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곳을 위해

출25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출애굽기에서 가장 재미없는 부분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산에 오른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성소와 회막 건축에 대한 자세한 설계도를 받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언약궤, 진설병 상, 등잔대 만드는 법을 25장에서 명하십니다.

3D영상으로 만들어 보면 재미가 있을 것도 같은데, 그냥 글로만 대하니 정말 뭔 소린지 알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일단 이 모든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초가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드린 예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눈길을 끕니다.

예물의 존재가치는 ‘기쁜 마음’에 있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드린 예물만이 성소와 회막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성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들의 마음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이나 성소는 하나님과 백성의 마음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마음이 함께 할 때 성소와 그 안의 기명들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상징하지만,

마음이 빠져 버릴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삼상 4장에서의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기는 사건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는 어떨까요? 하나님과 마음의 만남이 있는 곳입니까?

혹시 세속적 가치가 횡횡하며 참된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사적 욕구 해소를 위해, 부질없는 외형적 체면에 매어서

마음 없는 껍데기만의 헌신으로 드림을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무리 멋들어진 모양을 하고, 화려하게 치장한다고 해도

하나님과 사람들의 마음의 만남이 없다면 돌과 나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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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한 아이가 헌금 봉투에 1,000원이라고 쓰고 넣어둔 쪽지입니다.

엄마가 찔러 주어 아무 생각 없이 아이의 손을 거쳐 헌금함에 들어간 어떤 헌금보다 소중한 예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받으시지 않으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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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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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만나는 하나님

출24

9 모세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장로 일흔 명과 함께 올라갔다.  10 거기에서, 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깔아 놓은 것 같으며, 그 맑기가 하늘과 꼭 같았다.  11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손으로 치지 않으셨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뵈며 먹고 마셨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백성들 앞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너무도 놀라운 광경 앞에 백성들은 놀라다 못해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시내산은 더없이 성스러운 장소로 보였을 것입니다.

특히 뽑혀서 올라간 70명의 장로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이 하나님을 뵈며 먹고 마셨다.”

이 얼마나 멋진 순간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먹고 마셨다니.

그런데 왜 저는 이 장면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봐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이로운 일을 경험한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일들을 벌이는 지 뻔히 알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너무 멀리 나가는 것 같아 다소 생뚱맞기까지 한 이야기를 떠오르는 대로 좀 해 볼까 합니다.


이렇게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표현할 때,

‘시내산에서 나타나신 하나님’, ‘시내산의 하나님’ 쯤으로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목격한 하나님의 모습을 기억 속에 새겨 놓으려고 안간힘을 쏟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경험한 상황 속에 아예 못 박아 놓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시내산, 시내산, 시내산...

그러나 하나님은 시내산에 살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또 그들이 시내산에서 목격한 하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전부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재대로 보지도 못했고, 볼 수도 없었습니다.

모세조차도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해 친히 손바닥으로 덮고 지나가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뒷모습만 잠시 보았을 뿐입니다(출33:23).

그러니 장로들이 하나님의 발 아래만 보았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면서 자신들의 짧은 언어로 규정하려 합니다.

이후 아람왕의 신하들이 하나님을 산의 신 운운하는데(왕상 20:23),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도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당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아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을 뿐인데,

그렇게 하나님을 한 마디로 정의하려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결국 다른 모습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알아보는 데 커다란 장애물이 됩니다.


이렇게 제한적인 감각에만 의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자세는

40일도 인내하지 못하고 바닥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는 것 너머,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범위 밖에 계신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에게 눈높이를 맞추어 주시고,

우리들을 이해시키시지 위해 몸 낮추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기 위해 보여주신 그 사랑의 크기보다

그 사건의 주변적인 것들에 얽매여 새롭게 나를 만나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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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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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미 찍고 왔다.
부재자 투표!

버스로 세 정거장 가서 200미터 더 걸어서 찍고 왔다.
차라리 스타벅스를 찍어서 국회로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스타벅스는 최소한 입점하는 지역과 어울리는 컨셉으로 매장을 꾸미고
가능한 고객에게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은 하니깐.
뭐 고객의 주머니를 털어 가기 위한 술책이긴 하지만.
맛있는 커피라도 맛보게 하니 그냥 봐 줄 수 있겠다.
사회환원을 쥐꼬리만큼도 하지 않았다고 며칠 전에 기사가 나긴 했지만,
국회의원들이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는 것에 비하면 피해는 훨씬 경미하다고 해야 할까.

