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에 해당되는 글 4건

('농촌과 목회'라는 계간 잡지에서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이 왔다. 요즘 내 정서상 귀농과 관련된 글을 쓴다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했는데도 부탁을 하셔서 쓰긴 썼지만, 겨우 쓴 표도 나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제 겨우 2년을 바라보는 농촌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가타부타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사실 귀농이니, 농부니 하는 말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 모든 표현보다 가장 적절한 것이 바로 이 ‘농촌에 산다’는 말이다. 서울을 떠나 올 때는 이런저런 이유들을 들며 마치 대단한 것처럼 이야기도 했지만 사람 사는 것이야 서울이든 농촌이든 별반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더 크게 깨달은 곳이 바로 농촌에서였던 것 같다.
농촌에 살기에 밭농사도 지어 보고, 아궁이에 불도 떼보고, 똥도 퍼 보고, 올 해는 특별히 포도농사도 지어보았다. 한 신학생이 어떻게 귀농을 하게 되었고, 농촌에서 무엇을 했고, 또 요즘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펜 가는대로 써 보려고 한다.

신학생 귀농자

귀농을 하겠다고 길을 나선 것은 신대원 3학년 2학기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물론 그 전부터 농촌목회에도 관심이 있었고, 생태라든지, 대안이라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진 것은 대부분의 신대원생들이 졸업 후 전임 사역지를 물색할 즈음에 이루어졌다. 나름대로 약간은 별난 성향 때문에 그런 것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고, 학교생활에서나 교회에서 신학생, 목회자들에게서 교회의 빛을 발견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어찌 보면 내가 가진 약간의 부정적 시야와 교만함이 일조한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대안 대학교에 가보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한 교수님을 통해 귀농자들을 교육하는 곳이 있다는 말씀을 듣고 알게 된 곳이 귀농운동본부였고, 바로 생태귀농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일주일에 두 차례 저녁 때 이어지는 교육은 이론과 실제에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깨우쳐 주었다. 그것이 옳고 그른 차원을 떠나 귀농의 뜻을 품은 이들의 마음 밭을 고르게 해 주는데 이보다 더 좋은 장은 없는 듯하다.
여기까지는 일반인들도 똑같이 느끼는 부분일 테고, 나는 한 가지 더 얻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거울이었다. 그것은 기독교를 비추고 있는 거울이었다. 세상이라는 거울에 비친 교회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들이 말하는 기독교, 교회, 교인들은 때로 비수가 되어 나에게 꽂히기도 했다. 내가 전도사라는 것은 고사하고 그리스도인, 아니 교회 다닌다는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게 만드는 삭막한 분위기. 어쩌면 이리도 교회의 위상이, 사회적 리더십이 바닥을 치고 있는 것인가? 결국 ‘교회인’으로 굳어져 가고 있던 나를 향한 비판이요, 충고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비판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가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이고, 기대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입장에서 교회가 감당해 주었으면 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더 이상 교회가 소비적 집단이 아닌 사회를 향한, 사람들을 향한 생산적 집단이 된다면 이런 냉소적 시선도 줄어들 거라 생각하며, 나로서는 생산자가 되겠다는 전의를 한층 더 불태우는 동기가 되었다.

서울에서만 살아 온 내가 귀농을 하려니 한두 가지가 걸리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로 갈 것인지, 뭘 해 먹고 살 것인지도 문제였지만, 보다 실제적인 문제는 삼십 대 중반을 향해 가는 나이에 배우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혼자 가서 얼마나 살 수 있나? 농촌에서는 혼자 오면, 특히 남자가 혼자 내려오면 인정도 안 한다던데, 농사 자체가 남자 혼자 하기에는 지루한 일이라는데...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모님도 함께 가기로 의견을 모으게 된 것이다. 나와는 별도로 농촌이든 어촌이든 내려가서 생활 할 계획이 있으셨던 차에 의기투합을 하게 된 것이다. 부모님께서는 어느 정도 재정적 뒷받침을 포함한 하드웨어를, 나는 발로 뛰고 구체적 그림을 그리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부모님께서 ‘안정’을 확보해 주셔서 일단 큰 문제 하나는 모른 척 할 수 있게 되었다.

