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과 목회'라는 계간 잡지에서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이 왔다. 요즘 내 정서상 귀농과 관련된 글을 쓴다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했는데도 부탁을 하셔서 쓰긴 썼지만, 겨우 쓴 표도 나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제 겨우 2년을 바라보는 농촌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가타부타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사실 귀농이니, 농부니 하는 말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 모든 표현보다 가장 적절한 것이 바로 이 ‘농촌에 산다’는 말이다. 서울을 떠나 올 때는 이런저런 이유들을 들며 마치 대단한 것처럼 이야기도 했지만 사람 사는 것이야 서울이든 농촌이든 별반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더 크게 깨달은 곳이 바로 농촌에서였던 것 같다.
농촌에 살기에 밭농사도 지어 보고, 아궁이에 불도 떼보고, 똥도 퍼 보고, 올 해는 특별히 포도농사도 지어보았다. 한 신학생이 어떻게 귀농을 하게 되었고, 농촌에서 무엇을 했고, 또 요즘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펜 가는대로 써 보려고 한다.

신학생 귀농자

귀농을 하겠다고 길을 나선 것은 신대원 3학년 2학기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물론 그 전부터 농촌목회에도 관심이 있었고, 생태라든지, 대안이라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진 것은 대부분의 신대원생들이 졸업 후 전임 사역지를 물색할 즈음에 이루어졌다. 나름대로 약간은 별난 성향 때문에 그런 것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고, 학교생활에서나 교회에서 신학생, 목회자들에게서 교회의 빛을 발견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어찌 보면 내가 가진 약간의 부정적 시야와 교만함이 일조한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대안 대학교에 가보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한 교수님을 통해 귀농자들을 교육하는 곳이 있다는 말씀을 듣고 알게 된 곳이 귀농운동본부였고, 바로 생태귀농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일주일에 두 차례 저녁 때 이어지는 교육은 이론과 실제에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깨우쳐 주었다. 그것이 옳고 그른 차원을 떠나 귀농의 뜻을 품은 이들의 마음 밭을 고르게 해 주는데 이보다 더 좋은 장은 없는 듯하다.
여기까지는 일반인들도 똑같이 느끼는 부분일 테고, 나는 한 가지 더 얻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거울이었다. 그것은 기독교를 비추고 있는 거울이었다. 세상이라는 거울에 비친 교회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들이 말하는 기독교, 교회, 교인들은 때로 비수가 되어 나에게 꽂히기도 했다. 내가 전도사라는 것은 고사하고 그리스도인, 아니 교회 다닌다는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게 만드는 삭막한 분위기. 어쩌면 이리도 교회의 위상이, 사회적 리더십이 바닥을 치고 있는 것인가? 결국 ‘교회인’으로 굳어져 가고 있던 나를 향한 비판이요, 충고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비판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가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이고, 기대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입장에서 교회가 감당해 주었으면 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더 이상 교회가 소비적 집단이 아닌 사회를 향한, 사람들을 향한 생산적 집단이 된다면 이런 냉소적 시선도 줄어들 거라 생각하며, 나로서는 생산자가 되겠다는 전의를 한층 더 불태우는 동기가 되었다.

서울에서만 살아 온 내가 귀농을 하려니 한두 가지가 걸리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로 갈 것인지, 뭘 해 먹고 살 것인지도 문제였지만, 보다 실제적인 문제는 삼십 대 중반을 향해 가는 나이에 배우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혼자 가서 얼마나 살 수 있나? 농촌에서는 혼자 오면, 특히 남자가 혼자 내려오면 인정도 안 한다던데, 농사 자체가 남자 혼자 하기에는 지루한 일이라는데...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모님도 함께 가기로 의견을 모으게 된 것이다. 나와는 별도로 농촌이든 어촌이든 내려가서 생활 할 계획이 있으셨던 차에 의기투합을 하게 된 것이다. 부모님께서는 어느 정도 재정적 뒷받침을 포함한 하드웨어를, 나는 발로 뛰고 구체적 그림을 그리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부모님께서 ‘안정’을 확보해 주셔서 일단 큰 문제 하나는 모른 척 할 수 있게 되었다.

