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하나님을 위로하다

출32

10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14 모세가 이렇게 간구하니, 주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시고, 주님의 백성에게 내리시겠다던 재앙을 거두셨다.

19 모세는 화가 나서,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돌 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내던져 깨뜨려 버렸다.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니, 바로 그 날, 백성 가운데서 어림잡아 삼천 명쯤 죽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완전히 없애 버리시겠다는 하나님을 일단 진정시키고 산을 내려왔지만

정작 백성들의 타락한 장면을 목격하고는 화를 참지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 돌 판 두 개도 내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또 백성들 서로를 죽이게 하여 삼천 명쯤을 죽게 했습니다.

실로 참혹한 장면이 아닐 수 없지만 어쩌면 모세 덕분에

더 큰 재앙이 피하고 삼천 명의 희생으로 마무리 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후 수송아지를 만든 일로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셨지만(35절)

모든 백성을 향한, 또 기록에 남을 만큼의 전면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와 백성들 앞에서 너무도 다른 모세의 행동에 의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세의 이런 행동이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막았기 때문에 마음을 돌리기는 하셨지만

화나고 괘씸한 마음은 그대로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모세가 돌 판을 던져 깨뜨려 버리고 또 백성들을 향해 화를 낼 때

하나님께서 속 시원해 하시며 위로?!를 받으셨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느끼는 모세의 존재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대신해 화를 내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린 덕분에 이스라엘의 대부분은 생존의 은혜를 입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대신해 화를 내고 있는지요.

하나님의 공의의 분을 품는 사람들의 존재가 점점 희박해 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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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출31

6 분명히 나는 단 지파 사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이 브살렐과 함께 일하게 하겠다. 그리고 기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지혜를 더하여, 그들이 내가 너에게 명한 모든 것을 만들게 하겠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친히 쓰신 증거판을 주시는 장면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하시는 말씀 중에

두 기술자를 뽑아서 일을 맡기라고 하시는 부분에서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굳이 사람의 손을 빌려서 성막을 만드셔야만 했나?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실 곳이 생기는 것이었나?

성막이 만들어 지고, 제사장의 제도가 서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나?

함께 하실 수 없으셨나?

그 이전에 아브라함을 포함한 성조들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불완전한 것이었나?


어쩌면 이 제사제도가 세워지는 부분에 냄새가 납니다.

순수한 신앙의 발로라기보다는 종교주의자들의 손길이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제도와 절차를 통해 사람들을 길들여 자신들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이후 역사를 보더라도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혹은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관계가 진전되는 것을 별로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전 혹은 유사성전들로 인해 백성들은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할 뿐이다.

물론 제도라는 안전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안정되게 하나님 이야기가 전승되어 갈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안정이라는 것이 함정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안정을 가장 중심으로 놓다보면 하나님께서 전해 주셔서 만들어 놓은

지극히 과정적이고, 수단일 수밖에 벗는 것들이

목적이 되고 대상이 되어 버리는 일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홀리압과 브살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언약궤가 그 자체로 신통력을 지니기라도 한 듯이

사람들이 그 것은 부적으로 만들어 버려서 전쟁터에서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여기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분명히 발생합니다(삼상 4장).

그러니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성전을 무참히 무너트려 버리실 때

그 성전은 이미 백성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로 하나님께는 아무 의미도 없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소통)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일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성도들이 특정한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되는 것은 본말이 크게 전도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언약궤가 거룩합니까, 그것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거룩한 것입니까?

교회가 거룩합니까, 그 안에서 사람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이 거룩합니까?

사람의 손을 통해 세워지고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릴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만남을 통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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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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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것은 쉬운 거다

출30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3 "너는 제일 좋은 향품을 취하되, 순수한 몰약을 오백 세겔, 향기로운 육계를 그 절반인 이백오십 세겔, 향기로운 향초 줄기를 이백오십 세겔,

24 계피를 오백 세겔, 이렇게 성소 세겔로 취하고, 올리브 기름 한 힌을 취하여라.

25 너는 향을 제조하는 법을 따라 이 모든 것을 잘 섞어서, 성별하는 기름을 만들어라. 이것이 성별하는 기름이 될 것이다.


출애굽기가 전하는 제사장 이야기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예수님 때문에 더 힘들어 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정해주신 절차와 공식대로 만들고 따라하면

그 자체로 구별되고 거룩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공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가타부타 이야기할 여지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대로 전하는 역할, 물론 이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마음’의 문제를 이야기 하시면서

상황은 전혀 다른 쪽으로 돌아서버립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외모에서 중심으로 옮겨 갔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실은 그것이 예수님이 선언을 하신 것이지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으로 보시고 계셨습니다.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때도 그러하셨고,

이스라엘의 불순종 앞에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주실 때 반복하신 말씀의 주제가 마음이었습니다.

육체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라고 목청 높여 전하셨으니까요.

