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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을 따르기 보다는 인정을 따르는 것이 더 좋다.
왜냐면 일을 하면서도 사람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간적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만,
정작 공적인 일을 처리하는 데는 결격일 수 밖에 없다.
원칙도 지키면서 사람들의 형편도 배려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인정을 따르는 것도 나름 원칙은 있는 거다. '사람'이라는 원칙이다.
그러니 사람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 나조차도 종잡을 수가 없어 때로 힘겨울 때도 있다.
이것도 저것도 시원하지 못하다.
그런 면에서 모세의 온유함은 원칙과 인정을 적절하게 사용한 데서 오는 것 같다.
그러나 모세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모세에게조차 그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모세의 고뇌, 그것은 그 양쪽 가운데서 외줄타기의 긴장이 아니었을까?
나도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중심을 잘 잡아야겠다.
 

위치 파악하기

출6장

16 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들의 족보대로 이러하니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요 레위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18 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고핫의 나이는 백삼십삼 세였으며

20 아므람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26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성경에는 이야기를 전개해 가는 가운데 종종 족보를 등장시킨다.

누가 누구를 낳고를 반복하는 것이 지루하고 따분한 부분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족보가 나오면 그냥 넘어가고 싶어 한다(예, 마1).

그런데 성경을 쓴 사람들은 왜 족보를 중요한 자리에 놓고 있을까?

다른 곳에 있는 것은 그 때 이야기를 하고라도

출애굽기 6장에 나오는 짧은 족보는 무슨 의도, 의미일까?


5장까지 모세의 활동이 워밍업이었다면 6장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또 족보 앞부분에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일의 무게를 짐작케 할 만한 ‘하나님의 출사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하나님의 출사표 다음에 등장하는 족보는 그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떠안고 진행시켜야 하는 사람이 모세인데,

그 모세라는 한 ‘사람’을 소개하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모세의 위치를 분명히 하려하시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족보를 사용해 자신을 더 부각시키려 한다.

자신의 혈통의 우월감을 표시하거나,

출세한 자신으로 인해 별 볼일 없는 집안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등장한 족보의 의도는 모세가 당면한, 그리고 그가 책임질 일의 크기로 모세를 보지 말 것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셋째 아들 레위의 후손이고,

그의 할아버지는 고핫이며, 아버지는 아므람이라는 것이다.

모세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초인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 중 한 명이라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조상이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

그런 관계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모세 한 사람을 주목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한 사람과 함께 동역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출애굽기를 읽고 있는 독자들 역시 오해 하지 말기를 바라는 당부인 것이다.


위치...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지혜이다.

어떤 일을 맡게 되었을 때, 그 자리까지 자신이 오게 된 과정과

자신이 참여하게 된 일이 그 때까지 이어져 온 과정을 아는 것은 너무 중요하다.

어쩌면 모세는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이와 같은 마음 자세로 지혜롭게 대처했던 것 같다.

모세라는 걸출한 한 인물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결국 이 일을 이룰 것이라는 소망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인해 모세는 무거운 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소신 있게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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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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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 한국코치협회에서 월 초에 진행하는 코칭카페에 다녀왔다.
코칭이나, 코칭과 관련된 정보를 나누면서 코칭 스킬을 업 시킬 수 있도록 하는 자리다.
엑션 러닝이라는 것을 배웠고, 그 도구로 포스트잇을 사용한 브레인 라이팅을 경험하게 됐다.
교회에서 생활하다 보면 나 혼자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중요한 이유는 선생님들이나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이 너무 짧은 데 있다.
그런데 브레인 라이팅을 사용하면 짧은 시간에 여러 사람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결론까지 도출해 낼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이런 점이 약간 흥분하게 했다.
이와 같은 창의적 방법들을 모르고 일방통행적 소통만을 해 온 것도 반성을 했고,
당장 이 번 주에 응용해서 한 번 해 보기로 했다.

어쩌면 출애굽기 이하를 통해 만나는 모세는 듣는 것을 잘 한 지도자인 것 같다.
그는 말 뿐만 아니라 마음도 잘 읽었다.
백성들의 아픈 마음을 넘어 하나님의 깊은 속내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더 낮추어 하나님께서 행하시도록 했고,
백성들의 부당한 원망과 분을 최선의 태도로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선생님들의 마음, 아이들의 마음,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고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텐데...
어떻게? 잘!
 

절망에서 희망으로 

출5장

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이미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면서 바로의 반응을 예견하셨다.

바로라는 세상 권력, 혹은 사악한 세력은

그들이 맞닥뜨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가르침이나 교훈을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면서 갖은 수단을 강구하여 저지하려 한다.

모세는 그 첫 저항에 봉착한 것이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요사이 교회가 사회를 향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

모세가 전하는 하나님의 뜻과 같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이단, 즉 정통에서 끝이 다른 집단을 부르는 말인데,

때때로 교회의 지도자들의 태도를 볼 때 이단이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교리상의 다름을 떠나 그들이 취하는 말과 행동의 끝이 하나님의 그것과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한다는 그 일의 과정을 통해 결과적으로 자신의 잇속을 차리게 된다면,

자신이 힘을 얻고, 영향력을 증대해서 자기의 뜻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것이 이단이 아닐까.

그래서 ‘교회 속 이단’이라는 말을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지도자들을 생각할 때 모세라는 지도자는 그들과 정 반대의 자리에 서 있다.


자신이 지도자의 자리에 서기를 한사코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든든한 백을 뒤에 두고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힘들어 한다.

혹 자신이 하나님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누가 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를 상대하는 일이 말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당장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노역을 보며 모세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인지, 오히려 더 고통만 늘어나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 때로 그 일이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현실을 배제한 채 밀어붙이는 것은 폭력일 수 있다.

마치 그 요구를 따르는 것이 신앙적인 것이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불신앙인 양 몰아붙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모세의 태도가 그랬다.

이후에도 드러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이끄심에 맞추어 백성들을 인도하기도 하지만,

백성들이 그 보조를 맞추지 못할 때는 백성들을 등지고 하나님께 그들을 살펴 달라는 호소를 한다.


그렇기에 백성들뿐만 아니라 모세에게 있어 출애굽기 5장의 공기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이제 희망을 보는 것은

이제까지는 바로가 상대한 것이 이스라엘 족속이었다면,

이제 비로소 바로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직접 상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그 결말은 너무도 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그 기간을 참아 기다릴 수 있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그래서 현 상황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이 오히려 더 악화 일로에 있지만

변화의 기운이 느껴지는 가슴 벅찬 장면들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고역이 심각하게 가중되고 있지만 이것이 바닥임을,

더 내려가지 않고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것을 안다면

절망의 신음을 더하는 것이 아닌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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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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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40년은 시작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설득하시는, 그
에게 40년(물론 그 때는 40년이 될 줄은 몰랐지만)을 맡기시려고 하시는 긴박한 장면이 이어지고 있다.

성경의 몇 구절을 뽑고, 또 앞뒤의 이야기를 엮어서 생각을 정리하면서
불현듯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면 되는 것을 어줍잖게 내 생각으로 정리는 하려 하는 것이 말이다.
더구나 써 놓고 읽어 보면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는 질문이 나올 법한
내가 정말 싫어하는 투의 글이 되어 있으니 더욱 그렇다.
'기발하다'라는 평가를 듣고 싶지만 그것도 웃기는 발상이고,

쯧쯧

그래도 한 걸을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뭔가 시야가 생길 것이라 여기며
잘 보이지 않는 저 만치로 생각의 뭉치들을 던져 본다.
언젠가 예기치 않을 때, 나에게 진실로 필요한 어느 때 문득 곁에 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르니까.

 

가능성의 하나님

출4:13-17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모세는 자신을 히브리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왕자의 신분임에도 히브리인 동족을 돕기 위해 애굽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우발적인 사건이었다고 하더라도 모세의 의식 속에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일이 자신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자 도망했고, 광야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다.

그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은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양을 치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실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맡기고 계시니

놀라고, 거절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거부의 주된 이유는 ‘나’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를 믿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말을 못한다.

