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 어느 방향으로

출 36:5 이르기를 "백성들이, 주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는 데에 쓰고도 남을 만큼 많은 것을 가져 오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성소를 짓기 위해 금은보석은 물론 실로 천을 만들어 바치는 일에 앞 다투어 달려듭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기간의 열심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 보이는 것과 같은 열심으로 32장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열심을 내는 모습, 그 자체를 놓고 평가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대개 열심히 뭔가를 하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방향이고, 의도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지도자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열심을 하나님의 성막을 만드는 데에 사용하도록 했지만,

아론은 똑같은 열심을 금송아지 우상을 만드는데 사용하게 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열심을 굉장한 미덕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이 특심인 교회들은 다른 교회 목회자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하지만 그 열심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방향이 잘못되어 있을 때가 너무도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열심이라는 것이 얼마든지 우상에게로, 이단에게로도 향할 수 있고,

그래서 이단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이 더 특별한 열심을 보이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열심이 없음을 탓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열심을 내야할 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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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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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하나님의 선물

출35(표준새번역)

1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아 놓고 말하였다. "주께서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명하신 말씀은 이러하다.

2 엿새 동안은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렛날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 곧 주께 바친 완전히 쉬는 안식일이므로, 그 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형에 처해야 한다.

3 안식일에는 너희가 사는 어디에서도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


출애굽기에만 안식일 언급이 다섯 번이나 등장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양식인 만나를 주시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일은 쉬는 날로서, 주님의 거룩한 안식일이니, 당신들이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으십시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당신들이 다음날 먹을 수 있도록 아침까지 간수하십시오.” 16:23

십계명을 주시면서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20:10

안식년과 함께 다시 이르시면서
“너희는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의 소와 나귀도 쉬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여종의 아들과 몸붙여 사는 나그네도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23:12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이르시는 것을 마무리 하시며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징이니, 이는, 나 주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면서 숨을 돌렸기 때문이다.” 31:17

그리고 출애굽기 35장,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의 사건을 지나고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성막을 지으려고 하는 시작점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안식일 규례를 명하십니다.


‘맞아 안식일에는 뭐든 일을 하면 안 돼!’라고 생각하며 넘어가면 쉽겠지만,

안식일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아 보입니다.

결국 율법을 철석같이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에게 안식일은 그런 삶의 지표와도 같은 것이었고,

이렇게 누차 하나님께서 강조하셨다는 데서 더 확실한 정당성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그들의 반대편에 서 계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 12:8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 마 12:12


좀 비약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안식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종교인과 신앙인이 나눠진다고 생각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과

안식일에 담긴 의미,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은 같을 수 없는 것이니까요.

아마 출애굽기를 쓰고, 또 바로 받아서 읽었어야 했던 사람들은

보다 강한 어조의 율법의 경구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초보적 신앙 단계에서 바로 의미나 의도로 가버리면

자유가 아닌 방종으로 희석되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있어서, 또 예수님을 믿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 준수의 문제는

단지 문자적인 준수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마도 예수님은 보다 더 강력하게 말씀하셔서

‘안식일 해체자’ 혹은 ‘율법의 파괴자’로까지 비춰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물론 앞에서도 약간은 이해가 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종교인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사람이라면,

신앙인은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는 사람입니다.

뭐 신앙인이라는 표현이 좀 부족하다고 생각하실 분도 있지만

일단 이 논의에서는 더 나아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종교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힘들게도 보일 수는 있지만 마음은 편할 것이고,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겉으로는 쉬워 보이지만 실제 그 내면은 끊임없는 갈등의 연속(수행)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종교인에게 전혀 신앙이 없다든지

신앙인에게 종교적인 행위나 절차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에게 안식일이라는 율법이 없었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알아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수준(?) 이상이 되었을 때는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어쩌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유로움으로 옮겨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껍데기들의 이면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때로 목숨처럼 여기는 제도와 규율들을 넘어서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교회에 더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자연스러워 지기 보다는 더 경직되어 갑니다.

내면으로는 이미 규율을 규율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자유로운 사람들이나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옭아매려는 규율에 규율을 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해 준 그런 규율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안식일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출애굽기에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안식일은

그리스도교를 통해 주일로 바뀌기는 했지만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사이 주5일 근무를 이야기하며 5일 일하고 이틀을 쉬는 이들도 있지만,

6일을 일하고 하루를 쉬어야 한다는 것은 실로 파격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다른 율법들에 비해 가장 실천되기 어려운 것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어차피 가진자 힘 있는 자들은 안식일이든 아니든 일하지 않았습니다.

놀고먹으며 힘없는 이들, 노예들, 나그네들, 심지어 종의 자식들의 노동 덕분에 먹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도 쉽게 지켜지지 않을게 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섯 번이나 반복하시는 데는 이렇게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이해한 안식일은 초점이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대한 주권을 선언하시고, 또 그 날 선한(좋은) 일을 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신 것은 정말 옳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수고롭게 살아가는 인생에게 베푸신 최고로 좋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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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는 지도자

출34

29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34 그러나 모세는, 주님 앞으로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말할 때에는 수건을 벗고, 나올 때까지는 쓰지 않았다. 나와서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 때에는,

35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게 되므로, 모세는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까지는 다시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모세는 또다시 산 위에서 하나님과 40일을 보내고 다시 만든 돌 판을 들고 내려옵니다.

