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그 길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대개 보수적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 익숙한 방식을 유지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를 더 먹을 수록 더욱 보수적이 된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옳고 그름보다는 익숙하고 편한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자신과 친한 사람, 해 오던 방식을 따르는 것을 선호한다.

지금 교육계의 문제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들...
특히 교회에 잠재하고 있는 문제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변하지 않으려는 보수적 태도가 도사리고 있다.
조금도 바꾸려고 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변하는 시대를 좇아 가지 못하는 것이다.

요사이 교회나 학교 현장을 보면서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긴박감을 느끼고 있다.
지금 젊은 이들, 청소년들은 이미 바뀌어있다.
그런데 그들을 상대해서 뭔가를 시도하고 있는 기성세대들을 그것을 모른다.
아니 알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이제 더이상 한 사람 혹은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다수의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상대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왜냐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나이나 위치, 혹은 직함 등을 머리로 이해하고 권위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상대방이 얼마나 진실한지, 더 나아가 나를 향한 진심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인지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낀다.
만약 가슴으로 그것을 확신하게 되면 머리와 온 몸을 주어 버린다.

그래서 교육의 현장의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
일대 다수의 만남을 지양하고, 일대일 혹은 일대 소수의 만남이 가능한 구조로 나가야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일방적인 전달의 구조를 탈피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들이 들려 질 수 있는 구조로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획기적인 생각의 전환과 투자가 요구된다.
어쩌면 그래서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도 더 걸리고, 힘도 더 많이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교인들만 봐도 큐티 나눔이나 일대일 훈련 등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선호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니 더 젊은 세대들은 어떻겠는가?
학교에서도 전체를 대상으로 한 수업에서는 딴전을 피우고 돌아 앉아 있는 아이들이
가까이 다가가서 자신의 일대일의 인격적 접촉을 시도할 때는 태도도 달라지고, 말씨도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 지는 명확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린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야흐로 영성의 시대는 그런 영적 권위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 영적 권위란 예수님의 마음,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만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을 향해, 젊은 이들을 향해 예의가 없다고, 부모들일 가르치지 않았다고 남탓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이젠 익숙한 방식을 버리고, 기꺼이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굳어있는 몸을 유연하게 해야 한다.
일단 다음 세대들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들을 만나는 방법(본질이 아닌)을 비용이 얼마가 들던 간에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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