이미 자신의 능력으로 뭔가를 해 보려했던 일이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다

지금은 자신이 자신 안에 의지할 어떤 부분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자신을 자기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 자기를 잘 알까?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잘 통제하며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크게 오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조절하지도, 최선의 대안으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것이 사람들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가장 잘 아신다는 것까지 모른 척 하며,

내버려 두라고 큰 소리를 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만을 가질 수 있다면... No Problem!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다시 일어 설 수 있고, 나아 갈 수 있고, 말 할 수 있고,

인내 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로 설득하신다.

그가 기대어 살아왔던 지팡이가 변하여 뱀이 되고,

지팡이를 잡았던 손에 문둥병이 발하고 고쳐지는 기적을 보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곁에 계시다는 뜻이고, 함께 할 것이라는 강한 메시지였다.

그럼에도 패배주의에 빠져 저항하는 모세는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면서 까지 강권하실 때 비로소 일어선다.

40년 전에는 자신이 뭔가를 해 보려고 했었다면, 이제는 철저히 자신 없음을 경험하고 난 후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힘으로 일어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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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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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가 가득한 날, 햇살이 방안으로 가득히 들어온다.
새벽기도회를 가려고 했으나 4시에 순간 눈을 떴다가 시간만 확인하고 자는 바람에 9시가 넘어서 일어났다.
그래도 선생님들과 문자를 주고받기로한 약속 덕분에 날라온 문자가 나를 맞아 주었다.
'하나님은 예배의 전통이 아닌 열정과 헌신으로 감동받으신다' p87 황사 조심하세용^^
나의 답은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예배다' p89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시길 황사가 아닌
ㅎㅎ

너무 잘 알고 있는 이야기에서는 그 안에서 새로운 메시지를 찾아 내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냥 나름대로의 생각을 적어 본다. 부족하지만 ㅋㅋ
 

과정의 하나님

출3:2-4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울부짖음을 들으시면서도 80년이나 모세를 기다리셨다.

애굽 왕궁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아마도 모세는 이제 자신의 때,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할 충분한 시간이 찼을 때였다.

그는 그저 양을 치는 목동으로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에게 오래 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일들을 함께 하자고 말씀하신다.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이제 다 늙어서 힘도 없는 사람을 찾아오셔서 무언가를 하자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말이다.

하나님은 늘 이런 식으로 일하시는가?

연약한 여인들인 두 명의 히브리 산파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도 그렇고,

가족에게 버림받고 타국에서 홀로 생고생을 하는 요셉을 통해 일하시는 것도 그렇고.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며, 가장 탁월한 점일 수도 있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길을 택하시는 것이고, 결국 가장 뛰어난 결과로 이끌어 가신다.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만의 독특한 방법!


사실 하나님은 당신이 보여 주실 수 있는 그 어떤 기막힌 기적들 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모세 한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온전해 지는 것이

뭔가 기적들을 보며 홀린 듯이 하나님을 좇는 것 보다 더 선호하신다는 것이다.

때로 힘겹고, 고통스러울지라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한 사람의 존재를 더 귀하고 소중하게 보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디지만 이 길을 선택하시고,

오늘도 모세와 잘 통하지 않는 대화를 시도하고 계신다.

아무튼 하나님은 이 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실 것이다.

모세 또한 불붙은 가시떨기라는 놀라운 광경에 이끌리기는 했으나,

결국 진솔한 하나님과 직면하면서 이제까지 가져왔던 자신의 그릇된 하나님 이해를 수정해 간다.


만약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강압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니 따르라는 식으로 이끌었다면

이후 40년의 광야 생활동안 모세가 백성들의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한 공격들을 참고 이겨낼 수 있었을까.

하나님은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 지 분명하게 아셨고,

그렇기에 하나님과 어울리지도 않고, 어리석게까지 보이는 과정을 기꺼이 치르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정을 생략한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그들의 마음을 홀려서 단기간에 현격한 결과를 얻고 싶어 한다.

너무 성급하고, 너무 가볍고, 너무 얕은 수를 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크신 하나님, 능력이 충만한 하나님께서 모세를 설득하는 장면은 그런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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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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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자료로 예전에 교사 경건회 때 나름대로 써 둔 것이 있다.
원래 자기가 쓴 글을 좀 다시 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기 때문에 이리저리 수정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다 보니 오히려 새로 쓰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
하지만 나름 정리를 할 수 있어 재미있다.
단점은 간략했던 것에 자꾸 말을 붙이는 바람에 길어진다는 거다.
 

출2:24,25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은 천년을 하루같이 여기시기도 하지만 하루를 천년같이 여기실 수 있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백여 년의 기간은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고스란히 당신의 것으로 가져가실 수 있는 분이라는 뜻도 된다.

요셉이 죽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애굽을 다스릴 때

아마도 그들은 보호자를 잃은 상실감을 맞봐야 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족속들은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속의 하나님은 알고 있었으나

제대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방법을 알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양적으로는 충분히 늘어났지만 질적으로는 아직 부족한 상태였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본다면 이 위기를 타개하는 것은 아주 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상황을 모두 다 알고 있으셨음에도

마치 아무 것도 모르시는 것처럼 또다시 수십 년을 더 보내시는 것을 보게 된다.

누가 봐도 곧바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그들을 구해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잠자코 계신다. 한 사람이 준비될 때까지.

그 한 사람, 하나님의 대안은 모세였고, 큰 인내심으로 그를 기다리신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계획하신 일들을 실현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사람이 없으면 일하실 수 없는 분이다.

그래서 감히 하나님을 ‘무능한 전능자’라고 부른다.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면 하염없이 무능할 수밖에 없는 분, 하나님.

그 곳에서 그 분은 손이 없고 발이 없고 입이 없다.

오늘 전능하신 하나님을 유능하게도 무능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나다.


재미있는 것은 모세는 바로의 딸에게 구함을 받아 이름도 얻고 40년의 삶을 보장 받았다.

그리고 미디안 제사장의 딸에 의해 구함을 받아 또 40년의 삶을 보장 받았다.

이런 우여곡절의 시기를 거치며 모세가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준비되고 있을 때

드디어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들었고, 언약을 기억하고 있으며, 돌보실 것이라는 뜻을 드러내신다.

이제 모세의 나머지 40년의 삶을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시려 하신다.

그러나 그 이전과 다르게 모세는 강한 의지로 저항하는 모습이 다음 장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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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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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교회에서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을 하고 있다.
새벽기도회에 대한 막대한 부담을 갖고 있으면서도 벌써 두번이나 빠졌다.
그래도 전 교인이 책도 같이 읽고, 말씀도 같이 듣고, 소그룹으로 모일 수 있어 나름 유익한 기간이 될 것 같다.

40일... 나는 그것을 좀 패러디 해서 나름대로 출애굽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내가 한다고 하지만 뭐 다 주워 들은 이야기들을 나열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정리하는 차원에서 도움이 될 듯하여 시작해 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광야 40년을 생활 한 후 요단강 앞에 갈 때까지.

오늘은 그 첫번째, 출애굽기 1장의 이야기다.

출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출애굽 이야기는 출애굽기로부터 시작된다.

애굽으로 내려온 야곱의 후손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출애굽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 이유는 애굽이라는 나라에 이스라엘의 후손이 더이상 머물수 없게 된 것이다.

애굽 사람들, 특히 왕이 봤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도 위협적인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를 두고 보지 못하고 고역을 시키고 결국에는 새로 태어나는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리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때 이런 애굽 왕 바로의 서슬퍼런 칼날을 막아선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천사도, 혹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나, 지하 조직의 힘센 장수도 아닌 두 명의 여인이었다.



십브라와 부아

그래서 출애굽의 이야기의 진정한 시작은 바로 이 두 여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교훈을 깊이 새기는 것이 그들에 대한 최선의 예의가 되리라.


살아가다 보면 상황에 따라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가 문제다.

이제까지 가지고 왔던 삶의 원칙을 어겨가면서 까지 따라야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먹고 살아야 하는 입장에서 윗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힘이 없는 입장에서 힘 센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여럿이 함께 하는 일인데 나만 빠질 수 없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때 우리들을 심각하게 고민을 하지만 선뜻 나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고

누군가가 원하는 행동을 하고 마는 것이 대부분의 우리들이다.