그러나 겉모습에 중심을 두고 그것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던 이들에겐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국 모세를 통한 모세의 세대에 마침표를 찍으시고,

예수님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세대가 도래하도록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겉으로 보여 지는 절차와 외모에 따라서가 아닌

마음으로 판단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때문에 더 어려워졌다고 감히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망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모세를 부르시어 당신의 백성을 만드시기 위해 율법을 주셨던 것이 은혜였듯

예수님을 통해 마음의 길을 열어 주신 것 또한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는 우리가 진심으로 나아갈 때 또한 하나님의 진심어린 마음과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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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의 마음

출29

1 나를 섬기는 제사장을 거룩히 구별하여 세우는 절차는 이러하다.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두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골라라.

2 그리고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누룩 없이 기름만 섞어 만든 과자와, 누룩 없이 기름만 바른 속 빈 과자를, 고운 밀가루를 가지고 만들어라.

3 너는 그것을 모두 한 광주리에 넣어서, 수송아지와 두 마리의 숫양과 함께 광주리째 바쳐라.


여전히 실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하라’고 이르시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보다 생생한 장면은 출애굽기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명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오히려 여기에서 자세한 사항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28장에서 제사장의 옷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29장에서는 그것을 제사장에게 입히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옷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냥 제사장의 일을 할 사람이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그 절차에는 또 희생이 따랐습니다.

희생이 없이는 제사장으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과거에 범죄 한 사실이 있고, 현재 흠(결격사유)을 가졌다면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희생은 자신도 모르게 지었을지도 모르는 죄를 위한 것이고,

장래에 지을 지도 모르는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제사장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자신에게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기에 그 직무를 감당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했습니다.

백성 중에서 정해진 요건을 갖춘 자가 정해진 절차를 밟았을 때 거룩한 직임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제사장은 자신이 입은 옷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때부터 타락이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면 그는 분명 그 옷을 자신의 권력으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그의 옷이 그인 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되는 자는 옷에 감추어져 있는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기 위해

내적 자신으로의 끊임없이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백성들도 그러하지만 제사장들은 더더욱 자신이 드리는 짐승들이 불태워질 때

그것과 함께 자신의 속되고 거짓된 자아를 함께 태워버리는 의식을 성실히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야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의 타는 냄새를 향기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불태워지는 짐승의 살과 기름에는 아무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제사장의 낮은 마음이 함께 할 때에라야 진정한 능력이 있는 제사,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되는 더 중요한 절차, 희생은 바로 제사장의 마음의 태워짐이었습니다.

자신을 남김없이 산화시키는 헌신만이 그를 제사장으로 거룩한 자리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거기에 있었다면, 예수님이야 말로 최고의 제사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그것을 조금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허덕이고 있으니

하나님의 긍휼이 더더욱 크게 느껴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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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필요한 은혜

출28

2 너는 너의 형 아론이 입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보이는 거룩한 예복을 만들어라.

3 내가 슬기로운 생각으로 가득 채워 준 모든 재주 있는 사람을 불러다가, 나를 섬길 아론이 제사장이 되어서 입을 예복을 만들라고 하여라.

4 그들이 만들어야 할 예복은 이러하니, 곧 가슴받이와 에봇과 겉옷과 줄무늬 속옷과 관과 띠이다. 이렇게 그들은 너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만들어 주어서, 나를 섬기는 제사장 일을 맡게 하여야 한다.


1.
출애굽기 28장은 성소의 사람인 제사장이 입을 옷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옷을 이르시면서 ‘거룩’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시는데,

제사장의 옷이 ‘거룩한 예복’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되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거룩할 수는 없습니다.

그에게 맡겨진 일이 거룩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거룩한 직임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예복으로 자신의 개성, 한계, 허물을 가렸던 것입니다.


제사장의 직무는 하나님의 의지로부터 온 것이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명하신 것이고, 임명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이 된 사람이 자신이 거룩하고, 위대하다고 오해,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화려한 옷, 화려한 자리에 앉을수록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더욱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화려한 옷은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위한 배려로 주신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 화려한 옷을 보고 제사장을 존경하고, 자신들과 다른 존재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사장은 그럴수록 더욱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의 은혜를 더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거룩한 옷 입기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어찌 자신이 그 옷을 입을 수 있는지 괴로움에 휩싸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에 우쭐하기보다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직무의 무게를 생각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
목사임직을 앞두고 있습니다.

목사가 된다는 것, 그것이 저의 존재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끊임없이 저의 존재를 갈고 닦는 일은 계속할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가 구약에서 말하는 제사장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 된 사람이 감당하는 일의 중대성은 과소평가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사라는 이름의 옷은 거룩한 예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저의 고백은 ‘주님의 은혜가 더욱 필요합니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아니면 조금도 나아갈 수 없는 자리가 또한 ‘목사의 자리’가 아닐까요.

주님의 은총이 더욱 필요하고, 함께하는 사람들의 기도가 더욱 필요하고,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는 갈고 닦음이 더더욱 필요합니다.

아마 자신의 내적 모습이 볼품없을수록 더욱 화려한 ‘예복’을 입으려고 안달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경계하며 저 자신의 존재를 예수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더욱 겸손해져서 낮은 마음을 품기를 소원해 봅니다.

목사, 그래서 조금도 눈에 띄는 어떤 옷도 필요하지 않고,

존재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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