양다린 걸친 농부

2004년 연말에 있었던 ‘귀농인의 날’에 뜻밖에도 고등학교 때 절친했던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 귀농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친구가 살고 있는 상주 모동으로 살 집을 알아보고 확정을 지었고, 귀농 초기의 난관들을 그 친구의 도움으로 극복하며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정말 기적같이 정착을 했다.
거처도 마련되고, 동시에 무상으로 지을 수 있는 밭도 천여 평 얻으며 외형적으로도 농부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사는 문제 앞에서는 경제적인 부분을 빼놓을 수 없는 문제였다. 멀쩡히 세 식구가 형이 보내주는 약간의 생활비로 화물차까지 굴리면서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나는 은행에서 대출했던 학비를 갚아야 했다. 이로부터 양다리 걸친 농부가 탄생하게 된다. 주 중에는 철저히 농부가 되고, 주말과 주일에는 내 특기를 살려 교회 사역을 하기로 한 것이다. 교육전도사를 하기로 한 것인데, 사실 귀농하면서 자유롭고 싶었던 내 입장에서 이 결정은 정말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부모님께 짐이 아니라 보탬이 되어 드리고 싶고, 무엇보다 일단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은 이러저러한 것들보다 우선적 해결 과제이기도 했다.
주 중과 주일의 간극을 오가는 농부전도사, 때로는 흙이 좋은 친구가 되어 주기고 하고, 때론 어린이들이 위안이 되어 주기도 했다. 이 결정은 경제적 안정이라는 도움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 쪽으로 빠져들어 버리지 않도록 해 준 것 같다.

주 중에 농사를 짓는다는 전도사, 손바닥이 거칠어져 오는 전도사, 얼굴이 햇빛에 그을려 나타나는 전도사, 화물차를 끌고 오는 전도사를 만나며 아이들과 교사들은 조금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교사들은 어떻게든 내 삶의 자리와의 만남을 시도하고 싶어 했고, 이로부터 포도밭 방문과 체험도 이루어졌고, 또 전도사가 가져온 변변찮은 생산물들을 기꺼이 구입해 주는 너그러움도 보여주었다. 일기가 불안해 날이 굳으면 오히려 전도사를 걱정해 주는 교사들도 있었다.

초보농부

농사를 많이 지어본 것은 아니지만, 만약 누군가 농사일 중에 어떤 일이 가장 힘드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흙을 만지는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이 호미로든, 삽으로든, 경운기로든 말이다. 비닐을 씌우고, 약을 치고, 수확을 하는 일들도 물론 힘이 들지만 특히 근력이 부족한 나에겐 흙에 접촉하는 일만큼 힘들게 느껴지진 않았다. 다른 일들은 지루함의 정도가 얼마나 되느냐의 차원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더욱 창세기의 말씀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을 갈게 하셨다”(창세기3:23) 흙이 나의 근본이라는 것이고, 그 흙을 뒤집고 가는 작업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길이었으니 말이다. 나를 뒤집고 가는 작업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피부로 느끼는 곳이 바로 내가 선 곳 농촌이었다. 삽에 기대어, 또는 경운기에 시동을 끄고 주저앉아서 깊은 숨을 몰아쉬며 ‘내가 왜 이러고 있지?’하다가도 번쩍하고 머리를 스치는 생각, ‘나를 갈아야지...’

귀농 교육을 받으면서 생태적이고 순환적 삶에서 화장실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정말 내가 똥을 푸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어린 시절 ‘푸세식’ 변소를 사용했던 기억이 워낙 악몽 같아서 떠올리기도 싫었는데, 똥을 푸게 되다니... 물론 시골의 변소는 과거 도시의 공동변소와 다르고, 또 왕겨나 재를 뿌리면 냄새도 덜한 것은 사실이다. 위생적(?)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똥은 똥이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네 번은 푼 것 같다. 나와 나의 가족의 배설물이니 군소리 없이 푸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사실 똥을 푸고 났을 때 가장 행복감을 많이 느낀다. 일단 변소의 분뇨 통이 비어서 좋고, 또 대자연의 순환에 조금이나마 참여 할 수 있다는 데에 기쁨이 있어서이다. 내가 저지른 일을 내가 책임져 다시 거두어들이는 일에 함께 한 것이 아닌가?
한 덩어리, 혹은 한 그릇정도의 양을 내어놓고, 몇 바가지의 물을 섞어 흘려보내야 하다니. 그것도 아무런 책임감이나 가책도 없이. 어떻게든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싶었다. 어떤 분은 수세식 변소를 ‘문명의 함정’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잘 발효된 똥만큼 더 좋은 거름은 없으니 작물들은 나의 배설물을 먹고, 나는 또 그들이 내어 놓는 것들을 먹는다. 아쉬운 것은 농촌에서도 정화조를 묻어야 건축허가가 난다고 한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세기3:19)

