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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설 때
레10장
3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라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으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다가 죽었습니다.
9절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는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엉뚱한 불을 담아 들고 들어 간 것입니다.
아론이 첫 제사를 드리고 곧 이어 이런 참담한 일이 생기다니 특히 아론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를 향해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고 명합니다.
아론의 가족들은 입술을 깨물며 슬픔을 안으로 삭여야만 했습니다.
두 아들을 잃은 찢어지는 아픔보다도 하나님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이 제사장임을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다른 존재임을 인식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도 아니지만, 또 사람의 일도 아닌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선 중개자 였습니다.
땅에 발을 딛고 선 사람 중 가장 먼저 하나님의 시선을 접해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해이한 마음과 자세로 자신들의 일을 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의 죽음은 애석하지만 이 일로 남은 자들에겐 분명하게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더불어 이들의 죽음으로 더 큰 재앙(더 많은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기에 하나님을 더 욕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람들의 눈에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제사장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제사장들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 수준이 결정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말씀에서 대개 지도자들의 타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시겠다는 말씀은
비단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전도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며 프로그램을 만들고 전도 훈련을 하지만,
정작 그들의 '제사장적 삶', '하나님 앞에 선 자의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일들이 벌어지고,
그들이 그리도 인도하고 싶어 하는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사람들이 등을 돌렸고, 하나님도 눈살을 찌푸리시지 않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 이상의 전도 프로그램은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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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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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하여
레9장
7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제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되 여호와의 명령대로 하라

아론_속죄제(송아지), 번제(숫양)
이스라엘 자손_속죄제(숫염소), 번제(송아지, 어린양), 화목제(수소, 숫양, 소제)

아론의 제사가 시작됩니다.
아론이 처음으로 드린 제사는 백성의 것도, 아들들을 위한 것도 아닌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를 드린 후에 백성들의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늘 나 아닌 누군가를 향한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만약 제사장이라면 오늘 누구의 제사를 드릴 것인지 얼마나 성공적으로 할 것인지에 집중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된 아론이 먼저 드린 제사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과 손은 자연스럽게 밖으로 향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먼저 '나'입니다.
자신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제사를 집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깨끗이 하고, 자신을 드리는 시간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분주하게 봉사하면서
정작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순서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 하겠습니다.
외부로 드러나는 행동에 집중하다 보니 홀로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교회들은 그런 깊은 그리스도인을 원하지 않는 지도 모릅니다.
외형에 치중하며 소모적이기까지 한 교회의 자화상이라 하겠습니다.
문제는 일반 그리스도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역자들의 삶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이 반영된 제물을 손수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속한 곳에서 하나님 앞에 세상을 등지고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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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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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을 나누다.
레8장
2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함께 그 의복과 관유와 속죄제의 수송아지와 숫양 두 마리와 무교병 한 광주리를 가지고 3 온 회중을 회막 문에 모으라

제사장 위임식 : 속죄제(수송아지), 번제(숫양), 위임식(숫양)

성막의 제단은 그 제단을 사용할 자들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위임식을 위해 처음으로 사용됩니다.
실로 역사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 역시 하나님께서 이르신 말씀을 그대로 따르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조심스러웠을 것이고,
이것을 지켜보는 백성들 또한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위임식의 당사자들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은 백성들과의 소통을 위해서(출 18), 제사장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 세워집니다.
전자는 이드로의 충고에 의해, 후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세워진 것이 다릅니다.
드디어 일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만남을 안내 할 사람들이 세워진 것입니다.
직접 하나님을 만나서 대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어느 방법보다도 안전한 방법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아론이 출애굽 초반부터 협력자의 자리에 있긴 했지만 뚜렷하게 정해진 역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사장이라는 분명한 직임을 갖게 됩니다.
이로써 모세는 함께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이고,
아론과 더불어 그의 아들들에게도 함께 위임하면서 그 책임의 지속성도 보장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날의 위임식은 하나님과 백성을 향한 책임을 나누는 예식이었습니다.
모세는 여기서 우려하는 마음도 들었겠지만, 홀가분한 마음이 더 컸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일들을 감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사람을 하나 둘 세우며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민족을 세워갑니다.

목사로 안수 받는 임직식과 비교 할 수는 없으나 그 의미는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선배 목사들이 지금까지 짊어지고 오던 일들을 함께 짊어지자고 하는 일이 임직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수적 포화상태라는 것을 비판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나누게 된 것에 대한 축하하며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어떤 단체, 조직에서도 새로운 사람들이 세워지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환영하며 기뻐할 것은 함께 짐을 나누고 책임지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십시오.(갈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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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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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내지 않도록
레7장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그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가져다가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주었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을 영원한 소득이니라

레위기 7장에서 제사를 통해 제사장과 그의 가족들에게 돌려지는 몫
속건제물_제사장인 남자가 거룩한 곳에서 먹음(6절)
번제물_번제를 드리는 제사장이 번제물의 가죽을 가짐(8절)
소제물_기름 섞은 것이나 마른 것이나 모두 아론의 모든 자손이 균등하게 분배(10절)
화목제물_거제로 드린 것을 피를 뿌린 제사장에게 돌림(14절)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줌(34절)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제사를 위해 제물을 준비해 온 백성들은
제물의 일부 또는 대부분이 제사장들의 몫으로 돌려질 때 어떤 생각을 했을 지 궁금합니다.
더구나 그들이 가지고 온 짐승이나 곡식은 최상의 것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깝지 않았을까요?

백성들이 그러하듯 제사장들에게도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반 백성들처럼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할 수 없었기에 제사장은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풍요로울 수 없었습니다.
물론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는 레위인들, 또 레위인이 바친 십일조는 제사장들의 것이 되었지만
그 것이 그들에게 충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러니 제사장들은 성막에서 제사를 집례 할 때마다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융통성(? 잔머리)을 발휘하면 자신이나 가족이 배불리 먹을 고기와 곡식을 챙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시기 위해서인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과정에서 제사장들의 몫을 정확히 정해 주셨습니다.
아마 제사장들도 제사를 집례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소위 거룩한 직임을 감당하면서 생계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삶에서의 곤궁함은 때론 사심으로 사명을 무너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자신들의 것으로 정해진 몫이 있었기에 평안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제사장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몫 이상을 요구하게 되거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정해진 몫을 제사장들에게 돌리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이런 함정에 빠진 예라 하겠습니다(삼상 2:12-17).
그런데 요사이는 몇몇 목회자들이 자신의 몫 이상을 가져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내의 사람은 물론 일반인들의 눈살까지도 찌푸리게 합니다.
반면 어떤 힘 있는(?) 성도들은 목회자의 정당한 몫을 주지 않으려고 힘겨루기를 합니다.
과연 그 교회의 목회자가 평안 가운데 사역을 감당하기를 바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생계,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기 시작하면
제대로 된 목회사역을 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조차도 인정하신 부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변호하면서 당연히 받을 것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전제로 아래의 말을 합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 9:13)
바울처럼 자비량 사역을 할 수 있는 형편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바울의 사역방식은 이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 교회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똑같이 일을 하고도 자신의 몫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한 일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챙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될 때 사회는 불안해 지고 작은 사람들의 한이 쌓여 가는 것 같습니다.

현재 교회가 직면한 어려움은 어떤 한 가지 부분만 진단하고 처방한다고 해결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근접해 지려는 노력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바울과 같은, 아니면 또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이 가능하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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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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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지피는 사람들

레 6장

13 불은 끊임없이 재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성경말씀에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제사장들은 여러 분야로 서로 다른 일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 말씀을 받아 전할 때에야 아론과 네 명의 아들이 제사장의 일을 했지만

이후에 후손들이 많아져 제사들이 많아졌을 때는 각각의 맡은 일들을 감당했겠죠.

