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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교역자들과 갔었던 곳 사진들.
누가 보면 놀러만 다닌 줄 알겠네.

2008년 운보의 집, 속리산, 법주사





2008년 횡성, 강릉



2009년 미시령, 속초, 낙산




2009년 남이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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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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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하는 사람들이나 설교를 하는 사람들은 흔히 나의 강의(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잘) 변화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내가 어떻게 하면 그들이 '이렇게'(자신의 생각대로) 될까를 생각하는 것이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 아닌 다른 사람, 혹은 자신이 속한 그룹 외의 다른 그룹을 대상화 타자화한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타자화 하고 있는데,
정말 타자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잘 생각해 보면 세상에 타자란 없다고 볼 수 있겠다.
왜냐면 모두 주체로서 존재하지 객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독립된 존재로서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생산자요 소비자이다.
그러므로 일방적으로 나는 주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받기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강의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감정을 주고받고 있는 것이다.
청중도 감정을 생산하고 있고, 당연히 강의자는 그것을 받고 있는 것이다.

늘 영향 받고 변화되어야 하는 것들을 자신 밖에서 찾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밖이, 타자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느낄 때 그 말은 이미 자신의 변화라는 말로 바꾸어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바꾸어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을 타자화하는 것만큼이나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타자화하는 것도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온통 촉각을 세우고 사는 삶이 그것이다.
변화의 에너지가 자신으로부터가 아닌 밖으로부터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삶이 너무도 피곤할 것이고, 옆에서 보기에 가엽기까지 하다.
언제 제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볼까?

누군가를 타자화하든, 나를 타자화하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자타를 구분하지 말고 똑같은 '나'로 인식하는 태도라 하겠다.
모든 이들을 나로 인식하게 될 때, 삶이 좀 더 따듯해 질 것 같다.
상대방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며, 상대방의 허물을 나의 허물로 여길 뿐만 아니라
그의 기쁨도 함께 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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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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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부에서 아이들이 큐티를 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시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아이들 입에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신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이 두 문장이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시련을 주실까?
성경을 보면 그 대답을 얻을 수 있을까?
뭐 단련하신다고 할 수도 있고, 다 뜻이 있으셔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고,
좀 정성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약간은 미신적인 표현으로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봐도 인간들이 처한 상황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정답은 찾을 수 없다.

성경은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성경은 답안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인생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히 결론을 지을 수 없는 것이니
무 자르듯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다.
조급한 마음에 한 마디로 정의 할 수 없는 것인 것 같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정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에 빠진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 그리스도인 삶, 신앙이라는 것,
고통, 시련,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 간단하게 풀릴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성서는 오늘의 우리와 똑같이 그런 의문에 휩싸였던 이들의 긴 여정을 담고 있는 책이다.
굴곡 많은 인생을 살며 그만큼 큰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씨름했던 이야기들을 전하는 책이다.
그래서 그들은 크신 하나님의 일부분에 접촉한다. 
그들이 그려내는 하나님 이야기의 결론은 하나님에 대한 것은 모두 '알 수 없음'이고
그 분의 사랑만은 확실히 '알 수 있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모습을 추출해 낼 뿐이다.
시련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과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오늘 내가 그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서가 혹은 설교가 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으로 교인이 되고 교회에 오는 것도 문제일 수 있으나,
더 큰 문제는 그런 생각으로 설교하는 목회자들에게 있다.
자신이 접촉한 하나님의 모습을 절대화, 공식화해서
다수의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이미 하나님은 그 모습으로 계시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은 다른 모습,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나시기 때문이다.

어쩌면 각자가 갖고 있는 삶이라는 것은 일생, 아니 그 이상을 통해 풀어 가야할,
또는 그 과정을 통해 풀려질 '나의 과제'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의존하게 된다면 자신이 해결해야할 숙제를 엄마에게 부탁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꼴이 된다.
몇 번은 가능할 지 몰라도 그 습관이 계속된다면
그는 아마도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의 끄트머리만 좇으며 흉내내고,
연기하는 삶이 되고 말 것이다.

성서를 읽으며 그들의 부르짖음, 고뇌에 응답하셨던 하나님께서
나에게 또 어떻게 응답하실 지를 기대하는 삶,
그래서 늘 변화무쌍한 다양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인의 길을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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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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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15

요즘 교회들이 사람들을 모으는데 열심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사람을 모아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사람이 되게 하기 보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들기위해 노력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 교회에 다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됨보다 교인됨을 좇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학교 교육이 그러하듯 제도교회의 '바보만들기'에 수해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교회와 목회자들의 기준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과 만남을 갖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인가?
물론 전자가 후자와 일치한다면 문제는 없지만
눈을 씻고 봐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까움이다.

교단이 나서서 정책으로 숫자를 정하고 전도하겠다고 하는데,
우연인지 의지적인 것인지 현정권에 대단히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도 웃지 못할 진실이다.
성공적으로 성도들을 시대적 문제들에서 떨어뜨려 놓고 있으니 말이다.
뭐 대단한 출정이나 하는듯 구호를 외치고 난리를 하니 이성은 둔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전도를 해서 사람들을 모아 교회를 채운다 한들
그들이 지금 교인들보다 더 낳아지리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하는' 사람들인 바리새인들의 이야기가 먼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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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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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일로 밥먹고 사는, 소위 전문가들이 문제의 중심일 때가 많다.
그쪽 방면에 일각연이 있다고 하니 비전문가들은 그들을 따를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도움을 받아야 하니 전문가들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쩌면 전문가들이 사람들이 자신들의 도움을 받도록 구조를 만들어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전문가들은 지속적으로 자신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이런 구조를 재생산해 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비전문가들의 수준을 높이려고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들이 제자리 걸음을 하게 만들고 있고, 
어려워 할 때 살며시 다가가 '그봐 잘 안되지? 나에게 부탁하면 되'라고 손을 내민다.

사람들의 과제는 이 종속의 고리를 끊고, 홀로 서는 것이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더라도 그 기간을 한시적으로 제한하자.
왜냐면 처음에는 배울 필요도 있으니까.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졸업을 할 수 있는 거다.
졸업을 못하고 그냥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성장이 멈추어 버린 것이다.
계속 초등학교 선생님에게 배울수만은 없는 것 아닌가.

사실은 교회 이야기를 하고 싶다.
교회의 전문가들(종교인들)...
정말 신앙생활에 전문가가 존재할 수 있는것인가?
계속 필요한 것일까?

그들이 하나님을 막고 서 있는 것은 아닐까?
또 성도들을 수단화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목적인데도.
신학교는 교회와 자신들에 대한 비판적 대안이 아닌 밥그릇(교회)을 키우는 훈련만 하는 것 같다.
본질은 멀찍이 두고서 말이다.

전문가가 없는 교회, (전문가가 전혀 없을 수는 없으니) 졸업할 수 있는 교회를 꿈꿔본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말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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