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기도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됐다.

21세기가 영성의 시대이고, 영성의 핵심이 기도이기 때문일까.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자연스럽게 그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세계적으로 한국 개신교 신자들이 기도 잘하기로 유명하다.

새벽기도는 물론이고, 수요일, 금요일 저녁(밤) 정해진 모임 뿐만 아니라 

여러 작고 큰 모임들을 가지며 기도한다.

기도를 해도 '뜨겁게'해야 한다.

뜨겁게 하지 않으면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시원하지 않은 거다.

마음 속에 맺힌 것, 꽉 막힌 일들이 물꼬가 터지듯이 뻥 뚫릴려면

좀 더 파워풀하게 '주여~'를 외치며 몸을 들석거려야 하는 것이다.


사실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도의 방식 역시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선택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기도 방법 가운데 담기는 내용이다.

대부분의 기도에 담기는 내용을 보면, 거의 요구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진다.

요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기도라는 말 자체에 그 뜻이 담겨 있으니까.

그런데 요구하는 것이 한 쪽으로 치우쳐 있으니 곤란한 것이다.


거의 대부분 물질, 출세, 건강 등 성취물(복)에 집중되어 있다.

성경을 잘 읽어 보면(참고, 신28:1-14)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 앞에 '~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명령을 잘 지켜 행하면, 복을 주신다는 약속이다.

그러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 지 명확하다.

'~면' 앞쪽에 있는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명령을 잘 지켜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잘 안된다는 것, 잘 지켜 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함께 해 달라는 것을 구해야 한다.

자녀를 위한 기도에서도 마찬가지다.

내 아들이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게 해 달라고, 시험 잘 보게 해 달라고 수능날 기도할 것이 아니라,

평소 내 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도록 해 달라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아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면 복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이 얘기 안해도 주실 것 아닌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비유하면 이렇다.

아빠가 아들에게 "장난감 정리 잘 해 놓으면, 동화책 읽어줄께!"했는데,

그 때부터 장난감을 정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동화책 읽어줘!'를 연발하는 것이다.

그것도 처음 한 두번은 아이가 귀여우니까 들어주지, 계속 그러고, 커서도 그러면 정말 대책이 없는 일이다.

앞 문장에서 '커서도 그러면' 부분을 한 번 더 강조해야겠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연륜을 더해도 그 기도 내용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커서도 전혀 진전이 없는 것이다. 

성장은 없고 나이만 먹는 것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를 누구보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잘 아신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면 나에게 필요한 최선의 것을 아실까, 모르실까? 아니 주실까, 안 주실까?

시간문제이지 분명히 주실 것이다. 차고 넘치도록!

그런데 우린 지금 좁은 시선을 가지고 이 거 달라, 저 거 달라 안달을 하고 있으니.


오히려 시선을 돌려 지금까지 주신 것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지 못하는 오늘 나의 현실을 고백하고, 함께 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그리고 할 말이 없으면 가만히 앉아 자신을 들여다 보고,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기도가 더 좋고, 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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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이Pai에 대한 사진을 올릴려고 보니 사진이 너무 없다.

반면에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너무 잘 찍은 사진들이 넘쳐난다.

멋있는 사진도 있고, 예쁜 사진도 정말 많다.

'나도 한 번 찍어봐야지~'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포기했다.

그래서 그런 글들에서 보지 못한 장면이나, 정보가 될 만한 것 몇 장 올리며 

그 유명한 빠이에 '나도 다녀왔다~'고 흔적 남긴다.


여행 가이드북에 보면 '빠이는 별 볼 거리는 없지만'으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나마 좀 볼 거리가 될만한 곳 몇 곳을 추천하고 있다.

그래서 정말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빠이가 가까워올 무렵부터 펼쳐지는 주변 농가의 풍경은...

'여기가 태국 맞나?'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이국적(태국 같지 않은) 멋스러움을 자랑했다.

그리고 며칠 머물며 경험한 빠이를 한마디로 하자면 '모듬'이다.

여행자들이 좋아할만한 것들이 작은 공간 안에 모여있는 거다.

그것도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쑤셔넣은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말이다.

물론 요사이는 스스로 인위적인 빠이스러움을 꾸미고 있는 곳들도 있지만

여전히 자연스러운 빠이스러움은 잘 보존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인위적인 것을 뺀 인사동을 지리산 쯤에 갔다놓은 것이라 할까. ㅋㅋ


마을의 경관도 그렇지만 이 곳의 주민이나,

또 머물고 있는 외국인들이나 좀 별남이 묻어 난다.

헤어스타일이며 복장이 그렇고, 저녁무렵부터 길 양 옆에 자리 잡는 그들의 생산품들이 또한 그렇다.

그들의 말처럼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그 소품들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아쉽게도 그런 소품들 사진은 다른 여행기에서 찾아 보시길)


마을 길도 좋고, 집도 좋고, 주변 환경도 좋고, 사람도 좋은 곳! 그 곳이 빠이다.



숙소들이 대충 이렇다. 이 곳은 반빠이 빌리지이다. 

가격은 아고다에서 찾아 보시길...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길

저녁이 되면 먹거리, 볼거리, 살거리 들이 가득해 진다.



건기라서 강의 수량도 적고, 대나무로 만든 다리로 오갈 수도 있다.



소들만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일년이 모두 여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빠이 주변은 농사철이 아니었다.

치앙마이 주변에서는 논 가득히 자라고 있는 벼를 볼 수 있었다.

소와 함께 있는 아저씨, '사와디캅~'하고 인사하니, 웃으며 '사와디캅'으로 받아준다.



매연폭포를 보겠다고 들어간 숲에서 본 나무들이다.

뭔가를 보고 나오긴 했는데, 확신은 없다.

산속으로 왕복 4시간을 넘게 걸었다. ㅠㅠ


카시콘 은행의 빠이 지점이다.

이 것이 인위적인 빠이스러움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빠이를 여행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이 이동수단이다.

일단 오토바이를 탈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여행의 양이 달라진다.

빠이 주변에 있는 볼거리들을 거의 못 볼 수도 있다.

대안으로 자전거를 빌려서 타봤는데 커피인러브 한 곳 다녀오고 넉다운이 됐다.

그러나 오토바이는 잘 타도 문제는 있다. 워낙 위험한 교통수단이기 때문이다.

빠이같은 곳에 가면 늘 고민을 할 것 같다. 오토바이를 배울까 말까.

그래도 아쉽긴 하지만 안 타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이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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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의 자존심은 수많은 사찰에 있는 것.

구시가지 안에 있는 사찰은 마음먹고 돌면 한나절에 돌 수 있는 숫자.

물론 하나하나 꼼꼼하게 보기 시작하면 불가능할 일이지만,

꼭 봐야한다고 써 있는 구시가지 내에 있는 사찰 네 개를 돌아봤다.

가이드북이 제안한 순서인데 그 정도만 봐도 충분하지 않나 싶다.

그 이유는 가보면 안다. ㅎㅎ


1. 왓 치앙만 Wat Chiang Man



1296년 건립된 것으로 치앙마이에서 제일 오래된 사찰이다.

불당 안에 유명한 불상들이 있는데, 잘 촬영이 되지 않아서 포기했다.

코끼리가 받치고 있는 황금색 쩨디, 창 롬 Chang Lom은 이후 본 어떤 쩨디보다도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사진발이 제일 잘 받는 것 같다.