잘 아시듯 다윗의 때에는 제사장들이 많아서 가족별로 반차를 나누어서 봉사하게도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맡은 일 중에서 가장 잘 해야 하는 부분이 불과 관련된 부분인 것 같습니다.

왜냐면 재단의 불은 절대로 꺼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궁이의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는 과거 우리네 아낙네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조금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제사장은 혹시 재단의 불이 꺼지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며,

불을 지필 장작들도 충분히 확보를 해 두어야 하고, 날씨의 변화도 예민하게 관찰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재단의 불을 꺼지지 않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라는 질문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꺼지지 않는 재단의 불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라는 질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백성들은 꺼지지 않는 불을 보며 하나님께서 성막에 항상 계시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달리 표현하면 꺼지지 않는 불은 늘 자신들을 기다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어떤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님이 토요일에도 저녁 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있으면

자신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신다고 좋아한다고 합니다.

비교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닌 줄 알지만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이 꺼지지 않는 성막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현존의 자리였고,

그 현존을 돕는 자들이 바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이 불을 지피는 일로 백성들이 하나님을 느끼게 할 때,

그것이 검댕이 묻는 일이라 해도 거룩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일로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드러나게 할 수 없습니다.

제사장 자신의 욕구나, 명성을 위해 일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로 한 번 튀어 보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목회자들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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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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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길이 열리다.

레 6장

2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하되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3 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의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속건제 레 5:14-6:7

속건제와 속죄제가 많이 혼동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속건제가 속죄제의 큰 울타리 안에 들어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속죄제나 속건제나 하나님의 계명을 부지중에 범하였을 때에 드리는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차이는 속건제에서는 하나님의 계명 중에서도 하나님과 관계된 부분에 대해서 더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는 속건제니 그가 여호와 앞에 참으로 잘못을 저질렀음이니라”(5:19)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또 속죄제는 기타 항목에서도 ‘깨달았을 때’라는 표현을 통해 대개 자신도 모르고 지은 죄들을 다루는데,

속건제는 속이고, 부인하고, 거짓 맹세하는 등 고의적인 측면이 더 강하고,

더 중요한 것은 위의 과정을 통해 이웃에게 심각한 손해나 피해를 주었을 때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제는 자복하는 과정을 거쳐 제물을 가져오면 되는 반면

속건제는 일단 손해를 입힌 사람에게 보상을 하고, 제사를 추가적으로 드려야 했습니다.

아마 당시에도 속죄제를 드려야 하느냐 속건제를 드려야 하느냐를 놓고 옥신각신 하기도 하고,

속죄제를 드렸느냐 속건제를 드렸느냐를 가지고 사람들의 시선도 나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제사의 의미는 명백해 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를 요구하시는 것은

그들을 괴롭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살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잘못을 하고 그 죄로 말미암아 죽지 않도록,

더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죄라는 표현은 명확한 기준이 있을 때 성립되는 것이지

사람들에게만 맡겨 두었을 때는 역학 관계에 따라 무시될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강자들은 제멋대로 행동해도 죄가 되지 않고,

약자는 상대적 차별과 부당한 질서 속에서 한을 쌓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공동체의 수면 아래 잠복하고 있다가 뿌리로부터 썩어 들어가게 해서 넘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속죄제와 속건제라는 이름으로 해소책을 주신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어느 누구든 차별이 없고

정당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특히 속죄제의 경우 지도자들에는 엄격한 수준을 요구하셨지만

일반 백성들에게는 다양한 수준을 제시하시며 형편에 맞추어 하나님 앞에 나아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사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활짝 열어 주신 길을 제대로 걷지 않았습니다.

제사를 무시하고 동시에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의 이런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의 사건이 일어났고,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살 길도 이런 살 길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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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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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사람들

레5

7 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가난한 자들의 속죄제물

힘이 흠 없는 암염소, 흠 없는 어린 암양에 미치지 못할 때,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

힘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에 미치지 못할 때 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



하나님은 백성들의 형편을 고려하셔서 힘이 미치지 못할 때는 덜 부담이 되는 제물을 바치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죄제를 삶 가운데 자연스럽게 여기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 부담이 되지 않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과도 닿아 있습니다.

다른 제사는 상황에 따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속죄제는 허물이 생겼을 때에는 누구나 언제든 드려야 하기 때문에

그 문턱을 낮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늘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화하는 의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역시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교회는 대부분 성도들의 지친 몸과 마음의 쉼과 위안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고,

조금 낫다고 하는 교회가 봉사와 선교를 강조하는 교회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해 지기 위한 자기반성을 위한 절차를 교회 안에 담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를 사함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세상 가운데서 끊임없이 범죄하고 허물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는데

타당한 절차를 통해 자복하고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채널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 교회 안에는 자칭 의인들로 가득합니다.

구조적으로 그것을 고착화 하고 권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을 명심하고, 스스로 돌아보아 거짓된 삶을 자복하고 통회하는 예배를 드리며

스스로의 한계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을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는 진정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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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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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지는 그리스도인

레4

3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속죄제(4:1-5:13)

속죄제에서 먼저 고려되는 것은 죄 지은 자가 누구냐였습니다.

범죄한 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제물이 되는 짐승과 제사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제사장이 가장 먼저 언급되고 그 다음이 회중, 족장, 평민의 순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자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이 분명한데,

이는 온 회중보다도 그 책임이 막중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제사장을 소중히 여기시며 관심 갖고 보신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한, 혜택들을 누리며 함부로 행하지 못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한발 앞서서 하나님의 뜻을 더 반듯하게 실천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에 대한 정당한 응답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사장으로서 당신의 역할을 누구보다도 충실히 감당하셨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그 제사장의 소임이 고스란히 오늘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계승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중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을 변론하신다고는 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온전한 제사장의 직임은 누구도 아닌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의 시선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때로 어떤 목회자는 자신을 제사장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성도들은 또 목회자들이 제사장이고, 그래서 목회자의 기도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도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더 큰 책임을 맡았다는 것으로 특별한 자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앞의 생각은 예수님 이후 그리스도교를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책임질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고,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인의 삶이 곁길로 가도록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일들을 다른 이(교역자)에게 돌리고 역시 무책임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 모두는 레위기 4장의 맨 앞자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시선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부르셔서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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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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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제로 보내셨도다

레3

3 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5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화목제 역시 소제처럼 제물의 일부만을 떼어 하나님께 태워서 바치는 제사입니다.

다른 점은 제물의 나머지 부분을 제사장만 갖는 것이 아닌 제물을 바친 사람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레7:11-18, 28-34).

하나님께서는 내장에 낀 기름과 콩팥 정도만 취하셨습니다.

화목제는 그 동기에 따라서 제물의 고기를 다루는 방식도 달랐습니다. 이것은 7장에서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다른 제사들과 달리 화목제는 기쁨을 전제로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 또 뭔가 해 보겠다고 서원하며 결의에 찬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끌고 간 제물을 모두 태우고 빈손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양 손 가득 나누어 먹을 고기를 들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족은 물론 이웃과도 나누어 먹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제사가 얼핏 하나님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만 보이지만,

소제에서는 제사장을, 화목제에서는 가족과 이웃을 생각함으로 그 범위가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는 성막에서 하나님께 드리지만 그 결과는 이웃을 향하는 제사라 하겠습니다.