그러나 애굽 왕의 명령을 받은 히브리 산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원칙을 따라 올곧게 행동하고 있다.

아무리 애굽 왕 바로의 공권력이 가공할 위세로 자신들에게 명령한다고 해도

그들은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우리들은 너무도 손쉽게, 이제는 어떤 고민도 없이,

세상적 흐름에 나를 실어 보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겨우 주일에 교회에 와서 종교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만 위안 삼을 뿐이다.

그런 일들은 우리의 목숨을 요구하지도 않는데...


이런 산파들의 목숨을 건 행위로 인해 아론이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산파들을 잇는 이들은 아므람과 요게벳, 미리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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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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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성경유형 검사를 하면 16가지 유형 중 하나가 자신의 유형이라는 결과를 얻게 된다.
지표라고 하는 I-E(내향-외향), S-N(감각-직관), T-F(사고-감정), J-P(판단-인식) 여덟 개를 조합한다.
예를 들어 에너지의 방향이 내향이고,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감정으로 결정하고,
판단적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다면 INFJ유형이 되는 것이다.

94개의 간단한 문제를 풀고 자신의 유형을 곧바로 알 수 있는데,
그 유형에 대한 설명이 대개는 거의 정확하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유형을 네 개의 이니셜로 된 글자로 받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유형이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주의하고 개발할 것은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그럴 때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보다 향상된 인간관계를 영위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MBTI의 각 유형을 하나하나 설명할 수도 있지만,
네개씩 묶어서 설명하는 방법이 있다.
-기능(ST, SF, NF, NT라인), 기질(SJ, SP, NF, NT), 사분할(IS, ES, IN, EN), 태도(IJ, IP, EP, EJ)
그 중에서도 기질로 설명되는 것이 가장 흥미로운 것 같다.
특별히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연결해서 설명할 때 이해하기 쉽다.

ISTJ

ISFJ

INFJ

INTJ

ISTP

ISFP

INFP

INTP

ESTP

ESFP

ENFP

ENTP

ESTJ

ESFJ

ENFJ

ENTJ


디오니시우스(SP)기질
SP유형인 디오니시우스는 자신이 발견해 낸 사실에만 반응하는 현실주의자이며 술과 육체의 즐거움 속에서 기쁨을 누렸다. 그는 인간에게 성의 즐거움에 대한 이해를 갖게 했다. 충동적이 되기를 원하고, 충동적이 될 때 살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충동이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해야만 하며, 충동이 하라고 하는 한은 그 행동을 계속한다. 이들은 신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으며, 상징적인 것에 대체로 무관심하고, 도구를 주인으로 섬긴다. 그 어떤 유형보다 도구사용에 숙련성을 보인다.

에피메테우스(SJ)기질
프로메우스는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아버지인 제우스가 주는 어떠한 선물도 받아들이지 말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자기 자신이 했던 충고에 따라 제우스가 그를 위해 만들어낸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제우스가 판도라를 에피메테우스에게 주려고 하자 에피메테우스는 형을 본받아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그러자 제우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노발대발하게 되었다.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에게 내린 가혹한 형벌에 놀란 에피메테우스는 비록 이 선물, 이제까지 창조되었던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에 따르는 위험을 충분히 알고는 있었지만, 서둘러 자기가 내렸던 결정을 재고하여 판도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판도라는 곧 호기심에 굴복하여 올림푸스에서 자기가 가져오기는 했으나, 제우스로부터 열어보면 안 된다는 명령을 받은 금으로 된 상자를 열었다. 에피메테우스는 그의 아내가 금지된 상자의 뚜껑을 들어 올리고 난 후에 조차 그녀를 말리지 않고 모든 종류의 악이 인류에게로 쏟아져 나오도록 내버려두었다. 노년, 노고, 질명, 어리석음, 악덕 그리고 열정 등이 쏟아져 나왔다.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와 함께 극심한 고통을 겪었지만 결코 그녀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훌륭한 분별력을 가지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 이제는 온 세상에 퍼진 이러한 재앙들에 대한 방패로서 그를 안내해 줄 “해야 하는 것”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을 추구하게 된다. 에피메테우스가 판도라와 결혼하라는 제우스의 요구에 응했을 때, 그는 처세하는 지혜를 얻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여론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는데 대한 지식을 얻은 것이다. 이와 같이 순종하므로써 에피메테우스는 양심에 관한 자기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인류의 모든 악을 경험했지만 그러나 그는 또한 판도라의 상자에 있었던 악 가운데 단 하나의 선인, 희망과 예언이라는 보물을 가지게 되었다.

프로메티안(NT) 기질
생명이 없는 그 자신의 조각에 실망한 프로메테우스는 미네바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녀는 그를 하늘로 데려갔고, 프로메테우스는 그곳에서 태양의 바퀴에서 불을 훔쳐온다. 훔쳐온 불을 그가 만든 사람의 가슴에 댐으로써 그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준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그의 도벽에 대한 대가를 “쇠사슬에 묶여 못에 박혀 하늘아래” 버려지는 벌로써 지불한다. 독수리가 날아가 그의 간을 하루 동안 쪼아 먹는 일을 해를 거듭하여 끊임없이 반복한다.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에는 끝이 없었다. 손발이 묶여서 절벽에 못 박힌 채 추위와 바람과 서리를 맞으면서 그의 간은 다시 자랐고, 독수리는 그 간을 다시 쪼아 먹었다. 프로메테우스는 하늘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을 무지로부터 구출했다. 그는 인간 발전의 철칙을 선도하였으며 인간을 위해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선사하였다.

아폴로니안(NF)기질
그리스 신화 속에서 아폴로는 신들과 인간 사이의 직접적인 매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인간으로 하여금 사명감을 갖게 하고, 이미 세속의 악을 알고 있는 그들에게 성스러움을 발견해 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폴로는 자발적인 진리의 전달자였다. 그는 인간들을 위해 아버지 제우스의 뜻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아폴로는 그리스 정신의 이중성을 상징한다. 이상, 진리, 미, 영성, 신성함에 대한 바람과 더불어 불경함, 추함, 타락함, 육감적인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는 그는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로서 헌신적으로 타인을 도우며, 위안을 주는 음악과 노래의 전달자로서 그리스인의 이상이다. 그는 마음과 육체의 치료자이며 예언의 전달자, 신들의 대변자이고, 영감을 주는 신성하고 깨끗한 존재였다. 아폴로의 야성적이고 광폭한 면이 폭발하는 것은 오직 그의 우위성이 도전받거나, 인간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 주려는 그의 노력이 좌절되었을 때 뿐이다. 아폴로의 내면에는 사명감, 인간에 대한 존중, 주체성의 추구뿐만 아니라 필요 하다면 기꺼이 살인을 하고, 제사의식 중에 여사제들을 음흉하게 이용하려 하고, 마침내 아버지 제우스를 배반하기까지 하는 제어되지 않는 욕망이 함께 존재한다. 그에게 성스러움과 불경함이 동시에 내재되어 있다.

출처 '나의 모습 나의 얼굴'(한국심리검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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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로부터 시작해 주일을 향해 하루하루가 더해 갈 수록
플래너에는 내가 해야 할 일들, 결정해야 할 일들이 하나 둘 늘어 간다.
우리 부서에는 최소한 두 명, 많게는 서너 명의 교사들이 적극적으로 일을 찾아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일을 스스로 짊어지려는 행태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왜 나는 주일을 향해 내 손으로, 내 생각대로 해야 할 일들을 축적해가는 것일까?
그 답을 지난 주에 깨달았다.
교사들을 믿지 못해서도 아니고, 내가 일을 잘 한다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내 주변에서, 특히 우리 부서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내가' 정답을 주려하기 때문이다.
어떤 과업이 생각나면 그 것을 끙끙거리며 결론을 만들어 내야만 하고,
그 결론을 교사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 일을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교사들은 수동적이 되고,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코칭의 철학에 '사람들은 각자 자신 안에 해답을 갖고 있다'는 것이 있다.
내가 꼭 결정을 해 주지 않아도 각자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얘기다.
이것이 내가 '이렇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려 하는 것을 멈추고,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고 묻는 쪽으로 바꾸어야 할 이유이다.
더이상 모든 '공'을 내가 움켜 쥐고 있지 말고, 교사들에게 던져 주라는 것이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리고 뭔가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는 각자가
스스로 해답을 찾고, 그 것으로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해 나갈 수 있도록
각각의 작은 공들을 던져주는 역할이 나의 일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 역할이 결국 그들을 성공하게 만드는 코치의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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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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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칭이란?