양다린 걸친 농부

2004년 연말에 있었던 ‘귀농인의 날’에 뜻밖에도 고등학교 때 절친했던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 귀농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친구가 살고 있는 상주 모동으로 살 집을 알아보고 확정을 지었고, 귀농 초기의 난관들을 그 친구의 도움으로 극복하며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정말 기적같이 정착을 했다.
거처도 마련되고, 동시에 무상으로 지을 수 있는 밭도 천여 평 얻으며 외형적으로도 농부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사는 문제 앞에서는 경제적인 부분을 빼놓을 수 없는 문제였다. 멀쩡히 세 식구가 형이 보내주는 약간의 생활비로 화물차까지 굴리면서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나는 은행에서 대출했던 학비를 갚아야 했다. 이로부터 양다리 걸친 농부가 탄생하게 된다. 주 중에는 철저히 농부가 되고, 주말과 주일에는 내 특기를 살려 교회 사역을 하기로 한 것이다. 교육전도사를 하기로 한 것인데, 사실 귀농하면서 자유롭고 싶었던 내 입장에서 이 결정은 정말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부모님께 짐이 아니라 보탬이 되어 드리고 싶고, 무엇보다 일단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은 이러저러한 것들보다 우선적 해결 과제이기도 했다.
주 중과 주일의 간극을 오가는 농부전도사, 때로는 흙이 좋은 친구가 되어 주기고 하고, 때론 어린이들이 위안이 되어 주기도 했다. 이 결정은 경제적 안정이라는 도움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 쪽으로 빠져들어 버리지 않도록 해 준 것 같다.

주 중에 농사를 짓는다는 전도사, 손바닥이 거칠어져 오는 전도사, 얼굴이 햇빛에 그을려 나타나는 전도사, 화물차를 끌고 오는 전도사를 만나며 아이들과 교사들은 조금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교사들은 어떻게든 내 삶의 자리와의 만남을 시도하고 싶어 했고, 이로부터 포도밭 방문과 체험도 이루어졌고, 또 전도사가 가져온 변변찮은 생산물들을 기꺼이 구입해 주는 너그러움도 보여주었다. 일기가 불안해 날이 굳으면 오히려 전도사를 걱정해 주는 교사들도 있었다.

초보농부

농사를 많이 지어본 것은 아니지만, 만약 누군가 농사일 중에 어떤 일이 가장 힘드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흙을 만지는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이 호미로든, 삽으로든, 경운기로든 말이다. 비닐을 씌우고, 약을 치고, 수확을 하는 일들도 물론 힘이 들지만 특히 근력이 부족한 나에겐 흙에 접촉하는 일만큼 힘들게 느껴지진 않았다. 다른 일들은 지루함의 정도가 얼마나 되느냐의 차원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더욱 창세기의 말씀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을 갈게 하셨다”(창세기3:23) 흙이 나의 근본이라는 것이고, 그 흙을 뒤집고 가는 작업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길이었으니 말이다. 나를 뒤집고 가는 작업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피부로 느끼는 곳이 바로 내가 선 곳 농촌이었다. 삽에 기대어, 또는 경운기에 시동을 끄고 주저앉아서 깊은 숨을 몰아쉬며 ‘내가 왜 이러고 있지?’하다가도 번쩍하고 머리를 스치는 생각, ‘나를 갈아야지...’

귀농 교육을 받으면서 생태적이고 순환적 삶에서 화장실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정말 내가 똥을 푸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어린 시절 ‘푸세식’ 변소를 사용했던 기억이 워낙 악몽 같아서 떠올리기도 싫었는데, 똥을 푸게 되다니... 물론 시골의 변소는 과거 도시의 공동변소와 다르고, 또 왕겨나 재를 뿌리면 냄새도 덜한 것은 사실이다. 위생적(?)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똥은 똥이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네 번은 푼 것 같다. 나와 나의 가족의 배설물이니 군소리 없이 푸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사실 똥을 푸고 났을 때 가장 행복감을 많이 느낀다. 일단 변소의 분뇨 통이 비어서 좋고, 또 대자연의 순환에 조금이나마 참여 할 수 있다는 데에 기쁨이 있어서이다. 내가 저지른 일을 내가 책임져 다시 거두어들이는 일에 함께 한 것이 아닌가?
한 덩어리, 혹은 한 그릇정도의 양을 내어놓고, 몇 바가지의 물을 섞어 흘려보내야 하다니. 그것도 아무런 책임감이나 가책도 없이. 어떻게든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싶었다. 어떤 분은 수세식 변소를 ‘문명의 함정’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잘 발효된 똥만큼 더 좋은 거름은 없으니 작물들은 나의 배설물을 먹고, 나는 또 그들이 내어 놓는 것들을 먹는다. 아쉬운 것은 농촌에서도 정화조를 묻어야 건축허가가 난다고 한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세기3:19)