감사와 서원의 기쁨은 자신을 둘러싼 이웃과 나눌 때 참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예수님께서 번제나 속죄제나 속건제로 보내지신 것이 아니라 화목 제물로 보내지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제사의 제물이셨다면 어떤 한 가지 사안을 위해 일회적으로 바쳐진 것일 수 있으나,

화목제라는 것은 그 제사를 통해 그것을 기억하는 자들에게는 계속적으로 유효한 제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만찬을 통해 당신의 몸과 피를 나누며 다시 오실 때까지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 화목제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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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를 대자면 휴가도 있었고, 바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레위기는 들여다 보고 있어도 별로 생각이 진전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제사의 순서들을 설명하는 것도 무의미할 것 같고...
그래도 읽고 또 읽고, 집중하다보면 나름 창조적인 영감이 주어지기도 한다.
그것이 부스러기 한 조각 같더라도 솜사탕처럼 달콤하다.

사람의 일이 아니다.

레2

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2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3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가 목적에 중점을 두었다면 번제와 소제는 그 방법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번제가 짐승을 불살라 드리는 것이었다면 소제는 곡식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물론 번제를 모든 것을 드리는 헌신의 뜻을 담은 제사라고 합니다.

소제 역시 그 제물의 특성상 추수감사의 때나 짐승을 잡기 어려울 때 주로 드리는 제사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소제는 곡식을 드리는 제사인데, 특별히 낱알을 그대로 드리는 것이 아닌 고운 가루여야 했습니다.

굽든 부치든 삶든 간에 그 근간은 고운 가루여야 합니다.

들녘에서 거두어들인 곡식들을 맷돌에 정성스럽게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가루도 그냥 가루가 아닌 ‘고운’ 가루여야 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요즘처럼 방앗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돌도 곱게 가는 믹서가 있는 때도 아닌 그 때 고운 가루를 만들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 때의 기준이 지금의 밀가루 정도를 요구하지는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바치는 사람의 정성 그리고 제사장의 꼼꼼함의 정도에 따라 고운 정도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많지도 않은 곡식 중에서 갈고 또 갈아서 고운 가루를 만들어 오는 사람들의 정성이 소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소제는 번제처럼 전체를 드리지 않고 기념할 정도의 양만을 드리고

나머지는 아론의 자손들이 먹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왜 그걸 제사장들이 먹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제사장들을 어느 정도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지,

또 제사장들 스스로 어떤 자의식을 가져 주기를 바라시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제사장들을 소중히 여겨주기를 바랐습니다.

그 마음 그대로 하나님 역시 제사장들을 따듯한 시선으로 보고 계신다는 것이고,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먹으며 자신들의 직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특권으로 여길 때 아론의 두 아들이나(레 10장) 엘리의 두 아들(삼상 2장)과 같은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할 때 사람을 생각하고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고, 그 것을 먹게 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과정에서 그들의 마음을 가감 없이 제물로 받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열심히 만든 것을 어느 제사장이 먹을까?’라고 생각한다든지,

‘이 가루는 누가 만들어 온 거지?’ , ‘누가 많이 가져왔지?’라는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제사의 순수성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소제의 순수성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이 여기서 통하게 됩니다(골 3:23).


흔히 교회에서 주어진 일을 하면서 그 행위를 사람을 의식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대가를 받으려 할 뿐만 아니라 반대로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고 교회 전체를 판단합니다.

또 사람을 의식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역할을 축소하거나 심각하게 사기를 잃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의 부재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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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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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다시 시작, 물론 부담은 만땅으로 가지고 있다가...
레위기라는 큰 산을 넘어 보자! 영차~

 

타는 냄새가 향기가 될 때

레1

1 주님께서 모세를 회막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너희 가운데서 짐승을 잡아서 나 주에게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누구든지 소나 양을 제물로 바쳐라.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 되기위한 교과서이자, 제사장들에겐 직무 매뉴얼입니다.

사실 제사장에겐 삶의 지침서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 지까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 제사규례는 1장부터 7장까지 집중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를 읽으면서 그 제물이 뭔지, 또 그 절차는 어떤지에 대한 논의는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이 제사규례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좀 더 생각을 해 보고 싶습니다.

이미 출애굽기에서도 말씀드린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시면 될 듯한데,

소(송아지), 양, 염소, 비둘기를 바치는 행위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성막 역시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위한 것이었듯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뭐가 부족해서 초라한 천막집이 필요하시겠습니까?

온 세상을 만드시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또 뭐가 부족하셔서 짐승을 태우는 고약한 냄새를 향기로 받으실까요?

그래서 단언컨대 사람에게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면 지금도 짐승을 불살라 드리는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사람을 위한 것이기에 시대에 따라 바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맞추어진 방식으로 사람을 깊이 배려한 과정이 제사로, 예배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절차를 따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순서 안에 역할을 감당하는 제사장은 그 절차를 준수해야 합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어김없이.


하나님을 향해 하는 모든 과정에는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제물에 시야가 좁혀지면 안 됩니다.

그것이 비추어주는 외형에 얽매이면 그 이면에 자리한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가 소외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과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 어느 것도 나와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달리 표현하면 모든 것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심지어는 책상위에 놓여 있는 연필 한 자루 역시 나를 반영하고 나는 그 연필을 반영합니다.

그러니 나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들과의 상생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만약 소, 양이나 염소, 비둘기를 하나님께 드릴 때 그 제물은 자신과 상관없는 어떤 것이 아닌

나의 일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제물을 죽이고, 각을 뜨고, 태울 때 자신 역시 죽임당하고 각이 떠지고 태워지는 것임을 동시적으로 경험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를 포함한 제사는 단지 금전적(제물의 비용) 헌신을 넘어 나 자신 전체를 드림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물에 붙는 ‘흠 없는’이라는 수식어는 제물의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제물을 들어 바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정해진 순서와 양(量), 기준들은 그 만큼 하나님을 향한 집중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의 현장에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 불가능하면서 어찌 그로부터 오는 은혜를 누리겠다고 말 할 수 있을까요.


제물과 하나 되어 찢기고 태워질 수 있을 때 그 것은 진정한 제사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향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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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수가 더해 세월 가는 것을 잊고 옳다 그르다 의미를 따지는 일을 잊어버리게." 
장자(오강남 풀이) 130p

우린 학교에서 옳다(맞다) 그르다(틀리다)는 판단을 잘 해야 하는 것으로 배우면 자랐다.
이것을 잘 해야 명석한 사람이다.
당연히 성적하고도 관련이 있기에 그렇다.

언듯 숫자 놀음에서 덧셈이나 뺄셈 등을 할 때 답이 맞느냐 틀리느냐에 대해 정해진 답이 있다.
그러나 좀 더 인생을 살다보면 그것이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뺐지만 줄지 않고, 더했지만 늘어나지 않는 경우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보다 시야를 넓히다 못해 높이면 절대로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없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가진 생각, 관점을 누군가에게 관철시키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은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머물러 있음을 어찌하랴.
그러니 이 것 또한 존중해 주고, 나는 나 나름의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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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크게 깨어나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한 바탕의 큰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네."

장자(오강남 풀이) 126p

한바탕 큰 꿈을 꾸고 있다면
지금, 현재, 오늘을 어찌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인가?
되는 대로 살아가나?
최대한 자신이 살고 싶은 모습을 위해 살까?
어차피 이것도 저것도 꿈이라면 하고 싶은 일을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의 성패에 집착하지도 말아야지.
혹여 장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 역시 어리석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생각해 보면 어리석다는 판단 또한 꿈이 아닐까?