사람세움/코칭 2008. 1. 25. 22:27

코칭이란 무엇일까?
뭐 내가 짧은 지식으로 말해 봐야 당연히 부족할 것이 분명하여,
아래에 자료들(책)에서 코칭에 대한 정의들을 뽑아봤다.
먼저 내가 간단히 정의를 해 본다면 '코칭은 마음으로 듣기'라고 정의하고 싶다.
실제 코칭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잘 듣는 것 만큼 더 훌륭한 코칭은 없는 것 같다.
어떤 멋진 질문을 할까 고민하면서 듣는 것이 아닌,
상대방에게 몰입하여 그 사람의 감정의 흐름, 몸의 작은 떨림까지 함께 느끼며 들을 때
정말 나도 놀라는 너무도 적절한 질문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코칭은 상대방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전제하고,
그 사람의 성장을 진심으로 바라며 기다리며 듣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코칭이라고 하니까 왕왕 컨설팅, 멘토링, 카운셀링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아주 간단히 차이점을 살펴 보면,
컨설팅은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코칭은 그 해결책을 스스로 발견하게 한 후 그 해결책을 스스로 재생산할 수 있도록 과정을 공유하고,
능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멘토링은 코칭의 형태와 매우 유사하지만,
멘토링은 멘토와 멘티의 관계가 수직적이며 상호간의 인간적 개입이 더 깊다는 점이다.
반면 코칭은 수평적 파트너십이며, 깊숙한 개입이 있을 필요가 없다.
카운슬링이 과거 지향적인 면이 많은 반면,
코칭은 철저히 미래 지향적이다. 코칭의 대상은 치료의 대상이 아니다.


코칭의 정의들

코치가 파트너, 지원자가 되어 코치받는 사람과 지속적인 협력관계를 통해 그의 잠재능력을 극대화시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코칭은 상대가 바라는 목표를 향해 자발적으로 행동을 촉진하게 만드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코칭 클리닉_한국코칭센터 2일 과정 워크샵

코칭은 상대의 안에 있는 답을 끌어내고, 행동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목표는 그 결과를 가지고 '스스로 답을 발견하고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을 육성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또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은 지를 상대 자신이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코칭대화 기술(이토하키라, 김영사) 115p

'코칭'이란 개인의 자아실현을 서포트하는 시스템이다.
마법의 코칭(에노모트 히데타게, 새로운 제안) 55p

코칭은 한 개인이나 그룹을 현재 있는 지점에서 그들이 바라는 더 유능하고 만족스러운 지점까지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기술이자 행위이다. 코칭은 사람들이 자신의 비전을 키우고, 자신감을 가지며,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돕는다. 또한 스스로 기술을 증진시키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실제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돕는다.
'코칭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를 성장시키도록 돕는 과정이다.' -로우 타이스
크리스천 코칭(게리 콜린스, IVP) 21p

코칭은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묶여 있는 개인의 잠재력을 풀어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코치의 가르침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배우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티머시 골웨이(하버드 대학교 교육학자 테니스 전문가)
코칭 리더십(존 휘트모어, 김영사) 17p

상대의 존재가치와 숨은 열정을 경청해 주고 상대가 그것을 명확히 인식하여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지지하고 격려하고 상호책임을 지는 것이다.
부모코칭(정진우 우수명, 아시아코치센터) 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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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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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에게 교회사역, 다음으로 배우고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코칭, MBTI, 에니어그램이다.
그 중에서 코칭에 대해서는 정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굴뚝 같은데
차일피일 미루다 제대로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만한 글을 쓰지 못했다.
하여 일단 코칭을 배우는 과정에서 독후감으로 제출했던 글을 올린다.
이렇게라도 시작을 하고, 조금씩 정리해 해 가리라 다짐해 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즘 들어서 많이 드는 생각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든지 일방적인 것은 잘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잘 먹히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런 현상은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이것이 옳다’,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주는 것에 대해서 곧바로 ‘맞다’고 응답하지 않고, ‘그것밖에 없나?’, ‘그렇게 밖에 얘기할 수 없나?’라고 한 번 더 생각하거나 반대 생각을 하게 된다. 반면 내가 감탄을 하며 받아들이는 것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맞았을 때, 내가 거치고 있는 과정과 유사한 과정을 통해 이른 사실들에 대해서는 주저함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코칭은 너무도 적절한 커뮤니케이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마법의 코칭」의 저자가 책의 시작부터 언급하는 해답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온 이유다. 해답을 일부 사람들만 향유했던 시대가 끝이 났다는 것, 지배․종속의 관계에서 협동의 인간관계로 변화했다는 것, 상류와 하류가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적절한 관점이 아닐 수 없다.
어설픈 코치로서 클라이언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전히 내 생각을 주입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 나를 본다. 그런 나 하나도 변화시키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상대방을 만나고 있는 나를 변화시키려는 시도 그것이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 나오는 ‘영향력의 원’ 개념처럼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를 변화시키는 생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저자의 제안에 시선이 멈춘다.
코칭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X이론에 물들어 있고(철학1 모든 사람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내가 가진 답이 정답이라고 주장하고(철학2 그 사람에게 필요한 해답은 모두 그 사람 내부에 있다.), 파트너이기보다는 지시하는 입장이었던 것 같다(철학3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그러니 내가 사람들의 자아실현을 돕는 코치라고 말하는 것이 정말 마음속으로부터 찔리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5가지 코어스킬로 질문스킬(확대질문과 특정질문, 미래질문과 과거질문, 긍정질문과 부정질문), 경청스킬(부하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을 듣는 것), 직관스킬(생각하지 않는다. 예측하지 않는다. 리드하지 않는다.), 자기관리스킬(머리 관리, 마음관리, 몸 관리, 시간관리), 확인스킬(미래 확인 - 목표 상기, 현재 확인 - 가치관 확인, 과거 확인 - 성공체험 확인)을 제안하는데,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하고 싶지만, 실제로 실천하지 못하는 면이 더 많기 때문에 잘 모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코칭은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변화(지시명령형→질문형)와 패러다임 환경(X이론형→Y이론형)의 변화를 통해 메타성과(눈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수치화하기 어렵다. 예방요법, 전체적, 지속적)를 올릴 수 있도록 해 준다고 말한다. 메타성과의 정의를 보니 어쩌면 답답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좀 더 큰 틀에서 보면 보다 긍정적이다 못해, 실제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 같다.
저자도 이야기 했지만 서브스킬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도 아쉽고, 상사와 부하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도 좀 마음에 안 들지만, 또 책을 한 권 읽음으로 인해 큰 과제를 하나 더 얻게 되었다. 하나라도 더 알았으면 그만큼 더 잘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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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 주일 오전 교사미팅 때

때로 전화를 했을 때 믿지 않는 아버지가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 거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어머니가 받아주셨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차분하게 인사드리고 용건을 이야기하면 잘 들어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전화하는 쪽보다 받으시는 분이 더 쑥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신다면 너무 두려워 할 것도 없습니다.
사실 더 어려운 것은 잘 못 알아들으시는 할아버님이 받으실 때입니다.
어! 어! 하시다가 서둘러 끊어 버리시니까요.
전화할 때마다 아버지나 다른 사람이 받는 일이 반복되면 그 어린이의 집으로 전화할 때 망설여지게 됩니다.
그런데 좀 다른 측면으로 생각하면 전화를 매 주 하게 되면 교회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전화 오는 것이 귀찮아서라도 아이들 보내주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너 또 안가면 또 전화 온단 말야!'라고 말 할 수도 있죠.
이것은 마치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재판장의 태도와 같습니다.

누가복음 18:1-8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또 부모와 아이들은 정기적으로 걸려오는 선생님의 전화를 기다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금요일 일정을 선생님이 전화하시는 시간을 중심으로 짜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과외를 하거나 가족모임을 한다는 것이지요.
선생님께서 맡으신 아이의 가정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어 보입니다.

