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연수 소감문을 썼는데, 무슨 출사표 같다.
쓸 얘기는 더 많은데 그러면 소감문의 정체성을 잃을 것도 같고,
분량도 정해져 있어서 이 정도로만...


마음이 콩밭에 갔어요!
김민태

2004년 가을, 신대원 3학년을 마쳐갈 즈음 내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귀농! 남들은 좋은 교회 전임 자리를 찾고 있을 때, 나는 몇몇 뜻 맞는 귀농학교 동기들과 귀농할 땅을 찾아 다녔다. 그 때 나는 온통 생태적 삶, 순환이 있는 삶, 소비가 아닌 생산적 삶에 대한 간절함에 흠뻑 빠져있었다. 결국 이듬해 2월 삶의 근거지를 경북 상주시 모동면으로 옮기고야 말았고, 초짜 농부로 밭농사도 재미나게 지어보고, 포도농사는 뜻밖으로 알찬 수익을 올렸다.
이렇게 그 농부의 때를 추억하는 지금, 내 마음은 다시 콩밭에 가 있다. 이번엔 진짜 콩밭이다. 연해주의 드넓은 콩밭이 눈만 감으면 손에 잡힐 것 같다.
사실 연해주의 끝이 보이지 않는 대지는 적잖이 충격을 주었다. 물론 몽골이나 중국 등 땅이 넓은 나라를 가보지 않아서 그렇긴 하지만, 연해주가 그런 곳일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기에 더욱 그렇다. 어디든 가보지 않고는 말을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녁시간에 걸었던 우정마을 주변의 초원, 거기서 발견한 대지에 걸려 있는 네 개의 하늘! 끝이 보이지 않는 콩밭, 그래서 호미를 들고 콩밭 매어보겠다던 소망은 날아가 버렸지만, 어딜 가도 금세 지평선으로 변해버리는 사방의 전경들... 신기한 것은 그런 풍광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왠지 친숙하고, 따듯했다. 어떤 이들은 연해주를 포함해 북간도, 심지어 사할린까지도 우리나라가 되찾아야 할 땅이라고 주장하며 캠페인을 하는데, 그건 좀 심한 것 같고, 최소한 우리나라의 땅은 아니지만 우리 민족의 땅이라고는 말 할 수 있겠다 싶다. 그것이 편안함의 이유가 아닐까.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땅을 더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닌 걸어보고 싶은 마음으로 하루 온 종일 걸어보고 싶었다. 호수에서 물장난(혹자는 수영이라고 하겠지만)을 하고 나와서 밀키스 하나 들고(다른 분들은 맥주) 걷게 되었을 때, 비록 아스팔트길이긴 했지만 표또르(현재 한국인 가이드)의 트럭이 늦게 왔으면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연해주를 다녀온 후에 하도 연해주 이야기를 해서 주변에서 그만 좀 하란다. 정말 갈 거냐고 묻는다. 그런데 그 질문은 나도 나에게 하고 있다. 사실 이 나이에, 별 쓸모도 없을 것 같은 내가 그 곳에 가서 뭘 할 수 있을까? 내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 텐데! “사람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일까? 러시아어는 물론 영어도 잘 못하는데, 그리고 배운 건 최근에 사회복지 공부 좀 한 거고, 이과도 아닌 문과에 신학공부밖에 한 것이 전부니 뭐에 써먹을 수 있을까?
장자의 얘기를 빌려와서 무용의 유용함을 보여줄 때까지 버텨볼까? 최소한 좀 더 젊기라도 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표또르 정도 수준은 되었다면... ㅋㅋ 또 한편으로는 “네가 짧은 기간에 좋은 것만 보고 온 것 아니냐”는 질문도 가능해 보인다. 그 길고 혹독한 겨울을 경험한다면 며칠 못 살고 도망쳐 올 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런데 이런 얘기를 들으면 난 ‘그래 겨울에도 가봐야겠다’는 호기가 생긴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주로 하는 얘기가 있다. ‘꿈이 있니? 꿈이 있다면, 그 꿈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맞지 않을 때는 그 일을 바꿔야 하는 거야! 그 때는 10대이든, 40대든, 70대든 상관없어!’
그럼 나의 꿈은 뭐지? 1차 귀농을 할 때 이후로 변하지 않는 나의 꿈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자연의 순환의 한 지점에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꼭 농촌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잘 할 수 있는 직업이 농부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농부가 되고 싶은 거다. 뭐 내가 튼튼한 체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쪽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어서도 아니다. 왠지 처음부터 그런 삶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난 이 연해주가 아니라면 또 다른 ‘연해주’를 찾을 거다. 고생스런 삶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도시의 삶의 햇수를 더할수록, 교회에서 짬밥이 늘어 갈수록 더욱 간절하다.
그런 면에서 이번 연수는 나의 마음을 다시 콩밭으로 가게 했다.

‘하나님, 아~ 어쩌죠. 제 마음이 콩밭에 가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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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깨어살리/日步 2010. 9. 10. 09:46
목요일마다 중학교 3학년 다섯반 종교수업을 한다.
뭐 딱히 종교적인 얘기보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그래서 별명이 도덕선생님이다.
크리스천이 아닌 친구들이 대다수인 곳에서 소위 교회 이야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요즘 교실 상황이 예전 같지 않아서 도통 말을 들으려는 태도들이 없기도 해서
이슬비에 옷 젖듯이 조금씩 내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영상과 팝송에 담아 조금씩 전달하고 있다.