지난해에는 천여 평 밭에 제초제, 농약 사용하지 않고 짓다보니 일부를 포기하고 칠백여 평에 들깨, 콩, 참깨를 심었었는데, 올해는 좀 더 늘려서 이것저것 심어보고 싶었던 것들까지 더해 농사지었다. 이에 더해 올 해는 그 대망하던 포도농사를 짓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상주시 모동면은 특구로 지정될 정도로 포도가 주작목인 곳이다. 그래서 ‘농사’하면 포도농사로 통한다. 논이나 밭이 포도밭으로 탈바꿈되어 있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마을 분들은 우리집 얘기만 나오면 ‘아무것도 안 한다’, ‘남자 두 사람이 놀고 있다’라고 얘기하셨다. 포도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우회적 표현인 것이다.
이런 어른들의 이야기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한 번 해 보고 싶은 것이 포도농사였기에 나에게 적당한 크기의 포도밭을 알아보게 되었고, 오백 평이 못되는 밭은 구하게 되었다. 포도농사는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아니 그 이상 아는 것이 없었기에 선배 귀농자요, 포도농사의 대선배인 친구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해 물어가며 지어야 했다.
다른 농사도 그런 측면이 있지만 특히 포도 농사를 일컬어서는 ‘세 번 울고, 세 번 웃는 농사’라고 한단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차츰 포도나무의 변화무쌍함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전혀 희망이 안 보이던 가지에서 움이 트고 가지가 나오고 꽃이 피고 충실한 열매를 달았고, 반면 아주 기대할 만큼 실했던 가지는 오히려 알들도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달린 송이들을 봉지로 싸 놓고 가슴조리는 기간이 지난 후에 열었을 때 그럴듯한 포도송이로 변해 있는 모습은 정말 가슴 벅찬 관경이었다. 정말 울고 싶은 때도 있었지만, 다행히 웃음으로 마무리되어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작지만 포도농사를 지어볼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내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찍어 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열매를 더 많이 맺게 하려고 손질하신다.”(요한복음15:1,2)

농촌대학원

포도농사는 다른 농사에 비해 집약적인 측면이 있다. 특히 수확에서 그런데, 잘 갖추어진 저장 시설을 가지지 못한 친환경 생산자들은 더욱 그렇다. 수확적기에 신속하게 수확하고 포도의 신선도가 떨어지기 전에 곧바로 소지자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집중적으로 온 식구, 지인들까지 동원해서 상품화 작업에 매달려야 한다.
올 해 이 과정에서 내가 간과했던 몇 가지 문제를 재인식하게 되었다. 내 농사를 돕기에 현저히 취약한 건강상태를 가지신 어머니를 재발견하게 된 것이다. 서른다섯에 아직도 혼자라는 것도 어머니 문제만큼이나 두드러져 인식되어 왔다. 물론 일일이 거론 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긴 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이런 문제들이 불거지면서 선택의 때가 된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사실 최소 5년은 하고서 그 다음 거취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마음먹었었고, 그렇게 이야기 했었다. 그래야 어디 가서 명함이라도 내 밀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명분을 만들자는, 누군가를 의식해서 나온 것이라면 여기에 얽매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는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선택해야 할 일이라는 판단 섰다. 더욱이 내 안에 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교회, 어린이 사역에 대한 불을 살려보고도 싶었다. 그리고 함께할 동반자를 찾는 일도 무엇보다 중요한 목표이다. 여기 있으면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이 그 당시 최선이었듯이 어쩌면 이제 다시 최선 길을 나서보려고 한다. 하지만 농부를 놓지 않을 작정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 할 지도 모르지만, 정기적으로 오르내리며 부모님을 돕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계획이다. 내년에도 초보농부는 계속된다. 죽~