깰 것을 알고 살든 모르고 살든 그 자체도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꿈임으로 말이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한정된 기회, 가능성, 느낌, 감정들에 충실하려고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절대적 잣대는 분명히 없고, 상대적이라는 잣대 또한 꿈에 지나지 않으니 뭘 두려워 하고 눈치를 볼 것이 있겠는가?
그러니 스스로 깨닫고 자신의 길에 설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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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크로싱'이라는 영화가 개봉을 했을 거다.

다른 영화를 보러 갔다가 예고편을 봤는데, 그 짧은 영상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슬픔과 아픔을 함께 느꼈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류의 영화는 보고 싶지 않다.

왜냐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없었으면 하는 일들, 끔찍한 장면들이 실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아니 더 가까이 바로 이북 땅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 괴로운 것은 그런 일들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도 보잘것없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어제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영화배우 차인표씨의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뭐 그도 지금까지 이런 문제를 외면하고 살아왔던 것에 대한 반성과

또 그렇기에 출연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인터뷰를 했다.

그 가운데 출연을 결정하게 계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웃을 도우라는 것인데 대한민국의 기독교인으로서 창피했고 반성을 많이 했다.”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했던 한 명의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지난 삶이 부끄러웠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아니 귀감이 가는 삶이었다.

그와 그의 아내 신애라가 봉사활동과 입양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 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인터뷰 기사의 제목이다.

차인표, “대한민국 기독교인으로서 창피했다"

나는 이 제목을 보고 또 기독교인들이 무슨 사고를 쳤나 했다.

혹시 차인표가 용감하게 이명박 대통령이나 추부길 비서관을 언급하며 이런 말을 했나 하고 호기심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인터뷰 내용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닌 영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문제는 제목이 '기독교인'과 '창피'라는 두 단어의 조합이라는 것.

당연히 그 아래 댓글은 가관이다.

개독교니 뭐니 하면서 또 기사 내용과는 상관없는 기독교 비판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들은 민간으로는 가장 많은 지원을 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인지 알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것은 차인표 씨도 알고 있는 일일 것이다.


인터뷰를 했던 차인표 씨도 전혀 이런 반응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존에 대한 반성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 텐데 영 방향이 잘못 나간 것이리라.

그런데 어쩌랴 결과적으로 또다시 기독교에 한 방을 날리는 일이 되었으니.


그래서 궁금하다.

기자가 고의로 그런 제목을 붙였는지.

그렇다면 이건 차인표라도 나서서 수정을 요청해야 할 일이다.
(물론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크로싱이라는 영화에 순수한 맘으로 임하는 배우의 인터뷰를 그렇게 이용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이 신문사가 국민일보랑 같은 건물을 쓰는 것을 보면 서로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의도는 차인표가 영화에 출연하게 된 계기가 신앙의 발로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홍보하려고 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의도와 정 반대로 나간 것 같아 '왜 그러셨어요?'라고 이야기 해 주고 싶다.


그러나 만약 악의적으로 그런 제목을 붙였다면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일이다.
기독교가 이렇게까지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기도 하지만,
양식있는 기자가 전혀 상관없는 내용의 인터뷰 기사를 이용해서 속보이는 짓을 한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정중히 사과를 요청해야 할 일이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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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다른 측면의 이야기 이긴 하지만,

언론이 제목 하나 만으로도 사실을 얼마나 왜곡 할 수 있는 지를 똑똑히 보여준 것 같다.

독자들은 제목을 클릭해 들어가면서 어떤 댓글을 달 것인지 결정하고 들어 온 듯하다.


더불어 기독교가 사회에 비추어진 모습이 이렇게 최악이 돼버린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

현 대통령만큼이나 신뢰를 잃어 버렸으니 그 어떤 이야기를 하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아무리 목청껏 외쳐도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다.
그런데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상황임에도 여전히 몸은 따르지 않고 말만 앞서고 있으니.

너무 안일하게 지내온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아닐까.

교회를 위한 기독교가 아니라 사람(인류)을 위한 기독교가 되라는 부르심은 또 아닐까.


또,,, 너무 멀리 나오고 말았다.
해피엔딩이 아닐 것 같지만 '크로싱'은 꼭 봐야겠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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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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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끄는 40년을 시작한지도 꽤 되었다.
교회에서 '목적이 있는 40일' 캠패인 중 2월 마지막 날에 시작을 했는데
벌써 6월 하순이 다 되었다.
원래 목적지는 신명기까지 하는 것이었는데,
40장 보는데 넉 달이 걸렸으니, 갈 길이 너무 멀다.
레위기라는 산은 또 어떻게 넘을 수 있을지...
그래도 레위기까지는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데, 27장이니.
암튼 허접한 내용이었지만 여기까지 온 것에 감사하고, 또 마음을 잡아서 레위기도 함 가보자.
천천히, 서둘지 말고.ㅋㅋ

 

마침이 아닌 시작

출 40

16 모세는 주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것을 모두 그대로 하였다.

17 마침내 제 이 년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웠는데,


출애굽 한 지 둘째 해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고 봉헌합니다.

모세와 백성들의 머릿속에 시내광야에서 보낸 지난 10개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입니다.

부끄럽고 죄스러운 사건 사고의 연속, 그러나 뿌듯함과 감사의 마음이 가득한 시간이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추는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비록 광야에서 불완전한 삶을 살고 있는 형편이지만 중심에 하나님의 성소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없음’으로 인한 불안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든 기댈 언덕이 저 멀리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닌 자신들 안에 있게 된 것이니까요.


그러나 성막이 세워진 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로서 본격적인 출발점에 서게 된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드웨어가 만들어졌고, 그것을 채울 소프트웨어의 문제가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 멈추어 버리면 안 됩니다.

이 성막을 통해 해 나갈 일들이 어떤 것인지 더 관심 갖고 집중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성막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한 최대로 끌어 올릴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를 담는 그릇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릇의 완성 앞에서 만족하고 그릇만 쳐다보고 있으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누군가 이 건물, 제도에 집착하면 정신, 관계, 생명력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제도가 어느 정도 안전장치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가변성, 수용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변화와 발전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지금도 멋들어진 예배당 건물을 지어놓고는 그 건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보다는

그 건물 자체를 지키기 위해 급급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본말이 전도되어도 한 참 나가버린 것이라 하겠습니다.

안식일이라는 제도가 그러했듯, 성막 역시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사건이 중요한 것이고,

결국 성막과 제도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로부터 이어지는 레위기의 말씀들이 의미가 있습니다.

성막과 제사장 제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얼마나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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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를 바꾸지 말기를

출 39

1 그들은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로 성소에서 예배드릴 때에 입는 옷을 정교하게 짜서 만들었다. 그들은 이렇게,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아론이 입을 거룩한 옷을 만들었다.


일꾼들은 마지막으로 제사장의 옷을 만듭니다.

제사장의 옷은 거룩한 옷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을 매개하는 일을 할 때 입는 옷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된 사람은 그 거룩한 옷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전에 했습니다(출28).

더불어 그 옷을 만드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만들었다’는 생각에 붙잡히면 안 됩니다.

‘내가 거룩한 옷을 만들었다’, ‘내가 온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것을 만들었다’고 우쭐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옷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제사장의 직임에 있습니다.

곧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가능할 일입니다.

거룩함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발현되는 속성입니다.

