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운동본부에서 계간으로 발행하는 귀농통문의 원고요청이 있어서 작성한 글이다. 지나서 다시 보니 정말 못썼다는 생각이 든다. 잘 써지지 않는 글을 억지로 썼더니만...)

이제 겨우 2년차에 들어서는 초보농사꾼인지라 여전히 소개할 때 농부라고 하는 것이 어색합니다. ‘농(農)’자에 서툰 초보이기 때문입니다. 내려오기 전에야 이런저런 말을 많이 했었지만, 말이 쉽지 생각했던 것들을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디 만만한 일인가요. 그래서 ‘농촌에 사는 거죠’라고 말한답니다. 아직 제 땅이라고는 한 평도 없이 남의 땅에 우리 먹고 조금 나눠먹을 만큼의 몇 가지 작물들을 재배하고 있을 뿐이고, 올해 들어서 조그만 포도밭을 하는 정도니 말입니다. 그래도 농촌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가졌던 작은 소망들이 이루어져 가는 곳이 바로 이곳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신흥리입니다.
상주로 내려오게 된 결정적 계기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귀농학교를 마치고 참석하게 된 귀농인의 날(2004년)에 연락이 끊겼던 친구(향유아빠)를 거의 십여 년 만에 재회한 것입니다. 고3 수험생의 시기를 같이 보냈고, 20대 초반의 고민들을 조금이나마 함께 했었던 친구를 귀농인의 날에 만나다니, 그리고 그 친구가 귀농학교 4기에 귀농 7년차의 대선배라니. 그래서 당연히 친구네 집에 놀러 가게 되었고, 마을을 둘러보다가 눌러 앉아 버렸습니다.
친구의 도움이 전제되었음에도 삶의 터전을 새로 만들어 가는 일은 만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몇 가지 요인들 때문인지 마을에 정착해가는 과정이 생각보다는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지상권만 산 것이지만 집을 구입한 것이 동네 분들에게는 인상 깊게 여겨진 것 같습니다. 원래는 꽤 오랫동안 비어있던 집으로 수리해서 들어가려 했는데, 수리비가 너무 많이 들어 갈 것 같아 그 집 바로 옆에 있는 할머니가 자식들 집에 오가며 닫혀 있었던 집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특별히 외지인에게 배타적이지 않은 분위기 탓도 있었지만, 집을 샀다는 얘기에 동네 분들은 ‘우리 동네 사람 됐네’하시며 반겨하셨습니다. 그리고 저 혼자 내려오지 않고 부모님과 함께 내려 온 것도 안정적으로 보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어머니께서 마을에 속한 교회에 출석하신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 가족의 존재가 더 넓게 공인되었으니까요. 요즘도 가만히 앉아 생각해 보면 우리 가족이 마을의 일원으로 별 갈등 없이 살고 있다는 것에 놀랄 때가 있을 정도입니다.

