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이 닥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내가 그렇다. 죽지 않는 것을 원하지는 않지만, 아파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몸 상태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지만 실은 병들었다고 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을 때가 더 많다고 해야 한다.

삶이 고통스럽지도, 불행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그러나 오늘 헨리 나웬의 일기를 읽으면서 내가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불행과 고통이 복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당하는 그 불행을 내가 만났을 때 뒷문이 아닌 앞문으로 당당히 맞을 수 있다면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을까?

헨리 나웬은 추기경인 조지프라는 사람이 암으로 입원해 있을 때 만났던 일들을 추억하며
그의 아픔을 넘어 죽음까지도 교회에 선물이 되겠다고 일면 가혹할 것 같은 말을 적고 있다.

9월 7일
나는 조지프와 함께 있으면서 그의 병과 언제 닥쳐올 수 있는 죽음이
오늘날 교회에 그가 선사하는 가장 큰 선물이 될 수도 있겠다는 깊은 확신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이 에이즈와 암, 기아와 전쟁과 폭력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조지프의 병과 죽음이 아파하는 모든 사람을 진실로 배려하는 사목이 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는 끔찍한 불행을 겪으실 때
그 고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 보셨기에 그 사건은 우리에게 복음이 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 나에게 일어나는 예기치 않은 불행도
그것을 맞이하는 나의 태도 여하에 따라 전혀 다른 반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너무도 조심스럽지만, 나의 어떤 불행도 하나님께 유익하게 바꾸어내는 삶으로 당당히 나가고 싶다.
나의 죽음도 유익하다는 찬양의 가사처럼...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믿음을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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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9월 2일 토요일
나는 단 하루도 나의 내념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능한 한 솔직하고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고서는 그냥 넘기지 않겠다고 자신과 약속했다.

헨리 나웬의 마지막 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한 번에 끝까지 읽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매일 한 글자씩 써 내려간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아
하루에 한 두 편씩을 읽으려고 한다.
그 여정을 통해 나를 돌아보며 성찰을 시도해 보고 싶어서이다.
어찌 내 주제에 헨리 나웬이라는 거목을 올려다 볼 수나 있을까 만은
성큼 성큼 앞장서 가는 아빠를 종종걸음으로 뒤쫓아 가는 아이처럼
그렇게 읽고 생각하고 기록을 남겨보고 싶다.

9월 3일 일요일
기도는 무의식과 의식을 이어주는 다리다.
어쩌면 나의 기도, 하느님 곁에 있으려는 나의 노력, 하느님과 친교를 맺는 나의 방식을 버리고
성령께서 내 안에서 자유로이 움직이시도록 나 자신을 내맡길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기도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저렇게 기록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기도의 상태를 '어둠과 메마름'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로부터 기도가 돌처럼 무감각해졌다고 하더라도 성령께서 이끄실 것임을 믿고 있었다.
그리곤 그 다음 날 일기에서는 사람들과의 관계인 우정을 기도에 비유한다.

9월 4일 월요일
기도하려는 나의 노력은 우정을 위한 노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도와 우정은 정화를 필요로 하며 덧없는 감정에 덜 의존하고
한결같이 헌신하는 일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리고 하는 말 '이 지혜를 따라잡으려면 참으로 많이 수양해야 한다.'
맙소사 이 영성의 대가가, 그래서 내가 쳐다 볼 수도 없을 것 같이 높은 경지에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수양해야 한단다.

나는 수양은커녕 기도에 무장해제를 하고 살고,
성령에게 맡기기는커녕 PC에 더 의존해서 삶을 연명하고 있으니 참 한심한 노릇이다.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고 살 수 있다니 참으로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 기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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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의 중요한 척도 중 하나가 '집중'이라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집중력이 나에게 많이 부족하다.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산만 그 자체이다.
요즘 들어 부쩍 더욱 많이 느낀다.

내 상황으로도 그렇고, 내 생각으로도 당연히 집중해야 할 곳이 있는데,
그대로 내버려 둔 채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을 때가 더 많다.

책은 다 읽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책 얘기만 들으면 일단 구입하려는 마음만 앞선다.

중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한 신령한(?) 전도사님 한 분이 오셨던 적이 있다.
이 분이 형과 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하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내가 산만하다는 거였다.
그 때는 그 말을 수긍할 수 없었다.
일단 기분이 많이 나빴는데, 그 이유는 내가 형보다 공부를 잘 했기 때문이다.
더 산만한데 어떻게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내 논리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전도사님의 진단(적절한 표현!)이 맞았던 것 같다.
형은 인생이 심플해서 하고자 하는 것을 한결같이 해 오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잘 못 살아왔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 보면 이리저리 흔들림이 더 많았던 것 같고,
특히 요사이 많이 산만한 모습을 보면서 더 그 말이 더 떠오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소망 중 하나가 뭔가를 집중해서 뚫는 삶을 사는 것 아닐까.
꼭 뭐를 뚫은 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일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내가 나의 인생을 살면서 더 이상 잘 할 수 없을 만큼 최선의 집중을 한 흔적을 갖고 싶다.

집중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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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정해서 꼬박꼬박 보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드문드문 보게 될 때가 있다.
오늘은 선덕여왕을 보게 되었는데,
흉년에 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민란이 일어난 안강성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민중들은 웬만해서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한 마디로 '좀 더 참고 살면 되지'하면서 몸을 낮춘다.
그래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선택을 한 것이다.
달리 보면 어차피 굶어 죽을 것이니 다른 방식으로 죽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민중들의 목숨을 건 폭동, 즉 자기 표현이 역사를 진보하게 한 것이 아닌가?

