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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하나님과 만남이라고 할 때, 그 만남을 이끌어 가는 쪽은 어디일까?
물론 만남이기에 쌍방이 적절하게 이끌어 간다고 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그런 대답을 하기에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대개의 기도는 하나님은 배제한 채
자신이 일방적으로 이끌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군가를 만날 때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주도했을 때 상대방의 기분이 어떨까?
더구나 그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어떠셨을까 생각해 보자.
그리고 지금까지 소위 하나님과의 만남은 잘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만약 조금이라도 찔림이 있다면 이제 주도권을 넘겨 드릴 때가 되었다는 신호가 온 것이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도록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 기도를 한 차원 높여 주는 길이 될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의 기도를 성령께 맡기는 것이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심들을 잠잠하게 하고
온전히 그 분을 인식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은 분심 그 이상으로 쉼없이 이어지는 말들을 늘어 놓는 것을 기도라고 여기고
한 순간의 끊김도 없이 쏟아 놓고 나올 때 시원하다고, 기도가 잘 되었다고 여겼지 않은가?
그러나 이젠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다.

그러면 침묵으로 가만히 있으면 될까?
솔직히 침묵으로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리 분심들을 잘 처리하게 되었다고 해도 사람이 죽지 않는 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살아있다는 증거이니 너무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성령의 이끄심에 나를 맡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뭐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겠으나 단순기도를 하는 것을 제안할 수 있겠다.
예수의 기도,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죄인인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반복할 수 있다.
좀 길면 '예수여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줄이거나, '예수님!', '주님!'등으로 더 줄여서 할 수도 있다.

또 예수마음기도를 할 수 있다. 
내가 선택해서 하고 있는 것은 '당신의 탁월하신 친절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이다.
'예수마음의 사랑이여, 제 마음을 불사르소서'나
'예수마음의 자비여, 제 마음을 용서하소서' 등을 반복할 수도 있다.
(예수마음 호칭기도문 가운데 선택)

단순기도는 기도문을 되뇌이거나 공염불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한 자 한 자를 생각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 중 하나님의 현존이 느껴지면 멈추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분심이 떠오를 때 기도문으로 돌아간다.
조금 어렵다고 생각되면 호흡과 맞추어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들숨에 '당신의 탁월하신 친절에'. 날숨에 '저를 온저히 합하나이다'를 반복한다.

기도문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성급한 마음에 뭔가 성과를 얻으려고 달려들면 안 된다.
지난 시간 나 중심의 기도습관에 너무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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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중 일어나는 분심에 미래의 일, 현재의 일과 함께 과거의 일이 있다.
계획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는 일들이 떠오를 때는 그것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또 기도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에 만나주겠다고 약속을 하며 보내고
다시 기도로, 주님 앞으로 돌아오면 된다.
이 것이 미래와 현재의 일에 대한 태도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일이 떠오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의 일이란 어떤 사회적 사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 내가 경험한 일들을 말한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과거의 일이란 알게 모르게 현재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일 수 있다.
그래서 과거의 일이 떠오를 때는 정면으로 만나 보는 것이 좋다.
하지만 과거의 일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일부러 끄집어 내려 애쓰거나, 회상을 하라는 말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찾아 오는 것을 만나라는 말이다.

과거 상처와 좌절이 무의식의 세계에 잠재되어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그것이 불현듯 떠오를 때 오늘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를 풀 수 있는 키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런 상처와 좌절의 기억이 해결되지 않을 때,
그것들은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극하여 하나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과거의 기억을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 내는 작업을 기도 중 할 수 있다.
그 시공간으로 들어가 하소연도 하고, 고발도 하고, 탄원하고 청원하는 시간을 가지게 될 때
묶였던 족쇄가 풀리듯 감사와 기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칠 때 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기도의 목적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
과거의 일을 만나는 작업 역시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기 위한 준비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나의 기도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내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것'이 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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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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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얘기지만 기도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의 마음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그러나 대부분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미 많은 기도를 하고 있다.
예배 중, 모임을 가질 때, 식사 할 때 대표해서 기도를 한다.
그럴 때에야 격식에 맞춘 어투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은밀한 기도 시간에 조차도
자신의 직분이나 위치를 의식한 말투나 내용의 기도한다는 것이다.
소위 말해 우리가 사회 생활을 통해 덧쓰게 된 페르소나(가면)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 가면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인데도
스스로 틀에 넣어 자신의 감정들을 배제한 채로 과장된 사실들을 나열하는 기도를 드린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과 진솔한 만남이 가능할까?
다른 말로 하면 나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의 접촉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말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우리의 유일한 신분은 어린 아이면 족하다.
아이 같다는 것은 감정에 솔직하고, 사회적 위치나 역할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페르소나에 갖히지 않은 진솔한 마음으로 하는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고, 
내면 깊이 담긴 이야기들이 남김 없이 꺼내 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마 19:13-14)
 
'어린이다움이란 다른 한 편 그것이 지닌 순진성과 무의식성 덕분에 상당히 완벽한 自己의 상, 꿈밈없는 자기의 개성을 갖춘 전체인간의 상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어린이나 원시인을 볼 때 어른이 된 문화인의 마음속에 충족되지 않는 욕구와 필요에서 우러나온 그리움이 눈을 뜨는 것이다. 그것은 적응되기 위해서, 즉 페르소나(Persona)에 맞추다 보니 전체 인격상에서 떨어져나간 인격부분에 해당된다.'
회상, 꿈 그리고 사상(아니엘라 야훼 엮음, 집문당) 20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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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하면서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소위 분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쉼없이 떠오르는 분심을 어떻게 할까?
그 분심이 어디로부터 오는 지,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을 기도 안을 가져 오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중요한 것은 분심이 없는 것이 아니며, 그 많은 분심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내는 작업 역시 기도임을 아는 것이다." 예수마음기도(권민자 지음, 성바오로) 52p

기도할 때 주로 떠오르는 분심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미래의 일들, 현재의 일들, 과거의 일들이 그것이다.

미래에 대한 분심은 뭔가 계획을 세워야 하는 일들과 관련되거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때 불안함과 함께 오게 마련이다.
그러면 일단 그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실체를 알아차리고
계획을 세우는 시간을 주겠다고 하거나,
어떻게 될지 두려워하는 일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닌
지금 기도 가운데서 크게 일어나는 불안한 마음을 그대로 아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적 분심을 지나 가도록 하고 다시 기도로 돌아오면 된다.

기도로 돌아온다는 얘기는 지금 나를 만나고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에 집중한다는 것을 뜻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하고 근심하는 데에 기도의 시간을 쓰지 말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의탁) 지금 나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현재에 대한 분심도 마찬가지다.
죽고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달래서 보내고(맡기고) 기도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절박한 상황 때문에 도저히 마음에 평온을 찾을 수 없다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

물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면 기도 시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생활 가운데서도 분심에 이끌려 살아왔기 때문에
어떤 것이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 '나'인지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덮고 있는 구름들을 걷어가는 과정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진 않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예수마음기도'를 반복할 때 거의 사투를 벌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반복해서 하는 말이지만 정말 '쉴 새 없이' 별의 별 생각들이 다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다 보면 '나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생각이 번득하고 일어난다.