어이들에게 전화하는 일, 좀 더 적극적으로 해 주세요. 그리고 주 중 만나시는 일도 계획해 주세요.
 

1. 매 주 전화를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2. 전화 심방을 어렵게 하는 걸림돌은 무엇입니까?
 

3. 어떤 도움이 있다면 그 걸림돌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
 

4. 자 그럼 이제 어떤 다짐을 해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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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슬픈 일이 있었다.
어린이부 2학년 꼬마가 차 사고로 하나님 품으로 간 것이다.
후진하던 차량의 운전자의 부주의로 난 사고였다.

아홉살 꽃다운 나이에 우리의 곁을 떠난 아이...
매 주일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160명이 넘는다.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알고 부모나 형편에 대해서 아는 아이들이 있지만,
그런 아이들은 소수이다.
겨우 이름을 90% 정도 알고 있을 뿐,
그 아이들에 대해 자세한 사항을 알진 못한다.

그 아이들 중에서도 이 친구는 그래도 이름도 알고,
성격이나 모습에 대해서 몇 마디 할 수 있는 아이였다.
이유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나오지만
형과 함께 워낙 개구장이여서 누구보다 빨리 파악이 된 친구였다.
또 담당 선생님이 매 주일 아침 전화를 해야 나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아이의 슬픈 소식은 여러가지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매 주일 만나는 아이들이 어느 순간 어떤 일을 당할 지 알 수 없다는 것,
혹 아이들이 예배당에 왔다 가는 시간을 소중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 것은 아닌지,
아이들에게 주님 안에서의 삶을 얼만큼 알려주었는지, 또 그렇게 살도록 했는지,
내가 나의 역할을 똑바로 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오는 주일부터 더 강하게 아이들에게 요청, 요구, 설득, 강조 해야 하나 라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강렬하게 든 생각은
아홉살이란 나이에 하나님 품으로 간 것에 대한 생각이다.
이제 서른 일곱 해를 시작한 내 나이의 숫자의 의미가 크게 다가왔다.
마감되지 않고 해마다 더해지는 숫자들, 그것을 더해주시는 분의 뜻은 무엇일까.
결국 그 모든 의문의 짐은 남은 자들의 몫으로 남는 것이리라.
그 친구의 가족, 친구들, 그리고 나에게까지.

내일 설교 주제가 '찬양의 예배'이다.
그래서 더더욱 그 아이가 생각난다.
인생들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이의 숫자를 더할 수록 더 영악해질 뿐 순수함을 찾아 볼 수 없어 지지만,
그럴 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수한 찬양을 더 받으시길 원하시지 않을까.
내가 그토록 꿈꾸며 이루려고 하는 것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인지도,
오로지 하나님을 향한 나의 마음이 남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아버지가 사고를 낸 차량이 속한 고물상을 없애자는 서명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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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랫만에 글을 써서 내 블로그지만 좀 어색하다는...


지난 8월부터 시작해 12월까지 MBTI 전 과정을 수료하고, 일반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뭐 워낙 대중화 되어 있어서 마치 운전면허증을 딴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만 정작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듯해서,
나름대로 관심을 갖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은 누군가에게 뭘 해 주려는 의도보다는 나를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집중했던 것이다.

그리고 올 해는 에니어그램을 시작했다.
MBTI와 사뭇 다른 성향의 유형검사 도구인 에니어그램도 마스터하고 싶다는 강한 동기로.

MBTI는 몇 번을 가도 16가지 유형별 이니셜들이 익숙해지지 않아서 어려웠는데,
반면 에니어그램은 한 번 다녀왔는데 9가지 유형에 대해 그림이 그려진다.
물론 이전에 두어번 경험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훨씬 이해가 쉽다.

하지만 MBTI는 하면 할 수록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게 하지만
에니어그램은 알면 알 수록 더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MBTI는 16가지 유형이 한 사람으로 나를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관계를 맺어 가도록 하지만,
에니어그램은 9가지 유형 중 하나가 나라고 하지만 그것은 거짓의 탈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니 에니어그램은 좀더 심층적인 과제가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MBTI는 내가 가지고 있는 성향들을 발견하고 잘 사용하고, 없는 것을 계발해 가도록 하지만
에니어그램은 나의 행동의 근원적 동기(집착, 회피)를 찾고 그것을 벗어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내적여정,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라고 하는 것 같다.

어느 것이 더 낫다 못하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은 우문이 될 것이다.
MBTI만큼 한 사람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성격유형검사 도구는 없는 것 같다.
또 에니어그램만큼 내면을 깊이있게 들여다 보게 하는 도구는 없는 것 같다.

짧게나마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몇 자 적어 보았다.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고...(언제 쓸지는 나도 잘...)
암튼 2008년에는 에니어그램과의 긴 여정에 들어간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참 나'를 찾아가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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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지하철에 신문을 들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신문을 펼치고 있으면 곁눈질로 힐끔거리며 보다가
신문을 다 본 후 선반에 올려놓으면 바로 가져다가 읽곤 했다.
친절한 사람들은 '보시겠냐?'고 하면서 주기도 했다.
그래서 신문을 다 읽고 선반에 두고 내리는 것은 또 다른 독자를 위한 배려였다.
그리니 신문을 지하철에 놓고 내리는 것은 미덕이기도 했다.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 손에손에 신문을 들고 있는 것이 요즘 풍경이다.
돈을 주지 않아도 공짜로 나누어주는 무가지들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의 수준에 대한 논의를 떠나서
신문을 다 보고 나서 선반 위에 놓고 내린다는 것이 문제이다.
간혹 신문을 못 가지고 온 사람들이 집어서 보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신문들은
선반에 쌓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신문을 누가 치우나?
일부 용돈 벌이는 하는 어르신들이 계시긴 하지만,
결국 청소하시는 분들이 치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지하철에 신문을 두고 내리는 것은 결코 미덕이 아니다. 쓰레기다.

자신이 가지고 들어 온 것을 왜 자신이 치우지 않는가?
자기가 들고 들어 온 것은 자기가 들고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자신이 벌인 일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 모습, 이것이 오늘의 도시인들의 모습이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똥 싸놓고 치우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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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에 빼곡히 메모한 것을 그냥 순서대로 타이핑을 했다.
감격을 내 안으로 담기위해, 목사님의 말씀처럼 곱씹기 위해...

신비의 길 요3:16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고 편해져야 한다.
내면의 깊은 자유함과 평강, 해방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배워오면서 가능해진 것.
QT, 새벽기도가 하루 일과의 한 항목일 때가 있었다.
이제는 사랑하는 '님'이 나에게 뭐라 하실까 해서 말씀을 편다.
조건적 관계(나 중심)가 아닌 하나님의 함께하심(하나님 중심)으로 이동한다.

하나님과 교제를 배우면서 내면의 비밀들을 이야기하게 된다.
뭔가 비밀이 많을 때 말이 많다. 깊은 교류는 말이 없어진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영과 영의 만남이고 교제이다.
성령은 우리의 영을 깨워 하나님을 만나게 한다.
신비=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로 들어가는 것, 연합하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자존감을 어디로 부터 얻는냐가 중요하다.
사회적 이름이나 배경이 아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기초해야 한다.
하나님과 만나는 나는 이상적 '나'가 아니라 치유,구원받아야 할, 겉으로 드러나는 '나' 이면에 있는 '나'이다.
깨닫기를 하나님께서 20년 30년 40년 기다리신다.

어떤 하나님이 나와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대화를 터야 한다. 그것이 기도이다.
말씀을 읽을 때, 사랑하는 님의 편지로 생각하고 읽어야 한다.
편지의 여운, 따듯함이 남아 있도록 해야 한다. 일상 속에서 반추, 되새김을 하면서...
무슨 일을 하든 '현재의 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내 주장, 나의 것을 내려 놓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역이 내 삶 속에서 많아지도록 해야 한다.

신비에 뿌리 박아야 한다. 궁극적인 실제와의 만남을 바라봐야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배워가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가면 초연해지고, 쉽게 상처 안받고,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을 중단하게 된다.
이 것은 일생과 관련된 문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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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놓고 가는 바람에 핸드폰 카메라밖에 없어서 많이 찍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 올릴만한 사진이 나와서 다행이다.
평소에 핸드폰 가메라가 좋지 않다고 투덜거렸었는데...