2. 왓 판따오 Wat Phan Tao


몇 개인지 안 세어봐도 알 수 있다. 108개!

그릇 숫자만큼 동전을 바꾸어 하나씩 넣으며 기도하라는 것.


3. 왓 쩨띠 루앙 Wat Chedi Luang

1401년에 건립된 쩨디로 원래는 90m 높이였다는데, 지진으로 무너져 60m만 남아있다.

지금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만들었을 당시 얼마나 경이로웠을까?


4. 왓 프라씽 Wat Phra Sing


예배 행위를 하는데 많은 불상이 필요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불상들 옆에는 심지어 고승들을 불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물론 죽은 사람이겠지만.


왓 프라씽 뒤뜰에 있는 흰색 쩨디이다. 

줄에 달린 쇠로 만든 통에 물을 넣어 도르레를 돌려 올리면 끝에 가서 자동적으로 쏟아지게 되있다. 

그렇게 해서 물을 뿌려 쩨디를 씼고 소원을 비는 것 같았다. 

불상에 물을 붙는다든지 송크란 때 물을 뿌리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지. 


왓 프라씽 바로 앞, 정확히는 정문을 바라보고 가다가 약 30~40m 못가서 왼편에 있는 로컬 식당.

특별히 이 식당을 언급하는 이유는, 치앙마이 최고 광광지 복판에 있는 식당인데, 값도 싸고 맛도 좋아서이다.

대개 물도 얼음든 컵 주고는 돈을 받는데, 그것도 셀프라고 공짜였다.

주변에 학교에 다니는 듯한 청소년들도 많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그냥 학교 앞 식당 분위기라고 할까.

암튼 치앙마이는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이 있어 특히 좋았던 것 같다.

아쉽게도 식당 이름은 담아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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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앙마이 도이쑤텝 2013.3.17

도이쑤텝은 치앙마이를 대표하는 사원으로 원래는 긴 이름을 가졌는데 줄여서 부른다.

치앙마이 외곽 해발 1,610m 산 정상에 있다.

도이쑤텝에 가려면 직접 오토바이를 몰고 가기도 하지만, 좀 위험하고,

대개 성태우에 10명씩 채워서 함께 가게된다.

성태우 편도 50B(빠뚜 창푸악 앞에서 출발), 입장료 30B(외국인만)


사실 치앙마이에 가면 절절하다. ㅋㅋ 

절이 너무 많아서 하나 둘 셋 다니다 보면 다 똑같아 보인다.

그 차이를 명확하게 아는 이의 가이드를 받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그렇게 많은 절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태국 사람들의 여전한 신심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도이쑤텝을 오르는 길에 가장 먼저 눈에 띈 '개밥에 후원해주세요!'

개로 태어나려면 불교나라 특히 태국에서 태어나야 한다.

이렇게 대접을 받고 있으니.

개들은 묶여있지도 않고, 어디든 마음놓고 다녀도 누구도 제지하지 않는다.

(나~ 한국에서 왔어! 무섭지?)



도이쑤텝을 오르는 계단이다. 300개라는데 세어본다는 걸 깜박했다.

계단 양 옆을 지키고 있는 용모양은 머리 일곱게 달린 힌두교 신화에 등장하는 뱀의 왕 나가Naga이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매일 오르는데, 어떤 생각으로 오르나 궁금하다.

치앙마이 관광 필수 코스여서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일거다.

간혹 주위 사람들 아랑곳하지 않고 경건하게 참배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흠짓 놀란다.

나와 전혀 다른 마음가짐으로 올라온 사람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원래 도이쑤텝이 유명한 것은 치앙마이 시내를 한눈에 전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간, 3-4월은 대기가 맑지가 않다. 

황사도 있는 것 같고, 너무 기온이 높은 것 때문인 것 같기도하다.

그래서 치앙마이의 희미한 모습밖에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대기 맑은 시기에 다시 오리라 다짐했지만 언제 올 수 있을 지...



내려오는 길에 고산족 꼬맹이들의 뒷모습을 찍었다.

왜? 

앞모습을 찍으면 돈을 줘야한다. 재주가 있는 아이들은 도이쑤텝 마당에서 노래와 춤을 추고 있고,

이 아이들은 둘, 셋 씩 서 있으면서 사진을 찍게 하고 돈을 받는다.

돈을 받는 순간 나가(뱀_아이들이 기대어 있는) 옆에 숨어 있던 엄마같은 어른이 낚아채간다.



2. 치앙마이, 푸삥 궁전 2013.3.17

뭐라 불러야 하나, 태국 왕실의 겨울궁전이라고 해야 할까?

도이수텝에서 조금만 더 가면 있기 때문에 도이쑤텝, 도이 뿌이(고산족 마을)와 묶어서 다녀오기도 한다.

입장료 50B


푸삥 궁전은 왕족과 귀족들이 12~2월에 주로 와서 머물러 그 때를 제외하고는 개방이 된다.

개방이라고는 하지만 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궁 주변의 정원을 둘러보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처음에는 김이 좀 빠졌고, 또 반바지 입었다고 긴바지를 대여하라고 해서 기분 상했지만,

정원을 산책하며 꽃향기를 맡으면서 마음이 확 바꿨다.

온 세상의 꽃은 다 모아 놓은 것 같았고, 향기도 어찌 그리 좋던지.

더운 날씨에 모두 걸어서 구경하기에 조금 벅찬감이 있었다.

골프 카트같은 것에 서너명 타고 기사가 가이드해주는 것이 있었는데, 

말만 알아들으면 사람 모아서 타면 좋겠다 싶었다.





한국에서 고무나무라고 부르는 그 나무인데, 이렇게 크다.

위쪽을 보면 작은 잎들이 있는데, 그것이 어른 손바닥 두개만한 그런 큰 잎인데 작게 보인다.


대나무가 어찌나 큰지, Dragon Bamboo라고 부른다.

이후로 대나무를 많이 보게 되었는데, 한국의 대나무가 사방으로 퍼진다면

열대지방 대나무는 한곳에 모여서 집중적으로 자라는 특징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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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같아서는 필요한 이들에게 정보를 줄 수 있는 여행기를 쓰고 싶은데,

그 정도로 정확하고 세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또 위트가 있고 감동이 있는 여행기를 써보고 싶은데,

그러기엔 글발이 한참 달리고, 사진도 뒷받침되지 않는다.

암튼 이렇게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리면 검색엔진에 걸려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발견될텐데...

그냥 '아~ 저런 곳에 가서 그런 생각도 할 수 있구나' 정도로 가볍게 보고 지나가면 좋겠다.


치앙마이, 선데이 마켓 2013.3.17.

일요일 오후 5시부터 치앙마이 여행의 이정표가 되는 타페문(빠투 타페)으로부터 

왓 프라싱까지 족히 1키로도 넘는 길을 모두 막고 시장이 열린다.

어디서 나왔는 지 도로의 좌우 가운데를 노점들이 가득 메우는데,

정말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생각인데, 치앙마이 여행의 꽃이 아닐까 싶다.

때에 따라서는 음악공연도 열리고, 다양한 볼거리들도 함께 한다.


1/4되는 지점에 이렇게 친절하게 지도도 세워뒀다.

사실 선데이 바자를 돌아보면서 이 지도를 참고하진 않을 것 같다.

