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신데, 나는 (소위) 하나님의 일을 보고 있다."

8박9일의 예수마음배움터 피정을 마치면서 나에게 던지는 말은 '어디 보니?'
하나님이 보시는 곳을 같이 볼 수 있으면 생활은 많이 달라진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두려움과 불안 휩싸여 고민할 일은 현저히 줄어들고,
오늘, 아니 지금 이 순간을 깊이 누리게 된다.
이 순간이라 함은 바로 지금 나의 마음에 대한 관심이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가 가을 하늘처럼 맑아지는 경험을 하는 거다.
'관상'이라는 것이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런지.

하나님, 이 순간 저의 마음을 말끔히 비울께요.
하나님께서 가득하시도록 말예요.

'깨어살리 > 日步'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께걷기01_기적이 따로 있나?  (0) 2009.10.09
집중의 흔적이 있는지  (0) 2009.10.07
twitter에 가입하다.  (0) 2009.10.03
목소리를 낮추기 전에  (0) 2009.09.04
내 인생 최고의 순간  (0) 2009.09.02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주된 목적은 경운기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계속 세워만 놓는 것 같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팔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려간 김에 텃밭이지만 적지 않은 농삿일에 품을 보탰다.
참깨 순치기.
정확히 말하면 더이상 자라지 말고 이미 달린 열매들이 더 실해지라고 맨 위에 꽃이 달린 부분을 잘라주는 거다.
손톱 끝이 시컴해지고, 끈적끈적해 졌지만 나름 즐거운 작업이었다.

(핸드폰 카메라가 좋지 않아서 사진이 영 불량하지만...)



집 앞에 울타리를 탱자 나무로 하고 싶어서 한 뼘 남짓한 것을 옮겨심었는데,
3년만에 이렇게 자라주었다.

'시골살이 > 초보농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밭 갈기_일년 농사의 시작!  (4) 2010.04.30
2008년 곶감 작업  (0) 2008.10.31
밭갈기 한 판, 경운기와 관리기로...  (1) 2008.06.15
농사철이 시작되다.  (2) 2008.04.15
욕심이 과하다!  (0) 2007.07.20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어린이들에게 설교할 때,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될 때 우리들이 살아가는 곳들이 사랑과 평화가 넘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작은 예수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몸으로 보여주는 삶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셨던 가치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깨우친 사람들에게,
교회가 성도들에게 바라던 그런 삶을 살아낸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불경한 것으로 여기고 비판한다.
어떻게 그 사람에게 감히 예수라고 할 수 있느냐고 분개하기까지 한다.
아마 그들은 스스로의 논리적 모순에 빠진 것이다.
자신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에 대한 질투심이 엿보이기도 한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삶을 살았다.
우리 나라의 예만 들어도 최용신, 주기철, 손양원 등의 선각자들을 예수라 하는데 이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류영모, 김교신, 함석헌, 권정생과 같은 이들도 역시 그렇다.
더 나아간다면 암울한 시기에 자신을 태워 세상을 깨우려고 했던 전태일,
또 최근에 노무현 대통령까지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최소한 예수님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정확히 한다면 그들을 그리스도라 칭할 수는 없겠지만 (작은) 예수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 자신을 가장 밑바닦으로 집어 넣으며
기꺼이 자신을 태우며 부르짖을 수 있는 삶,
너무도 이기적인 삶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다른 존재를 깨닫게 하는 삶,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 길을 하나님께 기대어 가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누가 그를 예수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 예수라고 칭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슬픔이 더 눈 앞을 가린다.
좀 더 자신을 위해 사시지, 좀 더 이기적이 되셨으면 좋았을 것을.
어쩌면 이 말은 베드로의 말과 닮아 있다.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라고 부르짖던.
그러나 그들에게 그 길은 운명이 아닌 선택으로 주어졌다.
그리고 그들을 그 길을 선택하고 살아갔다.
그래서 결국 운명은 그들을 예수라 하는 것이다.

남아 있는 자들은 자신의 비겁했음을 가슴을 치며 후회하거나
그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것을 시샘하며 불평을 늘어 놓는다.
기득권자들은 예수가 많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때문에 자신들의 삶의 내용들이 들춰지기 때문이다.

'깨어살리 > 돌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예들의 착각  (0) 2009.09.09
2050년 어느 날의 일기  (1) 2009.09.09
힘을 쓰는 사람은 힘이 없는 사람이다.  (0) 2009.06.05
좋아하는 데 이유는 없다.  (2) 2009.05.26
모두를 '나'로 여기는 마음!  (0) 2009.05.14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이스라엘
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삼하 1:19)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면 부른 조가의 시작부분이다.
아홉 절에 걸쳐서 다윗은 진심으로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요나단은 그렇다 쳐도 사울의 죽음을 그리 슬퍼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지기도 했고, 군대를 이끌고 좇아 다녔던 사람이다.
그 사울이 죽었다는 것은 더이상 목숨을 노리는 자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다윗이 이미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으므로 왕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기에
기뻐해야 할 일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윗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진심으로 사울의 죽음을 애도한다.