지난 11월 2일에 촬영한 광경이다.
오늘은 눈이 온다. 경기 북부 지역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렸단다. 그래도 첫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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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신성리 갈대밭에 대한 소개...(퍼온 글)

갈대밭의 대명사 같은 곳이다. 금강하구둑 변에 있는 이 곳은 하구둑이 생기기 전부터 오랜기간 조성된 갈대밭으로 금강의 침전물이 쌓이면서 갈대가 자랄 환경이 만들어진 반면, 범람의 위험으로 다른 농작물이 재배되지 않으면서 오로지 갈대로만 뒤덮인 곳이다.
하구둑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더 넓었을 것이지만, 하구둑이 만들어진 이후로는 폭이 200여미터 길이 1.5킬로미터로 약 10만평에 달하는 넓이이다. 우리나라의 4대 갈대밭이라고도 하고, 관광공사 선정 7대 갈대 명소이기도 하다.
강변을 따라 퍼져 있는 갈대밭은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장소로도 자주 이용되는데, JSA에서 이수혁 병장역의 이병헌이 볼일을 보다가 지뢰를 밟은 상황에서 인민군 중사 오경필 역의 송강호와 맞닥뜨리는 갈대밭이 바로 이곳에서 촬영 되었다. 또한,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무혁이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는 갈대밭 장면이 이곳이기도 하다.
갈대밭에는 다양한 구조물들도 있고, 갈대밭 사이로 오솔길도 있는데, 각종 싯귀가 적혀 있는 팻말부터 목구조 다리도 있고, 장승이나 솟대등을 볼 수 있다. 간이 매점도 있어서 잠시 쉬어갈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강변쪽으로는 각종 철새들고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청둥오리, 고니등은 먼발치에서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보니, 철새 탐조로는 적당하지 않다. 갈대는 가을에 찾아야 제맛이지만, 다른 계절에도 나름대로 운치 있는 풍경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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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글입니다. 생각하게 하는 면이 있어서. 또 김훈태님을 아주 잠깐 만났었습니다.)

초등학교 애국조회, 그 쓰라린 패배의 기억

참세상 | 기사입력 2007-06-29 12:09 

[맹세야, 경례야 안녕](9) - 군문초 교사 김훈태 님

김훈태(군문초)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맞는지 모르겠다. 국기에 대한 맹세. 곱씹어 볼수록 나치스럽다. 나는 태극기가 자랑스럽지 않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를 나의 조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슴이 아프지만, 사실이다. 정이 떨어졌다. 평택의 대추분교가 무너지던 날 나는 깨달았다. 대한민국은 '그들'의 나라라는 것을.

교직 4년차 되는 해에 나는 전담을 신청해 담임을 맡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구속 수감되었다. 전담을 택한 표면적인 이유는 대학원 진학이었지만 진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병역거부의 충격을 담임교사로서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고, 다른 하나는 애국조회로부터 달아나고 싶어서였다.

새로 부임한 교장은 운동장 조회를 유난히 좋아해서 월요일과 토요일마다 전교생을 운동장으로 불러내 훈화를 했다. 담임교사들은 아이들을 여자 한 줄, 남자 한 줄의 이열종대로 행진곡에 맞춰 데리고 나가 운동장의 정해진 줄에 세워야 했다. 그리고 앞으로 나란히, 차렷, 열중 쉬엇, 차렷의 부동자세로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를 하고 애국가를 부르도록 지도해야 했다.

이어지는 교장의 훈화는 대개 나라 사랑과 효도, 질서와 청결, 근면 따위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애국조회가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식민지 시절 일왕에게 바치던 일련의 조회 행위와 전혀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었다. 뜻있는 분들의 운동에 의해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애국조회를 비롯한 식민지 잔재는 전혀 청산되지 않았다. 나는 그게 절망스러웠다.

천황을 상징하는 히노마루에 경례를 하고 황국신민으로서 충성 맹세를 한 뒤 기미가요를 부르던 아이들은 교사가 되어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해방 조국의 아이들에게 저희들이 배웠던 것을 그대로 강요했다. 독재자를 위해서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런 일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우리가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에 저항감을 덜 갖는 이유는 저항적 민족주의 때문이 아니다. 보편화된 극일정서는 청산되지 못한 일제 잔재를 은폐하기 위한 가면일 뿐이다.

단지 우리의 주인이 일제에서 미제로 바뀌었을 뿐, 기존의 체제는 굳건하다. 식민지 교육은 여전한 것이어서 아이들은 국가교육이라는 새 이름 아래 식민화되고 있다. 우리의 근대는 우리 자신을 주인으로 키우지 않는 것이다. 근대가 꿈꾸었던 시민적 주체로서의 개인은 탈근대를 모색하는 현재에도 요원한 일이 되었다. 우리는 국가교육을 통해 주인의식을 국가에게 빼앗기고, 그 잘난 국가는 다시 미국에게 충성 맹세를 한다.

이라크 파병과 미군기지 평택이전과 한미FTA는 그러한 현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국민들 역시 자발적으로 영어를 미친 듯이(!) 배우고, 미국으로 유학가지 못해 안달이다. 잘못된 교육은 이렇듯 인민 전체를 병들게 한다.

일본에서 부활한 히노마루와 기미가요가 이슈화되기 전까지 우리의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 애국가는 너무나 당연해 전혀 문제될 게 없어 보였다.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이단이자 비(非)국민으로 치부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두 '대한민국교'의 신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나 불교 같은 종교는 그에 비하면 한 끗발 아래인 것으로 하느님과 부처님의 뜻에 따라 총 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여전히 쓰레기 치우듯 감옥으로 보내버리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개인적 신념에 따라 집총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이해받지 못할 수밖에.

이제 다시 내 얘기로 돌아가 본다면, 나는 미력하나마 저항했다. 국기에 대해 경례하지 않았고, 맹세하지도 않기 시작했다. 애국가도 부르지 않았다. 어느 날은 애국조회 시간에 아이들을 교실에 붙잡아 두기도 했다. 교무회의 시간에 교장과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설문지를 전 교직원에게 돌려 애국조회를 하지 말자고 선동도 했다. 아이들에게 토론도 시켜보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동교 교직원들은 뜻에는 공감했으나 움직여 주지는 않았다. 나는 지쳐갔다. 현실을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아이들조차 애국조회는 필요하다는 입장이 다수였다. 나는 내 뜻을 강요할 수 없었다. 전담교사를 선택한 것은 그래서였다. 차라리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 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나에겐 그것이 패배감으로 남아 있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는 국민 여론과 상관 없이 폐지돼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형제 폐지와 양심적 병역거부권 인정도 마찬가지이다. 국기법이 제정되면 이제 양심에 따라 국기에 대해 경례나 맹세를 하지 않는 사람을 처벌할 수 있다. 거꾸로 가는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교'를 믿지 않는데 왜 '그들'의 우상을 향해 경배하고 맹세해야 하는가?

우리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제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해서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권위에 순종하여 안정과 쾌락을 얻으라고 교육받았다. 처벌과 훈육을 통해 각인된 노예의식은 우리의 얼굴을 빼앗아갔다. 교육은 이런 게 아니다. 참된 교육은 스스로 주인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주인된 자만이 건강한 관계를 만들고 행복을 찾아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조국을 만들어야 한다. 새 조국의 건설에 동참하는 이, 부디 용기내길 바란다. 우리는 자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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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여름성경캠프가 끝났다.
지난 주일까지 2박3일...

이런 날이 올 줄 알면서도 왜 그리 안달을 했는지.
그러나 마치 캠프만 지나면 끝인 것처럼 뛰었지만,
막상 지나고 나니 동일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수정해 달라고 기다리는 월간 숲과나무 원고뭉치.
이런 저런 처리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
피곤이 몰려와 눈이 감기고 몸이 처져도 피씨 앞에 붙어 앉아 있어야 했다.