"만일 민중들이 법을 다 지키고 살았다면 사회는 지금 노예제 사회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법치는 옳은가'라는 강의에서 한홍구교수)

결국 이 진보라는 것은 가진 자들의 생각을 아주 조금씩 바꾸는 과정이 아닐까.
뭔가를 쥔 자들은 변화를 원치 않는다.
그래야 자신들의 힘과 소유를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이 몸을 던져 피 흘리는 불법이 변화의 시발이 될 것이 아닌가.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 하면 예수님을 빼놓을 수 없다.
일단 그 분은 유대인들의 목숨과도 같은 법, 율법을 무시했다.
이유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대 기득권자들의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또 그 뿐일까. 예수님의 행보는 헤롯이나 로마의 지배자들에게까지도 걸림돌이 되었다.
어쩌면 지배자들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돌볼 수 있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이 백성들을 한 차원 높게 깨워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을 터이다.
그런데 그 과정은 정치적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성경은 빌라도가 등 떠밀려서 예수님을 십자가로 보낸 것으로 나오지만,
어찌 그 자신의 의지 없이, 판단 없이 그런 일이 가능할까? 대 로마의 총독이 말이다.
빌라도는 충분이 이 사람, 예수의 행적을 정치적 차원에서 이해했고, 법으로 심판한 것이다.

예수 사후 이천년의 세월 동안 힘없고 눌린 자들의 불법 투쟁은 계속되어 왔다.
오늘 본 선덕여왕에서의 백성들의 행동도 거기에 속할 거다.
언제나 가진 자들의 논리는 주류를 형성하지만
그것에 의해 규정되는 자들의 생각은 무시된다.
힘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기꺼이 그 힘없는 쪽에 서셨다.
그래서 무참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한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오늘도 여전히 중요한 화두이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에 대한 생각의 진보를 위해 또 어느 곳에선가 불법은 행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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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기웃 하다가 드디어 트위터에 가입했다.
블로그를 하면서 또 트위터를 한다는 것이 산만해지는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냥!' 한 번 발 담가 보기로 했다.

우선 김주하, 이외수, 노회찬의 Follower가 되었고,
누가 내 글을 구독해 줄 진 몰라도
주로 간간히 떠오르는 아포리즘을 올려볼까 한다.
그리고 독서 후의 정리에 부담이 있었는데, 편한 마음으로 마음에 와닿은 구절들을 올려야겠다.

많이 지져대야징 twitter~
http://twitter.com/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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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순 교회 어린이들 6명과 상주로 향했다.
일명 '농촌체험'을 하겠다는 것이었고, 그 내용은 포도따기였다.
학교 다니는 것에 더해 학원에 가야해서 바쁜 친구들을 불러 모아 금요일 오후 늦게 출발했다.
당연히 상주에 있는 집에 도착하니 9시가 훌쩍 넘었다.
서울 아이들에게 농촌의 볼품없는 집이 어떤 인상으로 비춰질까 약간은 긴장도 되고,
막상 잠자리 들기 전 한두시간 뭘 해야 하나 걱정도 되었는데,
들어서자 마자 아이들의 모든 관심을 송두리채 집중하게 한 작은 생명이 있었다.
검은 색의 주먹만한 강아지!
강아지 한 마리로 이틀은 충분했다.

이튿날 아침 식사 후에 백화산(933m) 계곡 물에 발 담그고
곧바로 향유네 포도원에 가서 포도를 땄다.
실은 좀 많이 따주고 싶었는데 이 놈들, 어찌나 말이 많던지
향유아빠가 네 줄 정도 마칠 즈음, 그 정도면 됐단다.
길진 않지만 우리를 위해 남겨둔 대여섯 줄이 더 있었는데...

암튼 예기치 않은 어린이들과 함께한 경험,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들 덕에 꼬마 손님 치르느라 분주하셨던 부모님께도 감사하고,
기꺼이 시간 내서 아이들과 함께해 준 향유아빠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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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도 에어컨들은 열심히 돌아간다.
낮의 기온이 높기 때문에 더위를 면하기 위해선 에어컨을 틀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더위를 면하려고 하는 것일까?
일하기 위해서다.
일을 잘 하려면 시원한 온도를 유지해 줘야 한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좀 엉뚱한 생각이긴 하지만, 왜 더운 날에 할 수 없는 일을 시원하게 만들어가면서 해야 할까?
어쩌면 더우면 그 더위에 맞게 쉬던지, 잠을 자던지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억지로 전력을 써가며 에어컨을 돌려 시원하게 만들어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지구를 만드시고 각 지역마다 그 지역에 맞는 기후를 주셨고,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그에 맞는 일을 하면서 살면 된다.
아마도 과거 농업을 주로 할 때는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 지역과 상관없는 일들을 하고 있다.
긴 시간 자연과 동떨어져 살면서 생산력을 높여서 만들어 내는 것들이
전혀 자신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고,
그런 것들이 실제 필요 이상으로 만들어 지고
그것을 소비시키기 위해 과대 광고를 하고
과소비를 시켜서는 또다시 부를 창출해 축적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어쩌면 오늘날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과다하게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혹사하고 있다.
대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이는 마치 노예와 같은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높이를 부르짖으며 전진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삶의 진정한 가치는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비친 자신을 전부로 여기고 있다.
이처럼 종속된 삶이니 노예라는 말이 틀린 말도 아니다.

에어컨 얘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지만
우리들이 스스로를 위해 만들고 필요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있는 것들
과연 그것들이 정말 우리를 위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를 하고싶어서다.
어찌 에어컨 뿐만 그럴까?
자동차도 그렇고, 냉장고도 그렇다.
멀리 갈 수 있는 이동수단이 생겨서 편리하지만 그것으로 잃어 가는 가치는 얼마며
소위 저장할 수 있는 기간이 늘어난 것으로 인해 우리 몸은 자연과 더 멀어졌다.
그래서 작은 변화만 있어도 우리 몸은 취약성을 곧바로 드러내는 것 아닌가.
면역력 저하는 어쩌면 저장 기술의 발달과도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길러낸 농산물을 두고두고 먹으며 몸을 채우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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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에 '문화인류학'이라는 과목을 듣게 되었는데
첫 시간에 좀 독특한 과제를 해야 했다.
2050년의 일기 써오기, 그것도 로봇이 들어가게.
다른 수강생들 써 온 것을 세 편 정도 들었는데,
무슨 공상과학 소설을(마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파피용'을 방불케 하는) 대하는 듯했다.
그에 비해 내가 써 간 것은 너무나 소박하고 신변잡기적이었다.
그래도 나름 재미있는 접근이었다고 자평하며 올려본다.