그런데 한낱 사람이 자신의 손재주로 그것을 ‘만들었다’고 주권을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오직 자신에게 그런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 드릴 따름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는 가능한데 시간이 지나면

그 자체가 커다란 권력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했다’는 이 무서운 권력이 많은 선한 일들을 그르치는 함정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단지 그 시간에 그렇게 쓰임을 받은 것에 대한 깊은 감사만이 진정 거룩함을 담보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그것이 놀랍고 대단합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 주시지 않아도 또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순서를 바꾸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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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드는 일

출 38

24 성소 건축비로 든 금 곧 흔들어 바친 금은 모두 성소 세겔로 이십구 달란트 칠백삼십 세겔이다.

25 인구 조사의 대상이 된 회중이 바친 은은 성소의 세겔로 백 달란트 천칠백칠십오 세겔이다.

26 스무 살이 넘어서 인구 조사의 대상이 된 사람이 모두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므로, 한 사람당 성소 세겔로 반 세겔 곧 한 베가씩 낸 셈이다.

27 성소 밑받침과 휘장 밑받침을 부어 만드는 데 은 백 달란트가 들었으니, 밑받침 백 개에 백 달란트 곧 밑받침 한 개에 한 달란트가 든 셈이다.

 

어느 날 아이 하나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매 주일 내는 헌금은 어디에 다 써요?”라고요.

그 아이는 그 돈으로 교회학교 선생님들 월급을 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날 우리 선생님들은 한 푼 받지 않고 우리 친구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이라고 ‘강조’를 한 날이었기 때문이죠.

아이들의 의문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이렇게 되겠죠.

‘우리가 내는 헌금은 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 때 욱하는 마음에 ‘내가 다 받아 갔다!’라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지만 꾹 누르고는

교회에 불도 켜야 하고, 물도 쓰고, 종이도 쓰고 등등을 읊어대며 비용으로 들어간다고 하며 넘겨버렸습니다.

‘교회와 돈’에 대한 의구심은 이렇게 작은 아이들조차도 갖고 있는 생각입니다.

교회와 돈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아니, 어떤 관계를 가져가야 하는 것일까요?


모세로부터 위임을 받아 성막과 성소의 물품을 만든 이들을 자신들이 사용한 물품,

더 정확히 말하면 비용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쓰고 남을 만큼 많이 가져온 재료들 가운데서

얼마나 썼는지 낱낱이 밝혀 두어야 했던 것입니다.

금도 은도 무척이나 많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금은이 많이 쓰였으니, 백성들은 빈털터리가 되었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이 내어 놓은 대부분의 금붙이들은 애굽에서 빠져 나올 때 애굽 사람들에게 받아 온 것들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다 사용할 것을 예상하시고 준비하게 해 주신 것이지요.

아무튼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독립된 하나의 민족(아직 나라를 형성하진 않았으므로)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제도로 만들어 가고 있는 과정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성막이 만들어졌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돈을 내어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불어 그 성막을 유지하기 위해, 성막을 중심으로 앞으로 이루어질 종교행위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돈(가축이나 곡식 포함)을 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재물을 내어놓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옛말에도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듯이

돈이 가면 마음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수중에서 나간 돈이 어떻게 사용되는 지, 또 어떤 절차를 거쳐 가는 지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결국 그 돈이 하나님께서 원래 부여하신 질서대로 투명하게 사용될 때

이스라엘 나라 공동체 또한 건강하게 유지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타락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을 받아서 관리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했습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부를 축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적 욕심을 위해 성전에 드려진 물질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개의 교회의 재정은 한 사람에 의해 관리되지 않고

여러 사람들에 의해 관리되면서 어느 정도 감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런 체제는 쓰임의 결과에는 관심하지만 과정에는 무관심(사실은 무지)하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지켜보다 보니 필요하지 않은 곳에까지 낭비되는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체면치례를 위해, 임기응변적으로, 군중심리로, 일관성 없이 방만하게 운영되어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건물에 집중하다 보니 멋드러진 건물을 지어 놓고는 그 관리비에 허덕거리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경상비의 비중이 너무 커져서 본말이 전도된 상황이 연출되는 것입니다.

‘작은 정부’라는 말이 있듯이 ‘작은 교회’를 지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성소의 건축 비용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멀리 나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소이든 교회이든 돈이 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서 필요한 것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비용이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 채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돈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 돈을 더 잘 사용하기 위한 데에 지혜를 모으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모아진 돈을 허투루 쓰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일도 역시 ‘돈 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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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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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역사적인 날이었던 6월 10일 촛불문화제,
광화문 앞 세종로 사거리 모습을 핸드폰 카메라에 담았다.
(내가 사진을 많이 찍는 사람 같으면 핸드폰을 진작에 바꿨을 거다.)

이 많은 사람들의 이 뜨거운 열정, 에너지를 이런 곳에 쏟게 하다니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지만, 또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가 변증법적 발전을 이룰 수 있다면
그 나름 의미 있는 일이고, 그래서 그 자리에 함께 한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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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막 앞 왼쪽에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있는 사람이 지금 보니 고진화 의원(17대)이다.
공천 탈락하고 대운하 반대쪽으로 돌아섰고, 지금은 환경운동 하는 이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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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뭐가 뭔지 잘 구분이 안 가지만 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컨테이너 아래쪽에 붙어 있는 현수막 때문이다.
"경, 08년 서울의 새로운 랜트마크 명박산성, 축"


웹2.0을 대표하는 위키백과에 바로 명박산성의 뜻이 올라왔다.
물론 현재 이 단어가 백과사전에 어울리는 지 그렇지 않은 지 삭제 토론 중이라고 한다.
위키백과>>
명박산성(明博山城)은 2008년 6월 10일 6.10 민주화 항쟁 21주년을 맞아 한미 쇠고기 협상 내용에 대한 반대 시위의 일환으로 서울 도심에서 100만 촛불 대행진이 계획되자, 경찰이 시위대의 청와대 진출과 전경과의 대치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도심 곳곳에 설치한 컨테이너박스 바리케이드를 뜻하는 말이다. 대한민국 네티즌과 시위대가 풍자의 뜻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지만, 신문 기사 등에서 인용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주요 외신에도 컨테이너 장벽의 사진이 보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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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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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초순에 찍었던 사진을 이제야 올린다.
초보농부라하고 하면서 전혀 뒷받침할 증거를 보여주지 않는 것 같아서 늦었지만...

먼저 지난해 작물들에게 모든 영양을 주고 겨울내 쉬었던 땅을 경운기로 부수고,
관리기로 골을 타서 이랑을 만든다.
비닐을 씌우고(멀칭) 구멍을 뚫어 고추 모종을 심기도 하고,
콩이나 참깨, 들깨, 옥수수, 고구마 등을 심기도 한다.

주로 서울에서 살다가 오랫만에 농기구를 사용하다 보니 팔이 저렸다.
특히 직접 접촉하는 손바닥은 벌겋게 달아 오르고 욱신 거렸다.
몸으로 사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삶의 모습일텐데
그것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거리를 두고 사는 데서 오는 현상이다.

아무튼 이렇게 작은? 수고로 작지만 한 해 농사의 기본이 갖추어 졌다.
지금 쯤은 이런 저런 작물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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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일 하면서 사진 찍는 것이 좀 머쓱하다.
어머니께서 물 한 잔 들고 오실 때, 카메라! 하고 외치면 재미있어 하시며 가져오신다.
그리고 몇 컷 찍어 주신 것,
어색한 마음처럼 사진 역시 전혀 농사꾼 같지 않은 모습이 생뚱맞게 보인다.
나름 얼굴 표정은 진지하지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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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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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의 합작품

출 37

1 브살렐은 아카시아 나무로, 길이가 두 자 반, 너비가 한 자 반, 높이가 한 자 반인 궤를 만들었다.