워낙 사람이 많아서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은 쇼핑(관람이라고 해도) 포인트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흐름이 종종 너무 좁은 곳에서 막히기도 하는데 누구도 짜증을 내지 않고 기다린다는 것.

한국 같으면 상점을 뒤로 더 물러서 길을 넓히라고 야단을 할텐데 그러지 않는다.


이런 사진을 좀 많이 찍고 싶었는데, 아니 사실 많이 찍었는데 잘 나온 것이 없어서ㅠㅠ

지금 광경은 사찰 안에 차려진 상점들의 모습이다.

이런 물건들을 파는 것은 물론 먹거리 장터도 사찰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열린 것을 보게 된다.

기꺼이 사찰의 문을 열고 마당을 사용하게 한다는 것이 의미있게 다가왔다.

자리세를 받는 지는 몰라도, 종교와 그 시설이 사람들에게 편하게 개방되는 모습이 좋았다.





더 많이 찍지 못한 것이 아쉬운데, 암튼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그리고 먹는 것도 정~말 많은데, 먹고 싶다고, 호기심에 지갑을 열기 시작하면 배가 터질지도 모른다.

가장 인기있는 메뉴는 회초밥과 바로 갈아주는 딸기주스였던 것 같다.

회초밥 하나에 10밧(410원), 5밧인데 나름 괜찮았다.


치앙마이는 마사지의 천국이다.

선데이 마켓에서만이 아니고 평소에도 길가나 사람들이 모일만한 곳에는 의자를 죽 깔아놓고

손님들을 맞는다. 손님이 오면 어디있었는지 마사지사가 등장한다.

가격도 저렴한데, 발마사지 30분에 80밧(3,300원), 1시간에 130밧(5,300원)이다.

물론 팁은 알아서 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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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광야와 시험의 조합은 너무도 당연하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야곱이 집을 떠나 라반에게 갈 때 통과했던 그 곳이고,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끌려 갈 때 지나갔던 길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걸었던 학습장이었고,

다윗이 왕이 되기 위한 지루한 수업이 있었던 곳이고,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또 다시 돌아 올 때 지나는 길이었다.


광야는 무엇을 의미할까?

없음(無)을 뜻한다.

없는 곳이다.

자신을 지지해 줄 어떤 것도 없는 곳.

먹을 음식도 물도 없는 곳이다.

나를 위급한 상황에서 지켜줄 집도, 담장도 없다.

도와줄 도움의 손길도 없다.

일단 지지자들이 없다는 것이 광야는 희망과 소망의 땅이라기보다는 절망과 죽음의 땅이다.


인간이 세운 제도와 가족과 관계가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은 가려진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온전한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아니 부정할 것도 없다.

가진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그러나 그 사람이 예수님이셨다면 많이 달라진다.

능력이 있는 예수님은 그 광야를 손쉽게 생명의 땅으로 바꿀 수 있다.

광야에서 온전히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만나느냐

아니면 능력껏 자신의 필요를 채울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시험은 광야의 하나님이 되라는 것이다.

무를 유로 바꾸라는 유혹이다.

하나님 없이 살라는 유혹이다.


신앙생활은 광야로 나가는 것이다.

광야에서 아무것도 없기에 모든 것이 있음,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체험 할 수 있다.

(광야는 때때로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배신, 죽음, 질병, 고통 등으로. 그 때 시험 역시 찾아온다. 

시험의 다른 얼굴이 의심이다. 하나님이 나타나시지만 하나님으로 볼 수 없도록 한다.)


그러나 신앙의 여정은 우리로 하여금 광야에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어쩌면 광야에서 하나님의 실존 안에 거하는 삶을 지속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 또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격적, 자연스런 삶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오신 것처럼

그리스도인 역시 사람들 가운데로 돌아와야 한다.

그 곳에서 이젠 더 이상 거짓 하나님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그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삶을 살게 된다.

당연히 그의 삶은 작은 하나님, 작은 예수의 삶이 된다.


그러므로 정리해 보면 광야는 훈련의 장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위한 훈련의 장이다.

예수님께선 이 코스를 정말 모범적으로 통과하신다.

사람들 중엔 이런 과정을 거치며 종종 자신이 하나님인줄 오해 하고 자신의 몸을 세우려 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취는 남아 있지 않다. 오직 예수님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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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안묵적으로 지지받아온 말이다. 
정말 교역자를 대적하면 벌을 받아서 아프고, 심지어 죽기까지 할까?
일부 교역자들은 그 근거로 모세를 대적했던 사람들이 당했던 일을 거론하며 겁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한 것은 목회자를 대적했던 사람들의 집에 죽는 사람이 발생하고
병에 걸려서 고생을 하는 것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목사를 대적하면 안 된다는 공식이 성립한다.
그럼에도 대개의 교회들에서는 목회자들을 성도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쫓아 내는 일들이 비일비제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런 현상으로 주눅이 들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여기지만
그럼에도 그런 말을 하면서 누가 벌을 받았느니 하면서 설왕설래하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일단 상식적으로 봤을 때,
누군가를 미워하고, 공격하며 격정적인 마음으로 일정 기간을 보내게 될 때
가장 큰 내상을 입는 것은 비판받는 대상이 아니라 비판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내부에 병을 키우게 될 수 있다는 거다.
또 그런 성격적인 측면이 작용을 해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내 생각으로는 목회자들은 자신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성도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런 움직임이 보이면 빨리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예수님이셨어도 그렇게 하셨을 것 같다.
결국 인간사가 그렇게 단기적으로 뭐가 옳고 그르고를 판가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이야기가 좀 곁길로 나갔지만,
목회자를 대적했다는 그 사실로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병에 걸리고, 죽는 것은 인간사에 드리운 총체적 운명의 한 부분일 뿐이고,
우연히 그 사건과 결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인과관계를 찾는 것은 인간이 가진 또하나의 어리석음의 결과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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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들과 말하다 두 번이나 말 문이 박혔다.

반에서 석차가 떨어져서 걱정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자 마자 나오는 말이 '다음에 잘하면 되지~'였다.
그래서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괜찮아, 잘 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지. 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네가 어떠하든 소중하게 여기시는데...
이렇게 말했어야 하는거고.

또 연예인들 이야기를 하다가 모 개그우먼 이야기가 나왔다.
예쁘다 안 예쁘다 얘기를 하다가
내 입에서 바로 튀어 나온 말이 "그래도 돈을~"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이 곳 저 곳에 나오면서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데...라고 얼버무렸다.

나 역시 뭐든 잘해야 하고, 돈만 많이 벌면 된다고 하는 가치관으로 가지고 살고 있는 거다.
그런 것이 쉽게 튀어 나오는 걸 보면 스스로를 속이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닌척하면서 말이다.

청소년들에게 '괜찮아~'라고 말해 줄 수 있어야 겠고,
돈이 전부가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는 얘기를 해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가치관으로 살고 있는 어른이 되지 못한 것 같아 서글프다.

그냥 말 문이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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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여고생들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써니'같은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바탕에 깔린 영화는 더욱 그렇다.

오늘 동구마케팅고 하은이반(기독 동아리)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갔는데,
영화 동아리의 영화관람에 끼어서 보게 되어
영화관은 동구의 여인들이 꽉 들어찼다.
그들 사이에서 보는 여고생들의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했다.

