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와 한국사회'라는 수업을 듣고 있다.
수업 방식은 수업에 들어오기 전에 읽을거리들을 읽고 질문 서너개를 교수님께 보낸다.
교수님을 그 질문들을 선별 분류해서 A4 한 장으로 만들어 오시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 질문들을 서로 나누며 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물로 배가 산으로 가지 않도록 교수님께서 교통 정리도 하시고, 중요한 것은 설명도 해 주신다.

문제는 내가 이런 수업에 익숙하지 않고,
인원도 적을 뿐더러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달하는 것도 훈련이 되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이 뭔지도 모를 때가 많은 것이 더 문제다.
이제까지 늘 많은 학생들과 배우면서 간헐적인 질문에 답변하는 정도 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지난 주와 오늘도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보려고 했으나 핀트가 어긋난 몇 마디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 수업 중에 알게 된 것은
내가 내 생각과 내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에 잡혀 있으면 다른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거다.
사실 이 말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얘기다.
내가 이래뵈도 인증받은 코치인데, 그정도 대화의 상식을 모를까?
하지만 실전에서는 망각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얘기가 끝나면 이 얘기를 해야지 하고 신경쓰고 있을 때 난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을 차렸다.
다음 수업부터는 내가 무슨 얘기를 해야지 하는 생각에 몰입되어 있지 말고
다른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지, 그 논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데 더 집중해야 겠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을 정리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일명 '경청'을 잘 하겠다는 거다.
내 것을 끄집어 내겠다는 집착에서 자유로와 져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우겠다는 자세를 갖겠다는 얘기다.

그러니 내가 정신이 들었다고 얘기하지 않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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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와 한국사회_민족담론의 스펙트럼(임지현) vs 상상의 민족주의 비판(신용하)


민족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봉건사회가 무너지면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일제강점기가 그 때이다.
국가를 상징했던 국왕이 없어지면서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민족이 된 것이다.

문제는 이 민족을 누가 얘기하느냐, 퍼뜨리느냐에 있다.
그들은 왜 민족을 중요한 이슈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민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수혜를 입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아무래도 해방이후에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기득권을 지키려는 범 보수진영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들은 민족이라는 두 글짜를 통해 끊임없이 권력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분류하고 걸러내는 작업을 해 왔다.

우리 나라는 좀 특별해서 민족과 국민이 일치하는 나라이다.
그래서 국가를 위해 민족을 동원하는 형세를 전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민족은 존재하는 것이며 차이 또한 있는 것인가?
왜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차별이 발생하고 있는가?
모든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진 않는다(동일성에 대한 착각!).
어떤 과정(개입, 정치 일 수도)을 거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쩌면 차별을 위해 차이를 찾아내는 것일 수도 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민족에 대한 이야기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많이 다르게 쓸 수 있다.
어떤 자료를 모으느냐에 따라 모든 논리가 가능한 상황이기도 하다.

마지막 질문인데, 한반도 밖에서의 민족주의는 무엇일까?
예를들어 재일동포들의 입장에서 민족은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
민족의 형성 세 유형
영-프 유형 :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부르조아의 견인
독-이 유형 : 신흥귀족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견인
                  만들었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의도적으로 더 강조(예술 작품 등에서)
슬라브 유형 : 일부 선각자들에 의한 민족주의 형성
                  민족국가 건설 노력, 해방투쟁  → 제 3세계 유형
※아래로 내려 올 수록 만들어진, 인위적, 감정적이고, 후진적이라 할 수 있다.

---------------------
내 생각 하나 더
단군신화 같은 경우에도 조선시대에는 별로 부각된 이야기가 아닌었는데
일제 강점기때 자신들의 고유성, 차별성을 찾아가는 선상에서 증폭된 것 같다.
그렇다면 기독교 역시 그런 의도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을까?
자신의 정체성을 보다 근원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찾고자 했던 시도가 아니었을까?
유대인들이 가졌던 선민의식 특히 출애굽의 사건을 해방과 연결시키고자 한 것이 아닌가.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은 유대민족의 하나님이면서 한민족의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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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님 강의 중

文脈
내가 갇혀 있는 문맥은 무엇인가?
그래서 어린이로 돌아가야 한다.
그들은 갇혀있지 않기에 문맥을 뛰어넘을 수 있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쓸모가 없어질까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인간이 쓸모가 있어야 하나?
인간이 쓸모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지 않은가?

脫井
자신이 갇혀 있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짧은 시선에 들어오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自己理由
자기이유는 곧 자유를 의미한다.
다시 갇히더라도 지식인은 정신적 자유를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의 기준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로부터의 기준, 이유로 사는 것이다.
(버섯 우화)

自尊
자기이유가 타인에게 거리낄 것이 없으면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힘든 삶을 견디는 조건은 물질이 아니라 자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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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아들이 길을 가고 있었다.
아들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고 싶었던 아빠는 길가에 자라고 있는 버섯을 발견했다.
이 때다 싶어서 아빠는 가지고 있는 막대기로 버섯을 가리키며 아들의 주의를 끌고 말했다.
"이 거 잘 봐봐. 독버섯이야. 먹을 수 없는 버섯이란다."

순식간에 독버섯이라는 말을 듣게 된 작은 버섯을 힘이 쭉 빠졌고,
정신을 못 차리고 쓰러질 지경이었다.
옆에 있던 친구 버섯이 그 버섯을 부축하곤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그 버섯을 위로하기 시작한다.
"아니야. 넌 독버섯이 아니야. 넌 버섯일 뿐이야."
그러나 이미 버섯은 삶에 대한 소망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독버섯이라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옆에서 위로하는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 버섯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 말을 던진다.
"그건 사람들이 하는 얘기일 뿐이야!"라고.

대학 새내기들을 위한 신영복 교수님의 강연 중 들은 우화


그렇다.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일 뿐 나와는 상관이 없다. 왜냐면 난 나니까.
그들의 평가로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이 아닌, 이미 나로서 나인 것이다.
난 그들이 세워놓은 기준에 합당 하냐 그렇지 않느냐로 평가 받을 대상이 아니다.
작은 버섯은 사람들이 세워놓은 식탁의 논리로 '독버섯'이 되었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얘기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존재 그 자체로 기뻐하신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어떤 기준에 부합하느냐, 어느 수준에 이르렀느냐가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사람들이 하는 얘기일 뿐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집중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자신을 혹사시키고 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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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정책론(1)_사회복지 정책이란?

수업 내용과는 좀 동떨어져 있지만
수업 중에 웃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이야기를 하고 싶다.

