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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것은 쉬운 거다

출30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3 "너는 제일 좋은 향품을 취하되, 순수한 몰약을 오백 세겔, 향기로운 육계를 그 절반인 이백오십 세겔, 향기로운 향초 줄기를 이백오십 세겔,

24 계피를 오백 세겔, 이렇게 성소 세겔로 취하고, 올리브 기름 한 힌을 취하여라.

25 너는 향을 제조하는 법을 따라 이 모든 것을 잘 섞어서, 성별하는 기름을 만들어라. 이것이 성별하는 기름이 될 것이다.


출애굽기가 전하는 제사장 이야기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예수님 때문에 더 힘들어 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정해주신 절차와 공식대로 만들고 따라하면

그 자체로 구별되고 거룩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공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가타부타 이야기할 여지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대로 전하는 역할, 물론 이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마음’의 문제를 이야기 하시면서

상황은 전혀 다른 쪽으로 돌아서버립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외모에서 중심으로 옮겨 갔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실은 그것이 예수님이 선언을 하신 것이지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으로 보시고 계셨습니다.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때도 그러하셨고,

이스라엘의 불순종 앞에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주실 때 반복하신 말씀의 주제가 마음이었습니다.

육체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라고 목청 높여 전하셨으니까요.

그러나 겉모습에 중심을 두고 그것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던 이들에겐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국 모세를 통한 모세의 세대에 마침표를 찍으시고,

예수님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세대가 도래하도록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겉으로 보여 지는 절차와 외모에 따라서가 아닌

마음으로 판단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때문에 더 어려워졌다고 감히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망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모세를 부르시어 당신의 백성을 만드시기 위해 율법을 주셨던 것이 은혜였듯

예수님을 통해 마음의 길을 열어 주신 것 또한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는 우리가 진심으로 나아갈 때 또한 하나님의 진심어린 마음과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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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의 마음

출29

1 나를 섬기는 제사장을 거룩히 구별하여 세우는 절차는 이러하다.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두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골라라.

2 그리고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누룩 없이 기름만 섞어 만든 과자와, 누룩 없이 기름만 바른 속 빈 과자를, 고운 밀가루를 가지고 만들어라.

3 너는 그것을 모두 한 광주리에 넣어서, 수송아지와 두 마리의 숫양과 함께 광주리째 바쳐라.


여전히 실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하라’고 이르시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보다 생생한 장면은 출애굽기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명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오히려 여기에서 자세한 사항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28장에서 제사장의 옷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29장에서는 그것을 제사장에게 입히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옷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냥 제사장의 일을 할 사람이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그 절차에는 또 희생이 따랐습니다.

희생이 없이는 제사장으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과거에 범죄 한 사실이 있고, 현재 흠(결격사유)을 가졌다면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희생은 자신도 모르게 지었을지도 모르는 죄를 위한 것이고,

장래에 지을 지도 모르는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제사장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자신에게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기에 그 직무를 감당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했습니다.

백성 중에서 정해진 요건을 갖춘 자가 정해진 절차를 밟았을 때 거룩한 직임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제사장은 자신이 입은 옷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때부터 타락이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면 그는 분명 그 옷을 자신의 권력으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그의 옷이 그인 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되는 자는 옷에 감추어져 있는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기 위해

내적 자신으로의 끊임없이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백성들도 그러하지만 제사장들은 더더욱 자신이 드리는 짐승들이 불태워질 때

그것과 함께 자신의 속되고 거짓된 자아를 함께 태워버리는 의식을 성실히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야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의 타는 냄새를 향기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불태워지는 짐승의 살과 기름에는 아무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제사장의 낮은 마음이 함께 할 때에라야 진정한 능력이 있는 제사,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되는 더 중요한 절차, 희생은 바로 제사장의 마음의 태워짐이었습니다.

자신을 남김없이 산화시키는 헌신만이 그를 제사장으로 거룩한 자리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거기에 있었다면, 예수님이야 말로 최고의 제사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그것을 조금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허덕이고 있으니

하나님의 긍휼이 더더욱 크게 느껴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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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필요한 은혜

출28

2 너는 너의 형 아론이 입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보이는 거룩한 예복을 만들어라.

3 내가 슬기로운 생각으로 가득 채워 준 모든 재주 있는 사람을 불러다가, 나를 섬길 아론이 제사장이 되어서 입을 예복을 만들라고 하여라.

4 그들이 만들어야 할 예복은 이러하니, 곧 가슴받이와 에봇과 겉옷과 줄무늬 속옷과 관과 띠이다. 이렇게 그들은 너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만들어 주어서, 나를 섬기는 제사장 일을 맡게 하여야 한다.


1.
출애굽기 28장은 성소의 사람인 제사장이 입을 옷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옷을 이르시면서 ‘거룩’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시는데,

제사장의 옷이 ‘거룩한 예복’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되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거룩할 수는 없습니다.

그에게 맡겨진 일이 거룩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거룩한 직임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예복으로 자신의 개성, 한계, 허물을 가렸던 것입니다.


제사장의 직무는 하나님의 의지로부터 온 것이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명하신 것이고, 임명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이 된 사람이 자신이 거룩하고, 위대하다고 오해,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화려한 옷, 화려한 자리에 앉을수록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더욱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화려한 옷은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위한 배려로 주신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 화려한 옷을 보고 제사장을 존경하고, 자신들과 다른 존재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사장은 그럴수록 더욱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의 은혜를 더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거룩한 옷 입기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어찌 자신이 그 옷을 입을 수 있는지 괴로움에 휩싸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에 우쭐하기보다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직무의 무게를 생각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
목사임직을 앞두고 있습니다.

목사가 된다는 것, 그것이 저의 존재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끊임없이 저의 존재를 갈고 닦는 일은 계속할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가 구약에서 말하는 제사장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 된 사람이 감당하는 일의 중대성은 과소평가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사라는 이름의 옷은 거룩한 예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저의 고백은 ‘주님의 은혜가 더욱 필요합니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아니면 조금도 나아갈 수 없는 자리가 또한 ‘목사의 자리’가 아닐까요.

주님의 은총이 더욱 필요하고, 함께하는 사람들의 기도가 더욱 필요하고,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는 갈고 닦음이 더더욱 필요합니다.

아마 자신의 내적 모습이 볼품없을수록 더욱 화려한 ‘예복’을 입으려고 안달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경계하며 저 자신의 존재를 예수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더욱 겸손해져서 낮은 마음을 품기를 소원해 봅니다.

목사, 그래서 조금도 눈에 띄는 어떤 옷도 필요하지 않고,

존재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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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경건회 말씀을 준비하면서 앞의 것과는 쪼금 다르게 써 보았다.

막상 경건회 때는 그림을 그리듯 전하다 보니 앞부분 이야기에서

중간 예수님 이야기는 빼고 바로 결론으로 갔는데

‘내가 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자, 전하자’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본 그대로 하기를(2)

출27

8 제단은 널판으로 속이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게 하라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본 대로 해야 할 책임이 모세에게 주어졌습니다.

대개 그리스도인들은 출애굽기 22장부터 31장까지, 더 길게 잡으면 40장까지를 읽으며

지루한 마음으로 눈을 굴려 신속히 지나갑니다.

본 대로, 그대로 전해서 똑같이 만들게 해야 할 모세는 한 눈을 팔 수 없는 긴장된 시간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 규례를 잘 지키기 위해 더 세분화된 규정까지 만들어 철저히 지키려 했으니까요.

정말 그럴까요?

그들이 정말 하나님께서 그리신 안식일의 그림을 그대로 완성한 것일까요?


아니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외치며

손 마른 자를 고치시고(마11),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를 고치신(요5) 예수님이 그 그림을 완성한 것일까요?


안식일... 출20:8, 출23:12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올려지고, 작은 자들에게 숨 돌릴 틈이 주어진 것은 누구를 통해서였습니까?


자신들은 안식일을 넉넉하게 지킬 수 있음을 뽐내며

그럴 수 없어 안식일의 규례를 범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질시하는 행위는

결코 하나님에게서 안식일을 명하시며 보여 주신 그림을 그대도 완성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구덩이에 빠진 양을 구하듯(마11:11)

불안정한 사람을 도와주고, 낫게 해 주는 예수님의 삶이 더 하나님의 그림을 온전히 완성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실(마25:40)

그 하나님을 생각하며 오늘 나에게 주시는 이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정성을 쏟을 수 있다면

그대로 함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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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그대로 하기를

출27

8 제단은 널판으로 속이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게 하라

(25:9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25:40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네게 보인대로’는 성소를 만들라는 말씀을 주시며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사용하시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할 때 융통성을 부린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칭찬하실 기술자는 자신의 능력을 한껏 뽐내기 위해 융통성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려주신 대로 그대로 만드는 자여야 합니다.