2 순금으로 그 안팎을 입히고, 그 둘레에는 금테를 둘렀다.


하나님께서 산 위에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들이 그대로

오홀리압과 브살렐, 그리고 그를 돕는 이들의 손길에 의해 실체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모세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동안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솜씨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혹시 잘못 이해한 부분 때문에 오류가 나지 않을지 노심초사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막을 만들고 언약궤를 만들고 성소의 각종 기명들을 만드는 일은 순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세에게 설계도를 주셨을 뿐 그것을 만드는 일은 오로지 백성들의 몫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 모세가 전하는 것을 하나도 빠트릴 수 없었겠지만,

이 작업의 모든 키는 작업자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좀 달리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꿈의 실현이 사람들의 손끝에 달려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진 능력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집중해서 한 치의 오차 없이 만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있었습니다.


이 본문을 읽고 위와 같은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답답한 마음이 듭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 손끝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꿈이 사람들의 손끝에서 현실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삶의 장 속에서 그것을 분별해 내고 구체화 해 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말 모세와 같은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해서 모든 의혹을 말끔히 씻어 준다면 또 모르겠지만

오늘의 사회, 오늘의 기독교, 오늘의 교회의 현실은 한마디로 ‘오리무중’이라 하겠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말해 자신이 뭘 해야 할 지 도무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르침들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을 가지고도 정반대로 이야기들을 하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이죠.

더구나 사회 문제들에 대한 견해들은 왜 그리 극단을 달리는지.

그러다 보니 교회의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현재 교회에 잘 출석하고 있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지 심히 우려되는 대목입니다.


성경 말씀 한 두 줄 읽고 너무 멀리까지 나온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답답한 마음을 담아 봅니다.

어쨌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마치 브살렐과 같이

하나님의 설계도를 자신의 손끝에서 실체로 만들어 내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동업자요, 동역자입니다.

그 동역의 결과는 멋진 합작품의 생산에 있는 것이 되겠죠.

그런데 요사이 그리스도인들, 특히 말 잘하는 사람들이 그 합작품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기에 아쉬운 마음 가득합니다.


그래도 어디선가 조용히 멋진 작품을 만들고 있는 분들이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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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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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 어느 방향으로

출 36:5 이르기를 "백성들이, 주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는 데에 쓰고도 남을 만큼 많은 것을 가져 오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성소를 짓기 위해 금은보석은 물론 실로 천을 만들어 바치는 일에 앞 다투어 달려듭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기간의 열심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 보이는 것과 같은 열심으로 32장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열심을 내는 모습, 그 자체를 놓고 평가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대개 열심히 뭔가를 하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방향이고, 의도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지도자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열심을 하나님의 성막을 만드는 데에 사용하도록 했지만,

아론은 똑같은 열심을 금송아지 우상을 만드는데 사용하게 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열심을 굉장한 미덕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이 특심인 교회들은 다른 교회 목회자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하지만 그 열심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방향이 잘못되어 있을 때가 너무도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열심이라는 것이 얼마든지 우상에게로, 이단에게로도 향할 수 있고,

그래서 이단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이 더 특별한 열심을 보이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열심이 없음을 탓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열심을 내야할 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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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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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하나님의 선물

출35(표준새번역)

1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아 놓고 말하였다. "주께서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명하신 말씀은 이러하다.

2 엿새 동안은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렛날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 곧 주께 바친 완전히 쉬는 안식일이므로, 그 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형에 처해야 한다.

3 안식일에는 너희가 사는 어디에서도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


출애굽기에만 안식일 언급이 다섯 번이나 등장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양식인 만나를 주시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일은 쉬는 날로서, 주님의 거룩한 안식일이니, 당신들이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으십시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당신들이 다음날 먹을 수 있도록 아침까지 간수하십시오.” 16:23

십계명을 주시면서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20:10

안식년과 함께 다시 이르시면서
“너희는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의 소와 나귀도 쉬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여종의 아들과 몸붙여 사는 나그네도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23:12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이르시는 것을 마무리 하시며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징이니, 이는, 나 주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면서 숨을 돌렸기 때문이다.” 31:17

그리고 출애굽기 35장,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의 사건을 지나고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성막을 지으려고 하는 시작점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안식일 규례를 명하십니다.


‘맞아 안식일에는 뭐든 일을 하면 안 돼!’라고 생각하며 넘어가면 쉽겠지만,

안식일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아 보입니다.

결국 율법을 철석같이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에게 안식일은 그런 삶의 지표와도 같은 것이었고,

이렇게 누차 하나님께서 강조하셨다는 데서 더 확실한 정당성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그들의 반대편에 서 계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 12:8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 마 12:12


좀 비약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안식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종교인과 신앙인이 나눠진다고 생각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과

안식일에 담긴 의미,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은 같을 수 없는 것이니까요.

아마 출애굽기를 쓰고, 또 바로 받아서 읽었어야 했던 사람들은

보다 강한 어조의 율법의 경구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초보적 신앙 단계에서 바로 의미나 의도로 가버리면

자유가 아닌 방종으로 희석되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있어서, 또 예수님을 믿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 준수의 문제는

단지 문자적인 준수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마도 예수님은 보다 더 강력하게 말씀하셔서

‘안식일 해체자’ 혹은 ‘율법의 파괴자’로까지 비춰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물론 앞에서도 약간은 이해가 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종교인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사람이라면,

신앙인은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는 사람입니다.

뭐 신앙인이라는 표현이 좀 부족하다고 생각하실 분도 있지만

일단 이 논의에서는 더 나아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종교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힘들게도 보일 수는 있지만 마음은 편할 것이고,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겉으로는 쉬워 보이지만 실제 그 내면은 끊임없는 갈등의 연속(수행)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종교인에게 전혀 신앙이 없다든지

신앙인에게 종교적인 행위나 절차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에게 안식일이라는 율법이 없었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알아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수준(?) 이상이 되었을 때는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어쩌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유로움으로 옮겨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껍데기들의 이면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때로 목숨처럼 여기는 제도와 규율들을 넘어서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교회에 더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자연스러워 지기 보다는 더 경직되어 갑니다.

내면으로는 이미 규율을 규율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자유로운 사람들이나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옭아매려는 규율에 규율을 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해 준 그런 규율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안식일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출애굽기에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안식일은

그리스도교를 통해 주일로 바뀌기는 했지만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사이 주5일 근무를 이야기하며 5일 일하고 이틀을 쉬는 이들도 있지만,

6일을 일하고 하루를 쉬어야 한다는 것은 실로 파격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다른 율법들에 비해 가장 실천되기 어려운 것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어차피 가진자 힘 있는 자들은 안식일이든 아니든 일하지 않았습니다.

놀고먹으며 힘없는 이들, 노예들, 나그네들, 심지어 종의 자식들의 노동 덕분에 먹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도 쉽게 지켜지지 않을게 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섯 번이나 반복하시는 데는 이렇게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이해한 안식일은 초점이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대한 주권을 선언하시고, 또 그 날 선한(좋은) 일을 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신 것은 정말 옳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수고롭게 살아가는 인생에게 베푸신 최고로 좋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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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는 지도자

출34

29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34 그러나 모세는, 주님 앞으로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말할 때에는 수건을 벗고, 나올 때까지는 쓰지 않았다. 나와서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 때에는,

35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게 되므로, 모세는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까지는 다시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모세는 또다시 산 위에서 하나님과 40일을 보내고 다시 만든 돌 판을 들고 내려옵니다.