교수님께서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 하면서 '금수만도 못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럼 짐승은 존엄하지 않다는 얘기냐며 약간은 웃으라는 의도로 말씀하셨다.
학생들은 짐승도 존엄하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그런데 짐승은 그렇다 치고 정말 사람이 존엄할까?라는 의문으로 돌아왔다.
정말 인간이 존엄할까?

그건 사람이 하는 이야기인 것 같다.
다른 누군가가 해 준 이야기가 아니라 스스로를 향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머릿 속에 모든 사람이 존엄하지는 않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우리라는 틀, 즉 국가나 민족이라는 틀 안에 있을 때 그 사람은 존엄해 진다.
너를 지키는 것이 곧 나를 지키는 것이 되고, 다른 사람을 존엄하다고 해야 나도 존엄해지는 것이다.

다시 동물 얘기를 해 보면, 사람은 동물보다 심각하게 나약하다.
동물들은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생존의 방법을 터득한다.
인간이 고등하고 말하는 동물로 올 수록 그 적응 기간은 길어진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긴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나약하고 힘 없는 존재가 서로 뭉쳐서 힘을 합칠 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굴린 결과 스스로를 존엄하다는 명분을 내 걸고
자연과 여타 생명체를 지배하고 유린하는 정당성을 획득한 것이다.

종교는 어쩌면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위대한 '존엄'의 이론적 근거가 아닐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 놀라운 명제!
해탈을 통해 벗어 날 수 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의 존재일 것이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를 거의 신적 존재로까지 고양을 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불완전성을 부정하고 신적 세계에 접촉하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종교일 수도 있겠다.

암튼 사회복지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기에
좋게 보면 서로를 돌보고 이끌어 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어쩌면 이제는 국가(정부)라는 더 큰 힘에 의존되는 과정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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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와 한국 사회(1)_소수자 문제의 쟁점들

소수자란?

소수자 - 신체적 문화적 특징때문에 사회의 다른 성원에게 차별을 받으며,차별받는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 -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
소수자와 약자는 변경가능성의 여부로 구분될 수 있다.
소수자성은 본인의 생각 여부와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다.
다수자는 사회적 요인으로 약자가 될 수 있고, 소수자는 사회적 힘을 획득해서 강자가 될 수 있다.


소수자 문제

소수자가 사회적 부(자본주의 사회에서)를 획득하여 강자가 되었을 때는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그들이 약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문제가 되는 것 같다.
결국 소수자라는 연대의식이 강화되고 그 힘을 다수자들 아니 강자들을 향해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 약자라는 것 때문에 야기된 문제이지만 사회는 그들의 소수자성을 더 부각시키게 마련이다.
왜냐면 그것이 그 사회가 가진 그늘이라고 보기 보다는 그 소수자들의 특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몰아 붙이는 것이다.
만약 소수자들이 부와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을 때는 폭동 같은 부정적 방법이 아닌
로비같은 정치적 방법과 여론을 활용할 것이다.
결국 이런 채널들을 획득하지 못한 소수자들이 최악의 상황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소주자, 특히 인종적 소수자의 경우
한 나라에 정착을 할 때 국가가 그 나라의 일원이 되게 하기 위해 여러 절차들을 두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그들이 그 나라에 속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해 변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낙인이 문제이다.
그들을 자신의 국민으로 만들겠다는 어떤 절차가 아니라
그 나라에 들어오면 이미 그 나라가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나'가 확장된 '우리'와 다른 타자로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다.
피부 색이 다르든 사용하는 말이 다르든 문화가 다르든 같은 영역 안에 있을 때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민이 되고,
또 내가 다른 나라에 가면 또 그 나라의 국민이 되는 자연스러운 이동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이상적이긴 하지만 국적이라는 것 자체가 배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많은 잇따르는 어려움들이 있겠으나 국적이라는 국가주의를 해체하는 길밖에 없어 보인다.

소수자에게 부와 출세를 준다면!
일단 기득권 세력이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소수자가 출세하고 부를 획득하게 되면 또 소수자가 아닌 것으로 행세하게 되고
대다수의 소수자들이 처한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존재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
그의 어떠함(특히 유용함)을 가지고 분류하지 않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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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배

깨어살리/돌소리 2008. 12. 4. 10:10
빈 배

배로 강을 건너는데
빈 배 하나가 떠내려오다가
그 배에 부딪쳤습니다.
그 사람 성질이 급한 사람이지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떠내려오던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당장 소리치며
비켜 가지 못하겠느냐고 합니다.
한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결국 세 번째 소리치는데,
그 땐 반드시 욕설이 따르게 마련.
처음에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 와서 화를 내는 것은
처음에는 배가 비어 있었고
지금은 배가 채워져 있기 때문.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능히
그를 해하겠습니까?

[장자] 오강남 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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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시티의 어느 큰 시장 그늘진 한구석에 포타-라모라는 나이든 인디언이 있었다.
그는 자기 앞에 20줄의 양파를 매달아 놓고 있었다.
시카고에서 온 어떤 미국 사람이 다가와서 물었다.
“양파 한 줄에 얼마요?”
“10센트입니다.”
“두 줄은 얼마요?”
“20센트입니다.”
“세 줄에는 얼마요?”
“30센트.”
“세 줄을 사도 깎아 주지 않는군요. 세 줄을 25센트에 주실래요?”
“안 됩니다.”
“그럼, 스무 줄 전부는 얼마에 파시겠습니까?”
“나는 스무 줄 전부를 팔지는 않습니다.”
“안 판다니요? 당신은 여기에 양파를 팔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나는 내 삶을 살려고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합니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서라피(멕시코나 중남미에서 어깨걸이나 무릎덮개 등에 쓰는 색깔이 화려한 모포)를 좋아합니다. 나는 햇빛과 바람에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합니다. 나는 페드로와 루이스가 와서 ‘부에노스 디아스’라고 인사하고 담배를 태우며 자기 아이들이나 곡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런 것들이 내 삶입니다. 그것을 위해 나는 종일 여기 앉아서 스무 줄의 양파를 팝니다. 그러나 내가 내 모든 양파를 한 손님에게 다 팔아 버린다면, 나의 하루는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럼, 나는 내 사랑하는 것들을 잃게 되지요. 그러니 그런 일은 안 할 것입니다.”

『동물기』시튼

삯을 위해 일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삶을 위해 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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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날에 군대 폐지를 외치며 알몸시위를 한 강의석!

