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와 한국 사회(1)_소수자 문제의 쟁점들

소수자란?

소수자 - 신체적 문화적 특징때문에 사회의 다른 성원에게 차별을 받으며,차별받는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 -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
소수자와 약자는 변경가능성의 여부로 구분될 수 있다.
소수자성은 본인의 생각 여부와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다.
다수자는 사회적 요인으로 약자가 될 수 있고, 소수자는 사회적 힘을 획득해서 강자가 될 수 있다.


소수자 문제

소수자가 사회적 부(자본주의 사회에서)를 획득하여 강자가 되었을 때는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그들이 약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문제가 되는 것 같다.
결국 소수자라는 연대의식이 강화되고 그 힘을 다수자들 아니 강자들을 향해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 약자라는 것 때문에 야기된 문제이지만 사회는 그들의 소수자성을 더 부각시키게 마련이다.
왜냐면 그것이 그 사회가 가진 그늘이라고 보기 보다는 그 소수자들의 특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몰아 붙이는 것이다.
만약 소수자들이 부와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을 때는 폭동 같은 부정적 방법이 아닌
로비같은 정치적 방법과 여론을 활용할 것이다.
결국 이런 채널들을 획득하지 못한 소수자들이 최악의 상황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소주자, 특히 인종적 소수자의 경우
한 나라에 정착을 할 때 국가가 그 나라의 일원이 되게 하기 위해 여러 절차들을 두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그들이 그 나라에 속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해 변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낙인이 문제이다.
그들을 자신의 국민으로 만들겠다는 어떤 절차가 아니라
그 나라에 들어오면 이미 그 나라가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나'가 확장된 '우리'와 다른 타자로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다.
피부 색이 다르든 사용하는 말이 다르든 문화가 다르든 같은 영역 안에 있을 때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민이 되고,
또 내가 다른 나라에 가면 또 그 나라의 국민이 되는 자연스러운 이동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이상적이긴 하지만 국적이라는 것 자체가 배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많은 잇따르는 어려움들이 있겠으나 국적이라는 국가주의를 해체하는 길밖에 없어 보인다.

소수자에게 부와 출세를 준다면!
일단 기득권 세력이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소수자가 출세하고 부를 획득하게 되면 또 소수자가 아닌 것으로 행세하게 되고
대다수의 소수자들이 처한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존재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
그의 어떠함(특히 유용함)을 가지고 분류하지 않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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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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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돌아오는 절기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 '뭐 이 시기에 그 본문에 그 말씀이겠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올 해도 변함없이 사순절이 시작되었고, 돌아오는 주일이 두 번째 주일이다.
지금 어린이부는 매일 성경읽기를 하고 있고, 주 중에 읽는 본문 중에서 주일 본문을 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주에 정해진 본문은 마태복음 20:29-34의 말씀이다.
그런데 2월 마지막 주 설교 본문과 내용상 겹치는 부분이 있다.
두 소경의 치유 사건이다.
다른 복음서는 고침 받은 소경은 한 명인데 마태는 꼭 두 명이다.
가다라(거라사)의 광인도 두 명이었다.
마태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썼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증인이 두 명이 되어야 한다는 율법에 좀 더 충실하려 했던 것 같다.
신 19:15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이 전통에 의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도 두 명씩 보내셨다고 다른 복음서(막6, 눅10)도 전하고 있다.
연관을 지어 본다면 두 명의 전통은 정탐꾼 열두 명에서 실패를 경험한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탐꾼을 두 명을 보내는 것에서부터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예수님께 눈을 뜨게 해 달라는 소경이 두 번 등장하는데
9장에서의 사건과 20장에서의 사건을 어떻게 다른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을까?
그 포인트는 예수님께 있는 것 같다.
소경들이야 9장이나 20장이나 고쳐 달라는 것에 목을 매는 입장이니 말이다.

장소적으로도 9장은 가버나움 인근이었고, 20장은 여리고였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계실 때이다.
이미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이라는 수난예고를 세 차례나 하신 다음이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음가짐의 그 비장함을 빼놓고 이 사건을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정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계실 때,
어쩌면 주변에 사람들은 많았지만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뿐이었으니 혼자 외롭고 쓸쓸하다 못해
참담한 심정까지 느끼셨을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향해 또 소경 둘이 소리를 지른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이놈의 인생들은 참 어디까지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
예수님께서 지금은 그럴 정신이 아니니 돌아가라고 하셔도 됐을 법한데
예수님은 너무도 친절하게 그들을 향해 서셨고,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질문을 하셨다.