어디 그 뿐이랴.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과 왕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그들에게 사신을 보내 감사한 마음을 표한다.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삼하 2:5-6)
만약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어디 이런 행동을 취할 수 있었을까?
당장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마음 한 켠에 저런 괘씸한 놈들이 있나 하며 칼을 갈고는
기회가 되면 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도 남을 상황이다.
그러나 다윗은 마치 자신의 부모에게 베푼 은혜에 대해 감사하듯이 그들을 높여 주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전혀 서두르지 않는' 다윗을 볼 수 있다.
왜 다윗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에 효율적이지 않았던 것일까?
왜 힘을 쓸 수 있을 때 한 방 날리지 않는 것일까?
자신이 원하는 빨리 이루기 위해 달려들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형편에 이었을 텐데 말이다.

그는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기회를 두 번이나 사용하지 않았다.
상황을 깨끗이 정리하고 스스로 자신의 때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때 그렇게 하지 않고 기다렸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열어 가시는 때를 기다렸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의 최선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원칙에 최대한 가까이 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모습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도리를 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도리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었고, 
그것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을 죽이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의 행하심을 앞질러 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도 근시안 적이다.
할 수만 있다면 단시간 힘을 써서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당연히 자신이 손해 보는 상황은 조금도 참지 못한다.
참고 기다리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어떤 형태로든 힘이 있으면 상대방을 누르고, 제압하려 한다.
그렇다면 생각해 봐야 한다.
다윗이 정말 힘이 없어서 그렇게 긴 시간을 지체했는지.

다윗은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 힘을 누군가를 이겨먹기 위해 사용하기보다
자신 안의 '나'를 이기기 위해 애썼던 것이다.
그래서 정말 힘 있는 사람이고, 힘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고 칭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밖으로 힘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사람은 정말 힘이 센 사람이 아니다.
힘이 셀수록 그 힘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말이다.

오늘, 예수님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윗 정도는 흉내라도 내 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눈앞에 손해가 때로 크게 보면 이익이 될 때도 있다'고 말하며 기꺼이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엔 자신의 몸까지 던지면서 진실을 말하려 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추모하는 이들에게 마당 하나 내 주지 않고,
불순세력 운운하며 알량한 힘을 쓰는 사람이 있다.
누가 다윗의 길을 걷는 사람일까?

'깨어살리 > 돌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50년 어느 날의 일기  (1) 2009.09.09
예수로 살아낸 사람들  (0) 2009.07.03
좋아하는 데 이유는 없다.  (2) 2009.05.26
모두를 '나'로 여기는 마음!  (0) 2009.05.14
성경은 답안지가 아니다.  (2) 2009.05.11
블로그 이미지

dolsori

,

좋아하는 데에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이런저런 이유를 붙이기 시작하면 그 것은 진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건 그냥 좋은 거다.

난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좋았다.
좋다는 데 무슨 이유가 있을까?
물론 그의 모든 면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이라크 파병을 하지 말라고 시위도 해봤고,
반대로 그를 탄핵한 사람들을 향한 촛불시위에도 참여했었다.
또 한미FTA를 진행할 때는 그를 욕하기도 했다.

그가 봉하마을로 내려갔을 때 꼭 가서 얼굴 한 번 보고 싶었다.
한 번은 그가 밥 먹고 갔다는 식당에서 밥 먹고 뿌듯해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흑백사진을 내 블로그의 이미지에 넣게 될 줄이야.

   검찰이 적당히 했더라면,
   퇴임 후 조금만 인기가 없으셨더라도,
   돈을 받으시지 않으셨다면(누가 받았던),
   검찰과 사이가 좋으셨다면,
   대통령이 되지 않으셨더라면...
 
역사에 만약은 없는 것이겠지만
하도 답답해 만약을 되뇌어 본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그의 말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로 넘기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며칠째 한숨지으며 안절부절 못하고 서성이고 있다.

'깨어살리 > 돌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로 살아낸 사람들  (0) 2009.07.03
힘을 쓰는 사람은 힘이 없는 사람이다.  (0) 2009.06.05
모두를 '나'로 여기는 마음!  (0) 2009.05.14
성경은 답안지가 아니다.  (2) 2009.05.11
바보만들기  (0) 2009.04.09
블로그 이미지

dolso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