로 당당히 맞을 수 있다면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을까?

헨리 나웬은 추기경인 조지프라는 사람이 암으로 입원해 있을 때 만났던 일들을 추억하며
그의 아픔을 넘어 죽음까지도 교회에 선물이 되겠다고 일면 가혹할 것 같은 말을 적고 있다.

9월 7일
나는 조지프와 함께 있으면서 그의 병과 언제 닥쳐올 수 있는 죽음이
오늘날 교회에 그가 선사하는 가장 큰 선물이 될 수도 있겠다는 깊은 확신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이 에이즈와 암, 기아와 전쟁과 폭력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조지프의 병과 죽음이 아파하는 모든 사람을 진실로 배려하는 사목이 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는 끔찍한 불행을 겪으실 때
그 고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 보셨기에 그 사건은 우리에게 복음이 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 나에게 일어나는 예기치 않은 불행도
그것을 맞이하는 나의 태도 여하에 따라 전혀 다른 반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너무도 조심스럽지만, 나의 어떤 불행도 하나님께 유익하게 바꾸어내는 삶으로 당당히 나가고 싶다.
나의 죽음도 유익하다는 찬양의 가사처럼...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믿음을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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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9월 2일 토요일
나는 단 하루도 나의 내념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능한 한 솔직하고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고서는 그냥 넘기지 않겠다고 자신과 약속했다.

헨리 나웬의 마지막 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한 번에 끝까지 읽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매일 한 글자씩 써 내려간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아
하루에 한 두 편씩을 읽으려고 한다.
그 여정을 통해 나를 돌아보며 성찰을 시도해 보고 싶어서이다.
어찌 내 주제에 헨리 나웬이라는 거목을 올려다 볼 수나 있을까 만은
성큼 성큼 앞장서 가는 아빠를 종종걸음으로 뒤쫓아 가는 아이처럼
그렇게 읽고 생각하고 기록을 남겨보고 싶다.

9월 3일 일요일
기도는 무의식과 의식을 이어주는 다리다.
어쩌면 나의 기도, 하느님 곁에 있으려는 나의 노력, 하느님과 친교를 맺는 나의 방식을 버리고
성령께서 내 안에서 자유로이 움직이시도록 나 자신을 내맡길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기도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저렇게 기록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기도의 상태를 '어둠과 메마름'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로부터 기도가 돌처럼 무감각해졌다고 하더라도 성령께서 이끄실 것임을 믿고 있었다.
그리곤 그 다음 날 일기에서는 사람들과의 관계인 우정을 기도에 비유한다.

9월 4일 월요일
기도하려는 나의 노력은 우정을 위한 노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도와 우정은 정화를 필요로 하며 덧없는 감정에 덜 의존하고
한결같이 헌신하는 일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리고 하는 말 '이 지혜를 따라잡으려면 참으로 많이 수양해야 한다.'
맙소사 이 영성의 대가가, 그래서 내가 쳐다 볼 수도 없을 것 같이 높은 경지에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수양해야 한단다.

나는 수양은커녕 기도에 무장해제를 하고 살고,
성령에게 맡기기는커녕 PC에 더 의존해서 삶을 연명하고 있으니 참 한심한 노릇이다.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고 살 수 있다니 참으로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 기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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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의 중요한 척도 중 하나가 '집중'이라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집중력이 나에게 많이 부족하다.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산만 그 자체이다.
요즘 들어 부쩍 더욱 많이 느낀다.

내 상황으로도 그렇고, 내 생각으로도 당연히 집중해야 할 곳이 있는데,
그대로 내버려 둔 채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을 때가 더 많다.

책은 다 읽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책 얘기만 들으면 일단 구입하려는 마음만 앞선다.

중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한 신령한(?) 전도사님 한 분이 오셨던 적이 있다.
이 분이 형과 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하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내가 산만하다는 거였다.
그 때는 그 말을 수긍할 수 없었다.
일단 기분이 많이 나빴는데, 그 이유는 내가 형보다 공부를 잘 했기 때문이다.
더 산만한데 어떻게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내 논리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전도사님의 진단(적절한 표현!)이 맞았던 것 같다.
형은 인생이 심플해서 하고자 하는 것을 한결같이 해 오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잘 못 살아왔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 보면 이리저리 흔들림이 더 많았던 것 같고,
특히 요사이 많이 산만한 모습을 보면서 더 그 말이 더 떠오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소망 중 하나가 뭔가를 집중해서 뚫는 삶을 사는 것 아닐까.
꼭 뭐를 뚫은 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일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내가 나의 인생을 살면서 더 이상 잘 할 수 없을 만큼 최선의 집중을 한 흔적을 갖고 싶다.