또한 이를 중계해야 하는 모세의 역할 또한 막중했습니다.

자신이 본 그대로 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런 것들을 이르실 때 단지 말씀으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 만들어졌을 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셨던 것 같습니다.

들은 대로, 받아 적은 대로가 아니라 ‘본 대로’이기 때문이다.

이후 기술자들이 작업을 똑바로 하고 있는지 노심초사 했을 모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 때 모세가 보았던 것을 그대로 할 필요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율법을 새롭게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로 하려는 마음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인 그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람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마음과 행동을 따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셨고, 그래서 그대로 하려고 노력하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외형적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을 보게 됩니다.

종교적 행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열심을 내니 말입니다.

반면 내적 삶의 자세는 전혀 그리스도의 삶을 좇지 않습니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에게 겉모습은 너무도 쉽게 벗겨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손쉽게 그리스도의 원칙을 상황에 따라 바꾸어 버리는 놀라운 융통성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몇 명이라도 삶으로 경험하고 목격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해 주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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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출26

1 열 폭으로 성막을 만들어라. 그 천은, 가늘게 꼰 모시 실과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놓아 짠 것이라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설계도를 주시면서 그 유효기간은 언제까지로 생각하셨을 까요?

우리는 대개 성막을 40년 광야 생활의 풍경 중 하나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설계도를 주실 때는 조만간 가나안에 들어갈 예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천막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 명하실 것이 아니라

돌로 만드는 것을 가르쳐 주셨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만들 신전의 설계도를 주셨다면

어쩌면 백성들이 더 기대에 차서 더 힘 있게, 더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았을까요?


어떤 분들은 성막이 광야에서 이동하는 진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성막은 광야에서 40년이 지체된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다윗을 지나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까지 그대로 유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단지 광야생활을 염두에 두고 성막 건축을 지시하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온전한 성소의 모델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까지 480년 가까이 지속된 것이 성막이었습니다(왕상6:1).

그러니 이후 만들어진 그 어떤 성전보다도 더 오래 유지 된 것이 성막이었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 새로운 천으로 갈았겠지만 그 원형은 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 있어서 성소의 재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백성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 만남이 능력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한 점입니다.
그래서 그 천막이 하나님의 위대함을 더 드러내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웅장하고, 멋진 신전을 가진 신이라면 당연히 능력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초라한 천막을 성소로 가진 신이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가졌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고, 더 큰 영광을 돌리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겉보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백성들은 만나주시는 분이 누구냐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큰 교훈을 가져가게 될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질그릇에 담긴 보배를 이야기 하며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고후4:7).


사람들은 건물에 주목하지만 그 건물은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그 안에 깃들이는 하나님께 완전한 능력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연약하고 볼품없는 천막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음으로 해서

그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최고의 성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을 때 솔로몬이 화려하게 지은 성전도 무참히 무너져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꼼꼼하게 이르시는 하나하나 빠짐없이 받아 백성들에게 전해
작은 수치 하나 틀림없이 성막이 만들어지게 해야 하는 모세의 책임은 너무도 막중한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의 손으로 만든 곳이 하나님과 백성들이 만나는 곳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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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곳을 위해

출25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출애굽기에서 가장 재미없는 부분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산에 오른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성소와 회막 건축에 대한 자세한 설계도를 받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언약궤, 진설병 상, 등잔대 만드는 법을 25장에서 명하십니다.

3D영상으로 만들어 보면 재미가 있을 것도 같은데, 그냥 글로만 대하니 정말 뭔 소린지 알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일단 이 모든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초가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드린 예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눈길을 끕니다.

예물의 존재가치는 ‘기쁜 마음’에 있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드린 예물만이 성소와 회막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성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들의 마음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이나 성소는 하나님과 백성의 마음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마음이 함께 할 때 성소와 그 안의 기명들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상징하지만,

마음이 빠져 버릴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삼상 4장에서의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기는 사건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는 어떨까요? 하나님과 마음의 만남이 있는 곳입니까?

혹시 세속적 가치가 횡횡하며 참된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사적 욕구 해소를 위해, 부질없는 외형적 체면에 매어서

마음 없는 껍데기만의 헌신으로 드림을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무리 멋들어진 모양을 하고, 화려하게 치장한다고 해도

하나님과 사람들의 마음의 만남이 없다면 돌과 나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난주에 한 아이가 헌금 봉투에 1,000원이라고 쓰고 넣어둔 쪽지입니다.

엄마가 찔러 주어 아무 생각 없이 아이의 손을 거쳐 헌금함에 들어간 어떤 헌금보다 소중한 예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받으시지 않으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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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만나는 하나님

출24

9 모세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장로 일흔 명과 함께 올라갔다.  10 거기에서, 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깔아 놓은 것 같으며, 그 맑기가 하늘과 꼭 같았다.  11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손으로 치지 않으셨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뵈며 먹고 마셨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백성들 앞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너무도 놀라운 광경 앞에 백성들은 놀라다 못해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시내산은 더없이 성스러운 장소로 보였을 것입니다.

특히 뽑혀서 올라간 70명의 장로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이 하나님을 뵈며 먹고 마셨다.”

이 얼마나 멋진 순간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먹고 마셨다니.

그런데 왜 저는 이 장면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봐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이로운 일을 경험한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일들을 벌이는 지 뻔히 알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너무 멀리 나가는 것 같아 다소 생뚱맞기까지 한 이야기를 떠오르는 대로 좀 해 볼까 합니다.


이렇게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표현할 때,

‘시내산에서 나타나신 하나님’, ‘시내산의 하나님’ 쯤으로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목격한 하나님의 모습을 기억 속에 새겨 놓으려고 안간힘을 쏟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경험한 상황 속에 아예 못 박아 놓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시내산, 시내산, 시내산...

그러나 하나님은 시내산에 살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또 그들이 시내산에서 목격한 하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전부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재대로 보지도 못했고, 볼 수도 없었습니다.

모세조차도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해 친히 손바닥으로 덮고 지나가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뒷모습만 잠시 보았을 뿐입니다(출33:23).

그러니 장로들이 하나님의 발 아래만 보았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면서 자신들의 짧은 언어로 규정하려 합니다.

이후 아람왕의 신하들이 하나님을 산의 신 운운하는데(왕상 20:23),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도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당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아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을 뿐인데,

그렇게 하나님을 한 마디로 정의하려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결국 다른 모습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알아보는 데 커다란 장애물이 됩니다.


이렇게 제한적인 감각에만 의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자세는

40일도 인내하지 못하고 바닥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는 것 너머,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범위 밖에 계신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에게 눈높이를 맞추어 주시고,

우리들을 이해시키시지 위해 몸 낮추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기 위해 보여주신 그 사랑의 크기보다

그 사건의 주변적인 것들에 얽매여 새롭게 나를 만나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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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원칙, 우상의 변칙

출23

1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너희는 다른 신들의 이름을 기억해서는 안 되며, 입 밖에 내서도 안 된다.


다른 신들의 이름이란 무엇일까요?

신을 섬긴다는 것, 믿는다는 것은 그 신의 가치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 신의 가치는 사람들에게 삶의 원칙 혹은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율례를 이르실 때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가장 경계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위 말해 우상숭배를 한다는 것, 당시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상황에 따라 여러 다른 신들을 섬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일관된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자기를 편의에 맞는 기준을 들이 들이 댈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아무래도 가진 자들의 입장에서 더없이 편리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잇속을 챙기기 위해 ‘신’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고,

약자 일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좇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의 한결 같은 원칙은 공평함과 배려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의 규례를 주시며 여종의 아들과 몸 붙여 사는 나그네,
심지어 소와 나귀의 ‘숨 돌릴 틈’을 생각해 주시는 분이시지만,

그들이 잘못했을 때조차 무조건 편들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원수와 미워하는 자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분명하고 아름다운 원칙입니까?

그런데 만약 다른 신의 이름을 부름으로서 이런 원칙들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사회는 금세 종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져들지 않겠습니까.

정의는 사라지고, 서로를 믿지 못하고, 위선과 아부가 난무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칙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하지만

우상의 변칙은 ‘그래도 된다.’고 말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래도 된다.’에 마음이 더 끌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대부분 좋게 표현해 다신교 숭배자들이고,

성경대로 표현한다면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왜냐면 가는 곳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원칙을 가지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칙의 횡횡’이 오늘날 우리들의 초상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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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보기를

출22

2 밤에 도둑이 몰래 들어온 것을 알고서, 그를 때려서 죽였을 경우에는, 죽인 사람에게 살인죄가 없다.