그래도 1년 중 가장 큰 행사를 치르고 난 다음이라
약간은 아주 약간은 행복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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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에 내려가서 화요일에 감나무에 약을 치고 왔다.
가능하면 화학농약을 치지 않으려고 하는데,
워낙 벌레가 많이 붙어서 도무지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을 정도여서 올 해는 좀 서둘러 쳤다.
보통 감나무는 약을 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감나무에 벌레가 많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제는 적어도 두세번은 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버렸다.

이것 역시 인간의 욕심이 부른 결과가 아닐까?
돈이 된다고 생각하면 지나칠 정도로 많이 심고, 많이 따려고 하니
예전에는 다른 나무들에 의해 조절되었던 해충들이
감나무를 공격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더는 약을 치지 않고 감을 수확할 수 있으면 좋겠다.
7월에 한 번 쳤으니, 10월 하순에 딸 때는 농약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벌레도 없고...

또 욕심이 과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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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더 있으면 있을수록 더 확신이 드는 것이 있다.
교회에 그리스도인은 없고 교인만 있다는 것이다.
교회엔 그리스도인은 없고 목사, 장로, 권사, 집사만 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한 노력 또한 별로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목사의 모습, 장로의 모습, 권사의 모습, 집사의 모습에 충실하려 할 뿐이다.
자신이 집사이면 집사에 맞는 행동을
권사가 되면 권사의 행동을
장로가 되면 장로의 행동을
목사는 목사의 행동을 하기에 급급하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에 대한 고민보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장로로 보이느냐가 더 우선하는 것이다.

세상적 가치관을 조금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유지한 채
힘의 논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대로 뭔가 해 보려는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다.
배려도, 인내도, 사랑도 찾아보기 힘들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럴바엔 교회를 좀 쉬는 것이 더 낫지 않나.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으니 교회를 향한 비판도 당연해 보인다.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
외형으로 드러나는 교인의 모습에 비중을 두고 있으니 안타까움을 더한다.

지나친 비약일수도 있겠으나, 충분히 반성해 볼 일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나는 전도사 노릇에 집중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식과 삶에 집중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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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한 권을 책을 읽고 온 것 같았다."
모새골을 다녀와서 느낌이 어떠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시종 행위가 아닌 존재에 집중하라는 임목사님의 메시지,
더불어 그로부터 파생되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그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이야기들,
너무나 완벽한 주변 환경과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건물들,
그리고 세끼 정성이 담긴 맛있는 식사.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새골에 잠시 머물러 보는 것도 좋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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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이지만 아담하고, 품격이 있는 모새골의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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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동_사무실과 도서관이 아래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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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동_역시 깔끔함과 편리함이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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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동산_미로(labyri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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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 예배당 옆 정원에 있는 ‘미로(labyrinth)’ 둘레가 어른 걸음으로 66보
중심으로 다가갈 듯…하지만 멀어진다. 멀어질 듯
미로의 중앙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장 6절)는 성경 구절이 새겨짐
미로는 ‘거룩한 땅으로 가는 순례’를 상징. 1200년경 프랑스 샤트레스 성당의 미로에서 유래
실재로는 4000년의 역사를 가진 ‘구도(求道)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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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기로 로터리도 치고,
관리기(사진은 없지만)로 골도 타고,
비닐 씌워서 고추를 심었다.

오랫만에 육중한 경운기를 운전하느라 손바닥도 얼럴하고,
허리는 잘 굽히지 못할 정도까지 되었지만,
간만에 흙을 가까이에서 만지고,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여전히 초보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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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 아이가 두번이나 소리높여 우는 일이 있었다.
이 아이는 교회 올 때마다 공을 가지고 오는데,
오늘 결국 그것이 문제를 야기한 것이다.

한번은 선생님 한 분이 공을 빼앗아 캐비닛에 넣었다.
예배당에서는 공을 가지고 놀지 말라는 뜻에서 예배 끝나고 준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아무리 그래도 공을 빼앗긴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큰 소리로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
난 공을 내주지 않는 선생님의 단호한 외침까지 목격을 했다.

그리고 예배가 진행되고 있을 때, 설교 중이었는데, 또 폭발을 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까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다른 선생님이 목소리를 높였고,
이 아이는 '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게 하느냐'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난 그 상황에서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 아이 하나에게 묶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지혜롭게 처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고,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이 없기도 했다.
겉으로는 신경 쓸 일도 많다는 듯 회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족(반)모임이 진행 중일 때
이 아이가 뒷쪽에 공을 가기고 기대어 서 있는 거다.
다가가서 꼭 껴안으며 '전도사님은 네가 좋은데...'라는 말을 귀에 속삭여 주었다.
그런데 웬일로 이 아이가 예전처럼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 않았다.
아이가 공을 가지고 복도로 나가길래 따라 나가서 몇 번 같이 차주었고,
다시 건물 밖으로 유도해서 둘만의 축구시합을 벌였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서 어떻게 이 아이와의 관계를 형성해 가야 할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아이와 놀아주고, 재미있게 놀아주고, 또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그리고 그 아이에게 살짝이 속삭이는 거다.
"우리 또 축구하고 놀자. 그런데 예배당에서, 예배시간에는 공을 차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아이와 신뢰를 쌓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한다면
아이에게 상처도 주지 않고, 아이도 좋고, 나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어른이 된 이들은 그 정도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저 윽박지르고, 단시간에 복종시키려 할 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아이의 마음을 얻어 가는 과정이 교육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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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식물이 섞여서 자라면 병충해가 없으나
모여서 자라면 병이 나기 마련이다.
                                                    '먹기 싫은 음식이 병을 고친다' 임락경 지음  12쪽

상주 집에서 들려 온 소식.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셨던 기씨 아저씨가 백혈병에 걸려 입원하셨다는 것 하나.
우리 집 터를 관리하는 땅부자 황씨 아저씨가 또 암으로 입원하셨다는 것 둘.

65세에서 70세 전후의 어르신들이 힘없이 쓰러지신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데,
그 분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신 분들이라는 데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바로 농약이다.

보호장구 없이 살포할 때 자연스럽게 속에 축적된 농약들이 몸을 고장낸 것이다.
농약의 해로움이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요사이에도
마스크 하나도 쓰지 않고 아무렇지않게 약을 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 그 전에야 오죽 했을까.

보기좋은 먹거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뿌려온 농약이
그래서 보기 좋은 상품으로 돈을 벌게 해 준 그 농약이
농부의 생명을 갉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를 보기 좋게, 빨리, 크게, 대량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에 속지 말자.
그에 대한 대가를 누군가는 분명 치루어야 할 것이니.
혹시 모른다 우리 안에서도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지도.


학교라는 이름으로 생각없는 시민들을 대량으로 길러 내고,
교회라는 이름으로 겉만 번드르르하고, 말만 잘하는 신도들을 찍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들을 그 안에 빠져들도록 현혹시킨 거짓에 대한 대가를 누군가 분명 치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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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살구꽃이 활짝 피었을 때)

올해도 어김없이 살구나무가 가장 먼저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매화꽃이 먼저 피어 있었지만 올 해 수확하기에는 나무가 너무 어리 탓에
열매를 가장 먼저 얻는 과실이 살구인지라 더없이 반가운 모습이다.

그런데 이 살구나무가 크기는 아주 큰데
거의 한번도 가지치기를 해 주지 않아서 너무 무성한 것이 문제다.
과실 나무에서 중요한 부분이 햇볕이 잘 드는 것인데
가운데 가지에서 난 열매들은 햇볕을 보지 못할 것이 뻔한 일이다.

그래서 향유 아빠의 충고도 있고 해서
전정 가위와 톱을 들고 나섰는데,
막상 자르려고 하니 어떤 가지를 잘라야 할지도 모르겠고,
또 미안한 마음도 들고 해서 머뭇거리다가 들어와 버렸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나은 열매를 얻으려면 가지치기는 필수인지라
이튿날 마음을 단단히 먹고 겹쳐서 나온 가지부터 조금씩 자르다가
나중에는 대담해져서 가운데 굵게 자란 가지를 베어 버렸다.
그랬더니 나무 가운데가 탁 트여 보였다.
물론 가지치기의 결과는 두어달 후에 나타나겠지만
나무가 시원해 진 것처럼 내 마음도 시원해졌다.