강의석은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유명해진 친구다.
이름만으로도 잘 알려진 기독교 사학에서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 덕분에 지금은 서울대 법대에 다닌다고 한다.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사회에 강의석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누가 어떤 말을 하면 그 말이 옳으냐, 지금 시대에서 할 수 있는 얘기냐를 따지며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켜버리는 풍토가 사라지고,
누구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 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것이 진정한 양심의 자유가 아닐까.
주눅이 들어서 제대로 의사표현도 못하고, 다수가 가는 길로만 조용히 가려는 것이 오늘 우리의 초상이 아닌가.
미덕이라는 이름으로 눈치 보며 숨죽이고 순응하며 말도 잘 못하고.

누군가 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말을 하는 것을 받아 줄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다수의 힘으로 소수의 의식을 죽이는 일이 없는 사회가 된다면 좋겠다.
또 그런 생각과 말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지도 말아야 겠고.
그래서 저렇게 알몸으로 군대를 없애라느니 쇼를 해도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누가 알몸으로 시위를 했다고 호들갑을 떨게 되지도 않겠지.
아직 그렇지 못하니 강의석이 이런 퍼포먼스로 자신의 존재를 전국적으로 알리고도 남는 것이다.
맞다 틀리다는 논의를 넘어서 자유롭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그려본다.
맞으면 어떻고, 또 틀리면 또 어떤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잴 수는 없는 것이니.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가 지금 옳다고 철통같이 믿고 있던 것들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될 수도 있는 것을.

그러니 우리 '아! 저 사람은 저런 생각을 하는 구나'라고 생각하며 별 일 아닌 듯 지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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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수가 더해 세월 가는 것을 잊고 옳다 그르다 의미를 따지는 일을 잊어버리게." 
장자(오강남 풀이) 130p

우린 학교에서 옳다(맞다) 그르다(틀리다)는 판단을 잘 해야 하는 것으로 배우면 자랐다.
이것을 잘 해야 명석한 사람이다.
당연히 성적하고도 관련이 있기에 그렇다.

언듯 숫자 놀음에서 덧셈이나 뺄셈 등을 할 때 답이 맞느냐 틀리느냐에 대해 정해진 답이 있다.
그러나 좀 더 인생을 살다보면 그것이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뺐지만 줄지 않고, 더했지만 늘어나지 않는 경우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보다 시야를 넓히다 못해 높이면 절대로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없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가진 생각, 관점을 누군가에게 관철시키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은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머물러 있음을 어찌하랴.
그러니 이 것 또한 존중해 주고, 나는 나 나름의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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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크게 깨어나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한 바탕의 큰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네."

장자(오강남 풀이) 126p

한바탕 큰 꿈을 꾸고 있다면
지금, 현재, 오늘을 어찌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인가?
되는 대로 살아가나?
최대한 자신이 살고 싶은 모습을 위해 살까?
어차피 이것도 저것도 꿈이라면 하고 싶은 일을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의 성패에 집착하지도 말아야지.
혹여 장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 역시 어리석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생각해 보면 어리석다는 판단 또한 꿈이 아닐까?

깰 것을 알고 살든 모르고 살든 그 자체도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꿈임으로 말이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한정된 기회, 가능성, 느낌, 감정들에 충실하려고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절대적 잣대는 분명히 없고, 상대적이라는 잣대 또한 꿈에 지나지 않으니 뭘 두려워 하고 눈치를 볼 것이 있겠는가?
그러니 스스로 깨닫고 자신의 길에 설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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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크로싱'이라는 영화가 개봉을 했을 거다.

다른 영화를 보러 갔다가 예고편을 봤는데, 그 짧은 영상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슬픔과 아픔을 함께 느꼈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류의 영화는 보고 싶지 않다.

왜냐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없었으면 하는 일들, 끔찍한 장면들이 실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아니 더 가까이 바로 이북 땅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 괴로운 것은 그런 일들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도 보잘것없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어제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영화배우 차인표씨의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뭐 그도 지금까지 이런 문제를 외면하고 살아왔던 것에 대한 반성과

또 그렇기에 출연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인터뷰를 했다.

그 가운데 출연을 결정하게 계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웃을 도우라는 것인데 대한민국의 기독교인으로서 창피했고 반성을 많이 했다.”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했던 한 명의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지난 삶이 부끄러웠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아니 귀감이 가는 삶이었다.

그와 그의 아내 신애라가 봉사활동과 입양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 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인터뷰 기사의 제목이다.

차인표, “대한민국 기독교인으로서 창피했다"

나는 이 제목을 보고 또 기독교인들이 무슨 사고를 쳤나 했다.

혹시 차인표가 용감하게 이명박 대통령이나 추부길 비서관을 언급하며 이런 말을 했나 하고 호기심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인터뷰 내용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닌 영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문제는 제목이 '기독교인'과 '창피'라는 두 단어의 조합이라는 것.

당연히 그 아래 댓글은 가관이다.

개독교니 뭐니 하면서 또 기사 내용과는 상관없는 기독교 비판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들은 민간으로는 가장 많은 지원을 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인지 알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것은 차인표 씨도 알고 있는 일일 것이다.


인터뷰를 했던 차인표 씨도 전혀 이런 반응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존에 대한 반성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 텐데 영 방향이 잘못 나간 것이리라.

그런데 어쩌랴 결과적으로 또다시 기독교에 한 방을 날리는 일이 되었으니.


그래서 궁금하다.

기자가 고의로 그런 제목을 붙였는지.

그렇다면 이건 차인표라도 나서서 수정을 요청해야 할 일이다.
(물론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크로싱이라는 영화에 순수한 맘으로 임하는 배우의 인터뷰를 그렇게 이용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이 신문사가 국민일보랑 같은 건물을 쓰는 것을 보면 서로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의도는 차인표가 영화에 출연하게 된 계기가 신앙의 발로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홍보하려고 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의도와 정 반대로 나간 것 같아 '왜 그러셨어요?'라고 이야기 해 주고 싶다.


그러나 만약 악의적으로 그런 제목을 붙였다면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일이다.
기독교가 이렇게까지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기도 하지만,
양식있는 기자가 전혀 상관없는 내용의 인터뷰 기사를 이용해서 속보이는 짓을 한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정중히 사과를 요청해야 할 일이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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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다른 측면의 이야기 이긴 하지만,

언론이 제목 하나 만으로도 사실을 얼마나 왜곡 할 수 있는 지를 똑똑히 보여준 것 같다.

독자들은 제목을 클릭해 들어가면서 어떤 댓글을 달 것인지 결정하고 들어 온 듯하다.