3 그러나 해가 뜬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그에게 살인죄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2장에서 소유권 침해에 대한 말씀을 주십니다.

그 첫 번째가 도둑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도둑이 밤에 몰래 들어온 것을 알고, 그를 때려서 죽이면 죽인 사람에게는 살인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해가 뜬 이후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비록 상대방이 도둑이라 할지라도 그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을 때는 죽이면 살인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재산이 중요하고, 다른 사람들의 것을 몰래 가져가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는 데 그것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밤에 어두워 서로를 알아 볼 수 없을 때는 내 생명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해가 떠서 상대를 알아 볼 수 있을 때는 도둑이지만 그 생명 또한 지켜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도둑일지언정 ‘사람’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십계명을 범하다 걸린 것이라 해도 그는 먼저 사람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누군가를 사람으로 보려하지 않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자기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보다도 못하게 여기지는 않는지.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하시는 말씀 속에서도 백성들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지라고 말씀하시면서도,

그 율법의 근간이 사람에 대한 믿음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요사이 유괴와 살인 등 극악한 범죄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범인이 잡힌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그 가족들이나 경찰에게나 견디기 힘든 시기를 보내게 합니다.

최근 잡힌 범인은 오락가락 진술을 번복하면서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약간의 아쉬움은 그 범인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를 사람으로 봐 주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지만 그도 역시 우리와 같은 존중받아야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이야기>

언제 아침이 시작되는가?


늦은 밤, 스승과 제자들이 화톳불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이런 저런 잡담들을 나누다가,

문득 하늘에 빛나는 달과 별들을 바라보면서 모두들 침묵에 잠겼다.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스승이 입을 열었다.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한 젊은이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멀리 있는 짐승을 보고 그것이 개인지 양인지를 분별할 수 있으면,

그 때가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 아닐까요?”


"좋은 대답이군,"스승이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답은 아닐세.”

제자들은 잠시 의논한 끝에, 두 번째 젊은이가 대표로 말했다.

"빛이 나뭇잎에 내릴 때 그것이 소나무 잎인지 참나무 잎인지를 분별할 수 있으면

그 때가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이번에도 스승은 고개를 저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훌륭한 대답이지만, 역시 내가 찾는 답이 아니네.”

제자들은 머리를 모으고 생각해보았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스승에게 간청했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해주십시오."


스승은 제자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 눈을 들여다 볼 때 형제나 누이가 보이면 아침이 밝은 것이고,

형제도 누이도 보이지 않으면 아직 캄캄한 밤중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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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복지로부터

출21

1 "네가 백성 앞에서 공포하여야 할 법규는 다음과 같다.

2 너희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종살이를 해야 하고, 일곱 해가 되면, 아무런 몸값을 내지 않고서도 자유의 몸이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시기 시작한 율법이 계속됩니다.

20장이 대원칙이었다면 21장부터는 각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첫 번째의 것이 종에 대한 것입니다.

히브리 종은 종이 된지 7년째에 놓임을 받게 될 것인데,

만약 결혼했다면 아내와 같이 자유가 되고,

자식을 낳았다면 아내와 자식은 주인의 것이 되므로

혼자 자유가 될 것인지 아니면 가족들과 계속 종으로 남을 것인지 결정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구히 종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시작이 종의 복지로부터 시작한 점입니다.

다른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아직 성막이나 제사 규례가 없긴 하지만 제사장의 규례나,

지파 지도자를 선출하는 문제나, 그들이 전쟁을 할 때에 관한 규례를 주시던가,

재산 상속 같은 가진 자들의 집안의 주요 관심사에 대한 규례를 주실 수도 있고,

사회문제가 될 수 있는 범죄들에 대한 세부적인 것들을 먼저 주실 수도 있었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종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애굽에서 종 생활을 백년도 넘게 해 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종’이라는 주제는 익숙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동족 안에서도 조금만 힘이 있고, 돈이 있어도 종을 부리고 사는 일이 쉽게 생겼을 것이고,

이 문제에 대한 정리가 시급한 사안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1차적 과심이 종, 여종, 가난한 자, 나그네에게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된 삶을 살았던 종․노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먼저 관심가지셨듯이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종, 노예, 가난한 자, 나그네에게 먼저 관심을 가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자들의 인권과 복지가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세우는데 초석이 된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왜 종이라는 제도를 인정하고 계신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의 종이라는 개념은 요즘을 말하면 하층민이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부자들의 집에 들어가 일을 도와주면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 말입니다.

자유롭게 드나들며 품삯을 받으며 일을 돕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것보다도 못한 사람이라면 아예 그 집에 머물며 일을 했겠죠.

그 사람들을 종이라고 할 수 있었겠죠.(제 생각입니다.)

 

어느 사회든 작은 자들의 한을 모른척하고 이룩한다면 분명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 전 2MB대통령이 일부 기업인들에게 모바일 폰 번호를 나눠주고,

언제든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연락하라고 했다는데,

그 분이 가진 자들의 불편, 애로, 고충을 신속하게 들어 주겠다는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냈다면,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직통전화를 종들, 여인들, 가난한 자들, 나그네들에게 먼저 열어 놓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 역시 누구에게 먼저 마음을 열고 있는지.

하나님의 요청은 너희 안에 작은 자들에게 대한 배려, 그들의 삶의 상태,

그들의 먹먹한 부르짖음에 먼저 몸 낮추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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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들의 진솔한 만남이 있는 곳

출20

18 온 백성이 천둥소리와 번개와 나팔 소리를 듣고 산의 연기를 보았다. 백성은 그것을 보고 두려워 떨며, 멀찍이 물러섰다.

19 그들은 모세에게 말하였다. "어른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시오.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죽습니다."

2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들을 시험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이며, 당신들이 주님을 두려워하여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21 백성은 멀리 떨어져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시는 먹구름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갔다.


백성들이 두려워 떱니다.

하나님께서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로 당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광경, 이제까지 겪어 보지 못했던 경험 앞에 오금이 저린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실 때 굳이 놀라운 광경을 연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떡으로 만드시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의 진위가 결정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는 그 어떤 현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 가만히 계셔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놀랄만한 자연 현상들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는 이유는 백성들을 위한 배려에 있었습니다.

그들을 겁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듣고 따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그런 하나님의 배경에 놀라기도 하겠지만,

그런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섭네, 죽겠네, 두렵네 하면서 호들갑을 떨기 보다는

기쁨에 감격하며 감사함으로 말씀을 받아야 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그 주변적인 것들을 판단의 중요한 근거로 사용합니다.

왜 기적이 일어나는 지, 그 기적을 있게 하시는 분은 누구인지에 관심하기 보다는

그 기적 자체에 몰입해 버리는 것이 그런 현상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후에 모세가 산으로 올라 간 후 40일 동안 조용하자

참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뭔가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기는 인간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꺼이 사람들의 눈높이를 맞추시는 분, 그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당신에게만 맞추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시내산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하나님과 인간의 진솔한 만남이 있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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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백성 매뉴얼
출20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해 계명을 말씀하실 때
가장 먼저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도 신이고, 또 다른 신들이 존재한다는 말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으로 생각해 보면 신이란 인간사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인지로 모릅니다.
무슨 일을 하던 마음을 두고 의지하고 믿음을 주는 대상이 바로 신이 아닐까요?
때로 힘이 될 수도 있고, 돈이 될 수도 있고, 명예가 될 수도 있고, 나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자신의 신념이 신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만들어져 있는 생각의 틀, 구조, 확신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게 되는 것,
나를 존재하게 했고,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충만한 에너지 안에 있으면서 그것을 모른척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세운 자신의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고수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여기며 삽니다.
어쩔 수 없이 버거운 인생의 짐들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일 수도 있고,
내가 만들어 놓은 가공의 신의 그것일 수도 있습니다.
신들에 의해 겹겹이 쌓여 살아가는 실존이란
도저히 하나님을 가까이, 아니 하나님께서 가까이 올 수 없게 합니다.
그것을 끊어내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님께서 안타까움으로 내어놓으시는 부탁이며, 계명입니다.

4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과 이어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 사이에 차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앞의 문장을 부연 설명하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상을 만든다는 것은 하나의 종교가 만들어 진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숭배하는 제도가 만들어 질 것이고, 조직도 만들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첫 번째 문장에서 다른 신을 두는 것보다 한 발짝 더 앞으로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봐 줄 수 없는 꼴을 연출하는 것이죠.