암튼1
어제는 책 읽으라는 얘기를 살짝 했다.
중학교 때 책읽는 습관을 못 가지면 평생 어려울 거라고 하면서.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의 유익 중 하나가 '상상력'에 있다고 했다.
상상력이란 똑같은 상황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인데,
예를들어 곤경에 처하거나, 건강의 이상이 생겼을 때, 가족이나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할 때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행동하지 않고 그 너머를 볼 수 있게 한다는 얘기를 했다.

그런 얘기를 하고는 가만히 나를 생각해 봤다.
그러면, 나는 상상력이 있나?
내가 그래도 책을 좋아하고 나름 독서를 즐기는 편인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시야가 넓은 것 같지도 않고, 더더구나 상상력은 그리 있어 보이지 않는다.
기질이나 성격의 문제가 더 큰 건가?
어쩌면 그나마 책을 읽어서 이정도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암튼2
상상력이 있으면 좋겠다.
다양한 측면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
소설도 쓰고, 시도 쓰고.
무엇보다 더 멀고, 더 넓은 삶을 꿈꾸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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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양심의 문제다.
무슨 일을 해도 상관은 없는데,
그 일이 양심을 흔들 때는 더이상 지속할 수 없는 거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무엇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양심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은 특정 순간에 양심의 문제가 대두될 뿐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일이 양심과 관련이 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소위 말해 성직이라는 하는 것이다.

성직,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의 중간에 서 있는 거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확신하지 못하거나
그 세상에 대해 만나는 사람들과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을 때
그 일 가운데 계속 있을 때, 그것은 양심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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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땀도 잊은채 머물다 왔다. 먹먹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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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며 사람들은 더 큰 것을 원한다.
그것이 명성이든, 권력이든, 소유든 말이다.
그러나 너무 큰 것은 그 크기만큼이나 파장을 많이 남긴다.
그 파장은 때로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부정적인 형태를 띤다.
예수님과 같은 영적 거인의 죽음은 그만큼 큰 파장으로 인류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누가 예수님과 같을 수 있을까?
인간이 더 많이 갖고, 더 알려지고, 더 커지면 그 것은 누군가의 것을 빼앗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가지도록 주신 것을 독점한 것이라 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책임을 슬쩍 그 사람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공정한 상황이 아니다.
이럴 때, 이 사람이 그 자리를 뜨게 되면 그 빈 자리는 너무 커서 도무지 채울 수 없게 된다.
인간 그 누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너무 관심의 집중을 받는 것은 좋지 않다.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만큼만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 서로에게 복이 아닐까.

최근 한 대형 교회의 원로목사님이 별세하셨다.
너무 많이 존경받고, 너무 많이 관심을 받던 터라 그 빈 자리가 걱정 되는 상황이다.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이 너무 많아서 그가 없음에 그 공허감을 누가 채워준단 말인가?
적당히 자신의 분량대로 조용히 살다 가는 것,
작은 아쉬움 남기고 가는 것이 좋겠다.
서로 공평하게 사는 것이 좋겠다.
적당히 존경을 나누고, 관심을 나누고, 힘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그런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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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지도자(성직자)가 죽는, 아니 죽어야 하는 종교다.
위세를 얻고 섬김을 받는 자리에 앉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가 아니다.
대접을 받고, 권세를 얻고, 마음껏 누리고 사는 것은 그저 종교인일 뿐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다.
이는 카톨릭이나 정교회나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범기독교 집단들의 가장 큰 오류는 지도자가 죽지 않으려하는 것이다.
지도자의 위치가 공고해지면 공고해 질 수록 진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진리는 죽음으로 살아나는 것이니까.

예수가 만든 최초의 공동체 안에 예수는 죽었다.
그가 선택한 제자의 손에 의해.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전을 받고 죽음으로 말하는 것.
예수의 제자는 또다시 자신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동체 안에서 가장 먼저 죽는 사람이다.
그렇게 죽어갈 때 그 모임은 진리를 지켜낼 수 있다.
죽지 않으면 사람이 남을 뿐이다.

죽지 않는 기독교,
그러므로 진리에서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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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받는 중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초심 학인 시절, 어른 스님으로부터 늘 듣던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그런 중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칠십, 팔십 노인분들로부터 절을 받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 이상은 자신이 없습니다.
 
환경운동이나 NGO단체에 관여하면서
모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비록 정치권력과 대척점에 서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하나의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원력이라고 말하기에는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을 보면서 제 자신의 문제가 더욱 명료해졌습니다.
'한 생각'에 몸을 던져 생멸을 아우르는 모습에서,
지금의 제 모습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제 자신의 생사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살면 제 인생이 너무 불쌍할 것 같습니다.
대접받는 중노릇 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적인 삶을 이어갈 자신이 없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납니다.
조계종 승적도 내려놓습니다.
제게 돌아올 비난과 비판, 실망, 원망 모두를 약으로 삼겠습니다.
 
번다했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어느 따뜻한 겨울,
바위 옆에서 졸다 죽고 싶습니다.
 
