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만나는 하나님

출24

9 모세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장로 일흔 명과 함께 올라갔다.  10 거기에서, 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깔아 놓은 것 같으며, 그 맑기가 하늘과 꼭 같았다.  11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손으로 치지 않으셨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뵈며 먹고 마셨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백성들 앞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너무도 놀라운 광경 앞에 백성들은 놀라다 못해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시내산은 더없이 성스러운 장소로 보였을 것입니다.

특히 뽑혀서 올라간 70명의 장로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이 하나님을 뵈며 먹고 마셨다.”

이 얼마나 멋진 순간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먹고 마셨다니.

그런데 왜 저는 이 장면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봐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이로운 일을 경험한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일들을 벌이는 지 뻔히 알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너무 멀리 나가는 것 같아 다소 생뚱맞기까지 한 이야기를 떠오르는 대로 좀 해 볼까 합니다.


이렇게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표현할 때,

‘시내산에서 나타나신 하나님’, ‘시내산의 하나님’ 쯤으로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목격한 하나님의 모습을 기억 속에 새겨 놓으려고 안간힘을 쏟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경험한 상황 속에 아예 못 박아 놓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시내산, 시내산, 시내산...

그러나 하나님은 시내산에 살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또 그들이 시내산에서 목격한 하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전부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재대로 보지도 못했고, 볼 수도 없었습니다.

모세조차도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해 친히 손바닥으로 덮고 지나가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뒷모습만 잠시 보았을 뿐입니다(출33:23).

그러니 장로들이 하나님의 발 아래만 보았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면서 자신들의 짧은 언어로 규정하려 합니다.

이후 아람왕의 신하들이 하나님을 산의 신 운운하는데(왕상 20:23),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도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당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아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을 뿐인데,

그렇게 하나님을 한 마디로 정의하려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결국 다른 모습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알아보는 데 커다란 장애물이 됩니다.


이렇게 제한적인 감각에만 의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자세는

40일도 인내하지 못하고 바닥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는 것 너머,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범위 밖에 계신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에게 눈높이를 맞추어 주시고,

우리들을 이해시키시지 위해 몸 낮추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기 위해 보여주신 그 사랑의 크기보다

그 사건의 주변적인 것들에 얽매여 새롭게 나를 만나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봐야 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dols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