그런데 지난번과 달라진 것은 모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납니다.

너무도 간절한 모세의 태도 덕분에 하나님께서 더 가까이 다가오셔서 이야기 하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모세는 처음에 자신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광채 나는 얼굴 그대로 백성들과 이야기를 했지만,

광채가 나는 것을 알고, 또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알자

그 때 부터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만날 때는 수건을 벗었다.


언 듯 생각해 보면 인위적으로 조작한 것도 아닌데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면

좋은 기회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집트의 파라오였다면 자신이 신의 아들, 혹은 신이라고 떠들며

백성들을 자신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는 좋은 도구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있어서 얼굴의 광채는 그것이 비록 하나님을 만남으로 얻게 된 것이라 해도

백성들이 두려워 한다면 장애물일 뿐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그것과는 달리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백성들을 더 강하게 장악해서 지배하려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모세의 위대성을 엿볼 수 있고, 왜 하나님께서 모세를 선택하셨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사귐의 시간을 통해 광채와 같은 능력을 얻더라도
 오히려 그것을 뒤로 감출 수 있는 사람,
광채 뒤에 그대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해야 할 작은 일들에 성실히 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서 빛나는 광채, 또 어떤 능력도 하나님의 것이며
잠시 스쳐가는 지나가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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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한다고 큰 소리 처놓고서는 뒷심 부족에 발목이 잡혀 버렸다.
더구나 목사 안수 받은 후유증(?)까지 겹쳐서 하루 한 두번 블로그에 얼굴 도장만 찍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니 야심차게 시작한 하나님이 이끄는 40년은 출애굽기도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으이그...

빈손의 지도자

출34

8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서 경배하며  9 아뢰었다.
"주님, 주님께서 저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사실이면,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 백성이 고집이 센 백성인 것은 사실이나, 주님께서 우리의 악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주님의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모세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노심초사 하고 있습니다.

다시금 산에 올라 하나님을 대하고 있으면서도 반복해서 함께 가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렇듯 모세의 영향력(카리스마)은 하나님과 밀고 당기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백성들에게 전하거나,

하나님을 향해 백성들을 대변하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발할 수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향해서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모세가 얻은 것은 없습니다.

오직 혜택은 백성에게,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물론 백성이 얻은 혜택은 최소한의 희생을 감수한 후에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모세의 역할이 있었기에 수준 이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힘겨운 훈련의 여정을 통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사이 만나게 되는 지도자들은 대개 반대로 합니다.

백성들에게는 아부하고, 하나님의 이름에는 먹칠을 합니다.

인기에 영합하는 가벼운 존재들에 의해 벌어지는 필연적 결과입니다.

그들의 손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들려져 있습니다.

빈손의 지도자였던 모세와 대조되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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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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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통(通)하는 사이
출애굽기 33장
17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잘 알고, 또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서, 네가 요청한 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마."
18 그 때에 모세가 "저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

하나님께서 같이 가시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던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얼굴)을 보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전에 산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백성들의 죄악에 대해서 들을 때보다 백성들의 상태가 더 나쁘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모세는 불안해진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모세의 진가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내겠다는 애틋한 사랑도 그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의 탁월성이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그것과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가지고 있는 마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닌 속에 갖고 계신 근원적 마음과 같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 주실 때 불쾌하거나 끌려가는 기분이 아니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못내 들어 주시는 것처럼 하셨지만 실은 모세의 이와 같은 태도에 뿌듯해 하시며,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고자 하시는 일을 더 쉽게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할 때 숫자를 줄이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부탁을 들어 주시기로 하셨지만, 그것이 모세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임을 알고 계셨기에 곧바로 타협안을 제시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서 있을 때 당신의 손으로 그를 덮고 지나가신 후 손을 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하나님을 정면으로 보고 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모세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고 싶으셨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최선을 다해 모세의 마음을 만져주시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실로 엄청난 일 앞에서 크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무지한 백성들을 인도하며 힘들고 지칠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본 전무후무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뒷모습 밖에 보지 못했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어쩌면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하나님의 모습이란 하나님의 뒷모습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사랑, 정의 등등의 것들이 그만큼 온전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면 우린 하나님의 일부분만을 만나고, 접촉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하나님을 전부 아는 것처럼 큰 소리를 낸다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모세조차 하나님의 뒷모습을 잠시 보았을 뿐인데 말입니다.


하나님 없는 성막을 지을 수 없다

모세가 성막을 짓기 전에 큰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실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세하게 성막의 식양을 주셨고, 이젠 성막을 짓기만 하면 되지만 하나님 없는 성막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텅 빈 성막만을 가지고 가본들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군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모세의 긴장의 이유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꼭 함께 하신다는 확증 아래서 그 분의 성막을 짓겠다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 없는 성막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관심과 요청을 뒤로 하고 자신들의 것만을 챙기려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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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 하나님을 위로하다

출32

10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14 모세가 이렇게 간구하니, 주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시고, 주님의 백성에게 내리시겠다던 재앙을 거두셨다.

19 모세는 화가 나서,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돌 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내던져 깨뜨려 버렸다.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니, 바로 그 날, 백성 가운데서 어림잡아 삼천 명쯤 죽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완전히 없애 버리시겠다는 하나님을 일단 진정시키고 산을 내려왔지만

정작 백성들의 타락한 장면을 목격하고는 화를 참지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 돌 판 두 개도 내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또 백성들 서로를 죽이게 하여 삼천 명쯤을 죽게 했습니다.

실로 참혹한 장면이 아닐 수 없지만 어쩌면 모세 덕분에

더 큰 재앙이 피하고 삼천 명의 희생으로 마무리 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후 수송아지를 만든 일로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셨지만(35절)

모든 백성을 향한, 또 기록에 남을 만큼의 전면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와 백성들 앞에서 너무도 다른 모세의 행동에 의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세의 이런 행동이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막았기 때문에 마음을 돌리기는 하셨지만

화나고 괘씸한 마음은 그대로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모세가 돌 판을 던져 깨뜨려 버리고 또 백성들을 향해 화를 낼 때

하나님께서 속 시원해 하시며 위로?!를 받으셨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느끼는 모세의 존재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대신해 화를 내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린 덕분에 이스라엘의 대부분은 생존의 은혜를 입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대신해 화를 내고 있는지요.

하나님의 공의의 분을 품는 사람들의 존재가 점점 희박해 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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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출31

6 분명히 나는 단 지파 사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이 브살렐과 함께 일하게 하겠다. 그리고 기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지혜를 더하여, 그들이 내가 너에게 명한 모든 것을 만들게 하겠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친히 쓰신 증거판을 주시는 장면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하시는 말씀 중에

두 기술자를 뽑아서 일을 맡기라고 하시는 부분에서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굳이 사람의 손을 빌려서 성막을 만드셔야만 했나?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실 곳이 생기는 것이었나?

성막이 만들어 지고, 제사장의 제도가 서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나?

함께 하실 수 없으셨나?

그 이전에 아브라함을 포함한 성조들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불완전한 것이었나?


어쩌면 이 제사제도가 세워지는 부분에 냄새가 납니다.

순수한 신앙의 발로라기보다는 종교주의자들의 손길이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제도와 절차를 통해 사람들을 길들여 자신들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이후 역사를 보더라도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혹은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관계가 진전되는 것을 별로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전 혹은 유사성전들로 인해 백성들은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할 뿐이다.