2009년 8월 9일에 쓰는
2050년 8월 9일 김민태의 일기

운동부족!
원래 운동하는 것을 싫어했다.
특히 동그랗게 생긴 것을 하나 놓고 죽자고 뛰어다니는 것은 더욱 싫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뛰며 흘리는 땀 냄새가 그립다.
온종일 소위 최적의 온도에 꼼짝 않고 앉아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당최 사는 것 같지가 않다.
정부에서는 최상의 실버서비스를 실현한다고 하면서
결국 저 실버도우미 한 놈을 안겨 주었다.
뭐 나름 편리하긴 하지만 저 놈은 나를 돕는 척하면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
로봇이면 로봇의 본분을 지켜야지 웬 말이 그리 많은지.
이래라 저래라 마누라보다 잔소리가 더 많다.
일어나라, 이 닦아라, 밥 먹어라, 걸어라, 씻어라, 누워라 등등.
그래봐야 콧구멍만한 방에서 하는 일인데.
이 놈 없이도 할 수 있는데.
이까짓 귀찮은 놈 안겨 놓고는 내 새끼에게서 돈을 뜯어가겠지.
나쁜 놈들.
저 놈이 컴퓨터에 쓰는 일기는 훔쳐보는 것 같아서
오늘부터는 옛 기억을 살려 만년필로 끄적거려야겠다.
놈! 속이 좀 탈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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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님과 부교역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
나야 뭐 아직 비중도 없고, 내가 할 이야기도 제한적이어서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회의가 중반을 넘어서고 있을 때 '교육'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왔다.
내가 무슨 얘길를 했느냐를 떠나서 그런 자리에서의 나의 태도는 딱 두가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조용히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말을 하되 높은 톤으로 한다는 거다.

문젠 두 번째!
말을 하더라도 차분히 해야하고, 내용은 전후 맥락 가운데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하고,
앞뒤를 잘라내 버리니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잘 전해질 수가 없다.

왜 목소리가 커지고, 또 크든 작든 감정이 실리기까지 하는 걸까?
말에 감정이 실리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듣는 사람도 감정으로 듣게 된다.

예전부터 말하면서 감정을 실어서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는데
그래서 늘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을 했었는데,
지금 보면 내가 딱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게 하고 나면 그 전에 가만히 듣고 있었던 것도 제대로 경청하지 않은 것이 된다.
어쩌면 잘 듣는 것을 못했으니 내 말도 잘 전달하지 못하는 거다.

결국 마음의 문제로 귀결된다.
안정감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잘 듣지 못하고,
공격이 두려워 먼저 공격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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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영성적 삶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묶이지 않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

과거에 있었던 상처가 지금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고,
미래 일어날 일들이 나를 불안하게 하지 않도록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그 분을 바라보며
그 분이 아닌 것들에 의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아파하고 가슴 조렸는가?
하루도 한 순간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거기에 더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정작 나 자신을 버려두었다.
잘 하지 못할까봐, 실수할까봐, 사람들이 싫어할까봐, 버림받을까봐 움츠러들었다.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걸...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느낀다면 이 순간이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다.

-----------------

내일 나와 관련해서 한두 가지 결정될 일이 있다.
그 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 이래도 저래도...
중요한 것은 내가 그런 일들 가운데 일이 아닌 하나님을 볼 수 있느냐 이고,
최고의 순간은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나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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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신데, 나는 (소위) 하나님의 일을 보고 있다."

8박9일의 예수마음배움터 피정을 마치면서 나에게 던지는 말은 '어디 보니?'
하나님이 보시는 곳을 같이 볼 수 있으면 생활은 많이 달라진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두려움과 불안 휩싸여 고민할 일은 현저히 줄어들고,
오늘, 아니 지금 이 순간을 깊이 누리게 된다.
이 순간이라 함은 바로 지금 나의 마음에 대한 관심이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가 가을 하늘처럼 맑아지는 경험을 하는 거다.
'관상'이라는 것이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런지.

하나님, 이 순간 저의 마음을 말끔히 비울께요.
하나님께서 가득하시도록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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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된 목적은 경운기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계속 세워만 놓는 것 같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팔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려간 김에 텃밭이지만 적지 않은 농삿일에 품을 보탰다.
참깨 순치기.
정확히 말하면 더이상 자라지 말고 이미 달린 열매들이 더 실해지라고 맨 위에 꽃이 달린 부분을 잘라주는 거다.
손톱 끝이 시컴해지고, 끈적끈적해 졌지만 나름 즐거운 작업이었다.

(핸드폰 카메라가 좋지 않아서 사진이 영 불량하지만...)



집 앞에 울타리를 탱자 나무로 하고 싶어서 한 뼘 남짓한 것을 옮겨심었는데,
3년만에 이렇게 자라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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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에게 설교할 때,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될 때 우리들이 살아가는 곳들이 사랑과 평화가 넘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작은 예수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몸으로 보여주는 삶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셨던 가치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깨우친 사람들에게,
교회가 성도들에게 바라던 그런 삶을 살아낸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불경한 것으로 여기고 비판한다.
어떻게 그 사람에게 감히 예수라고 할 수 있느냐고 분개하기까지 한다.
아마 그들은 스스로의 논리적 모순에 빠진 것이다.
자신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에 대한 질투심이 엿보이기도 한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삶을 살았다.
우리 나라의 예만 들어도 최용신, 주기철, 손양원 등의 선각자들을 예수라 하는데 이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류영모, 김교신, 함석헌, 권정생과 같은 이들도 역시 그렇다.
더 나아간다면 암울한 시기에 자신을 태워 세상을 깨우려고 했던 전태일,
또 최근에 노무현 대통령까지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최소한 예수님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정확히 한다면 그들을 그리스도라 칭할 수는 없겠지만 (작은) 예수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 자신을 가장 밑바닦으로 집어 넣으며
기꺼이 자신을 태우며 부르짖을 수 있는 삶,
너무도 이기적인 삶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다른 존재를 깨닫게 하는 삶,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 길을 하나님께 기대어 가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누가 그를 예수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 예수라고 칭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슬픔이 더 눈 앞을 가린다.
좀 더 자신을 위해 사시지, 좀 더 이기적이 되셨으면 좋았을 것을.
어쩌면 이 말은 베드로의 말과 닮아 있다.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라고 부르짖던.
그러나 그들에게 그 길은 운명이 아닌 선택으로 주어졌다.
그리고 그들을 그 길을 선택하고 살아갔다.
그래서 결국 운명은 그들을 예수라 하는 것이다.

