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집에 도둑이 들었다.
어떻게 했는지 자물쇠 두 개를 모두 부수고 들어와서는
장롱과 서랍을 모두 열어 젖혀 두고 갔다.
결론은 도둑맞은 것이 없다는 거다.
훔쳐 갈 것이 없으니 가져 간 것도 없다.
뭔가 금붙이를 노린 것 같은데 도둑도 실망이 컸을 것 같다.
(참, 도둑 걱정을 하고 있네.)
뭔가 값비싼 것을 집에 두고 있다가 이럴 때 잃었다면
오늘 하루 동안 갑갑했겠지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다.
물론 현관 자물쇠 두 개를 모두 교체하는 비용은 들었지만.

물건에 마음을 붙여 놓았을 때 그 물건을 잃으면 마음도 잃게 되는 것 같다.
마음이 붙어버릴 만한 물건을 만들지 않는 것도 삶의 중요한 덕목이지 않을까.
좋은 경험 한건가?
유쾌하지만은 않은 경험이지만 경험을 통해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건 사실이다.
 

내가 경험하는 하나님

출10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사실 삼천년도 넘는 간극을 넘어서 출애굽기의 사건을 피부로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대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재앙사건을 보기 때문에 편협한 견해를 가질 수도 있다.

열 가지 재앙을 표현하는 것에도 조금의 과장이 있을 수 있고,

그러므로 바로가 일련의 일들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재앙이 세 개가 남았다.

그 재앙 중 메뚜기 재앙과 흑암의 재앙이 본 장에서 애굽에 내린다.

무엇이든 적당 할 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지나쳐 과하게 되면 그것은 재앙이 된다.

비가 더 많이 온다든지, 바람이 더 많이 분다든지, 병충해가 더 많으면 재앙이 된다.

농업이 모든 것의 근간이었던 시절에 우박이나 메뚜기가 조금만 더 와도

실로 큰 재앙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재앙 하나하나를 놓고 논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모든 것들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강하게 인식시키시겠다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그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조상의 하나님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들의 조상들이 경험한 하나님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들조차 경험해 보지 못한 하나님 경험을 주고 계신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주시고자 6개월여의 의식을 진행하고 계신 것이다.

그들은 몸으로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으리라.


재앙들이 애굽 전역을 강타하면서도

유독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을 때,

그리고 이 현상이 모세라는 사람에 의해 일어나기도 잦아들기도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의 변방에 있던 자신들이 역사의 중심으로,

주인공의 자리로 옮겨 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는 삶이 더없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게 하는 기간이 열 가지 재앙의 시간이었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경험하는 과정은 필수인 것 같다.


아홉 번째 재앙으로 흑암이 내린 것은 애굽의 사람들에게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는 것을 멈추고 깊이 생각하라는 하나님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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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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