다른 친구들은 이제 대학원을 마쳐가고 있다. 설교, 상담, 영성, 선교... 그런데 나는 농촌대학원에서 농사를 전공으로 하여 수료를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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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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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운동본부에서 계간으로 발행하는 귀농통문의 원고요청이 있어서 작성한 글이다. 지나서 다시 보니 정말 못썼다는 생각이 든다. 잘 써지지 않는 글을 억지로 썼더니만...)

이제 겨우 2년차에 들어서는 초보농사꾼인지라 여전히 소개할 때 농부라고 하는 것이 어색합니다. ‘농(農)’자에 서툰 초보이기 때문입니다. 내려오기 전에야 이런저런 말을 많이 했었지만, 말이 쉽지 생각했던 것들을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디 만만한 일인가요. 그래서 ‘농촌에 사는 거죠’라고 말한답니다. 아직 제 땅이라고는 한 평도 없이 남의 땅에 우리 먹고 조금 나눠먹을 만큼의 몇 가지 작물들을 재배하고 있을 뿐이고, 올해 들어서 조그만 포도밭을 하는 정도니 말입니다. 그래도 농촌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가졌던 작은 소망들이 이루어져 가는 곳이 바로 이곳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신흥리입니다.
상주로 내려오게 된 결정적 계기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귀농학교를 마치고 참석하게 된 귀농인의 날(2004년)에 연락이 끊겼던 친구(향유아빠)를 거의 십여 년 만에 재회한 것입니다. 고3 수험생의 시기를 같이 보냈고, 20대 초반의 고민들을 조금이나마 함께 했었던 친구를 귀농인의 날에 만나다니, 그리고 그 친구가 귀농학교 4기에 귀농 7년차의 대선배라니. 그래서 당연히 친구네 집에 놀러 가게 되었고, 마을을 둘러보다가 눌러 앉아 버렸습니다.
친구의 도움이 전제되었음에도 삶의 터전을 새로 만들어 가는 일은 만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몇 가지 요인들 때문인지 마을에 정착해가는 과정이 생각보다는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지상권만 산 것이지만 집을 구입한 것이 동네 분들에게는 인상 깊게 여겨진 것 같습니다. 원래는 꽤 오랫동안 비어있던 집으로 수리해서 들어가려 했는데, 수리비가 너무 많이 들어 갈 것 같아 그 집 바로 옆에 있는 할머니가 자식들 집에 오가며 닫혀 있었던 집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특별히 외지인에게 배타적이지 않은 분위기 탓도 있었지만, 집을 샀다는 얘기에 동네 분들은 ‘우리 동네 사람 됐네’하시며 반겨하셨습니다. 그리고 저 혼자 내려오지 않고 부모님과 함께 내려 온 것도 안정적으로 보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어머니께서 마을에 속한 교회에 출석하신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 가족의 존재가 더 넓게 공인되었으니까요. 요즘도 가만히 앉아 생각해 보면 우리 가족이 마을의 일원으로 별 갈등 없이 살고 있다는 것에 놀랄 때가 있을 정도입니다.