남아 있는 자들은 자신의 비겁했음을 가슴을 치며 후회하거나
그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것을 시샘하며 불평을 늘어 놓는다.
기득권자들은 예수가 많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때문에 자신들의 삶의 내용들이 들춰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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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삼하 1:19)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면 부른 조가의 시작부분이다.
아홉 절에 걸쳐서 다윗은 진심으로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요나단은 그렇다 쳐도 사울의 죽음을 그리 슬퍼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지기도 했고, 군대를 이끌고 좇아 다녔던 사람이다.
그 사울이 죽었다는 것은 더이상 목숨을 노리는 자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다윗이 이미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으므로 왕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기에
기뻐해야 할 일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윗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진심으로 사울의 죽음을 애도한다.

어디 그 뿐이랴.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과 왕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그들에게 사신을 보내 감사한 마음을 표한다.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삼하 2:5-6)
만약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어디 이런 행동을 취할 수 있었을까?
당장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마음 한 켠에 저런 괘씸한 놈들이 있나 하며 칼을 갈고는
기회가 되면 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도 남을 상황이다.
그러나 다윗은 마치 자신의 부모에게 베푼 은혜에 대해 감사하듯이 그들을 높여 주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전혀 서두르지 않는' 다윗을 볼 수 있다.
왜 다윗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에 효율적이지 않았던 것일까?
왜 힘을 쓸 수 있을 때 한 방 날리지 않는 것일까?
자신이 원하는 빨리 이루기 위해 달려들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형편에 이었을 텐데 말이다.

그는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기회를 두 번이나 사용하지 않았다.
상황을 깨끗이 정리하고 스스로 자신의 때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때 그렇게 하지 않고 기다렸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열어 가시는 때를 기다렸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의 최선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원칙에 최대한 가까이 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모습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도리를 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도리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었고, 
그것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을 죽이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의 행하심을 앞질러 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도 근시안 적이다.
할 수만 있다면 단시간 힘을 써서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당연히 자신이 손해 보는 상황은 조금도 참지 못한다.
참고 기다리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어떤 형태로든 힘이 있으면 상대방을 누르고, 제압하려 한다.
그렇다면 생각해 봐야 한다.
다윗이 정말 힘이 없어서 그렇게 긴 시간을 지체했는지.

다윗은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 힘을 누군가를 이겨먹기 위해 사용하기보다
자신 안의 '나'를 이기기 위해 애썼던 것이다.
그래서 정말 힘 있는 사람이고, 힘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고 칭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밖으로 힘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사람은 정말 힘이 센 사람이 아니다.
힘이 셀수록 그 힘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말이다.

오늘, 예수님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윗 정도는 흉내라도 내 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눈앞에 손해가 때로 크게 보면 이익이 될 때도 있다'고 말하며 기꺼이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엔 자신의 몸까지 던지면서 진실을 말하려 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추모하는 이들에게 마당 하나 내 주지 않고,
불순세력 운운하며 알량한 힘을 쓰는 사람이 있다.
누가 다윗의 길을 걷는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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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데에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이런저런 이유를 붙이기 시작하면 그 것은 진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건 그냥 좋은 거다.

난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좋았다.
좋다는 데 무슨 이유가 있을까?
물론 그의 모든 면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이라크 파병을 하지 말라고 시위도 해봤고,
반대로 그를 탄핵한 사람들을 향한 촛불시위에도 참여했었다.
또 한미FTA를 진행할 때는 그를 욕하기도 했다.

그가 봉하마을로 내려갔을 때 꼭 가서 얼굴 한 번 보고 싶었다.
한 번은 그가 밥 먹고 갔다는 식당에서 밥 먹고 뿌듯해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흑백사진을 내 블로그의 이미지에 넣게 될 줄이야.

   검찰이 적당히 했더라면,
   퇴임 후 조금만 인기가 없으셨더라도,
   돈을 받으시지 않으셨다면(누가 받았던),
   검찰과 사이가 좋으셨다면,
   대통령이 되지 않으셨더라면...
 
역사에 만약은 없는 것이겠지만
하도 답답해 만약을 되뇌어 본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그의 말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로 넘기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며칠째 한숨지으며 안절부절 못하고 서성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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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교역자들과 갔었던 곳 사진들.
누가 보면 놀러만 다닌 줄 알겠네.

2008년 운보의 집, 속리산, 법주사





2008년 횡성, 강릉



2009년 미시령, 속초, 낙산




2009년 남이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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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하는 사람들이나 설교를 하는 사람들은 흔히 나의 강의(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잘) 변화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내가 어떻게 하면 그들이 '이렇게'(자신의 생각대로) 될까를 생각하는 것이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 아닌 다른 사람, 혹은 자신이 속한 그룹 외의 다른 그룹을 대상화 타자화한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타자화 하고 있는데,
정말 타자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잘 생각해 보면 세상에 타자란 없다고 볼 수 있겠다.
왜냐면 모두 주체로서 존재하지 객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독립된 존재로서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생산자요 소비자이다.
그러므로 일방적으로 나는 주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받기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강의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감정을 주고받고 있는 것이다.
청중도 감정을 생산하고 있고, 당연히 강의자는 그것을 받고 있는 것이다.