2010년 6월 14일
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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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받는 종(목사)노릇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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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모습이 가장 예쁘고 사랑스러울 때.
누구나 이런 때가 있었을 거다.
그러나 이젠 언제 그런 때가 있었는 지도 까맣게 잊고
뭔가를 해야만 사랑받는다며 치열한 일상을 살고 있다.
어쩌면 그리 노력하지 않아도 될지 모르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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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광장 사용을 늦게 허가해서 그런 것인지
주 행사는 부산에서 이루어지고 서울광장은 모니터로 시청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물론 서울에서도 곽노현 교수가 나와서 한 말씀하시고, 나중에는 한명숙 시장 후보도 나왔다는데
나는 중간에 와서 정확히는 모르겠다.

암튼 벌써 1년이 지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고
사회가 별로 나아지지 않은 것 같아 더 마음이 아프다.
누구의 책임이랄 것도 없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 함께 짊어지고 고통스러워 해야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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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 본문이 계속 예레미야다.
'생명의 삶'이 예레미야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내내 어둡고, 결말 역시 마찬가지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이기 때문이다.

부활절 후 성령강림절까지 기쁨의 50일에 왜 이 본문을 선택했는지 의아스럽지만,
예레미야를 읽으며 선지자 혹은 예언자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설교준비를 하며 써 보았던 예언자에 대한 생각들이다.

예언자의 설교(예언)는 듣기 거북하다.
예언자의 호소는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지 말고 생각하라고 한다. 그래서...
예언자는 기존 권위에 도전한다.
예언자는 전통이나 율법의 길과 다르다.
예언자는 평화(잘 되고 있다고)를 말하지 않는다.
예언자는 다수의 편에 서지 않는다.
예언자는 자신이 한 말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예레미야의 슬픔).

예언자의 삶은 편하지 않다. 그래서...
예언자는 고통 가운데 있지, 편함이나 안락과는 거리가 멀다.
예언자는 온전히 하나님을 뜻을 담아내는 그릇이다(때때로 의지나 욕구가 없어 보인다).
예언자는 공과 사가 따로 없이 온전히 예언을 위해 사용된다(결혼, 가족생활, 의식주 등).

신학대학을 다닐 때 학교를 일러 '선지동산'이라고 했다.
다른 신학교에 가 보니 거기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정말 그 곳에서 선지자, 즉 예언자가 배출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 목회자들이 스스로 혼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말은 예언자처럼 하기도 하면서 대접은 제사장으로 받으려 한다.
신학교가 배출한 것은 선지자가 아니라 제사장 쪽인 것 같다.
그러니 교회가 공의와 정의에 편이 아닌 힘과 돈의 편을 드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다수의 힘 있는 이들의 편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맞다.
목회자들은 제사장의 자리에 서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예언자의 전통 위에 계셨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을 보면서 대제사장이라고도 하고,
예수님 덕분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으로 한 명 한 명을 제사장이라고 하긴 하지만...
예수님을 가르치고, 보여주어야 할 사람들이 스스로 예언자가 아닌 제사장의 반열에 서려 한다.

가톨릭에서 매번 제사(미사)를 드리고, 신부를 사제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넌센스인지 알 수 있다.
더구나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의 전통을 잇는다고 하면서 사제라고 하다니...
그러나 문제는 목사들이 제사장인줄 착각하는 것이다.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정죄하면서 그대로 내심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성도들 또한 제사장이 되어주기를 바라기까지 한다.
당연히 교회는 성전이 되고, 그 곳에서 들려지는 말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성전을 지키기 위한 말들, 예레미야를 적대했던 사람들이 했던 말과 유사한 말들이 전해진다.

아이러니 한 것은 지금 가톨릭의 사제들이 예언자 노릇을 하고,
개신교는 목회자들은 제사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거다.
웃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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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에 고려대를 자퇴하며 대자보를 붙였던
김예슬의 그 때 그 선언이 작은 책으로 출판이 되었다.

대자보에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담아냈다.
어느 한 구석도 빼놓을 수 없을만큼 놀라운 필력으로 써내려간 글이다.
사실 좀 화도 났다. 이렇게 어린 친구가 이런 생각을 하고 또 글을 쓰다니...

내용을 요약하려는 것은 아니고,
이 책을 손에 들고 며칠을 씨름하며 나의 오늘을 많이도 반성하고 있다.
오늘 나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할까?

만약 내가 20대로 돌아간다면 이 친구처럼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쉽지는 않을 거다.
최소한 이렇게 알려지고 힘을 얻지는 못할 거다.
어쨌든 고려대 학생이라는 프리미엄이 있으니 가능한 얘기일수도 있으니.
고려대생의 선언이니까.. 하며 폄훼하려는 생각은 없다.

아무튼 내가 20대로 돌아간다면 꼭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양심적병역거부다.
김예슬의 선언을 보면서도 부끄러움을 많이 느꼈지만
종교적 신념(여호와의 증인) 때문도 아니면서 평화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병역을 거부하며 불이익을 감수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한 없는 부끄러움을 이미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나도 거부한다.
일상 속에 만연한 무감증과 무력함, 그리고 진리를 외면하고 물질을 숭배하고
숫자 놀음에 파묻혀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현실을.
그리고 생각은 리버럴하지만 생활은 급진적이지 않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던 나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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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그대로 아름답다.
여기에 이유를 달면 사족이 된다.

