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원칙, 우상의 변칙

출23

1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너희는 다른 신들의 이름을 기억해서는 안 되며, 입 밖에 내서도 안 된다.


다른 신들의 이름이란 무엇일까요?

신을 섬긴다는 것, 믿는다는 것은 그 신의 가치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 신의 가치는 사람들에게 삶의 원칙 혹은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율례를 이르실 때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가장 경계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위 말해 우상숭배를 한다는 것, 당시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상황에 따라 여러 다른 신들을 섬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일관된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자기를 편의에 맞는 기준을 들이 들이 댈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아무래도 가진 자들의 입장에서 더없이 편리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잇속을 챙기기 위해 ‘신’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고,

약자 일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좇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의 한결 같은 원칙은 공평함과 배려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의 규례를 주시며 여종의 아들과 몸 붙여 사는 나그네,
심지어 소와 나귀의 ‘숨 돌릴 틈’을 생각해 주시는 분이시지만,

그들이 잘못했을 때조차 무조건 편들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원수와 미워하는 자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분명하고 아름다운 원칙입니까?

그런데 만약 다른 신의 이름을 부름으로서 이런 원칙들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사회는 금세 종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져들지 않겠습니까.

정의는 사라지고, 서로를 믿지 못하고, 위선과 아부가 난무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칙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하지만

우상의 변칙은 ‘그래도 된다.’고 말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래도 된다.’에 마음이 더 끌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대부분 좋게 표현해 다신교 숭배자들이고,

성경대로 표현한다면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왜냐면 가는 곳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원칙을 가지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칙의 횡횡’이 오늘날 우리들의 초상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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