그러나 그들은 잘 몰랐을 거다.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 배경들이 가진 시대성을 말이다.
그것까지 알면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엄마들에게 강추한다고, 꼭 보시라고 말씀드리라고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여고생이라고 하면서, 또 유호정이 교복을 입으며 추억에 잠기지만
실제 여고시절로 돌아가서는 교복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건 80년대에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만 알 거다.
교복 자율화!
5공화국 때 영화 중 잠시 등장했던 전모 대통령 덕분으로 있었던 자유롭지 못한 시대에 자유!
그래서 임나미가 벌교에서 전학을 와서 당황해하는 것과 연관되는데
자기는 스펙스 신발을 신었는데 다른 친구들은 프로스펙스나 나이키를 신었다는 것으로 충격을 받는 장면이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프로스펙스 신발을 신었다.
그 때가 85년이었는데, 친구들이 주변에 모여들어서 신기해 하며, 공부 잘해서 사주셨냐고 부러워했었다.
정확히 기억하는데 당시 25,000원짜리로 제품명은 '그랜드슬램' 테니스화였다.
스펙스와 프로스펙스, 월드컵과 프로월드컵의 차이를 아는 사람은 우리 세대다.
소위 메이커 옷과 신발이 청소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잡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촌스러운 모습인데, 영화는 그것을 참 잘 담아낸 것 같다.

(일단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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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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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투자해서 구입한 오디오.
스피커가 AR이라는 말만 듣고서, 누가 물어 보면 'AR이래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가족이 된 지 1년을 훌쩍 넘기고서야 좀 궁금해졌다.
왜냐면 어떨 때는 소리가 좋은데, 어떨 때는 좀 답답하게 들릴 때가 있어서다.
오래된 거라 성능이 좀 떨어졌나 싶어서 인터넷에 AR스피커를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내 거랑 똑같이 생긴 것들이 죽 뜬다.
물론 똑같이 보여도 여러 기종들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내가 소장하고 있는 스피커는 60년대부터 생산된 AR-4x모델이다.
그런데 눈에 딱 띄는 문구, '보컬에 적합한' 스피커!
아~ 그랬구나. 이 스피커는 사람의 목소리를 잘 담아내는 거구나.
그래서 클래식을 틀면 왠지 소리가 뭉쳐서 들리는 것 같은데,
반면 재즈나 가요 같은 것을 들을 때는 참 좋았던 거다.
이제부터는 스피커에 맞는 음악을 들어야겠다.

그런데 사람들도 그런 것 같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징, 사람의 결이라고 할까.
그 사람만의 고유성이 있는데, 그것을 거의 무시하고
이것저것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려고 하는 것 같다.
아니 그런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모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밀어 붙인다.
특히 자녀들을 대하는 엄마들의 태도가 그렇다.
엄마들이 원하는 자녀상은 아마 거의 똑같을 것이다.
기계적으로 엄마가 계획하는 대로 다 받아서 좋은 성적 내고, 좋은 대학 가고, 좋은 회사 가고,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되는 것!
만약 그렇게 되면 마치 영화 메트릭스의 마지막 부분에 세상 사람이 몽땅 스미스로 바뀐 것처럼 되어 버릴 지도 모든다.
모두 똑같은 사람을 목표로 기르려고, 아니 생산하려고 하니 말이다.
그래서 엄친아라는 말도 나왔을 거다.

스피커도 그러할진데, 사람은 더욱 그렇지 않을까.
각각 담아내는 삶의 내용이 다르게, 다른 소리를 내도록 창조된 것이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그 다름, 독특함이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하는 것이 아닐까. 



# 삼베로 만든 그릴을 벗기면 약간은 험악한 속살을 드러내는데, 연륜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마 나에게 오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탔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암튼 매력적인 놈과 동거 중이었다니, 새삼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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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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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하고 생각하는 것이 곧 글을 쓰는 바탕이며 출발점이다.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훈련이 더욱 중요하다.
기막힌 이야기 기막힌 글쓰기, 최수묵 지음, 교보문고, 29p.

매일 짧게라도 글을 써 보겠다고 작정을 했는데,
어느 날은 블로그만 열어 둔 채로 한두 줄 쓰다가는 한 글짜도 더 나가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다 떠올려 보고,
아무 글도 써 있지 않은 플래너를 뒤적거린다.
그러면서 장탄식이 나온다.
'아, 오늘은 아무 생각도 없이 하루를 보낸 것인가?'
정말 하루라는 긴 시간을 보내면서 아무 생각도 안 했을까?

그렇다.
하루동안 생각 같은 생각을 하지 않고 보낸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 가운데 지혜를 얻지 못한 것이다.
꼭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음에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인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연해주 들녁에서_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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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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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아들을 둔 엄마가 있다. 누구보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다. 요사이 딸도 아들도 자신의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열심히 살고 있다. 또 각각 애인도 있어서 교회에서도 소문난 커플들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 정도면 다른 가정들에 비해서도 자녀들이 잘 지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엄마는 자녀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입이 나오고 얼굴빛이 어두워진다. 나름 공부도 잘 하고 있고, 연애도 잘 하고 있으면 그렇게 계속 가기만 바라며 지켜보면 되는 것 아닐까?
엄마 마음은 그것이 아닌가 보다. 더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겠고, 지금보다 더 나은 학과에 가서 더 전망 있는 직장에 취직하면 좋겠고, (실제로는 자신이 다 해 주려고 하면서도) 자기 일을 알아서 잘 해주었으면 좋겠고, 더 좋은 집 배우자를 만나면 좋겠고, 더 신앙 있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고, (늘 품고 있기를 원하면서) 빨리 독립해서 자기 앞가림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또 기도의 대부분을 채운다.
자식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미 많은 부분에서 자식들은 엄마를 배려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자식들을 향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자식들을 향해 그렇게 매달리는 것이 정말 누구를 위해서인지 묻고 싶다. 그렇게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면서 정말 자식들이 잘 되기를 위해서 그러는 것인가? 물론 그렇다고 대답들 하시겠지만, 경험하고 관찰해 본 바에 의하면 '아니다'이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자식의 수준을 위해서, 자기가 들인 물질을 포함한 노력에 대한 보상심리가 더 많은 부분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욕망(이런 엄마들의 태도는 욕망이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을 채우기 위해 자녀들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자녀들은 엄마의 장식품이 아니다. 자녀는 자녀 나름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이미 그들을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있다. 부모는 자녀들이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며, 진지하게 선택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지금 부모들은 모든 것을 다 결정하고, 그대로 따르라고만 한다. 아이들은 그런 부모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꾹 참으며 분노를 쌓는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그것을 되갚아 주겠다고 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엔 더더욱 그럴 것이다. 빨리 깨닫고 자녀들을 놓아 주고, 자신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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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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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부에 최근 4주를 결석한 중1 여자 아이가 있어서 전화를 했다.
아이는 전화를 받지 않아서 엄마랑 통화를 하게됐는데,
엄마 얘기로는 아이가 교회가 가기 싫어해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가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를 정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든 생각은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엄마가 교회에 오는 것에 소위 '재미를 못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엄마의 그런 마음 상태가 아이에게 영향을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청소년들은 부모와 상관없이도 이런 저런 것들을 의심하고 거부할 수 있는 시기다.
그럴 때 부모의 삶의 태도는 중요한 방향타가 된다.
그런데 요즘 문제는 오늘의 청소년들의 부모들이 불안한 정서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뭐 꼭 신앙이 없다, 믿음이 없다는 식으로 얘기 할 것까지도 없다.
요사이 아이들의 부모 세대들이 맞닥드리고 있는 세상은 불확실 그 자체다.
그 가운데 신앙적 삶도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 자녀들에게 신앙적 일관성을 보여주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속은 어떠하든지 아이들에게 일관성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부모의 바른 자세일텐데 그것도 어려움에 처한 것이다.

