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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여기서 시작이라는 것은 마가복음의 기록을 알리는 것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삶에 대한 엶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예수님을 통해서도 그렇고, 또 예수님 전에도 사실은 복음은 있었다.
하나님의 이름 그 이상의 복음이 또 있을까?
예수가 그 하나님을 최고로 담아내었기에 예수님의 이름이 복음을 대변하게 된 것이다.

시작이라는 것의 의미는 어쩌면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 말씀을 읽을 때 그 속에서 시작되는 복음의 역사!

그래서 우리는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역이 내 속에서 시작되고,
또 누군가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갈 때 그 곳, 그 사람에게 복음은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셨고, 끊임없이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아마 마가는 이 첫 문장을 쓰기위해 가장 고심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자신 안에서 그 순간 새롭게 떠오르는
예수님의 생생한 이야기들이 그로 하여금 시작의 마음을 갖게 한 것이다.

마가와 함께 복음을 시작하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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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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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은 뭘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어떤 삶을 사느냐'는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을 삶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천한다는 것은 회개(반성)와 동시에 변화된 삶으로 나아가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믿음과 대응되는 반대개념이 아니라 믿음을 포함하는 더 넓은 의미이다.

누군가 무엇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가 무엇을 믿는 지를 알 수 없다.
과장해서 표현하며 하나님 조차도 그가 무엇을 믿는 지 아실 수 없다.
오로지 그가 삶 가운데서 어떤 결단을 하고 변화된 삶을 살고 있느냐로 알 수 있을 뿐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복잡한 질문들을 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예정론, 신정론, 삼위일체는 물론 영지주의 등 난해한 문제들을 가지고 와서 해결해 달라고,
그것이 풀리지 않아서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헛다리 짚은 거다.

예수 그리스도의 단순한 삶을 배우고,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성육신이니, 동정녀 탄생이니, 대속이니 하는 것들도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사랑을 나도 실천하고, 예수님의 버림을 나도 실천하고,
예수님의 모욕당함을 나도 당하면 된다.
"하루에 한 시간씩 하나님을 만나고,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는 마더 테레사의 말에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리스도인은 어떤 이론이나 신학이 옳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나를 부르셨기에 그를 좇아 가는 사람들이다.
믿음을 넘어서 삶으로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점이다.

하나님께서 묻지 않으실까?
"너 예수를 믿으며 살았냐?"가 아니라 "너 예수처럼 작은 자들을 사랑하며 살았냐?"라고.

믿음? 그건 의외로 간단하다.
우리의 구원의 문제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거면 충분한다.
그리고 '믿습니다'라는 외침과 조건부의 행위로 결정할 수 있다는 오만을 버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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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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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들이 성도들을 무술도장에서 사범이 제자를 가르치듯 해야 합니다."
얼마전 어떤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나는 이 말을 교회에서도 도장처럼 승급, 승단을 시켜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요즘 교회는 성도들을 승급시키지 않는다.
한 5급 쯤 되면 거기에 멀물러 있게 만든다.
그래서 사범인 목사를 죽을 때까지 필요하게 만든다.
그들은 매번 동일한 동작을 반복한 뿐이다.
어느 누구와의 겨루기도 필요없다.
목사가 나서서 막아주고 지켜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승급하지 못한 성도들이 나이가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가 되어 교회의 중직자가 되는데,
배운 것이 없고, 볼 줄 아는 안목도 없고, 결정적으로 잘 성장하고 훈련된 신앙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그들에게 맞겨진 교회가 건강하게 운영될 수 없다.
많은 교회들이 치고받고 싸우는 것에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또 늘 같은 동작만 반복하던 성도들이 세상에 나갔을 때
매 주 듣는 것은 많아서 말도 잘하고, 머리 회전도 빠르지만
정작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알 지 못해 기독교 쭉정이로 살아간다.
그들이 교회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으니 욕을 먹지 않을 수 없다.