특히 교회에서 교사로서 어린이들을 상대할 때,
교사를 하겠다는 것이 대단한 결단이고, 그러하기에 교회학교 부서에 있는 것 그 존재 자체로 귀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큰 선택을 한 것인데, 나에게 이거해라 저거 해라 할 수 있어? 그리고 이 어린놈들은 그것도 몰라주고 불평하고 귀찮게 하는 거야?'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가끔씩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들이 왜 나를 몰라주느냐는 식의 생각 말이다.
우리도 그러할 진데 우리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이 무지한 인간들이 죽음 앞에 고통당하는 나를 몰라주고 또 뭘 더 해 달라고 한단 말인가?'라고 불평을 하실 수도 있는 일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런 인간들을 그들의 말처럼 불쌍히 여기셨던 것 같다.
초지일관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온전케 해 주시고 싶은 마음을 잃지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가 사순절에 묵상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이 이 마음이 아닐까.
예수님께서 당신을 내어주면서도 우리들을 걱정하고 불쌍히 여기셨던 그 마음, 
그런 여정을 걸으시며 겪으신 고통스러운 심정을 느끼고,
그 길로의 초대에 대한 응답하는 삶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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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레위인
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3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으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인들이 제사장을 시종하는 역할을 합니다.
언뜻 보면 아론의 후손이 아닌 레위인들은 스스로를 작게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딱히 군사적인 역할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기업(땅)도 변변히 가질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레위인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를 안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앞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을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로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열번째 재앙이었던 처음난 것들(장자)의 죽음에서 목숨을 부지 하게 하셨기에
모든 처음 난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모든 집에서 장자를 내 놓도록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대신해서 레위인들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레위인들은 단지 한 지파, 때로는 소외된 사람들의 신분이 아닌
이스라엘 전체의 장자를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집에서 장자들이 소중하듯이 레위인들은 모든 백성들에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역시 한 지파로 이루어진 집단이 성막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닌
모든 지파로부터 온 소중한 자들이 그 역할을 감당한다는 뜻에서 더욱 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성들이 해야할 일을 대신해서 하는 것이니 백성들은 레위인들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 것입니다.
레위인들이 백성들 앞에 어른이 될 수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위인들의 신분을 절묘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 같습니다.
불평할 수 없고, 무시당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만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되었지만, 그 하나님의 손에 의해 제사장들에게 맡겨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로 자신의 역할을 맞추어 갈 때 최고의 사람들이 바로 레위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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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하기
2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자기의 진영에 군기와 자기의 조상의 가문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치라

뭐든 흐트러져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군가에 의해 정돈되고 질서를 잡을 때 의미를 갖게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약하지만 대열을 갖추게 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삽겹줄이 더 단단하다는 잠언의 말씀 역시 여기에 합당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대오를 갖추는 것입니다.

자리를 정하고, 순서를 정하고, 위계를 정합니다.
이런 과정은 상호간에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파별로 위치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성막이 있고, 레위인들의 거처가 있었습니다.
이동 할 때에도 성막을 중심으로 해서 앞 뒤로 배치됩니다.
이렇게 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제의 그들이 아닙니다. 
각각의 모습은 동일하지만 좀 더 시야를 넓게 해서 봤을 때는 그들의 위치가 정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와 관련된 정돈을 통해 하나님과 관련된 정신적 안전을 얻을 수 있었다면
군제를 개편함으로 해서 물리적 안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물리적 안전의 핵심 역시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든 그 중심이 무너질 때 몸의 안전 역시 담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런 과정으로 통해 아말렉 같은 도적들에게 기습을 당하는 일은 다시 발생하지 않게 됐습니다.

장소를 정하고, 시간을 정하고, 정해진 순서를 따른다는 것이 때로 갑갑하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개성 없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 것에 대한 반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따르는 이들이 모인다는 것, 그리고 한 분 하나님을 중심으로한 삶을 생각하며
정해진 순서를 따를 때, 그것은 큰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적 삶이 훈련된 사람이 또한 개인적인 영성을 지켜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과 살아가는 법을 아는 사람이 또한 하나님과 사는 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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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끄시는 40년은 레위기에서 끝나지 않고 민수기로 이어진다.
실은 레위기까 끝나면서 그들의 광야 생활은 겨우 1년을 조금 넘긴 것 뿐이다.
그러니 앞으로 39년이 남았다고 보면 된다.
레위기에서만 멈춘다면 '하나님이 이끄는 1년'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최소한 민수기를 지나야 40년의 대부분을 거치는 거다.
다시 시작~

책임 나누기
민 1: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이끄셔서 광야로 나왔고, 틀림없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일들만으로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실은 변함이 없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날이 언제이냐의 문제만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막이 완성된 시점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을 계수하게 하십니다.

왜 백성들의 숫자를 세도록 하신 것일까요?
그냥 백성들의 숫자가 궁금하셨을까요?
혹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신들을 방어하도록 하려 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백성들의 수로 힘을 과시하도록 하려 하신 것일까요?
뭐 그럴 수도 있겠으나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광야 가운데서 백성들을 계수하게 하신 것은 
각 지파, 또 전체 이스라엘의 그 수에 걸맞는 책임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함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책임의 크기만큼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인구 계수와 다른 점입니다.
다윗은 인구 계수를 통해 이스라엘의 힘의 크기를 알고 싶었고, 또 그 세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도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레위지파와 또 그에 속한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직임들을 맡아 갈 때
다른 지파의 백성들은 소외된 듯한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의 적당한 위치를 주시기위한 기초작업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시고 있고, 레위인들이 할 일을 받았듯
이제 이스라엘의 백성들 각자도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한 책임을 나누기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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