더불어 기독교가 사회에 비추어진 모습이 이렇게 최악이 돼버린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

현 대통령만큼이나 신뢰를 잃어 버렸으니 그 어떤 이야기를 하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아무리 목청껏 외쳐도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다.
그런데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상황임에도 여전히 몸은 따르지 않고 말만 앞서고 있으니.

너무 안일하게 지내온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아닐까.

교회를 위한 기독교가 아니라 사람(인류)을 위한 기독교가 되라는 부르심은 또 아닐까.


또,,, 너무 멀리 나오고 말았다.
해피엔딩이 아닐 것 같지만 '크로싱'은 꼭 봐야겠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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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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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미 찍고 왔다.
부재자 투표!

버스로 세 정거장 가서 200미터 더 걸어서 찍고 왔다.
차라리 스타벅스를 찍어서 국회로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스타벅스는 최소한 입점하는 지역과 어울리는 컨셉으로 매장을 꾸미고
가능한 고객에게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은 하니깐.
뭐 고객의 주머니를 털어 가기 위한 술책이긴 하지만.
맛있는 커피라도 맛보게 하니 그냥 봐 줄 수 있겠다.
사회환원을 쥐꼬리만큼도 하지 않았다고 며칠 전에 기사가 나긴 했지만,
국회의원들이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는 것에 비하면 피해는 훨씬 경미하다고 해야 할까.

암튼 경북 상주시 출마자 중에는 찍을 사람이 없었지만
비례대표를 찍기 위해 좀 먼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가서 찍고 왔다.
선거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행사였으면 좋겠는데, 갈수록 절망을 주니 답답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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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를 하니 이런 것도 주던데.
투표확인증-공공시설 2,000원 할인
좀 더 쓰지 2,000원이 뭐야!
환승할인 덕분에 교통비 900원 들었으니, 1,100원 남네.
명바기 아저씨 덕분에 900원 덕봤다고 감사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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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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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지하철에 신문을 들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신문을 펼치고 있으면 곁눈질로 힐끔거리며 보다가
신문을 다 본 후 선반에 올려놓으면 바로 가져다가 읽곤 했다.
친절한 사람들은 '보시겠냐?'고 하면서 주기도 했다.
그래서 신문을 다 읽고 선반에 두고 내리는 것은 또 다른 독자를 위한 배려였다.
그리니 신문을 지하철에 놓고 내리는 것은 미덕이기도 했다.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 손에손에 신문을 들고 있는 것이 요즘 풍경이다.
돈을 주지 않아도 공짜로 나누어주는 무가지들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의 수준에 대한 논의를 떠나서
신문을 다 보고 나서 선반 위에 놓고 내린다는 것이 문제이다.
간혹 신문을 못 가지고 온 사람들이 집어서 보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신문들은
선반에 쌓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신문을 누가 치우나?
일부 용돈 벌이는 하는 어르신들이 계시긴 하지만,
결국 청소하시는 분들이 치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지하철에 신문을 두고 내리는 것은 결코 미덕이 아니다. 쓰레기다.

자신이 가지고 들어 온 것을 왜 자신이 치우지 않는가?
자기가 들고 들어 온 것은 자기가 들고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자신이 벌인 일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 모습, 이것이 오늘의 도시인들의 모습이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똥 싸놓고 치우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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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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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글입니다. 생각하게 하는 면이 있어서. 또 김훈태님을 아주 잠깐 만났었습니다.)

초등학교 애국조회, 그 쓰라린 패배의 기억

참세상 | 기사입력 2007-06-29 12:09 

[맹세야, 경례야 안녕](9) - 군문초 교사 김훈태 님

김훈태(군문초)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맞는지 모르겠다. 국기에 대한 맹세. 곱씹어 볼수록 나치스럽다. 나는 태극기가 자랑스럽지 않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를 나의 조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슴이 아프지만, 사실이다. 정이 떨어졌다. 평택의 대추분교가 무너지던 날 나는 깨달았다. 대한민국은 '그들'의 나라라는 것을.

교직 4년차 되는 해에 나는 전담을 신청해 담임을 맡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구속 수감되었다. 전담을 택한 표면적인 이유는 대학원 진학이었지만 진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병역거부의 충격을 담임교사로서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고, 다른 하나는 애국조회로부터 달아나고 싶어서였다.

새로 부임한 교장은 운동장 조회를 유난히 좋아해서 월요일과 토요일마다 전교생을 운동장으로 불러내 훈화를 했다. 담임교사들은 아이들을 여자 한 줄, 남자 한 줄의 이열종대로 행진곡에 맞춰 데리고 나가 운동장의 정해진 줄에 세워야 했다. 그리고 앞으로 나란히, 차렷, 열중 쉬엇, 차렷의 부동자세로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를 하고 애국가를 부르도록 지도해야 했다.

이어지는 교장의 훈화는 대개 나라 사랑과 효도, 질서와 청결, 근면 따위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애국조회가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식민지 시절 일왕에게 바치던 일련의 조회 행위와 전혀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었다. 뜻있는 분들의 운동에 의해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애국조회를 비롯한 식민지 잔재는 전혀 청산되지 않았다. 나는 그게 절망스러웠다.

천황을 상징하는 히노마루에 경례를 하고 황국신민으로서 충성 맹세를 한 뒤 기미가요를 부르던 아이들은 교사가 되어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해방 조국의 아이들에게 저희들이 배웠던 것을 그대로 강요했다. 독재자를 위해서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런 일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우리가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에 저항감을 덜 갖는 이유는 저항적 민족주의 때문이 아니다. 보편화된 극일정서는 청산되지 못한 일제 잔재를 은폐하기 위한 가면일 뿐이다.

단지 우리의 주인이 일제에서 미제로 바뀌었을 뿐, 기존의 체제는 굳건하다. 식민지 교육은 여전한 것이어서 아이들은 국가교육이라는 새 이름 아래 식민화되고 있다. 우리의 근대는 우리 자신을 주인으로 키우지 않는 것이다. 근대가 꿈꾸었던 시민적 주체로서의 개인은 탈근대를 모색하는 현재에도 요원한 일이 되었다. 우리는 국가교육을 통해 주인의식을 국가에게 빼앗기고, 그 잘난 국가는 다시 미국에게 충성 맹세를 한다.

이라크 파병과 미군기지 평택이전과 한미FTA는 그러한 현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국민들 역시 자발적으로 영어를 미친 듯이(!) 배우고, 미국으로 유학가지 못해 안달이다. 잘못된 교육은 이렇듯 인민 전체를 병들게 한다.

