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은 물론 지혜를 확장하는 삶을 살기


지금 내 생각은 언제 적 것인가?

어떤 사람은 사고의 틀이 십대, 어떤 사람은 20대 중반, 또 어떤 사람은 30대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을 만나도, 어떤 사람은 만나도 그 때의 사고체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판단하고 결론을 이끌어 내는 과정이 늘 유치하고, 편협하고, 외골수로 흐르게 된다.

가장 심각한 것은 다른 사람을 말을 결코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워야 한다.

지식도 더 얻어야 한다. 더 알아야 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일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안목을 가져야 한다.

이는 어떤 생각에 묶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일신우일신 할 수 있는 삶의 태도

일보(김교신의 일기책 이름) 할 수 있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배운다는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창시절로 배움의 시기를 끝낸다.

그리고 결정적인 어떤 게기를 전후해서 배움의 자세를 멈추어버린다.

배움은 책을 통해서도 일어나지만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찌 하든지 자신의 이야기만 하려 한다.

배우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다.


진정한 배움은 지식을 넘어서 지혜에 닿게 한다.

그래서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문제는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점점 더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 지혜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지혜의 마음을 넓힌다는 것은 단기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들과 만남 속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을 통해서 성령 안에서 지혜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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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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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목사님들이 언론에 등장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물론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기사들이 더 많다.
교회에서 세운 언론사를 자신의 자녀들에게 물려주기위해 노력한다는 얘기로,
수천억원을 들여 교회를 건축해야 하는 당위성을 주장하는 모습으로,
교단의 교권다툼으로 결국엔 타교단 장로인 변호사에게 수장 자리를 내 주는 치욕의 장면으로...

반면에 교회가 사회를 위한 선한 일을 하겠다는 취지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사회복지 엑스포 같은 것을 통해 교회의 사회봉사를 알리고,
서해안 기름유출이 있을 때는 교회사회봉사단을 꾸려서 섬김의 장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엔 교회들의 자산을 기반으로 은행을 만들겠다고 선언을 하기도 했다.
교회가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뭔가 이런 일들을 할 때 더이상 주목을 받지 못한다.
아마도 어른 목사님들은 이런 행동이 꽤나 인기를 끌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보면 소위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높다.
어떤 프로그램을 하면 교회 인근에 주민들에게 긍정적인 소문이 나고 선교가 일어날까를 고민한다.
그 산물이 카페, 도서관, 극장 등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런 쪽에 관심을 갖고 예산을 몰아 줘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물론 기존 교회의 원로들에게 이런 얘기가 잘 먹히지 않아서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지금의 교회들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을 보면서 의문이 든다.
소위 문화라는 이유들을 들어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의욕적으로 진행하고
그래서 사람들을 끌어 오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라는 생각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핵심이다.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겉으로 보여지는 화려함, 특별함으로 사람들을 끌어 들이지만
그들은 교회의 실체를 알고는 발걸음을 돌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결론은 잘 길러진 참 괜찮은 그리스도인 하나가 최고의 프로그램이라는 얘기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잘 살아갈 때 우리가 소원하는 최고의 선교가 일어나는 것이다.
밖으로 이렇다 저렇다 소리지르는 것을 멈추고
이젠 자신을 돌아보고, '나나 잘하자'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다.
내가 괜찮은 그리스도인이 되면 된다.
대사회적으로 교회의 리더십이 실추되었다고, 뭘 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노력을 돌려서 자신을 바로 세우는 쪽으로 가라는 얘기다.
결국 교회의 지도자들, 특히 앞선 목사님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길을 걷는다면 거의 모든 문제는 술술 풀릴 것이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무슨 프로그램을 할까'하는 공허한 소리들은 그만 하게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http://www.andotadao.org/chlight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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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에 대한 소개는 단 하나다. 그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다.
그 이상 부연하거나 추가적 사건이 있을 필요는 없다.
요한복음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조롱받았던 곳!
뭐 다윗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끼워 맞추기식 논리도 필요 없다.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는 것을 굳이 힘들여 풀어 놓을 필요도 없다.
아직 유아일 때 이집트 구경을 했다는 것도.
얼토당토하지 않은 동방의 박사들과 목자들까지 끌어들일 필요도 없다.
그저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사람이고,
그가 처음 드러난 것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부터다.

아마 요한도 처음에는 그가 자신이 얘기한 사람인지 몰랐을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예수의 정체가 밝혀졌을 것이다.
하늘로서 들리는 소리 역시 예수님만 듣는다.
얼마나 감격적인 자기 확신인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 기뻐하는 아들이라는 것!

어쩌면 모든 인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은 동일할 거다.
그러나 모두를 기뻐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당신께서 선택하신 유대인들조차 기뻐하시긴 어려워 보인다.
예수님께서 기뻐하는 아들이라는 것이 그분의 삶 전체를 분명하게 해준다.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삶이 어떠할지 알 수 있다는 얘기다.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살아낸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를 얼마나 무겁게 받으셨을까.
매일의 삶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고,
결국 십자가가 현실이 되는 상황 가운데서도 물러 서거나 피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고(존재),
더불어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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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세례 요한은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했다.
그럼 세례요한의 능력이 뭔가?
자신 뒤에 오시는 분의 능력은 또 뭘까?

세례 요한은 이미 자신의 능력을 보여줬다.
광야로 사람들을 끌어냈고, 그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획기적인 일을 실현했다.
그럼 예수님의 능력은 무엇인가?
가르침, 병고침 등의 기적? 영적 파워(카리스마)?
이런 것들로도 예수님은 그 누구와도 구별되는 능력의 차이를 보이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하나 더 있다.
바로 죽음의 능력이다.
온갖 고통을 다 받고 못박힌 십자가의 죽음,
그 길이 어떤 길임을 알고도 그것을 선택하는 그 모든 여정이 바로 예수님의 능력이다.
물론 세례요한 또한 헤롯 왕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예수님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예수의 능력은 뭘까?
우리가 기대하고 고대하는 예수의 능력은 뭘까?
전자에만 있지 않나? 기적과 같은.
먹을 것, 질병에서 나음 받고, 명예를 얻고, 힘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예수님의 최종적 능력은 죽음에 있었다.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그 능력,
죽기까지 사람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키가 된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인생들을 향한 사랑의 능력이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탁월한 능력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정답에 가깝다.
세례요한은 사랑이 아니라 정의에 가까웠고, 구별이나 분리였다.
광야로 나오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또 정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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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2-5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그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더라

세례 요한의 사역은 사람들을 성전 밖으로 불러낸 것이다.
(당시 요한과 같은 이들이 더 있었다.)
그 때까지 성전과 그 성전의 사람들인 제사장들,
그리고 그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중심의 종교생활을 했다.
그것이 자신들의 삶의 안녕을 지켜주는 방편이었다.
그런 그들을 성전과 예루살렘의 밖으로 끌어 낸 것이 요한이다.
의례에 묶여 있던 하나님과 진리를 향한 갈망에 자유를 준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상황을 혼란으로 여기고, 경계해야할 사태라고 보았을 것이다.
상당히 기분 나빴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활동은 굳은 종교를 유연하게 하는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는 것은 결국 들과 강에서 제사(속죄제, 화목제)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도 제사장이 연 어떤 야외 성소에서가 아닌 한 야인이 선 들녘과 강에서였다.
그러니 이 얼마나 예수님의 길을 잘 준비한 것인가?
예수님은 이후 당신 스스로를 성전보다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고,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성전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요한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던 말씀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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