기도의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기도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라면 그 만남을 방해하는 것들을 방치한 채로 기도할 수 있을까?
(계속)

(1. 예수마음배움터에 다녀온 후 노트 필기한 것과 내 생각을 정리하는 것  2. 위에 언급한 '예수마음기도'(권민자)라는 책을 주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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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의 성패는 하나님과 만남을 잘 가졌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
그렇다면 기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장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분심일까? 그럴 수 있겠다.
쉼 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이 기도를 방해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도하며 이 분심을 잘 살펴보면 오히려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돕는 소중한 소재가 될 수 있다.
내 마음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 또 어떤 쪽으로 향하고 있는 지를 알아챌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 가운데 분심을 정면으로 만나고 대화를 시도하며 그 정체를 알아가게 될 때
내 마음 안이 정리가 되고 결국에는 내 속 깊은 곳으로부터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계획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내 생각과 내 의지를 비우고, 쉼 없이 떠오르는 분심들을 하나하나 만나고 정리하며 위로하고 화해하다 보면
결국 하나님, 그 분과의 방해 받지 않는 만남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는 내가 의지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물론 하나님 앞에 있기 위한, 그리고 분심과 만나기위한 최소한의 훈련과 노력은 필요하다(예수마음기도).

그래서 기도를 정말 방해하는 것은 분심이라기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다.
자신의 의도, 자신의 생각대로 되게 하고자 하는 것들,
예를 들어 '기도의 제목'을 빙자해 끝없이 이어지는 '되게 해 달라'는 기도들 말이다.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위로를 받겠다고, 복을 받겠다고 하는 기도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엄밀히 말해서 이런 것들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만남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자기 주도적 기도의 목표들이 가득할 때 하나님이 다가 오시기 너무 힘들어 진다.
쉽게 그려보면, 하나님께서 기도자의 얘기가 끝나기를 기다리시다가 지쳐서 돌아가시는 형국인 것이다.
자신의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요원할 뿐이다.
마치 하나님을 목석으로 만든 우상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왜냐면 내 얘기만 들으면 되는 거니 말이다.

자기 이야기만 하고 오는 것이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 기도 가운데 나를 만남으로 초대하시는 성령님이 주도권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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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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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오래 해 오면서 기도에 대한 컴플렉스를 한 번 쯤 가져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저 사람은 저렇게 집중해서 기도를 잘 하는데, 나는 왜 시작만 하면 바로 딴 생각을 하는 거지?'
'저 사람은 저렇게 긴 시간 열정적으로 부르짓는데, 나는 왜 할 말이 별로 없는 거지?' 등등

특히 딴 생각의 문제는 쉬 해결되지 않는 것 같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념들, 그리고 심지어 졸음까지.
그래서 조용히 기도하는 것 보다는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일단 자신의 소리를 들으며 다른 것에 신경쓰지 않고 집중할 수도 있고,
슬쩍 졸음으로 빠지는 일도 방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통성기도라는 것이 모두에게 잘 맞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통성기도는 자신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하다보니
그 기도가 정말 하나님과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에
사실 마음 속으로부터 추천하고 싶은 기도는 아니다.
물론 기도를 성령께서 이끄신다고 할 때 내가 하는 말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통성기도 후에 갖는 심적 평안을 응답이라는 차원으로 설명하려 할 수도 있겠으나,
여전히 발산하는 것(한 풀이) 이상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한다.
(지극히 개인적 소견으로...)

할 수만 있다면 기도를 하나님과 소통하는, 하나님 만나는 시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게 될 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쉼없이 일어나는 다른 생각들이 문제다.
사실 이전까지는 이것을 잡념들이라 생각하고 '나는 기도가 잘 안 되'라고 생각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더 세게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사모하고 그렇게 쉼없이 내 이야기를 쏟아 놓을 수 있었을 때
스스로 크게 위안을 얻고 기도 잘 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마음배움터에서 영성피정을 하면서 이 잡념들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됐다.
잠잠해야 할 기도 시간에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좀 다른 말로 표현해서 '분심'이라고 하는데,
이 분심이 바로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는 것이다.
내 안의 무의식의 공간에서 끊임없이 의식으로 올라오는 생각들을 잘 살펴 보면
일종의 패턴이 있고, 그 패턴을 알게 되면 현재 나를 지배하고 있는 상처나 아픔의 그림자를 알게 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분심이 다 그런 것을 대변하지는 않기에 잘 살펴보고
경중을 따져보고 흘려 보낼 것은 흘려 보내고, 확인해 볼 것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놀랍고 재미있는 것은 기도 시간에 이 작업을 편한 마음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앉아서 마치 아빠 앞에 아이가 이야기 하듯
자신 안의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하면 된다.
심지어 자신을 얽어 매고 있었던 과거의 어떤 시공간을 접하게 되었을 땐
그 자리에서 그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그대로 풀어 놓는 것이다.
그렇게 분심을 알아차려 가다 보면 그 분심들에 가려져 있던 내 안에 하나님을
아무런 장애물 없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분심은 내가 살아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분심에 끌려 다니기 보다 그 분심의 정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
분심은 습관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을 만나면서도 우린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 같으면서도 금세 자신의 생각으로 돌아와 버린다.
그러다보며 자신의 이야기만 하기에 급급하기 마련이다.
만약 기도를 통해 분심을 알게 되고, 조절할 수 있게 된다면
사람들과의 만남 또한 변화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진솔한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또한 사람과의 진실된 만남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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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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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끄는 40년이라는 거창한 모토를 걸고 출애굽기를 출발했는데
이제 레위기라는 산을 넘기에 이르렀다.
사실 지난해 12월 초에 읽고 써두긴 했는데,
마무리를 못해 차일피일 미루다 마침표를 찍기로 굳은 결심을 하고 다시 왔다(떠났던 것 같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
레27장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28 어떤 사람이나 자기 소유 중에서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들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29 온전히 바쳐진 그 사람은 다시 무르지도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사람이 자신을 대신해 짐승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인 번제로 시작한 레위기는
사람이 자신을 드리기로 서원하고 그 값을 드리는 것에 대한 규정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레위기를 정의하자면 제사장 매뉴얼이고, 거룩한 삶을 위한 교과서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약속의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약속, 그것은 생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의 땅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고,
역시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으로 인해 죽어 가는 땅으로 이끄셔서
이들을 통해 그 땅을 생명의 땅, 살림으로 일구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녹아 있는 것입니다.
특히 레위기는 백성들은 물론 제사장들이 철저히 익혀 틀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이기에 어그러짐이 있을 때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율법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 짧은 구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서원할 때 이 율법에 적용을 받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서원하였다면, 바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제사를 드리려고 결심했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안다면 마음 내키는 대로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로 결심했으면서 갈팡질팡 우왕좌왕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출발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위해 일어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맺은 약속,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기본을 너무도 쉽게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레위기를 읽는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에 대한 각오를 새롭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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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배

깨어살리/돌소리 2008. 12. 4. 10:10
빈 배

배로 강을 건너는데
빈 배 하나가 떠내려오다가
그 배에 부딪쳤습니다.
그 사람 성질이 급한 사람이지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떠내려오던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당장 소리치며
비켜 가지 못하겠느냐고 합니다.
한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결국 세 번째 소리치는데,
그 땐 반드시 욕설이 따르게 마련.
처음에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 와서 화를 내는 것은
처음에는 배가 비어 있었고
지금은 배가 채워져 있기 때문.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능히
그를 해하겠습니까?