늘 영향 받고 변화되어야 하는 것들을 자신 밖에서 찾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밖이, 타자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느낄 때 그 말은 이미 자신의 변화라는 말로 바꾸어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바꾸어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을 타자화하는 것만큼이나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타자화하는 것도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온통 촉각을 세우고 사는 삶이 그것이다.
변화의 에너지가 자신으로부터가 아닌 밖으로부터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삶이 너무도 피곤할 것이고, 옆에서 보기에 가엽기까지 하다.
언제 제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볼까?

누군가를 타자화하든, 나를 타자화하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자타를 구분하지 말고 똑같은 '나'로 인식하는 태도라 하겠다.
모든 이들을 나로 인식하게 될 때, 삶이 좀 더 따듯해 질 것 같다.
상대방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며, 상대방의 허물을 나의 허물로 여길 뿐만 아니라
그의 기쁨도 함께 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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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부에서 아이들이 큐티를 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시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아이들 입에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신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이 두 문장이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시련을 주실까?
성경을 보면 그 대답을 얻을 수 있을까?
뭐 단련하신다고 할 수도 있고, 다 뜻이 있으셔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고,
좀 정성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약간은 미신적인 표현으로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봐도 인간들이 처한 상황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정답은 찾을 수 없다.

성경은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성경은 답안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인생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히 결론을 지을 수 없는 것이니
무 자르듯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다.
조급한 마음에 한 마디로 정의 할 수 없는 것인 것 같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정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에 빠진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 그리스도인 삶, 신앙이라는 것,
고통, 시련,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 간단하게 풀릴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성서는 오늘의 우리와 똑같이 그런 의문에 휩싸였던 이들의 긴 여정을 담고 있는 책이다.
굴곡 많은 인생을 살며 그만큼 큰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씨름했던 이야기들을 전하는 책이다.
그래서 그들은 크신 하나님의 일부분에 접촉한다. 
그들이 그려내는 하나님 이야기의 결론은 하나님에 대한 것은 모두 '알 수 없음'이고
그 분의 사랑만은 확실히 '알 수 있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모습을 추출해 낼 뿐이다.
시련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과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오늘 내가 그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서가 혹은 설교가 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으로 교인이 되고 교회에 오는 것도 문제일 수 있으나,
더 큰 문제는 그런 생각으로 설교하는 목회자들에게 있다.
자신이 접촉한 하나님의 모습을 절대화, 공식화해서
다수의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이미 하나님은 그 모습으로 계시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은 다른 모습,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나시기 때문이다.

어쩌면 각자가 갖고 있는 삶이라는 것은 일생, 아니 그 이상을 통해 풀어 가야할,
또는 그 과정을 통해 풀려질 '나의 과제'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의존하게 된다면 자신이 해결해야할 숙제를 엄마에게 부탁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꼴이 된다.
몇 번은 가능할 지 몰라도 그 습관이 계속된다면
그는 아마도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의 끄트머리만 좇으며 흉내내고,
연기하는 삶이 되고 말 것이다.

성서를 읽으며 그들의 부르짖음, 고뇌에 응답하셨던 하나님께서
나에게 또 어떻게 응답하실 지를 기대하는 삶,
그래서 늘 변화무쌍한 다양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인의 길을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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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15

요즘 교회들이 사람들을 모으는데 열심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사람을 모아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사람이 되게 하기 보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들기위해 노력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 교회에 다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됨보다 교인됨을 좇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학교 교육이 그러하듯 제도교회의 '바보만들기'에 수해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교회와 목회자들의 기준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과 만남을 갖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인가?
물론 전자가 후자와 일치한다면 문제는 없지만
눈을 씻고 봐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까움이다.

교단이 나서서 정책으로 숫자를 정하고 전도하겠다고 하는데,
우연인지 의지적인 것인지 현정권에 대단히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도 웃지 못할 진실이다.
성공적으로 성도들을 시대적 문제들에서 떨어뜨려 놓고 있으니 말이다.
뭐 대단한 출정이나 하는듯 구호를 외치고 난리를 하니 이성은 둔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전도를 해서 사람들을 모아 교회를 채운다 한들
그들이 지금 교인들보다 더 낳아지리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하는' 사람들인 바리새인들의 이야기가 먼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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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일로 밥먹고 사는, 소위 전문가들이 문제의 중심일 때가 많다.
그쪽 방면에 일각연이 있다고 하니 비전문가들은 그들을 따를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도움을 받아야 하니 전문가들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쩌면 전문가들이 사람들이 자신들의 도움을 받도록 구조를 만들어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전문가들은 지속적으로 자신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이런 구조를 재생산해 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비전문가들의 수준을 높이려고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들이 제자리 걸음을 하게 만들고 있고, 
어려워 할 때 살며시 다가가 '그봐 잘 안되지? 나에게 부탁하면 되'라고 손을 내민다.

사람들의 과제는 이 종속의 고리를 끊고, 홀로 서는 것이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더라도 그 기간을 한시적으로 제한하자.
왜냐면 처음에는 배울 필요도 있으니까.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졸업을 할 수 있는 거다.
졸업을 못하고 그냥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성장이 멈추어 버린 것이다.
계속 초등학교 선생님에게 배울수만은 없는 것 아닌가.

사실은 교회 이야기를 하고 싶다.
교회의 전문가들(종교인들)...
정말 신앙생활에 전문가가 존재할 수 있는것인가?
계속 필요한 것일까?

그들이 하나님을 막고 서 있는 것은 아닐까?
또 성도들을 수단화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목적인데도.
신학교는 교회와 자신들에 대한 비판적 대안이 아닌 밥그릇(교회)을 키우는 훈련만 하는 것 같다.
본질은 멀찍이 두고서 말이다.

전문가가 없는 교회, (전문가가 전혀 없을 수는 없으니) 졸업할 수 있는 교회를 꿈꿔본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말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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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와 한국사회'라는 수업을 듣고 있다.
수업 방식은 수업에 들어오기 전에 읽을거리들을 읽고 질문 서너개를 교수님께 보낸다.
교수님을 그 질문들을 선별 분류해서 A4 한 장으로 만들어 오시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 질문들을 서로 나누며 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물로 배가 산으로 가지 않도록 교수님께서 교통 정리도 하시고, 중요한 것은 설명도 해 주신다.