암튼 경북 상주시 출마자 중에는 찍을 사람이 없었지만
비례대표를 찍기 위해 좀 먼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가서 찍고 왔다.
선거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행사였으면 좋겠는데, 갈수록 절망을 주니 답답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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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를 하니 이런 것도 주던데.
투표확인증-공공시설 2,000원 할인
좀 더 쓰지 2,000원이 뭐야!
환승할인 덕분에 교통비 900원 들었으니, 1,100원 남네.
명바기 아저씨 덕분에 900원 덕봤다고 감사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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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원칙, 우상의 변칙

출23

1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너희는 다른 신들의 이름을 기억해서는 안 되며, 입 밖에 내서도 안 된다.


다른 신들의 이름이란 무엇일까요?

신을 섬긴다는 것, 믿는다는 것은 그 신의 가치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 신의 가치는 사람들에게 삶의 원칙 혹은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율례를 이르실 때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가장 경계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위 말해 우상숭배를 한다는 것, 당시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상황에 따라 여러 다른 신들을 섬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일관된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자기를 편의에 맞는 기준을 들이 들이 댈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아무래도 가진 자들의 입장에서 더없이 편리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잇속을 챙기기 위해 ‘신’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고,

약자 일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좇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의 한결 같은 원칙은 공평함과 배려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의 규례를 주시며 여종의 아들과 몸 붙여 사는 나그네,
심지어 소와 나귀의 ‘숨 돌릴 틈’을 생각해 주시는 분이시지만,

그들이 잘못했을 때조차 무조건 편들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원수와 미워하는 자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분명하고 아름다운 원칙입니까?

그런데 만약 다른 신의 이름을 부름으로서 이런 원칙들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사회는 금세 종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져들지 않겠습니까.

정의는 사라지고, 서로를 믿지 못하고, 위선과 아부가 난무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칙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하지만

우상의 변칙은 ‘그래도 된다.’고 말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래도 된다.’에 마음이 더 끌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대부분 좋게 표현해 다신교 숭배자들이고,

성경대로 표현한다면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왜냐면 가는 곳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원칙을 가지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칙의 횡횡’이 오늘날 우리들의 초상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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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보기를

출22

2 밤에 도둑이 몰래 들어온 것을 알고서, 그를 때려서 죽였을 경우에는, 죽인 사람에게 살인죄가 없다.

3 그러나 해가 뜬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그에게 살인죄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2장에서 소유권 침해에 대한 말씀을 주십니다.

그 첫 번째가 도둑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도둑이 밤에 몰래 들어온 것을 알고, 그를 때려서 죽이면 죽인 사람에게는 살인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해가 뜬 이후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비록 상대방이 도둑이라 할지라도 그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을 때는 죽이면 살인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재산이 중요하고, 다른 사람들의 것을 몰래 가져가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는 데 그것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밤에 어두워 서로를 알아 볼 수 없을 때는 내 생명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해가 떠서 상대를 알아 볼 수 있을 때는 도둑이지만 그 생명 또한 지켜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도둑일지언정 ‘사람’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십계명을 범하다 걸린 것이라 해도 그는 먼저 사람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누군가를 사람으로 보려하지 않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자기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보다도 못하게 여기지는 않는지.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하시는 말씀 속에서도 백성들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지라고 말씀하시면서도,

그 율법의 근간이 사람에 대한 믿음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요사이 유괴와 살인 등 극악한 범죄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범인이 잡힌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그 가족들이나 경찰에게나 견디기 힘든 시기를 보내게 합니다.

최근 잡힌 범인은 오락가락 진술을 번복하면서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약간의 아쉬움은 그 범인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를 사람으로 봐 주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지만 그도 역시 우리와 같은 존중받아야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이야기>

언제 아침이 시작되는가?


늦은 밤, 스승과 제자들이 화톳불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이런 저런 잡담들을 나누다가,

문득 하늘에 빛나는 달과 별들을 바라보면서 모두들 침묵에 잠겼다.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스승이 입을 열었다.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한 젊은이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멀리 있는 짐승을 보고 그것이 개인지 양인지를 분별할 수 있으면,

그 때가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 아닐까요?”


"좋은 대답이군,"스승이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답은 아닐세.”

제자들은 잠시 의논한 끝에, 두 번째 젊은이가 대표로 말했다.

"빛이 나뭇잎에 내릴 때 그것이 소나무 잎인지 참나무 잎인지를 분별할 수 있으면

그 때가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이번에도 스승은 고개를 저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훌륭한 대답이지만, 역시 내가 찾는 답이 아니네.”

제자들은 머리를 모으고 생각해보았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스승에게 간청했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해주십시오."


스승은 제자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 눈을 들여다 볼 때 형제나 누이가 보이면 아침이 밝은 것이고,

형제도 누이도 보이지 않으면 아직 캄캄한 밤중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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