그런데 지난번과 달라진 것은 모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납니다.

너무도 간절한 모세의 태도 덕분에 하나님께서 더 가까이 다가오셔서 이야기 하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모세는 처음에 자신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광채 나는 얼굴 그대로 백성들과 이야기를 했지만,

광채가 나는 것을 알고, 또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알자

그 때 부터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만날 때는 수건을 벗었다.


언 듯 생각해 보면 인위적으로 조작한 것도 아닌데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면

좋은 기회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집트의 파라오였다면 자신이 신의 아들, 혹은 신이라고 떠들며

백성들을 자신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는 좋은 도구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있어서 얼굴의 광채는 그것이 비록 하나님을 만남으로 얻게 된 것이라 해도

백성들이 두려워 한다면 장애물일 뿐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그것과는 달리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백성들을 더 강하게 장악해서 지배하려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모세의 위대성을 엿볼 수 있고, 왜 하나님께서 모세를 선택하셨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사귐의 시간을 통해 광채와 같은 능력을 얻더라도
 오히려 그것을 뒤로 감출 수 있는 사람,
광채 뒤에 그대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해야 할 작은 일들에 성실히 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서 빛나는 광채, 또 어떤 능력도 하나님의 것이며
잠시 스쳐가는 지나가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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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한다고 큰 소리 처놓고서는 뒷심 부족에 발목이 잡혀 버렸다.
더구나 목사 안수 받은 후유증(?)까지 겹쳐서 하루 한 두번 블로그에 얼굴 도장만 찍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니 야심차게 시작한 하나님이 이끄는 40년은 출애굽기도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으이그...

빈손의 지도자

출34

8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서 경배하며  9 아뢰었다.
"주님, 주님께서 저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사실이면,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 백성이 고집이 센 백성인 것은 사실이나, 주님께서 우리의 악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주님의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모세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노심초사 하고 있습니다.

다시금 산에 올라 하나님을 대하고 있으면서도 반복해서 함께 가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렇듯 모세의 영향력(카리스마)은 하나님과 밀고 당기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백성들에게 전하거나,

하나님을 향해 백성들을 대변하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발할 수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향해서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모세가 얻은 것은 없습니다.

오직 혜택은 백성에게,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물론 백성이 얻은 혜택은 최소한의 희생을 감수한 후에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모세의 역할이 있었기에 수준 이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힘겨운 훈련의 여정을 통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사이 만나게 되는 지도자들은 대개 반대로 합니다.

백성들에게는 아부하고, 하나님의 이름에는 먹칠을 합니다.

인기에 영합하는 가벼운 존재들에 의해 벌어지는 필연적 결과입니다.

그들의 손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들려져 있습니다.

빈손의 지도자였던 모세와 대조되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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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통(通)하는 사이
출애굽기 33장
17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잘 알고, 또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서, 네가 요청한 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마."
18 그 때에 모세가 "저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

하나님께서 같이 가시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던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얼굴)을 보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전에 산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백성들의 죄악에 대해서 들을 때보다 백성들의 상태가 더 나쁘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모세는 불안해진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모세의 진가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내겠다는 애틋한 사랑도 그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의 탁월성이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그것과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가지고 있는 마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닌 속에 갖고 계신 근원적 마음과 같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 주실 때 불쾌하거나 끌려가는 기분이 아니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못내 들어 주시는 것처럼 하셨지만 실은 모세의 이와 같은 태도에 뿌듯해 하시며,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고자 하시는 일을 더 쉽게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할 때 숫자를 줄이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부탁을 들어 주시기로 하셨지만, 그것이 모세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임을 알고 계셨기에 곧바로 타협안을 제시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서 있을 때 당신의 손으로 그를 덮고 지나가신 후 손을 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하나님을 정면으로 보고 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모세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고 싶으셨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최선을 다해 모세의 마음을 만져주시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실로 엄청난 일 앞에서 크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무지한 백성들을 인도하며 힘들고 지칠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본 전무후무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뒷모습 밖에 보지 못했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어쩌면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하나님의 모습이란 하나님의 뒷모습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사랑, 정의 등등의 것들이 그만큼 온전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면 우린 하나님의 일부분만을 만나고, 접촉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하나님을 전부 아는 것처럼 큰 소리를 낸다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모세조차 하나님의 뒷모습을 잠시 보았을 뿐인데 말입니다.


하나님 없는 성막을 지을 수 없다

모세가 성막을 짓기 전에 큰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실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세하게 성막의 식양을 주셨고, 이젠 성막을 짓기만 하면 되지만 하나님 없는 성막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텅 빈 성막만을 가지고 가본들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군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모세의 긴장의 이유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꼭 함께 하신다는 확증 아래서 그 분의 성막을 짓겠다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 없는 성막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관심과 요청을 뒤로 하고 자신들의 것만을 챙기려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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