어린이날 청소년부 선생님들과 부천식물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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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거금을 주고 구입한 오디오다.
TV가 없다보니 라디오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요사이는 MC들의 말이 너무 많아 집중하기가 어려워 대개 CD로 음악을 듣는다.
주로 클래식, 째즈, 영화음악을 듣는다.

위층에서 시끄럽다고 할까봐 볼륨을 높이지 못한다.
조용하게 나오다 높은 음이 나오면 달려와서 줄이기 바쁘다.
그런데 최근에 들은 얘기로 볼륨을 낮게 고정해두면 스피커가 그 수준에 굳어버린단다.
그래서 오늘은 볼륨을 높여 보려고 했는데 조금 올렸다가 또 낮추고 말았다.
너무 커서, 누군가에게 피해가 갈까봐, 싫은 소리 들을까봐...

오늘날 우리들이 주로 배우는 것이 이 것이 아닐까.
소리를 낮추는 것! 조용히 있는 것!
그래서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잊어버리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르고 살고 있다.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다.
그 영혼을 깨우는 곳이 학교이고 교회여야 할텐데 이젠 두 곳 모두 그 정체성을 버리기위해 경쟁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린 지금보다 더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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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월)
정말 오랜만에 상주에 내려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나? 어머니께서 '그럼 밭 갈면 되겠네!'하셨다.
뭐 쉬려고 내려간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걸린거다.
다행히 친구가 트렉터로 뒤집고, 나는 관리기로 골만 탔다.
만약 경운기를 팔지 않아서 경운기로 해야 했다면 정말 끔찍했을 작업이 아주 순식간에 마무리가 되었다.

친환경 농사를 짓는 분들 중에는 무경운을 주장하기도 한다.
저렇게 육중한 농기계가 들어가서 땅을 뒤집는다고 왔다갔다 하면
겉은 부드럽게 갈리지만 속은 더 눌리고, 또 그 안에 형성되고 있는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해 두 해 거듭하면서 땅이 스스로 부드러워지는 것이 좋다는 얘기다.
일면 맞는 말이어서 그렇게 하고 싶지만 기계의 도움 없이 흙을 다룬다는 것이 힘에 부치는 일이어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
또 밭을 부모님이 경작하시기에 그런 것을 강제할 수도 없다.

암튼 잘깐 내려가서 일년 농사의 첫 삽을 뜨고 올 수 있어서 좋았다.
문제는 날씨인데, 여전히 추워서 파종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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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도심교회와 지역교회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도심교회는 과거에는 지역교회였지만 주거지가 외곽으로 옮겨가면서 자연스럽게 도시 가운데 남아 있는 교회를 가리키고, 지역교회는 당연히 주거지에 있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요즘 강하게 드는 물음은
'도심교회가 왜 부흥해야 하는가?'이다.
도심교회는 당연히 쇠퇴하여 문을 닫아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아니면 그 주변에 살고 있는 몇 안 되는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면 딱 좋다.
그런데 교회는 서울 한 복판에 있는데 성도들은 일산, 분당, 구리, 인천, 심지어 천안에서도 온다.
그러면서 여전히 교회가 더욱 커져야 한다는 강한 소명(스스로)에 사로잡혀 있다.

일단 도심교회를 포함한 일부 대형교회(주거 지역에 있으면서 그 지역을 넘어선)의 부흥은 여러가지 사회적 폐해를 낳고 있다(그냥 떠로르는 대로 적어 봄).
1. 먼 거리를 오가기 때문에 자동차를 이용하면서 매연(특히 이산화 탄소 배출)으로 인한 환경 오염을 가중시킨다. 물론 교통체증을 유발할 수도 있겠다.
2. 사는 곳과 교회가 다르기 때문에 지역 공동체 형성을 저해한다.
특히 아이들의 경우 다른 지역의 교회를 다니면서 생활권과 교회의 거리로 인해 단절 현상을 경험한다.
3. 시간적 한계로 인해 신앙생활에 있어서 더 깊은 여정으로 나가는 것을 어렵게 한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는 교회 유목민을 양산한다.
4. 먼 곳에 있는 교인들을 붙잡아 놓기 위해서 교회는 본질에 충실하기 보다는 프로그램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5. 먼 길 오가는 것은 자연스럽게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차 안에서 서로 간에 긍정적인 에너지 보다는 불화의 단초들을 제공하게 된다.
6. 교회도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에 맞춘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여유있게 편안하게 프로그램을 진행하지 못한다.


교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교회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애처롭다.
특히 도심교회는 그 지역의 독특함보다는 모두에게 맞추려고 애쓰고 있다.
교회는 그 지역의 특성에 맞게, 그 지역의 사람들과 호흡하는 장이 되어야 하는데
요즘 교회는 이런 저런 프로그램을 알리는 현수막 걸어 놓고 호객하는 백화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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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담임 목사님께서 설교 하실 때 동시에 생각을 적어 보았다.
목사님은 이 본문이 적극적 사고 방식으로 활용되는데,
할 수 있다고 아무리 소리 질러도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오류가 있다고 하셨다.

맞다. 거기에 더해서...