승단을 해서 수준이 올라가면 과거 반복동작들은 그의 몸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이미 몸에 밴 기본기이고, 그것을 응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높은 신앙의 여정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승급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이해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다른 모습을 취하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심지어 이단으로 몰아세우기까지 한다.

저급할 때는 각자의 도장의 특색들이 중요하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그 차이들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승급하지 못한 이들은 이 안목을 갖지 못하기에 남을 더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유단자가 된다는 것은 그 도장에 더이상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모든 것을 가르쳐주고, 훈련시켜서
도장(교회)을 내 보내야 한다.
또 다른 곳에서 그들이 누군가를 제자로 삼아서 가르치도록 말이다.
아니면 더 높은 경지로 이끌어줄 또다른 스승에게 배우러 가든지, 
스스로 기술을 더욱 연마하기위한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아쉽게도 지금 교회에서 승급은 금기사항이다.
위험한 일이라 여기고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따로 불러서 호되게 주의를 줘서 원위치로 돌려놔야 한다.
그래서 마치 매트릭스에서 레오를 찾아 되돌려 놓으려는 스미스 같은 역할이 교역자들의 일이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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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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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힘 가진 사람들이 함부로 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런데 자신이 그 권력과 끈이 닿게 되면 확 돌변한다.
그럴 수 있다고, 지금은 그런 것이 필요한 때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우리 내부에 권력에 대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힘 뿐만이 아니다.
인기, 아름다움, 지식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가 뭔가를 더 큰 소리로 비판하게 될 때,
저신의 내부를 더 솔직하게 들여다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큰 소리로 비판하는 어떤 것이 내 내부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 명심하자!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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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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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그 길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대개 보수적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 익숙한 방식을 유지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를 더 먹을 수록 더욱 보수적이 된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옳고 그름보다는 익숙하고 편한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자신과 친한 사람, 해 오던 방식을 따르는 것을 선호한다.

지금 교육계의 문제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들...
특히 교회에 잠재하고 있는 문제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변하지 않으려는 보수적 태도가 도사리고 있다.
조금도 바꾸려고 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변하는 시대를 좇아 가지 못하는 것이다.

요사이 교회나 학교 현장을 보면서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긴박감을 느끼고 있다.
지금 젊은 이들, 청소년들은 이미 바뀌어있다.
그런데 그들을 상대해서 뭔가를 시도하고 있는 기성세대들을 그것을 모른다.
아니 알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이제 더이상 한 사람 혹은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다수의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상대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왜냐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나이나 위치, 혹은 직함 등을 머리로 이해하고 권위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상대방이 얼마나 진실한지, 더 나아가 나를 향한 진심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인지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낀다.
만약 가슴으로 그것을 확신하게 되면 머리와 온 몸을 주어 버린다.

그래서 교육의 현장의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
일대 다수의 만남을 지양하고, 일대일 혹은 일대 소수의 만남이 가능한 구조로 나가야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일방적인 전달의 구조를 탈피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들이 들려 질 수 있는 구조로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획기적인 생각의 전환과 투자가 요구된다.
어쩌면 그래서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도 더 걸리고, 힘도 더 많이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교인들만 봐도 큐티 나눔이나 일대일 훈련 등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선호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니 더 젊은 세대들은 어떻겠는가?
학교에서도 전체를 대상으로 한 수업에서는 딴전을 피우고 돌아 앉아 있는 아이들이
가까이 다가가서 자신의 일대일의 인격적 접촉을 시도할 때는 태도도 달라지고, 말씨도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 지는 명확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린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야흐로 영성의 시대는 그런 영적 권위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 영적 권위란 예수님의 마음,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만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을 향해, 젊은 이들을 향해 예의가 없다고, 부모들일 가르치지 않았다고 남탓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이젠 익숙한 방식을 버리고, 기꺼이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굳어있는 몸을 유연하게 해야 한다.
일단 다음 세대들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들을 만나는 방법(본질이 아닌)을 비용이 얼마가 들던 간에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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