문제는 내가 이런 수업에 익숙하지 않고,
인원도 적을 뿐더러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달하는 것도 훈련이 되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이 뭔지도 모를 때가 많은 것이 더 문제다.
이제까지 늘 많은 학생들과 배우면서 간헐적인 질문에 답변하는 정도 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지난 주와 오늘도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보려고 했으나 핀트가 어긋난 몇 마디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 수업 중에 알게 된 것은
내가 내 생각과 내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에 잡혀 있으면 다른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거다.
사실 이 말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얘기다.
내가 이래뵈도 인증받은 코치인데, 그정도 대화의 상식을 모를까?
하지만 실전에서는 망각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얘기가 끝나면 이 얘기를 해야지 하고 신경쓰고 있을 때 난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을 차렸다.
다음 수업부터는 내가 무슨 얘기를 해야지 하는 생각에 몰입되어 있지 말고
다른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지, 그 논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데 더 집중해야 겠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을 정리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일명 '경청'을 잘 하겠다는 거다.
내 것을 끄집어 내겠다는 집착에서 자유로와 져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우겠다는 자세를 갖겠다는 얘기다.

그러니 내가 정신이 들었다고 얘기하지 않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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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와 한국사회_민족담론의 스펙트럼(임지현) vs 상상의 민족주의 비판(신용하)


민족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봉건사회가 무너지면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일제강점기가 그 때이다.
국가를 상징했던 국왕이 없어지면서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민족이 된 것이다.

문제는 이 민족을 누가 얘기하느냐, 퍼뜨리느냐에 있다.
그들은 왜 민족을 중요한 이슈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민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수혜를 입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아무래도 해방이후에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기득권을 지키려는 범 보수진영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들은 민족이라는 두 글짜를 통해 끊임없이 권력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분류하고 걸러내는 작업을 해 왔다.

우리 나라는 좀 특별해서 민족과 국민이 일치하는 나라이다.
그래서 국가를 위해 민족을 동원하는 형세를 전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민족은 존재하는 것이며 차이 또한 있는 것인가?
왜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차별이 발생하고 있는가?
모든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진 않는다(동일성에 대한 착각!).
어떤 과정(개입, 정치 일 수도)을 거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쩌면 차별을 위해 차이를 찾아내는 것일 수도 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민족에 대한 이야기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많이 다르게 쓸 수 있다.
어떤 자료를 모으느냐에 따라 모든 논리가 가능한 상황이기도 하다.

마지막 질문인데, 한반도 밖에서의 민족주의는 무엇일까?
예를들어 재일동포들의 입장에서 민족은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
민족의 형성 세 유형
영-프 유형 :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부르조아의 견인
독-이 유형 : 신흥귀족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견인
                  만들었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의도적으로 더 강조(예술 작품 등에서)
슬라브 유형 : 일부 선각자들에 의한 민족주의 형성
                  민족국가 건설 노력, 해방투쟁  → 제 3세계 유형
※아래로 내려 올 수록 만들어진, 인위적, 감정적이고, 후진적이라 할 수 있다.

---------------------
내 생각 하나 더
단군신화 같은 경우에도 조선시대에는 별로 부각된 이야기가 아닌었는데
일제 강점기때 자신들의 고유성, 차별성을 찾아가는 선상에서 증폭된 것 같다.
그렇다면 기독교 역시 그런 의도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을까?
자신의 정체성을 보다 근원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찾고자 했던 시도가 아니었을까?
유대인들이 가졌던 선민의식 특히 출애굽의 사건을 해방과 연결시키고자 한 것이 아닌가.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은 유대민족의 하나님이면서 한민족의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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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님 강의 중

文脈
내가 갇혀 있는 문맥은 무엇인가?
그래서 어린이로 돌아가야 한다.
그들은 갇혀있지 않기에 문맥을 뛰어넘을 수 있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쓸모가 없어질까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인간이 쓸모가 있어야 하나?
인간이 쓸모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지 않은가?

脫井
자신이 갇혀 있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짧은 시선에 들어오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自己理由
자기이유는 곧 자유를 의미한다.
다시 갇히더라도 지식인은 정신적 자유를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의 기준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로부터의 기준, 이유로 사는 것이다.
(버섯 우화)

自尊
자기이유가 타인에게 거리낄 것이 없으면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힘든 삶을 견디는 조건은 물질이 아니라 자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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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아들이 길을 가고 있었다.
아들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고 싶었던 아빠는 길가에 자라고 있는 버섯을 발견했다.
이 때다 싶어서 아빠는 가지고 있는 막대기로 버섯을 가리키며 아들의 주의를 끌고 말했다.
"이 거 잘 봐봐. 독버섯이야. 먹을 수 없는 버섯이란다."

순식간에 독버섯이라는 말을 듣게 된 작은 버섯을 힘이 쭉 빠졌고,
정신을 못 차리고 쓰러질 지경이었다.
옆에 있던 친구 버섯이 그 버섯을 부축하곤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그 버섯을 위로하기 시작한다.
"아니야. 넌 독버섯이 아니야. 넌 버섯일 뿐이야."
그러나 이미 버섯은 삶에 대한 소망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독버섯이라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옆에서 위로하는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 버섯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 말을 던진다.
"그건 사람들이 하는 얘기일 뿐이야!"라고.

대학 새내기들을 위한 신영복 교수님의 강연 중 들은 우화


그렇다.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일 뿐 나와는 상관이 없다. 왜냐면 난 나니까.
그들의 평가로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이 아닌, 이미 나로서 나인 것이다.
난 그들이 세워놓은 기준에 합당 하냐 그렇지 않느냐로 평가 받을 대상이 아니다.
작은 버섯은 사람들이 세워놓은 식탁의 논리로 '독버섯'이 되었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얘기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존재 그 자체로 기뻐하신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어떤 기준에 부합하느냐, 어느 수준에 이르렀느냐가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사람들이 하는 얘기일 뿐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집중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자신을 혹사시키고 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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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정책론(1)_사회복지 정책이란?

