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아들을 둔 엄마가 있다. 누구보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다. 요사이 딸도 아들도 자신의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열심히 살고 있다. 또 각각 애인도 있어서 교회에서도 소문난 커플들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 정도면 다른 가정들에 비해서도 자녀들이 잘 지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엄마는 자녀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입이 나오고 얼굴빛이 어두워진다. 나름 공부도 잘 하고 있고, 연애도 잘 하고 있으면 그렇게 계속 가기만 바라며 지켜보면 되는 것 아닐까?
엄마 마음은 그것이 아닌가 보다. 더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겠고, 지금보다 더 나은 학과에 가서 더 전망 있는 직장에 취직하면 좋겠고, (실제로는 자신이 다 해 주려고 하면서도) 자기 일을 알아서 잘 해주었으면 좋겠고, 더 좋은 집 배우자를 만나면 좋겠고, 더 신앙 있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고, (늘 품고 있기를 원하면서) 빨리 독립해서 자기 앞가림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또 기도의 대부분을 채운다.
자식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미 많은 부분에서 자식들은 엄마를 배려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자식들을 향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자식들을 향해 그렇게 매달리는 것이 정말 누구를 위해서인지 묻고 싶다. 그렇게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면서 정말 자식들이 잘 되기를 위해서 그러는 것인가? 물론 그렇다고 대답들 하시겠지만, 경험하고 관찰해 본 바에 의하면 '아니다'이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자식의 수준을 위해서, 자기가 들인 물질을 포함한 노력에 대한 보상심리가 더 많은 부분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욕망(이런 엄마들의 태도는 욕망이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을 채우기 위해 자녀들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자녀들은 엄마의 장식품이 아니다. 자녀는 자녀 나름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이미 그들을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있다. 부모는 자녀들이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며, 진지하게 선택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지금 부모들은 모든 것을 다 결정하고, 그대로 따르라고만 한다. 아이들은 그런 부모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꾹 참으며 분노를 쌓는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그것을 되갚아 주겠다고 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엔 더더욱 그럴 것이다. 빨리 깨닫고 자녀들을 놓아 주고, 자신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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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그 길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대개 보수적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 익숙한 방식을 유지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를 더 먹을 수록 더욱 보수적이 된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옳고 그름보다는 익숙하고 편한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자신과 친한 사람, 해 오던 방식을 따르는 것을 선호한다.

지금 교육계의 문제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들...
특히 교회에 잠재하고 있는 문제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변하지 않으려는 보수적 태도가 도사리고 있다.
조금도 바꾸려고 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변하는 시대를 좇아 가지 못하는 것이다.

요사이 교회나 학교 현장을 보면서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긴박감을 느끼고 있다.
지금 젊은 이들, 청소년들은 이미 바뀌어있다.
그런데 그들을 상대해서 뭔가를 시도하고 있는 기성세대들을 그것을 모른다.
아니 알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이제 더이상 한 사람 혹은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다수의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상대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왜냐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나이나 위치, 혹은 직함 등을 머리로 이해하고 권위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상대방이 얼마나 진실한지, 더 나아가 나를 향한 진심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인지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낀다.
만약 가슴으로 그것을 확신하게 되면 머리와 온 몸을 주어 버린다.

그래서 교육의 현장의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
일대 다수의 만남을 지양하고, 일대일 혹은 일대 소수의 만남이 가능한 구조로 나가야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일방적인 전달의 구조를 탈피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들이 들려 질 수 있는 구조로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획기적인 생각의 전환과 투자가 요구된다.
어쩌면 그래서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도 더 걸리고, 힘도 더 많이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교인들만 봐도 큐티 나눔이나 일대일 훈련 등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선호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니 더 젊은 세대들은 어떻겠는가?
학교에서도 전체를 대상으로 한 수업에서는 딴전을 피우고 돌아 앉아 있는 아이들이
가까이 다가가서 자신의 일대일의 인격적 접촉을 시도할 때는 태도도 달라지고, 말씨도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 지는 명확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린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야흐로 영성의 시대는 그런 영적 권위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 영적 권위란 예수님의 마음,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만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을 향해, 젊은 이들을 향해 예의가 없다고, 부모들일 가르치지 않았다고 남탓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이젠 익숙한 방식을 버리고, 기꺼이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굳어있는 몸을 유연하게 해야 한다.
일단 다음 세대들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들을 만나는 방법(본질이 아닌)을 비용이 얼마가 들던 간에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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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거금을 주고 구입한 오디오다.
TV가 없다보니 라디오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요사이는 MC들의 말이 너무 많아 집중하기가 어려워 대개 CD로 음악을 듣는다.
주로 클래식, 째즈, 영화음악을 듣는다.

