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을 오늘부터 한 장씩 읽어보려 한다. 물론 읽다보면 뛰어뛰엄 읽을 수도 있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겠지만, 암튼 바울이 쓴 서신의 연대적 순서에 따라 데살로니가 전서 부터 읽는다.

<바울서신의 대략적 집필 순서>
살전(50년), 살후(50년대 혹은1세기 말), 갈(54,55), 고전(54,55), 고후(55,56), 롬(56), 엡(60,80), 골(56-58,58-60), 빌(53-55, 56-58), 몬(불확실...), 딤전(60년대, 2세기초), 딛(60년대, 2세기초), 딤후(60년대, 2세기초)

바울서신01_살전 1:1-23

살전 1:9-10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아들이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는지...

과거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물리적 환경은 복잡했지만,
정서적으로는 명쾌했던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향하던 시선을 하나님으로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여러가지 방해와 저항 요소들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대상은 확실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우상이라는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내재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우상은 우리 생활 곳곳에 침투해 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만연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학벌에 대한 우상화
돈에 대한 우상화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우상화
인기에 대한 우상화

이런 것들이 오히려 더욱 우리의 삶과 정신을 좀 먹고 지배하고
급기야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함정에 빠뜨려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아들이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삶의 양태를 송두리체 바꾼 것을 의미한다.
우상이라는 것은 그 지역 토착 문화를 뜻하고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은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인데
그것을 버렸다는 것은 지역적 소속감의 박탈
혹은 가족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기꺼이 그 선택을 했다는 것은 실로 혁명적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부분에서 이 선교, 복음의 전파의 일이 사람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어찌 사람의 힘과 노력으로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성령이 감동하고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믿음 역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임에 분명하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합당한 자세이다.

더 나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지금까지 바라고(vision) 살던 것들에서 떠나
새로운 바라봄, 기다림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재림)이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지금 강한 힘으로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의 종국,
그것들 위에 최후 승자로 서실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것으로
이제는 그 이전의 것들에 연연하여 휘둘리지 않고 더 분명한 삶의 지표, 방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버리고, 돌아와 기다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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