아이가 교회에 가기 싫어한다는 얘기도 시작했지만
사실은 부모들이 교회에 오기 싫어하는 것이 문제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 때는 결국 부모들이 자신의 신앙을 재정립해야 하는 시기라고 하겠다.
지금까지 가지고온 신앙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온 몸으로 격동의 시기를 보낸 그 위 세대 부모들로부터 공짜로 받은 신앙의 유산이
이제 모두 소진되어 버린 상태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자기 신앙이 아닌 부모의 신앙으로 살아왔다는 얘기다.
이제 그것에 대해서 중심으로부터 큰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봐도 된다.

부모들에게 말하고 싶다.
이제 좀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을 돌아보라고,
그리고 나와 하나님에 대한 진지 질문을 던지라고 말이다.
아까도 그 분에게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어떻게 들으셨을 지 모르겠다.

안타까운 것은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있다.
멈추어 서면 도태될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또 자식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스스로 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향해 채찍질을 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어찌 할까?

요즘 범 교회적으로 신앙의 대잇기를 부르짓고 있는데,
대이어질 신앙의 실체가 무엇이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얘기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 부모들, 교회가 아래 세대에게 전해줄 것이 뭔지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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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후기

깨어살리/日步 2011. 4. 27. 22:34
설교 하기 전이 좋을까 설교 한 후가 좋을까?
어리석은 질문같지만...
설교 전이 더 좋은 것 같다.
왜?
설교 전에 긴장 하게 되고, 마무리가 잘 되지 않았을 때는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최소한 아직 말을 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말은 내 뱉으면 그만큼 나에게 되돌아 오는 것을 느낀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라는 지극히 사적인 통로를 통해서 전해지다 보니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들어갈 수 있고, 그러다보면 그 말의 질량이 낮아 질 때가 있다.
그렇게 말씀을 전하고 내여 오면 한 없이 허전함에 부끄러움까지 느끼게 된다.
아마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전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전한 전체 말씀이 아닌 마음에 와 닿은 일부분만을 기억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또 매 번 최선으로 준비되지 않는 설교를 보면서,
나 자신의 성실하지 못함, 실력 부족이 많이 느낀다.
물론 내가 할 수 없는 성령의 영역이 있음을 고백한다.
때때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나를 압도하는 경험도 하지만,
그것이 늘상 일어나는 체험은 아니다.
그래서 노력 없이 그런 요행만을 바랄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암튼 오늘은 설교 후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이런저런 넋두리를 해 본다.
다음 번에는 좀 더 최선을 다하고, 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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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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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은 요즘 교회들이 긴장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면 한 가지 큰 의구심이 든다. 
동일한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고, 그것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다.
이제껏 가만히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의 문제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개의 교회와 목사님들이 침묵으로 일관했었다는 얘기다.
이미 2002년에도 한 목사님이 돈봉투를 받았다는 양심선언이 있었고,
이에 대해 당시 교계 일부의 술렁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남의 일처럼 여기다가 이제와서 큰 일을 맞은 것처럼 자성한다고 야단이다.

차이점은 언론의 관심에 있고, 이로인해 사회전반의 시선이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쏠리는 것을 의식하고 그것을 막아 보겠다는 동기가 많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정말 조심스럽지만, 이런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은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결국 이전부터 있었던 금권선거 가운데 자신들이 돈봉투를 돌릴 때, 또 그 봉투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 보시고 있다는 것을 몰랐나?
그 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돈보다 하나님, 총회장 자리보다 하나님을 선택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와서 사회에서 관심을 보이고, 공론화 되자 자성한다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특정인을 문제의 근원인양 몰아 세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성명서를 발표하고 자성하자고 하고, 그것에 동의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서
진심어린,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여전히 자신이 옳고, 지금 그런 자신들의 위치와 힘을 지키겠다는 의도가 더 앞서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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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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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회를 보면 어른스러움이 많이 결여된 모습들을 본다.
묵직하게 사회를 넓게 품는 사람, 세력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 사회의 어른스러움의 실종은 장남문화의 단절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장남의 문화란 책임감과 여유, 포용력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 대가족으로 살며 여러 대가 함께 살았을 때 형들이 그런 역할을 감당했다.
작은 아들은 작은 아들로 살지만, 그 작은 아들의 장남은 큰 아버지를 보면서 장남의 역할을 배운다.
그래서 장남의 문화는 단절되지 않고 가정에 사회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핵가족화되면서 작은 아들의 집에서 자라는 장남은 더이상 장남의 역할을 배울 곳이 없다.
그래서 차남인, 막내인 아버지의 약간 느슨한 책임감, 조급함, 이기적인 태도를 배우게 된다.
이로 인해 사회는 점점 빠르게 개인주의화된다. 

물론 모든 장남 문화가 다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좀 더 통큰 사고, 넓게 품는 가슴은 이 시대에 더 없이 소중한 덕목이 아닐까.

오늘 노회를 했다.
노회 중 우리 교단을 장자교단, 우리 노회를 장자노회라고 부르는 것을 여러번 들었다.
그렇다면 장자답게 책임있고, 통큰 마음과 헌신적인 모습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지금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인 '금권선거'에 대한 단호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여러 목사 장로님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용단을 내렸다.
총회에 노회총대를 보내지 않기로 한 것이다.
총대로 뽑히는 순간 금권선거에 빠져들고, 그렇게 총회에 가봐야 할 수 있는 일이 크지 않기에
아예 총대를 파송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뽑지도 않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 정도로 되겠느냐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지만,
몇몇 목사님들의 충정어린 호소는 가슴 뭉쿨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진작에 이런 결의를 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아 들지만,
그래도 뭔가 변화와 개혁을 위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에 고무적인 하루였다.

장남이든 아니든, 장자든 그렇지 않든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어르스러움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정말 이 사회가 너무 가벼워졌다.
대통령도 형이 국회의원이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 형님으로 모셨던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지
너무 가볍게 호들갑 떨듯히 일하는 것 같고, 언론은 진중한 고민이 없이 흥미만을 좇아 다니며
사람들의 정신을 산만하게 하고 있는 것이 오늘 한국의 자화상이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했다고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벌집을 만들어 버린다.
좀 기다려 줄 줄도 알고, 이해하려는 넓은 마음 더더욱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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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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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에 갔을 때, 한 카톨릭 복지시설에서 받은 책갈피이다.
추측하건데, 아마 프란치스코가 아닐까 싶다.
자연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그의 기행에 비추어 보면 저렇게 동물들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는 동물들이 곁에 있는 지 아는 지 모르는 지 하나님을 향한 기도 가운데 몰입되어 있다. 