일본에서 부활한 히노마루와 기미가요가 이슈화되기 전까지 우리의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 애국가는 너무나 당연해 전혀 문제될 게 없어 보였다.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이단이자 비(非)국민으로 치부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두 '대한민국교'의 신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나 불교 같은 종교는 그에 비하면 한 끗발 아래인 것으로 하느님과 부처님의 뜻에 따라 총 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여전히 쓰레기 치우듯 감옥으로 보내버리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개인적 신념에 따라 집총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이해받지 못할 수밖에.

이제 다시 내 얘기로 돌아가 본다면, 나는 미력하나마 저항했다. 국기에 대해 경례하지 않았고, 맹세하지도 않기 시작했다. 애국가도 부르지 않았다. 어느 날은 애국조회 시간에 아이들을 교실에 붙잡아 두기도 했다. 교무회의 시간에 교장과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설문지를 전 교직원에게 돌려 애국조회를 하지 말자고 선동도 했다. 아이들에게 토론도 시켜보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동교 교직원들은 뜻에는 공감했으나 움직여 주지는 않았다. 나는 지쳐갔다. 현실을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아이들조차 애국조회는 필요하다는 입장이 다수였다. 나는 내 뜻을 강요할 수 없었다. 전담교사를 선택한 것은 그래서였다. 차라리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 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나에겐 그것이 패배감으로 남아 있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는 국민 여론과 상관 없이 폐지돼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형제 폐지와 양심적 병역거부권 인정도 마찬가지이다. 국기법이 제정되면 이제 양심에 따라 국기에 대해 경례나 맹세를 하지 않는 사람을 처벌할 수 있다. 거꾸로 가는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교'를 믿지 않는데 왜 '그들'의 우상을 향해 경배하고 맹세해야 하는가?

우리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제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해서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권위에 순종하여 안정과 쾌락을 얻으라고 교육받았다. 처벌과 훈육을 통해 각인된 노예의식은 우리의 얼굴을 빼앗아갔다. 교육은 이런 게 아니다. 참된 교육은 스스로 주인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주인된 자만이 건강한 관계를 만들고 행복을 찾아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조국을 만들어야 한다. 새 조국의 건설에 동참하는 이, 부디 용기내길 바란다. 우리는 자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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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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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여름성경캠프가 끝났다.
지난 주일까지 2박3일...

이런 날이 올 줄 알면서도 왜 그리 안달을 했는지.
그러나 마치 캠프만 지나면 끝인 것처럼 뛰었지만,
막상 지나고 나니 동일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수정해 달라고 기다리는 월간 숲과나무 원고뭉치.
이런 저런 처리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
피곤이 몰려와 눈이 감기고 몸이 처져도 피씨 앞에 붙어 앉아 있어야 했다.

그래도 1년 중 가장 큰 행사를 치르고 난 다음이라
약간은 아주 약간은 행복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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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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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더 있으면 있을수록 더 확신이 드는 것이 있다.
교회에 그리스도인은 없고 교인만 있다는 것이다.
교회엔 그리스도인은 없고 목사, 장로, 권사, 집사만 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한 노력 또한 별로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목사의 모습, 장로의 모습, 권사의 모습, 집사의 모습에 충실하려 할 뿐이다.
자신이 집사이면 집사에 맞는 행동을
권사가 되면 권사의 행동을
장로가 되면 장로의 행동을
목사는 목사의 행동을 하기에 급급하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에 대한 고민보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장로로 보이느냐가 더 우선하는 것이다.

세상적 가치관을 조금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유지한 채
힘의 논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대로 뭔가 해 보려는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다.
배려도, 인내도, 사랑도 찾아보기 힘들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럴바엔 교회를 좀 쉬는 것이 더 낫지 않나.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으니 교회를 향한 비판도 당연해 보인다.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
외형으로 드러나는 교인의 모습에 비중을 두고 있으니 안타까움을 더한다.

지나친 비약일수도 있겠으나, 충분히 반성해 볼 일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나는 전도사 노릇에 집중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식과 삶에 집중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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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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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식물이 섞여서 자라면 병충해가 없으나
모여서 자라면 병이 나기 마련이다.
                                                    '먹기 싫은 음식이 병을 고친다' 임락경 지음  12쪽

상주 집에서 들려 온 소식.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셨던 기씨 아저씨가 백혈병에 걸려 입원하셨다는 것 하나.
우리 집 터를 관리하는 땅부자 황씨 아저씨가 또 암으로 입원하셨다는 것 둘.

65세에서 70세 전후의 어르신들이 힘없이 쓰러지신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데,
그 분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신 분들이라는 데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바로 농약이다.

보호장구 없이 살포할 때 자연스럽게 속에 축적된 농약들이 몸을 고장낸 것이다.
농약의 해로움이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요사이에도
마스크 하나도 쓰지 않고 아무렇지않게 약을 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 그 전에야 오죽 했을까.

보기좋은 먹거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뿌려온 농약이
그래서 보기 좋은 상품으로 돈을 벌게 해 준 그 농약이
농부의 생명을 갉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를 보기 좋게, 빨리, 크게, 대량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에 속지 말자.
그에 대한 대가를 누군가는 분명 치루어야 할 것이니.
혹시 모른다 우리 안에서도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지도.


학교라는 이름으로 생각없는 시민들을 대량으로 길러 내고,
교회라는 이름으로 겉만 번드르르하고, 말만 잘하는 신도들을 찍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들을 그 안에 빠져들도록 현혹시킨 거짓에 대한 대가를 누군가 분명 치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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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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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분류하는 기준 하나.

착한 사람
안 착한 사람

사람을 분류하는 기준 둘.

마음이 약한 사람
마음이 강한 사람

이 둘을 적용시키면 네가지 유형의 사람이 나온다.

착하고 마음이 강한 사람
착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
안 착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
안 착하고 마음이 강한 사람

물론 사람을 네가지로 나눈다는 것이 좀 웃기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관찰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착하고 착하지 않느냐의 기준은 이타적이냐 이기적이냐의 차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다른 사람을 중심으로 배려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착한 사람이다.

마음이 약한가 강한가는 구분은 어렵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 부탁을 할 때 거절을 잘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보면 알 수 있다.
감정에 이끌리기 보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알고, 그 일을 먼저 하는 사람이 마음이 강한 사람이다.
마음이 약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알면서도 그 일을 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 간다.

착하고 마음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한 일을 함에 있어 주도적으로 해나가는 사람이고,
착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은 유쾌하게 다른 사람을 위한 일을 하다가 결국 자기 일을 못하는 사람이다.
안 착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돕긴 하지만 마음 속에는 불평이 가득하다.
안 착하고 마음이 강한 사람은 주로 자신과 관련된 일을 선택하고 그 일만 한다.