이는 마치 간음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도 인정하시는 이혼 사유가 되는 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한 결별의 의사를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이후에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수렁이 바로 이 우상숭배였으니,

하나님의 입장에서 강조의 강조를 거듭해도 부족함이 없는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5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질투를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이 질투를 한다는 것이 좀 의아한 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약한 인간이나 할 만한 감정으로 질투를 하시다니...

하지만 잘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투라는 것은 시기와 다르게 사랑의 감정에서 나옵니다.

질투는 사전적으로 ‘사랑의 한 형태로서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자기 이외의 인물을 사랑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대인 감정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질투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른 존재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향해 마음을 주는 것을 참아보실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삼사 대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죄 갚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천 대까지 베푸시는 은혜가 사실은 하나님의 본심인 것이다.

하나님의 본심이 어디에 있는 지 더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7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해왔습니다.

성장 시기에 따라서 이름을 다르게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이름을 그 사람의 존재와 일치시키며 성장하고 온전해 진다고 본 듯합니다.

실재 이름보다 호를 사용한 것도 어쩌면 이름을 가벼이 부르지 않기 위함이었을지 모릅니다.

본인의 이름도 그러하기에 부모님의 이름은 거의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자식이 어떻게 부모님의 존함을 입으로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부모님의 함자를 말해야 할 때는 띄어서 한 자 한 자 말했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으로 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특별한 태도를 가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는데 너무 황공하고 송구해서 도저히 그 단어 자체를 발음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써 놓은 단어만 나오면 절을 하기도 하고,

읽지도 않고 그저 ‘네 글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계명의 말씀을 충실히 따른다는 것이 그것일까요?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며 백성들이 행하기를 바라셨던 모습이 이 것이었을까?

부모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을 때, 더 중요한 것은 그 마음에 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다함없는 존경의 마음을 그렇게라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그만큼 소중하고, 귀한 분으로 여기는 마음이 밑바탕이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을 중심에 놓고서 하나님을 장식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교회의 모습이라면,

그 안에서 온갖 수식어를 붙인 찬양과 기도를 올려 드린다 해도

마음이 없다면 망령된 모임이요, 망령된 사람들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밥 먹듯 하나님을 되 뇌이면서 그의 뜻을 내 삶을 옮겨 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망령되이 하나님의 이름을 일컫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의 이름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루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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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프로포즈

출19

4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 5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6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보다 적극적인 관계의 시작은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상 한 두 명에 의해 전승된 이야기들로 한 민족의 정체를 규정하기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본격적인 관계 형성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

마치 한 여인을 앞에 두고 청혼을 하듯 하나님은 속에 담아 두었던 말씀을 꺼내십니다.

그래서 감히 출애굽기 19장의 제목을 ‘하나님의 프로포즈’라고 붙여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해내신 구체적인 사건이 있고,

누구도 방해 할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먹을 것에 마음을 빼앗길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아침저녁으로 하늘양식을 내려 주소 계시니까요.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의 선택이 유효하게 하려면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택은 바로 율법 준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언약을 지키면 됩니다.

그들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율법 즉, 어느 민족도 가져보지 못한 하나님과 사람의 계약서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장면입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약속 체결 장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으로서의 멤버십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보호자요 소유자로서 책임을 다하시게 되는 놀라운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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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내용의 글들을 계속 올리다 보니 내 속에서부터 멀미가 나려고 한다.
그만 할까 하는 생각도 해 보지만, 뭐 매일 성경 한 장 읽고 부담없이 생각 정리해서 올리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과정이니 뭐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올리기를 계속한다.
뭐 내 맘이니깐.히히
 

하소연입니까, 간증입니까?

출애굽기 18

8 모세는 장인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신 일, 곧 바로와 이집트 사람에게 하신 모든 일과, 그들이 오는 도중에 겪은 모든 고난과, 주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건져 주셨는가 하는 것을 자세히 말하였다.

9 그러자 이드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시려고 베푸신 온갖 고마운 일을 전하여 듣고서, 기뻐하였다.


편한 사람, 가족, 친구를 만났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 놓게 마련입니다.

사소한 일부터 힘든 일, 고통스러운 일, 참을 수 없는 일 등등의 일들을 늘어놓으며 하소연을 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만두지도 않을 것이면서 그만두고 싶다느니, 떠나고 싶다느니 넋두리를 해 대겠죠.


모세는 오랜만에 장인을 만납니다.

40년이나 함께 살았으니 어쩌면 모세에겐 아버지 같은 존재이고, 흉허물이 없는 사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모세에게 있어 이드로는 편한 사람이었습니다.

집을 떠나 애굽으로 가서 지금까지 모세는 그 전까지 80년의 인생 중 그 어느 때보다 더 긴장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오랜만에 만난 장인에게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았을 까요.

애굽에서 벌어졌던 일들, 애굽을 나와서 이곳까지 오면서 있었던 일들을 열거하자면 며칠 밤낮이 걸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들을 마음 높고 터트릴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내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을 감당하고 있는데 백성들은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고 불평만 할 수 있는 것인지,

하나님은 또 나를 더 가까이 대해 주지 않으시고, 백성들을 너무 오냐오냐 하시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털어 놓을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장인을 만난 자리에서 이 모든 넋두리를 담아 하소연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들을 도우셔서 이곳까지 올 수 있었는지를 ‘간증’했습니다.

얼마나 실감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던지 이드로는 자신이 소문으로 들었던 것이 사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확신에 찬 응답이 나오게 되었고,

이드로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한 턱 내게 됩니다.


가까운 친구나, 친지를 만났을 때 답답함을 토로하며 하소연도 할 수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힘겨운 과정이지만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이끌어 주심을 간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닐까요?

이것은 패러다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의 문제란 말입니다.

어쩌면 소위 말하는 긍정의 힘이라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요?


편한 상대를 만날 때조차 중심으로부터 주체할 수 없는 간증이 쏟아져 나왔던 모세.

그는 복 받은 자임에 틀림없고, 또 그와 함께 할 백성들 또한 복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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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지키실 것입니다.

출애굽기 17

7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에서 주님께 대들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므리바라고도 하고, 또 거기에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고 해서, 그 곳의 이름을 맛사라고도 한다.


하여간 이스라엘 사람이든 오늘날의 우리든 간에

눈에 보이는 상황에만 얽매어 판단을 하는 것은 매한가지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의 전후 맥락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얘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도 쉽게 모세가 누구고,

그를 자신들 앞에 세우신 분이 누구인지에 대해 망각해 버립니다.

당연히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가 어떤 지팡인지도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죠.


어쩌면 오늘의 나는

지금 내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 고통, 실패보다

더한 어려움을 지나온 과정의 결과물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때 우리들을 넉넉하게 지켜주셨고,

오늘 나로 존재케 하신 것이란 말씀입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애굽이라는 강대국에서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살 운명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은 자유의 몸이 되어 있는 것이 놀라운 일 아닙니까?

또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기적들을 직접 목격하고도 살아 있다는 것이 또 기막힌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그런 일들을 하셨고

지금도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신비롭기까지 한 일 아닌지.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 잠시의(상대적인) 목마름으로 인해

그 이전에 자신들을 구하시고 지키셨던 분을 원망하며 불평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그래서 더 안타까움을 더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지금까지 나를 지키셨듯이 오늘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불평불만에 휩싸여 신세한탄을 하며 지내기보다는

다음 순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움직이실 지를 기대하는 쪽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장 선 지도자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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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약속=율법

출16

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항의하였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 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

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이 날마다 나가서, 그날 그날 먹을 만큼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그들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하여 보겠다.

5 매주 엿샛날에는, 거두어들인 것으로 먹거리를 준비하다 보면, 날마다 거두던 것의 두 배가 될 것이다."


우리가 평소 누군가와 소통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혹시 상대방을 무시한 채 일단 내 입장에서만 감정적으로 표현하고 보는 경우가 많지는 않은지.

특히나 가장 좋지 않는 태도가 불평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에게선 이 불평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우는 소리’를 해가며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방식도 거의 ‘우는 소리’에 가까웠습니다.

물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힘들다 등등등...

자신들을 상대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그 정도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그들은 언제나 불평으로 하나님을 코너로 몰아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일관된 선한 응답이 놀랍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일 음식을 이미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것을 받아 내는 방식이 또한 원망이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니 준비된 것을 주시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은 언짢지 않으셨을까요?