집중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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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정해서 꼬박꼬박 보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드문드문 보게 될 때가 있다.
오늘은 선덕여왕을 보게 되었는데,
흉년에 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민란이 일어난 안강성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민중들은 웬만해서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한 마디로 '좀 더 참고 살면 되지'하면서 몸을 낮춘다.
그래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선택을 한 것이다.
달리 보면 어차피 굶어 죽을 것이니 다른 방식으로 죽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민중들의 목숨을 건 폭동, 즉 자기 표현이 역사를 진보하게 한 것이 아닌가?

"만일 민중들이 법을 다 지키고 살았다면 사회는 지금 노예제 사회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법치는 옳은가'라는 강의에서 한홍구교수)

결국 이 진보라는 것은 가진 자들의 생각을 아주 조금씩 바꾸는 과정이 아닐까.
뭔가를 쥔 자들은 변화를 원치 않는다.
그래야 자신들의 힘과 소유를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이 몸을 던져 피 흘리는 불법이 변화의 시발이 될 것이 아닌가.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 하면 예수님을 빼놓을 수 없다.
일단 그 분은 유대인들의 목숨과도 같은 법, 율법을 무시했다.
이유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대 기득권자들의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또 그 뿐일까. 예수님의 행보는 헤롯이나 로마의 지배자들에게까지도 걸림돌이 되었다.
어쩌면 지배자들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돌볼 수 있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이 백성들을 한 차원 높게 깨워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을 터이다.
그런데 그 과정은 정치적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성경은 빌라도가 등 떠밀려서 예수님을 십자가로 보낸 것으로 나오지만,
어찌 그 자신의 의지 없이, 판단 없이 그런 일이 가능할까? 대 로마의 총독이 말이다.
빌라도는 충분이 이 사람, 예수의 행적을 정치적 차원에서 이해했고, 법으로 심판한 것이다.

예수 사후 이천년의 세월 동안 힘없고 눌린 자들의 불법 투쟁은 계속되어 왔다.
오늘 본 선덕여왕에서의 백성들의 행동도 거기에 속할 거다.
언제나 가진 자들의 논리는 주류를 형성하지만
그것에 의해 규정되는 자들의 생각은 무시된다.
힘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기꺼이 그 힘없는 쪽에 서셨다.
그래서 무참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한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오늘도 여전히 중요한 화두이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에 대한 생각의 진보를 위해 또 어느 곳에선가 불법은 행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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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기웃 하다가 드디어 트위터에 가입했다.
블로그를 하면서 또 트위터를 한다는 것이 산만해지는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냥!' 한 번 발 담가 보기로 했다.

우선 김주하, 이외수, 노회찬의 Follower가 되었고,
누가 내 글을 구독해 줄 진 몰라도
주로 간간히 떠오르는 아포리즘을 올려볼까 한다.
그리고 독서 후의 정리에 부담이 있었는데, 편한 마음으로 마음에 와닿은 구절들을 올려야겠다.

많이 지져대야징 twitter~
http://twitter.com/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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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순 교회 어린이들 6명과 상주로 향했다.
일명 '농촌체험'을 하겠다는 것이었고, 그 내용은 포도따기였다.
학교 다니는 것에 더해 학원에 가야해서 바쁜 친구들을 불러 모아 금요일 오후 늦게 출발했다.
당연히 상주에 있는 집에 도착하니 9시가 훌쩍 넘었다.
서울 아이들에게 농촌의 볼품없는 집이 어떤 인상으로 비춰질까 약간은 긴장도 되고,
막상 잠자리 들기 전 한두시간 뭘 해야 하나 걱정도 되었는데,
들어서자 마자 아이들의 모든 관심을 송두리채 집중하게 한 작은 생명이 있었다.
검은 색의 주먹만한 강아지!
강아지 한 마리로 이틀은 충분했다.

이튿날 아침 식사 후에 백화산(933m) 계곡 물에 발 담그고
곧바로 향유네 포도원에 가서 포도를 땄다.
실은 좀 많이 따주고 싶었는데 이 놈들, 어찌나 말이 많던지
향유아빠가 네 줄 정도 마칠 즈음, 그 정도면 됐단다.
길진 않지만 우리를 위해 남겨둔 대여섯 줄이 더 있었는데...