여기서 모든 것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가난, 고통, 외로움을 뜻하는 것이다. 거꾸로 부함까지도.
                       나는 비천에 처할 줄로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2절

어쩌면 이 말은 바울의 믿음의 고백이자 결의하고 할 수 있다.
이 외침의 배경은 바로 in Christ이다.
그 분이 내 곁에, 나와 함꼐 하시기에 가능한 놀라운 삶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많다.
그 길로 가는 것에 극도의 두려움을 가지고 삶을 넘나들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
그러니 시대를 읽고 품을 수 없다.
반면에 이 쪽에서 저쪽으로, 저 쪽에서 이 쪽으로의 삶의 전환 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달음질 한다면
이 또한 왜곡된 삶이고, 그에게서 시대의 그릇을 기대할 수 없어 보인다.
이 쪽도, 저 쪽도 가능하고,
그 어느 쪽도 삶의 기반이 아닌 하나님 만이 삶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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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한다.
억지로, 의무적으로 하는 것은 힘이 든다.
                                         무리다.
                                         버겁다.
                                         고통이다.
                                         긴장이다.
                                         어색하다.
                                         뻑뻑하다.

고수는 힘을 들이지 않는다.
도끼질을 할 때도, 톱질을 할 때도, 칼질을 할 때도, 관계를 할 때도.
힘으로 하려고 하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터지고,
                           부러지고,
                           멍든다.


정말  강하면 약해 보이고,
        크면 작아 보이고,
        빠르면 느리게 보이고,
        깊으면 얕아 보이고,
        지혜로우면 어리석어 보인다.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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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찬양예배에 채에스더 목사라는 분이 오셨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의 삶을 복음으로 해석하는 분이셨다.

절절한 말씀들을 들을 수 있어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말미에 담임목사님이 건강의 비결이 뭐냐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건강검진 결과 60대이면서 40대의 몸이라는 소견을 들었다는 말씀과 함께
"머리가 비어 머리가 아프지 않고, 가슴이 비어 가슴이 아프지 않다."

명쾌하다!
머리 속에, 가슴 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담고 고통하고 있는 내가 비추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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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05_살전 4:11-5:11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서는 참으로 많은 문제(신학적 주제)들이 복합되어 있다.
죽음과 부활, 지옥과 천국, 심판과 형벌, 구원 등등등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진정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이 지금까지 의지하고 살았던 것들을 버리고
선택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다.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예수를 믿는 삶은 이전의 삶과의 단절을 의미했고,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작은 부분에서부터 큰 부분까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 어려움은 다른 말로 하면 고난이요 환난이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오늘의 삶의 힘겨움을 이길 수 있는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장 예수를 믿고 그 분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던 사람이
침상에서 숨이 넘어가려 할 때 재림을 보지 못하는 것에 절망할까?
또 살아있는 사람은 그 상황을 목격하며 재림의 지연에 대해서 다른 마음을 갖게 될까?
사도 바울은 최소한 데살로니가에 편지를 쓰면서는 자신의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임을 믿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당황해 하며 이 글을 쓰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먼저 가는 사람들, 또 정확히 언제 재림의 사건이 일어날 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의 삶을 안정시켜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의 강림 때 오히려 먼저 간 성도들이 일어나는 일이 있고,
그 후 살아있는 자들이 뒤를 따른다고 설득하고 있다.
정말 그럴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의 존재이다.
단순히 보장이나 보상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예수를 믿는 삶이 살든 죽든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빛의 아들임을 인식할 때(정신을 차릴 때) 내세의 삶 만이 아닌
오늘의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10절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죽었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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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04_살전 4:1-10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하기를 원하신다고
바울의 육성을 통해 다시금 전해지고 있다.
거룩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거룩은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는 순간,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진 상황을 뜻한다.
그렇기에 여기서 음란을 버리라는 것,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를 대할 줄 알라는 것,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는 것 등이 부정한 것이 되는 이유이다.
즉 거룩이 하나님을 존재를 느끼는 삶이라면
그 반대는 하나님이 배제된 삶이다.
거룩이 하나님이 충만한 삶이라면
부정한 것은 하나님 아닌 것에 중독된 삶이다.
음란으로 대표되는 몸을 쫓는 삶이 부정한 이유는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음란한 삶을 우상숭배와 연결시킨다.
왜냐면 이 역시 하나님 아닌 우상에 중독된 삶이기 때문이다.
몸을 우상화한 것이 음란이라는 얘기도 된다.

오늘날의 인류는 내재화된 우상숭배 가운데서 스스로를 속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겉으로 교회 잘 다니고 신앙생활의 모양을 잘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과거의 사람들에 비해 더 다양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중독되어 살아가고 있다.
만약 바울이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서신을 보낸다면
정말 다양한 것들을 예로 들으면 거룩하라고 애타는 마음을 전했을 것이다.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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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03_살전 3:1-13

3 마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바울 서신의 목적은 단지 글이 아니라 만남에 있었다.
구체적인 만남의 보조적인 역할로 서신을 쓴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바울의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보고싶어 하는 열망이 절절하다.
직접 보는 것의 차선으로 디모데를 보내고, 또 서신을 보내는 사도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며 읽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데살로니가 교회의 현재 상황을 표현하면 '환난'이다.
이는 이미 바울이 복음 전하면서 그들에게 닥칠 것임을 예언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 환난이 혹시나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에서 멀어지게 할까 노심초사한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건실히 자라도록 돕기위해 디모데를 보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디모데를 포함한 자신의 역할을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쉼없이 마음에 담아 두고, 살피며, 부족함을 보충해 주는 자리라는 얘기다.
바울이 이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얼마나 집중했는 지는 말하면 입만 아프다.