위층에서 시끄럽다고 할까봐 볼륨을 높이지 못한다.
조용하게 나오다 높은 음이 나오면 달려와서 줄이기 바쁘다.
그런데 최근에 들은 얘기로 볼륨을 낮게 고정해두면 스피커가 그 수준에 굳어버린단다.
그래서 오늘은 볼륨을 높여 보려고 했는데 조금 올렸다가 또 낮추고 말았다.
너무 커서, 누군가에게 피해가 갈까봐, 싫은 소리 들을까봐...

오늘날 우리들이 주로 배우는 것이 이 것이 아닐까.
소리를 낮추는 것! 조용히 있는 것!
그래서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잊어버리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르고 살고 있다.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다.
그 영혼을 깨우는 곳이 학교이고 교회여야 할텐데 이젠 두 곳 모두 그 정체성을 버리기위해 경쟁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린 지금보다 더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들이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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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교육 시간
레25장
20 만일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21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22 너희가 여덟째 해에는 파종하려니와 묵은 소출을 먹을 것이며 아홉째 해에 그 땅의 소출이 들어오기까지 너희는 묵은 것을 먹으리라

이스라엘을 설명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되는, 아니 가장 우선적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들의 삶의 순환이 안식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나아가 인생의 순환까지도 안식일이 확장된 안식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한 명 한 명의 쉼의 문제에 관심이 있으셨듯이
땅의 쉼에도 역시 관심을 가지고 있으셨습니다.
땅의 쉼이란 결국 그 땅에 뿌리를 박고 생명활동을 이어가는 식물들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뽑아내면서 그려 가시는 이상적 공동체 안에
단지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땅의 쉼과 나무와 식물들의 쉼이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저주받은 땅이 하나님의 복 주심에 의해 풍성한 소출을 내지만
그 땅이 한 없이 모든 것을 내 놓을 수 있는 무한한 창고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땅의 생명력을 통해 무상으로 먹거리를 얻었으니
7년에 한 번 쉬도록 하여 재충전의 시간을 주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농부들에게 있어서 1년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업이 아닌 목축업을 하는 민족이었기에 처음부터 길을 잘 들이면 되는 문제이긴 합니다.
그래도 막상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20절의 말씀을 미리 하시면서 걱정하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 곧 믿음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을 나올 때 자신들의 가능성이나 소망을 보고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왔듯이
장차 들어가게 될 가나안에서의 삶 역시 하나님에 대한 믿음 가운데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땅의 안식은 6년 동안 일하여 먹고 살지만
단지 그들의 땀 흘림 만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교육 시간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주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땀 흘려 수고 하여 얻는 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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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 아이가 두번이나 소리높여 우는 일이 있었다.
이 아이는 교회 올 때마다 공을 가지고 오는데,
오늘 결국 그것이 문제를 야기한 것이다.

한번은 선생님 한 분이 공을 빼앗아 캐비닛에 넣었다.
예배당에서는 공을 가지고 놀지 말라는 뜻에서 예배 끝나고 준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아무리 그래도 공을 빼앗긴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큰 소리로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
난 공을 내주지 않는 선생님의 단호한 외침까지 목격을 했다.

그리고 예배가 진행되고 있을 때, 설교 중이었는데, 또 폭발을 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까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다른 선생님이 목소리를 높였고,
이 아이는 '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게 하느냐'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난 그 상황에서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 아이 하나에게 묶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지혜롭게 처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고,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이 없기도 했다.
겉으로는 신경 쓸 일도 많다는 듯 회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족(반)모임이 진행 중일 때
이 아이가 뒷쪽에 공을 가기고 기대어 서 있는 거다.
다가가서 꼭 껴안으며 '전도사님은 네가 좋은데...'라는 말을 귀에 속삭여 주었다.
그런데 웬일로 이 아이가 예전처럼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 않았다.
아이가 공을 가지고 복도로 나가길래 따라 나가서 몇 번 같이 차주었고,
다시 건물 밖으로 유도해서 둘만의 축구시합을 벌였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서 어떻게 이 아이와의 관계를 형성해 가야 할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아이와 놀아주고, 재미있게 놀아주고, 또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그리고 그 아이에게 살짝이 속삭이는 거다.
"우리 또 축구하고 놀자. 그런데 예배당에서, 예배시간에는 공을 차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아이와 신뢰를 쌓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한다면
아이에게 상처도 주지 않고, 아이도 좋고, 나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어른이 된 이들은 그 정도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저 윽박지르고, 단시간에 복종시키려 할 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아이의 마음을 얻어 가는 과정이 교육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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