암튼 예기치 않은 어린이들과 함께한 경험,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들 덕에 꼬마 손님 치르느라 분주하셨던 부모님께도 감사하고,
기꺼이 시간 내서 아이들과 함께해 준 향유아빠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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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도 에어컨들은 열심히 돌아간다.
낮의 기온이 높기 때문에 더위를 면하기 위해선 에어컨을 틀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더위를 면하려고 하는 것일까?
일하기 위해서다.
일을 잘 하려면 시원한 온도를 유지해 줘야 한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좀 엉뚱한 생각이긴 하지만, 왜 더운 날에 할 수 없는 일을 시원하게 만들어가면서 해야 할까?
어쩌면 더우면 그 더위에 맞게 쉬던지, 잠을 자던지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억지로 전력을 써가며 에어컨을 돌려 시원하게 만들어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지구를 만드시고 각 지역마다 그 지역에 맞는 기후를 주셨고,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그에 맞는 일을 하면서 살면 된다.
아마도 과거 농업을 주로 할 때는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 지역과 상관없는 일들을 하고 있다.
긴 시간 자연과 동떨어져 살면서 생산력을 높여서 만들어 내는 것들이
전혀 자신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고,
그런 것들이 실제 필요 이상으로 만들어 지고
그것을 소비시키기 위해 과대 광고를 하고
과소비를 시켜서는 또다시 부를 창출해 축적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어쩌면 오늘날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과다하게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혹사하고 있다.
대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이는 마치 노예와 같은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높이를 부르짖으며 전진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삶의 진정한 가치는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비친 자신을 전부로 여기고 있다.
이처럼 종속된 삶이니 노예라는 말이 틀린 말도 아니다.

에어컨 얘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지만
우리들이 스스로를 위해 만들고 필요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있는 것들
과연 그것들이 정말 우리를 위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를 하고싶어서다.
어찌 에어컨 뿐만 그럴까?
자동차도 그렇고, 냉장고도 그렇다.
멀리 갈 수 있는 이동수단이 생겨서 편리하지만 그것으로 잃어 가는 가치는 얼마며
소위 저장할 수 있는 기간이 늘어난 것으로 인해 우리 몸은 자연과 더 멀어졌다.
그래서 작은 변화만 있어도 우리 몸은 취약성을 곧바로 드러내는 것 아닌가.
면역력 저하는 어쩌면 저장 기술의 발달과도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길러낸 농산물을 두고두고 먹으며 몸을 채우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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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에 '문화인류학'이라는 과목을 듣게 되었는데
첫 시간에 좀 독특한 과제를 해야 했다.
2050년의 일기 써오기, 그것도 로봇이 들어가게.
다른 수강생들 써 온 것을 세 편 정도 들었는데,
무슨 공상과학 소설을(마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파피용'을 방불케 하는) 대하는 듯했다.
그에 비해 내가 써 간 것은 너무나 소박하고 신변잡기적이었다.
그래도 나름 재미있는 접근이었다고 자평하며 올려본다.


2009년 8월 9일에 쓰는
2050년 8월 9일 김민태의 일기

운동부족!
원래 운동하는 것을 싫어했다.
특히 동그랗게 생긴 것을 하나 놓고 죽자고 뛰어다니는 것은 더욱 싫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뛰며 흘리는 땀 냄새가 그립다.
온종일 소위 최적의 온도에 꼼짝 않고 앉아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당최 사는 것 같지가 않다.
정부에서는 최상의 실버서비스를 실현한다고 하면서
결국 저 실버도우미 한 놈을 안겨 주었다.
뭐 나름 편리하긴 하지만 저 놈은 나를 돕는 척하면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
로봇이면 로봇의 본분을 지켜야지 웬 말이 그리 많은지.
이래라 저래라 마누라보다 잔소리가 더 많다.
일어나라, 이 닦아라, 밥 먹어라, 걸어라, 씻어라, 누워라 등등.
그래봐야 콧구멍만한 방에서 하는 일인데.
이 놈 없이도 할 수 있는데.
이까짓 귀찮은 놈 안겨 놓고는 내 새끼에게서 돈을 뜯어가겠지.
나쁜 놈들.
저 놈이 컴퓨터에 쓰는 일기는 훔쳐보는 것 같아서
오늘부터는 옛 기억을 살려 만년필로 끄적거려야겠다.
놈! 속이 좀 탈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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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님과 부교역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
나야 뭐 아직 비중도 없고, 내가 할 이야기도 제한적이어서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회의가 중반을 넘어서고 있을 때 '교육'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왔다.
내가 무슨 얘길를 했느냐를 떠나서 그런 자리에서의 나의 태도는 딱 두가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조용히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말을 하되 높은 톤으로 한다는 거다.