어쩌면 목회자, 때때로 교회 내의 중직자들이 바로 이 일을 위해 부르심을 입은 것 아닐까.
요즘 드는 생각은 이런 사람들이 너무 게으르고 말만 많다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는 열심이 뛰기도 하지만 불평이 가득한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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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02_살전 2:1-12

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받았으니 우리가 이와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는 곳을 보고, 하나님께서 하고 싶어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과 같아 지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삶의 가장 완전한 모범은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만큼 하나님과 가깝게 살았던 사람은 없다.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듯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어떤 종교적 행위, 의례, 소속(멤버십)에 있지 않은 것 같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만나시면서 견지하셨듯이
인간을 향한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갖고,
그들을 향해 기꺼이 목숨까지도 내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8절)
이 얼마나 예수님과 닮은 마음 자세인가?

간사한 아첨이나 실속을 채우는 탐심이 있을 수 없고(5절)
정당한 댓가 운운하며 자신의 몫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교회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이런 부분에 약점을 보이는 것 같다.
교회 안에 얼마나 간사한 아첨과 탐심이 많은지.
소위 종교인들, 먹고 사는 문제와 결부되기에 직업적으로 흐를 수도 있고,
조직 안에서 살다보면 외곡된 문화의 영향 아래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옳은 말을 하기보다는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성패를 좌우하지 않나.
칭찬과 간사한 아첨과의 경계는 어디일까.
또 자기 몫을 챙기지 못하면 바보라는 소리를 듣지 않나.
진리와 원칙을 지키려는 사람은 오히려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안전보장이 아닌 인간으로부터의 그것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닐지.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방식을 지켜나가기 위한 자기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을 치른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고,
예수님께서 그 길을 온전히 걸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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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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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을 오늘부터 한 장씩 읽어보려 한다. 물론 읽다보면 뛰어뛰엄 읽을 수도 있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겠지만, 암튼 바울이 쓴 서신의 연대적 순서에 따라 데살로니가 전서 부터 읽는다.

<바울서신의 대략적 집필 순서>
살전(50년), 살후(50년대 혹은1세기 말), 갈(54,55), 고전(54,55), 고후(55,56), 롬(56), 엡(60,80), 골(56-58,58-60), 빌(53-55, 56-58), 몬(불확실...), 딤전(60년대, 2세기초), 딛(60년대, 2세기초), 딤후(60년대, 2세기초)

바울서신01_살전 1:1-23

살전 1:9-10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아들이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는지...

과거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물리적 환경은 복잡했지만,
정서적으로는 명쾌했던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향하던 시선을 하나님으로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여러가지 방해와 저항 요소들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대상은 확실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우상이라는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내재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우상은 우리 생활 곳곳에 침투해 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만연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학벌에 대한 우상화
돈에 대한 우상화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우상화
인기에 대한 우상화

이런 것들이 오히려 더욱 우리의 삶과 정신을 좀 먹고 지배하고
급기야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함정에 빠뜨려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아들이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삶의 양태를 송두리체 바꾼 것을 의미한다.
우상이라는 것은 그 지역 토착 문화를 뜻하고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은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인데
그것을 버렸다는 것은 지역적 소속감의 박탈
혹은 가족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기꺼이 그 선택을 했다는 것은 실로 혁명적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부분에서 이 선교, 복음의 전파의 일이 사람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어찌 사람의 힘과 노력으로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성령이 감동하고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믿음 역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임에 분명하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합당한 자세이다.

더 나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지금까지 바라고(vision) 살던 것들에서 떠나
새로운 바라봄, 기다림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재림)이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지금 강한 힘으로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의 종국,
그것들 위에 최후 승자로 서실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것으로
이제는 그 이전의 것들에 연연하여 휘둘리지 않고 더 분명한 삶의 지표, 방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버리고, 돌아와 기다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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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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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
내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하지만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 꼬여 있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것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마리 있으면
편안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줄 수 없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이 숲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 나무라는 걸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한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 게 있다면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 몸의 가지 하나라도
필요로 하는 이 있으면 기꺼이 팔 한짝을
잘라 줄 마음 자세를 언제나 가지고 산다
부족한 내게 그것도 기쁨이겠기 때문이다

도종환
부드러운 직선(창비시선 177),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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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깨어살리/돌소리 2009. 11. 7. 10:52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안디옥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운 이유는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 때문에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이어가는 그들의 특별한 삶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을까.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만 올리고 또 올린다면
예수님이 땀과 눈물, 심지어 피까지 쏟으시며 사셨던 삶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단지 예수님은 저 만치 나의 기도를 하나님께 중개하는 그런 존재로 고정화 해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최고의 본을 보이신 우리의 모델이셨다.
우린 그 여정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고뇌와 결단을 배우고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사는 것과는 동떨어져
자신의 삶의 내용을 예수님으로 조금도 바꿀 마음이 없으면서
머리로 '알고 있는 예수님'을 되뇌이며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그건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신앙적 행위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교회에 출석하는 것 자체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구별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지칭하듯 입으로 예수를 말하는 예수쟁이 혹은 교인은 될 지언정
참다운 그리스도인, 예수 따르미는 아니다.