그러나 16장에서 하나님은 별로 개의치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백성들이 불평할 만하다고 여기신 것인지, 아니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곧바로 모세를 부르시고는 그들의 요청대로 고기와 떡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이 말씀을 전하는 모세가 더 노를 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별로 유쾌한 과정은 아니었지만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아침저녁으로 내리시는 하늘양식을 먹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멋진 삶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또 있겠습니까요.

물론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애환이 있겠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피부로 체험했을 테니까요.

지금 우리가 하루하루 자신의 노력으로 먹고 산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두신 것들의 한계 안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 율법을 정하십니다.

만나는 매일 1인당 한 오멜을 주을 것, 6일 째 되는 날에는 두 배로 줍고 안식일에는 쉴 것.

이렇게 하나 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 맺어가는 약속으로서의 율법은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간에 생명을 담보로 맺어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율법은 생명의 안전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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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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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고 싫고에 의해 행동을 결정할 때는 지난 것 같다.
정황을 봐서 옳다고 여겨지는 일을 해야 한다.
여러 일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부모님과 관련된 일이 그렇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부모님의 마음을 먼저 배려하고
그 분들이 서실 자리를 미리 마련해 드려야 한다.
혹시 내가 내키지 않는다고, 싫다고 해서 머뭇거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돈이 드는 일이어도 그렇고,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어도 그렇다.
자식된 도리라는 표현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내가 이루고 싶은 가족이라는 그림을 떠올려 보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 역시 나의 '기호'에 따라 가변적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상황에 따라 변덕을 부리는 것 또한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요청이 '제발 마음을 굳게 하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시험의 목적

출15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고통의 문제는 무엇일까?

왜 하나님을 잘 믿고, 더구나 그 분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어려움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실로 놀라운 일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아마 체험을 이야기 하라면 3박4일도 모자라 녹취해서 책으로라도 내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런 흥분되는 시간을 지나고 그들이 마주해야 했던 ‘현실’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들의 길은 이름만 달리할 뿐 광야의 연속이었고,

광야는 곧 결핍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수르광야를 지나며 3,4일 물의 결핍을 경험할 때 과연 그것을 신앙의 이름으로만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타는 목마름 속에서 그 입으로 한 결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하는 시간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있으셨을까?

이건 지금의 독자의 물음이기도 하지만, 그 현장에서 온 몸으로 겪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타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시험’이라고 간단히 나옵니다.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따르는지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아직 구체적인 그 무엇도 주시지 않은 상황에서 뭘 따르라는 말씀인지 다소 생뚱맞긴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들의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이 휴가를 떠나신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고통의 상황 중에서 바른 선택을 해 주기를 바라시는 마음 가득 담아서 말입니다.

다소 가혹한 감이 없진 않지만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당신의 사람들을 단련하시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달라지고, 불리해 지더라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 주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목마름의 시간이 주어질 때, 그래서 하나님의 부재가 더 느껴질 때,

오히려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것,

그래서 삶의 태도를 흐트러트리지 않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시험을 통해 이르고자 하시는 목적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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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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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백인 학교에 아메리카 인디언 자녀들이 전학을 왔습니다.
몇 개월 공부하고 나서 선생님이 "애들아, 시험 칠 준비해라" 했더니,
백인 아이들이 전부 옆에 가방을 다 올렸는데 아메리카 인디언 아이들은 둥그렇게 앉더랍니다.
"애들아, 너희들 시험 친다고 했는데 왜 둥그렇게 앉냐?"
그랬더니 그 인디언 아이들이 그러더랍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이렇게 서로 의논해서 풀라고 배웠는데요."

작은책 4월호 '엮은이가 독자에게' 중에서
 

패자에서 승자로

출14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현장에 있긴 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불완전 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실로 감격스러운 일들을 겪으며 애굽을 탈출해 나오기는 했지만

백성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가장 중요한 동기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하나님에 막연한 두려움에 모세를 따라왔을 뿐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할 만큼의 능력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앞길을 막는 홍해 앞에서 불평하며 되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들 듯

바로에겐 쫓아낸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잡아오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바로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으시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 광야에 갇혀 있다고 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애굽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단절을 위한 거대한 의식이었습니다.

홍해 사건을 통해 백성들의 기억 속에 애굽은 다시 돌아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새기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보내신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애굽을 혼쭐을 내고 나오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애굽을 자신들이 노예생활을 했던 곳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완전 무장한 애굽의 군대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볼 때

출애굽은 노예의 신분으로 쫓겨난 사건이 아닌 전쟁에서 승리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자가 됩니다.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끌어 내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하신지를 똑똑히 체험했습니다.


홍해를 건넘으로 인해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확실하게 건넌 것이고,

이제 이들에게 남은 일은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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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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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다가 보면 똑같은 문제에 대해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 중에서 극명하게 다르게 드러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고민이나 고통 등 삶의 문제들을 어떻게 상대하느냐는 것으로 나타난다.

1. 고민이나 고통을 책임과 의무로 여기고 짊어져야 한다
2. 고민이나 고통을 친구로 여기고 삶을 즐겨야 한다.

짊어지느냐, 즐기느냐는 마음에 달린 것 같다.
이제까지 짊어지는 삶이었다면, 이젠 즐기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더 어려워 보인다.
약간은 진지함의 관성이 있기에...
 

준비를 위한 준비

출13

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20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요셉에 의해 시작된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애굽생활이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70명으로 시작한 그들이 한 민족이 되어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거니와

이제는 하나님의 명실상부한 선택된 민족으로서 첫발을 내디디는 모습이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전까지는 어렴풋한 하나님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한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발걸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을 빠짐없이 실천한 사람들만이 이 대열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시작으로 일주일간의 무교절을 지킨 사람들이고,

앞으로도 매 년 반복해서 이 구원의 사건을 되새길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 절기를 지키며 자신들이 어떤 백성인지,

어떻게 자신들이 시작되었는지를 전하고 또 전할 것입니다.


주목해서 볼 일은 이들이 창세기 50장에서 요셉이 임종하며 형제들에게 명했던 일,

즉 요셉 자신의 해골을 매고 올라가라고 맹세시킨 일을 실천한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모세를 통해 이 모든 일들이 주도되고 있지만,

결국 요셉으로 시작되어 요셉으로 마무리 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치르며 보여주었던 출애굽의 밑그림이 성취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대의 행진도 아니고, 급하게 출발한 그 길이 얼마나 막막했을 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여인들, 어린이들, 노인들이 뒤 섞이고, 짐승들과 짐수레들의 행렬이

오히려 그들을 낙담하게 하지는 않았을까요?

더구나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도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그냥 앞 사람만 따라 가야 했다면 말입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 있었으니,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에서 지켜주는 것 이상으로 큰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정처 없이 버려진 것이 아닐까 싶은 마음을 크게 잡아 주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이제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준비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애굽을 떠났고, 또 그 과정에서 주변 세계에 그들의 존재가 충분히 알려져서

환경적 준비는 다 되었을지 몰라도, 정작 준비되어야 할 정신의 훈련이

광야의 시간들을 통해 시험받고, 더 단단해 지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기대감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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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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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내 몸을 따듯하게 해 주었던 옷들을 세탁을 하고, 접어서 장롱 서랍에 넣었다.
좀 섭섭하고 미안한 생각도 들지만 그렇다고 계속 밖에 걸어 둘 수는 없다.
때가 되면 들어가고 좀 더 얇은 옷가지들이 밖으로 나와야 한다.
만약 그러지 않고 따듯해진 날에도 두꺼운 겨울 옷을 입고 다닌다면
사람들의 비웃음보다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 할 거다.
계절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바꾸어 입어야 하는 데
여전히 과거의 것들을 고집하면 남들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곤란한 일이 되고 만다.
익숙하다고, 편하다고 뒤로 물러서기만 한다면 더이상 발전은 없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입고 있던 애굽이라는 옷을 6개월 동안 벗겨주려고 애쓴 것 같다.
그 결정적 순간이 바로 출애굽기 12장의 사건이 아닐까.
오늘 묵은 옷들을 꺼내 세탁을 하고 장롱에 넣으면서
옷의 변화 만큼이나 마음의 변화 또한 소망해 본다.
 

보고, 듣고, 만지다

출12

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양고기, 문설주, 무교병, 쓴 나물, 띠, 지팡이...
성경 특히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명심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있다면

성경의 말씀들이 오늘날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쓰여 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기록되었다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끔 왜 이런 것을 자세히 쓰고 있는지 의아스러울 땐 이스라엘의 후손의 마음으로 읽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는 마지막 재앙을 준비하시는데

하나님과 모세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과 함께하십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시작점을 찍으려 하시고,

또 그 시작점을 매 해 기념하며 기억하도록 하려고 하십니다.