오늘 새벽에도 기도회에 갔었다.
사순절이기도 하고, 그 중에서도 이 번 주간은 고난주간이고,  
올 해 동숭교회는 특별히 '내 생애 마지막 한 달' 캠페인을 진행 중이기도 하다.
나는 교역자니까 빠질 수 없다.
지난 주에 담임목사님께서 '내가 만약 목사가 아니면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고 하셨는데,
나도 그런 생각을 했고, 대답은 빠졌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왜냐면 난 새벽, 아침에 취약한 체질이기 때문이다.

암튼 기도를 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과 잘 통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 새벽에도 한 청년이 무릎을 꿇고는 큰 소리로 기도하는 바람에 약간 졸다가 번쩍 깼다.
그런데 그 기도 내용을 들으며 답답함을 느꼈다.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고,
쉴새 없이 뽑아 내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대개의  개신교 신자들의 기도가 이럴 거다.
문제는 기도를 할 때 너무 힘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나'가 너무 살아 있어서, 그 나를 만나시는 하나님이 들어갈 여백이 없는 것이다.
나의 의지, 이렇게 되게 해 달라는 요구, 계획 등을 내려 놓고,
그 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니는 지 잠잠히 기다리는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기다리다 보면 하나님을 느끼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마치 위의 책갈피의 그림처럼, 내가 어디에 있는 지, 무엇이 내 주변에 있는 지, 심지어 내가 누구인지도 잊고 기도로 빠져 드는 것 말이다.
자신을 비우고 기다리는 것이 전재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기도, 그래서 참 어렵다. 그런데 또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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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0) 201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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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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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수련회 장소를 찾는 일이 너무 늦어 버렸다.
그래서 일단 기간이 비어있다고만 하면 열일 제쳐두고 달려가야 하는 형편이다.
지난 화요일에 두 곳을 다녀왔고, 오늘도 한 곳을 다녀왔다.
단양과 영월, 그리고 춘천을 찍었다.

오늘 갔던 곳은 춘천시 남산면 빙하리 한강변에 있는 '기화유스호스텔'이다.
이 곳은 처음이 아니라 2001년에 소년부 5,6학년 친구들과 2박3일을 보낸 곳이다.
지금 그 친구들은 대학생들이 다 되었다.
그 곳에 정말 10년 만에 다시 갈 수 있게 될 것 같아서 가슴 벅차다.
물론 수련시설로서 완전하진 않다.
물놀이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수영장도 없고, 한적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름 강에서 할 수 있는 몇 가지 놀이를 선택할 수 있고,
운동장이 바로 앞에 펼쳐져 있어서 좋다.
또 예전엔 없어서 불편했는데, 방마다 화장실과 샤워시설을 갖추어서 한결 좋아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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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 문제  (1) 201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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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처음 쓸 때는 버스정류장에 서서 내가 기다리는 버스 위치를 검색해 보며 어디쯤 오고 있는 지를 아는 것에 뿌듯해 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엔 폰을 꺼내서 검색해 보려고 하다가 멈추어 버린다. 귀찮아서이기도 하지만 뭐 꼭 그걸 검색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다. 그냥 기다려도 오고, 추적을 해 본다고 해서 더 빨리 오는 것도 아니니 의미 없는 소비적 행동같아서이다. 
그 시간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의 끝자락을 잡아서 이런 글 하나 더 쓸 수 있는 소재를 만들어 보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엔 핸드폰을 들여다 보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요금제를 바꿔야 할 판이다. 꼭 필요할 때만 살짝 터치할 뿐.
이제 초고속 인터넷은 보편화 되고, 핸드폰도 그냥 핸드폰이 아닌 스마트폰으로 진화하면서 우리의 정서는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볼거리에 영혼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더이상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 전하는 것을 보고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글을 쓰더라도 잠시 지나가는 감정을 단문으로 아주 짧게 그리고 무책임하게 쏟아놓을 뿐이다.

오늘 새벽에 담임목사님께서 주신 말씀 가운데 너무도 적절한 구절이 있었다. "속도를 낸다고 빨리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우리의 삶이 빨라졌다고들 하지만, 정작 자신을 진실되이 돌아보는 데도 느려졌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 역시 느려지고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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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일어난 재난의 상황을 놓고 말이 많다.
일단은 함께 고통을 나누자는 태도와 말들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그 곳을 향해서 하나님의 심판 혹은 징계 또는 경고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들은 정말 기가 막힌다.
그 말을 특별히 목사님이 했다는 것에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낀다.
그런 말을 하면서 아마도 자신들이 우상숭배의 땅인 일본을 향해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는 예언자쯤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성경을 좀 다시 읽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성경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시겠지만).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언했지는 지를 좀 다시 공부하시라는 것이다.

예언자의 예언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곳에 가서 직접 그들에게 말했다.
더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예언자들의 헌신이다.
자신의 모든 삶을 그들을 향해 고스란히 내어 놓고서 피를 토하며 하는 말이 예언이었다.
그러면서도 예언자들은 자신이 전한 말이, 또 해야 하는 말이 너무도 무섭고 가슴 아파서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애끓는 마음으로 한 마디 한 마디를 눈물을 머금고 전한 사람들이 예언자들이다.
그러나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예언자의 심정은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본심에 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까 예언자는 하나님의 슬픈 마음을 함께 가슴아파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오늘 소위 예언을 하는 것처럼 말하는 목사님들에게서 이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너무도 냉정하다. 최소한의 인정도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리고 정말 이번 일이 하나님의 징계이고 경고라고 치자.
그러더라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왜냐면 일단 징계가 내려 망하게 되었을 때엔 예언자의 역할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얘가를 부르며 애통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다시금 회복될 것에 대한 '소망'을 주는 역할을 했다.
 
지금 그 목사님들의 모습에서 위로나 소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말을 하는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가 더 부각이 된다.
일본을 향해서 우상숭배, 무신론, 물신주의라고 평가했는데,
최근 그 분께서 교회를 통해서 축적한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기위해 어떤 행태를 보이고 있는 지 다 알고 있지 않나. 
그래서 당신이 하나님을 내세우면서 뒤로는 돈을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는 것
이것이 물신주의가 아니고, 또 역시 우상숭배가 아닌가?
더이상 하나님의 지키심을 믿지 못하고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것은 무신적인 것이 아닌가?
어찌 그 분 한 분만의 문제일까?
그 교회도 그렇고, 최근 매스컴에 보도되고 있는 한기총도 그렇고, 또 대부분의 교단의 정치 행태들이 그렇다.
누군가를 향해 하려고 하는 말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겸허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것이 참다운 종교인의 길이고, 그런 사람이 던지는 한 마디 말을 듣기 위해 모여들 것이다.

수없이 많은 생명이 잠든 그 땅을 바라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슬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함께 아파하며  울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며, 말이 아닌 손과 발이,
침 튀기는 것이 아닌 눈물과 땀을 흘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지금 나는 또 뭘 하고 있는 것인지.
뭘 해야 하는 것인가? 나 또한 말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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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은 물론 지혜를 확장하는 삶을 살기


지금 내 생각은 언제 적 것인가?

어떤 사람은 사고의 틀이 십대, 어떤 사람은 20대 중반, 또 어떤 사람은 30대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을 만나도, 어떤 사람은 만나도 그 때의 사고체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판단하고 결론을 이끌어 내는 과정이 늘 유치하고, 편협하고, 외골수로 흐르게 된다.

가장 심각한 것은 다른 사람을 말을 결코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워야 한다.

지식도 더 얻어야 한다. 더 알아야 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일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안목을 가져야 한다.

