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지도자(성직자)가 죽는, 아니 죽어야 하는 종교다.
위세를 얻고 섬김을 받는 자리에 앉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가 아니다.
대접을 받고, 권세를 얻고, 마음껏 누리고 사는 것은 그저 종교인일 뿐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다.
이는 카톨릭이나 정교회나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범기독교 집단들의 가장 큰 오류는 지도자가 죽지 않으려하는 것이다.
지도자의 위치가 공고해지면 공고해 질 수록 진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진리는 죽음으로 살아나는 것이니까.

예수가 만든 최초의 공동체 안에 예수는 죽었다.
그가 선택한 제자의 손에 의해.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전을 받고 죽음으로 말하는 것.
예수의 제자는 또다시 자신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동체 안에서 가장 먼저 죽는 사람이다.
그렇게 죽어갈 때 그 모임은 진리를 지켜낼 수 있다.
죽지 않으면 사람이 남을 뿐이다.

죽지 않는 기독교,
그러므로 진리에서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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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받는 중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초심 학인 시절, 어른 스님으로부터 늘 듣던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그런 중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칠십, 팔십 노인분들로부터 절을 받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 이상은 자신이 없습니다.
 
환경운동이나 NGO단체에 관여하면서
모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비록 정치권력과 대척점에 서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하나의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원력이라고 말하기에는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을 보면서 제 자신의 문제가 더욱 명료해졌습니다.
'한 생각'에 몸을 던져 생멸을 아우르는 모습에서,
지금의 제 모습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제 자신의 생사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살면 제 인생이 너무 불쌍할 것 같습니다.
대접받는 중노릇 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적인 삶을 이어갈 자신이 없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납니다.
조계종 승적도 내려놓습니다.
제게 돌아올 비난과 비판, 실망, 원망 모두를 약으로 삼겠습니다.
 
번다했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어느 따뜻한 겨울,
바위 옆에서 졸다 죽고 싶습니다.
 
2010년 6월 14일
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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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받는 종(목사)노릇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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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모습이 가장 예쁘고 사랑스러울 때.
누구나 이런 때가 있었을 거다.
그러나 이젠 언제 그런 때가 있었는 지도 까맣게 잊고
뭔가를 해야만 사랑받는다며 치열한 일상을 살고 있다.
어쩌면 그리 노력하지 않아도 될지 모르는데도.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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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광장 사용을 늦게 허가해서 그런 것인지
주 행사는 부산에서 이루어지고 서울광장은 모니터로 시청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물론 서울에서도 곽노현 교수가 나와서 한 말씀하시고, 나중에는 한명숙 시장 후보도 나왔다는데
나는 중간에 와서 정확히는 모르겠다.

암튼 벌써 1년이 지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고
사회가 별로 나아지지 않은 것 같아 더 마음이 아프다.
누구의 책임이랄 것도 없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 함께 짊어지고 고통스러워 해야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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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 본문이 계속 예레미야다.
'생명의 삶'이 예레미야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내내 어둡고, 결말 역시 마찬가지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이기 때문이다.

부활절 후 성령강림절까지 기쁨의 50일에 왜 이 본문을 선택했는지 의아스럽지만,
예레미야를 읽으며 선지자 혹은 예언자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설교준비를 하며 써 보았던 예언자에 대한 생각들이다.

예언자의 설교(예언)는 듣기 거북하다.
예언자의 호소는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지 말고 생각하라고 한다. 그래서...
예언자는 기존 권위에 도전한다.
예언자는 전통이나 율법의 길과 다르다.
예언자는 평화(잘 되고 있다고)를 말하지 않는다.
예언자는 다수의 편에 서지 않는다.
예언자는 자신이 한 말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예레미야의 슬픔).

예언자의 삶은 편하지 않다. 그래서...
예언자는 고통 가운데 있지, 편함이나 안락과는 거리가 멀다.
예언자는 온전히 하나님을 뜻을 담아내는 그릇이다(때때로 의지나 욕구가 없어 보인다).
예언자는 공과 사가 따로 없이 온전히 예언을 위해 사용된다(결혼, 가족생활, 의식주 등).

신학대학을 다닐 때 학교를 일러 '선지동산'이라고 했다.
다른 신학교에 가 보니 거기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정말 그 곳에서 선지자, 즉 예언자가 배출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 목회자들이 스스로 혼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말은 예언자처럼 하기도 하면서 대접은 제사장으로 받으려 한다.
신학교가 배출한 것은 선지자가 아니라 제사장 쪽인 것 같다.
그러니 교회가 공의와 정의에 편이 아닌 힘과 돈의 편을 드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다수의 힘 있는 이들의 편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맞다.
목회자들은 제사장의 자리에 서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예언자의 전통 위에 계셨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을 보면서 대제사장이라고도 하고,
예수님 덕분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으로 한 명 한 명을 제사장이라고 하긴 하지만...
예수님을 가르치고, 보여주어야 할 사람들이 스스로 예언자가 아닌 제사장의 반열에 서려 한다.

가톨릭에서 매번 제사(미사)를 드리고, 신부를 사제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넌센스인지 알 수 있다.
더구나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의 전통을 잇는다고 하면서 사제라고 하다니...
그러나 문제는 목사들이 제사장인줄 착각하는 것이다.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정죄하면서 그대로 내심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성도들 또한 제사장이 되어주기를 바라기까지 한다.
당연히 교회는 성전이 되고, 그 곳에서 들려지는 말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성전을 지키기 위한 말들, 예레미야를 적대했던 사람들이 했던 말과 유사한 말들이 전해진다.

아이러니 한 것은 지금 가톨릭의 사제들이 예언자 노릇을 하고,
개신교는 목회자들은 제사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거다.
웃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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