[장자] 오강남 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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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선 목적
레26장
40 그들이 나를 거스른 잘못으로 자기의 죄악과 그들의 조상의 죄악을 자복하고 또 그들이 내게 대항하므로 41 나도 그들에게 대항하여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 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받지 아니한 그들의 마음이 낮아져서 그들의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42 내가 야곱과 맺은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하리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의 발단은 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에게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신실함을 놓지 않는 쪽은 늘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광야에 들어서 한 해를 보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약속 파기의 가능성을 말씀하시며 경고하십니다.
경고는 미움의 표현이 아닌 사랑의 표현입니다.
죽이려고 하심이 아닌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현재 자신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크게 봅니다.
그래서 그 잣대로 상황을 판단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차원에서 그 상황을 보신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이미 오래전 해묵은 것이라 할 수도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언약을 이행하시기 위해
안간힘을 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죄악과 어떤 해괴한 짓을 해도 그들이 돌이키기만 한다면
조상들과 맺은 언약은 유효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대원칙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스스로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때에도
하나님께는 가능성이요, 소망의 싹은 변함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찾고 만나시는 최우선 목적은 그들을 살리시고 복주시기위한,
함께함으로 기쁨을 나누고자 하시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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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교육 시간
레25장
20 만일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21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22 너희가 여덟째 해에는 파종하려니와 묵은 소출을 먹을 것이며 아홉째 해에 그 땅의 소출이 들어오기까지 너희는 묵은 것을 먹으리라

이스라엘을 설명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되는, 아니 가장 우선적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들의 삶의 순환이 안식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나아가 인생의 순환까지도 안식일이 확장된 안식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한 명 한 명의 쉼의 문제에 관심이 있으셨듯이
땅의 쉼에도 역시 관심을 가지고 있으셨습니다.
땅의 쉼이란 결국 그 땅에 뿌리를 박고 생명활동을 이어가는 식물들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뽑아내면서 그려 가시는 이상적 공동체 안에
단지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땅의 쉼과 나무와 식물들의 쉼이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저주받은 땅이 하나님의 복 주심에 의해 풍성한 소출을 내지만
그 땅이 한 없이 모든 것을 내 놓을 수 있는 무한한 창고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땅의 생명력을 통해 무상으로 먹거리를 얻었으니
7년에 한 번 쉬도록 하여 재충전의 시간을 주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농부들에게 있어서 1년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업이 아닌 목축업을 하는 민족이었기에 처음부터 길을 잘 들이면 되는 문제이긴 합니다.
그래도 막상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20절의 말씀을 미리 하시면서 걱정하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 곧 믿음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을 나올 때 자신들의 가능성이나 소망을 보고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왔듯이
장차 들어가게 될 가나안에서의 삶 역시 하나님에 대한 믿음 가운데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땅의 안식은 6년 동안 일하여 먹고 살지만
단지 그들의 땀 흘림 만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교육 시간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주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땀 흘려 수고 하여 얻는 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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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처방
레24장
10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의 어머니가 이스라엘 여인이요 그의 아버지는 애굽 사람인 어떤 사람이 나가서 한 이스라엘 사람과 진영 중에서 싸우다가 11 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며 저주하므로 무리가 끌고 모세에게로 가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슬르밋이요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었더라 

레위기는 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시는 제사와 제사장과 관련된 율법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사건은 거의 없습니다.
그 희소한 사건에 두드러지게 등장한 것이 두 번의 죽음의 사건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직접 아론의 두 아들을 죽이신 것이고(10장),
두 번째는 레위기 24장에 등장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사건입니다.
그의 죽음의 이유는 하나님(신성)모독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을 모독한 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과
그의 출생 배경을 통해 광야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다른 피를 가진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중요한 고비마다 불만 세력으로 활동했을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출애굽 관련 영화를 보면 다양한 종족들이 함께 나오는 것을 볼 수 있고,
그들을 중심으로 모세를 대항한 폭동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힘들 때마다 이들은 순수 이스라엘의 후손들보다 애굽을 더 추억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광야 40년이라는 형벌은 이런 불순한 동기들을 씻어내기 위해서도 필요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합니다.

아무튼 하나님을 모독한 것은 하나님의 귀에 들렸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이지만
그 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들렸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로 부각됩니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함부로 오르내리게 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도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질 수 있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존재와 상관없이 백성들의 의식 속에 하나님 상이 격하되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향한 자세 또한 흐트러질 것이 뻔합니다.

한 번 잘못할 것이니 그의 목숨을 가엽게 보고 용서해 줄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이제 겨우 걸음마를 땐 이스라엘 공동체에겐 그런 일을 감당할 충분한 내공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 아프지만 그를 돌로 쳐 죽이는 극약처방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가지고 하나님이 잔인한 신이니 뭐니 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수한 한 명의 인권도 소중히 여기시지만, 전체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시기 위한 선택을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주의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그의 머리에 안수를 할 때,
하나님 역시 슬픈 마음을 갖고 지켜보고 계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않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후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건들로 가득하게 됩니다.
공동체를 위해서가 아닌 한 개인을 위해 제사장을 임의로 세우거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들러리 정도로 여기는 경우도 많았으며
목석으로 하나님을 대신하게 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저질렀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오히려 즉각적으로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고, 대응하실 때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를 씻을 수 있은 방법을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버려 두실 때는 그 일들이 어떤 결과로 종지부를 찍게 될 지 긴장가운데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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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은 에니어그램과 함께한 한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연말에 2008년 에니어그램 교육일정을 모두 정하고 참가비까지 입금하고 밀어 붙였다.
그렇게 해서 결국 지난 10월에 지도자과정까지 모두 마치게 되었다.
그래서 에니어그램을 마스터했을까?
대답은 '아니다'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게 말하겠지만 최소한 나는 에니어그램이라는 것이 실체가 없다고 생각한다.
에니어그램은 누군가 그 앞에 섰을 때 형체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것이라 할까.
그러니 에니어그램은 도구이고 그 앞에 선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습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니어그램을 잘 알게 되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자신을 잘 알게 되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 말의 연장선상에서 얘기하면, 나에 대해서 알아가는 과정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에니어그램을 여전히 잘 모르겠다고 하는 말이 맞는 표현이라는 거다.

그런 차에 지난 목요일과 금요일에 에니어그램 첫 번째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것도 마산까지 내려가서 말이다.
물론 마산이나 되니 에니어그램에 대해 배우겠다고 나를 부를지 않았겠나.
아무튼 강의를 가겠다고 약속하고 날짜가 좁혀들수록 감당하기 어려운 압박감에 시달려야 했다.
3번 유형! 나의 유형인데, 이 유형은 뭐든 잘 하기를 원하는 데 문제는 잘 못할 것 같은, 그러니까 실패할 것 같으면 회피하려 드는 바람에 날짜가 임박해 올수록 안 하면 좋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흐르는 거다.
그래서 정말 한 주 전에는 전화를 해서 혹시 취소할 상황은 아닌지 확인까지 하고 말았다.
그러나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약간의 절망과 함께 다급해진 마음에
있는 자료, 없는 자료 모아서 강의안을 만들고,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만드느라 며칠 밤을 지새웠다.
왜냐면 잘 해야 하니까. 잘 하려면 준비를 잘 해야 하는 거고.

