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의 이유


출7장
8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 바로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말하기를 너의 지팡이를 들어서 바로 앞에 던지라 하라 그것이 뱀이 되리라

10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며 일을 시작하신 것도 답답한 일인데,

그를 통해 일을 해 가시는 과정은 답답하다 못해 한심해 보인다.

대개 우리는 출애굽기의 이 부분을 읽으며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찬양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어디 하나님이 그런 재앙을 내리셔야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셔도 된다.

왜? 하나님이시니까.

오히려 ‘짜잔’하며 단칼에 무 자르듯 깔끔하게 처리해 버리시고는

별 일 아니었다고 말씀하시는 모습이 더 좋지 않을까.

뭐 하러 자신 없어하는 모세를 설득하고,

여전히 거리를 두고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며

6개월이라는 시간을 지속한다는 말인가?

그러니 답답하다 못해 한심해 보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애굽을 상대로,

아니 한 인간인 바로를 상대로 수개월에 걸친 지루한 싸움을 시작하신다.

말을 해 놓고 보니 ‘싸움’이라는 것도 말이 안 된다.

한 인간과 하나님이 싸움을 하다니.

하나님의 일방적인 후려치심이라고 하면 더 맞을 것 같다.

이 일련의 과정의 목적이 하나님의 이김에 있지는 않은 것 같다.

핵심은 하나님께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에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존감의 문제이다.

100년도 더 넘게 고통을 당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존재감을 상실한 상태였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왜 이 곳에 있는 지에 대한 질문조차 망각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을 이끌고 나가서 다른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다고 해도

그들의 나약한 의식이 그들 스스로를 버텨내지 못하게 만들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히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하는 시간만큼, 아니 그 이상 고심하시고 준비하신 일이다.

도와주시려는 것이고, 기억에 남겨 주시려는 것이다.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시는 것이고,

그들의 마음속에 꽉 막혀 있는 한을 풀어 주시는 것이다.


그럼 억울한 애굽의 백성들은 어떻게 하나?

잘 살펴보면 그들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재앙은 때로 예고되었고, 그래서 그에 따른 준비를 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기도 했다.

특히 열 번째 재앙은 피해갈 방법이 있음을 그들은 소문(언론?)을 통해 들었을 것이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지 않을 수도 있었다.

늘 듣지 않는 마음이 이스라엘 백성이든 애굽 백성이든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펼치시는 역사!

모세의 지팡이가 바닥에 던져질 때 어떤 소리가 났을까?

쨍? 탁? 턱? 텅? 쿵? 딱? 척? 짝?

그 소리가 어떻든지

바로와 그 신하들은 이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어야 했다.

만약 그렇다면 새로운 ‘시작’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절망적 ‘끝’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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