대체적으로 앞의 두 유형의 사람은 좋은 평가를 받는데,
첫번째 사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지만 소수인 것 같다. 이 사람들은 같이 지내는 사람이 피곤할 정도록 철저하게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며 흔들림없이 사는 사람들이다.
두번째 사람은 사람들이 쉽게 보고, 마음대로 상대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면 거의 예스맨에 가깝기 때문이다.

네번째 유형의 사람은 당연히 인기가 없는 유형이다. 독선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모습을 드러내 놓고 사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세번째 유형의 사람인데,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이 유형에 속할 지도 모른다.
겉보기에는 착한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내부에서는 늘 갈등이 있다.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거절하지 못해 부탁을 들어주게 되니 말이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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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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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출퇴근을 할 때 버스를 이용한다.
그러다 보니 버스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물론 사람에 대한 생각이 주를 이룬다.

버스전용차로제가 시행되면서 차도 가운데 버스 승강장이 설치되었다.
그 승강장에 버스가 많이 서봐야 세네 대 정도 설 수 있다.
그래서 버스가 들어 올 때 먼저 들어 온 버스는 당연히 앞 쪽으로 가서 서 주어야 한다.
만약 초입에 서거나, 중간에 서 버리면 들어오는 버스들이 문도 열지 못하고 줄줄이 서서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버스가 들어 올 때 몇 번째로 들어 오느냐에 따라서 적당한 곳에 서 있는 것도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센스 중 하나이다.

그런데 가끔 볼 수 있는 광경이 있는데,
특히 나이가 좀 드신 아주머니들이 핸드백을 아래위로 열심히 흔들면서
자신이 선 곳에 버스가 서라고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버스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사람에 맞추어 정차 할 수 없다.
그러니 첫 번째로 들어온 버스일 경우에는 한 참 더 앞쪽으로 가서 설 수밖에 없다.

자신이 선 곳에 버스가 서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갖는 생각이다.
하지만 버스는 내가 선 곳에 설 수 없을 때가 더 많다.
버스는 버스가 서야 할 곳에 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생각한 대로, 내가 계획 세운 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얘기와 같다.
정한 때가 되었을 때, 때가 찼을 때, 나름의 원칙에 따라,
하나님께서 이미 부여하신 질서에 따라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조급하게,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조작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질 일을
울고불고 자신이 선 자리에 세우려 하는 것이 또 우리의 기도는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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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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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차례 어머니께서 올라오신다.
뭐 어머니는 청소도 해 주시고, 밑반찬도 만들어 주신다고 올라오시지만,
아들들은 그 마음을 잘 몰라주는 것이 사실이다.
자유롭게 지내다가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게 되니.

아무튼 가장 큰 차이는 잘 먹지 못하던 아침을 먹게 되는 거다.
또 밖에서 먹고 들어가던 저녁도 집에서 먹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희안한 것은 어머니께서 차려주시는 밥이 맛이 없다는 거다.
오히려 내가 해 먹었던 밥이나 국이 더 맛있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만든 음식이 정말 더 맛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착각이었다.

내가 집에서 밥을 차려 먹을 때는 배가 고플 때이다.
그래서 배고픔을 참으며 헐래벌떡 음식을 만들어 상을 차린다.
그러니 당연히 '시장'이라는 반찬을 놓고 먹는 것이니 당연히 맛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차려주시는 상은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먹기 싫을 때 먹게 된다.
먹기 싫으니 당연히 맛도 없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먹기 싫을 때가 먹어야 할 때가 아닐까?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먹기 싫어도 정해진 때에 식사해야 한다.

내가 먹고 싶을 때, 내가 하고 싶을 때만 뭔가를 한다면
즐거울 수는 있겠지만 더 길게 보면 나에게 해로운 것일 수 있다.
입맛이 없어도 규칙적으로 거르지 않고 밥을 먹는 것이 건강을 지켜주듯이
하기 싫어도 규칙적으로 나를 갈고 닦는 일을 빼먹지 않는 것이 나의 실력을 키워 줄 것이다.

입맛이 없어도 맛없다고 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먹는 것이 몸에도 좋고
어머니께도 효도하는 길이다.
나를 갈고 닦는 일도 하기 싫을 때도 기꺼운 마음으로 할 때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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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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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집단 속에서 이루려고 하는 목표를 위해
그 목표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시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면서
정작 그 집단 안에는 자유도 민주도 없는 것이다.
거의 공산당을 방불케 한다.

개인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외치면서
내부에서는 획일적 가치를 주입하고, 강요하기까지 한다.
이율배반이다.

사학법의 재개정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를 떠나서
기독교 학교가 가진 나름대로의 목적, 가치를 지켜내려는 시도 가운데
목회자들이 삭발을 했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유명한 교회의 유명한 목사님들에서 총회장님까지
장삼만 걸치면 스님이라 할만한 모습을 하셨다.
여기까지야 뭐 당신들의 이해관계도 있으시고, 정치적인 차원도 있고, 상징적인 위치도 있고, 또 교인들을 위한 메시지 차원에서 '그렇게 까지...'라고 넘길만 한데,
급기야 당신들이 목회하는 교회 전임교역자들을 삭발케 했다는 소식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당신들 혼자 깎고 다니니 외로우셨나? 억울하셨나?
혹 그 안에 삭발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사학법 재개정에 대한
투철한 의식을 가진 이도 있었을 것이지만
내 소견으로는 대부분은 삭발까지 하는 데까지 동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별 관심이 없다고 해야 맞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는 폭력이고, 인권유린이다.
삭발을 한 부교역자들 중 누구도 인권위원회에 제소할 사람도 없고,
물론 끌려가서 삭발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찍소리'도 못하고 깎으라니 깎은 사람들의 심정이란 어땠을까.

소신도 없이 시키는 데로 하냐고 비난 할 수도 있으나,
생각해 보면 그들은 결정적으로 약자일수밖에 없다는데서 한숨을 지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해 가는 일들이 대충 이렇다.
자유, 사랑, 평화를 내 걸고 있지만
삶의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가깝게 아내에게, 자녀에게 물리적인 것까지는 아닐지라도
폭력적이고 일방통행적이다.

그것이 크던 작던 가시적이든 그렇지 않든
힘은 어디로든 흐르게 되어 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힘이 힘 없는 자들을 위해 사용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힘 없는 자들이 조금이라도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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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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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한다는 것은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고,
게으름은 일이 눈에 보여도 모른척하고 버티는 것이다.