-초보농부 이야기
귀농 첫 해 농사는 집 주변의 70여 평의 텃밭과 ‘잡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에 700여 평의 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천 평이 넘는 밭이었지만 쟁기질하고 갈고 하는 것은 삯을 주고 트랙터로 한 나절 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돌아서면 자라기 시작하는 풀을 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지라 700여 평으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정말 농사는 풀매기라더니, 풀 뽑는 일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로터리 치고 얼마 가지 않아서 잔디를 깔아 놓은 것처럼 되더니 금세 무성하게 자라버렸습니다. 하여간 풀 뽑는 일 정말 진하게 경험했습니다. 덕분에 1년 만에 아버지는 풀 뽑는 전문가(?)가 되셨고, 동네에서는 풀 약 안치고 생으로 풀매며 농사짓는다고 소문이 확 돌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해서 생산한 것들을 비싼 값에 팔아서 고소득을 올린다고 이야기들 하신다는데, 솔직히 콩과 들깨 몇 말 팔아서 생계가 되었을까요?
아무튼 1년 정도 지내면서 동네 분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얘기는 ‘무엇으로 먹고 사냐?’는 것이었습니다. 말뜻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것이죠. 밭농사 800평은 그 분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즉, 수익 작물인 포도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두 번째 해가 되는 올 해에는 포도농사를 지어 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내려오면서부터 하려고 했었지만 막상 엄두도 안 나고, 소개받은 포도밭이 차가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하지 않기로 했었습니다. 올 해는 저에게 적당한 크기(5,600평)의 포도밭을 구하려고 했는데 막상 괜찮은 것이 나서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안쓰럽게 생각했는지 뒷집 사는 형님이 자신이 부치던 밭 중에 500평 조금 못되는 밭을 해보라고 선뜻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상황이 아닌지라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향유네 포도밭을 표본 삼아, 향유아빠가 뭐하나 살펴 가며 포도농사의 걸음마를 시작했습니다. ‘향유포도’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나름대로 ‘참(charm)포도’라는 브랜드도 만들었습니다. 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저농약인증도 받았지만 올해 생산되는 포도는 아름아름 지인들에게 판매할 정도 될 것 같아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고 있습니다.
농사 규모가 크던 작던 필요한 것은 똑같았습니다. 특히 경운기는 필수 중에 필수였습니다. 남의 손 안 빌리고 밭을 갈고 로터리 치고 싶었고, 포도나무와 감나무에 약도 쳐야 했기에 중고로 경운기도 덜컥 들여 놓아 버렸습니다. 막연하게 굉장히 위험한 농기계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주저되기도 했지만 막상 들여 놓고 이리저리 만져보니 나름대로 참 유용한 기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들긴 하지만 남들 하는 것 따라 대부분을 손수 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옆집 할아버지 밭도 넉넉하게 갈아드렸으니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관리기 끌고 오셨던 이웃 아저씨는 ‘처음 하는 거 아닌가?’하시며 제법 한다고 한마디 거드실 정도였습니다.
감나무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지난해에는 감을 딸 때까지도 감이 가져다 줄 수익을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니 일부를 장사꾼에게 팔아버렸죠. 깎아서 매달아 둔 것들이 곶감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야 그 가치를 알게 된 거죠. 곶감도 충분히 장사가 되겠다고요. 그래서 올해는 봄부터 감나무에 마음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집 주변으로 있는 나무가 열 그루가 넘게 있고, 옆집 할아버지네 감나무 네 그루도 임대했고, 잘 키워서 곶감장사를 해보려고 합니다.
포도도 좋고, 감도 좋지만 사실 농촌에 사는 맛은 이것저것 좋아하는 것들을 심어보고,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 아닐까요. 텃밭에 오이, 감자, 옥수수, 토마토, 땅콩 등을 심어 놓고 조금이지만 수확의 기쁨을 얻었고, 올 해에는 수수, 녹두도 심어 보았습니다. 이런 다양한 것들을 심어 키워가는 과정이 농부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양다리 걸친 농부지만
그래도 여전히 직업을 쓰는 난이 있을 때 뭐라 쓸까 고민합니다. 농사만 지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라면 주저 없이 농부라고 쓰겠지만 지금 저의 삶의 중요한 일부가 교회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소위 ‘교육전도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 경제적 필요를 이 사역(ministry)을 통해서 채우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를 하게 될 때는 ‘난 양다리 걸치고 있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부모님이나 저나 축적해 놓은 자본이 없기에 서툰 농사만 바라보고 몇 년을 살 수는 없기에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필연이고,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고, 일면 소명을 갖고 있는 일이기에 지속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몸이 왔다갔다하는 것처럼 때때로 마음도 두 곳을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외형적으로는 농부를 닮아가고 있지만 제 속에서 꿈틀대는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은 저를 틀 지우는 것들에 대한 저항의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도시에서의 삶, 그리고 나에게 요구되는 것들에 대한 일말의 항변을 하며 떠나오긴 했는데, 그래서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그리고 있었는데, 농촌은 농촌 나름대로의 틀이 있고, 농부다움이라는 저변에 깔려 있는 의식들이 어깨를 누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농부의 상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기운이 저를 감싸는 것입니다. 어쩌면 가족관계, 물질에 대한 의존,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성공에 대한 가치 등은 그대로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노골적이기까지 해 보입니다. 그러니 삶이란 도시든 농촌이든 같은 것이고, 결국은 환경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농촌은 충분히 좋고 매력적인 곳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시절을 따라 심고 가꾸고 거둠이 있고, 예전보다는 줄어들긴 했지만 생명의 순환이 있고, 무엇보다 땀 흘려 애쓰지만 결국 하늘을 바라 볼 수밖에 없는 삶의 마디들이 있는 곳이 이 곳 농촌이니까요. 그러기에 이런저런 고민들을 찾잔 속의 태풍으로 여기며 오늘도 감사와 기쁨으로 미완의 그림인 귀농의 한 부분을 그려가고 있습니다.