강의를 준비하면서 7번 유형의 목사님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다.
나는 잘 짜여진, 잘 준비된 상태에서 많은 내용을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목사님은 내용보다는 몸으로 느끼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강의만 듣고 가게 되면 남는 것이 없다는 얘기였다.
물론 7번 유형들은 낙천주의자이고 재미를 추구하기 때문에 강의를 해도 그리 부담을 서로에게 지우지 않고 즐겁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도 나의 장점과 그 목사님의 이야기를 받아들여서 체험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내용을 담아내기로 했다.
물론 또다시 강의안을 뒤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하든 진행해야 할 내용을 꼼꼼하게 담아가야 한다는 것이 내 주의니까 말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두 시간 반 씩 두 번의 강의를 했다.
웜업을 위한 게임들과 그룹작업을 적당히 넣어서 내용을 몸으로 체험하게 했다.
막상 진행하면서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많은 내용도 필요하지 않고,
걱정했던 것과 같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익했다는 나름대로 좋은 반응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 문제는 항상 나에게 있다.
에니어그램의 목표점이 하나님의 자유하심과 같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면,
난 나를 알아가고는 있지만 자유로워지는 것에는 아직 턱없이 먼 여정을 남겨두고 있다.
실패를 회피하고, 잘 해야 한다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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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맛보기
레23장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것이 나의 절기들이니 너희가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3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의 날이라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안식일/ 유월절(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과 무교절(첫째 달 열닷세날부터 7일 동안)
첫 곡식단을 바치는 명절(곡물을 거둘 때 첫 이삭 한 단을 바침, 안식일 이튿날 흔듬)
칠칠절(곡식단을 요제로 드린 날부터 50일)/ 설날(일곱째 달 첫 날)
속죄일(7월 10일)/ 초막절(7월 15일부터 7일 동안)

사람이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부터라 할 수 있습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에덴동산에 각종 나무의 실과를 먹으며 유유자적 할 수 있었을 텐데,
금단의 열매를 먹으면서부터 저주받은 땅을 가는 일을 해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다양한 많은 일들이 있지만 당시의 일이라면 농사와 집 안팎의 일이 고작이었을 것이지만,
먹고사는 문제라는 것에서는 동일하다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는 인생들이 6일 동안 자신의 삶을 위해 땀 흘리고,
일곱번째 날은 구별하여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하시지만, 류가 다른 일인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바로 에덴동산에서 있었을 법한 분위기를 만들어 보시려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일 동안은 사람을 위해 일하지만,
일곱 번째 날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면서 저주의 삶을 살도록 하셨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며 누렸던 그 삶의 내용을 맛보도록 허락하신 것이 됩니다.
그러니 결국 안식일 또한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이죠.
바리새인들은 이를 오해하여 그 제도 자체를 수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모든 막히고 얽힌 것들을 풀어주기 위한 날로 생각하시며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각에 한 발짝 더 다가가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레위기 23장에 정리되어 있는 유대인들의 절기들 역시 이 안식일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절기들을 '나의 절기', '여호와의 절기'라고 하시지만,
절기 역시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배려가 배어있는 사람을 향한 선물이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과 절기를 지킬 때 하나님의 숨결 안에서 참 자유를 느끼고 쉬어야 했듯이
오늘 우리들도 소위 안식일이라고 말하는 주일이나 신앙생활을 위해 구별한 시간 가운데 있을 때
환경이나 성과들에 구애됨 없이 하나님 안에서 쉼의 체험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 만남의 기억, 에덴을 맛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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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예절
레22장
2 아론과 그의 아들에게 말하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이 내게 드리는 그 성물에 대하여 스스로 구별하여 내 성호를 욕되게 함이 없게 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오늘을 살아가며 레위기를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소위 율법이라고 하는 것들, 특히 생활에 관한 것들이 아닌 제사와 관련된 것들이라면 더욱.
그러면서도 레위기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율법 하나하나를 이르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가 찾고 믿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놀라움이 아닐 수 없다.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3천 년 전에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민족을 붙들어 놓고
꼼꼼하게 이르신 가르침이 바로 레위기이고 구약의 율법들이다.
그러니 때로 이게 뭐야? 하면서 치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지만
다시금 붙잡고 씨름해야 하는 이유가 충분해 진다.
'왜 하나님은 그 때, 왜 하나님은 그들에게, 왜 하나님은 이것을 중요하게 강조하셨을까?'라는 식의 물음들을 들고서 말이다.
그렇기에 평면적이고 문자적 접근보다는 입체적이고 의미적 접근을 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 아닐까.

22장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무슨 결벽증 환자 같다(하나님, 표현을 용서해 주세요!).
눈에 띄는 단어들이 구별, 부정, 성물, 정결, 더럽히지, 속되게, 죄, 흠 등이기에 그렇다.
하나님께 바쳐졌던 성물을 먹는 문제와 바칠 제물에 관한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하나님과 식탁에 마주 앉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크신 하나님과 식탁에 마주 앉다니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 줄 그들은 알았을까?
예수님과 함께 만찬을 즐기며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보지 못했던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걸음마 단계를 막 지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똑바로 걸을 수 있도록 정도를 가르치고 계신 것이리라.
그러니 아무나 아무렇게나 참여할 수 있게 허용하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격을 정하시고, 그들의 몸 상태까지 따져 묻도록 하시는 것이다.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겉모습 이야기를 하실 수밖에 없다.
사실은 마음이 없다면 겉모습도 제대로 갖추기 쉽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겉모습으로 그 속마음까지 판단해 버리는 세태이다.
각자의 다른 형편을 헤아려 보려하는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

레위기가 말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예절이 겉으로 만의 형식이 아닌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심이 될 수만 있다면
그래서 마음이 통하는 일이 생긴다면
때로 겉모양이 조금 미흡해 지는 일이 있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진실된 믿음의 자세는 외모를 압도하는 정결함이 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식탁에 우리들을 초청하시며 바라시는 것이 이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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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을 뗄 때
레21장
6 그들의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들의 하나님의 이음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들의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왜 항상 다른 삶을 요청하시는 것일까요.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이 더 편하고 즐거울 수 있다면야 누구나 손들고 껴들려고 할 테지만,
그렇지 않고 더 어렵고 힘든 여정이라면 누가 그 길을 선택하려 할까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쩌면 힘겨운 현실을 보내고 있습니다.
노예이긴 했지만 안정된 삶의 자리에서 떠나 집도 절도 없는 광야에서 불확실한 내일을 향해 하루하루를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더욱 기막힌 것은 모세라는 지도자를 통해 하루가 멀다 하고 율법이라는 강화된 행동지침들이 하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조금은 과장을 해서 표현해 본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들을 읽으며 나와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조차 머리가 아픈데 당시 사람들은 오죽했을까요.
더구나 제사장들은 더욱 엄격하게 율법이 적용된다고 말씀하시는 대목에서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요.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놓고, 한 켠에 나와 상관이 없을 거야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지는 않았을지.
아, 당시 사람들의 수준을 너무 높여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정보와 지식수준은 아니었을 테니 말입니다.
일단 그들이 당시 처한 상황과 거기까지 오면서 목격하고 경험한 사건들이 그들에게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시켜 놓았으니 이런 요구 앞에 불평할 수 없는 것이었겠죠.