도시 생활에서는 부지런함이나 게으름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면 한 개인이 하는 일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자기가 맡은 일을 하면 되고, 집에서도 왠만한 일은 기술자에게 맡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정말 전문적이고, 규모가 큰 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일을 손수 해야 한다.
그러니 집 안팎에서 찾아서 하지 않으면 일들이 고스란히 방치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농촌의 생활에서 부지런함은 더욱 중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요즘의 도시, 젊은이들의 문화는 게으름의 문화이다.
귀차니즘이라고 표현되기도 하는 것 같은데.
아무튼 게으름의 문화는 무관심의 문화라 할 수 있다.
역으로 자신이 관심이 있는 부분에는 집요할 정도로 집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연한 게으름의 문화가 매니아와 일부의 전문가를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이로인해 삶의 영역이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오늘도 부지런한 하루를 그려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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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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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는 쓰레기 내 놓는 날이 월, 수, 금으로 정해져 있다.
밤 8시부터 자정까지 가져다 두고 아침에 보면 감쪽같이 치워져 있다.
때로 새벽에 시끌벌적하게 들리는 소리가 쓰레기 치워가는 소리였던 것 같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에서 거의 예외 없이 배출하는 쓰레기들을 빠짐없이 치워가는 것도 놀랍고,
또 그 많은 양의 쓰레기들을 가져갈 곳이 있다는 데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사람이 생활하면서 쓰레기가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이 뭔가 꺼림직 하다.

일단 버려질 것들로 구분되면 종량제 봉투에 꽉꽉 담겨서는 집 밖으로 벼려진다.
몇 가지만 잘 구분해서 내 놓으면 된다.
그런데 이제부터가 문제다.
그 쓰레기가 어떻게 수거되어 어리로 가서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수세식 화장실도 그러하거니와 쓰레기 처리도 사람들의 무책임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것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처리되어 자연을 파괴하는 지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필요도 없고,
만약 신경을 쓴다면 괜한 에너지를 낭비한다고 비웃음을 살 뿐이다.

쓰레기도 갈 곳을 잘만 구분해 주면 거름도 되고, 자원도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놈들을 한 곳에 모으면 그 때부터는 쓰레기가 되고, 독이 된다.
그러니 사회적 비용을 비불해서 격리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리고 있는 편리함, 청결함 등이
얼마나 단편적인 자기위안인지, 아전인수 격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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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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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생활이 어때, 좋아?'

농촌에서 오래 머물다 올라온 사람에게 하면 좋을 만한 질문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질문하는 분들의 성의를 봐서 대답을 하려고 하지만
뭐 딱히 분명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좋은 점도 있고, 안 좋은 점도 있다.

여유로움에 있어서는 단연 농촌에서의 생활이 좋다.
농사의 일정을 내가 임의대로 앞당기거나 미룰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기다려야 하는 때에는 한껏 여유를 부릴 수 있다.
누군가가 정해 준 스케줄을 따라 뛰어 다닐 필요도 없고,
비가 오면 비를 느끼고, 눈이 오면 눈을 느끼면 된다.

서울에서는 답답해서 좀 밖에 나가서 앉아 있고 싶어도 그럴 만한 곳도 없다.
농촌에서는 논둑이나 개울가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바람도 맞고, 풀냄새도 맡을 수 있는 곳이 널려 있는데.

하는 일을 떠나서 생활적인 측면에서만 놓고 보면 농촌이 좋은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어찌 비교를 할 수 있을까?

서울 생활이 어떠냐는 질문에 대답은
'장단점이 있어요.'라고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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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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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끊었다기 보다는
거처를 옮기면서 새로 연결하지 않은 것이다.
요즘에는 어디든 가면 컴퓨터가 있고, 인터넷을 손쉽게 할 수 있으니
집에서 연결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인터넷을 끊었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일단 집에서라도 안 하니 달라지는 것이 많다.
시간 여유가 생겨서 다른 데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다.
책을 좀 더 보게 되는 것도 그 결과 중 하나 일까?

아무튼 요즘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빠져있다.
거의 중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아무 목적의식이 없으면서도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들어가서
여기저기 영양가 없는 글, 이미지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홈페이지, 싸이, 블로그들을 돌아다니며 기웃거리기나 하고...

다른 사람 얘기가 아니라 내 얘기지만
아무튼 컴퓨터, 인터넷, 블로그 이런 것들에서 좀 떨어져서 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가끔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와서 글 남기고 소식도 들여다 보고
좀 더 여유로움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뭐 꼭 그렇게 될 거란 보장은 없다.

보름 넘게 인터넷을 놓고 사니 좀 멍하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괜찮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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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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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연기자들이 쇼프로에 나와서 인생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하는 것을 보면서
조금은 가소롭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들이 살았으면 얼마나 살았다고 함부로 삶을 논할 수 있어?'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생각이 바꿨다.
그들은 이름하여 연기자들이다.
일정기간을 자신과 전혀 다른 어떤 사람을 연기한다.
경찰도 될 수 있고, 강도도 될 수 있고, 사장도 됐다가 길거리의 불량배도 되었다가,
유학생도 되고, 농부도 되고, 택시 기사도 되는 거다.
물론 한시적이고 '연기'이긴 하지만
최소한 그들의 삶을 경험해 봤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사람의 삶', '살아감'에 대한 시야가 조금은 더 넓어지지 않았을까?

때때로 내가 누군가를 판단하는 근거는 바로 나의 경험일 수밖에 없다.
기껏해봐야 삼십대 중반의 삶의 연륜으로,
그것도 학생, 학생, 교육전도사 정도의 삶을 기반으로 하는
물론 부모님도 보았고,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쌓아놓은 견해가 있긴 하지만
그것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담아 낼 수 있을까.
마치 뭔가를 통달한 척 설교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사람들에게 다가갈까.

어설프긴 하지만 농부로 약 2년을 채워 오고 있다.
그래서 정말 쪼금은 농부에 대해 알 것 같다.
하지만 솔직히 모르는 것이 더 많다.
그래서 농부가 어쩌니 저쩌니 하는 얘기는 하지 않아야 할 것 같다.
할 수 있다면 나에 대한 이야기들 뿐...

어제는 포도주 병을 군포에 있는 두산공장에서 실어왔다.
1톤 포터트럭에 4단으로 가득 싣고 오는데 솔직히 겁나는 일이었다.
트럭을 몰고 다니기는 했지만 그렇게 짐을 온전히 실어 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온갖 모양의 병들이 쌓여 있는 공장에서 매일 끊임없이 들어오는 화물차들에 병을 올려주는 아저씨들을 만났다.
어리버리한 트럭기사에게 친절하게 대해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왜냐면 처음 가본 곳이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모르면 바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다른 세상, 인생들을 만나고 온 거다.
뭘 더 그곳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시점에서...