문젠 두 번째!
말을 하더라도 차분히 해야하고, 내용은 전후 맥락 가운데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하고,
앞뒤를 잘라내 버리니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잘 전해질 수가 없다.

왜 목소리가 커지고, 또 크든 작든 감정이 실리기까지 하는 걸까?
말에 감정이 실리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듣는 사람도 감정으로 듣게 된다.

예전부터 말하면서 감정을 실어서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는데
그래서 늘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을 했었는데,
지금 보면 내가 딱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게 하고 나면 그 전에 가만히 듣고 있었던 것도 제대로 경청하지 않은 것이 된다.
어쩌면 잘 듣는 것을 못했으니 내 말도 잘 전달하지 못하는 거다.

결국 마음의 문제로 귀결된다.
안정감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잘 듣지 못하고,
공격이 두려워 먼저 공격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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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영성적 삶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묶이지 않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

과거에 있었던 상처가 지금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고,
미래 일어날 일들이 나를 불안하게 하지 않도록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그 분을 바라보며
그 분이 아닌 것들에 의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아파하고 가슴 조렸는가?
하루도 한 순간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거기에 더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정작 나 자신을 버려두었다.
잘 하지 못할까봐, 실수할까봐, 사람들이 싫어할까봐, 버림받을까봐 움츠러들었다.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걸...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느낀다면 이 순간이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다.

-----------------

내일 나와 관련해서 한두 가지 결정될 일이 있다.
그 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 이래도 저래도...
중요한 것은 내가 그런 일들 가운데 일이 아닌 하나님을 볼 수 있느냐 이고,
최고의 순간은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나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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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신데, 나는 (소위) 하나님의 일을 보고 있다."

8박9일의 예수마음배움터 피정을 마치면서 나에게 던지는 말은 '어디 보니?'
하나님이 보시는 곳을 같이 볼 수 있으면 생활은 많이 달라진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두려움과 불안 휩싸여 고민할 일은 현저히 줄어들고,
오늘, 아니 지금 이 순간을 깊이 누리게 된다.
이 순간이라 함은 바로 지금 나의 마음에 대한 관심이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가 가을 하늘처럼 맑아지는 경험을 하는 거다.
'관상'이라는 것이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런지.

하나님, 이 순간 저의 마음을 말끔히 비울께요.
하나님께서 가득하시도록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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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에게 설교할 때,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될 때 우리들이 살아가는 곳들이 사랑과 평화가 넘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작은 예수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몸으로 보여주는 삶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셨던 가치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깨우친 사람들에게,
교회가 성도들에게 바라던 그런 삶을 살아낸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불경한 것으로 여기고 비판한다.
어떻게 그 사람에게 감히 예수라고 할 수 있느냐고 분개하기까지 한다.
아마 그들은 스스로의 논리적 모순에 빠진 것이다.
자신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에 대한 질투심이 엿보이기도 한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삶을 살았다.
우리 나라의 예만 들어도 최용신, 주기철, 손양원 등의 선각자들을 예수라 하는데 이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류영모, 김교신, 함석헌, 권정생과 같은 이들도 역시 그렇다.
더 나아간다면 암울한 시기에 자신을 태워 세상을 깨우려고 했던 전태일,
또 최근에 노무현 대통령까지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최소한 예수님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정확히 한다면 그들을 그리스도라 칭할 수는 없겠지만 (작은) 예수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 자신을 가장 밑바닦으로 집어 넣으며
기꺼이 자신을 태우며 부르짖을 수 있는 삶,
너무도 이기적인 삶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다른 존재를 깨닫게 하는 삶,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 길을 하나님께 기대어 가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누가 그를 예수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 예수라고 칭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슬픔이 더 눈 앞을 가린다.
좀 더 자신을 위해 사시지, 좀 더 이기적이 되셨으면 좋았을 것을.
어쩌면 이 말은 베드로의 말과 닮아 있다.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라고 부르짖던.
그러나 그들에게 그 길은 운명이 아닌 선택으로 주어졌다.
그리고 그들을 그 길을 선택하고 살아갔다.
그래서 결국 운명은 그들을 예수라 하는 것이다.