어쩌면 하나님께서 21장의 말씀처럼 제사장과 관련된 말씀을 주시면서
'내가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라고 생각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든 나(하나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언제든 어떤 상태이든 찾아올 수 있도록 하고
뭐 이런 저런 전재조건을 달아 놓는다는 것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수준의 문제일 수 있어 보입니다.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수준을 결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에게 열어 놓으신다고 성막을 아무렇게나 허름하게 만들어 놓고
제사장은 아무나 하고 싶다는 사람으로 하게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 수준으로 생각하고 격하시켜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까다로운 절차를 따라 성막과 제사장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크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의 한계를 아시고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서 한 발 떨어져 서 계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중간에 성막도 있고, 자격을 갖추고 잘 훈련된 제사장들이 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래서 수준이 높아지면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던 그 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볼품없는 한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인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는 돼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하나님께 이르는 과정에서 한시적으로 주신 몽학선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율법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젖을 뗄 때를 알아야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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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시티의 어느 큰 시장 그늘진 한구석에 포타-라모라는 나이든 인디언이 있었다.
그는 자기 앞에 20줄의 양파를 매달아 놓고 있었다.
시카고에서 온 어떤 미국 사람이 다가와서 물었다.
“양파 한 줄에 얼마요?”
“10센트입니다.”
“두 줄은 얼마요?”
“20센트입니다.”
“세 줄에는 얼마요?”
“30센트.”
“세 줄을 사도 깎아 주지 않는군요. 세 줄을 25센트에 주실래요?”
“안 됩니다.”
“그럼, 스무 줄 전부는 얼마에 파시겠습니까?”
“나는 스무 줄 전부를 팔지는 않습니다.”
“안 판다니요? 당신은 여기에 양파를 팔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나는 내 삶을 살려고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합니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서라피(멕시코나 중남미에서 어깨걸이나 무릎덮개 등에 쓰는 색깔이 화려한 모포)를 좋아합니다. 나는 햇빛과 바람에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합니다. 나는 페드로와 루이스가 와서 ‘부에노스 디아스’라고 인사하고 담배를 태우며 자기 아이들이나 곡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런 것들이 내 삶입니다. 그것을 위해 나는 종일 여기 앉아서 스무 줄의 양파를 팝니다. 그러나 내가 내 모든 양파를 한 손님에게 다 팔아 버린다면, 나의 하루는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럼, 나는 내 사랑하는 것들을 잃게 되지요. 그러니 그런 일은 안 할 것입니다.”

『동물기』시튼

삯을 위해 일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삶을 위해 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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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을 물리치면
레20장
7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26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사형에 해당하는 것들(2-21절) - 몰렉 섬김, 접신자와 박수무당 따름, 부모 저주, 간음, 근친상간, 동성애, 수간


세상 어느 것도 하나님의 숨결이 닿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비록 죄악으로 물들어 있는 가나안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잘라내려고 하실 때 어찌 마음 아프지 않으실까요.
그것은 마치 당신의 지체 하나를 절단하는 것과 같은 고통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세계를 운영해 가시면서 뒤틀린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어쩌면 방치해 더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백성들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마치 농부가 묵은 땅을 갈아 엎고 씨앗을 뿌리듯이
뒤짚어 엎을 땅 가나안에 뿌릴 이스라엘이라는 씨를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씨앗을 향해 쏟으시는 하나님의 깊은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그 말씀이 하지 말라는 말씀에 집중이 되지만 그 이면에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 지금 광야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을 향한 집중을 계속해 주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속 드러나는 이 백성들의 경솔함과 무개념의 행동들은 하나님의 걱정을 증폭시켰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하셨던 것들을 다시 반복하시며 한 발 더 나아가 사형선고까지 하시는 것입지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에서 벗어난 삶의 목록들, 가나안에 팽배한 삶의 양태들과의 단절만이 거룩한 삶,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담보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나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 유혹들은 성곡적인 훼방을 위해 악착같이 물고 늘어질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승리할 때, 유혹을 물리칠 때만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이 자신들의 것들이 될 텐데,
아직은 미래적 일들이기에 긴장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바로 레위기 20장과 가나안을 매일 오가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유혹의 땅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옮겨 다니며 각각의 영역에 효과적으로 적응하는 법을 익힌듯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유혹이 유혹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제 더이상 하나님의 애간장을 태우는 일은 그만두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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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지람 속에 자란 아이
비난하는 것을 배우고

미움 받으며 자란 아이
싸움질을 하게 된다.

놀림 속에서 자란 아이
싸움질을 하게 된다.

창피를 당하며 자란 아이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관용 속에 자란 아이
참을성을 알게 되며

격려 받으며 자란 아이
자신감을 갖게 된다.

칭찬 들으며 자란 아이
감사할 줄 알게 되고

공정한 대접 속에 자란 아이
정의를 배우게 된다.

안정 속에서 자란 아이
믿음을 갖게 되고

인정받으며 자란 아이
자신을 사랑할 줄 알게 되며

인정과 우정 속에서 자란 아이
온 세상에 사랑이 충만함을 알게 된다.

도로시 로 놀트(Dorothy Law Nolte)

‘어린이가 꼭 필요로 하는 일곱 가지’(존드레셔 지음, 생명의말씀사) 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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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은 사랑이다.
레19장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한 몸에서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란 분리됨의 결과물 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자 다른 모양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자신들의 본래적 정체성을 망각했기에 하나님께서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강조하시는 거룩, 특히 레위기를 통해 보여주시는 거룩의 모델은
바로 이와 같은 분리되고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시키시려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부모이든, 가난한 이웃이든, 일꾼이든, 종이든
거꾸로 재판관이든, 부자들이든 간에
서로를 향해 형제라고 말할 수 있게 됨으로
그래서 한 부모 아래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존재임을 각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로서 산다는 것은 단지 모든 것을 허용하는 관계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하시듯이 바른 원칙을 갖고 그 쪽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전재됩니다.
왜냐면 천지창조에서 보여주셨듯이 하나님은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질서는 단지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짐승에서 식물에까지도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자하는, 하나님의 백성 됨을 깨닫는 사람은
사람과 일, 사물을 보면서 사람의 기준과 원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과 원칙,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미 그 모든 것에 하나님께서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보지만 하나님을 보고, 짐승을 보면서도 역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야곱이 형 에서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하듯 한다는 것이 바로 거룩한 삶이 아닐까요.

만물에 깃든 하나님, 그 생명을 알아 볼 수 있는 눈을 키우고,
그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아끼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로부터 하나님의 마음과 만남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관계를 나누고 차별하다 못해 멸시하고, 적대하다 못해 학대하며, 책임전가하는 것이 아닌
모두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됨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은 결국 당신을 모함하고, 때리고, 채찍질 하고,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한 사람들을
용서하며 품으신 예수님의 모습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을 거룩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로 볼 뿐만 아니라
바로 자신으로 느끼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겐 너와 내가 따로 없고, 그 누구도 하나님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으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땅에 살지만 하늘을 만날 수 있는 삶,
마음 열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는 삶.
이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추가>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만난 때, 내 안에 하나님과 상대방 안의 하나님이 만나는 것.
그러므로 결국 내가 나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희로애락이 나의 것이 된다.
같이 느끼는 세상,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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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로가 지나면 감을 따고 깎아서 매 달아 곶감을 만든다.
우리 동네(상주시 모동면)는 봄에 서리 피해가 있어서 감이 좀 덜 달렸다.
작년에는 우리 집에서만 6천 개가 넘게 깎았는데, 올 해는 4천 개를 조금 넘겼다.
어쨌든 적은 양이 아니어서 작업을 지원하기 위해 시간을 내서 내려갔다.
어머니 말씀에 감 따기의 달인이 되신 아버지 덕분에 딸 감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감도 3분의 1은 이미 깎으셔서 나머지 감을 깎는 일을 함께 했다.
그런데도 안 하던 일이라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칼을 힘주어 줜 탓에 손도 아프다.
젊은 나도 그런데, 부모님이야 오죽 하랴.
3박4일 머물다 이른 아침 떠나오는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다.
워낙 부지런하신 어머니는 또 어떤 일거리를 찾아서 쉬지 않고 움직이실지.