말하려 하기 보다 겸손히 듣는 것이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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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지어보는 포도농사...
나에게 적당한 포도밭을 찾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물론 적당하다는 것 자체가 지극히 내 기준에서의 이야기였다.
동네 분들은 최소한 1000평 이상은 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시고,
현실적으로도 1000평 아래의 밭이 그리 많지도 않았다.
그래서 거의 마지막까지 버티며 밭이 나서지 않으면 안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뒷집 형의 소개로 정말 440평정도 되는 아주 작은 밭을 빌릴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아래 있는 2000평 되는 밭에 비하면 포도나무 340그루가 심긴 정말 작은 밭이었다.
더구나 관리가 잘 안된 탓에 곳곳에 죽은 나무들이 있었고,
지지대들도 썩어서 부러져 있는 곳도 많았다.
하긴 한다고 해놓고 포도밭에 앉아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한심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래도 향유 아빠는 다 그런 밭으로 시작하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때가 되면 별 차이가 없다고 말이다.
그런 말에 위안을 삼으며 또 아버지의 열심으로 모든 나무에 껍질을 벗기게 되면서 조금은 자리를 잡은 것 같다.
하지만 움이 트는 것도 늦고, 적당한 간격으로 나오지도 않는 순들을 보면서 한숨이 멈추질 않았다.
친구가 가르쳐 주는 스케줄에 따라 비료를 뿌리고,
약(친환경 재제)도 치면서 여전히 미숙아처럼 보이는 순들을 보며 가슴을 조려야 했다.

포도 농사를 지면 세 번 울고 세 번 웃는다는데 언제 웃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때가 되었는데도 가지가 얇아서 열매를 버텨낼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정해진 일정에 따라 송이를 솎아 주고, 알도 솎아 주었다.
기특하게 맺어준 열매들을 빠짐없이 봉투로 싸 주었다.
그리고 두어 달이 흘렀다.

그런데...

있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포도들이 글쎄
까맣게 익은 것은 기본이고, 상품이 될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것이었다.
사실 수확하기 며칠 전부터는 정말 될까 하는 생각에 포도밭에 가는 것 자체가 두려웠었다.
그런데 이렇게 익어 줄 줄이야.
물론 일반적인 기준에서 봤을 때는 송이도 작고 알도 작아 보일 수도 있었지만
내 기준으로 봤을 때는 충분히 만족스럽다 못해 감사 그 자체였다.

웃을 차례가 된 것일까?
수확하고 손질하는 과정이 고된 시간들이었지만 내가 농사지은 생산물을,
그것도 포도를 누군가에게 전한다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제는 비가 온다는 소식에 밭에 깔아 두었던 비닐을 거뒀다.
변변찮은 주인을 만나 칭찬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고생만 한 포도나무들이 시원한 물을 충분히 머금기를 소원하면서 말이다.

그들이 내게 베풀어준 은혜로 아직도 우리집 식탁에서는 포도가 끊이지 않는다.
세 번 울고, 일곱 번 웃는다고 해야 할까?

200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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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깨어살리/돌소리 2006. 10. 26. 21:59
지난해에는 뭐가 뭔지 잘 모르고 이런저런 결정을 했었다.
조금 과장을 한다면 땅을 치고 후회한 경우가 감나무와 관련된 경우였다.
사실 감나무가 집터에 많다는 것을 큰 매력으로 여겼으면서도,
정작 그것이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림조차 그리지 못하고,
빨리 익어 버린 감들을 탓하며 네 그루나 상인에게 팔아버렸다.
그리곤 남은 나무에서 감을 따고 깎아 곶감으로 만들고 나서야 후회 했다.
그래서 올 해 들어서는 우리 감나무는 말 할 것도 없고, 이웃의 감나무까지 임대해 버렸다.
거국적으로 곶감사업을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올 해 감 농사가 흉작인데다, 우리 것들은 벌레들까지 기승을 부려서 거의 지리멸렬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바라만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가만 두면 모두 홍시가 되어 떨어질 판이어서 다른 집들보다 좀 일찍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네 그루에서 감을 따고 깎았다.
작년에는 전부 해서 700개 정도 깎았던 것 같은데,
올 해는 한 번 깎은 것이 벌써 1,200개다.
이렇게 세 번 정도 더 해야 할 것 같다.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양에서는 우리 수준에는 만만치 않은 것이다.
만약 작년 수준으로 열었다면 우리 식구가 감당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감나무를 보며 걱정하는 어머니께 수차 말씀드렸던 것처럼 '주신 대로' 하는 것이 농사가 아닐지...
지금까지의 걱정은 기우였고, 우리 손에 들려진 것이 우리에게 ‘적당히’ 주신 것이리라.

200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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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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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오후 교회 컴퓨터 앞에서 고민하며 작성해 본 글이다. 포도박스를 열었을 때 이 글을 보면 포도맛이 더 나지 않을지...)

참(Charm)포도이야기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요한복음 15:1,2

초봄, 황량하기 짝이 없었던 작은 포도밭을 처음 만났을 땐
이 곳에서 포도가 재대로 나올까 싶었습니다.
저의 어리석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포도나무는 움이 트고, 가지가 자라고,
잎이 나고, 꽃이 피더니 예외 없이 열매들을 매 달았습니다.
물론 나무들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었지만,
주렁주렁 달린 포도송이들의 모습이 대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하늘이 허락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보석들을 낼 수 있었겠습니까?
서툰 손길로 포도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순을 정리하고, 곁순을 지르고,
적심을 하고, 송이와 알을 속고, 몇 차례 보르도액을 치는 일들은
제가 할 수 있는 너무도 작은 일에 불과 했습니다.

이제 그 열매를 거두어 누군가에게 전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앞섭니다.
믿고 선뜻 주문해 주신 그 따듯한 마음에 감사한 마음이지만,
혹여 저로 인해 다른 농부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그럼에도 이 몸짓이 생명살림의 작지만 큰 발걸음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수확의 때에 친환경적인 재배방식을 가르쳐 준 큰 길벗인 향유네 박종관 김현 부부에게 전적인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포도밭을 소개해 준 뒷집 차창식 형님,
관심 가져 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황간포도원 임영진 형님,
그 밖에 마음으로 함께하며 힘이 되어 주신 벗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200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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