그 기억은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직결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지시하십니다.

뭐 굳이 백성들이 이런 일들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일들을 빠짐없이 이르고 계십니다.

그냥 서둘러 재앙을 내리시고 바로로 하여금 쫓아내도록 하셔도 되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며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규정에 따라 절차를 밟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율법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이 시작, 즉 유월절의 시작은 공감각을 이용하도록 하십니다.

보고, 듣고, 만지는 생생한 경험으로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몸에 새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어떤 일을 당할 때 그 때의 그 경험을 떠올리며

자신들을 구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자신들을 구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양을 고르고, 양과 시간을 보낸 후, 그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나누어 먹고, 더불어 쓴 나물과 무교병을 먹는데,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급하게 먹어야 합니다.

누구라서 이런 장면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초월해 계시는 어떤 분으로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도 생생하게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그 모든 것을 통해

오늘도 우리들을 만나고 계시고, 그 가운데 기억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기 12장의 하나님은 더없이 강한 분이시지만 섬세한 사랑의 마음을 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매 년 유월절을 통해 전하며 기억해야 합니다.


(설교체로 바꿈, 이렇게 쓰는 것이 더 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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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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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나님을 지키는 용이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꼭 천국 가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절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3학년 꼬마가 쓴 기도문

아이들이 연초에 쓴 기도문을 정리하다 발견한 기발한 기도문이다.
하나님을 지키는 용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
하나님께서 즐거워하실 것 같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만, 언젠가 하나님을 지켜드리겠다는 동심의 순수함이 담겨있다.
 

출11

3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모세는 아무것도 없이 애굽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있는 것이라곤 늙은 몸을 의지한 지팡이와 하나님의 이끄심에도 불구하고 가득한 두려움뿐이었다.

그러나 6개월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의 손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는 이제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의 말, 몸짓이 애굽이라는 나라의 모든 사람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으로 자처하며 거드름을 피우던 바로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까지도 애굽의 백성들에게 눈여겨 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는 은금 패물을 손쉽게 얻을 수 있도록 만드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모세는 이쯤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자신을 설득해 긴 여정이 이끌어 오신 이유를 알게 되었을까.


이렇듯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할 준비가 되었지만,

여전히 바로는 처음 그 태도를 조금도 바꾸지 않고 있다.

완고함으로 오기까지 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는 바로와는 상관없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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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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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집에 도둑이 들었다.
어떻게 했는지 자물쇠 두 개를 모두 부수고 들어와서는
장롱과 서랍을 모두 열어 젖혀 두고 갔다.
결론은 도둑맞은 것이 없다는 거다.
훔쳐 갈 것이 없으니 가져 간 것도 없다.
뭔가 금붙이를 노린 것 같은데 도둑도 실망이 컸을 것 같다.
(참, 도둑 걱정을 하고 있네.)
뭔가 값비싼 것을 집에 두고 있다가 이럴 때 잃었다면
오늘 하루 동안 갑갑했겠지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다.
물론 현관 자물쇠 두 개를 모두 교체하는 비용은 들었지만.

물건에 마음을 붙여 놓았을 때 그 물건을 잃으면 마음도 잃게 되는 것 같다.
마음이 붙어버릴 만한 물건을 만들지 않는 것도 삶의 중요한 덕목이지 않을까.
좋은 경험 한건가?
유쾌하지만은 않은 경험이지만 경험을 통해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건 사실이다.
 

내가 경험하는 하나님

출10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사실 삼천년도 넘는 간극을 넘어서 출애굽기의 사건을 피부로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대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재앙사건을 보기 때문에 편협한 견해를 가질 수도 있다.

열 가지 재앙을 표현하는 것에도 조금의 과장이 있을 수 있고,

그러므로 바로가 일련의 일들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재앙이 세 개가 남았다.

그 재앙 중 메뚜기 재앙과 흑암의 재앙이 본 장에서 애굽에 내린다.

무엇이든 적당 할 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지나쳐 과하게 되면 그것은 재앙이 된다.

비가 더 많이 온다든지, 바람이 더 많이 분다든지, 병충해가 더 많으면 재앙이 된다.

농업이 모든 것의 근간이었던 시절에 우박이나 메뚜기가 조금만 더 와도

실로 큰 재앙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재앙 하나하나를 놓고 논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모든 것들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강하게 인식시키시겠다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그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조상의 하나님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들의 조상들이 경험한 하나님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들조차 경험해 보지 못한 하나님 경험을 주고 계신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주시고자 6개월여의 의식을 진행하고 계신 것이다.

그들은 몸으로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으리라.


재앙들이 애굽 전역을 강타하면서도

유독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을 때,

그리고 이 현상이 모세라는 사람에 의해 일어나기도 잦아들기도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의 변방에 있던 자신들이 역사의 중심으로,

주인공의 자리로 옮겨 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는 삶이 더없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게 하는 기간이 열 가지 재앙의 시간이었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경험하는 과정은 필수인 것 같다.


아홉 번째 재앙으로 흑암이 내린 것은 애굽의 사람들에게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는 것을 멈추고 깊이 생각하라는 하나님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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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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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더 분명하게 이야기 해 달라고 부탁한다면,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지 이미 매뉴얼로 제시되어 있다면
걱정할 것이 없을 것 같다.
특히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앞에서는 거의 속수무책이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너무도 다양하고,
그 감정이라는 것이 심하게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어떤 원리나 구조를 세우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이 상책일 때도 있다.

내가 나름대로 정한 원칙은
일단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시간이 지나 결과가 좋으면 잘한 선택이고,
결과가 좋지 못하면 반성은 하되 후회는 하지 말자는 것이다.

바로는 선택의 기로에 서서는 최악의 선택을 계속하고 있다.
나름대로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후회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무시되는 현실들 

출9

27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28 여호와께 구하여 이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성에서 나가서 곧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그리하면 우렛소리가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 아니할지라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

30 그러나 왕과 왕의 신하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모세는 신이 아니었고 사람이었다.

그가 과거에 어떤 신분이었는지를 떠나 지금은 명백하게 이스라엘 사람이고,

80살의 초라한 행색의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당시 신으로 자처하던 바로나,

그의 주변에서 호사를 누리던 그 어떤 권세가들이 가진 권위 그 이상이었다.

그들이 가졌다고 자랑하던 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바로가 끝내 회피하려는 현실, 그 현실이 진실임을 깨달았어야 했다.

어쩌면 바로는 자신을 신으로 추앙하는 거짓 현실에 휩싸여

진짜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질 때도

금방 지나가 버릴 것이라고, 눈속임이라고 자신을 속이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 명의 착각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또 하나의 현실이 무시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현재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일부 목회자들이 교회 안에서 누리는 (조금 과장해서) 절대 권력이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통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제왕적으로 누리는 힘을 현실로 여기다가

교회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비판을 부당하다고 몰아붙이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목회자들의 태도가 너무도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왜 바로를 이야기 하면서 일부 목회자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지 가슴 아프다.

나도 그 목회자들의 무리 가운데 있는 것인데...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자신을 둘러싼 인의 장막에 휩싸여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안 된다.

바로가 그 현실을 무시하고 있을 때

애굽에는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의 재앙으로

각각 가축의 죽음, 악성종기, 우박이 내려진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고센에는 내리지 않았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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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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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빼먹지 않고 쓰려고 했는데 토요일과 주일에는 아무래도 무리인듯 하다.
주일은 주일 대로, 토요일은 주일을 준비해야 하니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이 이끄는 40년이라는 거창한 주제이지만,
실은 매일 성경을 읽고 싶은 나의 작은 소망이 담긴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어줍잖은 글이라도 매일 빠짐없이 기록을 남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도 어느정도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지만,
욕심을 가지면 글을 올리는 것이 불가능해 질 것 같다.

나름 성경을 읽을 때 가지는 원칙을 정리해 보려고 하는데 그것도 여의치는 않다.
'돌소리의 직관으로 성경읽기'라고 해 볼까하는데, 말처럼 쉽지는 않다.

월요일이 다 가고 밤이 되서야 또 한 장을 마무리 한다.
 

시간의 주인

출8장

28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29 모세가 이르되 내가 왕을 떠나가서 여호와께 간구하리니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바로의 백성을 떠나려니와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하지 마소서 하고

30 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니

31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그 파리 떼가 바로와 그의 신하와 그의 백성에게서 떠나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32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초라한 행색을 한 두 노인이 전하는 말을 듣게 된 바로의 기분은 어땠을까?