수업 내용과는 좀 동떨어져 있지만
수업 중에 웃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이야기를 하고 싶다.

교수님께서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 하면서 '금수만도 못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럼 짐승은 존엄하지 않다는 얘기냐며 약간은 웃으라는 의도로 말씀하셨다.
학생들은 짐승도 존엄하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그런데 짐승은 그렇다 치고 정말 사람이 존엄할까?라는 의문으로 돌아왔다.
정말 인간이 존엄할까?

그건 사람이 하는 이야기인 것 같다.
다른 누군가가 해 준 이야기가 아니라 스스로를 향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머릿 속에 모든 사람이 존엄하지는 않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우리라는 틀, 즉 국가나 민족이라는 틀 안에 있을 때 그 사람은 존엄해 진다.
너를 지키는 것이 곧 나를 지키는 것이 되고, 다른 사람을 존엄하다고 해야 나도 존엄해지는 것이다.

다시 동물 얘기를 해 보면, 사람은 동물보다 심각하게 나약하다.
동물들은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생존의 방법을 터득한다.
인간이 고등하고 말하는 동물로 올 수록 그 적응 기간은 길어진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긴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나약하고 힘 없는 존재가 서로 뭉쳐서 힘을 합칠 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굴린 결과 스스로를 존엄하다는 명분을 내 걸고
자연과 여타 생명체를 지배하고 유린하는 정당성을 획득한 것이다.

종교는 어쩌면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위대한 '존엄'의 이론적 근거가 아닐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 놀라운 명제!
해탈을 통해 벗어 날 수 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의 존재일 것이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를 거의 신적 존재로까지 고양을 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불완전성을 부정하고 신적 세계에 접촉하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종교일 수도 있겠다.

암튼 사회복지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기에
좋게 보면 서로를 돌보고 이끌어 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어쩌면 이제는 국가(정부)라는 더 큰 힘에 의존되는 과정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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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와 한국 사회(1)_소수자 문제의 쟁점들

소수자란?

소수자 - 신체적 문화적 특징때문에 사회의 다른 성원에게 차별을 받으며,차별받는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 -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
소수자와 약자는 변경가능성의 여부로 구분될 수 있다.
소수자성은 본인의 생각 여부와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다.
다수자는 사회적 요인으로 약자가 될 수 있고, 소수자는 사회적 힘을 획득해서 강자가 될 수 있다.


소수자 문제

소수자가 사회적 부(자본주의 사회에서)를 획득하여 강자가 되었을 때는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그들이 약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문제가 되는 것 같다.
결국 소수자라는 연대의식이 강화되고 그 힘을 다수자들 아니 강자들을 향해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 약자라는 것 때문에 야기된 문제이지만 사회는 그들의 소수자성을 더 부각시키게 마련이다.
왜냐면 그것이 그 사회가 가진 그늘이라고 보기 보다는 그 소수자들의 특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몰아 붙이는 것이다.
만약 소수자들이 부와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을 때는 폭동 같은 부정적 방법이 아닌
로비같은 정치적 방법과 여론을 활용할 것이다.
결국 이런 채널들을 획득하지 못한 소수자들이 최악의 상황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소주자, 특히 인종적 소수자의 경우
한 나라에 정착을 할 때 국가가 그 나라의 일원이 되게 하기 위해 여러 절차들을 두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그들이 그 나라에 속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해 변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낙인이 문제이다.
그들을 자신의 국민으로 만들겠다는 어떤 절차가 아니라
그 나라에 들어오면 이미 그 나라가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나'가 확장된 '우리'와 다른 타자로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다.
피부 색이 다르든 사용하는 말이 다르든 문화가 다르든 같은 영역 안에 있을 때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민이 되고,
또 내가 다른 나라에 가면 또 그 나라의 국민이 되는 자연스러운 이동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이상적이긴 하지만 국적이라는 것 자체가 배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많은 잇따르는 어려움들이 있겠으나 국적이라는 국가주의를 해체하는 길밖에 없어 보인다.

소수자에게 부와 출세를 준다면!
일단 기득권 세력이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소수자가 출세하고 부를 획득하게 되면 또 소수자가 아닌 것으로 행세하게 되고
대다수의 소수자들이 처한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존재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
그의 어떠함(특히 유용함)을 가지고 분류하지 않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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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돌아오는 절기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 '뭐 이 시기에 그 본문에 그 말씀이겠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올 해도 변함없이 사순절이 시작되었고, 돌아오는 주일이 두 번째 주일이다.
지금 어린이부는 매일 성경읽기를 하고 있고, 주 중에 읽는 본문 중에서 주일 본문을 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주에 정해진 본문은 마태복음 20:29-34의 말씀이다.
그런데 2월 마지막 주 설교 본문과 내용상 겹치는 부분이 있다.
두 소경의 치유 사건이다.
다른 복음서는 고침 받은 소경은 한 명인데 마태는 꼭 두 명이다.
가다라(거라사)의 광인도 두 명이었다.
마태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썼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증인이 두 명이 되어야 한다는 율법에 좀 더 충실하려 했던 것 같다.
신 19:15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이 전통에 의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도 두 명씩 보내셨다고 다른 복음서(막6, 눅10)도 전하고 있다.
연관을 지어 본다면 두 명의 전통은 정탐꾼 열두 명에서 실패를 경험한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탐꾼을 두 명을 보내는 것에서부터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예수님께 눈을 뜨게 해 달라는 소경이 두 번 등장하는데
9장에서의 사건과 20장에서의 사건을 어떻게 다른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을까?
그 포인트는 예수님께 있는 것 같다.
소경들이야 9장이나 20장이나 고쳐 달라는 것에 목을 매는 입장이니 말이다.

