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정해서 꼬박꼬박 보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드문드문 보게 될 때가 있다.
오늘은 선덕여왕을 보게 되었는데,
흉년에 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민란이 일어난 안강성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민중들은 웬만해서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한 마디로 '좀 더 참고 살면 되지'하면서 몸을 낮춘다.
그래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선택을 한 것이다.
달리 보면 어차피 굶어 죽을 것이니 다른 방식으로 죽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민중들의 목숨을 건 폭동, 즉 자기 표현이 역사를 진보하게 한 것이 아닌가?

"만일 민중들이 법을 다 지키고 살았다면 사회는 지금 노예제 사회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법치는 옳은가'라는 강의에서 한홍구교수)

결국 이 진보라는 것은 가진 자들의 생각을 아주 조금씩 바꾸는 과정이 아닐까.
뭔가를 쥔 자들은 변화를 원치 않는다.
그래야 자신들의 힘과 소유를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이 몸을 던져 피 흘리는 불법이 변화의 시발이 될 것이 아닌가.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 하면 예수님을 빼놓을 수 없다.
일단 그 분은 유대인들의 목숨과도 같은 법, 율법을 무시했다.
이유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대 기득권자들의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또 그 뿐일까. 예수님의 행보는 헤롯이나 로마의 지배자들에게까지도 걸림돌이 되었다.
어쩌면 지배자들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돌볼 수 있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이 백성들을 한 차원 높게 깨워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을 터이다.
그런데 그 과정은 정치적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성경은 빌라도가 등 떠밀려서 예수님을 십자가로 보낸 것으로 나오지만,
어찌 그 자신의 의지 없이, 판단 없이 그런 일이 가능할까? 대 로마의 총독이 말이다.
빌라도는 충분이 이 사람, 예수의 행적을 정치적 차원에서 이해했고, 법으로 심판한 것이다.

예수 사후 이천년의 세월 동안 힘없고 눌린 자들의 불법 투쟁은 계속되어 왔다.
오늘 본 선덕여왕에서의 백성들의 행동도 거기에 속할 거다.
언제나 가진 자들의 논리는 주류를 형성하지만
그것에 의해 규정되는 자들의 생각은 무시된다.
힘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기꺼이 그 힘없는 쪽에 서셨다.
그래서 무참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한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오늘도 여전히 중요한 화두이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에 대한 생각의 진보를 위해 또 어느 곳에선가 불법은 행해져야 한다.

'깨어살리 > 돌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죽나무  (0) 2010.02.02
그래서?  (1) 2009.11.07
노예들의 착각  (0) 2009.09.09
2050년 어느 날의 일기  (1) 2009.09.09
예수로 살아낸 사람들  (0) 2009.07.03
블로그 이미지

dols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