이는 어떤 생각에 묶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일신우일신 할 수 있는 삶의 태도

일보(김교신의 일기책 이름) 할 수 있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배운다는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창시절로 배움의 시기를 끝낸다.

그리고 결정적인 어떤 게기를 전후해서 배움의 자세를 멈추어버린다.

배움은 책을 통해서도 일어나지만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찌 하든지 자신의 이야기만 하려 한다.

배우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다.


진정한 배움은 지식을 넘어서 지혜에 닿게 한다.

그래서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문제는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점점 더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 지혜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지혜의 마음을 넓힌다는 것은 단기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들과 만남 속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을 통해서 성령 안에서 지혜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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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목사님들이 언론에 등장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물론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기사들이 더 많다.
교회에서 세운 언론사를 자신의 자녀들에게 물려주기위해 노력한다는 얘기로,
수천억원을 들여 교회를 건축해야 하는 당위성을 주장하는 모습으로,
교단의 교권다툼으로 결국엔 타교단 장로인 변호사에게 수장 자리를 내 주는 치욕의 장면으로...

반면에 교회가 사회를 위한 선한 일을 하겠다는 취지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사회복지 엑스포 같은 것을 통해 교회의 사회봉사를 알리고,
서해안 기름유출이 있을 때는 교회사회봉사단을 꾸려서 섬김의 장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엔 교회들의 자산을 기반으로 은행을 만들겠다고 선언을 하기도 했다.
교회가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뭔가 이런 일들을 할 때 더이상 주목을 받지 못한다.
아마도 어른 목사님들은 이런 행동이 꽤나 인기를 끌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보면 소위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높다.
어떤 프로그램을 하면 교회 인근에 주민들에게 긍정적인 소문이 나고 선교가 일어날까를 고민한다.
그 산물이 카페, 도서관, 극장 등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런 쪽에 관심을 갖고 예산을 몰아 줘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물론 기존 교회의 원로들에게 이런 얘기가 잘 먹히지 않아서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지금의 교회들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을 보면서 의문이 든다.
소위 문화라는 이유들을 들어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의욕적으로 진행하고
그래서 사람들을 끌어 오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라는 생각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핵심이다.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겉으로 보여지는 화려함, 특별함으로 사람들을 끌어 들이지만
그들은 교회의 실체를 알고는 발걸음을 돌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결론은 잘 길러진 참 괜찮은 그리스도인 하나가 최고의 프로그램이라는 얘기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잘 살아갈 때 우리가 소원하는 최고의 선교가 일어나는 것이다.
밖으로 이렇다 저렇다 소리지르는 것을 멈추고
이젠 자신을 돌아보고, '나나 잘하자'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다.
내가 괜찮은 그리스도인이 되면 된다.
대사회적으로 교회의 리더십이 실추되었다고, 뭘 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노력을 돌려서 자신을 바로 세우는 쪽으로 가라는 얘기다.
결국 교회의 지도자들, 특히 앞선 목사님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길을 걷는다면 거의 모든 문제는 술술 풀릴 것이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무슨 프로그램을 할까'하는 공허한 소리들은 그만 하게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http://www.andotadao.org/chlight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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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에 대한 소개는 단 하나다. 그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다.
그 이상 부연하거나 추가적 사건이 있을 필요는 없다.
요한복음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조롱받았던 곳!
뭐 다윗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끼워 맞추기식 논리도 필요 없다.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는 것을 굳이 힘들여 풀어 놓을 필요도 없다.
아직 유아일 때 이집트 구경을 했다는 것도.
얼토당토하지 않은 동방의 박사들과 목자들까지 끌어들일 필요도 없다.
그저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사람이고,
그가 처음 드러난 것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부터다.

아마 요한도 처음에는 그가 자신이 얘기한 사람인지 몰랐을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예수의 정체가 밝혀졌을 것이다.
하늘로서 들리는 소리 역시 예수님만 듣는다.
얼마나 감격적인 자기 확신인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 기뻐하는 아들이라는 것!

어쩌면 모든 인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은 동일할 거다.
그러나 모두를 기뻐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당신께서 선택하신 유대인들조차 기뻐하시긴 어려워 보인다.
예수님께서 기뻐하는 아들이라는 것이 그분의 삶 전체를 분명하게 해준다.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삶이 어떠할지 알 수 있다는 얘기다.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살아낸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를 얼마나 무겁게 받으셨을까.
매일의 삶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고,
결국 십자가가 현실이 되는 상황 가운데서도 물러 서거나 피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고(존재),
더불어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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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세례 요한은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했다.
그럼 세례요한의 능력이 뭔가?
자신 뒤에 오시는 분의 능력은 또 뭘까?

세례 요한은 이미 자신의 능력을 보여줬다.
광야로 사람들을 끌어냈고, 그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획기적인 일을 실현했다.
그럼 예수님의 능력은 무엇인가?
가르침, 병고침 등의 기적? 영적 파워(카리스마)?
이런 것들로도 예수님은 그 누구와도 구별되는 능력의 차이를 보이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하나 더 있다.
바로 죽음의 능력이다.
온갖 고통을 다 받고 못박힌 십자가의 죽음,
그 길이 어떤 길임을 알고도 그것을 선택하는 그 모든 여정이 바로 예수님의 능력이다.
물론 세례요한 또한 헤롯 왕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예수님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예수의 능력은 뭘까?
우리가 기대하고 고대하는 예수의 능력은 뭘까?
전자에만 있지 않나? 기적과 같은.
먹을 것, 질병에서 나음 받고, 명예를 얻고, 힘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예수님의 최종적 능력은 죽음에 있었다.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그 능력,
죽기까지 사람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키가 된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인생들을 향한 사랑의 능력이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탁월한 능력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정답에 가깝다.
세례요한은 사랑이 아니라 정의에 가까웠고, 구별이나 분리였다.
광야로 나오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또 정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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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2-5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그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더라

세례 요한의 사역은 사람들을 성전 밖으로 불러낸 것이다.
(당시 요한과 같은 이들이 더 있었다.)
그 때까지 성전과 그 성전의 사람들인 제사장들,
그리고 그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중심의 종교생활을 했다.
그것이 자신들의 삶의 안녕을 지켜주는 방편이었다.
그런 그들을 성전과 예루살렘의 밖으로 끌어 낸 것이 요한이다.
의례에 묶여 있던 하나님과 진리를 향한 갈망에 자유를 준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상황을 혼란으로 여기고, 경계해야할 사태라고 보았을 것이다.
상당히 기분 나빴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활동은 굳은 종교를 유연하게 하는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는 것은 결국 들과 강에서 제사(속죄제, 화목제)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도 제사장이 연 어떤 야외 성소에서가 아닌 한 야인이 선 들녘과 강에서였다.
그러니 이 얼마나 예수님의 길을 잘 준비한 것인가?
예수님은 이후 당신 스스로를 성전보다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고,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성전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요한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던 말씀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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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여기서 시작이라는 것은 마가복음의 기록을 알리는 것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삶에 대한 엶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예수님을 통해서도 그렇고, 또 예수님 전에도 사실은 복음은 있었다.
하나님의 이름 그 이상의 복음이 또 있을까?
예수가 그 하나님을 최고로 담아내었기에 예수님의 이름이 복음을 대변하게 된 것이다.