아무튼 이렇게 작업한 곶감은 1월 초순이면 상품이 된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적잖이 보탬이 될 거다.


잘 익은 감을

따고

모아서

1차로 위를 돌려깎고

2차로 몸통을 깎아

모아 놓았다가

줄에 매단다. 예전에는 줄에 달았는데, 요즘에는 끼우기만 하면 되도록 하는 소품들이 나와서 편리하다.
좀 더 지나면 얼마나 더 편한 것들이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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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질서_또 하나의 약자 보호
레18장
24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이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땅을 더럽히는 일-근친상간
어머니(아버지의 다른 아내), 누이, 손녀, 외손녀, 고모, 이모, 숙모, 며느리, 형제의 아내, 아내의 자매
여인과 그 여인의 딸 혹은 손녀나 외손녀 함께 취함 불가, 자녀를 몰렉에게 주는 일, 남자가 남자와, 짐승과 교접

예전에 어떤 집에서 개를 키웠다고 합니다.
암컷이 새끼를 낳았고, 수컷인 새끼가 자랐는데
어느날 주인은 애미와 새끼가 교미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놀란 이 아저씨는 몽둥이를 들고 둘 다 죽여 버리겠다고 달려들었다고 합니다.
그 때 아주머니가 아저씨의 팔뚝을 잡고 말리며 '그러니까 짐승이죠!'라고 했다고 합니다.
물론 개를 길러 보면 아무리 커도 최소한 지 새끼는 알아보는 것 같은데,
아마 그 어린 수놈이 정신 줄을 놓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짐승과 사람의 다른 점은 짐승은 온전히 본능적으로 산다는 것이고,
사람은 본능이 있지만 이성적으로 조절하며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기 몸뚱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질서를 알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짐승처럼 사는 일이 만연하게 된다면 그것은 몸과 마음이 더럽혀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만 더럽혀진 것이 아니라 땅까지도 더럽혀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시며 지금은 더렵혀진 가나안의 사람들을 쫓아내시지만
강조점은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사전에 경종을 울리시는 것입니다.

좀 다른 측면으로 보면 성적 문란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힘이 약한 남자들은 그가 일가친척이라도 그에게서 자신의 아내를 지킬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작은 자들의 슬픔과 한이 쌓이는 사회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이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해 낸다는 말씀은 너무도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약자를 보호하는 문제는 전체 사회를 지키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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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주인
레17장
14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그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

초등학교 2학년 때 영종도에 있는 큰집에 놀러갈 일이 있었습니다.
큰어머니께서 갯벌에 조개를 잡으러 가셔서 저녁에 마중을 가려고 우물가를 지나가는데
동네 어른들이 개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바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간을 잘라서 먹는 것이었습니다.
'인간들의 잔인함이라...'뭐 대충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것 때문인지 저는 익힌 것이라도 간을 먹지 않습니다.

뭐 지금 시대에 피를 먹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논의는 별 의미는 없어보입니다.
혹자는 짐승이 죽을 때 피에 사람에게 해로운 성분들이 들어가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하니
그것이 사실이라면그런 뜻에서야 먹지 말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시는 지 그 뜻을 생각해 보는 것이 되겠죠.

하나님께서 노아의 시대로부터 육식을 허락하셨지만, 그 때도 피를 먹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면 그 피는 곧 생명을 대변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짐승을 취할 때 부득불 그것의 생명을 빼앗을 수밖에 없지만,
그 생명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피를 구별함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릴 때 피를 구별해서 드리는 행위나,
짐승을 잡을 때 피를 땅에 쏟고 흙으로 덮은 후 고기를 먹도록 하신 것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신 것이 아닌지.
피로 상징되는 생명은 사람의 영역이 아닌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또 자신의 생명, 이웃의 생명이 바로 하나님의 것임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부여하신 생명 이상 무엇을 더 하나님께 구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허락하신 것들을 마음껏 누리되
그것의 주인이 내가 아닌 하나님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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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해진 이유
레16장
1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에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3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삼고 숫양을 번제물로 삼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삶()이면서, 동시에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이시기에
인간이 그 하나님과 마주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선한 동기와 상관없이 비극은 일어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전적으로 사람에게 있습니다.
사람의 잘못, 더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면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서 주어지는 율법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기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보다 가까이에서 만나고 싶어 하셨지만,
그러다가는 사람들이 죽을 것임을 알고 계셨기에 최대한 안전한 방법의 하나로 성막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쉽게 접근하도록 노력하셨지만
이미 10장에서와 같은 사건을 거치며 더 분명한 지침의 필요를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16장의 내용은 그런 이유 때문에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 사람, 대제사장이 죽고 사는 문제는 전체 이스라엘 공동체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에 더욱 중요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구약 시대처럼 짐승을 잡으면서 복잡하고 힘든 제사를 드리지는 않지만
나름 짜인 순서에 따라서 예배라는 것을 드립니다.
또 개인적으로는 큐티(묵상)를 하더라도 자기만의 순서를 따라서 하게 됩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존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오로지 사람을 위해서, 그들이 하나님과 만남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의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란 얘기입니다.
성막에 대한 얘기에서나 제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미 말씀을 드린 내용을 또다시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복잡한 절차를 만드실 의지가 없으셨을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보다 쉬운 방법을 주시려 했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 둘 더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좀 더 단순한 길을 열어가는 그리스도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에 얽히고설킨 것들을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모세처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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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출병'에 와서 멈춰버렸습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이 유출병 이야기를 가지고 너무 '영해'를 한 나머지
교회 공동체 내에 유출병이 걸린 것과 같은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은 나병에 걸린 사람들보다 더 위험하다는 식의 글을 올려놓은 것도 보았습니다.
때로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말씀을 끼워 맞추기 식으로 해석하는 함정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함정이라기보다 습관이고, 또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줄로 알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혹시 저도 그런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았습니다.
어쨌든 15장만 지난다면 레위기의 가장 험한 능선을 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 힘을 내고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쉽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진솔한 공동체
레15장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자라

정상적이지 않게 몸에서 체액이 흘러나왔을 때
당시로서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지에 대해 잘 알 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병리적인 것인지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로 인해 공동체를 위태롭게 할지도 추측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단 거리를 두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정하다고 하시고, 절차와 기간을 정해주십니다.