작업을 하면서 간혹 죽어서 말라 있는 가지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놈들은 얇아도 전정가위로는 잘 잘라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반면에 살아있는 가지는 그것보다 두배는 더 굵어도 웬만하면 잘 잘려 나갔다.
죽으면 딱딱해 지나보다.
반대로 하면 딱딱하고 질긴 것은 죽은 것이었다.
최소한 살구나무에서는 그렇다는 얘기다.

비약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생각이 굳고 단단해진 것은 죽은 것, 생명을 잃은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무슨 말을 해도 바뀌지 않는 우리의 마음...
혹시 죽어서 말라버린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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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분류하는 기준 하나.

착한 사람
안 착한 사람

사람을 분류하는 기준 둘.

마음이 약한 사람
마음이 강한 사람

이 둘을 적용시키면 네가지 유형의 사람이 나온다.

착하고 마음이 강한 사람
착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
안 착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
안 착하고 마음이 강한 사람

물론 사람을 네가지로 나눈다는 것이 좀 웃기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관찰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착하고 착하지 않느냐의 기준은 이타적이냐 이기적이냐의 차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다른 사람을 중심으로 배려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착한 사람이다.

마음이 약한가 강한가는 구분은 어렵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 부탁을 할 때 거절을 잘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보면 알 수 있다.
감정에 이끌리기 보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알고, 그 일을 먼저 하는 사람이 마음이 강한 사람이다.
마음이 약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알면서도 그 일을 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 간다.

착하고 마음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한 일을 함에 있어 주도적으로 해나가는 사람이고,
착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은 유쾌하게 다른 사람을 위한 일을 하다가 결국 자기 일을 못하는 사람이다.
안 착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돕긴 하지만 마음 속에는 불평이 가득하다.
안 착하고 마음이 강한 사람은 주로 자신과 관련된 일을 선택하고 그 일만 한다.

대체적으로 앞의 두 유형의 사람은 좋은 평가를 받는데,
첫번째 사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지만 소수인 것 같다. 이 사람들은 같이 지내는 사람이 피곤할 정도록 철저하게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며 흔들림없이 사는 사람들이다.
두번째 사람은 사람들이 쉽게 보고, 마음대로 상대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면 거의 예스맨에 가깝기 때문이다.

네번째 유형의 사람은 당연히 인기가 없는 유형이다. 독선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모습을 드러내 놓고 사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세번째 유형의 사람인데,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이 유형에 속할 지도 모른다.
겉보기에는 착한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내부에서는 늘 갈등이 있다.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거절하지 못해 부탁을 들어주게 되니 말이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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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출퇴근을 할 때 버스를 이용한다.
그러다 보니 버스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물론 사람에 대한 생각이 주를 이룬다.

버스전용차로제가 시행되면서 차도 가운데 버스 승강장이 설치되었다.
그 승강장에 버스가 많이 서봐야 세네 대 정도 설 수 있다.
그래서 버스가 들어 올 때 먼저 들어 온 버스는 당연히 앞 쪽으로 가서 서 주어야 한다.
만약 초입에 서거나, 중간에 서 버리면 들어오는 버스들이 문도 열지 못하고 줄줄이 서서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버스가 들어 올 때 몇 번째로 들어 오느냐에 따라서 적당한 곳에 서 있는 것도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센스 중 하나이다.

그런데 가끔 볼 수 있는 광경이 있는데,
특히 나이가 좀 드신 아주머니들이 핸드백을 아래위로 열심히 흔들면서
자신이 선 곳에 버스가 서라고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버스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사람에 맞추어 정차 할 수 없다.
그러니 첫 번째로 들어온 버스일 경우에는 한 참 더 앞쪽으로 가서 설 수밖에 없다.

자신이 선 곳에 버스가 서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갖는 생각이다.
하지만 버스는 내가 선 곳에 설 수 없을 때가 더 많다.
버스는 버스가 서야 할 곳에 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생각한 대로, 내가 계획 세운 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얘기와 같다.
정한 때가 되었을 때, 때가 찼을 때, 나름의 원칙에 따라,
하나님께서 이미 부여하신 질서에 따라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조급하게,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조작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질 일을
울고불고 자신이 선 자리에 세우려 하는 것이 또 우리의 기도는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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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차례 어머니께서 올라오신다.
뭐 어머니는 청소도 해 주시고, 밑반찬도 만들어 주신다고 올라오시지만,
아들들은 그 마음을 잘 몰라주는 것이 사실이다.
자유롭게 지내다가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게 되니.

아무튼 가장 큰 차이는 잘 먹지 못하던 아침을 먹게 되는 거다.
또 밖에서 먹고 들어가던 저녁도 집에서 먹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희안한 것은 어머니께서 차려주시는 밥이 맛이 없다는 거다.
오히려 내가 해 먹었던 밥이나 국이 더 맛있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만든 음식이 정말 더 맛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착각이었다.

내가 집에서 밥을 차려 먹을 때는 배가 고플 때이다.
그래서 배고픔을 참으며 헐래벌떡 음식을 만들어 상을 차린다.
그러니 당연히 '시장'이라는 반찬을 놓고 먹는 것이니 당연히 맛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차려주시는 상은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먹기 싫을 때 먹게 된다.
먹기 싫으니 당연히 맛도 없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먹기 싫을 때가 먹어야 할 때가 아닐까?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먹기 싫어도 정해진 때에 식사해야 한다.

내가 먹고 싶을 때, 내가 하고 싶을 때만 뭔가를 한다면
즐거울 수는 있겠지만 더 길게 보면 나에게 해로운 것일 수 있다.
입맛이 없어도 규칙적으로 거르지 않고 밥을 먹는 것이 건강을 지켜주듯이
하기 싫어도 규칙적으로 나를 갈고 닦는 일을 빼먹지 않는 것이 나의 실력을 키워 줄 것이다.

입맛이 없어도 맛없다고 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먹는 것이 몸에도 좋고
어머니께도 효도하는 길이다.
나를 갈고 닦는 일도 하기 싫을 때도 기꺼운 마음으로 할 때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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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집단 속에서 이루려고 하는 목표를 위해
그 목표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시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면서
정작 그 집단 안에는 자유도 민주도 없는 것이다.
거의 공산당을 방불케 한다.

개인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외치면서
내부에서는 획일적 가치를 주입하고, 강요하기까지 한다.
이율배반이다.

사학법의 재개정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를 떠나서
기독교 학교가 가진 나름대로의 목적, 가치를 지켜내려는 시도 가운데
목회자들이 삭발을 했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유명한 교회의 유명한 목사님들에서 총회장님까지
장삼만 걸치면 스님이라 할만한 모습을 하셨다.
여기까지야 뭐 당신들의 이해관계도 있으시고, 정치적인 차원도 있고, 상징적인 위치도 있고, 또 교인들을 위한 메시지 차원에서 '그렇게 까지...'라고 넘길만 한데,
급기야 당신들이 목회하는 교회 전임교역자들을 삭발케 했다는 소식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당신들 혼자 깎고 다니니 외로우셨나? 억울하셨나?
혹 그 안에 삭발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사학법 재개정에 대한
투철한 의식을 가진 이도 있었을 것이지만
내 소견으로는 대부분은 삭발까지 하는 데까지 동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별 관심이 없다고 해야 맞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는 폭력이고, 인권유린이다.
삭발을 한 부교역자들 중 누구도 인권위원회에 제소할 사람도 없고,
물론 끌려가서 삭발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찍소리'도 못하고 깎으라니 깎은 사람들의 심정이란 어땠을까.

소신도 없이 시키는 데로 하냐고 비난 할 수도 있으나,
생각해 보면 그들은 결정적으로 약자일수밖에 없다는데서 한숨을 지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해 가는 일들이 대충 이렇다.
자유, 사랑, 평화를 내 걸고 있지만
삶의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가깝게 아내에게, 자녀에게 물리적인 것까지는 아닐지라도
폭력적이고 일방통행적이다.

그것이 크던 작던 가시적이든 그렇지 않든
힘은 어디로든 흐르게 되어 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힘이 힘 없는 자들을 위해 사용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힘 없는 자들이 조금이라도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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