남아 있는 자들은 자신의 비겁했음을 가슴을 치며 후회하거나
그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것을 시샘하며 불평을 늘어 놓는다.
기득권자들은 예수가 많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때문에 자신들의 삶의 내용들이 들춰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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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삼하 1:19)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면 부른 조가의 시작부분이다.
아홉 절에 걸쳐서 다윗은 진심으로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요나단은 그렇다 쳐도 사울의 죽음을 그리 슬퍼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지기도 했고, 군대를 이끌고 좇아 다녔던 사람이다.
그 사울이 죽었다는 것은 더이상 목숨을 노리는 자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다윗이 이미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으므로 왕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기에
기뻐해야 할 일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윗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진심으로 사울의 죽음을 애도한다.

어디 그 뿐이랴.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과 왕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그들에게 사신을 보내 감사한 마음을 표한다.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삼하 2:5-6)
만약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어디 이런 행동을 취할 수 있었을까?
당장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마음 한 켠에 저런 괘씸한 놈들이 있나 하며 칼을 갈고는
기회가 되면 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도 남을 상황이다.
그러나 다윗은 마치 자신의 부모에게 베푼 은혜에 대해 감사하듯이 그들을 높여 주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전혀 서두르지 않는' 다윗을 볼 수 있다.
왜 다윗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에 효율적이지 않았던 것일까?
왜 힘을 쓸 수 있을 때 한 방 날리지 않는 것일까?
자신이 원하는 빨리 이루기 위해 달려들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형편에 이었을 텐데 말이다.

그는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기회를 두 번이나 사용하지 않았다.
상황을 깨끗이 정리하고 스스로 자신의 때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때 그렇게 하지 않고 기다렸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열어 가시는 때를 기다렸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의 최선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원칙에 최대한 가까이 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모습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도리를 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도리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었고, 
그것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을 죽이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의 행하심을 앞질러 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도 근시안 적이다.
할 수만 있다면 단시간 힘을 써서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당연히 자신이 손해 보는 상황은 조금도 참지 못한다.
참고 기다리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어떤 형태로든 힘이 있으면 상대방을 누르고, 제압하려 한다.
그렇다면 생각해 봐야 한다.
다윗이 정말 힘이 없어서 그렇게 긴 시간을 지체했는지.

다윗은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 힘을 누군가를 이겨먹기 위해 사용하기보다
자신 안의 '나'를 이기기 위해 애썼던 것이다.
그래서 정말 힘 있는 사람이고, 힘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고 칭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밖으로 힘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사람은 정말 힘이 센 사람이 아니다.
힘이 셀수록 그 힘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말이다.

오늘, 예수님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윗 정도는 흉내라도 내 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눈앞에 손해가 때로 크게 보면 이익이 될 때도 있다'고 말하며 기꺼이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엔 자신의 몸까지 던지면서 진실을 말하려 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추모하는 이들에게 마당 하나 내 주지 않고,
불순세력 운운하며 알량한 힘을 쓰는 사람이 있다.
누가 다윗의 길을 걷는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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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데에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이런저런 이유를 붙이기 시작하면 그 것은 진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건 그냥 좋은 거다.

난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좋았다.
좋다는 데 무슨 이유가 있을까?
물론 그의 모든 면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이라크 파병을 하지 말라고 시위도 해봤고,
반대로 그를 탄핵한 사람들을 향한 촛불시위에도 참여했었다.
또 한미FTA를 진행할 때는 그를 욕하기도 했다.

그가 봉하마을로 내려갔을 때 꼭 가서 얼굴 한 번 보고 싶었다.
한 번은 그가 밥 먹고 갔다는 식당에서 밥 먹고 뿌듯해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흑백사진을 내 블로그의 이미지에 넣게 될 줄이야.

   검찰이 적당히 했더라면,
   퇴임 후 조금만 인기가 없으셨더라도,
   돈을 받으시지 않으셨다면(누가 받았던),
   검찰과 사이가 좋으셨다면,
   대통령이 되지 않으셨더라면...
 