돌소리는
귀농학교 31기로 2005년 2월에 경북 상주로 귀농하여 교회사역을 겸하며 부모님과 함께 포도와 감 등을 주 작목으로 재배하고 있는 초보농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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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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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1년차

누군가에게 나를 귀농자로 소개하는 것이 아직 좀 어색하다.
여전히 ‘농(農)’자에 서툰 초보이기 때문이다.
말은 쉽지만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디 그리 만만한 일일까.
그래서 ‘농촌에 사는 거죠’라고 말한다.
그 말이 맞는 것이 아직 땅이라고는 한 평도 가지고 있지 않고,
남의 땅에 우리 먹고, 조금 나눠먹을 만큼의 몇 가지 작물들을 재배할 뿐이니 말이다.

땅 없이 농촌에 산다는 것을 60,70년대 농촌에 사셨던 분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가 보다.
소작을 하느냐고 약간은 안됐다는 눈빛으로 보는 분도 있었다.
때문에 반드시 땅을 가져야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신다.
물론 맞는 말씀들이기도 하지만
지금 농촌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다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을 알게 되실 거다.
땅을 가지게 되면 좀 더 안심, 안정은 될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만 부지런히 몸을 놀릴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다면 널린 것이 땅이고,
그 땅에 농사를 짓는 것이 과거처럼 결코 천대받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곳 분들은 나이 들어 힘에 부쳐 지을 수 없는 땅을 놀리지 않게 되어 고마워하신다.
문제는 그런 땅들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많아진다는 것이고,
몇 안 되는 젊은이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땅을 사들여 땅값만 올려 인심만 흉흉하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꼭 필요하다면 집터와 집 주변에 텃밭 정도는 확보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유기농이니 해서 생명농법을 하려 한다면 적게라도 자기 소유의 밭이 있어야
소신껏 투자를 할 수 있다.
아무래도 남의 땅에 관행농이 아닌 유기농을 하기는 쉽지 않으니까.

아무튼 농촌에 살며 농사를 짓는다는 것
아직 내 몸에 익지는 않았지만 나와 상관없이 한해가 가고 있다.
이웃 할아버지 하시는 일 곁눈질로, 귀농선배에게 전화로, 농사관련 책으로,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감각으로 한 해 농사를 지었다.
들깨는 들인 시간과 노력과 땀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수확을 했는가 하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참깨는 풍성하게 수확했다.
별 볼일 없어 보였던 감은 막바지에 효자 작물로 즐거움을 주었다.
살구, 호두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깜짝 선물이 되었고,
대문 밖 텃밭은 때마다 적절한 푸성귀들을 선사했다.
흙과 물과 양분과 공기와 태양의 조화, 그리고 하늘의 보살피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농촌의 생활도 많은 변화가 왔다.
그래서 도시처럼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는 생활의 부산물이 오염의 원인이 되고 있다.
각종 농자재들이 그러하고, 생활 쓰레기들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환의 가능성을 보면서
나 하나만의 청결을 위한 오염보다는 더불어 살아감에 대한 기쁨을 얻고 있다.
배설물들이 고스란히 흙으로 돌아가고,
흙은 대부분의 부산물들을 분해해 양분으로 바꾼다.
난 순환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을 분리하는 약간의 수고만 하면 될 뿐이다.