장소적으로도 9장은 가버나움 인근이었고, 20장은 여리고였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계실 때이다.
이미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이라는 수난예고를 세 차례나 하신 다음이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음가짐의 그 비장함을 빼놓고 이 사건을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정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계실 때,
어쩌면 주변에 사람들은 많았지만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뿐이었으니 혼자 외롭고 쓸쓸하다 못해
참담한 심정까지 느끼셨을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향해 또 소경 둘이 소리를 지른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이놈의 인생들은 참 어디까지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
예수님께서 지금은 그럴 정신이 아니니 돌아가라고 하셔도 됐을 법한데
예수님은 너무도 친절하게 그들을 향해 서셨고,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질문을 하셨다.

특히 교회에서 교사로서 어린이들을 상대할 때,
교사를 하겠다는 것이 대단한 결단이고, 그러하기에 교회학교 부서에 있는 것 그 존재 자체로 귀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큰 선택을 한 것인데, 나에게 이거해라 저거 해라 할 수 있어? 그리고 이 어린놈들은 그것도 몰라주고 불평하고 귀찮게 하는 거야?'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가끔씩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들이 왜 나를 몰라주느냐는 식의 생각 말이다.
우리도 그러할 진데 우리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이 무지한 인간들이 죽음 앞에 고통당하는 나를 몰라주고 또 뭘 더 해 달라고 한단 말인가?'라고 불평을 하실 수도 있는 일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런 인간들을 그들의 말처럼 불쌍히 여기셨던 것 같다.
초지일관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온전케 해 주시고 싶은 마음을 잃지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가 사순절에 묵상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이 이 마음이 아닐까.
예수님께서 당신을 내어주면서도 우리들을 걱정하고 불쌍히 여기셨던 그 마음, 
그런 여정을 걸으시며 겪으신 고통스러운 심정을 느끼고,
그 길로의 초대에 대한 응답하는 삶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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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레위인
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3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으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인들이 제사장을 시종하는 역할을 합니다.
언뜻 보면 아론의 후손이 아닌 레위인들은 스스로를 작게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딱히 군사적인 역할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기업(땅)도 변변히 가질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레위인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를 안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앞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을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로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열번째 재앙이었던 처음난 것들(장자)의 죽음에서 목숨을 부지 하게 하셨기에
모든 처음 난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모든 집에서 장자를 내 놓도록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대신해서 레위인들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레위인들은 단지 한 지파, 때로는 소외된 사람들의 신분이 아닌
이스라엘 전체의 장자를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집에서 장자들이 소중하듯이 레위인들은 모든 백성들에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역시 한 지파로 이루어진 집단이 성막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닌
모든 지파로부터 온 소중한 자들이 그 역할을 감당한다는 뜻에서 더욱 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성들이 해야할 일을 대신해서 하는 것이니 백성들은 레위인들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 것입니다.
레위인들이 백성들 앞에 어른이 될 수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위인들의 신분을 절묘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 같습니다.
불평할 수 없고, 무시당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만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되었지만, 그 하나님의 손에 의해 제사장들에게 맡겨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로 자신의 역할을 맞추어 갈 때 최고의 사람들이 바로 레위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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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하기
2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자기의 진영에 군기와 자기의 조상의 가문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치라

뭐든 흐트러져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군가에 의해 정돈되고 질서를 잡을 때 의미를 갖게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약하지만 대열을 갖추게 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삽겹줄이 더 단단하다는 잠언의 말씀 역시 여기에 합당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대오를 갖추는 것입니다.

자리를 정하고, 순서를 정하고, 위계를 정합니다.
이런 과정은 상호간에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파별로 위치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성막이 있고, 레위인들의 거처가 있었습니다.
이동 할 때에도 성막을 중심으로 해서 앞 뒤로 배치됩니다.
이렇게 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제의 그들이 아닙니다. 
각각의 모습은 동일하지만 좀 더 시야를 넓게 해서 봤을 때는 그들의 위치가 정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와 관련된 정돈을 통해 하나님과 관련된 정신적 안전을 얻을 수 있었다면
군제를 개편함으로 해서 물리적 안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물리적 안전의 핵심 역시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든 그 중심이 무너질 때 몸의 안전 역시 담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런 과정으로 통해 아말렉 같은 도적들에게 기습을 당하는 일은 다시 발생하지 않게 됐습니다.

장소를 정하고, 시간을 정하고, 정해진 순서를 따른다는 것이 때로 갑갑하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개성 없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 것에 대한 반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따르는 이들이 모인다는 것, 그리고 한 분 하나님을 중심으로한 삶을 생각하며
정해진 순서를 따를 때, 그것은 큰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적 삶이 훈련된 사람이 또한 개인적인 영성을 지켜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과 살아가는 법을 아는 사람이 또한 하나님과 사는 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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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끄시는 40년은 레위기에서 끝나지 않고 민수기로 이어진다.
실은 레위기까 끝나면서 그들의 광야 생활은 겨우 1년을 조금 넘긴 것 뿐이다.
그러니 앞으로 39년이 남았다고 보면 된다.
레위기에서만 멈춘다면 '하나님이 이끄는 1년'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최소한 민수기를 지나야 40년의 대부분을 거치는 거다.
다시 시작~

책임 나누기
민 1: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이끄셔서 광야로 나왔고, 틀림없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일들만으로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실은 변함이 없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날이 언제이냐의 문제만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막이 완성된 시점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을 계수하게 하십니다.

왜 백성들의 숫자를 세도록 하신 것일까요?
그냥 백성들의 숫자가 궁금하셨을까요?
혹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신들을 방어하도록 하려 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백성들의 수로 힘을 과시하도록 하려 하신 것일까요?
뭐 그럴 수도 있겠으나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광야 가운데서 백성들을 계수하게 하신 것은 
각 지파, 또 전체 이스라엘의 그 수에 걸맞는 책임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함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책임의 크기만큼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인구 계수와 다른 점입니다.
다윗은 인구 계수를 통해 이스라엘의 힘의 크기를 알고 싶었고, 또 그 세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도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레위지파와 또 그에 속한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직임들을 맡아 갈 때
다른 지파의 백성들은 소외된 듯한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의 적당한 위치를 주시기위한 기초작업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시고 있고, 레위인들이 할 일을 받았듯
이제 이스라엘의 백성들 각자도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한 책임을 나누기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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