역사에 만약은 없는 것이겠지만
하도 답답해 만약을 되뇌어 본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그의 말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로 넘기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며칠째 한숨지으며 안절부절 못하고 서성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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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하는 사람들이나 설교를 하는 사람들은 흔히 나의 강의(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잘) 변화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내가 어떻게 하면 그들이 '이렇게'(자신의 생각대로) 될까를 생각하는 것이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 아닌 다른 사람, 혹은 자신이 속한 그룹 외의 다른 그룹을 대상화 타자화한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타자화 하고 있는데,
정말 타자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잘 생각해 보면 세상에 타자란 없다고 볼 수 있겠다.
왜냐면 모두 주체로서 존재하지 객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독립된 존재로서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생산자요 소비자이다.
그러므로 일방적으로 나는 주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받기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강의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감정을 주고받고 있는 것이다.
청중도 감정을 생산하고 있고, 당연히 강의자는 그것을 받고 있는 것이다.

늘 영향 받고 변화되어야 하는 것들을 자신 밖에서 찾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밖이, 타자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느낄 때 그 말은 이미 자신의 변화라는 말로 바꾸어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바꾸어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을 타자화하는 것만큼이나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타자화하는 것도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온통 촉각을 세우고 사는 삶이 그것이다.
변화의 에너지가 자신으로부터가 아닌 밖으로부터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삶이 너무도 피곤할 것이고, 옆에서 보기에 가엽기까지 하다.
언제 제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볼까?

누군가를 타자화하든, 나를 타자화하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자타를 구분하지 말고 똑같은 '나'로 인식하는 태도라 하겠다.
모든 이들을 나로 인식하게 될 때, 삶이 좀 더 따듯해 질 것 같다.
상대방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며, 상대방의 허물을 나의 허물로 여길 뿐만 아니라
그의 기쁨도 함께 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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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부에서 아이들이 큐티를 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시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아이들 입에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신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이 두 문장이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시련을 주실까?
성경을 보면 그 대답을 얻을 수 있을까?
뭐 단련하신다고 할 수도 있고, 다 뜻이 있으셔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고,
좀 정성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약간은 미신적인 표현으로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봐도 인간들이 처한 상황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정답은 찾을 수 없다.

성경은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성경은 답안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인생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히 결론을 지을 수 없는 것이니
무 자르듯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다.
조급한 마음에 한 마디로 정의 할 수 없는 것인 것 같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정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에 빠진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 그리스도인 삶, 신앙이라는 것,
고통, 시련,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 간단하게 풀릴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성서는 오늘의 우리와 똑같이 그런 의문에 휩싸였던 이들의 긴 여정을 담고 있는 책이다.
굴곡 많은 인생을 살며 그만큼 큰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씨름했던 이야기들을 전하는 책이다.
그래서 그들은 크신 하나님의 일부분에 접촉한다. 
그들이 그려내는 하나님 이야기의 결론은 하나님에 대한 것은 모두 '알 수 없음'이고
그 분의 사랑만은 확실히 '알 수 있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모습을 추출해 낼 뿐이다.
시련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과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오늘 내가 그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서가 혹은 설교가 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으로 교인이 되고 교회에 오는 것도 문제일 수 있으나,
더 큰 문제는 그런 생각으로 설교하는 목회자들에게 있다.
자신이 접촉한 하나님의 모습을 절대화, 공식화해서
다수의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이미 하나님은 그 모습으로 계시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은 다른 모습,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나시기 때문이다.

어쩌면 각자가 갖고 있는 삶이라는 것은 일생, 아니 그 이상을 통해 풀어 가야할,
또는 그 과정을 통해 풀려질 '나의 과제'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의존하게 된다면 자신이 해결해야할 숙제를 엄마에게 부탁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꼴이 된다.
몇 번은 가능할 지 몰라도 그 습관이 계속된다면
그는 아마도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의 끄트머리만 좇으며 흉내내고,
연기하는 삶이 되고 말 것이다.

성서를 읽으며 그들의 부르짖음, 고뇌에 응답하셨던 하나님께서
나에게 또 어떻게 응답하실 지를 기대하는 삶,
그래서 늘 변화무쌍한 다양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인의 길을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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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15

요즘 교회들이 사람들을 모으는데 열심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사람을 모아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사람이 되게 하기 보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들기위해 노력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 교회에 다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됨보다 교인됨을 좇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학교 교육이 그러하듯 제도교회의 '바보만들기'에 수해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교회와 목회자들의 기준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과 만남을 갖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인가?
물론 전자가 후자와 일치한다면 문제는 없지만
눈을 씻고 봐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까움이다.