혹시 강대국의 사신이 대단한 위세로 수백 수천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나타났다면,

그래서 그들이 전하는 선전포고를 접하는 자리에 있었다면 바로가 조금은 위축되었을까.

노예로 일하고 있는 자들이 보이지도 않는 자신들의 신이 자신들을 놓아주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않으셨더라도 대개의 절대 권력을 가진 왕들은 바로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뻔히 알고 계신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보내시면서 바로의 시건을 끌만한 그 어떤 것도 그들에게 덧입혀 주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선 굳이 그런 일을 하실 필요가 없으셨던 것 같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인간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할 만한 그 어떤 화려한 장식이 위세가 아닌

‘하나님의 이름’과 ‘시간’이면 충분했다.

하나님의 이름이 전해지고, 그 이름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들이 현실로 드러날 때

그 누구도, 어떤 권력도 맥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역으로 시간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 어떤 고통도, 두려운 일도 해소될 것이라고 믿는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갖고 사는 어리석은 인간의 행태이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벌어지고 있는 재앙들이 그저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약간 귀찮은 일일뿐 그것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구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조금 심하다 싶으면 그들을 불러 몇 마디 말로 달래서 중지 시키고,

또 그렇게 그 재앙이 멈추면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다.

어떤 다급한 일이 있을 땐 달려와 무릎 꿇고 눈물범벅이 되어 기도하지만

그 일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나가 버리면 또 등 돌리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크리스천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이렇게 바로가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향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의 재앙을 각각 개구리, 이, 파리로 내리신다.

하나님의 각본대로 바로는 재앙을 모면하기 위해서 모세와의 대화를 시도할 뿐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는 일으키지 않는다.

자신들이 따라 할 수 없을 때에야 그나마 하나님을 인정하는 술객들이 어쩌면 그래도 지혜로운 것이다.


이런 시간의 과정을 통해 조금씩 하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 족속들의 마음속에 크게 자라고,

애굽의 백성들의 기억 속에 새겨지고, 주변의 나라들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가공할 재앙이 네 번째에 들어서면서 고센 땅이 구별된다는 것이 또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을까?

이스라엘 족속들은 이제 자신들에게 임한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기만 하는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자신들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몸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분명하게 보고, 깨달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모세에 대한 신뢰가 더욱 확고해 지고, 그가 명하는 것을 조금도 빠뜨림 없이 따르게 된다.

모세에 대한 믿음은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직결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당신의 백성 삼으시려는 계획을 쉬지 않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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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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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이유


출7장
8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 바로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말하기를 너의 지팡이를 들어서 바로 앞에 던지라 하라 그것이 뱀이 되리라

10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며 일을 시작하신 것도 답답한 일인데,

그를 통해 일을 해 가시는 과정은 답답하다 못해 한심해 보인다.

대개 우리는 출애굽기의 이 부분을 읽으며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찬양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어디 하나님이 그런 재앙을 내리셔야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셔도 된다.

왜? 하나님이시니까.

오히려 ‘짜잔’하며 단칼에 무 자르듯 깔끔하게 처리해 버리시고는

별 일 아니었다고 말씀하시는 모습이 더 좋지 않을까.

뭐 하러 자신 없어하는 모세를 설득하고,

여전히 거리를 두고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며

6개월이라는 시간을 지속한다는 말인가?

그러니 답답하다 못해 한심해 보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애굽을 상대로,

아니 한 인간인 바로를 상대로 수개월에 걸친 지루한 싸움을 시작하신다.

말을 해 놓고 보니 ‘싸움’이라는 것도 말이 안 된다.

한 인간과 하나님이 싸움을 하다니.

하나님의 일방적인 후려치심이라고 하면 더 맞을 것 같다.

이 일련의 과정의 목적이 하나님의 이김에 있지는 않은 것 같다.

핵심은 하나님께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에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존감의 문제이다.

100년도 더 넘게 고통을 당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존재감을 상실한 상태였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왜 이 곳에 있는 지에 대한 질문조차 망각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을 이끌고 나가서 다른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다고 해도

그들의 나약한 의식이 그들 스스로를 버텨내지 못하게 만들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히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하는 시간만큼, 아니 그 이상 고심하시고 준비하신 일이다.

도와주시려는 것이고, 기억에 남겨 주시려는 것이다.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시는 것이고,

그들의 마음속에 꽉 막혀 있는 한을 풀어 주시는 것이다.


그럼 억울한 애굽의 백성들은 어떻게 하나?

잘 살펴보면 그들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재앙은 때로 예고되었고, 그래서 그에 따른 준비를 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기도 했다.

특히 열 번째 재앙은 피해갈 방법이 있음을 그들은 소문(언론?)을 통해 들었을 것이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지 않을 수도 있었다.

늘 듣지 않는 마음이 이스라엘 백성이든 애굽 백성이든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펼치시는 역사!

모세의 지팡이가 바닥에 던져질 때 어떤 소리가 났을까?

쨍? 탁? 턱? 텅? 쿵? 딱? 척? 짝?

그 소리가 어떻든지

바로와 그 신하들은 이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어야 했다.

만약 그렇다면 새로운 ‘시작’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절망적 ‘끝’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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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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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을 따르기 보다는 인정을 따르는 것이 더 좋다.
왜냐면 일을 하면서도 사람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간적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만,
정작 공적인 일을 처리하는 데는 결격일 수 밖에 없다.
원칙도 지키면서 사람들의 형편도 배려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인정을 따르는 것도 나름 원칙은 있는 거다. '사람'이라는 원칙이다.
그러니 사람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 나조차도 종잡을 수가 없어 때로 힘겨울 때도 있다.
이것도 저것도 시원하지 못하다.
그런 면에서 모세의 온유함은 원칙과 인정을 적절하게 사용한 데서 오는 것 같다.
그러나 모세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모세에게조차 그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모세의 고뇌, 그것은 그 양쪽 가운데서 외줄타기의 긴장이 아니었을까?
나도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중심을 잘 잡아야겠다.
 

위치 파악하기

출6장

16 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들의 족보대로 이러하니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요 레위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18 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고핫의 나이는 백삼십삼 세였으며

20 아므람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26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성경에는 이야기를 전개해 가는 가운데 종종 족보를 등장시킨다.

누가 누구를 낳고를 반복하는 것이 지루하고 따분한 부분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족보가 나오면 그냥 넘어가고 싶어 한다(예, 마1).

그런데 성경을 쓴 사람들은 왜 족보를 중요한 자리에 놓고 있을까?

다른 곳에 있는 것은 그 때 이야기를 하고라도

출애굽기 6장에 나오는 짧은 족보는 무슨 의도, 의미일까?


5장까지 모세의 활동이 워밍업이었다면 6장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또 족보 앞부분에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일의 무게를 짐작케 할 만한 ‘하나님의 출사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하나님의 출사표 다음에 등장하는 족보는 그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떠안고 진행시켜야 하는 사람이 모세인데,

그 모세라는 한 ‘사람’을 소개하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모세의 위치를 분명히 하려하시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족보를 사용해 자신을 더 부각시키려 한다.

자신의 혈통의 우월감을 표시하거나,

출세한 자신으로 인해 별 볼일 없는 집안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등장한 족보의 의도는 모세가 당면한, 그리고 그가 책임질 일의 크기로 모세를 보지 말 것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셋째 아들 레위의 후손이고,

그의 할아버지는 고핫이며, 아버지는 아므람이라는 것이다.

모세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초인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 중 한 명이라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조상이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

그런 관계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모세 한 사람을 주목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한 사람과 함께 동역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출애굽기를 읽고 있는 독자들 역시 오해 하지 말기를 바라는 당부인 것이다.


위치...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지혜이다.

어떤 일을 맡게 되었을 때, 그 자리까지 자신이 오게 된 과정과

자신이 참여하게 된 일이 그 때까지 이어져 온 과정을 아는 것은 너무 중요하다.

어쩌면 모세는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이와 같은 마음 자세로 지혜롭게 대처했던 것 같다.

모세라는 걸출한 한 인물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결국 이 일을 이룰 것이라는 소망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인해 모세는 무거운 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소신 있게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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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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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 한국코치협회에서 월 초에 진행하는 코칭카페에 다녀왔다.
코칭이나, 코칭과 관련된 정보를 나누면서 코칭 스킬을 업 시킬 수 있도록 하는 자리다.
엑션 러닝이라는 것을 배웠고, 그 도구로 포스트잇을 사용한 브레인 라이팅을 경험하게 됐다.
교회에서 생활하다 보면 나 혼자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중요한 이유는 선생님들이나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이 너무 짧은 데 있다.
그런데 브레인 라이팅을 사용하면 짧은 시간에 여러 사람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결론까지 도출해 낼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이런 점이 약간 흥분하게 했다.
이와 같은 창의적 방법들을 모르고 일방통행적 소통만을 해 온 것도 반성을 했고,
당장 이 번 주에 응용해서 한 번 해 보기로 했다.