그러므로 나와 흙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흙에서 자라는 것들이 나의 밥상이 될 뿐만 아니라
나 또한 그들의 밥상이 되는 것이다.
서로에게 밥상이 되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곳,
그곳이 농촌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친구네 집 화장실 문에 붙어 있는 시를 옮겨 본다.)

김정원

똥이더라
밥이더라
밥이 똥 되고
똥이 밥되는 일이더라
교수보다 존경할 일이더라
시인보다 가난해지는 일이더라
연륜이 더할수록 부족함을 느끼는 겸손이더라
평생 겨우 오십 번밖에 해볼 수 없는,
희귀한, 예사롭지 않은 일이더라
인내와 절제와 땀이 진득하게 밴,
피 같은, 소박한 밥상이더라
길가 제비꽃 한 송이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두엄 속 지렁이 한 마리도 하찮게 여기지 않는
생명을 가꾸는 일이더라
각지불이(各知不移)더라
맨발로 하늘을 모시는 일이더라
공기처럼 물처럼 햇빛처럼 없으면
우리가 죽을 일이더라

200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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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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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을 하면서 하고 싶었던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물론 농사를 지으며 땀을 흘리겠다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
그리고 생태적 삶을 위해 하고 싶은 일들을 들라면
구들방에 불을 떼며 사는 것,
똥오줌 분리형 화장실을 만드는 것,
음식물 퇴비장을 잘 만들어 보는 것 등이었다.

그 중에 오늘 음식물 찌꺼기 퇴비장을 거의 완성했다.
안산주말농장에서 본 것처럼 널판을 사방으로 붙여 뚜껑을 덮는 구조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나무가 없을까를 찾아보았지만 집주변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나무를 사서 만든다는 것도 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퇴비장 만드는 일이 차일피일 미루어졌고, 대문 앞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곳은 포화상태에 이제는 악취까지 나게 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됐다.
그래서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대나무로라도 만들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대나무를 자르고 다듬고, 크기에 맞게 절단해서 세워 땅에 박은 네 기둥에 묶는 작업을 해야 했다.
생각으로야 그리 어렵지 않은 작업이지만 막상 철사로 하나하나 묶어 가는 작업은 시간도 더디고,
팬지를 쥔 손이 얼얼해서 작업 능률도 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일을 하려고 하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완성으로 두는 것이 어쩐지 거림직하고,
뭔가 끝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감자밭에 신문을 씌운 후 다시 시작했다.
대나무가 부족해서 숲에 들어가 더 베 오고 토막을 냈다.
철사도 없어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지만 녹슨 것이라도 쓰기로 하니 널린 것이 철사였다.
양 끝을 묶는 작업이니 시간은 좀 걸렸지만 쪼그리고 앉아 작업하는 내 어깨를 넘어 갈 때는 보람도 더불어 올라갔다.
더구나 퍼낼 수 있도록 한 쪽을 열어 두니 작업도 빨랐고 대나무도 적게 들어가 일석이조가 되었다.

지나가는 마을 분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곱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신기하다는 눈빛이다.
‘뭘 지어요?’ 하는 뒷집 창식이형.
‘개집 짖나?’ 하시는 기씨 아저씨.
충분히 그 분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모습이니.
만들고 보니 길에서 너무도 잘 보이는 곳에 대나무 빛 짙은 초록색을 드러냈다.

생태적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
그리고 그것을 실현해 가는 과정.
어쩌면 그것은 자연이 살아 숲 쉬는 이곳에서 더 생경한 풍경이다.
음식물 찌꺼기를 따로 모아 거름을 만들겠다고 조그만 퇴비장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우습게 보일까?

보너스로 굵은 대나무를 가져다가 드릴로 구멍을 뚫고 얇은 가지를 비스듬히 다섯 개 정도 박아 넣어 옷걸이를 만들었다.
작업복을 걸기 위한 것으로 문 밖에 두는 것이다.
아무래도 작업하던 먼지 붙은 옷을 집 안에 쌓아두는 것이 꺼림직 했다.
아무튼 아이디어는 좋았는데 완성도는 좀 떨어지는 것 같다.

애물단지 같은 대나무를 이렇게 저렇게 활용할 수 있어 좋다.

2005.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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