결국 이 역시 제가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정함과 부정함을 관계의 측면에서 이해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의 건강을 해치지 않고, 소중하게 여겨줄 수 있는 상황은 선하고 정한 것이고,
반대로 그럴 수 없는, 때로는 그것을 판단할 수 없을 때는 일단 거리를 두고 부정하다고 하며 안전을 기하도록 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나병에 대한 진단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출병이 있을 때도
부정하다고 하며 특별한 절차를 밟는 것은 그 사람을 정죄하고 죄인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사자와 함께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진단이 사라질 때 공동체는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서로를 향한 진심어린 관심의 부재, 또 속내를 깊이 감추는 데서 야기됩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역할은 공동체를 보다 진솔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더이상 말할 수 없는 것이 없는, 또 어떤 허물이든 정화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전하시는 율법의 목적지가 어딘지 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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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는 복음
레14장
2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3 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병 환부가 나았으면

나병으로 판정을 받은 사람이 정하게 되었을 때 치뤄야 하는 절차를 명하십니다.
나병환자를 다루는 근본 이유는 그를 격리하여 공동체 전체로 질병이 번져가는 것을 막는 데 있기도 하지만
한 사람이 질병으로인해 영구히 공동체로부터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데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병환자가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절차를 본 장에서 설명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는 규례를 주시는 이유는 공동체와 분리하고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하려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제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보게 하지만
제사를 통해 살아 마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레위기를 '레위복음'이라고도 합니다.
앞의 맥락에서 봤을 때 좀 다른 말로 하면 '살리는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한 사람을 살리고, 전체 공동체를 살리는 말씀이 바로 레위기가 담고 있는 율법인 것입니다.
사실 율법의 정신은 어렵고 무거운 짐이 아닌 백성들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율법은 일부 계층에 의해 오용되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닌 죽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의 제도와 교리, 관습들도 그 의도와 달리
일부 사람들에 의해 오용될 때 사람들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혁자들의 말처럼, 교회는 '늘 개혁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세워 살아가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병 판정을 받고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떨어져서 보낸 죽음같은 시간을 벗어나
제사장의 손에 이끌려 정결을 위한 절차를 밟을 때 그 기쁨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기쁨을 모든 이들에게 전할 책임이 오늘 우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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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날에 군대 폐지를 외치며 알몸시위를 한 강의석!

강의석은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유명해진 친구다.
이름만으로도 잘 알려진 기독교 사학에서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 덕분에 지금은 서울대 법대에 다닌다고 한다.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사회에 강의석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누가 어떤 말을 하면 그 말이 옳으냐, 지금 시대에서 할 수 있는 얘기냐를 따지며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켜버리는 풍토가 사라지고,
누구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 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것이 진정한 양심의 자유가 아닐까.
주눅이 들어서 제대로 의사표현도 못하고, 다수가 가는 길로만 조용히 가려는 것이 오늘 우리의 초상이 아닌가.
미덕이라는 이름으로 눈치 보며 숨죽이고 순응하며 말도 잘 못하고.

누군가 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말을 하는 것을 받아 줄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다수의 힘으로 소수의 의식을 죽이는 일이 없는 사회가 된다면 좋겠다.
또 그런 생각과 말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지도 말아야 겠고.
그래서 저렇게 알몸으로 군대를 없애라느니 쇼를 해도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누가 알몸으로 시위를 했다고 호들갑을 떨게 되지도 않겠지.
아직 그렇지 못하니 강의석이 이런 퍼포먼스로 자신의 존재를 전국적으로 알리고도 남는 것이다.
맞다 틀리다는 논의를 넘어서 자유롭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그려본다.
맞으면 어떻고, 또 틀리면 또 어떤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잴 수는 없는 것이니.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가 지금 옳다고 철통같이 믿고 있던 것들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될 수도 있는 것을.

그러니 우리 '아! 저 사람은 저런 생각을 하는 구나'라고 생각하며 별 일 아닌 듯 지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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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거룩
레13장
2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의 중요한 업무 하나는 백성들의 피부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혹시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겼을 때는 지체 없이 제사장에게 가서 그 곳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차에 따라서 꼼꼼하게 관찰하고 그것이 정한지 부정한지를 판가름내 주어야 합니다.
절차에 따라 꼼꼼하게 관찰한다는 것은 환처가 어디이든 그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거의 만지다시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제사장이 자신을 '난 거룩한 제사장인데, 이런 더러운 일을 할 수 있겠어!'라는 생각으로 이런 일들을 기피한다면 아마 전염병으로 변해 백성들에게 큰 재앙을 맞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일은 단지 한 사람의 피부병을 살피는 것이 아닌 전체 백성의 생명을 돌보는 일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의 거룩한 직임은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곳에서 그 일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물이 없어 잘 씻지 못해 발생하는 피부병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큰 재앙으로 죽을 수도 있는 것을 면하게 하시겠다는 깊은 배려하심이 머무는 곳이 바로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의 거룩한 일은 바로 질병으로 더러워진 살갗을 살피고 만지는 일인 것입니다.
제사장의 일이 성전에서 멋들어진 제사를 집례하기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요사이 목회자들의 다수는 여전히 열악한 삶을 살고 있지만(이 표현에 반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눈에 띄는 몇몇 교회의 목회자들이 끝없는 영광과 힘을 좇는 모습을 봅니다.
물론 과거 그들의 삶은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으로 정당화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거룩하다고 말하는 사람으로서 한 쪽으로 너무도 멀리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많은 젊은 목회자들이 그런 소위 출세한 목회자들의 모습을 선망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빨리 그쪽으로 길을 정하고 그 노하우를 전수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하나님이 열어 두신 길이 아님을, 거룩한 사역의 길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아파하는 한 사람을 찾아 그가 온전해 질 길이 어디에 있을 지 함께 고민하는 모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구유에 오시고, 먼지 날리는 길을 걸으시며, 냄새 나는 옷을 걸치셨지만
그 분이 하신 일들, 만난 사람들, 가신 길로 인해 거룩한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들만 탓할 일도 아닙니다.
성도들은 말씀 좋은 교회를 찾아 다니며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만 '나홀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곪아 터진 부분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은총 안에서 산다는 것은 단지 홀로 가능한 일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 돕고 힘을 주는 관계의 형성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은 그 안에서 거룩함으로 역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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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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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받은 기간
레12장
7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남아를 낳으면 - 7일 부정, 33일 후 산혈이 깨끗하여 짐
여아를 낳으면 - 14일 부정, 66일 후 산혈이 깨끗하여 짐
번제(일 년 된 어린양)와 속죄제(집비둘기나 산비둘기)를 드림
힘이 양에 미치지 않으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세 마리

하나님께서 출산을 한 여인이 남아든 여아든 정해진 기간이 지나 산혈이 깨끗해 질 때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는 규례를 주십니다.
산혈이 깨끗해지고 속죄제를 드리는 것인지, 속죄제를 드림으로 산혈이 깨끗해지는 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정해진 기간에 맞추어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남아를 낳았을 때와 여아를 낳았을 때의 기간이 다른 지에 대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남성과 다른 여성의 특별한 신체와 관련한 규례는 15장의 유출병과 이곳에 있는 출산과 관련되어 등장합니다.

이 율법대로 한다면 출산한 여인은 최소한 40일에서 80일 동안은 분리된 생활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격리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본인은 물론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대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출산한 여인에 대한 배려를 하신 것은 아닐까요?
요즘 말로 하면 몸을 풀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보장해 주신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남아는 40일, 여아는 80일이라는 문제가 또다시 나오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여아를 낳은 것으로 특별히 산모를 더 쉬게 해 줄 필요는 없어 보이니까요.

