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부에서 아이들이 큐티를 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시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아이들 입에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신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이 두 문장이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시련을 주실까?
성경을 보면 그 대답을 얻을 수 있을까?
뭐 단련하신다고 할 수도 있고, 다 뜻이 있으셔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고,
좀 정성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약간은 미신적인 표현으로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봐도 인간들이 처한 상황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정답은 찾을 수 없다.

성경은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성경은 답안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인생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히 결론을 지을 수 없는 것이니
무 자르듯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다.
조급한 마음에 한 마디로 정의 할 수 없는 것인 것 같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정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에 빠진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 그리스도인 삶, 신앙이라는 것,
고통, 시련,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 간단하게 풀릴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성서는 오늘의 우리와 똑같이 그런 의문에 휩싸였던 이들의 긴 여정을 담고 있는 책이다.
굴곡 많은 인생을 살며 그만큼 큰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씨름했던 이야기들을 전하는 책이다.
그래서 그들은 크신 하나님의 일부분에 접촉한다. 
그들이 그려내는 하나님 이야기의 결론은 하나님에 대한 것은 모두 '알 수 없음'이고
그 분의 사랑만은 확실히 '알 수 있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모습을 추출해 낼 뿐이다.
시련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과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오늘 내가 그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서가 혹은 설교가 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으로 교인이 되고 교회에 오는 것도 문제일 수 있으나,
더 큰 문제는 그런 생각으로 설교하는 목회자들에게 있다.
자신이 접촉한 하나님의 모습을 절대화, 공식화해서
다수의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이미 하나님은 그 모습으로 계시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은 다른 모습,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나시기 때문이다.

어쩌면 각자가 갖고 있는 삶이라는 것은 일생, 아니 그 이상을 통해 풀어 가야할,
또는 그 과정을 통해 풀려질 '나의 과제'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의존하게 된다면 자신이 해결해야할 숙제를 엄마에게 부탁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꼴이 된다.
몇 번은 가능할 지 몰라도 그 습관이 계속된다면
그는 아마도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의 끄트머리만 좇으며 흉내내고,
연기하는 삶이 되고 말 것이다.

성서를 읽으며 그들의 부르짖음, 고뇌에 응답하셨던 하나님께서
나에게 또 어떻게 응답하실 지를 기대하는 삶,
그래서 늘 변화무쌍한 다양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인의 길을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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