물론 제도라는 안전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안정되게 하나님 이야기가 전승되어 갈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안정이라는 것이 함정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안정을 가장 중심으로 놓다보면 하나님께서 전해 주셔서 만들어 놓은

지극히 과정적이고, 수단일 수밖에 벗는 것들이

목적이 되고 대상이 되어 버리는 일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홀리압과 브살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언약궤가 그 자체로 신통력을 지니기라도 한 듯이

사람들이 그 것은 부적으로 만들어 버려서 전쟁터에서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여기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분명히 발생합니다(삼상 4장).

그러니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성전을 무참히 무너트려 버리실 때

그 성전은 이미 백성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로 하나님께는 아무 의미도 없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소통)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일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성도들이 특정한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되는 것은 본말이 크게 전도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언약궤가 거룩합니까, 그것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거룩한 것입니까?

교회가 거룩합니까, 그 안에서 사람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이 거룩합니까?

사람의 손을 통해 세워지고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릴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만남을 통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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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것은 쉬운 거다

출30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3 "너는 제일 좋은 향품을 취하되, 순수한 몰약을 오백 세겔, 향기로운 육계를 그 절반인 이백오십 세겔, 향기로운 향초 줄기를 이백오십 세겔,

24 계피를 오백 세겔, 이렇게 성소 세겔로 취하고, 올리브 기름 한 힌을 취하여라.

25 너는 향을 제조하는 법을 따라 이 모든 것을 잘 섞어서, 성별하는 기름을 만들어라. 이것이 성별하는 기름이 될 것이다.


출애굽기가 전하는 제사장 이야기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예수님 때문에 더 힘들어 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정해주신 절차와 공식대로 만들고 따라하면

그 자체로 구별되고 거룩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공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가타부타 이야기할 여지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대로 전하는 역할, 물론 이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마음’의 문제를 이야기 하시면서

상황은 전혀 다른 쪽으로 돌아서버립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외모에서 중심으로 옮겨 갔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실은 그것이 예수님이 선언을 하신 것이지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으로 보시고 계셨습니다.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때도 그러하셨고,

이스라엘의 불순종 앞에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주실 때 반복하신 말씀의 주제가 마음이었습니다.

육체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라고 목청 높여 전하셨으니까요.

그러나 겉모습에 중심을 두고 그것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던 이들에겐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국 모세를 통한 모세의 세대에 마침표를 찍으시고,

예수님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세대가 도래하도록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겉으로 보여 지는 절차와 외모에 따라서가 아닌

마음으로 판단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때문에 더 어려워졌다고 감히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망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모세를 부르시어 당신의 백성을 만드시기 위해 율법을 주셨던 것이 은혜였듯

예수님을 통해 마음의 길을 열어 주신 것 또한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는 우리가 진심으로 나아갈 때 또한 하나님의 진심어린 마음과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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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의 마음

출29

1 나를 섬기는 제사장을 거룩히 구별하여 세우는 절차는 이러하다.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두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골라라.

2 그리고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누룩 없이 기름만 섞어 만든 과자와, 누룩 없이 기름만 바른 속 빈 과자를, 고운 밀가루를 가지고 만들어라.

3 너는 그것을 모두 한 광주리에 넣어서, 수송아지와 두 마리의 숫양과 함께 광주리째 바쳐라.


여전히 실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하라’고 이르시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보다 생생한 장면은 출애굽기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명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오히려 여기에서 자세한 사항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28장에서 제사장의 옷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29장에서는 그것을 제사장에게 입히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옷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냥 제사장의 일을 할 사람이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그 절차에는 또 희생이 따랐습니다.

희생이 없이는 제사장으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과거에 범죄 한 사실이 있고, 현재 흠(결격사유)을 가졌다면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희생은 자신도 모르게 지었을지도 모르는 죄를 위한 것이고,

장래에 지을 지도 모르는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제사장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자신에게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기에 그 직무를 감당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했습니다.

백성 중에서 정해진 요건을 갖춘 자가 정해진 절차를 밟았을 때 거룩한 직임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제사장은 자신이 입은 옷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때부터 타락이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면 그는 분명 그 옷을 자신의 권력으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그의 옷이 그인 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되는 자는 옷에 감추어져 있는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기 위해

내적 자신으로의 끊임없이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백성들도 그러하지만 제사장들은 더더욱 자신이 드리는 짐승들이 불태워질 때

그것과 함께 자신의 속되고 거짓된 자아를 함께 태워버리는 의식을 성실히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야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의 타는 냄새를 향기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불태워지는 짐승의 살과 기름에는 아무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제사장의 낮은 마음이 함께 할 때에라야 진정한 능력이 있는 제사,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되는 더 중요한 절차, 희생은 바로 제사장의 마음의 태워짐이었습니다.

자신을 남김없이 산화시키는 헌신만이 그를 제사장으로 거룩한 자리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거기에 있었다면, 예수님이야 말로 최고의 제사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그것을 조금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허덕이고 있으니

하나님의 긍휼이 더더욱 크게 느껴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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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필요한 은혜

출28

2 너는 너의 형 아론이 입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보이는 거룩한 예복을 만들어라.

3 내가 슬기로운 생각으로 가득 채워 준 모든 재주 있는 사람을 불러다가, 나를 섬길 아론이 제사장이 되어서 입을 예복을 만들라고 하여라.

4 그들이 만들어야 할 예복은 이러하니, 곧 가슴받이와 에봇과 겉옷과 줄무늬 속옷과 관과 띠이다. 이렇게 그들은 너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만들어 주어서, 나를 섬기는 제사장 일을 맡게 하여야 한다.


1.
출애굽기 28장은 성소의 사람인 제사장이 입을 옷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옷을 이르시면서 ‘거룩’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시는데,

제사장의 옷이 ‘거룩한 예복’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되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거룩할 수는 없습니다.

그에게 맡겨진 일이 거룩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거룩한 직임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예복으로 자신의 개성, 한계, 허물을 가렸던 것입니다.


제사장의 직무는 하나님의 의지로부터 온 것이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명하신 것이고, 임명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이 된 사람이 자신이 거룩하고, 위대하다고 오해,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화려한 옷, 화려한 자리에 앉을수록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더욱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화려한 옷은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위한 배려로 주신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 화려한 옷을 보고 제사장을 존경하고, 자신들과 다른 존재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사장은 그럴수록 더욱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의 은혜를 더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거룩한 옷 입기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어찌 자신이 그 옷을 입을 수 있는지 괴로움에 휩싸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에 우쭐하기보다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직무의 무게를 생각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
목사임직을 앞두고 있습니다.

목사가 된다는 것, 그것이 저의 존재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끊임없이 저의 존재를 갈고 닦는 일은 계속할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가 구약에서 말하는 제사장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 된 사람이 감당하는 일의 중대성은 과소평가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사라는 이름의 옷은 거룩한 예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저의 고백은 ‘주님의 은혜가 더욱 필요합니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아니면 조금도 나아갈 수 없는 자리가 또한 ‘목사의 자리’가 아닐까요.

주님의 은총이 더욱 필요하고, 함께하는 사람들의 기도가 더욱 필요하고,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는 갈고 닦음이 더더욱 필요합니다.

아마 자신의 내적 모습이 볼품없을수록 더욱 화려한 ‘예복’을 입으려고 안달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경계하며 저 자신의 존재를 예수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더욱 겸손해져서 낮은 마음을 품기를 소원해 봅니다.

목사, 그래서 조금도 눈에 띄는 어떤 옷도 필요하지 않고,

존재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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