이 문제를 원죄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이도 있는 것 같은데,
가볍게 성경을 읽어 가면서 그런 복잡하고 고차원적이기까지 한 추론을 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공동체 내에서 여인이 출산을 했을 때의 규례를 정해 주심으로
여성들이 감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공식화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은 아이를 출산했을 때, 지켜야 할 기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여인에겐 보장받은 기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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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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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레11장
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육지의 모든 생물 중 먹을 만한 생물 -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
먹지 못할 생물 -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만 충족하는 집승(낙타, 사반, 토끼, 돼지)
물에 있는 것 -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
새 중 가증히 여길 것 - 독수리, 솔개 물수리, 말똥가리, 말똥가리 종류, 까마귀 종류, 타조, 타흐마스, 갈매기,
                                새매, 올빼미, 가마우지, 부엉이, 흰 올빼미, 사다새, 너새, 황새, 백로, 오디새, 박쥐
혐오할 곤충 -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나는 것
먹을 수 있는 곤충 - 앞의 조건에 뛰는 다리가 있는 것(메뚜기 종류, 베짱이 종류, 뀌뚜라미 종류, 팥중이 종류)


이쯤에서 거룩이라는 말을 정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거룩의 정의를 하기 전에 제 경험담 하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열심이 특심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친구와 금요 철야기도회를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다녔습니다. 학기 중에는 가끔 가고, 방학 때는 거의 매 주 갔던 것 같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순복음교회의 특징은 뜨거운 기도에 있습니다. 2,3시간여의 1부 예배가 거의 12시까지 진행되는데 마칠 즈음 뜨거운 통성기도를 합니다. 그것이 마치는 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쉬는 순서가 있었다기 보다는 그 때가 쉬기에 적당해서 늘 밖에 나와서 어묵 같은 것을 사 먹고 들어갔습니다. 어느날 쉬는 시간에 나가려고 하는데, 옆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께서 아무래도 순복음교인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어디서 왔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회에서 왔다고 했더니, '아하~ 그 거룩 거룩 하는 데요!' 하는 겁니다. 물론 평소 장로교인들의 모습을 거룩거룩한다고 표현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듣는 것은 좀 당혹감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 제 입에서 나온 말은 ' 거룩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였고, 그 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출출한 배를 채우고 들어와서는 좀 미안한 마음에 좀 전에는 죄송했다고 사과를 했고, 아마 그 아주머니도 겸연적어 하시며 미안하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교회에까지 가서 철야집회에 참석할 정도의 청소년을 너무 과소평가 했던 거죠.

아무튼 그 당시 저는 거룩에 대한 분명한 뜻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습니다.
그 뜻은 '죄와 분리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면 레위기 11장에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짐승들을 말씀하시며 요청하시는 거룩의 뜻이
제가 어린 시절 배워 알고 있었던 그것과 같은 것일까요?
거룩의 뜻을 사전적으로 찾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이 거룩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도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것이 더 정확한 뜻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3)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출 13:2)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

안식일을 명하시며, 모세를 만나 신을 벗으라고 하시며, 유월절을 재정하시며, 또 위에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성막과 제사장과 관련하여 반복해서 거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거룩이라는 단어는 사람과 사람 간에서 나온 말이 아닌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어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사람 쪽보다는 하나님 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은 단지 깨끗하다 더럽다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셨을 때 깨끗할 장소가 어디며, 깨끗할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거룩은 더럽고 추한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장소와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은 수평적인 비교를 통해 어떤 특별함이 아닌 것입니다.
안식일이라는 한 날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 날을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기에 거룩한 것이고,
모세가 선 땅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곳에 계셨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고,
처음 난 것이 거룩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하나님께 바쳐지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니 반대로 부정하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정한 어떤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의 상태가 부정한 것입니다.

부정한 동물과 정한 동물을 이야기 할 때
깊이 들어가면 그것의 생물학적 이유들을 뒷받침해서 논의를 진행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것들을 먹는 것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뭐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전제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의복을 입을 때 거룩한 옷을 입은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전제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식생활에 대한 규례들을 받을 때 그 음식은 거룩해 지고 백성들은 거룩한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짐승이 어떠한 것은 상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 복잡해 지기는 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것은 거룩하고, 어떤 것은 정하다 혹은
어떤 사람은 죄인이고, 어떤 사람은 의인이다 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지양하지는 얘기입니다.
예를들어 주초의 문제만 놓고 봐도 어떤 교회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고 또 어떤 교회에서는 정죄가 됩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을 붙들고 이러쿵 저러쿵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이 어떤 것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잡아가는, 그래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이가 되어
결국 하나님께서 '거룩하다'라고 인정하는 백성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존재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단절된 채로
자신의 어떤 것을 통해 거룩함에 이르려고 합니다.
나름대로 외형을 꾸미고, 자기식의 신앙생활의 틀을 갖추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음으로 아무리 최고의 길을 가더라도 격하게 표현해 부정한 상태하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있고,
그 만남을 전제로 한 준비의 과정이 있다면 지금 아무리 형편없는 상태라 해도 거룩한 그리스도인이라 하겠습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교회라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의 자리가 될 수 없다면 거룩한 곳이 아니며
공터 한 모퉁이 볼품없는 곳에 천막을 친 곳이어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거룩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소냐 돼지냐를 가르듯 눈에 보이는 모습만으로 정·부정을 가르라고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님을 오늘은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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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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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아기를 품에 안고 있던 한 여인이 말했습니다.
저희에게 아이들에 대하여 말씀해 주소서.
그는 말했습니다.
그대들의 아이라고 해서 그대들의 아이는 아닌 것.
아이들이란 스스로 갈망하는 삶의 딸이며 아들인 것.
그대들을 거쳐 왔을 뿐 그대들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 그대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아이들이란 그대들의 소유는 아닌 것을.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순 있으나 그대들의 생각까지 줄 순 없습니다.
왜?
아이들은 아이들 자신의 생각을 가졌으므로.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마저 줄 수 없습니다.
왜?
아이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그대들은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도 가 볼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들은 아이들과 같이 되려 애쓰되 아이들을 그대들과 같이 만들려 애쓰진 말라.
왜?
삶이란 결코 뒤로 돌아가진 않으며, 어제 머물지도 않는 것이므로.
그대들은 활,
그대들의 아이들은 그 활로 쏘는 살아 있는 화살.
사수는 무한의 길 위에 한 표적을 겨누고 그의 온 힘으로 그대들을 당깁니다.
그의 화살이 보다 빨리, 멀리 날아가도록.
사수의 손길에 의해 구부러짐을 기뻐하라.
왜?
그는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는 만큼, 또한 흔들리지 않는 활도 사랑하므로.

칼릴 지브란(Khalil Gibran)
예언자(The Prophet)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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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주 주보를 만드는데, 한 쪽 면에 부모님들에게 도움이 될만 한 글들을 싣고 있다.
내가 쓰기도 어렵고 하여 이 책 저 책에서 글을 뽑는다. 사실 쉽지 않다.
오랜만에 좋은 글을 발견했다. 언젠가 들어보고 감탄을 했던 것인데, 전문을 발견한 거다.

얼마 전 어떤 엄마가 자신의 딸 얘기를 하면서 '내 것'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것을 듣고는
속으로 이 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글이다.
물론 너무 이상적으로 들리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그대는 활'이라는 제목은 내가 임의로 붙여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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