누군가 '제가 교회를 안 빠지고 잘 다녔고, 장로거든요!'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실까.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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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의 결핍을 과장하는 버릇이 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이 너무 많다고 투덜거린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한 일 아닌가.
볼 수 있고, 호흡할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배설할 수 있고,
아픔, 시원함, 더위, 추위, 서늘함 등 내외부의 변화들을 느낄 수 있는 것들,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걸어서, 차로 이동 할 수 있다는 것,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누리고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수없이 많은 누림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
너무 당연하다고 느껴서 일까?

9월 24일 일요일
당신이 경험하는 일과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과연 당신이 이처럼 환상적인 체험을 할 만한 자격이 있는가? 당신이 하느님이 어루만져 주실 만큼,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특별한 체험을 할 만큼 특별한 사람인가? 그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라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다. 당신이 이런 일을 누리고 경험할 만큼 한 일이 없다. (나웬이 러셀 슈와이카드의 글 인용) 마지막 일기, 헨리 나웬

자격이 없는 데도 받았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이다.
그 만큼의 은혜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왜 그렇게 더 달라고 부르짖는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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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힘:사람

요즘 과제 때문에 '숨겨진 힘-사람'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경영서적을 많이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대략 이런 책들은 실제 사례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일단 마음에 든다. 아직 앞부분을 읽고 있지만 이 책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는 대충 알 것 같다. 한 마디로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성공한 기업들은 그것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천했다는 것이다.

많은 기업들은 사람이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우스웨스트 항공은 그러한 생각을 실제로 실천하고 있다. 78p

그래서 이 책의 2장에는 사우스웨스트 항공사가 어떻게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지 구체적 실례들이 빼곡하다. 이 부분에서 눈길을 끈 것이 인재선발인데, 이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직원의 태도라고 한다. 실력이 아닌 태도, 성격을 중심으로 사람을 뽑는다는 것은 자칫 그 과정이 선명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직원들을 면접 과정에 참여시키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늘려서 최선의 인재를 선발한다고 한다.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만큼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선발 담당자가 말하는 태도가 중요한 이유가 걸작이다.

"우리는 지원자의 태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만약 태도에 문제가 있다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우리 회사에 들어 올 수가 없다. 업무 능력은 교육을 통하여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격은 그렇지 못하다." 86p

'성격은 그렇지 못하다'라는 말에서 가슴이 덜컹한다. 요즘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나의 태도, 즉 자동반응 하는 성격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격이 족쇄처럼 나를 붙들고 있다고 느껴지고 있던 참이다. 겉으로는 나이도 먹고, 배우기도 많이 배우고, 말도 고상하게 할 수 있게 되지만 정작 성격이 나를 원래 자리로 끄집어 내린다. 성격은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지만, 성격에 지배되기보다 깨어 있는 의식에 지배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너무도 쉽게 무장해제를 당해 버린다.

암튼 위의 이야기들은 듣고 배워서 아는 것 이상으로 실천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준다. 그리고 사람의 참다운 실력은 동료들과 건강하게 소통할 수 있는 태도라는 것을 알게 한다.

예수님의 방법은 분명히 사람 중심이었다. 그것도 율법주의자들처럼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실천하셨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고,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 가셔서 살 맞대는 일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의 한 마디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셨고, 애정을 가지고 대답해 주셨는데, 그가 적대자라 해도 별 차이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로 대접받는 경험을 한 사람이 어느 순간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 누군가가 예수님이었다면 그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사람 소중하다고 떠들지만 말고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구체적 실천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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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 수업 시간에 ‘30살이 더 많은 사람으로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분’을 찾아서 심층인터뷰를 해 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교수님이 과제를 내 주셨다. 하지만 수강생 대부분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교수님은 그러면 ‘자신이 30년 후에 누군가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끔 하는 사람이 될 수는 있을까’를 질문하셨다. 30년 후에 누군가 나를 본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없을 것 같지만, 혹시 가능하다면 오늘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수업을 마치고 11시를 넘기는 시간까지 모여 앉아서 두 주 남은 행사 이야기와 또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대학원 동기들을 보면서 참 좋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거의 중간이니까 나를 중심으로 아래위로 10살이 훌쩍 넘으니 최고 20년도 더 차이나는 사이도 있다. 그런 연령 차이에다가 알게 된지 8개월 여 되는데도 얼마나 오누이 같고, 남매 같고 형제자매 같은지. 어쩌면 이렇게 만나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온 사람들처럼 말이다.