어쩌면 출애굽기 이하를 통해 만나는 모세는 듣는 것을 잘 한 지도자인 것 같다.
그는 말 뿐만 아니라 마음도 잘 읽었다.
백성들의 아픈 마음을 넘어 하나님의 깊은 속내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더 낮추어 하나님께서 행하시도록 했고,
백성들의 부당한 원망과 분을 최선의 태도로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선생님들의 마음, 아이들의 마음,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고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텐데...
어떻게? 잘!
 

절망에서 희망으로 

출5장

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이미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면서 바로의 반응을 예견하셨다.

바로라는 세상 권력, 혹은 사악한 세력은

그들이 맞닥뜨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가르침이나 교훈을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면서 갖은 수단을 강구하여 저지하려 한다.

모세는 그 첫 저항에 봉착한 것이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요사이 교회가 사회를 향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

모세가 전하는 하나님의 뜻과 같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이단, 즉 정통에서 끝이 다른 집단을 부르는 말인데,

때때로 교회의 지도자들의 태도를 볼 때 이단이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교리상의 다름을 떠나 그들이 취하는 말과 행동의 끝이 하나님의 그것과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한다는 그 일의 과정을 통해 결과적으로 자신의 잇속을 차리게 된다면,

자신이 힘을 얻고, 영향력을 증대해서 자기의 뜻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것이 이단이 아닐까.

그래서 ‘교회 속 이단’이라는 말을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지도자들을 생각할 때 모세라는 지도자는 그들과 정 반대의 자리에 서 있다.


자신이 지도자의 자리에 서기를 한사코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든든한 백을 뒤에 두고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힘들어 한다.

혹 자신이 하나님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누가 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를 상대하는 일이 말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당장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노역을 보며 모세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인지, 오히려 더 고통만 늘어나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 때로 그 일이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현실을 배제한 채 밀어붙이는 것은 폭력일 수 있다.

마치 그 요구를 따르는 것이 신앙적인 것이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불신앙인 양 몰아붙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모세의 태도가 그랬다.

이후에도 드러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이끄심에 맞추어 백성들을 인도하기도 하지만,

백성들이 그 보조를 맞추지 못할 때는 백성들을 등지고 하나님께 그들을 살펴 달라는 호소를 한다.


그렇기에 백성들뿐만 아니라 모세에게 있어 출애굽기 5장의 공기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이제 희망을 보는 것은

이제까지는 바로가 상대한 것이 이스라엘 족속이었다면,

이제 비로소 바로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직접 상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그 결말은 너무도 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그 기간을 참아 기다릴 수 있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그래서 현 상황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이 오히려 더 악화 일로에 있지만

변화의 기운이 느껴지는 가슴 벅찬 장면들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고역이 심각하게 가중되고 있지만 이것이 바닥임을,

더 내려가지 않고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것을 안다면

절망의 신음을 더하는 것이 아닌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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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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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40년은 시작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설득하시는, 그
에게 40년(물론 그 때는 40년이 될 줄은 몰랐지만)을 맡기시려고 하시는 긴박한 장면이 이어지고 있다.

성경의 몇 구절을 뽑고, 또 앞뒤의 이야기를 엮어서 생각을 정리하면서
불현듯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면 되는 것을 어줍잖게 내 생각으로 정리는 하려 하는 것이 말이다.
더구나 써 놓고 읽어 보면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는 질문이 나올 법한
내가 정말 싫어하는 투의 글이 되어 있으니 더욱 그렇다.
'기발하다'라는 평가를 듣고 싶지만 그것도 웃기는 발상이고,

쯧쯧

그래도 한 걸을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뭔가 시야가 생길 것이라 여기며
잘 보이지 않는 저 만치로 생각의 뭉치들을 던져 본다.
언젠가 예기치 않을 때, 나에게 진실로 필요한 어느 때 문득 곁에 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르니까.

 

가능성의 하나님

출4:13-17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모세는 자신을 히브리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왕자의 신분임에도 히브리인 동족을 돕기 위해 애굽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우발적인 사건이었다고 하더라도 모세의 의식 속에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일이 자신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자 도망했고, 광야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다.

그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은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양을 치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실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맡기고 계시니

놀라고, 거절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거부의 주된 이유는 ‘나’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를 믿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말을 못한다.

이미 자신의 능력으로 뭔가를 해 보려했던 일이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다

지금은 자신이 자신 안에 의지할 어떤 부분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자신을 자기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 자기를 잘 알까?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잘 통제하며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크게 오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조절하지도, 최선의 대안으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것이 사람들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가장 잘 아신다는 것까지 모른 척 하며,

내버려 두라고 큰 소리를 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만을 가질 수 있다면... No Problem!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다시 일어 설 수 있고, 나아 갈 수 있고, 말 할 수 있고,

인내 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로 설득하신다.

그가 기대어 살아왔던 지팡이가 변하여 뱀이 되고,

지팡이를 잡았던 손에 문둥병이 발하고 고쳐지는 기적을 보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곁에 계시다는 뜻이고, 함께 할 것이라는 강한 메시지였다.

그럼에도 패배주의에 빠져 저항하는 모세는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면서 까지 강권하실 때 비로소 일어선다.

40년 전에는 자신이 뭔가를 해 보려고 했었다면, 이제는 철저히 자신 없음을 경험하고 난 후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힘으로 일어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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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가 가득한 날, 햇살이 방안으로 가득히 들어온다.
새벽기도회를 가려고 했으나 4시에 순간 눈을 떴다가 시간만 확인하고 자는 바람에 9시가 넘어서 일어났다.
그래도 선생님들과 문자를 주고받기로한 약속 덕분에 날라온 문자가 나를 맞아 주었다.
'하나님은 예배의 전통이 아닌 열정과 헌신으로 감동받으신다' p87 황사 조심하세용^^
나의 답은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예배다' p89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시길 황사가 아닌
ㅎㅎ

너무 잘 알고 있는 이야기에서는 그 안에서 새로운 메시지를 찾아 내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냥 나름대로의 생각을 적어 본다. 부족하지만 ㅋㅋ
 

과정의 하나님

출3:2-4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울부짖음을 들으시면서도 80년이나 모세를 기다리셨다.

애굽 왕궁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아마도 모세는 이제 자신의 때,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할 충분한 시간이 찼을 때였다.

그는 그저 양을 치는 목동으로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에게 오래 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일들을 함께 하자고 말씀하신다.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이제 다 늙어서 힘도 없는 사람을 찾아오셔서 무언가를 하자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말이다.

하나님은 늘 이런 식으로 일하시는가?

연약한 여인들인 두 명의 히브리 산파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도 그렇고,

가족에게 버림받고 타국에서 홀로 생고생을 하는 요셉을 통해 일하시는 것도 그렇고.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며, 가장 탁월한 점일 수도 있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길을 택하시는 것이고, 결국 가장 뛰어난 결과로 이끌어 가신다.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만의 독특한 방법!


사실 하나님은 당신이 보여 주실 수 있는 그 어떤 기막힌 기적들 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모세 한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온전해 지는 것이

뭔가 기적들을 보며 홀린 듯이 하나님을 좇는 것 보다 더 선호하신다는 것이다.

때로 힘겹고, 고통스러울지라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한 사람의 존재를 더 귀하고 소중하게 보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디지만 이 길을 선택하시고,

오늘도 모세와 잘 통하지 않는 대화를 시도하고 계신다.

아무튼 하나님은 이 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실 것이다.

모세 또한 불붙은 가시떨기라는 놀라운 광경에 이끌리기는 했으나,

결국 진솔한 하나님과 직면하면서 이제까지 가져왔던 자신의 그릇된 하나님 이해를 수정해 간다.


만약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강압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니 따르라는 식으로 이끌었다면

이후 40년의 광야 생활동안 모세가 백성들의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한 공격들을 참고 이겨낼 수 있었을까.

하나님은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 지 분명하게 아셨고,

그렇기에 하나님과 어울리지도 않고, 어리석게까지 보이는 과정을 기꺼이 치르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정을 생략한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그들의 마음을 홀려서 단기간에 현격한 결과를 얻고 싶어 한다.

너무 성급하고, 너무 가볍고, 너무 얕은 수를 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크신 하나님, 능력이 충만한 하나님께서 모세를 설득하는 장면은 그런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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