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에게 설교할 때,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될 때 우리들이 살아가는 곳들이 사랑과 평화가 넘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작은 예수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몸으로 보여주는 삶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셨던 가치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깨우친 사람들에게,
교회가 성도들에게 바라던 그런 삶을 살아낸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불경한 것으로 여기고 비판한다.
어떻게 그 사람에게 감히 예수라고 할 수 있느냐고 분개하기까지 한다.
아마 그들은 스스로의 논리적 모순에 빠진 것이다.
자신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에 대한 질투심이 엿보이기도 한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삶을 살았다.
우리 나라의 예만 들어도 최용신, 주기철, 손양원 등의 선각자들을 예수라 하는데 이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류영모, 김교신, 함석헌, 권정생과 같은 이들도 역시 그렇다.
더 나아간다면 암울한 시기에 자신을 태워 세상을 깨우려고 했던 전태일,
또 최근에 노무현 대통령까지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최소한 예수님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정확히 한다면 그들을 그리스도라 칭할 수는 없겠지만 (작은) 예수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 자신을 가장 밑바닦으로 집어 넣으며
기꺼이 자신을 태우며 부르짖을 수 있는 삶,
너무도 이기적인 삶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다른 존재를 깨닫게 하는 삶,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 길을 하나님께 기대어 가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누가 그를 예수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 예수라고 칭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슬픔이 더 눈 앞을 가린다.
좀 더 자신을 위해 사시지, 좀 더 이기적이 되셨으면 좋았을 것을.
어쩌면 이 말은 베드로의 말과 닮아 있다.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라고 부르짖던.
그러나 그들에게 그 길은 운명이 아닌 선택으로 주어졌다.
그리고 그들을 그 길을 선택하고 살아갔다.
그래서 결국 운명은 그들을 예수라 하는 것이다.

남아 있는 자들은 자신의 비겁했음을 가슴을 치며 후회하거나
그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것을 시샘하며 불평을 늘어 놓는다.
기득권자들은 예수가 많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때문에 자신들의 삶의 내용들이 들춰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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