교단이 나서서 정책으로 숫자를 정하고 전도하겠다고 하는데,
우연인지 의지적인 것인지 현정권에 대단히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도 웃지 못할 진실이다.
성공적으로 성도들을 시대적 문제들에서 떨어뜨려 놓고 있으니 말이다.
뭐 대단한 출정이나 하는듯 구호를 외치고 난리를 하니 이성은 둔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전도를 해서 사람들을 모아 교회를 채운다 한들
그들이 지금 교인들보다 더 낳아지리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하는' 사람들인 바리새인들의 이야기가 먼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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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일로 밥먹고 사는, 소위 전문가들이 문제의 중심일 때가 많다.
그쪽 방면에 일각연이 있다고 하니 비전문가들은 그들을 따를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도움을 받아야 하니 전문가들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쩌면 전문가들이 사람들이 자신들의 도움을 받도록 구조를 만들어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전문가들은 지속적으로 자신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이런 구조를 재생산해 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비전문가들의 수준을 높이려고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들이 제자리 걸음을 하게 만들고 있고, 
어려워 할 때 살며시 다가가 '그봐 잘 안되지? 나에게 부탁하면 되'라고 손을 내민다.

사람들의 과제는 이 종속의 고리를 끊고, 홀로 서는 것이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더라도 그 기간을 한시적으로 제한하자.
왜냐면 처음에는 배울 필요도 있으니까.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졸업을 할 수 있는 거다.
졸업을 못하고 그냥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성장이 멈추어 버린 것이다.
계속 초등학교 선생님에게 배울수만은 없는 것 아닌가.

사실은 교회 이야기를 하고 싶다.
교회의 전문가들(종교인들)...
정말 신앙생활에 전문가가 존재할 수 있는것인가?
계속 필요한 것일까?

그들이 하나님을 막고 서 있는 것은 아닐까?
또 성도들을 수단화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목적인데도.
신학교는 교회와 자신들에 대한 비판적 대안이 아닌 밥그릇(교회)을 키우는 훈련만 하는 것 같다.
본질은 멀찍이 두고서 말이다.

전문가가 없는 교회, (전문가가 전혀 없을 수는 없으니) 졸업할 수 있는 교회를 꿈꿔본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말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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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와 한국사회'라는 수업을 듣고 있다.
수업 방식은 수업에 들어오기 전에 읽을거리들을 읽고 질문 서너개를 교수님께 보낸다.
교수님을 그 질문들을 선별 분류해서 A4 한 장으로 만들어 오시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 질문들을 서로 나누며 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물로 배가 산으로 가지 않도록 교수님께서 교통 정리도 하시고, 중요한 것은 설명도 해 주신다.

문제는 내가 이런 수업에 익숙하지 않고,
인원도 적을 뿐더러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달하는 것도 훈련이 되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이 뭔지도 모를 때가 많은 것이 더 문제다.
이제까지 늘 많은 학생들과 배우면서 간헐적인 질문에 답변하는 정도 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지난 주와 오늘도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보려고 했으나 핀트가 어긋난 몇 마디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 수업 중에 알게 된 것은
내가 내 생각과 내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에 잡혀 있으면 다른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거다.
사실 이 말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얘기다.
내가 이래뵈도 인증받은 코치인데, 그정도 대화의 상식을 모를까?
하지만 실전에서는 망각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얘기가 끝나면 이 얘기를 해야지 하고 신경쓰고 있을 때 난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을 차렸다.
다음 수업부터는 내가 무슨 얘기를 해야지 하는 생각에 몰입되어 있지 말고
다른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지, 그 논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데 더 집중해야 겠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을 정리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일명 '경청'을 잘 하겠다는 거다.
내 것을 끄집어 내겠다는 집착에서 자유로와 져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우겠다는 자세를 갖겠다는 얘기다.

그러니 내가 정신이 들었다고 얘기하지 않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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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와 한국사회_민족담론의 스펙트럼(임지현) vs 상상의 민족주의 비판(신용하)


민족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봉건사회가 무너지면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일제강점기가 그 때이다.
국가를 상징했던 국왕이 없어지면서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민족이 된 것이다.