지난해에는 천여 평 밭에 제초제, 농약 사용하지 않고 짓다보니 일부를 포기하고 칠백여 평에 들깨, 콩, 참깨를 심었었는데, 올해는 좀 더 늘려서 이것저것 심어보고 싶었던 것들까지 더해 농사지었다. 이에 더해 올 해는 그 대망하던 포도농사를 짓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상주시 모동면은 특구로 지정될 정도로 포도가 주작목인 곳이다. 그래서 ‘농사’하면 포도농사로 통한다. 논이나 밭이 포도밭으로 탈바꿈되어 있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마을 분들은 우리집 얘기만 나오면 ‘아무것도 안 한다’, ‘남자 두 사람이 놀고 있다’라고 얘기하셨다. 포도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우회적 표현인 것이다.
이런 어른들의 이야기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한 번 해 보고 싶은 것이 포도농사였기에 나에게 적당한 크기의 포도밭을 알아보게 되었고, 오백 평이 못되는 밭은 구하게 되었다. 포도농사는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아니 그 이상 아는 것이 없었기에 선배 귀농자요, 포도농사의 대선배인 친구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해 물어가며 지어야 했다.
다른 농사도 그런 측면이 있지만 특히 포도 농사를 일컬어서는 ‘세 번 울고, 세 번 웃는 농사’라고 한단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차츰 포도나무의 변화무쌍함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전혀 희망이 안 보이던 가지에서 움이 트고 가지가 나오고 꽃이 피고 충실한 열매를 달았고, 반면 아주 기대할 만큼 실했던 가지는 오히려 알들도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달린 송이들을 봉지로 싸 놓고 가슴조리는 기간이 지난 후에 열었을 때 그럴듯한 포도송이로 변해 있는 모습은 정말 가슴 벅찬 관경이었다. 정말 울고 싶은 때도 있었지만, 다행히 웃음으로 마무리되어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작지만 포도농사를 지어볼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내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찍어 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열매를 더 많이 맺게 하려고 손질하신다.”(요한복음15:1,2)

농촌대학원

포도농사는 다른 농사에 비해 집약적인 측면이 있다. 특히 수확에서 그런데, 잘 갖추어진 저장 시설을 가지지 못한 친환경 생산자들은 더욱 그렇다. 수확적기에 신속하게 수확하고 포도의 신선도가 떨어지기 전에 곧바로 소지자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집중적으로 온 식구, 지인들까지 동원해서 상품화 작업에 매달려야 한다.
올 해 이 과정에서 내가 간과했던 몇 가지 문제를 재인식하게 되었다. 내 농사를 돕기에 현저히 취약한 건강상태를 가지신 어머니를 재발견하게 된 것이다. 서른다섯에 아직도 혼자라는 것도 어머니 문제만큼이나 두드러져 인식되어 왔다. 물론 일일이 거론 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긴 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이런 문제들이 불거지면서 선택의 때가 된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사실 최소 5년은 하고서 그 다음 거취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마음먹었었고, 그렇게 이야기 했었다. 그래야 어디 가서 명함이라도 내 밀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명분을 만들자는, 누군가를 의식해서 나온 것이라면 여기에 얽매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는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선택해야 할 일이라는 판단 섰다. 더욱이 내 안에 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교회, 어린이 사역에 대한 불을 살려보고도 싶었다. 그리고 함께할 동반자를 찾는 일도 무엇보다 중요한 목표이다. 여기 있으면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이 그 당시 최선이었듯이 어쩌면 이제 다시 최선 길을 나서보려고 한다. 하지만 농부를 놓지 않을 작정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 할 지도 모르지만, 정기적으로 오르내리며 부모님을 돕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계획이다. 내년에도 초보농부는 계속된다. 죽~

다른 친구들은 이제 대학원을 마쳐가고 있다. 설교, 상담, 영성, 선교... 그런데 나는 농촌대학원에서 농사를 전공으로 하여 수료를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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