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백성 매뉴얼
출20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해 계명을 말씀하실 때
가장 먼저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도 신이고, 또 다른 신들이 존재한다는 말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으로 생각해 보면 신이란 인간사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인지로 모릅니다.
무슨 일을 하던 마음을 두고 의지하고 믿음을 주는 대상이 바로 신이 아닐까요?
때로 힘이 될 수도 있고, 돈이 될 수도 있고, 명예가 될 수도 있고, 나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자신의 신념이 신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만들어져 있는 생각의 틀, 구조, 확신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게 되는 것,
나를 존재하게 했고,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충만한 에너지 안에 있으면서 그것을 모른척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세운 자신의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고수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여기며 삽니다.
어쩔 수 없이 버거운 인생의 짐들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일 수도 있고,
내가 만들어 놓은 가공의 신의 그것일 수도 있습니다.
신들에 의해 겹겹이 쌓여 살아가는 실존이란
도저히 하나님을 가까이, 아니 하나님께서 가까이 올 수 없게 합니다.
그것을 끊어내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님께서 안타까움으로 내어놓으시는 부탁이며, 계명입니다.

4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과 이어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 사이에 차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앞의 문장을 부연 설명하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상을 만든다는 것은 하나의 종교가 만들어 진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숭배하는 제도가 만들어 질 것이고, 조직도 만들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첫 번째 문장에서 다른 신을 두는 것보다 한 발짝 더 앞으로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봐 줄 수 없는 꼴을 연출하는 것이죠.

이는 마치 간음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도 인정하시는 이혼 사유가 되는 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한 결별의 의사를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이후에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수렁이 바로 이 우상숭배였으니,

하나님의 입장에서 강조의 강조를 거듭해도 부족함이 없는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5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질투를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이 질투를 한다는 것이 좀 의아한 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약한 인간이나 할 만한 감정으로 질투를 하시다니...

하지만 잘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투라는 것은 시기와 다르게 사랑의 감정에서 나옵니다.

질투는 사전적으로 ‘사랑의 한 형태로서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자기 이외의 인물을 사랑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대인 감정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질투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른 존재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향해 마음을 주는 것을 참아보실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삼사 대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죄 갚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천 대까지 베푸시는 은혜가 사실은 하나님의 본심인 것이다.

하나님의 본심이 어디에 있는 지 더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7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해왔습니다.

성장 시기에 따라서 이름을 다르게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이름을 그 사람의 존재와 일치시키며 성장하고 온전해 진다고 본 듯합니다.

실재 이름보다 호를 사용한 것도 어쩌면 이름을 가벼이 부르지 않기 위함이었을지 모릅니다.

본인의 이름도 그러하기에 부모님의 이름은 거의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자식이 어떻게 부모님의 존함을 입으로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부모님의 함자를 말해야 할 때는 띄어서 한 자 한 자 말했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으로 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특별한 태도를 가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는데 너무 황공하고 송구해서 도저히 그 단어 자체를 발음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써 놓은 단어만 나오면 절을 하기도 하고,

읽지도 않고 그저 ‘네 글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계명의 말씀을 충실히 따른다는 것이 그것일까요?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며 백성들이 행하기를 바라셨던 모습이 이 것이었을까?

부모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을 때, 더 중요한 것은 그 마음에 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다함없는 존경의 마음을 그렇게라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그만큼 소중하고, 귀한 분으로 여기는 마음이 밑바탕이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을 중심에 놓고서 하나님을 장식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교회의 모습이라면,

그 안에서 온갖 수식어를 붙인 찬양과 기도를 올려 드린다 해도

마음이 없다면 망령된 모임이요, 망령된 사람들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밥 먹듯 하나님을 되 뇌이면서 그의 뜻을 내 삶을 옮겨 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망령되이 하나님의 이름을 일컫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의 이름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루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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