9월 19일 화요일
오늘 나는 우리 삶이 수많은 형태로 연결되어 왔다는 점에 새삼 놀랐다.
                                                                                                  (헨리 나우웬의 마지막 일기 50p)

헨리 나우웬을 만났던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닐까?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만약 헨리 나우웬 신부를 알게 되었고, 관계를 맺게 되었다면 그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지 않았을까? 뭐 그 사정도 잘 모르고, 인간 헨리 나우웬에 대해서도 자세히 모른다. 단지 그의 저작들을 통해 그의 생각을 엿보았을 뿐이다. 글이라는 것이 묘해서 그 사람을 다 보여주는 것 같으면서 교묘하게 진면목은 감출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헨리 나우웬이 관계를 지속하면서 그들과의 연결에 새삼 놀라는 대목에서 나는 뭘 그걸 가지고 그러나 하면서도 나에겐 그런 관계가 있는 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낮에는 친구가 목사 안수를 받는 곳에 다녀왔다. 내가 동기회에 회장 없는 총무라서 대표 격으로라도 가야했고, 또 평소 통화를 자주하고 지내는 편이었기에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고민없이 다녀왔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그 관계가 나에게 감동을 주는 것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놀랄만하지도 않다. 19년 지속된 관계지만.

오늘 만나는 사람들, 과연 그들과의 연결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삶을 정리하는 순간까지 나의 존재를 느끼게 해 줄 사람이 있을까?

나와 30년 차이나는 이들은 지금 초등학교 1학년들이다. 그들과 진솔한 만남을 가지려하면 최소한 10년 이상은 있어야 할 것 같고, 그 전에 20년, 아니 10년 차이라도 마음을 나누며 공존의 기쁨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한두 가지라도 서로에게서 담고 싶은 점들을 찾아 갈 수 있으면 더 좋겠고. 그래서 오늘 목사 안수를 받은 친구도, 또 같이 공부하는 동기들도, 교회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도 귀하고 소중하게 만나고 연결해 가야겠다. 언젠가 그들과 연결되어 있음에 새삼 깜짝 놀라기를 바라며.

92년에 한 동기의 결혼식을 마치고 참석했던 친구들이 사진을 찍었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 여섯 번째 친구가 오늘 안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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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플래너와 인연을 맺은 지가 벌써 8년이다.
그와 함께 '시간관리'라는 테마는 나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래서 교회에서 그 분야와 관련된 강의는 나의 몫이 된다.
그럼 오늘 나의 시간관리를 잘 하고 있나?
물론 강의에서 누차 강조해 말하지만 시간관리는 곧 사건관리다.
시간의 실체가 사건의 연속이라고 한다면 결국 나에게 쉼 없이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관리는 하는 것이 시간관리가 되는 것이니까.

나에겐 두 가지 시간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 앞에서의 시간과 나 혼자의 시간.
전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나의 시간이고, 후자는 그럴 필요 없는 나의 시간이다.

사람들을 의식하고 마주하는 사건들의 연속선은 진솔한 나의 시간일 수 없고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는 사건들의 연속선은 긴장이 없이 흘려버리는 시간이다.
그러니 둘 다 나의 가치와는 상반된 시간들인 것이다.
결국 생각과 반대로 나의 시간관리, 즉 사건관리는 좌절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좌절로부터 오는 것이 피로가 아닐까.

9월 11일 월요일

자고 싶으면 잘 시간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엄청난 피로감 속에 깨어나
몸을 일으키는 것은 그저 무슨 일인가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에 지독히 집착하는 편이다.
시간을 잘 활용하여 오래도록 염원해 온 계획을 실현하고 싶다.

의외로 헨리 나우웬의 시간은 피로감으로 가득하다.
시간을 본인이 원하는 일들로 채우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해 내야 하는 과정은 피로와의 싸움이다.
피로란 뭘까? 그의 인용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짐일까?

시간을 잘 보내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같은 소망이지만
그 시간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자신의 마음의 지향과 다른 일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인간들이 짐승들과 달리 피로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나의 이야기로 돌아온다면 나의 시간관리, 사건관리 역시 피곤하다.
다른 사람 살피랴 피곤하고, 나 스스로에게 절망하느라 피로에 시달린다.

마태복음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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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학교 교사들과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10주 내로 성경 전체를 살펴보자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첫 모임에서는 성경에 대한 지금까지의 생각이나 의문들에 대해서 나누고
구약성경의 전체를 조망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어제는 두 번째 모임으로 창세기를 공부했다.
두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얼마나 자세히 살펴 볼 수 있을까 만은
최선을 다해서 설명하고, 의문점들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처음 전체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잘 모른다고 하셨던
몇 분들이 세부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니까 열변을 토하는 광경을 보게 된 것이다.
일단 어느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그래도 나은데,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다른 사람의 견해에 대해 판단까지 하는 것은 좀 지나치다 싶었다.
물론 그것이 사람의 성향의 다름에서 오는 현상일 수도 있겠으나
이를 통해 성경공부의 목적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성경, 아니 꼭 성경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그 배우는 것을 통해 자신을 바꾸는 모험으로 한 걸음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고 유익할까.
그런데 그 성경을 배우면서 조금도 자신을 바꾸려는 마음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더 확고히 하거나, 다르면 모른 척 하거나 거부한다.
그에 비해 의문을 품거나 화가 나는 것은 나은 거다. 그렇게 변화가 시작되는 거니까.

변화,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꾼다는 것이 사실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고, 두려움으로 움츠려 안전만을 추구한다면
우린 온전한 사람,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도 자기 방식으로 읽고 엉뚱한 소리를 할 테니 말이다.

더 나아가 교역자로서 나에게 막중함이 다가온다.
먼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바꾸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 그들에게 나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잘 소개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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