문제는 이 민족을 누가 얘기하느냐, 퍼뜨리느냐에 있다.
그들은 왜 민족을 중요한 이슈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민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수혜를 입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아무래도 해방이후에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기득권을 지키려는 범 보수진영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들은 민족이라는 두 글짜를 통해 끊임없이 권력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분류하고 걸러내는 작업을 해 왔다.

우리 나라는 좀 특별해서 민족과 국민이 일치하는 나라이다.
그래서 국가를 위해 민족을 동원하는 형세를 전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민족은 존재하는 것이며 차이 또한 있는 것인가?
왜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차별이 발생하고 있는가?
모든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진 않는다(동일성에 대한 착각!).
어떤 과정(개입, 정치 일 수도)을 거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쩌면 차별을 위해 차이를 찾아내는 것일 수도 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민족에 대한 이야기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많이 다르게 쓸 수 있다.
어떤 자료를 모으느냐에 따라 모든 논리가 가능한 상황이기도 하다.

마지막 질문인데, 한반도 밖에서의 민족주의는 무엇일까?
예를들어 재일동포들의 입장에서 민족은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
민족의 형성 세 유형
영-프 유형 :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부르조아의 견인
독-이 유형 : 신흥귀족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견인
                  만들었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의도적으로 더 강조(예술 작품 등에서)
슬라브 유형 : 일부 선각자들에 의한 민족주의 형성
                  민족국가 건설 노력, 해방투쟁  → 제 3세계 유형
※아래로 내려 올 수록 만들어진, 인위적, 감정적이고, 후진적이라 할 수 있다.

---------------------
내 생각 하나 더
단군신화 같은 경우에도 조선시대에는 별로 부각된 이야기가 아닌었는데
일제 강점기때 자신들의 고유성, 차별성을 찾아가는 선상에서 증폭된 것 같다.
그렇다면 기독교 역시 그런 의도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을까?
자신의 정체성을 보다 근원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찾고자 했던 시도가 아니었을까?
유대인들이 가졌던 선민의식 특히 출애굽의 사건을 해방과 연결시키고자 한 것이 아닌가.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은 유대민족의 하나님이면서 한민족의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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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님 강의 중

文脈
내가 갇혀 있는 문맥은 무엇인가?
그래서 어린이로 돌아가야 한다.
그들은 갇혀있지 않기에 문맥을 뛰어넘을 수 있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쓸모가 없어질까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인간이 쓸모가 있어야 하나?
인간이 쓸모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지 않은가?

脫井
자신이 갇혀 있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짧은 시선에 들어오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自己理由
자기이유는 곧 자유를 의미한다.
다시 갇히더라도 지식인은 정신적 자유를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의 기준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로부터의 기준, 이유로 사는 것이다.
(버섯 우화)

自尊
자기이유가 타인에게 거리낄 것이 없으면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힘든 삶을 견디는 조건은 물질이 아니라 자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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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아들이 길을 가고 있었다.
아들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고 싶었던 아빠는 길가에 자라고 있는 버섯을 발견했다.
이 때다 싶어서 아빠는 가지고 있는 막대기로 버섯을 가리키며 아들의 주의를 끌고 말했다.
"이 거 잘 봐봐. 독버섯이야. 먹을 수 없는 버섯이란다."

순식간에 독버섯이라는 말을 듣게 된 작은 버섯을 힘이 쭉 빠졌고,
정신을 못 차리고 쓰러질 지경이었다.
옆에 있던 친구 버섯이 그 버섯을 부축하곤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그 버섯을 위로하기 시작한다.
"아니야. 넌 독버섯이 아니야. 넌 버섯일 뿐이야."
그러나 이미 버섯은 삶에 대한 소망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독버섯이라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옆에서 위로하는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 버섯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 말을 던진다.
"그건 사람들이 하는 얘기일 뿐이야!"라고.

대학 새내기들을 위한 신영복 교수님의 강연 중 들은 우화


그렇다.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일 뿐 나와는 상관이 없다. 왜냐면 난 나니까.
그들의 평가로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이 아닌, 이미 나로서 나인 것이다.
난 그들이 세워놓은 기준에 합당 하냐 그렇지 않느냐로 평가 받을 대상이 아니다.
작은 버섯은 사람들이 세워놓은 식탁의 논리로 '독버섯'이 되었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얘기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존재 그 자체로 기뻐하신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어떤 기준에 부합하느냐, 어느 수준에 이르렀느냐가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사람들이 하는 얘기일 뿐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집중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자신을 혹사시키고 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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