시작이라는 것의 의미는 어쩌면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 말씀을 읽을 때 그 속에서 시작되는 복음의 역사!

그래서 우리는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역이 내 속에서 시작되고,
또 누군가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갈 때 그 곳, 그 사람에게 복음은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셨고, 끊임없이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아마 마가는 이 첫 문장을 쓰기위해 가장 고심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자신 안에서 그 순간 새롭게 떠오르는
예수님의 생생한 이야기들이 그로 하여금 시작의 마음을 갖게 한 것이다.

마가와 함께 복음을 시작하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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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은 뭘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어떤 삶을 사느냐'는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을 삶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천한다는 것은 회개(반성)와 동시에 변화된 삶으로 나아가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믿음과 대응되는 반대개념이 아니라 믿음을 포함하는 더 넓은 의미이다.

누군가 무엇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가 무엇을 믿는 지를 알 수 없다.
과장해서 표현하며 하나님 조차도 그가 무엇을 믿는 지 아실 수 없다.
오로지 그가 삶 가운데서 어떤 결단을 하고 변화된 삶을 살고 있느냐로 알 수 있을 뿐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복잡한 질문들을 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예정론, 신정론, 삼위일체는 물론 영지주의 등 난해한 문제들을 가지고 와서 해결해 달라고,
그것이 풀리지 않아서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헛다리 짚은 거다.

예수 그리스도의 단순한 삶을 배우고,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성육신이니, 동정녀 탄생이니, 대속이니 하는 것들도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사랑을 나도 실천하고, 예수님의 버림을 나도 실천하고,
예수님의 모욕당함을 나도 당하면 된다.
"하루에 한 시간씩 하나님을 만나고,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는 마더 테레사의 말에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리스도인은 어떤 이론이나 신학이 옳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나를 부르셨기에 그를 좇아 가는 사람들이다.
믿음을 넘어서 삶으로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점이다.

하나님께서 묻지 않으실까?
"너 예수를 믿으며 살았냐?"가 아니라 "너 예수처럼 작은 자들을 사랑하며 살았냐?"라고.

믿음? 그건 의외로 간단하다.
우리의 구원의 문제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거면 충분한다.
그리고 '믿습니다'라는 외침과 조건부의 행위로 결정할 수 있다는 오만을 버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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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들이 성도들을 무술도장에서 사범이 제자를 가르치듯 해야 합니다."
얼마전 어떤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나는 이 말을 교회에서도 도장처럼 승급, 승단을 시켜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요즘 교회는 성도들을 승급시키지 않는다.
한 5급 쯤 되면 거기에 멀물러 있게 만든다.
그래서 사범인 목사를 죽을 때까지 필요하게 만든다.
그들은 매번 동일한 동작을 반복한 뿐이다.
어느 누구와의 겨루기도 필요없다.
목사가 나서서 막아주고 지켜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승급하지 못한 성도들이 나이가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가 되어 교회의 중직자가 되는데,
배운 것이 없고, 볼 줄 아는 안목도 없고, 결정적으로 잘 성장하고 훈련된 신앙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그들에게 맞겨진 교회가 건강하게 운영될 수 없다.
많은 교회들이 치고받고 싸우는 것에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또 늘 같은 동작만 반복하던 성도들이 세상에 나갔을 때
매 주 듣는 것은 많아서 말도 잘하고, 머리 회전도 빠르지만
정작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알 지 못해 기독교 쭉정이로 살아간다.
그들이 교회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으니 욕을 먹지 않을 수 없다.

승단을 해서 수준이 올라가면 과거 반복동작들은 그의 몸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이미 몸에 밴 기본기이고, 그것을 응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높은 신앙의 여정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승급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이해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다른 모습을 취하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심지어 이단으로 몰아세우기까지 한다.

저급할 때는 각자의 도장의 특색들이 중요하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그 차이들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승급하지 못한 이들은 이 안목을 갖지 못하기에 남을 더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유단자가 된다는 것은 그 도장에 더이상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모든 것을 가르쳐주고, 훈련시켜서
도장(교회)을 내 보내야 한다.
또 다른 곳에서 그들이 누군가를 제자로 삼아서 가르치도록 말이다.
아니면 더 높은 경지로 이끌어줄 또다른 스승에게 배우러 가든지, 
스스로 기술을 더욱 연마하기위한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아쉽게도 지금 교회에서 승급은 금기사항이다.
위험한 일이라 여기고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따로 불러서 호되게 주의를 줘서 원위치로 돌려놔야 한다.
그래서 마치 매트릭스에서 레오를 찾아 되돌려 놓으려는 스미스 같은 역할이 교역자들의 일이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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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힘 가진 사람들이 함부로 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런데 자신이 그 권력과 끈이 닿게 되면 확 돌변한다.
그럴 수 있다고, 지금은 그런 것이 필요한 때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우리 내부에 권력에 대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힘 뿐만이 아니다.
인기, 아름다움, 지식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가 뭔가를 더 큰 소리로 비판하게 될 때,
저신의 내부를 더 솔직하게 들여다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큰 소리로 비판하는 어떤 것이 내 내부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 명심하자!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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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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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그 길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대개 보수적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 익숙한 방식을 유지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를 더 먹을 수록 더욱 보수적이 된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옳고 그름보다는 익숙하고 편한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자신과 친한 사람, 해 오던 방식을 따르는 것을 선호한다.

지금 교육계의 문제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들...
특히 교회에 잠재하고 있는 문제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변하지 않으려는 보수적 태도가 도사리고 있다.
조금도 바꾸려고 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변하는 시대를 좇아 가지 못하는 것이다.

요사이 교회나 학교 현장을 보면서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긴박감을 느끼고 있다.
지금 젊은 이들, 청소년들은 이미 바뀌어있다.
그런데 그들을 상대해서 뭔가를 시도하고 있는 기성세대들을 그것을 모른다.
아니 알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이제 더이상 한 사람 혹은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다수의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상대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왜냐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나이나 위치, 혹은 직함 등을 머리로 이해하고 권위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상대방이 얼마나 진실한지, 더 나아가 나를 향한 진심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인지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낀다.
만약 가슴으로 그것을 확신하게 되면 머리와 온 몸을 주어 버린다.

그래서 교육의 현장의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
일대 다수의 만남을 지양하고, 일대일 혹은 일대 소수의 만남이 가능한 구조로 나가야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일방적인 전달의 구조를 탈피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들이 들려 질 수 있는 구조로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획기적인 생각의 전환과 투자가 요구된다.
어쩌면 그래서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도 더 걸리고, 힘도 더 많이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교인들만 봐도 큐티 나눔이나 일대일 훈련 등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선호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니 더 젊은 세대들은 어떻겠는가?
학교에서도 전체를 대상으로 한 수업에서는 딴전을 피우고 돌아 앉아 있는 아이들이
가까이 다가가서 자신의 일대일의 인격적 접촉을 시도할 때는 태도도 달라지고, 말씨도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 지는 명확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린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야흐로 영성의 시대는 그런 영적 권위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 영적 권위란 예수님의 마음,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만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을 향해, 젊은 이들을 향해 예의가 없다고, 부모들일 가르치지 않았다고 남탓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이젠 익숙한 방식을 버리고, 기꺼이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굳어있는 몸을 유연하게 해야 한다.
일단 다음 세대들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들을 만나는 방법(본질이 아닌)을 비용이 얼마가 들던 간에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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