-초보농부 이야기
귀농 첫 해 농사는 집 주변의 70여 평의 텃밭과 ‘잡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에 700여 평의 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천 평이 넘는 밭이었지만 쟁기질하고 갈고 하는 것은 삯을 주고 트랙터로 한 나절 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돌아서면 자라기 시작하는 풀을 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지라 700여 평으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정말 농사는 풀매기라더니, 풀 뽑는 일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로터리 치고 얼마 가지 않아서 잔디를 깔아 놓은 것처럼 되더니 금세 무성하게 자라버렸습니다. 하여간 풀 뽑는 일 정말 진하게 경험했습니다. 덕분에 1년 만에 아버지는 풀 뽑는 전문가(?)가 되셨고, 동네에서는 풀 약 안치고 생으로 풀매며 농사짓는다고 소문이 확 돌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해서 생산한 것들을 비싼 값에 팔아서 고소득을 올린다고 이야기들 하신다는데, 솔직히 콩과 들깨 몇 말 팔아서 생계가 되었을까요?
아무튼 1년 정도 지내면서 동네 분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얘기는 ‘무엇으로 먹고 사냐?’는 것이었습니다. 말뜻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것이죠. 밭농사 800평은 그 분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즉, 수익 작물인 포도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두 번째 해가 되는 올 해에는 포도농사를 지어 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내려오면서부터 하려고 했었지만 막상 엄두도 안 나고, 소개받은 포도밭이 차가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하지 않기로 했었습니다. 올 해는 저에게 적당한 크기(5,600평)의 포도밭을 구하려고 했는데 막상 괜찮은 것이 나서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안쓰럽게 생각했는지 뒷집 사는 형님이 자신이 부치던 밭 중에 500평 조금 못되는 밭을 해보라고 선뜻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상황이 아닌지라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향유네 포도밭을 표본 삼아, 향유아빠가 뭐하나 살펴 가며 포도농사의 걸음마를 시작했습니다. ‘향유포도’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나름대로 ‘참(charm)포도’라는 브랜드도 만들었습니다. 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저농약인증도 받았지만 올해 생산되는 포도는 아름아름 지인들에게 판매할 정도 될 것 같아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고 있습니다.
농사 규모가 크던 작던 필요한 것은 똑같았습니다. 특히 경운기는 필수 중에 필수였습니다. 남의 손 안 빌리고 밭을 갈고 로터리 치고 싶었고, 포도나무와 감나무에 약도 쳐야 했기에 중고로 경운기도 덜컥 들여 놓아 버렸습니다. 막연하게 굉장히 위험한 농기계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주저되기도 했지만 막상 들여 놓고 이리저리 만져보니 나름대로 참 유용한 기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들긴 하지만 남들 하는 것 따라 대부분을 손수 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옆집 할아버지 밭도 넉넉하게 갈아드렸으니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관리기 끌고 오셨던 이웃 아저씨는 ‘처음 하는 거 아닌가?’하시며 제법 한다고 한마디 거드실 정도였습니다.
감나무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지난해에는 감을 딸 때까지도 감이 가져다 줄 수익을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니 일부를 장사꾼에게 팔아버렸죠. 깎아서 매달아 둔 것들이 곶감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야 그 가치를 알게 된 거죠. 곶감도 충분히 장사가 되겠다고요. 그래서 올해는 봄부터 감나무에 마음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집 주변으로 있는 나무가 열 그루가 넘게 있고, 옆집 할아버지네 감나무 네 그루도 임대했고, 잘 키워서 곶감장사를 해보려고 합니다.
포도도 좋고, 감도 좋지만 사실 농촌에 사는 맛은 이것저것 좋아하는 것들을 심어보고,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 아닐까요. 텃밭에 오이, 감자, 옥수수, 토마토, 땅콩 등을 심어 놓고 조금이지만 수확의 기쁨을 얻었고, 올 해에는 수수, 녹두도 심어 보았습니다. 이런 다양한 것들을 심어 키워가는 과정이 농부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양다리 걸친 농부지만
그래도 여전히 직업을 쓰는 난이 있을 때 뭐라 쓸까 고민합니다. 농사만 지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라면 주저 없이 농부라고 쓰겠지만 지금 저의 삶의 중요한 일부가 교회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소위 ‘교육전도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 경제적 필요를 이 사역(ministry)을 통해서 채우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를 하게 될 때는 ‘난 양다리 걸치고 있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부모님이나 저나 축적해 놓은 자본이 없기에 서툰 농사만 바라보고 몇 년을 살 수는 없기에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필연이고,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고, 일면 소명을 갖고 있는 일이기에 지속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몸이 왔다갔다하는 것처럼 때때로 마음도 두 곳을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외형적으로는 농부를 닮아가고 있지만 제 속에서 꿈틀대는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은 저를 틀 지우는 것들에 대한 저항의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도시에서의 삶, 그리고 나에게 요구되는 것들에 대한 일말의 항변을 하며 떠나오긴 했는데, 그래서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그리고 있었는데, 농촌은 농촌 나름대로의 틀이 있고, 농부다움이라는 저변에 깔려 있는 의식들이 어깨를 누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농부의 상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기운이 저를 감싸는 것입니다. 어쩌면 가족관계, 물질에 대한 의존,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성공에 대한 가치 등은 그대로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노골적이기까지 해 보입니다. 그러니 삶이란 도시든 농촌이든 같은 것이고, 결국은 환경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농촌은 충분히 좋고 매력적인 곳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시절을 따라 심고 가꾸고 거둠이 있고, 예전보다는 줄어들긴 했지만 생명의 순환이 있고, 무엇보다 땀 흘려 애쓰지만 결국 하늘을 바라 볼 수밖에 없는 삶의 마디들이 있는 곳이 이 곳 농촌이니까요. 그러기에 이런저런 고민들을 찾잔 속의 태풍으로 여기며 오늘도 감사와 기쁨으로 미완의 그림인 귀농의 한 부분을 그려가고 있습니다.

돌소리는
귀농학교 31기로 2005년 2월에 경북 상주로 귀농하여 교회사역을 겸하며 부모님과 함께 포도와 감 등을 주 작목으로 재배하고 있는 초보농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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